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호프만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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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호프만은 독일의 사진가로, 아돌프 히틀러의 전속 사진가로 활동하며 나치 선전 활동에 기여했다. 1919년 히틀러를 만나 1920년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1921년 히틀러가 당을 장악한 후 공식 사진 작가로 임명되어 25년 이상 그 직책을 유지했다. 히틀러의 사진을 독점적으로 촬영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1933년에는 사진집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를 출판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처리 재판에서 전쟁 이익을 취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1957년 사망했다. 그의 사진 아카이브는 현재 나치 독일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약탈된 미술품 관련 논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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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호프만 (사진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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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이름 | 하인리히 호프만 |
| 출생일 | 1885년 9월 12일 |
| 출생지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퓌르트 |
| 사망일 | 1957년 12월 16일 |
| 사망지 | 서독 바이에른주 뮌헨 |
| 안장지 | 노르트프리트호프 |
| 직업 | 사진가 |
| 활동 기간 | 1903년–1945년 |
| 알려진 이유 |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사진가 |
| 배우자 | 테레제 바우만(1911년 결혼, 1928년 이혼) 에르나 그뢰브케(1929년 결혼) |
| 자녀 | 2명 (딸 헨리에테 폰 시라흐 포함) |
| 군사 경력 | |
| 소속 | 독일 제국 |
| 군종 | 독일 제국 육군 |
| 복무 기간 | 1917년–1918년 |
| 부대 | Fliegerersatz-Abteilung I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 나치 당 | |
| 소속 정당 | 나치당 |
| 범죄 정보 | |
| 형벌 | 징역 10년, 징역 4년으로 감형 |
| 범죄 상태 | 사망 |
| 유죄 판결 | 전쟁 이득 |
2. 초기 생애
하인리히 호프만은 퓌르트에서 태어나 레겐스부르크에서 성장했다. 그는 사진작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하이델베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바트호름부르크,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일했다. 1909년 뮌헨에 자신의 사진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보도 사진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3]
호프만은 그의 사진 모델이었던 테레제 바우만(Therese „Nelly“ Baumann)과 결혼하여 슬하에 장녀 헨리에테 폰 시라흐와 장남 하인리히를 두었다.[40]
2. 1. 출생과 성장
퓌르트에서 태어나 레겐스부르크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성공한 사진가 로베르트 호프만(Robert Hoffmann, 1860년 출생)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아(Maria)였으며, 옛 성은 카르글(Kargl)이었다.[36] 아버지와 삼촌 하인리히(1862-1928)의 스튜디오에서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사진가 훈련을 받았다.[3]하이델베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바트호름부르크,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1909년까지 일했다. 1909년 뮌헨의 셸링슈트라세에 사진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보도 사진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3] 아버지의 사진관에서 일하며 아버지에게서 사진을 배웠으며,[37][38] 희미하게 갈색으로 빛나는 동판화와 같은 그의 사진은 전위적인 예술가 그룹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1년에는 바이에른 왕가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마르셀 뒤샹 등이 그의 고객이 될 정도로 유명한 사진가가 되었다.[39]
그의 사진 모델이었던 테레제 바우만(Therese „Nelly“ Baumann)과 결혼하여, 슬하에 장녀 헨리에테(헨리에테 폰 시라흐 1913년-1992년)와 장남 하인리히(1916년-)를 두었다.[40] 1915년에는 뮌헨의 막스포어슈타트 지구 셸링 거리에 사진 아틀리에를 열었다.[41]
2. 2. 사진작가 경력
퓌르트에서 태어나 레겐스부르크에서 성장한 호프만은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아버지와 삼촌의 스튜디오에서 사진가 훈련을 받았다.[3] 아버지의 사진관에서 일하며 사진을 배웠으며,[37][38] 희미하게 갈색으로 빛나는 동판화와 같은 그의 사진은 전위적인 예술가 그룹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1909년까지 하이델베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바트호름부르크, 스위스,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일했다. 1909년 뮌헨의 셸링슈트라세에 사진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보도 사진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3] 1911년에는 유명한 사진가가 되었으며, 당시 바이에른 왕가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마르셀 뒤샹 등이 그의 고객이었다.[39] 1913년에는 사진 에이전시인 ''포토베리히트 호프만''을 설립했다.
1915년에는 뮌헨의 막스포어슈타트 지구 셸링 거리에 사진 아틀리에를 열었다.[41] 1917년, 호프만은 징병되어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바이에른 ''플리기에어자츠-아브테일룽 I''에서 사진 통신병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바이에른 군의 종군 카메라맨을 맡았다.[42] 1919년에는 우익 시민 민병대인 바이에른 ''아인워너베렌''에 가입했다. 그해 뮌헨에서 단명했던 전후 바이에른 소비에트 공화국을 목격했으며,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모아 ''아인 야 바이에리셰 레볼루치온 임 빌데''(Ein Jahr Bayrische Revolution im Bilde, "그림으로 보는 바이에른 혁명 1년")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에밀 헤롤트가 쓴 이 책의 텍스트는 사진에 나타난 "유대인의 특징"과 대상의 좌익 정책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했다.[4]
1920년 4월 나치당에 입당했고,[36][44] 1923년부터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을 찍는 것을 허가받았다.[45] 이후 히틀러가 가는 곳 어디든 동행하여 그의 사진을 찍었으며, 호프만이 남긴 사진 수는 250만 장에 달한다고 한다.[44] 1933년 나치당의 권력 장악 후에는 첫 번째 히틀러 사진집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Hitler,wie ihn keiner Kennt)를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후에도 히틀러의 사진집을 잇따라 출판했고,[44][38] 호프만은 막대한 부를 쌓았다.[45]
카메라로는 라이카를 애용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하인리히 호프만은 바이에른 군의 종군 카메라맨을 맡았다.[42] 1917년 징병되어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바이에른 ''플리기에어자츠-아브테일룽 I''에서 사진 통신병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했다.[3]3. 나치당과의 관계
1920년 4월 6일 나치당에 입당한 호프만은[44] 1923년부터 아돌프 히틀러의 전속 사진작가가 되었다.[45] 히틀러가 가는 곳 어디든 동행하며 250만 장 이상의 사진을 남겼다.[44]
1921년 히틀러가 당을 장악한 후, 호프만은 공식 사진 작가로 임명되어 25년 이상 그 직책을 유지했다. 호프만 외에는 히틀러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으며, 호프만 자신도 스냅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 한번은 히틀러의 산장 베르크호프에서 에바 브라운의 테리어와 함께 노는 사진을 찍었는데, 히틀러는 "정치가가 작은 개와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진정한 남자에게는 독일 셰퍼드만이 어울리는 개다"라며 공개를 금지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엄격하게 통제했는데, 새 옷을 입기 전에는 반드시 사진을 찍었고, 1933년에는 레더호젠을 입은 사진을 유통에서 철회하도록 명령했으며, 베니토 무솔리니가 수영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것을 비난하기도 했다.
