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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이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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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구치 이치요는 1872년에 태어나 1896년에 사망한 일본의 소설가이다. 그는 메이지 시대의 여성 작가로, 24년의 짧은 생애 동안 근대 문학사에 남을 작품들을 남겼다. 히구치 이치요는 가난과 여성의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하며, 특히 말년 14개월 동안 '기적의 14개월'로 불릴 만큼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주요 작품으로는 <키재기>, <섣달 그믐날>, <흐린 강> 등이 있으며, 2004년부터 일본 5000엔 지폐에 그의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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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이치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히구치 이치요 사진
히구치 이치요 (山梨県立文学館蔵)
본명히구치 나쓰 (戸籍명)
출생일1872년 5월 2일
출생지일본 제국 도쿄부 제2대구 1소구 우치야마시타초 1초메 1번지 (현재의 東京都 千代田区内幸町)
사망일1896년 11월 23일
사망지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혼고구 마루야마 후쿠야마초 4번지 (현재의 文京区西片 1초메)
묘소築地本願寺 和田堀廟所
직업소설가
언어일본어
활동
활동 기간1891년 - 1896년
장르소설
사조擬古典主義
낭만주의
주요 작품
주요 작품'큰 해넘이' (1894년)
'가는 구름' (1895년)
'매미 허물' (1895년)
'탁류' (1895년)
'13번째 밤' (1895년)
'키재기' (1895년 - 1896년)
'わかれ道(갈림길)' (1896년)
영향
영향 받은 작품古今和歌集
源氏物語
伊勢物語
徒然草
영향 받은 인물가토 치카게
왕조 문학
타키자와 바킨
이하라 사이카쿠
코다 로한
나카지마 우타코
나카라이 도스이
다나베 카호
소공녀
죄와 벌
영향을 준 인물카부라기 키요카타
쿠보타 만타로
키쿠치 칸
카와카미 미에코
기타 정보
웹사이트台東区立一葉記念館(樋口一葉)

2. 생애

1872년 메이지 5년에 히구치 노리요시(樋口則義)의 2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883년 세이카이 소학교(私立青海学校) 고등과 제4급(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더 이상 학업을 잇지 못했다.[51] 이후 바느질을 배우며 집안일을 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1886년 나카지마 우타코가 운영하는 와카 사설 기관 하기노야(萩の舎)에 들어갔다. 당시 하기노야는 황족, 화족 등 높은 신분의 여성이 많이 다녔기 때문에 신분이 낮은 이치요는 옷차림 때문에 고민하기도 했다.[51]

1887년 오빠가 결핵으로 사망하며 17세에 호주가 되었다. 1889년에는 아버지마저 사업 실패 후 사망하고, 경제적인 이유로 약혼자와 파혼했다. 이듬해 어머니와 오빠의 불화로 집을 나와 혼고로 이사했고, 생계를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891년 4월 14일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작가였던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에게 문학을 배웠고, 1892년 3월 나카라이가 발간한 잡지 《무사시노》 창간호에 첫 작품 〈어둠 속의 벚꽃〉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치요와 나카라이의 관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 때문에 둘은 결별했다.[51] 이후 고다 로한의 〈풍류불〉에 영향을 받은 〈매목〉(1893)으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같은 해 요시와라 유곽 근처로 이사해 가게를 열었지만, 이듬해 문을 닫았다.

이치요는 생활고 속에서도 《문학계》 등에 〈섣달 그믐날〉(1894), 〈키재기〉(1895~96), 〈탁류〉(1895) 등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1896년 〈키재기〉가 모리 오가이 등에게 호평을 받았지만, 같은 해 결핵 진단을 받고 24세로 요절했다.

2. 1. 출생과 소녀 시절 (1872-1886)

1872년 메이지 5년, 히구치 노리요시(樋口則義)의 2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공식 문서에는 히구치 나츠코(樋口夏子)로 기록되어 있으며,[2] 樋口 奈津|히구치 나츠일본어라고 스스로 부르기도 했다.[2] 아버지는 하급 관리였던 히구치 노리요시이고, 어머니는 다키(多喜)이다.[12][11]

어릴 적부터 영특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책 읽기를 즐겼다.[13] 1883년 세이카이 소학교(私立青海学校) 고등과 제4급(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어머니 다키는 여자에게 학업이 더는 필요 없다고 판단하여 학업을 중단시켰다.[51]

2. 2. '하기노야' 입문과 문학 수업 (1886-1891)

1886년, 아버지의 권유로 나카지마 우타코가 운영하는 와카(和歌) 사설 학원 '하기노야(萩の舎)'에 입문하여 와카와 일본 고전 문학을 배웠다.[51] 하기노야는 황족, 화족 등 상류층 여성이 많이 다니는 곳이었기에, 이치요는 신분 차이로 인한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51]

하기노야에서 가르치는 시는 헤이안 시대의 보수적인 궁정 시인들의 것이었다. 이치요는 매주 시 수업과 일본 문학 강의를 들었으며, 매달 열리는 시 낭송회에도 참여했다.

