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창밖 투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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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은 프라하에서 발생한 여러 차례의 투신 사건을 일컫는다. 1419년 얀 젤립스키가 이끄는 후스파 군중이 시청의 관리들을 창밖으로 던져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1618년에는 개신교도들이 가톨릭 섭정관들을 창밖으로 던졌으나, 이들은 생존했고, 이 사건은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483년에는 프라하 시민들이 구시가지 시장과 신시가지 의원들을 창밖으로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얀 마사리크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결론났지만, 타살 의혹이 제기되어 "제3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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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0년대 신성 로마 제국 - 콘스탄츠 공의회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황 분열을 종식시키고 교회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1414년부터 1418년까지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렸으며, 세 교황을 폐위하고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여 서방 교회 분열을 종식시켰으나 얀 후스 화형 등의 논란과 공의회주의의 영향력 약화라는 한계도 남겼다.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 | |
---|---|
사건 개요 | |
![]() | |
유형 | 정치적 항의 및 폭력 사태 |
발생 위치 | 프라하 |
발생 날짜 | 1419년 7월 30일, 1483년 9월 24일, 1618년 5월 23일 |
주요 사건 | |
1차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 | 1419년 7월 30일, 얀 젤리프스키가 이끄는 후스파 시위대가 신 시청에서 시의원을 창밖으로 던짐. |
2차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 | 1483년 9월 24일, 구 시청에서 시의원을 창밖으로 던짐. |
3차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 | 1618년 5월 23일,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에 반발하여 황제 대리인을 창밖으로 던짐. |
배경 | |
종교적 갈등 | 후스 전쟁, 종교 개혁, 30년 전쟁의 배경이 됨. |
정치적 불만 | 보헤미아 귀족들의 자치권 요구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앙 집권 정책 간의 갈등. |
결과 | |
1차 창밖 투척 사건 | 후스 전쟁 발발의 도화선이 됨. |
3차 창밖 투척 사건 | 30년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됨.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얀 젤리프스키 페르디난트 2세 마티아스 |
기타 | |
영향 |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종교 및 정치적 갈등의 심화를 보여줌. |
2. 제1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 (1419년)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의 후스파 군중이 신시청사에서 시 평의원 7명을 창밖으로 던져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교회의 부패에 대한 불만과 종교적, 민족적 갈등이 커지면서 발생했다. 얀 젤립스키가 이끄는 후스파 군중들은 신시청으로 행진하며 후스파 수감자들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시 당국은 이를 거부했다. 행진 도중 신시청에서 젤립스키에게 돌이 날아왔고,[31] 분노한 군중들은 시청으로 난입해 시 평의원들을 창밖으로 던져 살해했다.[31]
2. 1. 배경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종교 개혁의 선구자인 프라하 카렐 대학교 교수 얀 후스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다.[19] 보헤미아 사람들은 이에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더 이상의 조치는 없었다. 오히려 야쿠벡 제 스트시브라가 시작한 우트라키즘(양형 영성체)가 문제가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요구에 성무정지로 대응했다.후스를 따르던 후스주의자들은 1420년 프라하에 모여 프라하 4개 조항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서 | 내용 |
---|---|
첫째 | 영성체를 할 때 신부와 일반 신도가 동등하게 예수의 성체와 보혈을 뜻하는 빵과 포도주를 먹을 것. |
둘째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유로운 설교 권리를 가질 것. |
셋째 | 교회 소유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세속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배제할 것. |
넷째 | 성직자든 일반인이든 용서받지 못할 죄에는 엄중히 처벌할 것. |
후스주의자들은 이 개혁 프로그램을 체코뿐만 아니라 유럽에 확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지만, 이들의 개혁 정신은 마르틴 루터에게 이어진다.
1419년,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4세는 동생인 지기스문트의 중재로 로마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그 결과, 프라하의 거의 모든 교회를 로마 교회로 복귀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후스파의 중심이었던 신시가 시의회를 해산하고 로마 교회 신자들만으로 새로운 시의회를 조직하자, 이에 분노한 후스파 세력은 얀 젤립스키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얀 젤립스키는 당시 프라하 눈의 성모교회 소속의 후스파 사제였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상태가 부패했다고 보았다.