호프만은 히틀러를 독일 국민의 전형으로 묘사하려 했으나, 히틀러가 게르만족(금발에 키가 큰)의 인종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11] 나치 신질서는 이를 보존하려 했다. 호프만은 몽환적이고 최면적이라고 생각한 히틀러의 눈에 더 집중함으로써 히틀러를 묘사하려 노력했다.[11]
호프만의 사진은 히틀러와 나치당을 대중에게 알리는 선전 캠페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1926년 튀링겐 바이마르 당 집회에서 5,000명의 돌격대원들이 행진하고, 히틀러가 처음으로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은 나치 주요 신문 ''Völkischer Beobachter''에 게재되어 독일 전역에 수천 부가 배포되었다. 이 집회는 뉘른베르크에서 거의 매년 개최되는 당의 연례 대규모 집회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호프만의 저서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1933)는 히틀러의 대중적 이미지 조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히틀러와 호프만은 절친한 친구였으며, 호프만의 절대적인 충성심과 정치적 야망 없음에서 비롯되었다.[3] 앨런 벌록은 호프만을 "술자리와 격렬한 농담을 좋아하는 흙내 나는 바이에른 사람"으로 묘사했고, 히틀러와 함께 "궁정 광대의 자유를 누렸다"고 평했다.[21] 호프만은 자신의 낮은 직급 덕분에 히틀러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12] 1924년 12월 20일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가석방된 히틀러를 마중 나가 사진을 찍었으며, 이후 베르크호프나 뮌헨의 오스테리아 바이에른에서 히틀러와 식사하며 슈바빙 출신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상대로 한 히틀러의 공중 선거 캠페인에 동행했다.
1929년 가을, 호프만 부부는 뮌헨 스튜디오 조수였던 에바 브라운을 히틀러에게 소개했다. 히틀러는 그녀를 "매력적인 작은 여자"라고 생각했고, 브라운은 적극적으로 그를 따랐다. 호프만은 브라운이 겔리 라우발 사망 후 베르크호프에 거주하며 히틀러 곁에 있었지만, 즉시 그의 정부가 되지는 않았다고 보고했다. 1945년 4월 29일 히틀러는 베를린 ''퓌러벙커''에서 브라운과 결혼했고, 다음 날 함께 자살했다.[13]
1931년 9월 17일, 히틀러는 호프만과 함께 뮌헨에서 함부르크로 가던 중 조카 겔리 라우발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호프만은 회고록에서 라우발이 히틀러가 아닌 에밀 모리스와 사랑에 빠졌고, 히틀러의 질투심 많은 통제를 견딜 수 없어 자살했다고 밝혔다.[14]
히틀러가 독일의 독재자가 되면서, 호프만은 그를 공식적으로 사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Reichsbildberichterstatter"(제국 사진 기자)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그의 회사 "Heinrich Hoffmann, Verlag Nationalsozialischer Bilder"(국가 사회주의 사진 출판사)는 언론 기관 국유화 이후 동종 업계 최대 사기업이 되었다. 회사는 편집 사진 공급과 사진 선전 책 출판 두 부서로 나뉘었다. 뮌헨 출신 미하엘 바우어가 회사 매니저였지만, 호프만이 유일한 주주였다. 회사는 확장되어 여러 지사를 열었다.[3] 호프만의 사진은 우표, 엽서, 포스터, 그림책 등으로 출판되어 그를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최대 300명의 직원을 고용한 호프만의 회사[15]는 1935년 100만 라이히스마르크, 1943년에는 1,500만[3] (5800만달러) 라이히스마르크의 매출을 올렸다.[15] 히틀러는 자신의 이미지가 담긴 모든 우표에 대한 로열티를 받았으며, 이는 1937년 설립된 그의 문화 기금으로 들어갔고, 히틀러 통치 기간 동안 최소 7,500만 마르크에 달했다.