이치요는 하기노야에서 '평민 3인조'라고 불리던 이토 나츠코(伊東夏子)와 타나카 미코(田中みの子)와 친하게 지냈다. 입문 이듬해 2월에 열리는 신년 행사 발회(発会)에서 이치요는 최고점을 받기도 했다.

사사키 신쓰나는 회고록에서 하기노야 가가회(歌会)에서 이치요가 경점(競点)의 가가 모음이나 당일의 가가합(歌合) 권의 청서 등을 하고, 낭독이 시작될 무렵 자리에 나왔다고 회고했다.[14][15]

타나베 카푸(田辺花圃)는 자서전에서 하기노야 월례회에서 이치요를 처음 만났을 때, 이치요가 하녀와 내제자를 겸한 일하는 사람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후 두 사람은 하기노야의 두 재원(二才媛)이라고 불렸다.[16] 이치요는 주변과의 격차로 인해 점차 내성적이 되어 ‘말없는 사람(ものつつみの君)’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 3. 가족의 죽음과 생활고 (1887-1891)

1887년 오빠 센타로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1889년에는 아버지마저 사업 실패 후 사망하면서 이치요는 17세의 나이로 가장이 되었다.[51] 아버지의 사업 투자가 실패하면서 재정 상태는 매우 어려워졌다. 이치요는 경제적인 이유로 약혼자 시부야 사부로(渋谷三郎, 훗날 검사, 판사, 아키타현 지사를 역임)와 파혼했다.[51] 이듬해 어머니와 오빠의 불화로 이치요는 어머니, 여동생 구니코(Kuniko)와 함께 오빠의 집을 나와 도쿄도 혼고 지역으로 이사하여 재봉과 세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51]

2. 4. 소설가의 길 (1891-1896)

1891년 4월 14일 노노미야 기쿠코의 소개로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작가였던 나카라이 도스이(半井桃水)를 만나 문학을 배웠다.[51] 1892년 3월 나카라이가 발행한 잡지 《무사시노》 창간호에 첫 작품 〈어둠 속의 벚꽃(闇桜)〉을 발표했다.[51] 그러나 이치요와 나카라이가 모두 독신이었기 때문에 이치요가 나카라이의 집을 드나드는 것을 두고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 이치요는 나카라이와 연을 끊었다.[51]

이후 고다 로한의 〈풍류불〉에 영향을 받아 예술에 대한 도공의 정열을 사실적 문체로 묘사한 〈매목〉(1893)으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같은 해 요시와라 유곽 근처로 이사해 가게를 열었지만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이듬해 문을 닫았다. 이치요는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계속 글을 썼고, 《문학계》 등에 〈섣달 그믐날〉(1894), 〈키재기〉(1895~96), 〈탁류〉(1895) 같은 서정성 넘치는 작품을 발표하여 복고적 시대 풍조 속에서 주목받았다. 1896년 발표한 〈키재기〉가 모리 오가이 등에게 호평을 받으며 작가로 인정받았다.[51]

2. 5. '기적의 14개월'과 요절 (1894-1896)

1894년부터 1896년까지 히구치 이치요는 〈키 재기〉, 〈섣달 그믐날〉, 〈흐린 강〉 등 대표작을 연이어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시기는 '기적의 14개월'이라고 불린다.[51] 1896년에 발표한 〈키 재기〉는 모리 오가이 등에게 호평을 받으며 작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51]

히구치 이치요의 성숙기(1894~1896년) 작품들은 요시와라 유곽 근처에서의 생활 경험, 여성의 고통에 대한 더 큰 관심, 그리고 17세기 작가 이하라 사이카쿠의 영향을 받았다. 이하라 사이카쿠는 하층민을 문학적 주제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히구치 이치요는 여기에 고통과 감수성에 대한 특별한 인식을 더했다. 이 시기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섣달 그믐날〉, 〈흐린 강〉, 〈13야〉, 〈키 재기〉, 〈갈림길〉 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로 히구치 이치요의 명성은 도쿄 문단 전체에 퍼져나갔다. 그녀는 전통적인 스타일로 칭찬을 받았고, 과거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메이지 시대의 마지막 여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잦은 두통과 결핵으로 인해 글쓰기를 중단해야 했다.[51] 1896년 11월 23일, 히구치 이치요는 2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1] 그녀의 작가 생활은 14개월에 불과했지만, 근대 문학사에 길이 남을 많은 작품을 남겼다.

