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핀의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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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핀의 기증은 751년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지배와 교황령의 위기 속에서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 3세가 교황 스테파노 2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고, 754년 퀘르지 맹약을 통해 롬바르드족을 격퇴한 후 라벤나 총독령을 비롯한 이탈리아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한 사건이다. 이로써 교황은 세속적인 통치자가 되어 교황령을 형성했으며, 이는 중세 교황권 강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피핀의 기증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샤를마뉴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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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핀의 기증 | |
---|---|
배경 | |
유형 | 영토 기증 |
위치 | 이탈리아 |
교황 수혜자 | 스테파노 2세 하드리아노 1세 |
기증자 | 피핀 3세 |
날짜 | 756년 |
영향 | |
결과 | 교황령의 합법화 및 확장 |
추가 정보 | |
관련 용어 | 콘스탄티누스 기증장 카롤루스 왕조 |
2. 역사적 배경
751년, 롬바르드족의 왕 아이스툴프는 북부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로마 제국의 마지막 잔재이자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통치 중심지였던 라벤나 총독령을 정복했다. 752년, 아이스툴프는 로마에 복종과 1인당 금화 1개(솔리두스)를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협상과 뇌물을 통해 아이스툴프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 3세에게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고, 자신이 피핀 3세를 만나 협의할 수 있도록 프랑크족의 호위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당시 프랑크족은 롬바르드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753년, 침묵자 요한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로 돌아와 교황에게 롬바르드족의 수도 파비아에서 아이스툴프를 만나라는 황제의 칙령(''iussio'')을 전달했다. 교황은 롬바르드족에게 통행증을 요청하여 받았고, 도착한 프랑크족 사절들과 함께 753년 10월 14일 파비아로 출발했다. 파비아에서 아이스툴프는 정복한 총독령을 제국에 반환해 달라는 스테파노 2세와 요한의 요청을 거부했지만, 스테파노 2세가 프랑크족 사절과 함께 피핀 3세의 궁정으로 가는 것은 허락했다. 이들은 753년 11월 15일 파비아를 떠났으며, 이는 교황이 알프스를 건너는 최초의 사례였다. 교황은 황제의 사절과 독립적으로 행동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교황은 자신이 아이스툴프에게 정복되고 위협받는 이탈리아 지방을 대신하여 행동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2. 1.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지배와 교황령의 위기
751년, 롬바르드족의 왕 아이스툴프는 북부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잔재인 라벤나 총독령을 정복했다.[1] 752년, 아이스툴프는 로마에 복종과 1인당 금화 1개 (솔리두스)를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1]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협상과 뇌물을 통해 아이스툴프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 3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1] 당시 프랑크족은 롬바르드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1]7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온 황제의 사절 침묵자 요한은 교황에게 파비아에서 아이스툴프를 만나라는 칙령을 전달했다.[1] 교황은 롬바르드족에게 정당하게 통행증을 받아 프랑크족 사절, 황제의 사절과 함께 파비아로 갔다.[1] 아이스툴프는 정복한 총독령 반환 요구를 거부했지만, 스테파노 2세가 피핀 3세를 만나러 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1] 이는 교황이 알프스를 넘는 최초의 사례였다.[1] 교황은 자신이 아이스툴프에게 정복되고 위협받는 이탈리아 지방을 대신하여 행동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1]
751년 당시 랑고바르드 왕국은 아이스투르프의 치세 하에 라벤나 총독령을 지배하고 있었다. 라벤나 총독령은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통치의 중심지였으며, 영내를 관할하는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독립하여 비잔틴 황제의 지배하에 있었다.
