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 2세 디 사보이아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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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포 2세 디 사보이아 공작은 사보이아 공작 루도비코와 키프로스의 안의 아들이자, 카를로 2세의 종조부였다. 그는 형 아메데오 9세의 가계 단절로 사보이아 가문의 상속자가 되었으며, 1496년에 공작위를 계승하여 이듬해 사망했다. 필리포 2세는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 클로딘 드 브로스, 그리고 여러 첩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루이즈, 필리베르토 2세, 카를로 3세 등이 그의 후손이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사보이아 공작 가문의 하위 일원으로 보냈으며, 브레스 지역을 본거지로 삼았지만, 이를 상실하여 '무토지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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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2세 디 사보이아 공작은 1490년부터 1496년까지 사보이아 공국을 다스렸으나,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후계 구도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어머니의 섭정 시절 프랑스 군대의 자유로운 통과를 허용했으며, 사촌인 필리포 2세가 공작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상속권 주장이 제기되었다.
필리포 2세 디 사보이아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필리프 2세 |
이명 | 펠리페 2세 (Filippo II) |
통치 | |
작위 | 사보이아 공작 |
재위 기간 | 1496년 4월 16일 – 1497년 11월 7일 |
이전 통치자 | 카를로 2세 |
다음 통치자 | 필리베르토 2세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438년 2월 5일 |
출생 장소 | 샹베리, 사보이아 공국 |
사망일 | 1497년 11월 7일 |
사망 장소 | 샹베리, 사보이아 공국 |
결혼과 자녀 | |
배우자 |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 클로딘 드 브로스 |
자녀 | 루이즈, 앙굴렘 백작부인 필리베르토 2세 카를로 3세 필리프, 느무르 공작 필리베르타, 느무르 공작부인 렌 드 사보이 (사생아) 안토니아 드 사보이 (사생아) |
가문 | |
가문 | 사보이아 가문 |
아버지 | 루도비코 디 사보이아 |
어머니 | 안 드 뤼지냥 |
2. 생애
필리포 2세는 사보이아 공작 루도비코와 키프로스의 안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로, 전임 공작인 카를로 2세의 종조부였다. 상속 순위에 앞선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임 공작의 법정 상속인은 아니었다. 사보이아 가문의 남성 계승을 위해 장남 필리베르토를 사촌이자 사망한 어린 공작의 자매와 혼인시켰으나, 어린 신부가 12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계획은 실패했다.
필리포 2세의 형 아메데오 9세의 딸의 자식들이 다음 상속 순위에 있었고, 키프로스와 예루살렘 왕위를 포함한 유산을 지닌 법정 상속인이었다. 필리포 2세는 키프로스와 예루살렘 왕위가 여성에게 상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이 권리를 주장하고 사용했으며, 그의 후계자들도 이를 따랐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사보이아 공작 가문의 하위 일원으로 보냈으며, 프랑스와 부르고뉴 국경 인근의 브레스 지역을 본거지로 삼았으나, 이를 상실하고 '무토지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
2. 1. 공작위 계승
카를로 조반니 아메데오(카를로 2세)의 죽음으로 아메데오 9세의 가계가 단절되자, 필리포 2세가 사보이아 가문에서 가장 가까운 친족이었기 때문에 상속자가 되었다.[2] 이때까지 사보이아 가문의 상속권은 살리카 법에 따르는 것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이후 이탈리아 왕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남자 상속이 이루어졌다.필리포 2세는 공작위 계승 다음 해인 1497년에 사망했다. 전처 마르그리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필리베르토 2세가, 그 다음으로 후처 클라우디나(클로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카를로 3세가 뒤를 이었다.
