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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폰 힌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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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동부 전선에서 활약하며 '탄넨베르크의 영웅'으로 불린 독일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32년 재선에 성공했으나, 1933년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여 나치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 힌덴부르크는 1934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히틀러는 대통령직을 폐지하고 총통 자리에 올라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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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폰 힌덴부르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초상화, 1925년
이름파울 폰 힌덴부르크
로마자 표기Paul Ludwig Hans Anton von Beneckendorff und von Hindenburg
출생일1847년 10월 2일
출생지포젠, 프로이센 왕국
사망일1934년 8월 2일
사망지노이데크, 나치 독일
안장 장소마르부르크 성 엘리자베스 교회
배우자게르트루트 폰 슈페를링(1879년 결혼, 1921년 사망)
자녀3명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포함)
친척에리히 폰 만슈타인(조카)
서명
직위
직책독일 대통령(1925년 5월 12일 ~ 1934년 8월 2일)
전임 대통령프리드리히 에베르트
후임 대통령아돌프 히틀러(총통), 칼 되니츠(대통령)
총리한스 루터
빌헬름 마르크스
헤르만 뮐러 (1876년생 정치인)
하인리히 브뤼닝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아돌프 히틀러
육군 참모총장(1916년 8월 29일 ~ 1919년 7월 3일)
참모차장에리히 루덴도르프(제1 병참 총감)
전임 참모총장에리히 폰 팔켄하인
후임 참모총장빌헬름 그뢰너
군 경력
소속프로이센 왕국군
독일 제국군
복무 기간1866년~1911년, 1914년~1918년
최종 계급육군 원수
주요 참전 전투
참전 전투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쾨니히그레츠 전투
보불 전쟁
그라블로트 전투
제1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
러시아의 동프로이센 침공 (1914)
탄넨베르크 전투
제1차 마주리 호수 전투
아우구스토프 전투 (1914)
비슬라 강 전투
우치 전투 (1914)
네 개의 강 전투
마주리 호수 겨울 전투
제1차 프라 스니츠 전투
후민-볼리모프 전투
롬자 전투
독일 여름 공세 (1915)
오소비에츠 전투
부크-나레프 공세
노보게오르기예프스크 포위전
리가-샤울렌 공세
빌노-드빈스크 공세
나로치 호수
베르됭 전투
바라노비치 공세
브루실로프 공세
제2차 브루실로프 공세
독일 봄 공세
훈장
주요 훈장대철십자성장
푸르 르 메리트 훈장 (참나무 잎 장식 포함)

2. 생애

힌덴부르크는 1934년 8월 2일, 86세의 나이로 동프로이센(East Prussia) 노이덱(Neudeck) 자택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90] 전날, 히틀러는 힌덴부르크가 임종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내각에 "독일국가원수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힌덴부르크 사망 시 대통령직이 폐지되고 그 권한이 총통의 직책인 "총통 및 국민총통(Führer und Reichskanzler)" 아래 총리의 권한과 통합된다는 내용이었다.[90]

힌덴부르크 사망 3시간 후, 히틀러가 독일의 국가원수이자 정부 수반이 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로써 히틀러를 합법적으로 해임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 사라지고 그의 독재자 지위가 확고해졌다.[88] 공개적으로 히틀러는 대통령직이 힌덴부르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직함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발표했다.[88]

사실 히틀러는 1934년 4월 이미 힌덴부르크가 그해를 넘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힌덴부르크 사후 국가원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는데, 힌덴부르크가 사망하면 그를 제거할 만큼 강력한 세력은 독일군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4월 11일, 도이칠란트(Deutschland)호에서 블롬베르크, 육군 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해군 사령관 에리히 레더와의 회의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힌덴부르크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군의 지지를 대가로 그는 돌격대(SA)를 진압하고, 자신의 통치 아래 군이 독일 유일의 무장 세력이 될 것을 약속했다. 레더는 즉시 동의했지만, 프리치는 5월 16일까지 지지를 보류했고, 이때 고위 장성들이 만장일치로 히틀러를 힌덴부르크의 후계자로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전간기 독일 외교관이자 힌덴부르크의 측근으로 나중에 영국으로 망명한 귄터 폰 치르슈키 운트 뵈겐도르프에 따르면,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유언장에는 나치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망명자는 그 유언장에 권력 분립이 명확한 입헌군주제 수립과 모든 형태의 인종 및 종교 차별 폐지를 주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문서가 힌덴부르크의 나치 지지 아들에 의해 히틀러에게 전달되었다고 주장했다. 사망 며칠 후, 나치는 히틀러를 칭찬하는 힌덴부르크의 최종 "정치 유언"을 자체적으로 발표했다.[91]

히틀러는 1934년 8월 19일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독일 국민에게 히틀러가 총통직을 맡는 것을 승인하는지 묻는 것이었다. 찬성(Ja) 투표는 90%에 달했다. 이 국민투표와 히틀러를 힌덴부르크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모든 노력은 권한 위임 법(Enabling Act)을 위반했다. 권한 위임 법은 히틀러에게 헌법에 반하는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부여했지만, 대통령의 권한은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이는 오랫동안 대통령직을 침해하려는 시도를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헌법은 또한 1932년에 개정되어 총리가 아니라 대법원장이 대통령직 계승 순위에서 먼저 자리하게 되었고, 그때도 새 선거가 있을 때까지 임시적인 것이었다.

힌덴부르크의 유언과는 달리, 그는 탄넨베르크 기념관에서 그의 아내와 함께 장엄한 의식을 거쳐 매장되었다. 1944년 소련군이 접근하자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중장(Generalleutnant)은 그의 부모의 유해를 서독으로 옮겼다. 1945년 1월 독일군은 기념관을 폭파했다. 1949년 폴란드 당국은 그 현장을 파괴하여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프리드리히 대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유해,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독일 제국군의 군기, 외무부의 서류, 프로이센 주립 박물관의 미술품, 산수시의 도서관, 그리고 프로이센 왕관 보석과 함께 투링겐에 임시 매장되었다. 1945년 4월 미국 육군의 기념물, 미술품 및 기록 보관소 부서가 유해를 발굴하여 마르부르크로 옮겨 성 엘리자베트 교회에 안치했고, 현재까지 그곳에 남아 있다. 그의 묘비에는 힌덴부르크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비문만 새겨져 있다.[92]

힌덴부르크의 묘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프로이센 왕국 포즈난에서 몰락한 융커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 로베르트 폰 베네켄도르프 운트 폰 힌덴부르크(Robert von Beneckendorff und von Hindenburg)는 프로이센 제18보병연대 소위였고, 어머니 루이제(Luise, 옛 성씨 슈비카르트(Schwickart))는 군의관의 딸이었다.[115][116] 힌덴부르크 가문은 13세기부터 이어진 군인 가문이었다.[119] 그의 가족은 모두 1817년 이후 칼뱅파와 루터파 신자를 모두 포함한 프로이센 교회 연합 소속 루터교 프로테스탄트였다.

힌덴부르크가 태어난 집


포즈난 포드구르나 거리에 있는 힌덴부르크의 집


힌덴부르크는 유년 시절부터 엄격한 군대 생활과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에서 프로테스탄트 계열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859년 바르슈타트의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863년 베를린 그로스리히터펠데의 프로이센 고급 사관학교로 옮겼다.[123] 1865년에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왕비 엘리자베트 루트비히 폰 바이에른의 시종을 맡았으며, 이때 받은 회중시계를 소중히 간직했다.[124][123]

바일슈타트에서 사관학교 생도 시절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1860)


1870년 제3근위연대 소위 시절의 힌덴부르크


1866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근위 보병 제3연대의 소위로 임관했다. 같은 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쾨니히그라츠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공로로 붉은 독수리 훈장을 받았다.[115][122] 당시 그는 헬멧을 관통하고 두개골 윗부분을 스친 총알에 의해 잠시 의식을 잃었으나, 정신을 차린 후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전투를 계속 지휘하여 훈장을 받았다.[3]

1870년부터 1871년까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하여 세당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15]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열린 빌헬름 1세의 독일 황제 즉위식에 소속 근위 연대 대표로 참가했다.[122]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40년간 평시 군 복무를 했다.[122] 1873년 프로이센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여 카를 폰 뷰로, 헬만 폰 아이히호른 등과 동기가 되어 군부, 정계, 궁정 등에 인맥을 쌓았다.[126] 1877년 졸업 후 1878년 대위로 진급하여 참모본부에 배속되었다.[127] 1879년 게르트루트 폰 힌덴부르크(Gertrud von Hindenburg)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128]

