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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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진춘추는 습착치가 저술한 역사서로, 후한의 광무제부터 서진의 민제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특히 삼국 시대에서 촉한을 정통으로, 진을 촉한의 정통성을 계승한 왕조로 보는 "촉한정통론"을 주장한 최초의 역사서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당시 권력자인 환온에게 제위 찬탈의 야망을 간언하거나, 동진의 정통성을 설파하기 위해 쓰였다는 설이 있으며, 삼국지 등 기존 역사서에서 다루지 않은 위진 교체기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촉한정통론은 조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사마씨의 진나라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저자 습착치의 가문이 촉한에 협력한 배경에서 촉한정통론이 비롯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습착치는 후한 광무제부터 서진 민제까지 300년이 채 안 되는 역사를 기록하면서, '존진'을 내걸고 삼국 시대에서 촉한을 정통으로 하여 진(서진)은 한(촉한)으로부터 정통을 계승했다는 "촉한정통론"을 주장했다.
한진춘추|한진춘추중국어는 삼국 시대에서 촉한을 정통 왕조로, 위나라를 찬탈 세력으로 규정한 역사서이다. 유비가 후한 황실의 후예라는 점과 제갈량의 북벌이 한나라 부흥을 위한 정당한 전쟁이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촉한정통론을 주장한다.[1]
2. 역사적 배경 및 저술 의도
이러한 주장은 당시 권력자였던 환온이 제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간접적으로 경계하고, 중원에서 쫓겨난 동진의 정통성을 설파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 또한, 『삼국지』 등 당시 역사서의 한→위→진 왕조 교체론으로는 진의 정통성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습착치는 촉과 위의 전쟁 (제갈량의 북벌)이나 위진 교체기의 여러 사건(특히 고귀향공 살해)에 대해 『삼국지』 등이 진나라를 꺼려 기록하지 않은 부분도 기록했다. 유지기는 『사통』에서 이를 "근고의 유직"이라 평가했다. 그러나 나카무라 케이지는 조조 (위)의 찬탈을 비난하면서 사마씨 (진)가 위로부터 찬탈한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촉한정통론을 내세웠다고 주장한다.[1]
유비에게 종사한 습정 등 양양 습씨 가문의 배경 때문에, 자신의 조상을 현창하려는 의도로 촉한정통론을 주장했다는 연구도 있다.[2]
2. 1. 정치적 상황
습착치가 《한진춘추》를 저술한 배경에는 당시 동진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있었다. 당시 동진은 권신(權臣) 환온이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1] 습착치는 조조의 위나라 건국 과정을 비판적으로 서술함으로써 환온의 야심을 간접적으로 경계하고자 했다.[1]
또한, 동진은 북방 이민족에게 중원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쫓겨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1] 습착치는 촉한을 정통으로 내세움으로써 동진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나아가 진 왕조(서진)가 한(촉한)으로부터 정통을 계승했다는 논리를 펼치고자 했다.[1] 이러한 주장은 중원에서 쫓겨난 동진이 정통 왕조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1]
나카무라 케이지는 습착치의 촉한정통론이 조조 (위)의 찬탈을 비난하면서 사마씨 (진)가 위로부터 찬탈한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조조의 찬탈로 성립된 위는 정통성이 없는 왕조로, 사마의가 위에 섬긴 것은 본심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촉한정통론을 내세웠다는 것이다.[1]
한편, 습착치의 조상들이 유비에게 종사했기 때문에 자신의 조상을 빛내기 위해 촉한정통론을 주장했다는 연구도 있다.[2] 조조가 형주를 침략했을 때, 유표의 정치 기반이었던 양양의 호족들 중 채모 등 양양 채씨는 조조에게 항복했고, 방덕공, 방통 등 양양 방씨는 위와 촉한으로 갈렸다. 반면, 습착치의 선조인 습정 등 양양 습씨는 유비에게 종사했다.[2]
2. 2. 기존 역사서와의 차별성
습착치는 '존진'을 내걸고 삼국 시대에서 촉한을 정통으로, 진(서진)은 촉한으로부터 정통을 계승한 왕조라는 '촉한정통론'을 주장한 최초의 역사서로 알려져 있다. 이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는 삼국지(三國志)를 비롯한 기존 역사서들과 차별성을 보인다.[1]
나카무라 케이지는 습착치의 촉한정통론이 조조 (위)의 찬탈을 비난하면서 사마씨 (진)가 위로부터 찬탈한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즉, 조조의 찬탈로 성립된 위는 정통성이 없는 참주이고, 사마의가 위에 섬긴 것은 본심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주장된 논리라는 것이다. 그 결과,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패한 것이나 고귀향공 살해 사건을 솔직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1]
또한, 습착치의 선조인 습정을 비롯한 양양 습씨 가문이 유비에게 종사했기 때문에, 자신의 조상을 현창하려는 의도로 촉한정통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냐는 연구도 있다.[2]
2. 3. 개인적 배경
습착치의 가문은 형주 양양 지역의 유력 호족이었다. 조조의 형주 침공 당시 양양 채씨(蔡氏) 등은 조조에게 항복했지만, 습착치의 선조를 포함한 양양 습씨(習氏)는 유비에게 귀의하여 촉한 건국에 기여했다.[2] 이러한 가문의 배경은 습착치가 촉한정통론을 주장하게 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습진은 오나라의 공격에 맞서 "한(漢)의 귀신이 될지언정 오(吳)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절개를 지킨 인물로, 습착치는 이러한 조상의 행적을 통해 촉한에 대한 충절을 강조하고자 했다.[2]