피핀은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 시절 교회령 몰수를 둘러싼 분쟁 해결에 기여했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로마 교황의 지원을 요청했다.[1] 교황은 랑고바르드족을 쳐부술 것을 요구했다.[1] 스폴레토 공과 랑고바르드 왕은 로마의 지배권을 위협했고, 아이스토르프는 교황 자카리아에게 공물을 요구했다.[1] 피핀은 자카리아에 의해 수아송에서 대관을 받아 피핀 3세가 되었고, 스테파노 2세는 로마 교황 탄생 이후 처음으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피핀 3세와 쿠에르지에서 만났다.[1]
2. 2. 프랑크 왕국과 교황의 협력
751년, 롬바르드족의 왕 아이스툴프는 북부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로마 제국의 마지막 잔재인 라벤나 총독령을 정복했다.[1] 752년, 아이스툴프는 로마에 복종과 함께 1인당 금화 1 솔리두스를 조공으로 요구했다.[1]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협상과 뇌물을 통해 아이스툴프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 3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1] 당시 프랑크족은 롬바르드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1]753년,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롬바르드족의 수도 파비아에서 아이스툴프를 만났으나, 정복한 총독령을 제국에 반환해 달라는 요청은 거부당했다.[1] 하지만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족 사절과 함께 피핀 3세의 궁정으로 가는 것을 허락받았고, 753년 11월 15일 파비아를 떠났다.[1] 이는 교황이 알프스 산맥을 넘은 최초의 사례였다.[1]
교황 스테파노 2세는 754년 1월 6일 퐁티옹 왕실 영지에서 피핀 3세와 만났다.[1] 피핀 3세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라벤나 총독령과 공화국의 권리와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했다.[1] 754년 4월, 퀘르지에서 열린 회의에서 피핀 3세는 교황에게 한 약속을 재확인하고 회복할 영토를 열거했다.[1]
754년 7월 28일, 생드니 대성당에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피핀 3세와 그의 아들 샤를마뉴와 카를로만 1세를 프랑크 왕과 로마의 귀족으로 임명했다.[1] 이는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제가 끝날 때까지 프랑스 왕의 대관식으로 여겨졌다.[1]
피핀 3세는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 시절,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 교황의 지원을 요청했고, 교황 자카리아는 피핀 3세를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랑고바르드족을 쳐부술 것을 요구했다. 피핀 3세는 자카리아에 의해 수아송에서 대관을 받았고, 그의 뒤를 이은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피핀 3세를 만났다.
756년, 피핀 3세는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토르프를 격파하고, 교황에게 라벤나 지방을 기증했다.[1]
3. 피핀의 기증 과정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였던 피핀은 가톨릭 교회와 타협하기 위해 교회령 몰수 분쟁 해결에 기여했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로마 교황의 지원을 요청했고, 생 드니 대수도원장에게 교황과의 면회를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피핀에게 왕권을 인정하는 대신 랑고바르드족을 쳐부술 것을 요구했다. 스폴레토 공과 랑고바르드 왕은 로마의 지배권을 위협했고, 당시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툴프는 외교관이기도 한 교황 자카리아에게 공물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피핀은 자카리아에 의해 수아송에서 대관을 받아 왕위에 올랐고, 자카리아의 뒤를 이은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로마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피핀 3세를 쿠에르지에서 만났다. 754년 7월 28일, 스테파노 2세는 생 드니 대성당에서 피핀 3세와 그의 두 아들 카를로만과 샤를마뉴를 성별하고, 로마 귀족 지위를 부여했다.[1] 이는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제가 막을 내릴 때까지 프랑스 왕의 대관식으로 이어졌다.
756년, 피핀 3세는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툴프를 격파하고 라벤나 지방을 교황에게 기증했다. 그는 같은 해에 로마에서도 기증을 했고, 774년에는 그의 아들 샤를마뉴(카를 대제)도 기증을 했다.
