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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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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갈량의 북벌은 228년부터 234년까지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시도한 일련의 군사 작전이다. 227년 제갈량은 유선에게 출사표를 통해 북벌의 이유를 밝히고, 한중을 출발하여 진령산맥을 넘어 위나라를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북벌은 지정학적 어려움과 위나라의 강력한 방어, 보급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실패로 돌아갔다. 제갈량은 5차례의 북벌을 통해 위나라에 피해를 입히고, 강유와 같은 인재를 얻기도 했지만, 결국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병사했다. 제갈량 사후 촉한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북벌은 촉한의 국력 소모와 멸망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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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북벌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제갈량의 북벌
다른 명칭육출기산 (六出祁山)
일부삼국 시대의 전쟁
시기228년 2월 ~ 234년 10월 (대략)
장소간쑤성, 산시성 일대, 중국
결과촉한의 전술적 승리, 위의 전략적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위
교전국 2촉한
강족
선비족
지휘관
조위조예
조진
사마의
장합
학소
왕쌍
곽회
비요
대릉
우금
가사
위평
신비
하후무
진랑
촉한유선
제갈량
위연
조운
등지
마속
진식
왕평
오의
오반
고상
양의
강유
가비능
관련 전투
관련 전투 목록신성의 난
천수의 난
가정 전투
진창 포위전
건위 전투
기산 전투
오장원 전투

2. 배경

227년 당시 중국 대륙은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1] 대륙 서남쪽에 위치한 촉나라가 북쪽의 위나라를 공격하려는 계획은 20년 전인 20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7세였던 제갈량유비에게 융중대를 제시했다. 제갈량은 위나라의 부수도 격인 장안과 낙양을 각각 익주(쓰촨 분지)와 형주에서 동시에 압박하는 방안을 내놓았다.[1]

융중대


유비가 215년 익주를 차지하면서(유비의 입촉) 융중대의 기본 전제조건은 모두 갖춰졌다. 그러나 형주를 둘러싼 손권과의 분쟁이 일어났고, 유비군의 형주 방면 사령관이던 관우가 북쪽을 공격(번성 전투)하는 사이 손권이 유비를 배신하여 유비 세력은 219년 형주를 상실한다(형주 공방전).[1] 유비는 형주를 되찾기 위해 손권을 공격했다가 대패하고 사망했으며(이릉 대전), 제갈량은 223년 손권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했으나 기존의 융중대는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1]

227년, 제갈량은 출사표를 통해 유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유선에게 북벌의 이유를 밝혔다. 그는 "늙고 아둔하나마 있는 힘을 다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대한 황실을 다시 일으켜 옛 황도로 돌아가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여겼다.[2][3]

3. 지정학

제갈량의 북벌 계획은 익주 북부의 중심지인 한중에서 출발하여 진령산맥을 넘어 위나라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3세기 당시 한중은 원시림에 둘러싸인 상대적으로 한적한 지역이었지만, 한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가 북쪽의 진령산맥과 남쪽의 대파산맥으로 둘러싸인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곳은 남쪽의 풍요로운 쓰촨 분지와 북쪽의 위수를 넘어 북서쪽의 서량 하서주랑 건조지대로 통할 수 있었다.[4]

진령산맥은 장안과 한중 사이의 막강한 자연장벽으로, 여러 개의 평행한 산줄기가 겹쳐 있고, 온갖 계곡이 가지 쳐서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지진으로 인한 구조 파괴로 지형학적으로 매우 복잡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소위 잔도라고 불리는 매우 적은 험준한 길들뿐이었다. 제갈량의 북벌에서 주요 전투들과 거점 탈환전은 이 잔도들을 주위로 벌어졌다.[4]

제갈량의 1차, 2차 북벌


동쪽에서 서쪽 순서로 주요 잔도는 다음과 같다.[4]

잔도 이름출발지도착지길이기타
자오도(子午道)한중장안660리가장 동쪽에 위치. 장안성 코앞에 있으나 험준하여 잘 사용되지 않음.
당낙도(儻駱道)한중낙성 (북쪽으로 갈라짐)420리낙곡 대전에서 사용됨.
야곡도(斜谷道)한중오장원470리초한상쟁 때 장량이 불태운 포야도(褒斜道)와 같음.
기곡도(箕谷道)한중야곡도와 같은 방향, 중간에 동쪽으로 갈라짐야곡도와 비슷초한상쟁 때 한신장한을 잡았던 "암도진창"의 진창도가 이 길.
기산로(祁山路)한중기산-상대적으로 넓고 편하지만 가장 김.