1897년 소장 시절의 힌덴부르크


1885년 소령으로 진급하여 참모본부에서 강의를 맡았고, 육군대학교에서 전술 수업을 담당했다.[130] 1889년 육군성 군무국장에 취임했으며,[131] 1891년 중령,[132] 1894년 대령으로 진급했다.[132] 1897년 소장,[132] 1900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28보병사단 사령관이 되었다.[132] 1904년 제4군단장에 취임했다.[134]

1905년 보병 대장으로 진급하고,[132][135] 같은 해 알프레트 폰 슐리펜의 후임 참모총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헬무트 폰 몰트케가 후임으로 선택되었다. 1908년 훈련에서 빌헬름 2세의 군대를 패배로 이끈 것이 황제의 미움을 산 원인으로 추정된다.[134] 1911년 검은 독수리 훈장을 받고 은퇴했으나,[137] 1912년 빌헬름 2세에게 전시에 군 사령관이 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이후 하노버에서 은퇴 생활을 하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의 군 경력을 돕는 데 힘썼다.[134]

2. 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에 복귀한 힌덴부르크는 제8군 사령관으로 동프로이센에 부임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 참모장과 함께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두고[132] 상급 대장으로 진급, 11월에는 육군 원수가 되었다.[132] 이 승리로 힌덴부르크는 '타넨베르크의 영웅'이라는 명성을 얻었다.[157]

힌덴부르크 장군과 에리히 루덴도르프 (1917년)


제8군 참모장 루덴도르프(오른쪽)와 군의를 하는 제8군 사령관 힌덴부르크를 묘사한 그림(후고 포겔 작, 1928년)


탄넨베르크 전투 후 건립된 힌덴부르크의 거대한 나무 조각상


1915년에 그려진 힌덴부르크 원수의 초상화


1915년 3월 동부방면군 사령관 힌덴부르크 원수. 코브노의 동부방면군 사령부.


1914년 7월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제1군과 제2군은 동프로이센을 침공했고, 독일 제8군은 이에 맞섰다.[138] 굼비넨 전투에서 전황이 교착되자,[138] 프리트비츠 사령관은 후퇴를 명령했고, 몰트케 참모총장은 그를 해임했다.[139][140][141][142][143] 몰트케는 에리히 루덴도르프 소장을 파견하고, 힌덴부르크를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140][144] 힌덴부르크는 루덴도르프와 함께 8월 23일 제8군 사령부에 도착,[146][148][149] 반격 작전을 지휘했다.

독일 제8군은 러시아 제2군을 탄넨베르크 부근에서 포위 공격했다.[139] 8월 26일, 헬만 폰 프랑소와 대장의 제1군단과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대장의 제17군단이 러시아 제2군의 후방으로 돌입했다.[150] 힌덴부르크는 루덴도르프의 철수 제안에도 불구, 공격을 지속하라는 판단을 내렸고,[151][152] 8월 29일 러시아 제2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 삼소노프 사령관은 자결했다.[153]

이후 독일군은 러시아 제1군을 공격, 동프로이센에서 몰아냈다.[155][150] 이 탄넨베르크 전투의 승리로 힌덴부르크는 독일 전역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실제 작전 기획은 루덴도르프와 막스 호프만 중령이 담당했고, 힌덴부르크의 역할은 상징적인 것이었다.[156]

1914년 11월, 힌덴부르크는 동부방면군 사령관, 루덴도르프는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러시아군에 맞서 싸웠으나, 서부 전선을 중시하는 파르켄하인 참모총장과 대립했다.[164]

1915년, 동부방면군은 러시아군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으나, 팔켄하인은 동부방면군의 병력을 다른 전선으로 이동시키려 했고, 힌덴부르크는 이에 반대했다.[175] 1916년, 러시아군은 브루실로프 공세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하고 독일 동부방면군을 압박했으나, 독일군은 전선을 유지했다.[176]

1916년 8월 28일 힌덴부르크는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ffs des Feldheeres)에 취임하고, 루덴도르프는 참모차장(그는 이 직책의 명칭을 「제1병참총감」(Erster Oberquartiermeister)으로 변경하는 것을 제안하여 허가받았다)에 임명되었다.[177][178] 이 인사는 몰트케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178] 이전과 마찬가지로 힌덴부르크는 명목상의 인물이었고 루덴도르프가 실질적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독일의 전쟁은 실질적으로 루덴도르프에 의해 지휘되었고, 그는 정치에도 간섭하여 「루덴도르프 독재」라고 불리는 시대를 열었다.[179][180]

그러나 각 전선 모두 이미 방어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지금까지의 동부전선 대공세론을 철회하고 서부전선에 힘을 쏟았다. 연합군의 공세에 선제적으로 전선을 후퇴시키고, 강력한 참호진지대 「지크프리트선(:de:Siegfriedstellung)」(연합국은 「힌덴부르크선」이라고 불렀다)을 구축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1917년 1월 8일, 플레스 성 대본영에서 작전 계획을 논의 중인 참모총장 힌덴부르크, 황제 빌헬름 2세, 참모차장 루덴도르프


1917년 4월 영국군은 아라스 전투(de)에서 공세를 강화하고, 5월부터 6월의 메신 전투(de)에서 독일군 돌출부를 공략했다. 또한 7월 말부터 11월에 걸쳐 파솅달 전투, 11월부터 12월에 걸쳐 전차군단을 동원한 캉브레 전투에서 공세를 펼쳤지만, 독일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여 영국군의 침공을 막았다.

한편 프랑스군은 1917년 4월 에느 전투(de)에서 공세를 펼쳤지만, 독일군이 승리했다. 프랑스에서 전쟁 혐오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4월 29일 68개 사단에서 반란이 발발했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간신히 진압하고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했다.[181]

해전에서는 1917년 2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결정했다. 이것은 영국을 몰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지만,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초래했다.[182] 그러나 당시 미국에는 본격적인 육군이 없어 육군 조직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태였으므로 미국의 실질적인 참전은 1년 후였다.[183]

한편,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된 러시아에 대해서는 평화 협상을 벌였다. 러시아 임시정부 총리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연합국의 요구에 따라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했지만, 케렌스키 정부는 1917년 10월 볼셰비키의 러시아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가 수립되었다. 독일은 레닌 정부에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의 분리 독립을 요구했다. 레닌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러시아의 군사력은 혁명의 혼란으로 붕괴 상태였고, 1918년 2월 독일군이 러시아군에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어 독일은 러시아를 제압했다. 3월 5일에는 러시아의 지원을 잃은 루마니아도 항복했다. 동부 전선은 종결되었다.[183]

러시아 탈락을 계기로 독일군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서부 전선에 마지막 공세를 가하기로 했다. 독일군은 1918년 3월부터 7월에 걸쳐 동부의 병력을 모두 서쪽으로 이동시켜 마지막 대공세 「카이저슐라흐트」(황제의 전투) 작전을 실시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분투도 헛되어 전황을 호전시키지는 못했다.[184][185] 또한 1918년 8월 8일 아미앵 전투(de)에서 독일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루덴도르프는 이 날을 「독일군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186][187][188]

명목상의 참모총장이었던 힌덴부르크는 바트 크로이츠나흐와 벨기에 스파의 대본영에 머물면서 군사 보고를 받지 못했다(그 모든 것은 루덴도르프가 받았다). 미신적으로 그를 숭배하는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외부 정보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힌덴부르크는 독일의 전황을 자세히 알지 못했고 여전히 전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189] 반면 실권을 쥐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전황을 절망적으로 판단하고 연합국과의 조기 강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대전 말기에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의견 대립이 많아졌다.[190]

그러나 곧 힌덴부르크도 전황이 절망적임을 이해하게 되었고,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9월 29일 제국 재상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에게 통첩을 보내, 독일이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14개조 평화 원칙」을 수락하고 미국과 휴전 협정을 맺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정부를 개조하여 의회 정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191][192] 의회 정치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 헤르틀링은 그날 바로 사임했다.[193][194] 10월 2일에는 힌덴부르크가 아직 전쟁 계속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빌헬름 2세 황제를 설득하여 의회 제도 민주주의 도입을 인정하게 했다.[187]

