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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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가이는 소련과 북한의 정치인으로, 소련파의 지도자였다. 그는 1908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소련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성장했고, 8.15 해방 후 북한에 진출하여 조선로동당 부위원장, 당 서기 등을 역임하며 당 조직 건설에 기여했다. 그러나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부총리로 좌천된 후, 1953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암살 의혹을 낳았으며, 북한 권력 투쟁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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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가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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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허가이 |
| 출생 이름 |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 |
| 로마자 표기 | Heo Gai |
| 한자 표기 | 許哥誼 |
| 러시아어 표기 |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 |
| 출생일 | 1908년 3월 18일 |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하바롭스크 |
| 사망일 | 1953년 7월 2일 |
| 사망지 | 평양, 북한 |
| 배우자 | 안나 이노켄티예브나 리 (1927년-1947년, 사별) 니나 최 (1949년~) |
| 자녀 | 장녀 허넬라, 차녀 허리라, 2남 |
| 직업 | 정치인 |
| 활동 이념 | 공산주의 |
| 관련 활동 | 노동운동 |
| 정치 경력 | |
| 직책 | 내각 부총리 |
| 임기 시작 | 1951년 11월 4일 |
| 임기 종료 | 1953년 7월 2일 |
| 총리 | 김일성 |
| 직책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
| 임기 시작 | 1949년 6월 24일 |
| 임기 종료 | 1953년 7월 2일 |
| 당위원장 | 김일성 |
| 제2비서 | 이승엽 |
| 제3비서 | 김삼용 |
| 주요 인물 | 박헌영, 홍명희, 김책, 최창익, 최용건 |
2. 생애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헤가이(러시아어: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Хегай, 1908년 3월 18일 ~ 1953년 7월 2일)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으며, 한국 이름은 허가이(許哥而)이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제국 시대 한국 학교 교사였다. 많은 고려인들과 달리 허가이는 출생 당시 한국 이름을 갖지 못했으며, 그의 한국 이름은 러시아 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2]
어린 시절 고아가 된 허가이는 1911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 후 아버지가 자살하면서 하바롭스크 금광에서 일하던 삼촌에게 길러졌다. 1920년, 열두 살 때 가계를 돕기 위해 담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3]
허가이는 가족의 계급 상승을 위해 공산주의 정치에 참여했다. 1920년대 내내 소련에서 회의와 집회에 참석했고, 22세에 공산당에 가입하여, 뛰어난 조직력으로 극동 소비에트 공산주의 청년 동맹 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열아홉 살에 소련 고려인인 안나 이노켄티예브나 리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1933년 모스크바로 가서 스베르들롭스크 전연방 공산 농업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나 1935년 "가정 문제"로 중퇴했다.
1937년 스탈린의 숙청이 있었으나, 허가이는 숙청되지 않았다. 1937년 말, 허가이는 임박한 체포를 대비해 문간에 가방을 준비해 두었으나, 결코 체포되지 않았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몇 년 동안, 허가이는 숙청으로 인해 당에서 제명된 후 당원으로 복귀하기 위해 심사를 받는 동안 가족을 우즈베키스탄의 양기율로 데려갔다. 결국 그는 무죄로 판명되어 복권되었지만, 당에서 이전 직책으로 돌아가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1945년, 그는 다른 열두 명의 남성들과 함께 소련 당국에 의해 러시아와 한국 간의 통역으로 극동으로 파견되었고, 조선로동당 내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3][4]
1946년, 허가이는 김일성, 김두봉, 주영하, 최창익과 함께 정부의 새로운 지도자를 결정하기 위해 구성된 정치위원회를 구성했다. 허가이는 소련 점령 당국 대표로 선출되었다.
1948년 3월 제2차 당 대회에서 허가이는 예정에 없던 연설을 통해 일부 관리들을 비난했다. 허가이는 오기섭과 최영달을 당의 발전을 희생하면서까지 자만하고 스스로를 변호했다고 비난했으며, 심지어 오기섭의 개인 영웅주의를 비난하기도 했다.