3. 1. 퐁티옹 회담과 퀘르지 맹약 (754년)
754년 1월 6일, 스테파노 2세는 퐁티옹 왕실 영지에서 피핀 3세를 만났다. 피핀 3세는 교황에게서 "로마와 롬바르드족 사이의 평화 조약에 따라 성 베드로와 로마 공화국의 소송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라벤나 총독령과 공화국의 권리와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했다.[1]이후 2년 동안 피핀 3세는 롬바르드족의 왕 아이스툴프에게 로마인과의 조약을 존중하라고 요구하는 사절단을 세 차례 보냈다. 754년 4월, 퀘르지에서 열린 회의에서 일부 귀족들이 반대했지만, 피핀 3세는 교황에게 한 약속을 공개적으로 재확인하고 회복할 영토를 열거했다. 이 약속은 이후 문서화되었다.[1]
754년 7월 28일, 생드니 대성당에서 교황은 피핀 3세와 그의 아들 샤를마뉴와 카를로만 1세를 프랑크 왕과 로마의 귀족으로 임명하고, 왕비 라옹의 베르트라다와 모인 귀족들에게 축복을 선포했다.[1]
3. 2. 생드니 대성당에서의 도유식 (754년)
754년 7월 28일, 스테파노 2세는 생드니 대성당에서 피핀과 그의 두 아들 샤를마뉴와 카를로만에게 도유식을 거행하고, 로마 귀족 칭호를 부여했다.[1] 이 의식은 프랑스 혁명으로 앙시앵 레짐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 왕의 대관식으로 여겨졌다.3. 3. 롬바르드족과의 전쟁 (755년, 756년)
755년 봄, 피핀은 군대를 브렌-쉬르-베슬에 소집했다. 그는 아이스툴프에게 조약을 위반하고 점령한 로마 영토를 반환하면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하는 사절을 보냈다. 프랑크 군대는 몽세니를 넘어 수사 근처에서 롬바르드 군대를 격파했다.[1] 패배한 아이스툴프는 프랑크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라벤나와 그가 점령한 다른 도시들을 교황에게 반환하겠다고 맹세했다. 평화 조약은 제국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없이 "로마인, 프랑크인, 롬바르드인"에 의해 서명되었다.프랑크 군대가 이탈리아를 떠나자마자 아이스툴프는 조약을 무시했다. 756년 1월 1일, 그는 로마를 포위했다. 교황은 프랑크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3개월 후, 아이스툴프는 포위를 풀었다. 4월, 프랑크 군대가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롬바르드인을 격파했다. 아이스툴프는 인질을 넘겨주고 프랑크인들에게 연공을 바쳐야 했다. 그는 또한 점령한 영토를 교황에게 서면으로 반환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1]
4. 피핀의 기증 내용과 의미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였던 피핀은 가톨릭 교회와 타협하기 위해 교회령 몰수 분쟁 해결에 기여했다. 피핀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로마 교황의 지원을 요청했고, 교황은 왕권 인정의 대가로 랑고바르드족을 쳐부술 것을 요구했다. 스폴레토 공과 랑고바르드 왕은 로마의 지배권을 위협했고, 당시 교황 자카리아에게 공물을 요구했다. 피핀은 자카리아에 의해 수아송에서 대관을 받아 피핀 3세가 되었고, 자카리아의 뒤를 이은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로마 교황 최초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피핀 3세와 쿠에르지에서 만났다.
754년 7월 28일, 스테파노 2세는 생 드니 대성당에서 피핀 3세와 그의 두 아들 (카를로만과 샤를마뉴)에게 성별했고, 피핀 3세에게 로마 귀족 지위를 부여했다[1]. 이는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제가 끝날 때까지 프랑스 왕 대관식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756년, 피핀 3세는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토르프를 격파하고 라벤나 지방을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후 피핀 3세는 로마에서도 기증을 했고, 그의 아들 샤를마뉴(카를 대제)도 774년에 기증을 했다.
4. 1. 기증된 영토
이 조약은 교황에게 라벤나에 속한 영토, 포를리와 그 배후지, 로마냐와 스폴레토 공국, 베네벤토의 롬바르드 정복지, 그리고 펜타폴리스 (리미니, 페사로, 파노, 세니갈리아, 안코나의 "다섯 도시")를 공식적으로 부여했다. 나르니와 체카노는 이전 교황령이었다.[1] 756년 조약에 명시된 영토는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다. 제국의 사절단은 파비아에서 피핀을 만나 제국에 영토를 반환하도록 많은 돈을 제시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며 그 영토는 성 베드로와 로마 교회에 속한다고 말했다. 교황에게 부여된 영토의 경계는 조약의 원문이 남아 있지 않아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경계는 이전 제국-롬바르드 조약과 동일했을 가능성이 있다. 풀라드 수도원장은 넘겨질 도시의 열쇠를 수집하여 서면 합의와 함께 성 베드로의 무덤에 보관하는 임무를 맡았다.이 기증을 통해 교황은 처음으로 세속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 영토는 티레니아 해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뻗어 있었다.
