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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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는 피렌체 출신으로,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와 톨레도의 엘레오노르의 아들이다. 그는 1564년 아버지의 섭정으로 활동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조반나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나, 비안카 카펠로와 재혼했다. 그는 제조업과 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아카데미아 델라 크루스카를 설립했으며, 연금술에도 심취했다. 1587년 비안카와 함께 사망했는데, 초기에는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2010년 연구에서 말라리아 감염이 확인되었다. 그의 자녀로는 엘레오노라와 마리아가 있으며, 마리아는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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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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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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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토스카나 대공 |
출생일 | 1541년 3월 25일 |
출생지 | 피렌체, 피렌체 공국 |
사망일 | 1587년 10월 19일 |
사망지 | 포조아카이아노의 메디치 가문 저택, 토스카나 대공국 |
매장지 | 프린치피 예배당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통치 | |
즉위 | 1574년 4월 21일 |
퇴위 | 1587년 10월 19일 |
이전 통치자 | 코시모 1세 |
다음 통치자 | 페르디난도 1세 |
가문 | |
가문 | 메디치 |
아버지 | 코시모 1세 |
어머니 | 톨레도의 엘레오노라 |
배우자 | |
배우자 | 오스트리아의 요안나 비앙카 카펠로 |
자녀 | |
자녀 | 엘레오노르, 만토바와 몽페라토 공작부인 안나 데 메디치 마리아, 프랑스 왕비 필리프, 토스카나 대공세자 돈 안토니오 데 메디치 (사생아) |
자녀 링크 | #Children |
서명 |
2. 일대기
피렌체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는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와 톨레도의 엘레오노르의 아들로, 1564년 아버지가 통치에서 물러난 후 섭정으로 활동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조반나와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애인 비안카 카펠로를 곁에 두었고 조반나가 사망한 후 비안카와 재혼했다. 이러한 자신의 스캔들뿐 아니라, 1576년 동생 피에트로 데 메디치의 아내 살해 사건과 누이 이사벨라 데 메디치 암살 사건을 묵인하면서 대공국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1570년경에는 베키오 궁전의 '오백 인의 방' 한쪽에 작은 연구실인 스튜디올로(Studiolo)를 만들게 했는데, 이 공간의 구상과 소장품들은 오늘날 매너리즘 예술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스튜디올로 내부에는 연금술 실험에 몰두하는 프란체스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도 있다.
정치에서 점차 멀어진 그는 만년에 별장이나 실험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가 실험실에서 독약을 만들고 비안카가 이를 사용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587년 10월, 프란체스코와 비안카는 포조 아 카이아노의 별장에서 잇따라 급사했다. 사망 원인으로는 말라리아 설과 동생 페르디난도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다.[1] 2006년에는 매장되었던 시신의 장기에서 비소가 검출되어 독살설에 힘이 실리는 듯했으나[2], 2010년 유골에 대한 면역학적 조사 결과 말라리아 원충의 치사 인자가 검출되어 독살설은 부정되었다는 보고가 나왔다.[3][4]
한편, 1585년에는 일본에서 파견된 천정소년사절단이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이들을 위한 무도회를 열기도 했다.
2. 1. 어린 시절

피렌체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는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와 엘레오노라 디 톨레도의 아들이었다. 그는 1564년 아버지 코시모 1세가 통치에서 물러나자 섭정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 2. 통치
157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프란체스코 1세에게 정식으로 대공(Grand Duke) 지위를 수여하고 토스카나를 대공작령으로 승격시켰다.[5] 이는 그의 아버지 코시모 1세가 1569년 교황 비오 5세로부터 토스카나 대공으로 임명받은 것[6][7][8]과는 다른 의미를 가졌다.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므로[9], 교황의 임명은 황제의 권한을 침해한 행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세속 군주에 대한 작위 수여는 황제의 고유 권한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 1세는 아버지와 달리 황제로부터 직접 작위를 받음으로써 대공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토스카나 대공국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프란체스코는 아버지처럼 독재적인 통치 방식을 보였지만, 피렌체의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던 코시모 1세와는 달리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 황제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에게 종속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받았고, 제국에 막대한 금액을 상납해야 하는 요구에 계속 시달렸다.
한편 그는 제조업과 과학 분야에 아마추어 수준의 관심을 보였다. 자기와 석기 제품을 대규모로 생산하기도 했으나, 그가 사망한 후에는 이러한 사업들이 지속되지 못했다. 예술 후원에서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예술가들을 지원했으며, 아카데미아 델라 크루스카를 설립하고 메디치 극장을 건립하는 등 문화적인 업적을 남겼다. 또한 화학과 연금술에 깊은 흥미를 느껴 개인 실험실과 골동품 수집에 많은 비용을 투자했다. 베키오 궁전 내에 마련된 개인 서재 겸 연구실인 스튜디올로(Studiolo)에 자신이 수집한 자연 재료들을 전시하고, 이를 이용해 화학 및 연금술 실험을 즐겼다.