1948년 9월 중앙위원회 제3차 확대회의에서 허가이는 주영하를 대신하여 당 부위원장 겸 검열위원장에 임명되었고, 김일성은 위원장을 맡았다. 1949년 6월, 북조선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의 두 중앙위원회의 첫 번째 합동회의에서, 김일성은 공식적으로 노동당 위원장으로, 허가이는 제2부위원장 겸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이 기간 동안 허가이는 1947년 평양에서 결핵으로 첫 번째 아내가 사망한 후 두 번째 아내 니나 초이와 1949년 1월 1일에 결혼했다. 니나 초이는 1937년부터 1939년까지의 대숙청을 "살아남은" 적군의 한국인 장교인 표트르 이바노비치(최표독)의 딸이었다.
2. 1. 소련에서의 성장과 초기 정치 활동
1908년 러시아 제국 연해주 포시예트 항에서 함경북도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게오르기였다.[2] 9세 때 부모를 잃고 삼촌 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191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몇 달 후 아버지가 자살했다. 형제들과 함께 금광에서 광부로 잠시 일했고, 비숙련 노동자 또는 작은 장사를 하는 행상인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삼촌에게 길러졌다. 1920년, 하바롭스크의 담배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신문팔이, 이발소 견습생, 일용직 노동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독서를 좋아했고, 여러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학업에 매진하여 조선인 학교에 다녔고, 거기서 러시아인 중학교로 진학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보통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1924년 콤소몰(공산주의 청년 동맹)에 가입했다. 1926년경부터 유망한 전속 직원으로서 많은 회의와 집회에 참석했고, 1930년 11월 22세의 나이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당시 추천인은 당시 고려인 사회의 지도자였던 아파나시 김과 극동 지방 콤소몰 위원회 서기 리소프스키였다. 1932년 9월 콤소몰 극동 지역위원회 비서로 선출되는 등 소련 공산당 내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1936년 말에는 고려인 자치지인 포셰트 조선 민족 지역 콤소몰 제1서기에, 이듬해에는 같은 지역 당 제2서기에 취임했다. 이때 동료 활동가들이 후일 북한 건국 초기의 "소련파"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1933년 모스크바의 스베르들롭스크 전연방 공산 농업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나, 1935년 "가정 문제"로 중퇴했다. 일본과 소련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고려인들은 엄격한 감시 하에 놓였다. 그리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의심받은 고려인 당 간부들은 잇따라 숙청되었다. 제1인자였던 아파나시 김도 1936년 관동군과 결탁하여 반소 폭동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1938년 처형). 허가이도 예외는 아니었고, 직책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되었다. 1937년 스탈린의 상류 및 중류 당 지도자에 대한 숙청이 일반화되었을 때, 그가 숙청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다.
1937년 말, 허가이는 매우 불안해져서 임박한 체포를 대비해 문간에 가방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허가이는 결코 체포되지 않았다. 스탈린의 의심은 겐리히 류시코프의 지휘 아래 1937년부터 실시된 모든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라는 폭거로 나타났다. 많은 비극을 가져온 이 강제 이주였지만, 허가이는 이 혼란 속에서 관헌의 눈을 피해 숙청을 모면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몇 년 동안, 허가이는 숙청으로 인해 그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당에서 제명된 후 당원으로 복귀하기 위해 심사를 받는 동안 가족을 우즈베키스탄의 양기율로 데려갔다. 1939년 복당이 허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우즈베키스탄 지역 당 위원회 서기 등을 역임하며 당 중견 간부로 활동했다.
2. 2. 북한에서의 정치 활동
1945년 12월 소련군 민정부 요원으로 북한에 들어와 소련 군정청 관리로 활동하였다.[3][4] 김두봉은 그에게 '허가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당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9월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검열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3] 1949년 6월 남로동당과 북로동당의 합동회의에서 당 제2부위원장 겸 제1서기로 선출되어, 김일성, 박헌영에 이어 당내 서열 3위의 위치에 올랐다. 소련 당국은 허가이를 조직 전문가로 여겨 당 내에서 그의 승진을 이끌었다.
