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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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가희는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는 시기에 활동한 군인으로, 요동 지역 군인 가문 출신이다. 그는 모문룡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심세규의 모함으로 후금에 투항, 홍타이지로부터 지순왕에 봉해졌다. 이후 청나라의 남정 과정에서 광동 지역을 평정하고 통치했으나, 아들 상지신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연금 상태에서 사망했다. 그는 청나라의 중국 통일에 기여했으나, 광주대도살 등 민간인 학살에 책임이 있으며, 한국사에서는 병자호란 참전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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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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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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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상가희(尙可喜) |
한자 | 尙可喜 |
자 | 원길(元吉) |
호 | 진양(震陽) |
출생일 | 명(明) 만력(萬曆) 32년 8월 초1일 |
출생일 (양력) | 1604년 8월 25일 |
출생지 | 해주위(海州衛) (요녕성 해성) |
사망일 | 청(淸) 강희(康熙) 15년 10월 29일 |
사망일 (양력) | 1676년 12월 4일 |
사망지 |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 |
묘호 | 없음 |
시호 | 평남경친왕(平南敬親王) |
작위 | 지순왕(智順王) → 평남왕(平南王) → 평남친왕(平南親王) |
가계 | |
아버지 | 상학례(尙學禮) |
형제 | 큰형 상가진(尙可進) |
자녀 | 아들 상지충(尙之忠), 상지신(尙之信), 상지효(尙之孝), 상지륭(尙之隆), 상지절(尙之節), 상지황(尙之璜), 상지영(尙之瑛) 등 29명, 딸 32명 |
조부 | 상계관(尙繼官) |
경력 | |
소속 | 명 → 청 |
깃발 | 양람기(镶蓝旗) |
직책 | 평남왕(平南王) |
전임 | 없음 |
후임 | 상지효(尙之孝) |
기타 | |
봉호 | 평남(平南) |
사후 칭호 | 경(敬), 평남친왕(平南親王) |
2. 아버지와 형제
상가희의 가문은 요동 지역의 군인 가문이었다. 아버지 상학례는 명나라 만력 2년(1574)에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상가진(尙可進), 상가복(尙可福), 상가의(尙可義)가 있었다. 상가희의 본관은 산서성 평양부 홍동현이며, 후에는 요동도지휘사사 해주위(海城市)로 옮겨갔다. 조부 상계관(尙繼官)은 과거에 급제하였다.[6]
2. 1. 아버지 상학례
명나라 만력 연간에 태어나 해주위(海州衛)에서 활동했다. 요동순무(遼東巡撫) 왕화정(王化貞)에게 투항하여 천총(千總) 직함을 받았다.[6] 모문룡(毛文龍) 휘하에서 진강대첩(鎭江大捷) 등에 참여하며 공을 세웠다.[7] 1624년 후금과의 전투 중 전사하였다.[8]2. 2. 큰형 상가진
상가진(尙可進)은 만력 23년(1596)에 태어나 명나라 장수가 되었으나, 숭정 6년(1633) 후금과의 전투 중 전사했다.[6]2. 3. 기타 형제
상가복(尙可福), 상가의(尙可義)도 명나라 관리였다.[6]3. 후금 투항과 초기 활동
상가희는 학문보다는 무예를 좋아했으며,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634년(천총 8년) 동강 총병(東江總兵) 심세규(沈世魁)에게 모함을 받자, 부하들을 이끌고 후금(後金,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홍타이지(皇太極)는 상가희를 크게 환영하며 '하늘이 돕는다(天助我也)'라고 말하고, 그의 부대를 '천조병(天助兵)'이라 칭했다. 홍타이지는 성 밖 30리까지 나가 맞이하고 많은 보물을 하사했으며, 이전에 사로잡았던 상가희 가족 27명을 돌려보내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다. 이후 상가희는 총병관(總兵官)에 임명되었다.[3]