히구치 이치요가 사망한 후, 모리 오가이는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요절을 애석하게 여겨 육군 일등군의로서 정장을 하고 기마로 관에 따르는 조문을 제안했지만, 유족에게 거절당했다.

3. 주요 작품

히구치 이치요는 21편의 단편 소설, 약 4,000편의 시 (산문에 비해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짐), 수많은 수필, 그리고 여러 권으로 된 일기를 남겼다.[18]

3. 1. 소설

발표 연도작품명(원제)작품명(한국어 번역)
1892년闇桜|야미자쿠라일본어어둠 속의 벚꽃
1892년別れ霜|와카레지모일본어이별 서리
1892년玉襷|타마다스키일본어보석 띠
1892년五月雨|사미다레일본어초여름 비/5월의 비
1892년経づくえ|쿄즈쿠에일본어경전 필사
1892년うもれ木|우모레기일본어묻힌 나무
1893년暁月夜|아카츠키즈쿠요일본어새벽 달밤
1893년雪の日|유키노히일본어눈 오는 날
1893년琴の音|코토노네일본어거문고 소리
1894년花ごもり|하나고모리일본어꽃 속에 갇힘
1894년{{lang어두운 밤
1894년{{lang섣달 그믐날
1895년{{lang키 재기
1895년軒もる月|노키모루츠키일본어처마 넘는 달
1895년ゆく雲|유쿠쿠모일본어가는 구름
1895년うつせみ|우츠세미일본어헛귀뚜라미
1895년{{lang흐린 강
1895년{{lang열세 밤
1896년この子|코노코일본어이 아이
1896년わかれ道|와카레미치일본어갈림길

[18]

3. 2. 수필


  • 〈빗밤 ― 잡담〉 (1895년 9월, 요미우리신문)[43]
  • 〈달밤 ― 잡담〉 (1895년 9월, 요미우리신문)[43]
  • 〈기러기 ― 잡담〉 (1895년 10월, 요미우리신문)[43]
  • 〈벌레소리 ― 잡담〉 (1895년 10월, 요미우리신문)[43]
  • 〈두견새 ― 잡담〉 (1896년 7월, 문예구락부)[43]

4. 문학적 특징과 평가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근대 문학 초기에 등장한 여성 작가로, 여성의 삶과 애환을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몰락해 가는 사족(士族) 출신으로서의 자부심과 생활고 사이의 갈등, 요시와라 유곽 근처에서의 경험은 그녀의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12][11]

히구치 이치요는 17세기 작가 이하라 사이카쿠의 영향을 받아 고상함과 속됨을 절충한 문체를 구사했다. 이하라 사이카쿠는 하층민을 문학적 주제로 다룬 작가였으며, 히구치 이치요는 여기에 고통과 감수성에 대한 특별한 인식을 더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히구치 이치요는 『연말』, 『니고리에』, 『13야』, 『탁구라베』, 『와카레미치(別れ道)』(「갈림길」)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그녀의 명성을 도쿄 문단 전체에 퍼뜨렸으며, 전통적인 스타일로 인해 "메이지 시대의 마지막 여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모리 오가이고다 로한은 메사마시구사라는 동인지에서 히구치 이치요의 『탁구라베』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20]

그녀의 작가 생활은 14개월 남짓으로 짧았지만, 사후인 1897년에는 『히토하 전집』, 『교정 히토하 전집』이 간행되었다.

5. 사후 평가와 영향

히구치 이치요는 2004년부터 일본 오천엔 지폐에 초상화가 등장하면서, 진구황후, 무라사키 시키부에 이어 일본 지폐에 등장한 세 번째 여성이 되었다.

그녀의 소설 『오쓰고모리』, 『니고리에』, 『주상야』, 『다케쿠라베』는 여러 차례 영화와 텔레비전으로 제작되었다.[8][9] 1939년에는 히구치 이치요의 삶을 그린 영화 「히구치 이치요」가 야마다 이즈 주연, 나미키 쿄타로 감독으로 개봉되었다.[10] 이노우에 히사시의 희곡 「두통 어깨 결림 히구치 이치요」는 1984년에 초연되었는데, 히구치 이치요를 주인공으로 한다.[10]

5. 1. 5000엔권 지폐 초상

2004년(헤이세이 16년) 11월 1일부터 일본은행권의 오천엔 지폐 앞면에는 신토토 이나조를 대신하여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의 초상이 사용되고 있다.[45] 이는 1881년(메이지 14년)에 발행된 지폐에 채택된 신공황후(神功皇后) 이후 123년 만에 두 번째로 여성의 초상이 사용된 사례이다.[46] 2000년(헤이세이 12년)에 발행된 이천엔 지폐 뒷면에는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그려져 있지만, 초상화로 취급되지는 않는다.[46]

히구치 이치요의 초상화는 위조 방지에 사용되는 수염이나 얼굴 주름이 적어 인쇄판 제작에 어려움이 있었고, 이 때문에 노구치 히데요의 일천엔 지폐,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만엔 지폐보다 제조 시작이 늦어졌다.