호프만은 다른 피사체를 촬영할 때 쇼스탈 사진 에이전시(Agentur Schostal)에 의해 대리되었다.[16]
제3제국 기간 동안 호프만은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1933), ''히틀러 주변의 청소년''(1934) 등 히틀러에 관한 많은 사진집을 냈다. 론 로젠바움은 이를 "히틀러의 이미지를 조작하기 위한 노력의 핵심"이라고 평가했다. 1938년에는 ''이탈리아의 히틀러'',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를 해방시킨다'', ''히틀러, 그의 고향에서'' 세 권의 책을 썼고, 1940년에는 ''서부의 히틀러와 함께''를 출판했다. 이 시기 마지막 책인 ''퓌러의 얼굴''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에 쓰였다. 1936년 입체경 제작자 오토 쇤슈타인의 라움빌트-베르라그를 장악,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 대량 시장 입체(3D) 사진을 사실상 지휘했다.[17]
1933년 호프만은 1933년 권한 위임법 통과 후, 히틀러의 일부 정책 연설 무대 배경으로 사용되는 것 외에는 거의 기능이 없는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31] 나치 독일의 일당제 하에서 "선거"는 퓌러의 후보자 목록을 승인하는 투표 용지에 표시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다른 선택 사항은 제시되거나 허용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1935년에 1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가 그린 7점의 그림으로 구성된 한정판 포트폴리오를 호프만이 발행하도록 허용했다. 이후 히틀러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작품에 대한 출판이나 논평을 금지했다.[32] 또한 1935년, 호프만의 50번째 생일을 맞아 히틀러는 뮌헨의 알테 레지덴츠("구 왕궁")의 안뜰을 그린 자신의 그림 중 하나를 호프만에게 주었는데, 이는 히틀러가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 여러 번 그렸던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였다.[33] 호프만은 히틀러의 수채화를 적어도 4점 이상 소유하게 되었다. 그 그림들은 전쟁이 끝날 때 미군에 의해 압수되었고,[33] 독일로 반환되지 않았다.[34]
1937년, 히틀러는 뮌헨 독일 예술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한 제1회 대독일 미술 전시회에 대한 선택 배심원단의 선택에 분노하여 그 패널을 해고하고 호프만에게 책임을 맡겼다. 프레데릭 스포츠는 ''히틀러와 미학의 힘''에서 호프만을 "평균적인 배관공보다 그림에 대해 아는 것이 더 적은 알코올 중독자이자 백치"라고 묘사한다. 호프만은 히틀러가 무엇을 원하고 그에게 무엇이 어필할지 알고 있다고 답했다. 호프만이 선택한 일부 작품조차 히틀러에 의해 전시회에서 제외되었다. 호프만은 그 후의 연례 대독일 미술 전시회를 계속 담당하면서, 히틀러가 승인하거나 거부할 예비 선택을 했다.[35] 호프만은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뮌헨파 키치"라고 불렀던 북부의 더 실험적인 화가들의 작품보다 남부 독일 화가들의 전통적인 작품을 선호했다.
1938년 5월, 히틀러는 "퇴폐 예술의 산물 압수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1937년 7월 뮌헨에서 열린 "퇴폐 미술" 전시회를 위해 박물관과 갤러리에서 현대 미술을 대가 없이 압수하고, 기관과 개인으로부터 그러한 미술품을 무상으로 추가 제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호프만은 압수 및 심사 과정을 중앙 집권화하도록 임명된 위원 중 한 명이었다. 1년 후, 요제프 괴벨스는 위원회를 자신의 부서로 가져와 압수된 작품의 국제 판매가 나치 정권의 경화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에 더 많은 미술상을 포함하도록 개편했다. 전쟁이 다가오면서 경매가 중단되었을 때, 호프만이 속한 위원회가 예술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12,000점이 넘는 작품이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이것들을 직접 검토하고 압수된 컬렉션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39년 3월 20일 베를린 중앙 소방서 안뜰에서 1,004점의 유화와 3,825점의 기타 작품이 불태워졌다.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 무대 디자이너 벤노 폰 아렌트, 건축가 게르디 트루스트, 박물관장 한스 포세와 함께 호프만은 히틀러가 예술적 판단을 신뢰했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38년에 호프만에게 "교수"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했는데, 이는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와 헤르만 기슬러, 조각가 브레커와 요제프 토락과 같은 예술 분야의 많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랬다.
호프만은 1938년 히틀러의 이탈리아 국빈 방문에 동행했는데, 퓌러는 로마, 나폴리 및 피렌체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예술 작품과 건축물에 매우 감명받았다. 호프만은 1939년 외무부 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비밀리에 불가침 조약을 협상하여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할 수 있도록 한 일행에 있었다. 히틀러는 특히 호프만에게 스탈린의 귓불 사진을 찍어 소련 지도자가 유대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붙어 있는" 귓불은 유대인 혈통을 나타내고, "분리된" 귓불은 아리아인을 나타낸다. 호프만은 필요한 이미지를 찍었고, 히틀러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스탈린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히틀러는 호프만에게 스탈린이 담배를 피우는 사진을 공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스탈린과 같은 지위의 지도자가 그런 식으로 보여지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호프만은 에바 브라운을 소개한 것 외에도, 히틀러에게 화상 마리아 알마스-디트리히를 소개했는데, 그녀는 그 연결을 이용하여 히틀러 자신이 히틀러의 고향 린츠에 계획된 ''퓌러 박물관'' 컬렉션뿐만 아니라 다른 고위 나치와 다양한 독일 박물관에 수백 점의 그림을 판매했다. 1941년 호프만은 네덜란드 점령을 이용하여 네덜란드 상인으로부터 그림 및 기타 예술 작품을 때로는 높은 가격에 구매한 많은 나치 지도자 중 선두 주자였다. 그것은 예술 시장을 끌어올렸고, 이는 히틀러에게 박물관을 위해 컬렉션을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은 한스 포세에게 큰 분노를 안겨주었다. 포세는 히틀러에게 그것을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히틀러는 그 요청을 거절했다.
호프만은 또한 히틀러에게 테오도어 모렐 박사를 그의 습진 치료를 위해 추천한 사람이었다. 나치당원이기도 한 모렐은 히틀러의 개인 의사가 되어 다양한 약물을 사용하여 수많은 불만을 치료했으며, 이는 전쟁 말 히틀러의 저하된 신체 상태에 기여했을 수 있다.