1636년(숭덕 원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공유덕(孔有德)을 공순왕(恭順王), 경중명(耿仲明)을 회순왕(懷順王), 상가희를 지순왕(智順王)으로 봉하여 이들을 청초 삼순왕(三順王)이라 불렀다. 상가희는 해주(海州)를 봉지로 받고 가족과 부대를 배치받는 등 홍타이지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송금전투(松錦戰鬪)에서 송산과 행산 등지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도르곤(多爾袞)을 따라 조선 원정에 참전했다.[3]
3. 1. 명나라에서의 경력
상가희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을 좋아했으며, 지혜롭고 용감하여 군사에 능통하였다. 모문룡(毛文龍) 휘하에서 군무에 종사하여 광록도부장(廣鹿島副將)까지 이르렀다. 1629년 원숭환(袁崇煥)이 모문룡을 처형하자 피도총병 심세규(沈世奎)가 그 뒤를 이었고, 모문룡의 옛 부대를 배제시켰다.[3] 1634년 심세규는 상가희를 속여 피도에 가게 하고 죄를 지었다고 모함하였다. 이 일은 상가희 부하 허이현(許爾顯) 등이 탐문하여 알게 되었고, 상가희는 심양(瀋陽)에 반지부(班志富) 등의 부하를 파견하여 후금과 접선하였다. 홍타이지(皇太極)는 이를 듣고 기뻐하며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天助我也)'라고 하였으며, 상가희의 부대 이름을 '천조병(天助兵)'이라 하였다. 상가희는 휘하 장수들과 다섯 개 섬의 군자와 무기를 들고 항해하여 항복하였다. 홍타이지는 성밖 30리까지 가서 이들을 맞이하고 많은 보물을 하사하였으며, 생포하거나 색출한 상가희 가문 사람 27명을 돌려보냈다(이때 후금에서 붙잡은 100여 명 가운데 상가희 부인 2명은 난중에 자진하였다). 곧이어 총병관(總兵官)에 임명되었다.[3]163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공유덕(孔有德)을 공순왕(恭順王), 경중명(耿仲明)을 회순왕(懷順王), 상가희를 지순왕(智順王)으로 봉하였다. 이들은 청초 삼순왕(三順王)으로 불렸다. 해주(海州)가 상가희의 봉지로 내려졌고 가족과 부대는 이곳에 배치되는 등 상가희는 홍타이지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3]
송금전투(松錦戰鬪) 중에 송산과 행산 등지를 공격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후 병자호란(丙子胡亂) 시기에는 도르곤(多爾袞)을 따라 조선 원정에 나섰다.[3]
3. 2. 후금 투항
1634년 (천총 8년) 심세규(沈世魁)의 모함을 받자, 부하들을 이끌고 후금(後金,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상가희의 부대는 "천조병(天助兵, abkai nonggiha cooha)"[3]이라 불렸다. 홍타이지(皇太極)는 상가희를 환영하며 성 밖 30리까지 나가 맞이하고 많은 보물을 하사하였다. 또한 이전에 생포하거나 색출한 상가희 가문 사람 27명을 돌려보내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하였다. 곧이어 상가희는 총병관(總兵官)에 임명되었다.3. 3. 청나라 초기 활동
상가희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고, 지혜롭고 용감하며 군사에 능통했다. 동강총병(東江總兵) 모문룡(毛文龍) 휘하에서 군무에 종사하여 광록도부장(廣鹿島副將)까지 이르렀다. 1629년 원숭환(袁崇煥)이 모문룡을 처형하자, 피도총병(皮島總兵) 심세규(沈世奎)가 그 뒤를 이었고, 모문룡의 옛 부대를 배제시켰다. 1634년 심세규는 상가희를 속여 피도(皮島)에 가게 하고, 죄를 지었다고 모함하여 음해했다. 상가희는 부하들을 심양(瀋陽)에 파견하여 후금(後金)과 접선하게 하였다. 홍타이지(皇太極)는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天助我也)'라고 하며 기뻐하였고, 상가희 부대 이름을 '천조병(天助兵)'이라 하였다. 상가희는 휘하 장수들과 군사, 무기를 가지고 항복하였다. 홍타이지는 성밖 30리까지 가서 이들을 맞이하고 많은 보물을 하사하였으며, 이전에 생포하거나 색출한 상가희 가문 사람 27명을 돌려보냈다. 곧이어 총병관(總兵官)에 임명되었다.163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공유덕(孔有德)을 공순왕(恭順王), 경중명(耿仲明)을 회순왕(懷順王), 상가희를 지순왕(智順王)으로 봉하였다. 이들을 청초 삼순왕(三順王)이라 불렀다. 해주(海州)를 봉지로 받고 가족과 부대를 배치받는 등 상가희는 홍타이지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4]
송금전투(松錦戰鬪)에서 송산(松山)과 행산(杏山) 등지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병자호란(丙子胡亂) 시기에는 도르곤(多爾袞)을 따라 조선 원정에 나섰다.[3]
4. 청나라의 남정과 광동 통치
1644년, 상가희는 청군을 따라 산해관을 넘어 청나라의 중국 통일에 참여했다. 도도를 따라 남쪽으로 진군하여 호북 지역에 이르렀다가 해주로 돌아갔다.