3. 가정
필리포 2세는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 브로스 가문의 클로딘과 결혼하였고, 리베라 포르토넬리, 보나 디 로마냐노와는 혼인 관계없이 자녀를 두었다.[3]
3. 1. 첫 번째 혼인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3]3. 2. 두 번째 혼인
브르타뉴의 클로딘 드 브로스와 혼인하여 5남 1녀를 두었다.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카를로 3세 | 1486년 | 1553년 | 필리베르토 2세의 뒤를 이어 사보이아 공작이 됨 |
루이지 | 1488년 | 1502년 | |
필리포 | 1490년 | 1533년 | 느무르 공작, 사부아-느무르 가문의 조상 |
아살로네 | 1494년 | ||
조반니 아메데오 | 1495년 | ||
필리베르타 | 1498년 | 1524년 | 네무르 공작 줄리아노 데 메디치와 혼인 |
3. 3. 사생아
리베라 포르토네리와의 사이에서 3명의 서자를 두었다.- 레나토 디 사보이아 (1468년~1525년 3월 31일) : 니스와 프로방스의 총독을 지냈으며, 안 드 몽모랑시 공작의 장인이었다.[1]
- 안토니에타 디 사보이아 : 장 2세 드 모나코와 혼인[1]
- 피에트로(Pietro) : 제네바의 주교[1]
보나 디 로마냐노와의 사이에서 4명의 서자를 두었다.
- 클라우디나(Claudina) 혹은 클라우디아(Claudia, 1528년 5월 2일 사망) : 호른 가문의 야코프 3세(Jacob III)와 혼인.[1]
- 필리피나(Philippina) 혹은 필리파(Philippa) : 로렌초 데 메디치와 혼인[1]
- 마르게리타(Margherita)[1]
- 조반나(Giovanna)[1]
- 미켈레(Michele) : 성직자[1]
3. 4. 가계도
'''필리포 2세 디 사보이아 공작'''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 루이
- 어머니: 키프로스의 앤
루이의 부모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아메데오 8세
- 어머니: 부르고뉴의 마리
키프로스의 앤의 부모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키프로스의 야누스
- 어머니: 부르봉-라 마르슈의 샤를로트
아메데오 8세의 부모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아메데오 7세, 사보이 백작
- 어머니: 베리의 본
부르고뉴의 마리의 부모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용담공 필리프
- 어머니: 플랑드르의 마르가레트 3세
키프로스의 야누스의 부모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키프로스의 자크 1세
- 어머니: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의 헬비스
부르봉-라 마르슈의 샤를로트의 부모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라 마르슈 백작 장 1세
- 어머니: 방돔의 카트린
수정사항:
- "부르고뉴의 마리"를 "부르고뉴의 마리"로 수정하여 내부 링크를 더 정확하게 만들었습니다.
- 나머지 사항들은 이전 출력과 동일하며, 모든 지시사항을 준수합니다.
4. 평가
필리포 2세는 복잡한 혼인 관계와 상속 분쟁을 통해 권력을 추구한 인물로, 중세 유럽 봉건 귀족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무토지공'이라는 별명은 당시 권력 투쟁의 치열함과 불안정성을 시사한다. 그는 전임 공작 사보이아의 샤를 2세의 삼촌이며, 사보이아의 루이 공작과 키프로스의 안의 막내 아들이었다. 그러나 여러 여성들이 계승 서열에 있었기 때문에 전임 공작의 일반 상속인은 아니었다.[1]
사보이아 가문에 남성 상속을 보장하기 위해 그의 장남 필리베르트는 사망한 어린 공작의 유일한 여동생이자 사촌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소녀가 열두 살에 사망하면서 성공하지 못했다. 필리포의 맏형 사보이아의 아메데오 9세 공작의 딸들의 자녀들이 다음 계승 서열에 있었고, 키프로스와 예루살렘을 포함한 일반 상속인의 계승권을 갖게 되었다. 키프로스와 예루살렘이 여성 계승을 막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포는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고 그 칭호도 사용했다. 사보이아의 그의 남성 후계자들 또한 계속 그렇게 함으로써 공작의 칭호에 더 높은, 왕실의 칭호를 부여했다.[1]
그는 생애 대부분을 공작 가문의 하위 구성원으로 보냈다. 원래 분봉령은 프랑스와 부르고뉴 국경에 가까운 브레스 지역이었지만 잃어버렸고, 그 결과 "땅 없는 자" 또는 "무토지"라는 별명을 얻었다.[1]
참조
[1]
서적
Sabaudian Studies: Political Culture, Dynasty, and Territory (1400–1700)
Truman State University Press
2013
[2]
서적
Francis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3]
서적
Women Rulers Throughout the Ages: An Illustrated Guide
ABC-CLIO
1999
[4]
서적
Franci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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