1941년경부터 호프만은 히틀러의 호감을 잃기 시작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히틀러의 개인 비서인 마르틴 보어만이 그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보어만은 점점 더 히틀러에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호프만과 같은 히틀러의 관심을 받기 위한 경쟁자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억측을 그에게 제공했다. 히틀러가 호프만을 싫어한 또 다른 이유는 호프만이 알코올에 점점 더 의존했기 때문이다. 1945년까지 호프만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3. 1. 나치당 입당과 히틀러와의 만남
하인리히 호프만은 1919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고, 1920년 4월 6일 나치당에 입당했다.[36][44] 그는 사진 통신원으로 맥주 홀 폭동에 참여했다. 1923년 나치당이 금지되었지만, 호프만은 잠시 ''Großdeutsche Volksgemeinschaft''에 가입했다가 1925년에 나치당에 다시 가입했다. 이듬해 그는 ''Illustrierter Beobachter''를 공동 창간했다. 1929년 11월, 그는 상부 바이에른 지역 의회에서 나치당을 대표했으며, 1929년 12월부터 1933년 12월까지 뮌헨 시의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에는 나치 독일 국회 의원이 되었다.[44]1921년 히틀러가 당을 장악한 후, 호프만은 공식 사진 작가로 임명되었고, 25년 이상 그 직책을 유지했다. 호프만 외에는 다른 사진 작가는 히틀러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호프만 자신도 스냅 사진을 찍는 것은 금지되었다.
호프만의 사진은 히틀러가 자신과 나치당을 중요한 대중 현상으로 제시하기 위한 선전 캠페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1926년, 호프만이 튀링겐 바이마르에서 열린 당 집회 사진은 5,000명의 돌격대원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히틀러는 처음으로 팔을 쭉 뻗는 "로마식" 또는 파시스트식 경례로 경례했다. 그 사진들은 나치 주요 신문인 ''Völkischer Beobachter''에 게재되었고 독일 전역에 수천 부가 배포되었다. 그 집회는 당의 연례 대규모 집회의 시초가 되었으며, 뉘른베르크에서 거의 매년 개최되었다. 이후 호프만의 저서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1933)는 히틀러가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조작하고 통제하려는 노력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히틀러와 호프만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이는 그의 충성심과 정치적 야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사학자 앨런 벌록은 호프만을 "술자리와 격렬한 농담을 좋아하는 흙내 나는 바이에른 사람"으로 묘사했고, 히틀러와 함께 "궁정 광대의 자유를 누렸다"고 평가했다. 호프만은 1924년 12월 20일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가석방된 히틀러를 만나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간 소규모 일행의 일원이었고, 히틀러의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호프만은 종종 베르크호프 또는 뮌헨에 있는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인 오스테리아 바이에른에서 히틀러와 함께 식사하면서 그와 잡담을 나누고 호프만이 알고 있던 슈바빙 출신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했다. 그는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상대로 한 히틀러의 공중 선거 캠페인에 동행했다.
1929년 가을, 호프만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에르나는 뮌헨 스튜디오 조수였던 에바 브라운을 히틀러에게 소개했다. 호프만에 따르면, 히틀러는 그녀를 "매력적인 작은 여자"라고 생각했고 브라운은 적극적으로 그를 따랐고, 친구들에게 히틀러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과 결혼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3. 2. 히틀러 전속 사진작가
1920년 4월 6일 나치당에 입당한 호프만은[44] 1923년부터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을 찍는 것이 허가되었다.[45] 이후 히틀러가 가는 곳 어디든 동행하여 그의 사진을 찍었으며, 호프만이 남긴 사진 수는 250만 장에 달한다고 한다.[44]1921년 히틀러가 당을 장악한 후, 호프만은 공식 사진 작가로 임명되었고, 25년 이상 그 직책을 유지했다. 호프만 외에 다른 사진작가는 히틀러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호프만 자신도 스냅 사진을 찍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번은 히틀러의 산장인 베르크호프에서 히틀러가 애인 에바 브라운의 테리어와 함께 노는 사진을 찍었는데, 히틀러는 "정치가가 작은 개와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진정한 남자에게는 독일 셰퍼드만이 어울리는 개다"라며 공개를 금지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엄격하게 통제했는데, 호프만에 따르면 새 옷을 입기 전에는 반드시 사진을 찍었고, 1933년에는 레더호젠을 입은 자신의 모든 이미지를 유통에서 철회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베니토 무솔리니가 수영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것을 비난했다.
호프만은 히틀러를 독일 국민의 전형으로 묘사하려 했으나, 히틀러가 게르만족(금발에 키가 큰)의 인종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11] 나치 신질서는 이를 보존하려 했다. 호프만은 몽환적이고 최면적이라고 생각한 히틀러의 눈에 더 집중함으로써 히틀러를 최상의 모습으로 묘사하려 노력했다.[11]
호프만의 사진은 히틀러와 나치당을 대중에게 알리는 선전 캠페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1926년 튀링겐 바이마르에서 열린 당 집회에서 5,000명의 돌격대원들이 행진하고, 히틀러가 처음으로 팔을 뻗는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은 나치 주요 신문 ''Völkischer Beobachter''에 게재되어 독일 전역에 수천 부가 배포되었다. 이 집회는 뉘른베르크에서 거의 매년 개최되는 당의 연례 대규모 집회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호프만의 저서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1933)는 히틀러의 대중적 이미지 조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히틀러와 호프만은 절친한 친구였으며, 이는 호프만의 절대적인 충성심과 정치적 야망 없음에서 비롯되었다.[3] 앨런 벌록은 호프만을 "술자리와 격렬한 농담을 좋아하는 흙내 나는 바이에른 사람"으로 묘사했고, 히틀러와 함께 "궁정 광대의 자유를 누렸다"고 평했다.[21] 호프만은 자신의 낮은 직급 덕분에 히틀러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12] 1924년 12월 20일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가석방된 히틀러를 마중 나가 사진을 찍었으며, 이후 베르크호프나 뮌헨의 오스테리아 바이에른에서 히틀러와 식사하며 슈바빙 출신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상대로 한 히틀러의 공중 선거 캠페인에 동행했다.