1647년 청군이 광동을 함락한 후, 1648년 남창에서 김성환, 왕득인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자, 광동제독 이성동도 이에 호응하여 북상하였다. 1649년 청군이 남창을 수복하고 이성동이 패배하여 사망하자, 상가희는 평남왕으로 승진하여 경중명과 함께 광동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해주, 산해관, 천진, 등주, 무창, 악양, 조경을 거쳐 광주로 향했고, 이 과정에서 경중명이 자살하고 그의 아들 경계무가 뒤를 이으면서, 두 군대는 모두 상가희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650년 광주성에 도착한 상가희와 경계무는 10개월간 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군인과 백성들이 크게 희생되었으며, 이를 광주대도살이라 부른다.
4. 1. 입관과 남정
1644년 청군을 따라 산해관을 넘어 남하하였다. 도도 휘하에서 호북 지역을 평정하였다.[9]4. 2. 광동 평정
1649년 평남왕(平南王, julergi be necihiyere wang)으로 승진하여 금책(金冊)과 금인(金印)을 받았다. 경중명(耿仲明)과 함께 가족과 옛 부대를 이끌고 광동(廣東)으로 진군하였다. 해주, 산해관(山海關), 천진(天津), 등주(登州), 무창(武昌), 악양(岳陽), 조경(肇慶)을 거쳐 마지막에는 광주로 갔다. 무창에서 부하의 군법 위반으로 경중명이 자살하고, 아들 경계무(耿繼茂)가 뒤를 이으면서 두 군대는 모두 평남왕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650년 봄, 평남왕과 정남왕의 군대가 광주성에 도착하여 10개월 동안 포위하였다.같은 해 10월, 청군의 준비가 완료되자 상가희와 경계무는 광주를 공격하여 서관(西關)을 함락시켰다. 11월 초, 청군은 포격으로 서북쪽 성벽을 무너뜨렸다. 상가희와 경계무는 직접 전투를 지휘하여 청군이 성 안으로 진입하도록 이끌었다. 시가전에서 명군 관병 6천여 명이 사망하고 총병 범승은(范承恩)이 생포되었다. 두영화(杜永和)는 패배를 직감하고 수로를 통해 도망쳤다.
청군은 광주성을 점령한 후, 무차별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한 선교사는 "대학살은 11월 24일부터 12월 5일까지 지속되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잔혹하게 죽였으며, '죽여라, 이 역도 만자(蠻子)들을 죽여라!'고만 말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중국 문헌에도 상가희와 경계무가 광주를 함락하고 백성들을 도륙하여 살아남은 이가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9] 번우현(番禺縣) 출신 왕명뢰(王鳴雷)는 당시 상황을 묘사하는 제문을 남겼다.
광동의 저명한 문인 광로(鄺露)는 이때의 살육을 보고 시를 지었다.[9] 11월 광주성 함락 후 벌어진 대학살을 광주대도살(廣州大屠殺)이라 한다. 당시 광주성 인구 약 40만 명 중 사망자는 5분의 1 정도였다.[10] 『광주시지(廣州市志)』에는 약 70만 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 광동 통치와 삼번의 난
상가희는 1649년 평남왕(平南王, julergi be necihiyere wang)에 책봉되어 금책(金冊)과 금인(金印)을 받고 광동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1660년 경계무가 복건(福建)으로 이동한 후에는 단독으로 광동을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사사로이 시장을 열고 세금을 거두어 '매년 얻은 은량이 최소 수백만'에 달했고, 이를 군비로 충당하였다.[11]
1673년, 오삼계(吳三桂)가 윈난성(雲南省)에서 군사를 일으켜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때, 긍정충(耿精忠)은 이에 호응하였고, 오삼계는 상가희에게도 거병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상가희는 이에 가담하지 않고 조정에 보고하여 충성심을 드러냈다.[11]
5. 1. 왕부 설치와 권력 행사
상가희와 경계무(耿繼茂)는 광주(廣州)에 왕부(王府, 왕의 집무소)를 설치하였다. 이들은 부하들이 현지 주민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방관하였다. 광동좌포정사(廣東左布政使) 호장(胡章)은 두 사람을 탄핵하는 상주를 제출, 두 왕이 부하들을 풀어 신사나 부녀 할 것 없이 약탈하거나 모욕을 주었다고 지적했으나, 결국 두 왕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호장이 무고죄에 걸렸다.[11] 이후 고요지현(高要知縣) 양옹건(楊雍建)이 중앙직 급사중(給事中)이 되자 상주를 올려 광동의 남역(濫役, 과도하게 아역을 차출)과 사세(私稅, 사사로이 세금을 거둠)의 폐해를 진술하였고, 또한 '한 성(省, 광동)이 두 번(藩, 상가희와 경계무의 번봉)을 견디지 못하니 다른 성으로 옮기길 청한다(一省不堪兩藩, 請量移他省.)'고 하였다.[11]1660년 경계무는 복건(福建)으로 옮겼고 상가희만이 광동에 주둔하였다. 상가희는 광동 사시사세(私市私稅)에서 '매년 얻은 은량이 최소 수백만(每歲所獲銀兩不下數百萬)'이었으며, 이로써 군비 지출에 충당하였다.