10월 3일, 연합국으로부터 자유주의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의회에서도 지지를 얻고 있던 막시밀리안 폰 바덴이 재상에 취임했다. 재상 막시밀리안은 즉시 미 대통령 윌슨과 전보를 주고받으며 휴전 협상에 응해 줄 것을 간청했다. 10월 12일에는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 수용도 표명했다.[195]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독일 군부나 왕조적 전제 군주는 강화 협상의 상대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전쟁을 지휘해 온 자들의 퇴진과 독일의 민주화를 추진하라”는 요구를 받았다.[196][197] 재상과 의회는 전쟁 지도자로서 우선 루덴도르프의 해임을 요구했다.[198] 10월 26일 빌헬름 2세는 루덴도르프에게 참모차장직을 사퇴시켰다. 힌덴부르크도 사표를 제출했지만, 그는 유임되었다.[199][200][201] 빌헬름 2세와 힌덴부르크는 후임 참모차장으로 빌헬름 그뢰너를 임명했다.[202]

11월 4일 킬 군항의 수병 반란을 시작으로 독일 혁명이 일어났다. 이로써 독일의 주요 도시는 모두 「노병평의회」에 의해 사실상 지배되었다. 황제 퇴위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급속히 커졌다. 그리고 11월 9일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요구에 따라 재상 막시밀리안이 독단으로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위와 프로이센 왕위를 했다”고 선언했다.[203][204] 당시 스파 대본영에 있던 빌헬름 2세는 격분하여 프로이센 왕위 퇴위와 스파 대본영에서의 퇴거를 거부했다. 힌덴부르크와 그뢰너는 빌헬름 2세를 네덜란드로 망명시키기로 결정했다. 힌덴부르크는 빌헬름 2세에게 “저는 폐하께서 베를린 혁명 정부에 체포되는 것을 보는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네덜란드로 피신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진언했다. 결국 빌헬름 2세는 11월 10일 새벽 특별 열차로 스파를 떠나 네덜란드로 망명했다.[205] 후년 빌헬름 2세는 망명지 네덜란드 도른에서 “자신의 퇴위에 대해서는 막시밀리안과 힌덴부르크에게 연대 책임이 있지만, 망명에 대한 책임은 완전히 힌덴부르크에게 있다”고 회고했다. 한편 힌덴부르크는 후년 “1918년 11월 9일의 일은 그뢰너가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206] 또한 힌덴부르크는 총리 하인리히 브뤼닝에게 당시를 돌이켜보며 “나는 카이저(독일 황제)를 위해 잘 되도록 꾀한 것이다. 일단 폐지된 황위가 다시 국민에 의해 부활된 예도 있다. 카이저가 네덜란드로 망명할 때 내가 생각한 것은 그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퇴위와 망명은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때는 전선이 붕괴되어 있었고 군대는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프로이센 군인으로서 카이저의 안전을 지키는 것 외에 취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07]

11월 10일 그뢰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총리(막시밀리안의 후임.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와 연락을 취하여 앞으로 군은 공화제를 지지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동시에 「노병평의회」를 억제하여 국가의 합법적인 발전을 지켜 줄 것을 요청했다. 에베르트는 이를 수락했다. 이에 따라 힌덴부르크는 「노병평의회」의 결정에 군은 구속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포고를 발표했다.[208] 11월 11일 독일 공화국 휴전 위원회 위원장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와 연합군 최고 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원수 사이에 파리 북쪽 콩피에뉴 숲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209][210] 이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1918년 11월 15일, 대본영은 슈파에서 카셀 교외의 빌헬름스호에로 이동하여 서부 전선 병력의 철수를 지휘했다.[211][212] 새해까지 철수를 완료했다.[213] 1919년 2월, 대본영은 포메라니아의 콜베르크로 이동하여 독일 동부 방어를 지휘했다. 또한 이곳에서 발트 지방의 독일 자원군의 반혁명 군사 작전을 지원하려 했지만, 이는 연합군 총사령관 폴슈 원수에 의해 금지되었다.[213]

1919년 5월, 독일은 연합국으로부터 베르사유 조약을 제시받았다. 너무나 가혹한 내용에 독일 전역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다시 전쟁을 시작할 여력이 없는 이상, 독일 정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힌덴부르크는 평화 조약 체결 여부에 대해 정부로부터 자문을 받았는데, 이렇게 답했다. “전쟁을 재개할 경우, 포젠 지역을 획득하고 동부 국경을 방어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서부에서는 우세한 연합군이 우리 양익을 포위할 힘을 생각하면 그 공격에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전반적인 성공은 매우 의문스럽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나는 불명예스러운 평화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결사항전을 희망한다.”[214]

결국, 정권을 맡은 독일 사회민주당과 중앙당만이 찬성하여 6월 23일 베르사유 조약 무조건 체결 승인이 국회에서 결의되었다(사민당과 중앙당만으로 과반수를 넘었다). 이에 따라 6월 28일 헤르만 뮐러 외무장관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연합국 31개국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힌덴부르크는 이 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19년 6월 25일에 예편했다.[215]

힌덴부르크는 많은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독일 혁명이라는 “배후의 칼침”에 의해 패배자로 취급되게 된 것이라고 믿었고, 1919년 11월 18일 국회 조사 위원회에서도 그것을 주장했다.[216]

하노버에서 은퇴 생활을 보내는 한편 독일 전역을 여행했지만, 특히 동프로이센에서는 러시아군으로부터 해방시킨 구원자로 환영받았다. 1921년, 슬하에 1남 2녀를 둔 그의 아내가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2. 1. 동부 전선의 영웅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에 복귀한 힌덴부르크는 제8군 사령관으로 동프로이센에 부임했다. 에리히 루덴도르프 참모장과 함께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두고[132] 상급 대장으로 진급, 11월에는 육군 원수가 되었다.[132] 이 승리로 힌덴부르크는 '타넨베르크의 영웅'이라는 명성을 얻었다.[157]

1914년 7월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제1군과 제2군은 동프로이센을 침공했고, 독일 제8군은 이에 맞섰다.[138] 굼비넨 전투에서 전황이 교착되자,[138] 프리트비츠 사령관은 후퇴를 명령했고, 몰트케 참모총장은 그를 해임했다.[139][140][141][142][143] 몰트케는 에리히 루덴도르프 소장을 파견하고, 힌덴부르크를 제8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140][144] 힌덴부르크는 루덴도르프와 함께 8월 23일 제8군 사령부에 도착,[146][148][149] 반격 작전을 지휘했다.

독일 제8군은 러시아 제2군을 탄넨베르크 부근에서 포위 공격했다.[139] 8월 26일, 헬만 폰 프랑소와 대장의 제1군단과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대장의 제17군단이 러시아 제2군의 후방으로 돌입했다.[150] 힌덴부르크는 루덴도르프의 철수 제안에도 불구, 공격을 지속하라는 판단을 내렸고,[151][152] 8월 29일 러시아 제2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 삼소노프 사령관은 자결했다.[153]

이후 독일군은 러시아 제1군을 공격, 동프로이센에서 몰아냈다.[155][150] 이 탄넨베르크 전투의 승리로 힌덴부르크는 독일 전역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실제 작전 기획은 루덴도르프와 막스 호프만 중령이 담당했고, 힌덴부르크의 역할은 상징적인 것이었다.[156]

1914년 11월, 힌덴부르크는 동부방면군 사령관, 루덴도르프는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러시아군에 맞서 싸웠으나, 서부 전선을 중시하는 파르켄하인 참모총장과 대립했다.[164]

1915년, 동부방면군은 러시아군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으나, 팔켄하인은 동부방면군의 병력을 다른 전선으로 이동시키려 했고, 힌덴부르크는 이에 반대했다.[175] 1916년, 러시아군은 브루실로프 공세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하고 독일 동부방면군을 압박했으나, 독일군은 전선을 유지했다.[176]

2. 2. 2. 참모총장 취임과 독일의 패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동시에 현역에 복귀하여 제8군 사령관으로서 동프로이센에 부임했다. 제8군의 참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함께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 전공으로 상급 대장으로 진급하고 11월에는 육군 원수가 되었다. 이 승리는 '타넨베르크의 영웅'이라는 거대한 명성을 가져다주었다.[177] 1916년 8월 28일 힌덴부르크는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ffs des Feldheeres)에 취임하고, 루덴도르프는 참모차장(그는 이 직책의 명칭을 「제1병참총감」(Erster Oberquartiermeister)으로 변경하는 것을 제안하여 허가받았다)에 임명되었다.[177][178] 이 인사는 몰트케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178] 이전과 마찬가지로 힌덴부르크는 명목상의 인물이었고 루덴도르프가 실질적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독일의 전쟁은 실질적으로 루덴도르프에 의해 지휘되었고, 그는 정치에도 간섭하여 「루덴도르프 독재」라고 불리는 시대를 열었다.[179][180]

그러나 각 전선 모두 이미 방어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지금까지의 동부전선 대공세론을 철회하고 서부전선에 힘을 쏟았다. 연합군의 공세에 선제적으로 전선을 후퇴시키고, 강력한 참호진지대 「지크프리트선(:de:Siegfriedstellung)」(연합국은 「힌덴부르크선」이라고 불렀다)을 구축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1917년 4월 영국군은 아라스 전투(de)에서 공세를 강화하고, 5월부터 6월의 메신 전투(de)에서 독일군 돌출부를 공략했다. 또한 7월 말부터 11월에 걸쳐 파솅달 전투, 11월부터 12월에 걸쳐 전차군단을 동원한 캉브레 전투에서 공세를 펼쳤지만, 독일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여 영국군의 침공을 막았다.