1929년 가을, 호프만 부부는 뮌헨 스튜디오 조수였던 에바 브라운을 히틀러에게 소개했다. 히틀러는 그녀를 "매력적인 작은 여자"라고 생각했고, 브라운은 적극적으로 그를 따랐다. 호프만은 브라운이 겔리 라우발 사망 후 베르크호프에 거주하며 히틀러 곁에 있었지만, 즉시 그의 정부가 되지는 않았다고 보고했다. 1945년 4월 29일 히틀러는 베를린 ''퓌러벙커''에서 브라운과 결혼했고, 다음 날 함께 자살했다.[13]
1931년 9월 17일, 히틀러는 호프만과 함께 뮌헨에서 함부르크로 가던 중 조카 겔리 라우발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호프만은 회고록에서 라우발이 히틀러가 아닌 에밀 모리스와 사랑에 빠졌고, 히틀러의 질투심 많은 통제를 견딜 수 없어 자살했다고 밝혔다.[14]
히틀러가 독일의 독재자가 되면서, 호프만은 그를 공식적으로 사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Reichsbildberichterstatter"(제국 사진 기자)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그의 회사 "Heinrich Hoffmann, Verlag Nationalsozialischer Bilder"(국가 사회주의 사진 출판사)는 언론 기관 국유화 이후 동종 업계 최대 사기업이 되었다. 회사는 편집 사진 공급과 사진 선전 책 출판 두 부서로 나뉘었다. 뮌헨 출신 미하엘 바우어가 회사 매니저였지만, 호프만이 유일한 주주였다. 회사는 확장되어 여러 지사를 열었다.[3] 호프만의 사진은 우표, 엽서, 포스터, 그림책 등으로 출판되어 그를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최대 300명의 직원을 고용한 호프만의 회사[15]는 1935년 100만 라이히스마르크, 1943년에는 1,500만[3] (5,80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매출을 올렸다.[15] 히틀러는 자신의 이미지가 담긴 모든 우표에 대한 로열티를 받았으며, 이는 1937년 설립된 그의 문화 기금으로 들어갔고, 히틀러 통치 기간 동안 최소 7,500만 마르크에 달했다.
호프만은 다른 피사체를 촬영할 때 쇼스탈 사진 에이전시(Agentur Schostal)에 의해 대리되었다.[16]
제3제국 기간 동안 호프만은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1933), ''히틀러 주변의 청소년''(1934) 등 히틀러에 관한 많은 사진집을 냈다. 론 로젠바움은 이를 "히틀러의 이미지를 조작하기 위한 노력의 핵심"이라고 평가했다. 1938년에는 ''이탈리아의 히틀러'',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를 해방시킨다'', ''히틀러, 그의 고향에서'' 세 권의 책을 썼고, 1940년에는 ''서부의 히틀러와 함께''를 출판했다. 이 시기 마지막 책인 ''퓌러의 얼굴''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에 쓰였다. 1936년 입체경 제작자 오토 쇤슈타인의 라움빌트-베르라그를 장악,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 대량 시장 입체(3D) 사진을 사실상 지휘했다.[17]
나치당의 권력 장악 후 1933년, 호프만은 첫 히틀러 사진집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를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후에도 히틀러 사진집을 잇따라 출판하여[44][38] 막대한 부를 쌓았다.[45]
3. 3. 오데온스플라츠 사진 논란

호프만이 1914년 8월 2일 뮌헨의 오데온스플라츠에서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진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을 환호하는 군중 속에 있던 젊은 히틀러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은 후에 나치 선전에 사용되었지만, 그 진위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5]
호프만은 1929년 나치 지도자가 사진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후에야 사진 속에서 히틀러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호프만이 오데온스플라츠에서 군중을 촬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히틀러는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고 말했고, 호프만은 그 후 사진의 유리 원판을 뒤져 히틀러를 찾아냈다고 말했다. 이 사진은 1932년 3월 12일 나치 신문인 ''일러스트리어터 베오바흐터''(Illustrated Observer)에 게재되었다. 전쟁 후, 유리 원판은 발견되지 않았다.[6] 비슷한 각도에서 촬영된 이 행사의 영상에서도 히틀러의 모습이 발견되었다고 주장되었지만,[7] 전쟁 전에는 그가 칫솔 수염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8][9]
2010년,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독일 전문가인 역사학자 Gerd Krumeich|게르트 크루마이히de는 호프만이 이 사진을 사진 조작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크루마이히는 집회의 다른 이미지를 검토했지만, 호프만의 사진에서 히틀러가 있는 위치에서 히틀러를 찾을 수 없었다. 또한, 바이에른 주립 기록 보관소에 있는 호프만의 사진의 다른 버전에서, 히틀러는 출판된 이미지와는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이러한 고려 사항으로 인해 제기된 의문점의 결과로, 히틀러의 영향력에 대한 2010년 베를린 전시회의 큐레이터들은 이미지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공지를 삽입했다.[10]
4. 히틀러 정권 시기 활동
제1차 세계 대전에 바이에른 군의 종군 카메라맨으로 참전했던 호프만은 전쟁 후 우익 단체에 가입했다. 1919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친분을 쌓았고, 히틀러는 호프만의 집을 자주 방문하며 "두 번째 우리 집"이라고 부를 정도로 좋아했다.[43] 1929년 호프만의 사진 스튜디오에서 일하던 에바 브라운이 히틀러와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37][38]
1920년 4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한 호프만은[36][44] 1923년부터 히틀러의 사진을 찍도록 허가받았다.[45] 이후 히틀러를 따라다니며 250만 장에 달하는 사진을 찍었다.[44]