3. 주요 내용 및 특징
습착치는 고귀향공 살해 사건 등 위진 교체기의 사건들을 『삼국지』보다 상세하게 기록했다. 유지기는 『사통』에서 습착치가 촉과 위의 전쟁, 위진 교체 시의 사건(특히 고귀향공 살해)에 대해 『삼국지』가 진나라를 의식하여 기록하지 않은 부분을 기록하여 "근고의 유직"이라 평가했다.[1]
3. 1. 촉한정통론
『한진춘추』는 삼국 시대에서 촉한을 정통 왕조로, 위나라를 찬탈 세력으로 규정하는 "'''촉한정통론'''"을 명확하게 제시한 최초의 역사서이다. 이러한 주장은 유비가 후한 황실의 후예라는 점, 제갈량의 북벌이 한나라 부흥을 위한 정당한 전쟁이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한다.[1]
나카무라 케이지는 습착치의 촉한정통론이 조조 (위)의 찬탈을 비난하면서 사마씨 (진)가 위로부터 찬탈한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조조의 찬탈로 성립된 위는 정통성이 없고, 사마의가 위에 섬긴 것은 본심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논리라는 것이다.[1]
조조가 형주를 침략했을 때 유표의 정치 기반이었던 양양 호족 중 채모 등 양양 채씨는 조조에게 항복했지만, 방덕공, 방통으로 대표되는 양양 방씨는 위와 촉한으로 갈렸다. 습착치의 선조인 습정과 습진 등을 배출한 양양 습씨는 유비에게 종했기 때문에, 자신의 조상을 현창하려는 의도로 촉한정통론을 주장했다는 연구도 있다.[2]
3. 2. 위진 교체기의 사건 재조명
습착치는 『삼국지』 등 기존 역사서에서 진 왕조를 옹호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다루었던 위진 교체기의 사건들, 특히 고귀향공 살해 사건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는 그가 위나라를 찬탈 세력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진 왕조의 정통성에 얽매이지 않고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 습착치는 촉과 위의 전쟁 (제갈량의 북벌)이나 위진 교체 시에 일어난 여러 사건 (특히 고귀향공 살해)에 대해 『삼국지』 등이 진나라를 의식하여 기록하지 않은 이면 부분도 기록하고 있으며, 당나라 유지기는 『사통』에서 "근고의 유직"이라고 평가했다.
3. 3. 사마의(司馬懿)에 대한 평가
습착치는 조조의 찬탈을 비난하면서도 사마의가 위나라에 충성한 것은 본심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옹호한다.[1] 이러한 주장은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패배한 사실이나 고귀향공 살해 사건과 같이 진나라에서 꺼리는 내용도 솔직하게 기록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1]
4. 평가 및 영향
습착치의 漢晉春秋중국어는 촉한정통론을 주장하여 중국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고, 정통성 논쟁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삼국 시대에서 촉한을 정통으로, 진 (서진)이 촉한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여, 조조의 위(魏) 찬탈을 비판하면서도 사마씨의 진(晉) 건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다.[1]
4. 1. 비판적 평가
나카무라 케이지는 습착치의 촉한정통론이 조조의 찬탈을 비난하면서도 사마씨의 위나라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라고 비판했다. 즉, 조조의 찬탈로 성립된 위나라는 정통성이 없는 참주(僭主)이고, 사마의가 위나라에 굴복한 것은 본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1] 그 결과,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패한 고사나 (습착치가 참주로 하는) 고귀향공 살해 사건을 꺼릴 필요 없이 직서가 가능하게 되었다.[1]또한, 조조가 형주를 침략했을 때, 유표의 정치 기반의 한 축을 형성한 양양의 호족들 중 채모나 유표의 후처로 대표되는 양양 채씨는 일족을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했고, 방덕공이나 방통으로 대표되는 양양 방씨는 위와 촉한으로 갈렸지만, 습착치의 선조인 습정과 "한의 귀신이 될지언정 오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긴 습진 등을 배출한 양양 습씨의 많은 수가 유비에게 종했기 때문에, 자신의 조상을 현창하려는 의도로 촉한정통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냐는 연구도 있다.[2]
4. 2. 영향
漢晉春秋중국어의 촉한정통론은 이후 중국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정통성 논쟁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삼국 시대에서 촉한을 정통으로 하고 진 (서진)이 촉한으로부터 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여, 조조의 위(魏) 찬탈을 비판하면서도 사마씨의 진(晉) 건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다.[1] 이러한 주장은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패한 것이나 고귀향공 살해와 같이 진(晉)에 불리한 사건도 솔직하게 기록할 수 있게 하였다.[1]또한, 유표의 정치 기반이었던 양양 호족 중 채모 등 양양 채씨 일족은 조조에게 항복했지만, 방덕공, 방통으로 대표되는 양양 방씨는 위와 촉한으로 갈렸고, 습착치의 선조인 습정과 "한의 귀신이 될지언정 오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긴 습진을 배출한 양양 습씨는 유비에게 종했다. 이러한 배경은 습착치가 자신의 조상을 현창하려는 의도로 촉한정통론을 주장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2]
참조
[1]
서적
晋書
唐
[2]
논문
後漢末期の裏陽の豪族
1970
[3]
서적
진서
[4]
서적
진서
[null]
서적
구당서
[4]
서적
신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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