허가이는 조선로동당 창립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 문제의 교수"라고 불릴 정도로, 당 조직 운영은 전적으로 그의 손에 맡겨졌다.
2. 3. 김일성과의 갈등 및 몰락
1951년 9월, 허가이는 김일성과 당 재조직 방식 및 당원 관리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6] 허가이는 엘리트 중심의 당 조직을 옹호한 반면, 김일성은 대중 정당을 지향했다.[6]한국 전쟁 중, 허가이는 당 검열위원장으로서 당에 대한 충성심을 점검하기 위해 하급 당원들을 무차별적으로 숙청했다는 비판을 받았다.[6] 북한 자료에 따르면, 허가이는 전쟁 중 당원 60만 명 중 45만 명 이상을 제명 또는 처벌했다.[6]
1951년 11월, 허가이는 당 조직부장에서 제명되고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5] 이는 소련계 한국인 세력의 영향력 약화와 김일성의 권력 강화를 위한 조치였다.[6] 이후 부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상실한 상태였다.[6] 김일성은 제명된 당원들을 모두 복권시켰다.[6]
2. 4. 죽음과 의혹
1953년 7월 2일, 허가이는 평양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 지하 방공호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2] 공식 사인은 자살로 알려졌으나, 암살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2]허가이가 권총을 두 정이나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장총에 가슴을 맞고 사망한 점,[8] 사망 직전까지 장인이자 인민군 탱크부대장이던 최표덕과 대화에서 자살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8] 등이 암살 의혹의 근거로 제시된다. 허가이의 딸 허리라는 김일성의 숙청 대상이 되자 아버지가 암살당했다고 주장했다.[9] 친구였던 장학봉도 허가이가 등 뒤에서 총을 맞았다며 암살 의혹을 제기했다.[9]
허가이는 사망 이틀 전 소련 측 참사관 수즈달료프를 찾아 자신이 비판받고 부수상직에서 해임될 위기에 처했다고 말하며, "김일성을 신뢰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 그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3. 가족 관계
허가이는 두 번 결혼했다.
장인은 최표덕으로, 두 번째 부인 최니나의 아버지이다.
4. 평가 및 영향
유성철은 허가이에 대해, 재능이 있고 실무는 잘 처리했지만, 인격적으로 일국의 지도자가 될 만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술을 매우 좋아했고, 마실수록 술버릇이 극도로 나빠지는 인물이었으며, 만취하여 여러 차례 추태를 부려 소련 점령 당국과 완전한 신뢰 관계를 맺지 못했다고 한다.[1]
허가이(許哥誼)라는 이름은, 또는 이름의 어원이 된 '헤가이(ヘガイ)'의 '가이(ガイ)'는 조선계 소련인 사이에서는 "~집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지만, 황해도나 평안도 등의 지방에서는 개를 가리키는 방언으로 사용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놈"이라는 뜻의 속어로 사용되기도 했다.[2] 소련계 조선인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반감도 있어, 허가이라는 이름을 고치라고 충고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2]
허가이라는 이름을 제안한 사람은 김두봉이었다고 알려져 있다.[3] 소문에 따르면 김두봉은 접미사 "gai"를 이름으로 하여 "哥誼"로 했다고 한다.[3] 북한에서 허가이와 함께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언급하지만, 그들의 오해일 가능성도 있었다.[3]
5. 대중 문화
참조
[1]
서적
モスクワと金日成
[2]
웹사이트
Biographies of Soviet Korean Leaders : 허가이(Ho, Ka-I)
https://www.loc.gov/[...]
[3]
웹사이트
허가이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4]
웹사이트
http://www.konas.net[...]
[5]
뉴스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http://media.daum.ne[...]
[6]
서적
박헌영 평전
[7]
간행물 # 출처가 불분명하여 간행물로 분류
[8]
서적
박헌영 평전
[9]
뉴스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http://media.daum.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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