1932년 호프만의 장녀 헨리에테가 나치당 전국 청소년 지도자 발두어 폰 시라흐와 결혼했다.[46] 1933년 나치당의 권력 장악 후, 호프만은 히틀러 사진집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Hitler,wie ihn keiner Kennt)를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후에도 히틀러 사진집을 출판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44][38] 1940년 1월에는 국회 의원이 되었다.[44]
4. 1. 나치 선전 활동
하인리히 호프만은 1919년 히틀러를 만났고, 1920년 4월 6일 나치당에 입당했다.[36][44] 그는 사진 통신원으로 맥주 홀 폭동에 참여했다. 나치당이 1923년에 금지되었지만, 호프만은 잠시 동안 'Großdeutsche Volksgemeinschaft'에 가입했다가 1925년에 다시 나치당에 재가입했다. 이듬해 그는 ''Illustrierter Beobachter''를 공동 창간했다. 1929년 11월, 그는 상부 바이에른 지역 의회에서 나치당을 대표했으며, 1929년 12월부터 1933년 12월까지 뮌헨 시의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호프만은 나치 독일 국회 의원이 되었다.히틀러가 1921년에 당을 장악한 후, 호프만을 공식 사진 작가로 임명했고, 그는 25년 이상 그 직책을 유지했다. 호프만 외에는 다른 사진 작가는 히틀러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11] 호프만의 사진은 히틀러가 자신과 나치당을 중요한 대중 현상으로 제시하기 위한 선전 캠페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1926년, 호프만이 튀링겐의 바이마르에서 열린 당 집회 사진은 5,000명의 돌격대원들이 인상적으로 행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히틀러는 처음으로 팔을 쭉 뻗는 "로마식" 또는 파시스트식 경례로 경례했다. 그 사진들은 나치 주요 신문인 ''Völkischer Beobachter''에 게재되었고 독일 전역에 수천 부가 배포되었다. 그 집회는 당의 연례 대규모 집회의 시초가 되었으며, 이는 뉘른베르크에서 거의 매년 개최되었다. 이후 호프만의 저서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1933)는 히틀러가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조작하고 통제하려는 부단한 노력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1932년 3월 31일, 장녀 헨리에테가 나치당 전국 청소년 지도자 발두어 폰 시라흐와 결혼했다.[46] 나치당의 권력 장악 후인 1933년에는 첫 번째 히틀러 사진집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Hitler,wie ihn keiner Kennt)를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후에도 히틀러의 사진집을 잇따라 출판했고,[44][38] 호프만은 막대한 부를 쌓았다.[45]
호프만이 히틀러를 독일 국민의 전형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히틀러가 게르만족의 인종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웠는데, 이는 나치 신질서가 보존하려던 것이었다.[11] 호프만은 많은 사람들이 몽환적이고 최면적이라고 생각한 히틀러의 눈에 더 집중함으로써 히틀러를 최상의 모습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했다.[11]
히틀러가 독일의 독재자가 되었을 때, 호프만은 그를 공식적으로 사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Reichsbildberichterstatter"(제국 사진 기자)라는 칭호를 채택했고, 그의 회사인 "Heinrich Hoffmann, Verlag Nationalsozialischer Bilder"(국가 사회주의 사진 출판사)는 동종 업계에서 가장 큰 사기업이 되었다.[3] 호프만의 사진은 우표, 엽서, 포스터 및 그림책으로 출판되어 그를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최고 300명의 직원을 고용했던 호프만의 회사[15]는 1935년에 10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매출을 올렸고, 1943년에는 1,500만[3] 또는 5,80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매출을 올렸다.[15] 히틀러는 자신의 이미지가 담긴 모든 우표에 대한 로열티를 받았고, 이는 1937년에 설립된 그의 문화 기금으로 들어갔다. 이는 히틀러 통치 기간 동안 최소 7,500만 마르크에 달했다.
제3제국 기간 동안 호프만은 히틀러에 관한 많은 사진책을 모았는데, 예를 들어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1933)와 1934년의 ''히틀러 주변의 청소년''이 있었다. 1938년 호프만은 ''이탈리아의 히틀러'',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를 해방시킨다''(Hitler befreit Sudetenland) 및 ''히틀러, 그의 고향에서''(Hitler in seiner Heimat) 세 권의 책을 썼다. 그의 ''서부의 히틀러와 함께''(Mit Hitler im Westen)는 1940년에 출판되었다. 이 시기의 마지막 책인 ''퓌러의 얼굴''(Das Antlitz des Führers)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쓰여졌다.
1937년, 히틀러는 뮌헨 독일 예술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한 제1회 대독일 미술 전시회에 대한 선택 배심원단의 선택에 분노하여 그 패널을 해고하고 호프만에게 책임을 맡겼다. 호프만은 그 후의 연례 대독일 미술 전시회를 계속 담당하면서, 히틀러가 승인하거나 거부할 예비 선택을 했다.
1938년 5월, 히틀러는 "퇴폐 예술의 산물 압수 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1937년 7월 뮌헨에서 열린 "퇴폐 미술" 전시회를 위해 박물관과 갤러리에서 현대 미술을 대가 없이 압수하고, 기관과 개인으로부터 그러한 미술품을 무상으로 추가 제거할 수 있도록 소급 적용되었다. 호프만은 압수 및 심사 과정을 중앙 집권화하도록 임명된 위원 중 한 명이었다. 1년 후, 요제프 괴벨스는 위원회를 자신의 부서로 가져와 압수된 작품의 국제 판매가 나치 정권의 경화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에 더 많은 미술상을 포함하도록 개편했다.