4. 제1차 북벌 (228년 봄)

228년 봄, 제갈량은 제1차 북벌을 시작했다. 조운에게 미끼 부대를 주어 야곡도를 통해 를 공격하는 척하며, 주력 부대로는 기산(祁山, 현재 리현, 간쑤성 주변 산악 지역)을 통해 위나라 서쪽 끝인 천수, 안정을 공략하려 했다.[15]

이에 위는 황제 조예가 직접 장안으로 가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조진에게는 조운을, 장합에게는 제갈량의 본대를 상대하도록 했다.[16] 한편, 남동쪽에서는 제갈량과 내응하려던 맹달사마의에게 진압당했다(신성의 난).

촉군 선봉 마속은 가정(街亭, 현재 친안현, 간쑤성 동쪽에 위치)에서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산꼭대기에 진을 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장합은 이를 놓치지 않고 촉군을 포위해 크게 이겼다.[17][18] 왕평이 분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위연이 구원하려 했으나 곽회에게 막혀 실패했다. 결국 촉군은 가정을 포기하고 남하했고, 조운도 퇴각했다.

제갈량은 패전 책임을 지고 스스로 승상 직에서 물러나 우장군으로 강등되었으며,[20][21] 마속은 군령을 어긴 죄로 처형되었다.[19] 이때 천수 지역 호족 강유는 촉에 내응하려다 실패하고 촉으로 망명했다.

5. 제2차 북벌 (228년 겨울)

228년 겨울, 제갈량은 제2차 북벌을 시작하여 촉 군대를 이끌고 산관을 통해 위나라의 진창 요새를 공격했다. 진창은 위나라의 서쪽 국경인 서량과 대촉 사령관인 조진이 주둔하고 있는 미현 사이에 위치한 전략요충지였다. 제갈량은 속전속결을 위해 상대적으로 짧은 기곡도를 통해 진창을 공격했다.[22][23]

당시 진창성에는 학소가 약 1,000명의 병사를 데리고 주둔 중이었는데, 촉군은 20,000 ~ 100,000 명이라는 압도적 군세로 밀어붙였음에도 학소는 항복하지 않고 방어에 성공했다. 제갈량은 먼저 군대에 진창을 포위하도록 명령한 다음, 학소의 오랜 친구인 진상(靳詳)을 보내 학소를 설득하여 항복을 권했으나, 학소는 두 번이나 거절했다.[24]

촉군은 운제, 충차, 정란 등 온갖 공성병기를 동원했으나 운제는 불화살로 태우고 충차는 돌절구를 던져 부서뜨리는 등 학소의 위군은 끈질기게 막아냈다. 학소는 진창을 방어하기 위해 단 1,000명의 병사만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촉 군대에 맞서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진창 공방전 20일 동안 제갈량은 다양한 전술을 사용하여 요새를 공격했지만, 학소는 차례로 각 전술에 성공적으로 대응했다.[25]

3주 뒤 장합이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하자 군량이 떨어진 제갈량은 한중으로 퇴각한다.[26] 퇴각하는 촉군을 추격하던 위나라 장수 왕쌍은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27]

6. 제3차 북벌 (229년 봄)

229년 봄, 제갈량은 세 번째 북벌을 시작하여 진식에게 촉군을 이끌고 위나라가 통치하는 무도와 음평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위나라 장수 곽회는 군대를 이끌고 진식에 저항했다. 제갈량이 촉군을 이끌고 건위(현재 롱난 간쑤성)로 진격하자 곽회는 후퇴했다. 그 후 촉군은 무도와 음평 군을 정복했다.[28]