5. 2. 삼번의 난
三藩之亂|삼번의 난중국어은 1673년 상가희가 고령을 이유로 요동(遼東)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청나라 조정은 이를 번왕(藩王) 세력을 줄일 기회로 삼았지만,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尙之信)은 이에 반발하였다.[11]1673년, 상가희는 요동으로 돌아가고 차남 상지효(尙之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상지효는 형제 간의 갈등을 이유로 사퇴했다. 강희제는 상가희의 봉지를 철회하겠다고 선포했고, 이는 삼번의 난 발생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675년 정월, 상가희는 평남친왕(平南親王)으로 승진하고 상지효에게 세습하게 했으며, 평남대장군(平南大將軍) 직위도 받았다. 그러나 1676년, 상지신은 군대를 이끌고 상가희의 저택을 포위하여 광동(廣東) 최고 지휘권을 빼앗고 오삼계(吳三桂)의 반란에 합류했다. 상가희는 아들의 반란에 반대했지만, 결국 1676년 음력 10월 29일, 연금 상태에서 향년 73세로 광주 저택에서 사망했다.[11] 강희제는 상가희에게 경(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상지신은 삼번의 난에서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며 광동을 지키면서 자신의 실력을 보존하였다. 1677년 청나라에 항복한 후 평남왕을 세습하고 태자태보(太子太保)에 봉해졌으나, 1680년 강희제에 의해 사사(賜死)되었다.
6. 사망과 후계
1673년, 오삼계가 윈난에서 군대를 일으켜 청나라에 반항하자, 긍정충도 거병하여 호응하였다. 오삼계는 상가희에게 거병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상가희는 가담하지 않고 조정에 보고하여 충성심을 보였다.[3]
1675년, 조정은 상가희를 평남친왕(平南親王)으로 가봉하였다.
6. 1. 죽음과 장례
1676년 2월 차남 상지신(尚之信)이 청나라에 반대하는 군에 참여하자, 상가희는 아들에게 연금당한 채 광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73세였다.[3] 1681년 상가희의 유언에 따라 해성(海城)에 안장되었다.6. 2. 후계 문제
1673년, 상가희는 나이가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광동 땅을 둘째 아들 상지신에게 물려주고자 청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은 귀향은 허락하되 세습은 허락하지 않았고, 상지신 등 삼번을 폐지하려 하였다.오삼계, 긍정충은 군대를 일으켰고, 상지신은 이에 호응하였다(삼번의 난). 1676년 거병에 반대한 상가희는 아들에게 연금되었다.[3][4]
7. 평가
상가희는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전환되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모두 존재한다.
강희제는 상가희가 오랫동안 변방을 지키면서 공을 세웠고, 오삼계의 반란 이후에도 충성을 다했다고 평가했다.[12] 반면 고성은 상가희와 경계무가 한족 동포를 희생시켜 청나라의 공적을 세웠다고 비판했다.[12]
7. 1. 긍정적 평가
상가희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을 바탕으로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데 기여했다.[12] 특히 청나라 초기 광동 지역을 안정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희제는 상가희를 "오랫동안 변방을 지키면서 공적과 노고가 크다"고 평가하며, 오삼계의 반란 이후에도 절개와 충정을 지킨 점을 높이 샀다.[12]7. 2. 부정적 평가
상가희는 광주대도살 등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12] 권력 남용과 부패로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8. 연표
- 1604년 (명 만력 32년) 음력 8월 초1일(1604.8.25.) 랴오닝성 해성시에서 태어났다.
- 1623년 (명 천계 3년) 명나라 변방 방어에 종군하였다.