4. 2.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 출판
나치당의 권력 장악 후인 1933년, 호프만은 첫 번째 히틀러 사진집인 Hitler, wie ihn keiner Kennt|아무도 모르는 히틀러de를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44][38] 그 후에도 히틀러의 사진집을 잇따라 출판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45]4. 3. 국회의원 활동
1919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고, 1920년 4월 6일 나치당에 입당했다.[36][44] 그는 사진 통신원으로 맥주 홀 폭동에 참여했다. 나치당이 1923년에 금지되었지만, 호프만은 잠시 동안의 ''Großdeutsche Volksgemeinschaft''에 가입했다가 1925년에 다시 나치당에 재가입했다. 이듬해 그는 ''Illustrierter Beobachter''를 공동 창간했다. 1929년 11월, 그는 상부 바이에른 지역 의회에서 나치당을 대표했으며, 1929년 12월부터 1933년 12월까지 뮌헨 시의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1933년 권한 위임법이 통과된 후, 히틀러의 일부 정책 연설을 위한 무대 배경으로 사용되는 것 외에는 거의 기능이 없는 무력한 실체가 된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나치 독일의 일당제 하에서 "선거"는 퓌러의 후보자 목록을 승인하는 투표 용지에 표시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다른 선택 사항은 제시되거나 허용되지 않았다. 1940년 1월에는 국회 의원이 되었다.[44]4. 4. 히틀러와의 관계
하인리히 호프만은 1919년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고, 1920년 4월 6일 나치당에 입당했다.[36][44] 1923년부터 히틀러의 사진을 찍는 것이 허가되었다.[45] 이후 히틀러가 가는 곳 어디든 동행하여 그의 사진을 찍었다. 호프만이 남긴 사진 수는 250만 장에 달한다고 한다.[44] 히틀러가 1921년에 당을 장악한 후, 호프만을 공식 사진 작가로 임명했고, 그는 25년 이상 그 직책을 유지했다. 호프만 외에는 다른 사진 작가는 히틀러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호프만의 사진은 히틀러가 자신과 나치당을 중요한 대중 현상으로 제시하기 위한 선전 캠페인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후 호프만의 저서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 (1933)는 히틀러가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조작하고 통제하려는 부단한 노력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히틀러와 호프만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역사학자 앨런 벌록은 호프만을 "술자리와 격렬한 농담을 좋아하는 흙내 나는 바이에른 사람"으로 간결하게 묘사했고, 히틀러와 함께 "궁정 광대의 자유를 누렸다"고 평가했다. 호프만은 1924년 12월 20일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가석방된 히틀러를 만나기 위해 그를 만나러 간 소규모 일행의 일원이었고, 히틀러의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호프만은 종종 히틀러와 함께 식사하면서 그와 잡담을 나누고 호프만이 알고 있던 슈바빙 출신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했다.
1929년 가을, 호프만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에르나는 뮌헨 스튜디오 조수였던 에바 브라운을 히틀러에게 소개했다.[37][38] 히틀러는 그녀를 "매력적인 작은 여자"라고 생각했고 브라운은 적극적으로 그를 따랐고, 친구들에게 히틀러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과 결혼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1931년 9월 17일, 히틀러는 호프만과 함께 뮌헨에서 함부르크로 여행하던 중 퓌러는 그가 숭배했고 거의 모든 사교 행사에 동행했던 조카 겔리 라우발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호프만은 회고록 ''히틀러는 나의 친구였다''에서 라우발이 히틀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했고, 히틀러의 광적인 질투심 많은 통제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자살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히틀러가 독일의 독재자가 되었을 때, 호프만은 그를 공식적으로 사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호프만의 사진은 우표, 엽서, 포스터 및 그림책으로 출판되어 그를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제3제국 기간 동안 호프만은 히틀러에 관한 많은 사진책을 모았는데, 예를 들어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1933)와 1934년의 ''히틀러 주변의 청소년''이 있었다.
4. 5. 재산 축적
히틀러가 독일의 독재자가 되었을 때, 호프만은 그를 공식적으로 사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3] 그는 "Reichsbildberichterstatter"(제국 사진 기자)라는 칭호를 채택했고, 그의 회사인 "Heinrich Hoffmann, Verlag Nationalsozialischer Bilder"(국가 사회주의 사진 출판사)는 기존의 언론 기관이 국유화된 후 동종 업계에서 가장 큰 사기업이 되었다. 이 회사는 편집 사진을 공급하는 부서와 사진 선전 책을 출판하는 부서로 나뉘었다. 회사의 매니저는 뮌헨 출신의 미하엘 바우어(1883년생)였지만 호프만이 유일한 주주였다. 회사는 꾸준히 확장되어 여러 지사를 열었다.[3] 호프만의 사진은 우표, 엽서, 포스터 및 그림책으로 출판되어 그를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최고 300명의 직원을 고용했던 호프만의 회사[15]는 1935년에 10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매출을 올렸고, 1943년에는 1,500만[3] 또는 5,80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매출을 올렸다.[15] 히틀러는 자신의 이미지가 담긴 모든 우표에 대한 로열티를 받았는데, 이는 1937년에 설립된 그의 문화 기금으로 들어갔으며, 히틀러 통치 기간 동안 최소 7,500만 마르크에 달했다.[11]
제3제국 기간 동안 호프만은 히틀러에 관한 많은 사진책을 펴냈다. 예를 들어 1933년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와 1934년 ''히틀러 주변의 청소년''이 있었다. 1938년에는 ''이탈리아의 히틀러'',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를 해방시킨다''(Hitler befreit Sudetenland), ''히틀러, 그의 고향에서''(Hitler in seiner Heimat) 세 권의 책을 썼다. 1940년에는 ''서부의 히틀러와 함께''(Mit Hitler im Westen)를 출판했고, 이 시기의 마지막 책인 ''퓌러의 얼굴''(Das Antlitz des Führers)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쓰여졌다. 1936년, 호프만은 입체경 제작자 오토 쇤슈타인의 출판사인 라움빌트-베르라그를 장악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에서 모든 대량 시장 입체(3D) 사진을 사실상 지휘하게 되었다.[17]
1933년, 호프만은 첫 번째 히틀러 사진집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Hitler,wie ihn keiner Kennt)를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후에도 히틀러의 사진집을 잇따라 출판했고,[44][38] 호프만은 막대한 부를 쌓았다.[45]
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호프만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5월 10일 미군에 체포되어 전쟁 이익을 취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2] 1947년 1월 뮌헨 재판소에서 "주요 범죄자"로 분류되어 징역 10년형과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베르너 프리드만은 그를 "히틀러의 재앙에 가장 탐욕스러운 기생충" 중 하나라고 불렀다.[2] 항소심에서 호프만은 제3제국 내 공식 직책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형량이 4년으로 감형되었다.[3]
1950년 5월 31일 석방 후, 바이에른 남부 에프파흐에 정착했다. 1954년에는 저널리스트 Joe Heydecker|조 하이데커de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10부작 자서전 시리즈 "호프만의 이야기"가 "Münchner Illustrierte"에 게재되었고, 이후 2008년에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다. 1955년 회고록 ''히틀러는 나의 친구였다''를 출판했다.[3] 1956년 바이에른 주는 호프만이 소유했던 모든 예술품을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미망인 에르나는 전 무성 영화 배우인 베라 엥겔스와 함께 그곳에서 계속 살았다.