제갈량이 원정에서 돌아오자 촉 황제 유선은 칙령을 내려 진창 포위전에서 왕쌍을 물리치고 곽회를 도주하게 했으며, 3차 북벌에서 현지 부족들의 신뢰를 얻고 무도와 음평 군을 점령한 제갈량의 성공을 축하했다. 또한 제갈량을 승상의 지위로 복귀시켰다.[29] 이는 초대 황제 유비 왕조 부흥의 유지를 따른 것이었지만, 당시 촉의 국력 및 군사력으로서는 상당히 무리한 것이었다.

위나라가 퇴각하면서 일대의 주민과 가축을 몽땅 데려가 버렸기 때문에 무도, 음평에 주둔한 촉군은 인력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제갈량은 다시 한중으로 돌아갔다.

7. 조진의 촉 침공 (230년)

230년 8월, 조진은 장안에서 자오곡(子午谷)을 통해 촉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다. 조예의 명령에 따라 사마의가 이끄는 또 다른 위 군대가 형주에서 한수를 따라 항해하며 촉으로 진격했다. 조진과 사마의 군대의 합류 지점은 남정현(南鄭縣; 현재의 한중시, 산시성)이었다. 다른 위 군대도 사곡 또는 무위군에서 촉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30]

위나라의 움직임을 들은 제갈량이엄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중군으로 가서 위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라고 촉구했고, 이엄은 여러 설득 끝에 마지못해 받아들였다.[31] 하후패가 330km에 달하는 자오도(子午道)를 통해 이 원정의 선봉을 이끌었을 때, 그는 현지 주민들에게 발각되었고 촉군에게 그의 존재가 보고되었다. 하후패는 주력 부대의 증원군이 도착한 후에 간신히 후퇴할 수 있었다.[32]

제갈량은 또한 위연에게 적 후방으로 병력을 이끌고 양계(陽谿; 현재의 우산현 서남쪽)로 가서 강족에게 위나라에 대항하여 촉한에 합류하도록 장려하도록 했다. 위연은 곽회비요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33] 이후, 이 분쟁은 소규모 교전만 벌어지는 장기적인 교착 상태가 되었다. 한 달 이상 진전이 지지부진하고, 막대한 손실과 자원 낭비를 우려한 위나라 관리들은 캠페인 종료를 요청하는 상소를 연이어 보냈다. 험난한 지형과 30일 이상 지속된 폭우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조예는 230년 10월까지 캠페인을 중단하고 장교들을 소환하기로 결정했다.[34]

8. 제4차 북벌 (231년)

231년, 제갈량은 네 번째 북벌을 감행하여 다시 기산을 공격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기계 장치인 목우유마를 사용하여 전선으로 식량을 수송했다.[35] 촉군은 천수군을 공격하여 기산을 포위했는데, 위나라 장수인 가사(賈嗣)와 위평(魏平)이 방어하고 있었다.[36] 제갈량은 기산에서 선비족의 수장인 가비능을 설득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촉을 지원하도록 했다. 가비능은 북지군으로 가서 현지인들을 모아 촉을 지원하게 했다.[37]

당시 위나라 대원수인 조진이 병에 걸리자, 위 황제 조예는 장수 사마의에게 장안으로 이동하여 관중 지역에서 촉의 침략에 대비한 위나라 방어를 감독하라고 명령했다. 사마의는 전투 준비를 마친 후 장합, 비요, 대릉(戴陵) 및 곽회를 부하로 삼아 위군을 이끌고 유미현(隃麋縣; 현재의 건양현 동쪽, 산시성)으로 가서 주둔했다.[38] 그는 비요와 대릉에게 4,000명의 병사를 주어 상규현(上邽縣; 현재의 천수, 간쑤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기산으로 가서 가사와 위평을 도왔다.[39]