- 1625년 (명 천계 5년) 아버지 상학례가 후금 수도를 급습했으나 실패하여 전사하였다.
- 1633년 (명 숭정 6년) 큰형 상가진이 전사하였다.
- 1634년 (명 숭정 7년, 후금 천총 8년) 부대를 거느리고 항해하여 후금에 투항, 부대는 ‘천조병(天助兵)’에 봉해졌고 피로인을 돌려보내었으며 총병관(總兵官)에 봉해졌다.
- 1636년 (청 숭덕 원년) 홍타이지가 대청으로 국호를 고치고 숭덕으로 연호를 고치면서 ‘지순왕(智順王)’에 봉해졌고 군대를 해주(海州)로 옮겼다.[4]
- 1644년 (청 순치 원년) 도르곤을 따라 입관하였다.
- 1645년 (청 순치 2년) 도도를 따라 남하, 후베이성에서 군대를 지휘한 후 해주로 다시 돌아갔다.
- 1649년 (청 순치 6년) 평남왕(平南王)에 봉해지고 금책과 금인이 하사되었으며 가족과 식구를 데리고 광둥성으로 남정하였다.
- 1650년 (청 순치 7년) 경계무와 함께 광저우를 함락하였고, 광주대도살을 진행, 성내 사망자가 수만 명(일설에는 70만 명, 서양인 기록에는 10만 명)에 달하였으며, 광주에 부저(府邸)를 세웠다.
- 1655년 (청 순치 12년) 처음으로 요동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상소하였으나, 순치제가 만류하였고, 천계령(遷界令)을 중단할 것을 상소하여 준허를 받았다.
- 1673년 (청 강희 12년) 11번째로 요동 귀향을 상소하여 준허를 받았으나, 오삼계가 윈난성에서 반청 운동을 일으키고 경정충이 거병하여 호응, 조정의 명에 따라 광동에 계속 남게 되었다. 오삼계는 상가희에게 서신을 보내어 반청에 가담하라고 설득하였지만 상가희는 오삼계의 서신을 조정에 보고하여 충심을 보였다.
- 1675년 (청 강희 14년) 조정은 상가희를 평남친왕(平南親王)에 봉하였고 광주 진해루(鎭海樓)에서 화가들을 불러 7폭의 화상을 그리게 하여 남겼다.
- 1676년 (청 강희 15년) 2월, 장남 상지신이 군대를 일으켜 상가희의 부저를 포위하고 오삼계 반란에 가담, 같은해 10월 29일(1676.12.4.) 상가희는 광주에서 향년 73세로 사망하였다. 강희제는 경(敬)이라는 시호를 주었고 관은 광주 대불사(大佛寺)에 잠시 안치되었다.
- 1677년 (청 강희 16년) 상지신은 청군에 투항하였다.
- 1681년 상가희의 유언에 따라 봉천(奉天) 해성(海城)에 안장되었다.
9. 가족
항목 | 내용 |
---|---|
아버지 | 상학례(尙學禮) |
처 | 호씨(胡氏), 서씨(舒氏), 증씨(曾氏), 양씨(楊氏) |
장남 | 상지신(尙之信) (모친 호씨) |
며느리 | 경씨(耿氏) (상지신의 처, 정남왕(靖南王) 경계무(耿繼茂)의 딸) |
차남 | 상지효(尙之孝) |
삼남 | 상지곤(尙之琨) (모친 증씨) |
사남 | 상지륭(尙之隆) (모친 양씨) |
딸 | 상씨(尚氏) (호이합씨(虎爾哈氏) 부통아(傅通阿)의 처) |
기타 | 60여 명의 자녀 |
참조
[1]
뉴스
zh:揭秘广州大佛寺的砖瓦为什么是绿色的
http://gd.qq.com/a/2[...]
2016-04-30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https://books.google[...]
[3]
문서
清朝皇帝と三藩
[4]
문서
平南敬親王尚可喜事実冊の原本について
[5]
서적
청사고(淸史稿)
中華書局
[6]
문서
평남경친왕상가희사실책(平南敬親王尙可喜事實冊)
[7]
문서
평남왕원공수범(平南王元功垂范)
[8]
문서
평남왕원공수범(平南王元功垂范)
[9]
서적
남명사(南明史)
中國靑年出版社
[10]
웹사이트
360年前广州遭十日屠城 海幢寺兴起恰与之有关
http://2010.163.com/[...]
2010-06-23
[11]
문서
청사고(淸史稿) 권234
[12]
서적
남명사(南明史)
中國靑年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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