4. 2. 교황령의 성립과 중세 교황권 강화
756년, 피핀 3세는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토르프를 격파하고 라벤나 지방을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 기증을 통해 교황은 처음으로 세속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기증된 영토는 티레니아 해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뻗어 있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교황들은 시대적 압박으로 인해 이 광대하고 산악 지형에 대해 효과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쿠에르지 조약에서 교황에게 공식적으로 부여된 영토는 라벤나와 그 배후지, 로마냐와 스폴레토 공국, 베네벤토의 롬바르드 정복지, 그리고 펜타폴리스 (리미니, 페사로, 파노, 세니갈리아, 안코나의 "다섯 도시") 등이었다. 나르니와 체카노는 이전 교황령이었다.[1] 피핀 3세는 같은 해에 로마에서도 기증을 했고, 그의 아들 샤를마뉴(카를 대제)도 774년에 기증을 했다.
4. 3.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악화
피핀 3세가 교황에게 라벤나를 포함한 영토를 공식적으로 부여하면서,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1] 이 영토는 본래 동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다.[1]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은 피핀 3세를 만나 영토 반환을 요구하며 많은 돈을 제시했지만, 피핀 3세는 이를 거부하고 해당 영토가 성 베드로와 로마 교회에 속한다고 주장했다.[1]751년 당시 랑고바르드 왕국은 아이스투르프의 지배 하에 라벤나 총독령을 다스리고 있었다. 라벤나 총독령은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통치 중심지였으며, 영내를 관할하는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독립하여 동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5. 샤를마뉴의 기증 재확인 (774년)
754년 7월 28일, 스테파노 2세 교황은 생 드니 대성당에서 피핀 3세와 그의 두 아들 카를로만과 샤를마뉴를 성별하고, 피핀 3세에게 로마 귀족 지위를 부여했다.[1] 756년 피핀 3세가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토르프를 격파하고 교황에게 라벤나 지방을 기증한 것에 이어, 그의 아들 샤를마뉴는 774년 로마를 방문하여 피핀의 기증을 재확인했다. 일부 연대기에서는 샤를마뉴가 기증 범위를 토스카나, 에밀리아, 베네치아, 코르시카까지 확장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
6. 동방 문제의 기원
751년, 롬바르드족의 왕 아이스툴프는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잔재인 라벤나 총독령을 정복했다.[1] 라벤나 총독령은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통치 중심지였으며, 총독령의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독립하여 동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752년, 아이스툴프는 로마에 복종과 함께 1인당 금화 1개(솔리두스)를 조공으로 요구했다.[1]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협상과 뇌물을 통해 아이스툴프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 왕국의 왕 피핀 3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1]
7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온 황제의 사절 요한은 교황에게 롬바르드족의 수도 파비아에서 아이스툴프를 만나라는 칙령을 전달했다. 교황은 프랑크족 사절들과 함께 파비아로 갔으나, 아이스툴프는 총독령 반환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스테파노 2세가 피핀 3세를 만나러 가는 것은 막지 않았다. 교황은 알프스를 넘어 피핀을 만났는데, 이는 교황이 알프스를 넘은 최초의 사례였다.[1]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교황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독립적으로 행동하려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교황은 아이스툴프에게 정복되고 위협받는 이탈리아 지방을 대신하여 행동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1]
피핀 3세는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 시절, 가톨릭 교회와의 타협을 통해 교회령 몰수 분쟁 해결에 기여했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로마 교황의 지원을 요청했고, 교황은 랑고바르드족을 쳐부수는 대가로 왕권을 인정했다. 스폴레토 공국과 랑고바르드 왕은 로마의 지배권을 위협했고, 아이스툴프는 교황 자카리아에게 공물을 요구했다. 피핀 3세는 자카리아에 의해 수아송에서 대관을 받았고, 스테파노 2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피핀 3세를 만나 754년 7월 28일 생 드니 대성당에서 그와 그의 두 아들을 성별하고, 로마 귀족 지위를 부여했다.[1]
756년, 피핀 3세는 아이스툴프를 격파하고 라벤나 지방을 교황에게 기증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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