제갈량은 위군의 접근을 알게 되자 군대를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한 그룹은 기산에 남겨두고, 자신이 다른 그룹을 이끌고 상규현을 공격했다. 그는 곽회, 비요, 대릉을 격파하고 병사들에게 상규현의 곡물을 수확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사마의는 기산에서 돌아와 상규현으로 향했고, 이틀 만에 그곳에 도착했다. 그때쯤 제갈량과 그의 병사들은 밀 수확을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40] 제갈량은 상규현 동쪽의 한양(漢陽)에서 사마의와 마주쳤지만,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다. 제갈량은 병사들에게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했고, 사마의는 병사들에게 대형을 갖추도록 명령하는 한편 우금에게 소수의 기병 부대를 이끌고 기산으로 가도록 했다. 제갈량과 촉군이 노성(鹵城)으로 물러나 남북의 언덕을 장악하고 강을 자연 방벽으로 삼으면서 대치 상태는 끝났다.[41][42]

부하들이 거듭 공격을 촉구했지만, 사마의는 촉의 진영 배치를 보고 주저했다. 그러나 결국 가사와 위평이 그를 조롱하며 공격하지 않으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마침내 허락했다.[43] 사마의는 장합을 보내 왕평이 지키는 촉의 남쪽 진영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노성을 정면으로 공격했다.[44] 이에 제갈량은 위연, 오반, 고상에게 노성 밖에서 적을 막도록 명령했는데, 위군은 예상치 못한 엄청난 패배를 겪었다. 3,000명의 병사가 죽고, 5,000벌의 갑옷과 3,100세트의 참나무 쇠뇌가 촉군에게 노획되었다.[45] 비록 피해가 컸지만 사마의는 여전히 상당한 군대를 유지했고, 이를 이끌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식량 부족으로 인해 주도적인 공격을 가할 수 없었다. 악천후로 인해 촉의 물자 수송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했다. 식량 수송을 담당한 촉의 장군 이엄유선 황제가 철수를 명령했다고 거짓으로 주장했다. 《진서》는 사마의가 이 시점에 촉의 주둔지를 공격하여 촉의 "엄호진영"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제갈량은 노성을 포기하고 밤을 틈타 철수했지만, 사마의는 그를 추격하여 촉군에 약 10,000명의 사상자를 냈다.[46] 《진서》의 이 기록은 역사가들에 의해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47][48] 11세기의 뛰어난 연대기적 역사서인 《자치통감》에는 포함되지 않았다.[49]

삼국지》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제갈량은 패배가 아닌 보급 부족으로 인해 촉으로 퇴각했고,[50][51] 위군은 그를 추격했다. 추격은 위나라에게 완전히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사마의는 장합에게 적의 기세를 이용하여 더욱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위략》에는 장합이 사마의의 명령을 거부하고, 고전적인 군사 교리에 따르면 자국 영토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나 사마의는 듣지 않고 장합에게 이 명령을 강요했다. 실제로 장합은 목문도 (현재 친저우구, 간쑤성 근처)에서 매복에 걸려 사망했는데, 제갈량은 고지대에 쇠뇌병을 매복시켜 좁은 협곡으로 들어오는 적군에게 사격하도록 명령했었다. 장합은 다리가 부러져 사망했다. 《진서》의 기록과는 달리, 위군은 촉의 퇴각하는 군대를 추격하다 큰 피해를 입었다.[52]

9. 제5차 북벌 (234년)

제갈량은 마지막으로 중원을 점령하겠다는 마음으로 5번째 중원 침략을 시도했다. 제갈량은 오장원에 주둔하고, 위수 남쪽에 맹염에게 진을 치게 했다. 사마의는 맹염의 부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제갈량은 둔전을 시행하며 장기전을 준비했다. 또한 북쪽의 가정, 천수를 공략하는 계책을 세우고 무공과 장안을 공격하는 척했다(성동격서). 그러나 곽회는 이를 간파했고, 제갈량은 결국 장기적인 대치 상황에서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53][54]

234년 봄, 제갈량은 10만 명이 넘는 촉군을 이끌고 사곡을 통해 미현 근처 위수 남쪽 강둑의 오장원에 진을 쳤다. 흘러가는 말을 이용하여 식량을 수송하고, 군사들에게 위수 남쪽 강둑에서 민간인과 함께 작물을 재배하는 둔전 계획을 시행했다. 또한 군인들이 민간인의 작물을 빼앗는 것을 금지했다.[53][54]