5. 2. 기념관 및 문학상

도쿄 다이토구에는 히구치 이치요 기념관이 있으며, 야마나시현에는 히구치 이치요 기념 야마나시 문학상이 제정되어 있다.

5. 3. 작품의 현대적 재해석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 『오쓰고모리』, 『니고리에』, 『주상야』, 『다케쿠라베』는 여러 차례 영화와 텔레비전으로 제작되었다.[8][9] 특히 『니고리에』(1953년, 감독 이마이 마사시)와 『다케쿠라베』(1955년, 감독 고쇼 헤이노스케)가 유명하다. 1939년에는 히구치 이치요의 삶을 그린 영화 「히구치 이치요」가 야마다 이즈 주연, 나미키 쿄타로 감독으로 개봉되었다.[10]

6. 필명

히구치 이치요의 필명은 “일엽(一葉)”이며, 본명은 나츠(奈津)이다. “나츠(なつ)” 또는 “나츠코(夏子)”라고도 불렸다.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로 알려져 있지만, 가인으로서는 '''나츠코(夏子)''', 소설가로서는 성씨를 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 '''일엽(一葉)''', 신문 소설 필명으로는 '''아사카노 누마코(浅香のぬま子)''', '''카스가노 시카코(春日野しか子)''' 등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발표 작품에서는 “히구치 나츠코(樋口夏子)”와 같은 본명 계열과 “일엽(一葉)”이라는 호(雅号) 계열로 분류된다.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를 혼용한 서명을 사용한 예는 단 하나뿐이며, 『탁구라베』 미정고 등에서 “일엽(一葉)”이라고 적힌 서명에 다른 사람이 성을 추가한 경우가 있다. 메이지 전반기 여성 작가들 사이에서는 가정에 대한 저항이나 성씨의 변천 등으로 인해 성씨를 피하거나 창작 세계에서는 호(雅号)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치요에게도 여가장(女戸主)으로서의 의식이 강했다고 생각된다. '일엽'이라는 필명은 당시 궁핍했던 상황(돈이 없었다)과 한 장의 갈대잎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간 후 손발을 잃은 달마(達磨)의 일화에서 유래했다.[44]

7. 가족 관계

히구치 가문은 대대로 야마나시 현의 농민 집안 출신이었으나, 아버지 히구치 노리요시는 1867년 사무라이 신분을 얻었다.[1] 그러나 메이지 유신으로 사무라이 계급이 폐지되기 전 짧은 시간 동안만 그 지위를 누렸다.[1] 이치요는 1872년 노리요시와 어머니 다키(滝, 후루야 아야메) 사이에서 2남 3녀 중 둘째 딸(넷째 자녀)로 태어났으며,[1][12][11] 공식 문서에는 히구치 나쓰코(樋口夏子)로 기록되어 있다.[2]