한편 프랑스군은 1917년 4월 에느 전투(de)에서 공세를 펼쳤지만, 독일군이 승리했다. 프랑스에서 전쟁 혐오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4월 29일 68개 사단에서 반란이 발발했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간신히 진압하고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했다.[181]

해전에서는 1917년 2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결정했다. 이것은 영국을 몰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지만,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초래했다.[182] 그러나 당시 미국에는 본격적인 육군이 없어 육군 조직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태였으므로 미국의 실질적인 참전은 1년 후였다.[183]

한편,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된 러시아에 대해서는 평화 협상을 벌였다. 러시아 임시정부 총리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연합국의 요구에 따라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했지만, 케렌스키 정부는 1917년 10월 볼셰비키의 러시아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가 수립되었다. 독일은 레닌 정부에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의 분리 독립을 요구했다. 레닌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러시아의 군사력은 혁명의 혼란으로 붕괴 상태였고, 1918년 2월 독일군이 러시아군에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어 독일은 러시아를 제압했다. 3월 5일에는 러시아의 지원을 잃은 루마니아도 항복했다. 동부 전선은 종결되었다.[183]

러시아 탈락을 계기로 독일군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서부 전선에 마지막 공세를 가하기로 했다. 독일군은 1918년 3월부터 7월에 걸쳐 동부의 병력을 모두 서쪽으로 이동시켜 마지막 대공세 「카이저슐라흐트」(황제의 전투) 작전을 실시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분투도 헛되어 전황을 호전시키지는 못했다.[184][185] 또한 1918년 8월 8일 아미앵 전투(de)에서 독일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루덴도르프는 이 날을 「독일군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186][187][188]

명목상의 참모총장이었던 힌덴부르크는 바트 크로이츠나흐와 벨기에 스파의 대본영에 머물면서 군사 보고를 받지 못했다(그 모든 것은 루덴도르프가 받았다). 미신적으로 그를 숭배하는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외부 정보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힌덴부르크는 독일의 전황을 자세히 알지 못했고 여전히 전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189] 반면 실권을 쥐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전황을 절망적으로 판단하고 연합국과의 조기 강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대전 말기에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의견 대립이 많아졌다.[190]

그러나 곧 힌덴부르크도 전황이 절망적임을 이해하게 되었고,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9월 29일 제국 재상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에게 통첩을 보내, 독일이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14개조 평화 원칙」을 수락하고 미국과 휴전 협정을 맺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정부를 개조하여 의회 정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191][192] 의회 정치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 헤르틀링은 그날 바로 사임했다.[193][194] 10월 2일에는 힌덴부르크가 아직 전쟁 계속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빌헬름 2세 황제를 설득하여 의회 제도 민주주의 도입을 인정하게 했다.[187]

10월 3일, 연합국으로부터 자유주의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의회에서도 지지를 얻고 있던 막시밀리안 폰 바덴이 재상에 취임했다. 재상 막시밀리안은 즉시 미 대통령 윌슨과 전보를 주고받으며 휴전 협상에 응해 줄 것을 간청했다. 10월 12일에는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 수용도 표명했다.[195]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독일 군부나 왕조적 전제 군주는 강화 협상의 상대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전쟁을 지휘해 온 자들의 퇴진과 독일의 민주화를 추진하라”는 요구를 받았다.[196][197] 재상과 의회는 전쟁 지도자로서 우선 루덴도르프의 해임을 요구했다.[198] 10월 26일 빌헬름 2세는 루덴도르프에게 참모차장직을 사퇴시켰다. 힌덴부르크도 사표를 제출했지만, 그는 유임되었다.[199][200][201] 빌헬름 2세와 힌덴부르크는 후임 참모차장으로 빌헬름 그뢰너를 임명했다.[202]

11월 4일 킬 군항의 수병 반란을 시작으로 독일 혁명이 일어났다. 이로써 독일의 주요 도시는 모두 「노병평의회」에 의해 사실상 지배되었다. 황제 퇴위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급속히 커졌다. 그리고 11월 9일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요구에 따라 재상 막시밀리안이 독단으로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위와 프로이센 왕위를 했다”고 선언했다.[203][204] 당시 스파 대본영에 있던 빌헬름 2세는 격분하여 프로이센 왕위 퇴위와 스파 대본영에서의 퇴거를 거부했다. 힌덴부르크와 그뢰너는 빌헬름 2세를 네덜란드로 망명시키기로 결정했다. 힌덴부르크는 빌헬름 2세에게 “저는 폐하께서 베를린 혁명 정부에 체포되는 것을 보는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네덜란드로 피신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진언했다. 결국 빌헬름 2세는 11월 10일 새벽 특별 열차로 스파를 떠나 네덜란드로 망명했다.[205] 후년 빌헬름 2세는 망명지 네덜란드 도른에서 “자신의 퇴위에 대해서는 막시밀리안과 힌덴부르크에게 연대 책임이 있지만, 망명에 대한 책임은 완전히 힌덴부르크에게 있다”고 회고했다. 한편 힌덴부르크는 후년 “1918년 11월 9일의 일은 그뢰너가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206] 또한 힌덴부르크는 총리 하인리히 브뤼닝에게 당시를 돌이켜보며 “나는 카이저(독일 황제)를 위해 잘 되도록 꾀한 것이다. 일단 폐지된 황위가 다시 국민에 의해 부활된 예도 있다. 카이저가 네덜란드로 망명할 때 내가 생각한 것은 그것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퇴위와 망명은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때는 전선이 붕괴되어 있었고 군대는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프로이센 군인으로서 카이저의 안전을 지키는 것 외에 취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07]

11월 10일 그뢰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총리(막시밀리안의 후임.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와 연락을 취하여 앞으로 군은 공화제를 지지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동시에 「노병평의회」를 억제하여 국가의 합법적인 발전을 지켜 줄 것을 요청했다. 에베르트는 이를 수락했다. 이에 따라 힌덴부르크는 「노병평의회」의 결정에 군은 구속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포고를 발표했다.[208] 11월 11일 독일 공화국 휴전 위원회 위원장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와 연합군 최고 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원수 사이에 파리 북쪽 콩피에뉴 숲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209][210] 이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1918년 11월 15일, 대본영은 슈파에서 카셀 교외의 빌헬름스호에로 이동하여 서부 전선 병력의 철수를 지휘했다.[211][212] 새해까지 철수를 완료했다.[213] 1919년 2월, 대본영은 포메라니아의 콜베르크로 이동하여 독일 동부 방어를 지휘했다. 또한 이곳에서 발트 지방의 독일 자원군의 반혁명 군사 작전을 지원하려 했지만, 이는 연합군 총사령관 폴슈 원수에 의해 금지되었다.[213]

1919년 5월, 독일은 연합국으로부터 베르사유 조약을 제시받았다. 너무나 가혹한 내용에 독일 전역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다시 전쟁을 시작할 여력이 없는 이상, 독일 정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힌덴부르크는 평화 조약 체결 여부에 대해 정부로부터 자문을 받았는데, 이렇게 답했다. “전쟁을 재개할 경우, 포젠 지역을 획득하고 동부 국경을 방어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서부에서는 우세한 연합군이 우리 양익을 포위할 힘을 생각하면 그 공격에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전반적인 성공은 매우 의문스럽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나는 불명예스러운 평화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결사항전을 희망한다.”[214]

결국, 정권을 맡은 독일 사회민주당과 중앙당만이 찬성하여 6월 23일 베르사유 조약 무조건 체결 승인이 국회에서 결의되었다(사민당과 중앙당만으로 과반수를 넘었다). 이에 따라 6월 28일 헤르만 뮐러 외무장관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연합국 31개국과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힌덴부르크는 이 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19년 6월 25일에 예편했다.[215]

힌덴부르크는 많은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독일 혁명이라는 “배후의 칼침”에 의해 패배자로 취급되게 된 것이라고 믿었고, 1919년 11월 18일 국회 조사 위원회에서도 그것을 주장했다.[216]

하노버에서 은퇴 생활을 보내는 한편 독일 전역을 여행했지만, 특히 동프로이센에서는 러시아군으로부터 해방시킨 구원자로 환영받았다. 1921년, 슬하에 1남 2녀를 둔 그의 아내가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3.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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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사망하자, 같은 해 3월 29일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다. 힌덴부르크는 4월 26일 2차 투표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 부르주아 보수파의 지지를 받아 5월 12일 제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225] 당시 힌덴부르크는 77세였다. 그의 출마는 독일 국방군의 종용 때문이었다고 한다. 힌덴부르크는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을 존중하며 전후 혼란에 침착하게 대응했으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했다.