2. 2. 경과
프라하 눈의 성모교회 소속 후스파 사제였던 얀 젤립스키가 주도한 후스파 군중들은 신시청사로 몰려가 후스파 수감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시청 측은 이를 거부했다. 후스파 군중이 행진하던 와중 시청 창문에서 누가 돌을 던졌고, 젤립스키가 그 돌에 맞았다.[31] 그러자 격분한 군중들이 시청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판사와 시장을 비롯한 시 평의원 7명을 창문 밖으로 집어던졌다. 투척당한 7명은 모두 추락사했다.[31]2. 3. 결과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4세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얼마 뒤 사망했다.[31] 제1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은 후스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후스파와 가톨릭 교회 간의 대화 시도는 결렬되었고, 이후 1436년까지 15년간 전쟁이 이어졌다.3.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 (1618년)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신성로마제국에서는 각 제후들이 자기 영지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가 통치하던 보헤미아 왕국은 종교적 자유가 비교적 보장되었으나, 1617년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2세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개신교 탄압이 예상되었다. 특히 신앙자유칙서의 적용 범위를 두고 갈등이 심화되었다.
1618년 5월 23일, 진드리히 마타야스 트런 백작을 비롯한 개신교 귀족들은 프라하 성에서 가톨릭 섭정관 야로슬라브 보리타 즈 마르티니츠 백작, 빌렘 슬라바타 즈 츨룸 백작과 서기관 필리프 파브리키우스를 창밖으로 던졌다. 이들은 21m 높이에서 떨어졌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가톨릭 측에서는 천사나 성모 마리아의 가호로, 개신교 측에서는 이들이 거름더미에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30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으며, 이후 보헤미아 귀족들은 '30인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독자적인 헌법 제정과 군대 소유를 선언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3. 1. 배경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 내 종교를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보헤미아 왕국은 종교적 자유가 비교적 보장되었으나, 1609년 루돌프 2세가 신앙자유칙서를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들의 권리가 확대되었다.[32] 그러나 마티아스를 거쳐 1617년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2세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개신교 탄압 정책을 펼칠 것으로 예상되었다.특히 신앙자유칙서의 적용 범위를 두고 국왕 직할령에도 적용된다고 해석한 보헤미아 개신교도들과 달리, 페르디난트 2세는 국왕 직할령의 개신교 교회 건설 중단을 명령하며 갈등이 심화되었다. 보헤미아인들이 이에 항의하자 페르디난트는 그들의 집회를 해산시켜 강경하게 대응했다.
3. 2. 경과
1618년 5월 23일, 진드리히 마타야스 트런 백작을 비롯한 개신교 귀족들은 회의를 열어 가톨릭 섭정관들에게 국왕 직할령 내 개신교 교회 건설 중단 명령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다. 섭정관 야로슬라브 보리타 즈 마르티니츠 백작, 빌렘 슬라바타 즈 츨룸 백작 등은 책임을 인정했고, 개신교 귀족들은 이들을 창밖으로 던졌다.[33][34]
투척당한 3명은 21m 높이에서 떨어졌음에도 기적적으로 생존했다.[33][34] 가톨릭 측에서는 이를 천사나 성모 마리아의 가호로 해석했다. 반면, 개신교 측은 이들이 거름더미에 떨어졌기 때문에 살았다고 주장했다.[35] 이후 필리프 파브리키우스는 황제에게 귀족으로 서임받고 "높은 데서 떨어지다"라는 뜻의 호헨팔 남작(Baron von Hohenfall)으로 봉해졌다.[35]
이 사건 이후, 보헤미아 귀족들은 '30인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독자적 헌법을 제정, 군대 소유를 선언하며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36]
3. 3. 결과
이 사건은 30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투척 사건 직후, 보헤미아 귀족들은 '30인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독자적인 헌법 제정과 군대 소유를 선언했다. 개신교도들과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인 합스부르크가는 각기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36]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죽자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로마황제를 겸하게 되었다. 그러자 '30인 집행위원회'는 페르디난트 2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개혁교회 신자인 프리드리히 5세 폰 팔츠를 새 왕으로 추대했다.그러나 정당한 왕을 폐위시켰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전쟁에 필요한 국제적인 지지를 모을 수 없었다.[36] 결국 1620년 11월 8일 백산 전투에서 페르디난트와 가톨릭교도들은 보헤미아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이 전투는 30년 전쟁의 첫 전투로 여겨진다.[37]
백산 전투 이후 몇 주에 걸쳐 개신교도들에 대한 약탈과 박해가 가해졌다. 이후 얀 예세니우스를 비롯한 개신교도 귀족과 시민 27명이 고문당한 끝에 구시가 광장에서 처형되었다. 그들 중 20명의 머리는 쇠꼬챙이에 꿰여 도개교 성탑 위에 효수되었다. 가톨릭교 측의 개신교에 대한 가혹한 조치는 30년 전쟁을 대규모 전쟁으로 격화시키는 촉매가 되었다.[37]
4. 1483년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
1483년 9월 24일, 헝가리의 블라디슬라프 2세 재위 시절 프라하에서 양쪽 성체 영성체를 지지하는 세력이 구시가지, 신시가지, 소지구에서 폭력적인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구시가지 시장과 신시가지 의원 7명이 살해되었다.[3]
4. 1. 배경
