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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케야마 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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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타케야마 유코는 1865년 지바현 가모가와시에서 태어난 여성으로, 오쓰 사건 당시 자결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가세가 기울어진 농가에서 태어나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7세에 결혼했으나 이혼 후 도쿄에서 하녀로 일했다. 정치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신문을 탐독하며 괴짜로 여겨지던 중, 오쓰 사건을 국가적 위기로 인식하고 러시아 황태자의 귀국을 막기 위해 백부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교토부청에 탄원서를 투척하고 자결했으며, 향년 27세였다. 그녀는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로 국가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죄의 뜻을 담아 자결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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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케야마 유코
인물 정보
씨명하타케야마 유코
후리가나하타케야마 유코
출생일1865년 12월
출생지아와 국나가사 군 요코스카
사망일1891년 5월 20일 (만 25세)
사망지일본 교토 부교토 시
사인자살
묘지말경사
부모하타케야마 지헤이

2. 생애

1865년, 지바현 가모가와시 요코스카에서 하타케야마 지헤이의 장녀로 태어났다.[1] 하타케야마 가문은 요코스카의 농가였으나, 메이지 유신 때 재산을 털어 가세가 기울었다. 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7세에 결혼했으나 남편의 품행 문제로 23세에 이혼했다.

도쿄로 상경하여 화족의 저택, 은행가 등에서 하녀로 일하다 백부의 도움으로 주오구 무로마치의 생선 도매상에서 일했다. 아버지와 백부의 영향으로 정치와 역사에 관심을 가졌으며, 정치색 강한 신문을 탐독하여 주변에서 괴짜로 여겨졌다. 오쓰 사건이 발생하자 국가의 위기를 걱정하며 몹시 한탄했지만, 주변에서는 "또 언제나 하던 버릇이 시작되었네"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2. 1. 오쓰 사건과 자결

1891년 5월 11일, 방일 중이던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경호를 맡았던 쓰다 산조에게 습격당하는 오쓰 사건이 발생했다.[1] 이 사건은 러시아 측 수행원이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풍경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자, 태자가 "언젠가 여기도 내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러시아어 학자이기도 했던 쓰다가 격분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 사건으로 일본 전체가 소란스러워진 가운데, 러시아 황태자가 본국의 명령으로 급히 고베항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이 소식을 들은 유코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시타야(下谷)의 백부 에노모토 로쿠베의 집으로 찾아가 "이대로 돌아가시면, 일부러 교토까지 가서 사죄한 천황 폐하의 면목이 서지 않습니다"라고 설득했다.[1] 그러나 백부는 일개 평민 여성이 국가의 대사를 걱정해도 소용없다고 훈계했다.

결국 유코는 교토로 가 여러 사찰을 방문한 후, 5월 20일 오후 7시경 "로국 어관료 님", "일본 정부 님", "정부 어중 님"이라고 쓰인 탄원서를 교토부청에 투척하고 자결을 시도했다.[1]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27세였다.

당시 일본은 극동의 약소국이었고, 유코는 이 사건을 구실로 대국 러시아에 선전 포고라도 당하면 국가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사죄의 뜻을 담아 자결한 것으로 보인다. 백부, 어머니, 동생 등에게 총 10통의 유서를 남겼다.

3. 사후

하타케야마 유코의 죽음은 "열녀 유코"로 칭송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성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1]

유코의 묘는 교토시 시모교구 만주지 구시타케 우에루의 맛케이사에 있다. 라프카디오 헌(고이즈미 야쿠모)과 포르투갈 영사 모라에스가 묘를 방문했다. 모라에스는 리스본의 잡지 '세로에스'에 유코를 소개했다.

가모가와시 요코스카의 간논지에는 유코의 분골과 현창비가 세워졌다.[2] 간논지에는 유코의 첫 번째 명절을 축하했을 때의 히나 인형이 봉납되었다.[2]

유코의 죽음은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보낸 유서와 신문의 보도로 국제 사회의 동정을 샀고, 러시아 측의 관대한 태도(무력 보복 및 배상 청구 없음)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요코미쓰 리이치는 '다리를 건너는 불 하타케야마 유코의 이야기'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참조

[1] 서적 護法の神 児島惟謙 https://dl.ndl.go.jp[...] 修文館
[2] 뉴스 大津事件で自刃 畠山勇子のひな人形展示へ http://www.bonichi.c[...] 2010-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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