1930년, 힌덴부르크는 연합군의 배상금 일부 삭감 조약인 영 안을 수락했지만, 우익 지지층으로부터 '독일 민족의 노예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헤르만 뮐러 당수가 맡고 있던 수상에 대해 반(反) 마르크스주의와 반(反) 의회주의가 강한 정권 수립을 추진했다. 그 결과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이 성립되었지만, 소수 여당으로 의회 운영은 험난했다. 힌덴부르크는 의회 안정을 위해 헌법상 대통령 권한을 이용, 의회 해산 및 총선을 명령했지만, 나치당과 독일공산당이 약진했다. 정부는 힌덴부르크가 싫어하는 사회민주당과의 협력으로 간신히 운영되었고,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긴급명령권(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48조)을 자주 행사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사회민주당, 중앙당 등은 빌헬름 마르크스를 지지했다. 독일 공산당은 에른스트 탈만을 내세웠다. 우익 정당들은 힌덴부르크를 선택했고, 4월 1일 대표단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힌덴부르크는 "조국을 위해 제 선거가 필요하다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출마하겠습니다."라고 결론지었다.[64] 그는 "사회 정의, 종교 평등, 국내외 진정한 평화"를 강조하며 선거 운동을 했다.[65] 2차 투표에서 힌덴부르크는 바이에른 인민당의 지지와 공산당의 후보 철회 거부 덕분에 승리했다.[66]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는 독일 최초의 국민 직접 선거였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4월 26일에 2차 선거가 실시되었다.[217][218] 바이마르 연합은 빌헬름 마르크스를, 보수·우파 진영은 힌덴부르크를 후보로 내세웠다. 힌덴부르크는 처음에 출마를 거부했지만,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설득으로 출마를 결심했다.[219][220]

1925년 4월 선거 운동 중인 힌덴부르크. 철모단과 함께 행진 중


힌덴부르크는 제정 복고주의자이면서 공화정 대통령을 지향하는 것에 대해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가 헌법 수호자로서 자신의 노동자 계급 출신임을 감추지 않았듯이, 나 역시 결코 나의 정치적 신념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21] 그는 라디오 연설을 어려워하여, 그의 연설을 담은 레코드가 방송되었다.[222] 4월 26일, 힌덴부르크는 1465만 표를 획득, 마르크스를 90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223] 그는 마르크스의 축전에 감동했고, 후에 대통령으로서 마르크스를 총리로 임명했다.[224]

1925년 4월, 선거 운동 중 하노버의 별장에서.


1932년 3월 10일, 대통령 선거 재출마를 선언하며 독일 국민에게 호소하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1932년 3월 13일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었다. 힌덴부르크는 고령으로 출마가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으나, 히틀러 당선을 막기 위해 출마를 요청받았다. 2월 15일, 힌덴부르크는 출마를 선언했다.[246][247] 아돌프 히틀러도 2월 27일에 출마를 선언했다.[248]

이 선거에서 힌덴부르크는 중앙당, 사회민주당 등의 지지를 받았다.[249] 1925년 선거와 달리, 부르주아·보수·우익 세력의 지지는 거의 사라졌다.[250] 귀족 연맹은 힌덴부르크를 공개 비판했다.[251] 히틀러는 부르주아·보수·우익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히틀러의 선거 자금은 힌덴부르크보다 많았다.[252]

1932년 3월 13일 선거에서 힌덴부르크는 1,866만여 표, 히틀러는 1,133만여 표를 얻었으나, 힌덴부르크의 득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해 결선 투표가 실시되었다. 결선 투표에서 힌덴부르크는 1,935만여 표, 히틀러는 1,341만여 표를 얻어 힌덴부르크가 재선되었다.[253]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1차 득표율1차 득표수2차 득표율2차 득표수결과당락
1925년 선거독일의 대통령2대무소속48.3%14,655,641표 1위
1932년 선거독일의 대통령2대무소속49.6%18,651,497표53.0%19,359,983표1위


2. 3. 1. 대통령 당선

1925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사망하자, 같은 해 3월 29일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다. 힌덴부르크는 4월 26일 2차 투표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 부르주아 보수파의 지지를 받아 5월 12일 제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의 출마는 독일 국방군의 종용 때문이었다고 한다. 힌덴부르크는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을 존중하며 전후 혼란에 침착하게 대응했으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했다.

1930년, 힌덴부르크는 연합군의 배상금 일부 삭감 조약인 영 안을 수락했지만, 우익 지지층으로부터 '독일 민족의 노예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헤르만 뮐러 당수가 맡고 있던 수상에 대해 반(反) 마르크스주의와 반(反) 의회주의가 강한 정권 수립을 추진했다. 그 결과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이 성립되었지만, 소수 여당으로 의회 운영은 험난했다. 힌덴부르크는 의회 안정을 위해 헌법상 대통령 권한을 이용, 의회 해산 및 총선을 명령했지만, 나치당과 독일공산당이 약진했다. 정부는 힌덴부르크가 싫어하는 사회민주당과의 협력으로 간신히 운영되었고,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긴급명령권(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48조)을 자주 행사했다.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1차 득표율1차 득표수2차 득표율2차 득표수결과당락
1925년 선거독일의 대통령2대무소속48.3%14,655,641표 1위
1932년 선거독일의 대통령2대무소속49.6%18,651,497표53.0%19,359,983표1위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사회민주당, 중앙당 등은 빌헬름 마르크스를 지지했다. 독일 공산당은 에른스트 탈만을 내세웠다. 우익 정당들은 힌덴부르크를 선택했고, 4월 1일 대표단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힌덴부르크는 "조국을 위해 제 선거가 필요하다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출마하겠습니다."라고 결론지었다.[64] 그는 "사회 정의, 종교 평등, 국내외 진정한 평화"를 강조하며 선거 운동을 했다.[65] 2차 투표에서 힌덴부르크는 바이에른 인민당의 지지와 공산당의 후보 철회 거부 덕분에 승리했다.[66]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는 독일 최초의 국민 직접 선거였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4월 26일에 2차 선거가 실시되었다.[217][218] 바이마르 연합은 빌헬름 마르크스를, 보수·우파 진영은 힌덴부르크를 후보로 내세웠다. 힌덴부르크는 처음에 출마를 거부했지만,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설득으로 출마를 결심했다.[219][220]

힌덴부르크는 제정 복고주의자이면서 공화정 대통령을 지향하는 것에 대해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가 헌법 수호자로서 자신의 노동자 계급 출신임을 감추지 않았듯이, 나 역시 결코 나의 정치적 신념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221] 그는 라디오 연설을 어려워하여, 그의 연설을 담은 레코드가 방송되었다.[222] 4월 26일, 힌덴부르크는 1465만 표를 획득, 마르크스를 90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223] 그는 마르크스의 축전에 감동했고, 후에 대통령으로서 마르크스를 총리로 임명했다.[224]

1932년 3월 13일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었다. 힌덴부르크는 고령으로 출마가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으나, 히틀러 당선을 막기 위해 출마를 요청받았다. 2월 15일, 힌덴부르크는 출마를 선언했다.[246][247] 아돌프 히틀러도 2월 27일에 출마를 선언했다.[248]

이 선거에서 힌덴부르크는 중앙당, 사회민주당 등의 지지를 받았다.[249] 1925년 선거와 달리, 부르주아·보수·우익 세력의 지지는 거의 사라졌다.[250] 귀족 연맹은 힌덴부르크를 공개 비판했다.[251] 히틀러는 부르주아·보수·우익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히틀러의 선거 자금은 힌덴부르크보다 많았다.[252]

1932년 3월 13일 선거에서 힌덴부르크는 1,866만여 표, 히틀러는 1,133만여 표를 얻었으나, 힌덴부르크의 득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해 결선 투표가 실시되었다. 결선 투표에서 힌덴부르크는 1,935만여 표, 히틀러는 1,341만여 표를 얻어 힌덴부르크가 재선되었다.[253]

2. 3. 2. 대통령 내각 시대와 나치의 부상



힌덴부르크는 1932년에 실시된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53%를 득표하면서 37%를 득표한 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를 누르고 재선했다. 그러나, 이 선거는 왕정주의자뿐만 아니라 그가 싫어하는 가톨릭 정당, 사회민주당의 협력까지 얻어서 실현된 것이었다. 자부심 강한 프로이센 군인으로서, 또한 고령이면서 대통령에 계속 머물러 있었지만 정책 결정은 아들인 오스카르 폰 힌덴부르크나 친한 동료들과의 다과회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수법은 대통령이기보다 옛날 독일 제국 황제의 결정 방식과 비슷했다.