그는 1957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5]
5. 1. 체포와 재판
하인리히 호프만은 1945년 5월 10일 미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전쟁 이익을 취한 혐의로 전후 재판을 받았다.[2] 1947년 1월 뮌헨 재판소에서 "주요 범죄자"로 분류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그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다. 베르너 프리드만은 그를 "히틀러의 재앙에 가장 탐욕스러운 기생충" 중 하나라고 불렀다.[2] 항소심에서 호프만은 제3제국 내에서 공식적인 직책이 없었던 점을 고려하여 형량이 4년으로 감형되었다.[3]호프만은 OSS(미국 전략사무국) 예술 약탈 조사반 보고서 1945–46에 상세 정보 보고서 DIR N°1로 그의 이름이 실렸다.[23][24]
1950년 5월 31일, 호프만은 석방되었고 그의 자산 일부가 반환되었다.[3] 1956년 바이에른 주는 호프만이 소유했던 모든 예술품을 그에게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5. 2. 회고록 출판
호프만은 1955년 런던에서 회고록 ''히틀러는 나의 친구였다''를 출판했다.[3] 1954년에는 저널리스트 Joe Heydecker|조 하이데커de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10부작 자서전 시리즈 "호프만의 이야기"가 "Münchner Illustrierte"에 게재되었고, 이후 2008년에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다.5. 3. 사망
호프만은 1945년 5월 10일 미군에 체포되어 전쟁 이익을 취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2] 1947년 1월 뮌헨 재판소에서 "주요 범죄자"로 분류되어 징역 10년형과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2] 베르너 프리드만은 그를 "히틀러의 재앙에 가장 탐욕스러운 기생충" 중 하나라고 불렀다.[2] 항소심에서 호프만은 제3제국 내 공식 직책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형량이 4년으로 감형되었다.[3]1950년 5월 31일 석방 후, 바이에른 남부 에프파흐에 정착했다.[3] 1955년 회고록 ''히틀러는 나의 친구였다''를 출판했다.[3] 1956년 바이에른 주는 호프만이 소유했던 모든 예술품을 반환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1957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5]
6. 유산
하인리히 호프만의 사진 및 예술 작품 관련 유산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논란과 법적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나치에 의해 약탈된 미술품 반환 문제가 있었다.[32]
6. 1. 사진 아카이브
하인리히 호프만 회사의 주요 이미지 아카이브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미 육군에 의해 압수되었다. 당시 아카이브는 약 50만 장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3]1950년, 아카이브 대부분은 미 육군 역사 부서에 의해 미국으로 옮겨졌고, 이후 미 국립 문서 기록 관리청으로 이관되었다. 28만 장 규모의 이 이미지 컬렉션은 나치 독일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 사진들은 압수된 나치 재산으로 간주되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에 속하며, 그렇지 않았다면 저작권은 2028년 1월 1일에 만료될 예정이었다.[29] 이 사진들은 이후 ''Price v. United States'' 소송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29]
사진 아카이브의 일부는 호프만 가문에 남았다. 호프만의 아들 하인리히 주니어는 자신이 설립한 "Contemporary Image Archive"를 통해 일부 사진을 판매했다. 나머지 컬렉션은 1993년 뮌헨의 바이에른 주립 도서관(Bayerische Staatsbibliothek)에 판매되었다.[3][30]
그 외에도 Getty Images, 비엔나의 오스트리아 저항 아카이브, 뉘른베르크의 독일 국립 박물관, 슈투트가르트의 "현대사 도서관", 베를린의 독일 역사 박물관, 독일 연방 기록 보관소 등에서 소규모 컬렉션을 관리하고 있다.[3]
6. 2. 논란
나치에 의해 박해받은 유대인 수집가들로부터 약탈된 많은 미술 작품들이 호프만을 거쳐갔다. 이러한 약탈된 미술품의 반환 요구에 저항이 있었다.[32] 2020년, 수년간의 협상 끝에 얀 반 데르 헤이덴의 그림 《네덜란드 광장의 풍경》이 1938년 3월 비엔나를 탈출한 고틀리프와 마틸데 크라우스의 상속자들에게 반환되었다. 호프만은 나치 정권 하에서 그것을 선물로 받았다. 전쟁 후 바이에른은 이 작품을 크라우스 가문에 반환하려 하지 않고, 1962년에 호프만의 딸인 헨리에테 호프만-폰 쉬라흐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했다.[33][34][35]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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