후스 전쟁 이후, 보헤미아에서는 양형 영성체를 지지하는 세력과 가톨릭 세력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1419년 프라하의 제1차 창밖 투척 사건은 이러한 갈등의 배경 속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교회의 부패에 대한 불만과 농민, 교회 고위 성직자, 귀족 간의 불평등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불만은 민족주의적 감정과 결합하여 얀 젤리프스키와 같은 설교자들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얀 젤리프스키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교회의 상태가 부패했다고 보았다.4. 2. 경과
1419년 얀 젤리프스키는 눈의 성모 마리아 교회 소속 신자들을 이끌고 프라하 거리를 행진하여 칼 광장의 신시청으로 향했다. 시의회 의원들이 후스파 포로 교환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행진 중에 신시청에서 젤리프스키를 향해 돌이 던져졌고, 이에 격분한 군중은 시청을 습격했다. 시청 안으로 들어간 군중은 판사, 시장, 그리고 시의회 의원 여러 명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고, 그들은 모두 추락사했다.[2]이 사건은 교회의 방향에 대한 불만과 농민, 교회 고위 성직자, 귀족 간의 불평등이 커지면서 발생했다. 이러한 불만은 민족주의적 감정의 고조와 결합하여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얀 젤리프스키와 같은 설교자들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1483년 9월 24일, 양쪽 성체 영성체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소지구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구시가지 시장과 신시가지 의원 7명을 각각의 시청 창밖으로 던져 살해했다.
4. 3. 결과
이 사건으로 프라하에서 후스파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3] 이후 종교적 화해와 1485년 쿠트나호라 회의에서 두 교회의 평등 선언이 이루어졌다.[3]5. 제3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 (1948년)
1948년 3월 10일, 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얀 마사리크(토마시 마사리크의 아들)가 외무부 건물 욕실 창문 아래에서 파자마 차림으로 추락사한 채 발견되었다. 공식 발표에서는 자살로 처리되었으나,[23][24]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나 소비에트 연방의 NKGB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25][26]
이 사건은 마사리크의 암살설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제3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라고도 불린다.[40]
5. 1. 배경
1948년 3월 10일,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의 외무장관 얀 마사리크가 외무부 건물 화장실 창문 아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공식적인 수사 결과는 투신자살이었다.[38]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나 소련 첩보원이 중립적인 성향의 마사리크를 암살한 것이라는 의혹이 계속 제기되었다.[39]얀 마사리크가 사망한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완전히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제외하고 41년간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5. 2. 경과
1948년 3월 10일,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의 외무장관 얀 마사리크가 외무부 건물 화장실 창문 아래에서 파자마 차림으로 발견되었다.[38] 공식적인 수사 결과는 투신자살로 발표되었으나,[38]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나 소련 첩보원이 마사리크를 암살한 것이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39]
2004년 프라하 경찰은 법의학 연구 이후 마사리크가 타살당했다는 결론을 내렸다.[41] 2006년에는 한 러시아 기자가 자기 모친이 마사리크를 창밖으로 던진 소련 정보장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42] 그러나 2019년에 시작된 최근 조사에서는 마사릭이 욕실 창문이 아닌 인접한 외벽 돌출부에서 떨어졌다고 주장하며, 2021년 마사릭 사망 사건에 대한 결정적인 결론을 내릴 만한 충분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조사가 중단되었다.[16]
5. 3. 결과
1948년 3월 10일,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의 외무장관 얀 마사리크가 외무부 건물 화장실 창문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공식적인 수사 결과는 투신자살이었다.[38]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나 소련 첩보원이 마사리크를 암살한 것이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39]얀 마사리크의 사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완전히 사회주의 국가화되었고,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제외한 41년간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마사리크의 죽음은 “제3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라고도 불린다.[40][27][28][29] 2004년 프라하 경찰은 법의학 연구 이후 마사리크가 타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41][30] 2006년에는 한 러시아 기자가 자기 모친이 마사리크를 창밖으로 던진 소련 정보장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42] 그러나 2019년에 시작된 최근 조사에서는 마사릭이 욕실 창문이 아닌 인접한 외벽 돌출부에서 떨어졌다고 주장하며, 2021년 마사릭 사망 사건에 대한 결정적인 결론을 내릴 만한 충분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조사가 중단되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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