하인리히 브뤼닝은 대통령선거 운동 기간 중에 나치의 돌격대와 친위대가 휘두르는 폭력의 위험성을 깨닫고 힌덴부르크를 설득해 이들을 억압하는 명령을 내리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군부는 이 명령의 시행을 거부했으며 국방부장관은 사임했다. 이로 인해 붕괴된 브뤼닝 내각은 정치경험이 없는 귀족 출신의 프란츠 폰 파펜을 수상에 임명했다. 파펜이 소속했던 중앙당은 브뤼닝의 실각을 묵인했다는 이유로 그를 당에서 축출했지만, 앞잡이 노릇을 하기에는 적합했다. 1932년 7월 31일에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정하고, 스스로 프로이센 최고 행정관에 올라 민선 주 정부를 무력화시켰으며 독재정치를 주 단위까지 확대했다. 시가전이 매일 벌어지자 베를린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파펜은 동년 11월 17일까지 수상 자리를 지켰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나치가 의회 과반수를 획득하면 수상직을 부여하되, 그렇지 못할 경우 대통령 명령으로 파펜을 수상에 임명하고 부수상직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유혈 사태를 예감한 히틀러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힌덴부르크는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수석보좌관을 지냈고 또 자신의 계략을 통해 브뤼닝과 파펜의 실각을 거들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을 수상에 임명했다. 그러나 슐라이허는 불과 57일 동안 수상직에 머물렀으며, 그동안 나치당을 분열시키기 위해 나치당의 그레고어 슈트라서에게 각료직을 제공했다. 그러나 슈트라서는 나치당에서 탈당했고, 나치는 일치단결해 협력을 거부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 힌덴부르크가 보수파와 나치의 연립내각을 이끌 수상으로 히틀러를 임명한 것이다. 정부 소유의 라디오와 신문을 장악한 나치는 의회를 통한 연립 정부를 해체하고 3월 5일 총선거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나치 소속으로 연립정부의 내무부 장관으로 있던 헤르만 괴링은 공산당의 시위와 사회당의 간행물 배포를 금지했다.

괴링은 경찰에 대해 직무 수행상 시민을 살해한 경찰관은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반(反)나치 세력에 대한 무력 행사를 촉구했다. 나치의 돌격대원은 중도파와 좌파 후보들의 집회에서 난동을 부렸다. 이는 힌덴부르크의 권한 약화와 더불어 나치의 대두를 촉진시켰다. 힌덴부르크는 실질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File:Bundesarchiv Bild 102-11720, Paul von Hindenburg.jpg|thumb|200px|1931년 5월, 베를린 빌헬름슈트라세(de) 대통령 관저 정원에서.

브뤼닝 내각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외무장관(그는 1929년 10월에 사망했다)의 배상 완수·군축 등의 국제 협조주의를 계승하여 독일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선의 계승은 대공황 속에서 이미 힘들었던 국민에게 더욱 궁핍한 생활을 강요하는 결과가 되어, "기근 수상"으로서 국민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238]

1930년 7월 16일 브뤼닝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요청하여 재정에 관한 대통령 긴급 명령을 발령했지만, 국회에서 사회민주당에 의해 무산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대통령의 긴급 명령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국회가 투표로 파기할 수 있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239] 대통령 내각의 의회 운영을 안정시키기 위해 힌덴부르크는 임의로 의회 해산을 명령하고 총선에 나섰지만, 결과는 좌우 양극단의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과 독일 공산당의 약진으로 끝나, 완전히 역효과를 낳았다(1930년 독일 총선)[240].

브뤼닝 내각은 힌덴부르크가 싫어하는 사회민주당의 협력으로 간신히 정권을 운영하는 상황이 되었고, 그 때문에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긴급 명령을 자주 행사하게 된다. 더 이상 제대로 된 의원내각제는 기능하지 않았다. 힌덴부르크가 사회민주당을 싫어한 것은 혁명의 경위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사회민주당과의 협력이 힌덴부르크가 지지층으로 인식하고 있던 보수·우익의 반발을 사서 그 지지를 잃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31년 3월 28일에는 브뤼닝의 요청에 따라 "정치적 과격파 척결을 위한 명령"을 발령하여 나치당의 집회와 제복을 금지하고, 나치당의 신문을 발매 금지 처분했다.[241] 1931년 10월 10일에는 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가 괴링을 동반하여 힌덴부르크 대통령과의 첫 면담을 위해 방문했다.[242]. 하지만 히틀러의 열광적인 연설은 힌덴부르크에게 악감정만을 심어주었다. 이후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보헤미아의 상등병"이라고 혐오하게 되었다.[243][244]. 같은 날 이루어진 브뤼닝과 히틀러의 회담도 결렬되었고, 히틀러는 정부에 대한 어떠한 협력도 거부했다. 다음 날 11일에는 나치당은 국가인민당과 철모단과 함께 우익 대연합의 반정부 운동인 "할츠부르크 전선"을 조직했다.[245]

재선된 힌덴부르크는 자신이 제정 복고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우익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게다가 바이마르 공화파에 의해 마치 '공화국의 수호자'로 떠받들어지는 것에 분개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이미 하루에 몇 시간 정도만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노쇠해 있었다.[254]. 정책 결정은 아들 오스카르 폰 힌덴부르크나 대통령府 관방장 오토 마이스너, 쿠르트 폰 슐라이허 등 중신들의 차담회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미 힌덴부르크는 대통령이라기보다는 독일 황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힌덴부르크의 측근 중에서 특히 그를 조종하여 권력을 잡은 것은 슐라이허였다.[255]

1932년 4월 13일, 힌덴부르크는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와 빌헬름 그뢰너 국방장관 겸 내무장관 등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치당의 돌격대와 친위대에 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효과는 미미했고, 4월 23일에 각 주에서 실시된 지방 선거에서 나치당은 바이에른주를 제외한 모든 주 의회에서 제1당으로 급성장했다.[256]. 슐라이허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우익 연립 정권을 구상하고 나치당과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브뤼닝 등의 반나치 움직임은 방해가 되었다. 슐라이허는 5월 13일에 그뢰너를 국방장관 사퇴로 몰아냈다. 또한 동프로이센의 지주 (용커 계층이 차지하는)가 관리할 수 없는 토지를 실업자에게 분배한다는 에 용커들이 "농업 볼셰비즘"이라고 반발한 것을 계기로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에게 브뤼닝 해임을 제안했다. 힌덴부르크는 이에 동의하여 5월 29일 브뤼닝을 불러 "앞으로는 우익 정치를 해야 한다", "노동조합 지도부와는 손을 끊어야 한다", "농업 볼셰비즘은 근절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사실상의 사퇴 요구로 느낀 브뤼닝은 다음 날인 5월 30일에 총사퇴했다.[257][258]

힌덴부르크는 슐라이허가 추천한 당시 전혀 무명이었던 귀족 프란츠 폰 파펜을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 브뤼닝을 사퇴시킨 5월 30일, 히틀러를 소집하여 파펜을 총리로 하는 보수·우익 내각을 수립할 예정이므로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돌격대와 친위대의 금지 명령 해제를 시사했다. 그러나 나중에 히틀러는 자신이 총리로 임명되는 것 외에는 정부에 협력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파펜은 나치 회유를 위해 돌격대와 친위대의 금지 명령 해제를 힌덴부르크에게 신청했고, 힌덴부르크는 6월 16일에 금지령 해제 명령을 내렸다.[259]