이에 대응하여 위나라 장군 사마의는 병력과 2만 명의 증원군을 이끌고 오장원으로 가서 촉군과 교전했다. 초기 소규모 교전[55]과 촉 진영에 대한 야간 기습 이후,[56] 사마의는 위나라 황제 조예로부터 진지를 고수하고 촉군과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제갈량은 사마의를 도발하기 위해 여자 장신구를 보내는 등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사마의는 응하지 않았다. 조예는 신비를 특별 대표로 전선에 보내 사마의가 명령을 따르고 진영에 머물도록 했다. 제갈량은 사마의가 자신의 조롱을 참지 못할 것이라고 위나라 군인들에게 보여주고 그의 부하들이 전투를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 화가 난 척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57][58]

제갈량이 사마의를 만나기 위해 사자를 보냈을 때, 사마의는 사자에게 제갈량의 일상과 생활 조건에 대해 물었다. 사자는 제갈량이 하루에 3승에서 4승의 곡물을 소비하고 사소한 범죄에 대한 처벌과 같은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관리한다고 답했다. 이를 들은 사마의는 제갈량이 곧 죽을 것이라고 예측했다.[59][60]

오장원에서 100일 넘게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61] 234년 9월 11일에서 10월 10일 사이, 제갈량은 위독해져 진영에서 사망했다. 그는 사망 당시 동아시아식 나이로 54세였다.[62]

사마의는 제갈량이 병으로 죽고 촉군이 진영을 불태우고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추격했다. 양의와 강유의 지휘하에 촉군은 방향을 돌려 전투를 준비했고, 사마의는 군대를 물리고 퇴각했다. 며칠 후 촉 진영의 잔해를 조사하면서 사마의는 제갈량을 "천재"라고 평가했다.[63] 촉군이 서둘러 퇴각한 것을 본 사마의는 제갈량이 실제로 죽었다고 판단하고 다시 추격했다. 사마의가 적안(赤岸)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곳 주민들에게 제갈량에 대해 물었고,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겁주다."라는 속담을 듣게 되었다. 그는 "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예측할 수 있지만 죽은 사람들의 생각은 예측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64][65] 한편, 6번째 북벌의 실패로 촉한은 일단 성도로 물러갔다. 이 과정에서 양의와 위연의 내분이 일어난다.

10. 결과 및 영향

제갈량의 북벌은 위(魏)나라 군에 피해를 입히고, 왕쌍, 장합 등 여러 위나라의 뛰어난 장수를 죽였으며, 무도군과 음평군 두 군을 점령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67] 228년 제1차 북벌에서는 가정 전투에서 마속장합에게 패배하여 실패했지만, 강유라는 인재를 얻었다.[67] 그러나 제갈량의 전략적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제갈량 사후, 그의 후계자 장완은 북벌을 계획했지만 실현하지 못하고 병사했다. 이후 강유가 군권을 잡고 북벌을 재개했지만, 잦은 북벌로 인해 촉한의 국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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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Sanguozhi vol. 35
[3] 서적 Sanguozhi vol. 35
[4] 논문 Zhuge Liang and the Northern Campaign of 228–234 https://doi.org/10.1[...] 199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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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서적 Analysis of the Three Kingdoms, Vol. 2, Vietnamese translation Publisher of People's Public Security 2010
[67] 문서 別途に漢水を下り、上庸方面を攻める東進も諸葛亮、蔣琬時代に試みを行われている。諸葛亮時代は魏に降伏した孟達を離反させることで上庸方面の占拠を試みるが、孟達が司馬懿らに撃退されたため断念した。蔣琬時代は指揮を執る蔣琬がしばしば病気がちになって実行が遅れたことと、撤退時に漢水を遡らなければいけない分追撃を受けやすい事から群臣の反対が大きく、断念している。
[68] 서적 Spring and Autumn Annal of Han and Ji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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