2. 3. 결혼 생활
프란체스코 1세는 1565년 12월 18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조안나와 결혼했다.[10] 그러나 이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으며, 조안나는 1578년 사망했다.[12] 조안나가 사망한 직후 프란체스코는 오랜 연인이었던 비앙카 카펠로와 재혼했는데,[15] 이 과정에서 조안나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프란체스코의 통치 기간에는 개인적인 스캔들 외에도 가족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발생했다. 1576년 동생 피에트로 데 메디치가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사건과 누이 이사벨라 데 메디치의 암살 사건[1]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묵인하여 대공국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2. 3. 1. 초혼
1565년 12월 18일, 프란체스코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안나의 막내딸이자 당시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여동생인 오스트리아의 요하나와 결혼했다.[10] 하지만 이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요하나는 평범한 외모에 차가운 성격을 가졌으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해 노골적으로 피렌체인들을 업신여겼다.[11] 프란체스코 1세 역시 요하나에게 무관심했고, 그의 정부인 비앙카 카펠로에게 공공연히 애정을 표현하며 요하나를 무시했다. 피렌체 사람들 또한 오스트리아 출신인 요하나를 좋아하지 않았다.요하나는 남편에 대한 불만을 기회가 될 때마다 오빠인 황제 막시밀리안 2세에게 토로했으며,[11] 이로 인해 부부간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요하나는 피렌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에 시달렸다.[12] 프란체스코 1세와 요하나 사이에서는 일곱 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대부분 어려서 사망했다. 성인으로 성장한 자녀는 만토바 공작 부인이 된 엘레오노르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왕비가 된 마리 드 메디시스 두 딸뿐이었다.[13]
1578년 4월 10일, 여덟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요하나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몇 시간 후 아들을 낳았지만 아이는 곧 사망했고, 요하나 본인도 다음 날인 4월 11일에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프란체스코 1세가 아내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였던 비앙카 카펠로와 비밀리에 결혼하고 이듬해인 1579년 6월 10일에 이를 공표하자, 정부와 결혼하기 위해 첫 부인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의학적인 조사 결과, 요하나의 사인은 출산 중 합병증으로 인한 자궁 파열로 밝혀졌다. 당시 아이가 팔부터 나오면서 난산이 있었고, 평소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던 요하나는 척추와 골반의 변형이 심해 출산 자체가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14]
2. 3. 2. 재혼
첫 아내 조반나가 사망한 후, 프란체스코는 1576년에 이미 사생아 안토니오를 낳았던 베네치아 출신의 정부 비앙카 카펠로와 결혼했다.[15] 조반나가 사망한 직후, 프란체스코는 피렌체 관료였던 비앙카 카펠로의 남편을 서둘러 처리하고 그녀와 재혼했다. 이러한 빠른 재혼과 더불어, 동생 피에트로 데 메디치가 아내를 살해한 사건 등 메디치 가문 내의 불미스러운 일들 때문에 프란체스코와 비앙카가 조반나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피렌체에 퍼지기도 했다.프란체스코는 비앙카를 위해 빌라 디 프라톨리노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선물했다.

그러나 피렌체 시민들은 비앙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정식 결혼 후 두 사람 사이에 적법한 자녀는 태어나지 않았지만, 프란체스코는 비앙카가 낳은 사생아 안토니오(1576년 8월 29일 ~ 1621년 5월 2일)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다. 1582년, 프란체스코의 유일한 적법한 아들 필리포 데 메디치가 사망하자 안토니오가 사실상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또한 프란체스코는 비앙카가 첫 결혼에서 낳은 딸 펠레그리나(1564년 출생)도 입양했다.
3. 스캔들
첫 번째 부인인 조안나 대공비가 사망하자마자,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애인이었던 비안카 카펠로의 남편인 피렌체 관료가 사망한 후 그녀와 서둘러 결혼했다. 이런 빠른 재혼과 더불어, 동생 피에트로 데 메디치가 아내를 살해한 사건 등 메디치 가문 내의 여러 문제들 때문에 프란체스코와 비앙카가 조안나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피렌체에 널리 퍼졌다. 프란체스코는 비앙카를 위해 프라톨리노 별장을 지었지만, 비앙카는 피렌체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둘 사이에는 적법한 자녀가 없었으나, 비앙카는 조안나가 살아있을 때 프란체스코의 아들 안토니오(1576~1621)를 낳았다. 1582년 프란체스코의 유일한 적법한 아들 필리포 데 메디치가 사망하자, 사생아인 안토니오가 상속자로 공표되었다.