7월 20일에는 파펜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통령 권한으로 프로이센 주총리 오토 브라운 (사민당)의 정부를 해체하고, 대신 파펜을 프로이센 국가 위임관으로 임명했다 (프로이센 쿠데타). 이로써 프로이센 정부의 간부를 차지하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파는 뿌리째 뽑혔다. 바이마르 공화파의 마지막 보루는 여기서 붕괴되었다. 아울러 공산당원 검거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260][261][262]

파펜 내각 아래에서 7월 31일에 총선거가 실시된다. 파펜 내각의 배상금 문제 대응을 비판한 나치당은 급성장하여 총의석 608석 중 230석(개선 전 107석)을 획득, 제1당이 된다.[263][264] 또한 75석을 획득한 중앙당도 반파펜(反パーペン) 자세를 분명히 하였기에, 내각의 권력 기반은 크게 흔들렸다. 파펜과 슈라이히어는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히틀러와 회담하여 히틀러에게 부총리 취임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이에 격분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8월 13일에는 힌덴부르크 자신이 히틀러를 소집하여 파펜 내각의 부총리가 되도록 설득했지만, 히틀러는 총리 지위를 요구했다. 힌덴부르크가 이를 거부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265]

9월 12일에 나치당은 사회민주당, 공산당 등과 함께 파펜 내각의 내각 불신임안에 찬성하여 압도적 다수로 가결시켰다. 파펜은 힌덴부르크의 대통령 명령으로 국회를 해산했다.[266] 그 결과 실시된 11월 6일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의석을 줄였지만, 196석으로 제1당 자리를 유지했다. 게다가 힌덴부르크와 파펜에게 나치당보다 더 증오스러운 적 독일 공산당이 처음으로 100석을 획득했다.[267] 나치당이 의석을 줄인 것을 보고 히틀러가 요구를 낮출 것이라고 생각한 파펜은 다시 히틀러에게 부총리 취임을 제안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더 이상 내각과 국회가 잘 해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파펜은 힌덴부르크에게 "신국가안(新國家案)"을 제출했다. 국회를 양원제로 하고, 가부장에게 2표의 투표권을 주고, 모든 정당·노동조합·경제단체를 해산시키는 내용이었다. 바이마르 헌법을 완전히 무시한 내용이었지만, 힌덴부르크는 이러한 시국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한 번 동의했다. 그러나 슈라이히어는 그러한 일을 하면 반드시 나치당과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군이 그것을 진압할 능력이 없다고 반대했다. 군의 지지 없이 이러한 안을 강행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파펜 내각은 11월 17일에 총사퇴할 수밖에 없었다.[268][269] 힌덴부르크는 슈라이히어에게 격분하여, 그에게 파펜 내각을 무너뜨린 책임을 지고 후임 총리를 맡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12월 2일에 슈라이히어에게 조각을 명령하여, 12월 3일에 그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총리가 취임했다.[270]

슈라이히어는 나치당과 연계한 정권 운영을 도모하여, 나치스 좌파 그레고어 슈트라서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총리 자리에 집착하는 히틀러는 12월 8일에 슈트라서를 모든 당직에서 사임시키고, 슈라이히어 내각에 대한 협력을 거절했다.[271][272]

한편, 완전히 반슈라이히어(反シュライヒャー) 입장이 된 파펜은 히틀러와 연계를 시도했다. 히틀러는 1933년 1월 1일에 쾰른의 은행가 저택에서 파펜과 비밀 회담을 하고 있다. 양자는 슈라이히어 타도를 위해 공투가 필요하다는 점,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하는 것, 헌법을 옹호하는 것, 사회민주당·공산당·유대인을 국가 중추에서 추방하는 것 등에 의견이 일치했다.[273][274][275] 그리고 1933년 1월 22일, 리벤트롭의 저택에 히틀러, 괴링, 프리크 등 나치당 간부들과 오스카, 마이스너, 그리고 파펜이 모였다. 히틀러와 오스카 두 사람은 밀실에서 회담을 하고, 그 후 일행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히틀러와 오스카의 비밀 회담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의 토지를 취득했을 때, 원래라면 오스카 명의로 등기할 곳을 다른 후원자의 이름으로 등기함으로써 상속세 납세 의무를 면제받았을 것이라는 의혹. 참고로 히틀러는 정권 장악 후인 1933년 8월 27일에 『』을 제정하여, 힌덴부르크와 그 일족이 노이덱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 한하여 국세·지방세 납세 의무를 면제하는 특권을 주고 있다.|group=#}}을 추궁하자 협박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276][277] 히틀러는 비밀 회담의 결과, 파펜과 오스카, 대통령 관방장 마이스너를 휘하에 넣는 데 성공했다.[278]

1933년1월 23일, 슈라이히어는 국회를 해산하고 다음 선거일을 정하지 않은 채 군사 독재 정권으로 이행할 것을 힌덴부르크에게 제안했지만, 힌덴부르크는 위헌이라고 하여 거절했다. 이에 따라 1월 28일에는 슈라이히어 내각이 총사퇴했다.[279][280] 힌덴부르크는 아직도 히틀러의 총리 취임에는 저항이 있었지만, 오스카와 파펜 등에게 설득당했다. 힌덴부르크와 파펜은 파펜과 국가인민당의 후겐베르크, 철모단의 젤테도 입각하므로 이들이 히틀러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281]

1933년 1월 30일 오전 11시 15분, 힌덴부르크는 마침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282][283]

2. 3. 3. 히틀러의 총리 임명과 나치 정권 수립

힌덴부르크와 아돌프 히틀러 (1933년)


힌덴부르크는 1932년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53%를 득표, 37%를 득표한 나치당 당수 아돌프 히틀러를 누르고 재선되었다.[263] 그러나 이 과정에서 왕정주의자, 가톨릭 정당, 사회민주당의 협력까지 얻어야 했다.[264]

프란츠 폰 파펜은 1932년 7월 31일 총선거를 실시, 프로이센 최고 행정관으로서 민선 주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독재정치를 확대했다. 베를린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파펜은 11월 17일까지 수상직을 유지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나치가 의회 과반수를 획득하면 수상직을 부여, 그렇지 않으면 파펜을 수상에, 히틀러를 부수상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히틀러는 거부했고, 힌덴부르크는 쿠르트 폰 슐라이허를 수상에 임명했다. 슐라이허는 57일 동안 재임하며 그레고어 슈트라서에게 각료직을 제안, 나치당 분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271][272]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는 보수파와 나치의 연립내각을 이끌 수상으로 히틀러를 임명했다.[282][283] 나치는 라디오와 신문을 장악, 의회를 해산하고 3월 5일 총선거를 실시했다. 내무장관 헤르만 괴링은 공산당 시위와 사회당 간행물 배포를 금지했다.[285] 괴링은 경찰에 반(反)나치 세력에 대한 무력 행사를 촉구했고, 돌격대는 중도파와 좌파 집회에서 난동을 부렸다.

독일 국회 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히틀러는 전권 위임법을 제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원 및 지지자 체포로 인해 통과되었다. 이로써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와 바이마르 공화국은 소멸되었다.[292] 힌덴부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영웅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기에 히틀러도 그를 배려했으나, 존경심은 없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에게 프로이센식 경례를 했지만, 이는 '제3제국'이 독일 제국과는 연속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과는 '단절'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호흘바인(Ludwig Hohlwein)이 그린 힌덴부르크, 나치 깃발과 함께, 1934년경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파펜을 부총리 겸 프로이센 국가위원으로, 괴링을 프로이센 내무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 새 내각에는 히틀러, 괴링, 빌헬름 프릭(Wilhelm Frick) 3명의 나치 당원만 포함되었다. 괴링은 프로이센 내무장관이 되어 경찰력을 장악하고 나치 당원들을 지휘관으로 승진시켰다.[273][274][275]

히틀러는 권한 강화 법 통과를 위해 국회 해산을 요청했고, 힌덴부르크는 동의했다. 국회 의사당 방화 칙령(Reichstag Fire Decree)에 서명하여 독일에서 시민의 자유를 정지시켰다. 괴링은 돌격대 대원들을 보조 경찰로 고용, 나치의 정적들을 공격했다. 힌덴부르크는 사회민주당을 싫어했고, 그들을 조국을 뒷통수 친 "배신자"로 규정, 나치의 사회민주당 탄압을 지지했다.

힌덴부르크와 그의 부인이 묻힌 탄넨베르크 기념비(Tannenberg Memorial)


왼쪽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의 신임을 얻었고, 군주제 복원을 약속했다. 힌덴부르크는 권한 강화 법 통과에 동의했고, 공화국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1933년과 1934년,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의 권력을 견제할 유일한 존재였다. 힌덴부르크가 히틀러 해임을 결정한다면 국방군(Reichswehr)은 힌덴부르크 편을 들 것이었다. 힌덴부르크의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나치는 힌덴부르크가 공개 석상에 나타날 때마다 히틀러와 함께 있도록 했다.