이치요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딸의 재능과 문학에 대한 열정을 인정하여 1886년 이치요를 나카지마 우타코가 운영하는 와카를 배우는 사설 기관인 하기노야(萩の舎)에 다니게 했다.[51] 1889년에는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이치요는 가장으로서 집안을 이끌어야 했다.[5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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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Ichiyō Den: Higuchi Natsuko no Shōgai https://www.worldcat[...] Shin Nihon Shuppansha
[3] 간행물 France-Japon : Bulletin mensuel d'information https://gallica.bnf.[...] 1936-01
[4] 서적 The Uses of Memory: The Critique of Modernity in the Fiction of Higuchi Ichiyō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5] 뉴스 Fiercely intelligent and unstoppably prolific, Hiromi Ito is a modern literary provocateur https://www.japantim[...] 2021-06-22
[6] 서적 にごり江 現代語訳 • 樋口一葉 (Nigorie: Modern language translation • Higuchi Ichiyō) Kawadeshobo Shinsha
[7] 서적 たけくらべ・山椒大夫 (Nigorie, Sanshō Dayū) Kodansha
[8] 서적 The Toho Studios Story: A History and Complete Filmography Scarecrow Press 2008
[9] 웹사이트 樋口一葉 (Higuchi Ichiyō) http://www.kinenote.[...] 2021-10-17
[10] 웹사이트 頭痛肩こり樋口一葉 (Zutsuu katakori Higuchi Ichiyō) https://kotobank.jp/[...] 2021-10-21
[11] 서적 略年譜 樋口アルバム
[12] 웹사이트 樋口一葉生誕の地 https://visit-chiyod[...] 千代田区観光協会 2021-11-02
[13] 서적 歌人・なつ子 樋口アルバ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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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웹사이트 明治大正昭和の人々 12 芸術界の人々1/11 https://ohta-masakaz[...] Livedoor blog 2022-10-21
[16] 서적 婦人と文学 https://www.aozor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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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뉴스 無謀な決断が道を拓いた 樋口一葉の日記をたどる https://www.nikkei.c[...] 2020-11-29
[19] 논문 樋口一葉『大つごもり』に見る信用問題 : 西鶴との比較を手掛りとして https://hdl.handle.n[...] 北海道大学大学院法学研究科 2022-07
[20]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2010
[21] 간행물 樋口一葉夭逝す 林泉社 1936-1940
[22] 웹사이트 樋口一葉終焉の地 https://www.city.bun[...] 文京区 2024-07-16
[23] 서적 ひさし伝 新潮社 2012
[24] 웹사이트 一葉歌集 https://dl.ndl.go.jp[...] 2022-10-20
[25] 서적 随筆 奎運社 1924
[26] 서적 列伝偉人の結婚生活 日本書院 1924
[27] 웹사이트 戦前都道府県知事総覧 http://homepage1.nif[...]
[28] 웹사이트 施設概要 https://www.taitocit[...] 一葉記念館 2021-11-03
[29] 웹사이트 過去の展覧会アーカイブ https://www.bungakuk[...] 日本近代文学館 2021-11-03
[30] 웹사이트 樋口一葉・その文学と生涯 https://www.bungakuk[...] 日本近代文学館 2021-11-03
[31] 웹사이트 常設展のご案内 https://www.bungakuk[...] 山梨県立文学館 2021-11-03
[32] 웹사이트 やまなし文学賞 https://www.bungakuk[...] 山梨県立文学館 2021-11-02
[33] 서적 最新文学賞事典2014-2018 日外アソシエーツ 2019
[34] 웹사이트 開館15周年記念企画展 樋口一葉展Ⅰ われは女なりけるものを ―作品の軌跡― https://www.bungakuk[...] 山梨県立文学館 2021-11-03
[35] 웹사이트 開館15周年記念企画展 樋口一葉展Ⅱ 生き続ける女性作家 ―一葉をめぐる人々― https://www.bungakuk[...] 山梨県立文学館 2021-11-03
[36] 웹사이트 開館20周年記念企画展 樋口一葉と甲州 https://www.bungakuk[...] 山梨県立文学館 2021-11-03
[37] 웹사이트 企画展「樋口一葉没後120年記念 ひびきあう、清方と文学」 https://www.museum.o[...] アイエム インターネットミュージアム 2021-11-03
[38] 웹사이트 樋口一葉没後120年記念 ひびきあう、清方と文学 http://www.kamakura-[...] 鎌倉市鏑木清方記念美術館 2021-11-03
[39] 웹사이트 会社概要 https://fengshui.co.[...] 風水国際グループ株式会社
[40] 웹사이트 特別展「樋口一葉展―わが詩は人のいのちとなりぬべき」 https://www.kanabun.[...] 神奈川近代文学館 2021-11-03
[41] 서적 樋口一葉展―わが詩は人のいのちとなりぬべき 神奈川近代文学館 2021
[42] 뉴스 「女性・ジェンダー」「貧困」「東京」現代につながる樋口一葉/生誕150年 ゆかりの地で記念展 https://www.tokyo-np[...] 東京新聞 2022-05-02
[43] 간행물 日本資本主義の生成と不動産業 http://d-arch.ide.go[...] 国連大学人間と社会の開発プログラム 1981
[44] 웹사이트 樋口一葉 和歌(1) https://web.archive.[...]
[45] 백과사전 五千円紙幣刷新
[46] 뉴스 読売新聞 2002-08-02
[47] 서적 明治大正昭和の人々 新樹社 1961
[48] 백과사전 毎日新聞
[49] 간행물 邦楽ジャーナル 11月号 http://www.hogaku.co[...] 邦楽ジャーナル 2023-11
[50] 뉴스 日本女性新聞, 山梨日日新聞 2017-08-15, 2017-08-20
[51] 서적 치열하게 피는 꽃 이치요 북스토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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