프란체스코의 통치 기간 동안 메디치 가문의 다른 스캔들도 그의 평판을 악화시켰다. 1576년 동생 피에트로 데 메디치가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사건과 누이 이사벨라 데 메디치가 남편에게 살해당한(혹은 암살된) 사건이 있었는데, 프란체스코는 이 사건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묵인함으로써 대공국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아버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처럼 독재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피렌체의 독립을 지키려 했던 아버지와 달리 프란체스코는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봉신처럼 행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또한 정치에서 멀어져 베키오 궁전 내 자신의 개인 실험실이자 수집품 전시 공간인 'Studiolo]'에서 연금술과 화학 실험에 몰두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때문에 시민들 사이에서는 프란체스코가 실험실에서 독약을 만들고 비안카가 그것을 사용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1587년 10월, 프란체스코와 비앙카는 포조 아 카이아노의 메디치 별장에서 며칠 간격으로 잇따라 사망했다. 공식 사망 증명서에는 말라리아가 원인으로 기록되었지만, 프란체스코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페르디난도가 두 사람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오랫동안 제기되었다.[1] 2006년에는 매장된 장기에서 비소가 검출되어 독살설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2] 하지만 2010년 프란체스코의 유골에 대한 면역학적 조사 결과,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열대열 말라리아 원충 기생충이 발견되어[3] 독살설보다는 말라리아 감염설과 공식 기록의 신빙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결과가 나왔다.[4]
4. 죽음
1587년 10월 19일과 20일, 포조 아 카이아노에 있는 메디치 빌라에서 프란체스코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비앙카 카펠로가 잇따라 사망했다.[17] 당시 공식 사망 증명서에는 말라리아가 사인으로 기록되었으나, 프란체스코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페르디난도 1세 데 메디치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다.[1] 시민들 사이에서는 프란체스코가 실험실에서 독약을 제조하고 비안카가 그것을 사용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2006년, 피렌체 대학교의 법의학 및 독성학 전문가들은 프란체스코의 유해에서 비소 중독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하며 독살설에 힘을 실었다.[18][2] 그러나 2010년에 이루어진 면역학적 조사 결과, 프란체스코 1세의 유골에서 말라리아를 유발하는 기생충인 ''열대열 말라리아 원충''이 검출되었다.[19][3][4] 이는 프란체스코가 말라리아로 사망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진다.
프란체스코의 뒤를 이어 토스카나 대공이 된 동생 페르디난도 1세는 비앙카 카펠로가 메디치 가문의 정식 일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메디치 가문의 묘지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20] 비앙카는 성 베드로 성당 아래의 공동묘지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란체스코는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에 안치되었다.
1857년, 메디치 가문 구성원들의 유해가 발굴되어 산 로렌초 성당에 재매장되었다. 당시 의식에 참석했던 화가 주세페 모리치는 프란체스코의 유해 상태를 묘사했는데, 오른쪽 편마비와 같은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보이는 특징들(얼굴 처짐, 오른손 갈고리 모양, 오른쪽 어깨 안쪽 회전, 오른쪽 종아리 근육 위축, 오른쪽 굽은 발)이 관찰되었다. 유해와 함께 발견된 정형외과 신발은 그가 사망하기 훨씬 이전에 뇌졸중을 겪었음을 시사한다. 뇌졸중의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말라리아가 이러한 상태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살아생전 공식 초상화에서는 이러한 신체적 문제가 드러나지 않도록 묘사되었다.
5. 자녀
프란체스코 1세는 첫 부인 요하나와의 사이에서 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대부분 어려서 사망하고 엘레오노라 데 메디치와 마리 드 메디시스 두 딸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정부였던 비앙카 카펠로와의 사이에서는 사생아 안토니오 데 메디치를 두었다.
이름 | 이탈리아어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엘레오노라 데 메디치 | Eleonorait | 1567년 2월 28일 | 1611년 9월 9일 | 만토바 공작 빈첸초 1세 곤차가와 결혼 |
로몰라 | Romolait | 1568년 11월 20일 | 1568년 12월 2일 | 요절 |
안나 | Annait | 1569년 12월 31일 | 1584년 2월 19일 | 요절 |
이사벨라 | Isabellait | 1571년 9월 30일 | 1572년 8월 8일 | 요절 |
루크레치아 데 메디치 | Lucreziait | 1572년 11월 7일 | 1574년 8월 14일 | 요절 |
마리 드 메디시스 | Mariait | 1575년 4월 26일 | 1642년 7월 3일 | 앙리 4세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비가 됨 |
안토니오 데 메디치 | Antonioit | 1576년 8월 29일 | 1621년 5월 2일 | 비앙카 카펠로 또는 하녀와의 사생아 |
필리포 데 메디치 | Filippoit | 1577년 5월 20일 | 1582년 3월 29일 | 요절, 메디치 가문의 유일한 남성 후계자였으나 일찍 사망 |
이름 없음 | 1578년 4월 10일 | 1578년 4월 10일 | 어머니 요하나가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사산됨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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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若桑1994
[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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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mj.co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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メディチ家 ルネサンス・美の遺産を旅する
世界文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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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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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aria Was “the Killer” of Francesco I de’ Medici
http://www.paleop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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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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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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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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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교황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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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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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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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ci family cold case finally sol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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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ale Biography; or, Memoirs of Illustrious and Celebrated Women, of All Ages and Countries
Chawton House Library Series: Women’s Memo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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