1934년 여름, 힌덴부르크는 나치의 과도한 행동에 불안해했다. 파펜은 마르부르크 대학교(University of Marburg)에서 마르부르크 연설(Marburg speech)을 통해 국가 테러 종식과 자유 회복을 촉구했다. 힌덴부르크는 블롬베르크에게 히틀러에게 최후통첩을 전달, 계엄령(martial law) 선포 및 정부를 육군에 넘길 것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긴 칼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을 자행했고, 힌덴부르크로부터 감사 전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1933년1월 23일, 슈라이히어는 국회 해산 후 군사 독재 정권으로의 이행을 제안했지만, 힌덴부르크는 위헌이라며 거부, 슈라이히어 내각은 총사퇴했다.[279][280] 힌덴부르크는 히틀러 총리 임명에 저항했지만, 오스카와 파펜 등의 설득으로 결국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281]

1933년 2월 1일, 힌덴부르크는 히틀러 요청에 따라 국회를 해산, 총선거를 실시했다.[284] 2월 4일, 「독일 민족 보호를 위한 대통령령」을 발령, 국민의 자유를 억압했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2월 28일 「독일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령」을 발령, 국민의 권리 제한을 확대했다. 괴링은 공산당원 4000명을 체포,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에 수용했다. 공산당 활동과 사회민주당 기관지 발행이 금지되었다.[285]

국회의원 선거 결과, 나치당은 288석을 획득했다.[286] 히틀러 내각 여당인 국가인민당이 52석을 획득, 여당은 과반수를 확보했다.[287] 3월 9일, 공산당 국회의원 81명이 자격 정지, 의석이 박탈되어 나치당이 단독 과반수를 차지했다.[286]

3월 13일, 히틀러 요청으로 요제프 괴벨스를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에 임명했다.[288]

3월 21일, 포츠담 수비대 교회에서 국회 개회식이 거행되었다. 힌덴부르크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290][291]

3월 23일, 전권 위임법이 가결되었다.[292] 힌덴부르크는 서명했고, 독일 의회 정치는 종지부를 찍었다.[293]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와 긴밀히 협조할 것이라는 서한을 발표했지만, 86세 노쇠한 대통령과의 사전 상담 약속은 44세 총리 히틀러에게 제약이 되지 못했다.[293]

|left|thumb|250px|1933년 5월 1일, 베를린 루스트가르텐에서 열린 제1회 「국민 노동제」。[294]]]

1933년 6월~7월, 나치당 외 모든 정당은 소멸했다. 사회민주당은 강제 해산되었고, 다른 주요 정당들은 나치당 압력으로 자진 해산했다.[295]

1933년 8월 27일, 히틀러와 「탄넨베르크 전투 기념관」 의식에 참석했다.

1934년 2월 19일, 히틀러 요청으로 힌덴부르크는 전 독일 군인에게 나치당 당장 부착을 명령했다.[299]

돌격대 반란 소문이 돌자, 1934년 6월 21일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돌격대 문제 미해결 시 군에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히틀러는 긴 칼의 밤을 통해 돌격대를 숙청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감사장을 보냈다.[301]

1934년 7월 말, 힌덴부르크는 혼수 상태에 빠졌다. 8월 1일 히틀러는 「독일 국가 원수법」을 제정, 힌덴부르크 사망 시 대통령 직무를 총리에게 통합한다고 규정했다. 8월 2일 오전 9시, 힌덴부르크는 사망했다.[303]

1934년 8월 2일, 안치되는 힌덴부르크의 유해


8월 18일, 아들 오스카는 히틀러가 원수가 되어야 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8월 19일 국민투표에서 히틀러는 국가원수 취임을 인정받았다.[306]

3. 유산과 평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역사적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হিন덴부르크는 "승리는 움직임에서 온다"는 슐리펜의 전쟁 원칙을 교관으로서 설명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적용했다.[53] 이러한 전술을 통해, 힌덴부르크가 지휘한 후퇴와 기동 방어는 효과적이었고, 그의 '''Schwerpunkt'''(슈베어푼크트) 공격은 서부 전선의 참호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돌파 부대의 속도가 너무 느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윈스턴 처칠은 1923년에 힌덴부르크를 참모본부의 신비에 압도된 명목상의 지도자로 묘사하며, "루덴도르프는 항상 논쟁의 여지없는 지배자로 나타난다"라고 결론지었다.[54] 파킨슨은 그를 "사랑받는 명목상의 지도자"라고 말했고, 스털링스는 그를 "늙은 군사 바보"라고 했다.[55] 이러한 평가는 전쟁 중 유명했고, 그 직후 자신을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회고록을 쓴 루덴도르프에서 비롯된다. 루덴도르프는 인쇄물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계속 강조했고,[56] 힌덴부르크는 공개적으로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18년 붕괴를 조사하는 국회 위원회에 증언한 최고 사령부(OHL) 장교들은 힌덴부르크가 항상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 동의했다.[57][58] 그는 목표를 설정하고 유능한 사람들을 임명하여 그들의 일을 하도록 했는데, 예를 들어 루덴도르프의 "지적 능력에 대한 충분한 범위를 부여"했다.[96]

1914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의 압도적인 승리를 이끈 후, 힌덴부르크는 거대한 인물숭배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며, 독일 남성성과 애국심의 살아있는 이상으로 칭송받았다.[100] 제1차 세계 대전 중, 힌덴부르크에게 바쳐진 가장 유명한 헌정은 베를린에 세워진 12미터 높이의 목조상이었다. 숭배자들이 못을 박는 데 지불한 돈—결국 30톤에 달하는 못—은 전쟁 미망인들에게 돌아갔다. 독일 전역에 더 작은 크기의 조각상들이 세워졌다.[102]

1927년 10월 2일 힌덴부르크 80세 생일을 기념하여 마이센 도자기 공장(Staatliche Porzellan-Manufaktur Meissen)에서 제작한 도자기 메달


1937년 화재로 파괴된 힌덴부르크호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본토를 실트 섬과 연결하는 둑길인 Hindenburgdamm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이전에 상실레시아 지역에 속했던 도시 자브제()도 1915년에 그의 이름을 따서 개명되었으며, SMS ''힌덴부르크''호와 뉴기니의 힌덴부르크 산맥도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국가 원수로서의 힌덴부르크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103]

힌덴부르크는 독일 역사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104]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독일 지방 자치 단체가 힌덴부르크를 폐지했고, 2020년 2월 베를린의 명예 시민권도 박탈되었다.[105][106]

4. 기타

제1차 세계 대전의 디오스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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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서적 ヒトラー全記録 :20645日の軌跡
[243] 서적 ヒンデンブルクからヒトラーへ :ナチス第三帝国への道
[244] 서적 ワイマル共和国 :ヒトラーを出現させたもの
[245] 서적 ヒトラー全記録 :20645日の軌跡
[246] 서적 ワイマル共和国 :ヒトラーを出現させたもの
[247] 서적 ヒトラー全記録 :20645日の軌跡
[248] 서적 ヒトラー全記録 :20645日の軌跡
[249] 서적 ヒンデンブルクからヒトラーへ :ナチス第三帝国への道
[250] 서적 ワイマル共和国 :ヒトラーを出現させたもの
[251] 서적 ヒンデンブルクからヒトラーへ :ナチス第三帝国への道
[252] 서적 ワイマル共和国 :ヒトラーを出現させたもの
[253] 서적 ヒンデンブルクからヒトラーへ :ナチス第三帝国への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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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서적 ヒトラー全記録 :20645日の軌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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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서적 ヒトラー全記録 :20645日の軌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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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서적 ヒトラー全記録 :20645日の軌跡
[305] 서적 ヒンデンブルクからヒトラーへ :ナチス第三帝国への道
[306] 서적 ヒトラー全記録 :20645日の軌跡
[307] 서적 第二次世界大戦 ヒトラーの戦い 文春文庫
[308] 서적
[309] 서적 ヒンデンブルクからヒトラーへ :ナチス第三帝国への道
[310] 서적 ヒンデンブルクからヒトラーへ :ナチス第三帝国への道
[311] 서적 第三帝国の演出者 :ヘルマン・ゲーリング伝 上
[312] 서적 ヒンデンブルクからヒトラーへ :ナチス第三帝国への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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