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련창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혁련창은 하나라의 2대 대선우로, 425년 혁련발발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서진을 공격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서평까지 진출했으나 북위의 침공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북위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수도 통만성을 잃고 포로로 잡혔다. 북위에서 회계공, 진왕으로 봉해졌으나, 반란을 시도하다가 434년에 살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하의 황제 - 혁련발발
흉노족 출신인 혁련발발은 후진의 장수로 반란을 일으켜 하를 건국하고 혁련으로 성을 바꾸었으며, 통만성 건설과 관중 지역 점령 등 세력을 확장했으나 포악하고 잔혹한 성품으로 공포 정치를 펼쳤다. - 하의 황제 - 혁련정 (하)
혁련정은 428년 하나라의 대선우로 즉위하여 관중과 오르도스 지역을 탈환했으나, 북위의 공격으로 멸망 직전 상으로 도주하고, 남안과 북량을 공격하다가 토욕혼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혀 432년 북위에 의해 처형되었다. - 북위 사람 - 북주 명제
북주 명제는 우문태의 맏아들로 효민제 폐위 후 옹립되어 천왕을 칭하다 황제가 되었으나 우문호에 의해 독살당했다. - 북위 사람 - 걸복치반
걸복치반은 서진의 군주로, 후진과 남량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세력을 확장하여 즉위, 토욕혼, 남량, 후진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고 북량과의 전쟁을 치렀으며, 말년에는 북위에 신하를 자처했다.
혁련창 | |
---|---|
기본 정보 | |
이름 | 헬리안 창 |
한자 표기 | 赫連昌 |
가문 | 헬리안 |
왕조 | 호하 |
신상 정보 | |
출생일 | 알 수 없음 |
사망일 | 434년 5월 7일 |
통치 정보 | |
직위 | 호하의 황제 |
재위 기간 | 425년 - 428년 |
연호 | 청광 (承光) |
연호 기간 | 425년 - 428년 |
이전 통치자 | 헬리안 발발 |
다음 통치자 | 헬리안 정 |
가족 관계 | |
성 | 허롄 (赫連) |
배우자 | 시핑 공주 |
아버지 | 무렬제 |
2. 생애
혁련창은 혁련발발의 아들로, 용맹한 군인이었지만 국정 운영 능력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 사후 황제가 되었으나, 영토 확장에 대한 야심은 북위의 침공으로 좌절되었다.
425년 혁련발발이 죽자 하나라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혁련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지만, 이듬해인 426년 북위의 공격을 받아 관중의 여러 성을 빼앗겼다.
426년, 서진이 북량을 공격하자, 북량은 혁련창에게 사신을 보내 서진의 수도 부한(현재의 린샤 후이족 자치주, 간쑤성)을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이에 혁련창은 장군 호로고(呼盧古)를 보내 완천(현재의 바이인, 간쑤성)을, 위벌(韋伐)을 보내 남안(현재의 딩시, 간쑤성)을 공격하게 했다. 서진은 완천을 지켰으나 남안은 함락되었다. 그해 겨울, 호로고와 위벌은 부한을 공격하여 서진의 군주 기부강귀가 수도를 정련(역시 린샤에 위치)으로 옮기게 했다. 호로고와 위벌은 서진의 또 다른 주요 도시인 서평(현재의 시닝, 칭하이성)을 점령했지만 곧 철수했다.
같은 해 겨울, 북위의 태무제가 얼어붙은 황하를 건너 통만성을 기습했다. 혁련창은 직접 북위 군대와 교전했으나 패배하고 성으로 후퇴했다. 북위 군대는 통만 주변을 약탈한 후 철수했다.
한편, 다른 두 북위 군대가 다른 두 개의 중요한 하나라 도시를 공격했다. 장군 닥시진(達奚斤)은 부반(현재의 윈청, 산시성)을, 장군 보기(普幾)는 산성(현재의 산먼샤, 허난성)을 공격했다. 보기(普幾)는 산성을 점령했지만 병으로 사망하여 철수했다. 닥시진이 부반으로 접근했을 때, 부반을 지키던 하나라 장군 혁련을두(赫連乙斗)는 통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사자가 통만이 함락되었다고 잘못 알렸다. 혁련을두는 부반을 버리고 장안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혁련창의 동생 혁련조흥(赫連助興)과 함께 안정(현재의 핑량, 간쑤성)으로 도망쳐 북위가 하나라의 남쪽 절반을 점령했다.
427년 봄, 혁련창은 동생 혁련정을 보내 장안을 되찾으려 했다. 혁련정은 장안에서 닥시진과 대치했다. 한편, 북위 태무제는 다시 통만을 공격했고, 혁련창은 처음에는 혁련정을 소환하려 했다. 혁련정은 통만을 지키면서 북위 군대의 전력을 소모시키고, 장안을 점령한 후 돌아와 북위 군대를 양면에서 공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혁련창은 이에 동의했지만, 북위 군대가 식량이 떨어져 취약하다는 잘못된 정보를 받고 군대를 이끌고 성에서 나와 북위 군대를 공격했다. 처음에는 승리했지만 북위 군대의 반격으로 패배했고, 혁련창의 동생과 조카가 전사했다. 혁련창은 상규(현재의 톈수이, 간쑤성)로 도망쳤다. 북위 군대는 통만에 진입하여 혁련발발과 혁련창의 황후, 여동생을 포함한 귀족과 황실 일족을 사로잡았다. 통만 함락 소식을 들은 혁련정은 상규에서 혁련창과 합류했다. 닥시는 하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추격했다.
428년 봄, 닥시의 부하 위치권(尉遲眷)이 상규를 포위하자, 혁련창은 평량으로 철수했다. 닥시의 군대가 도착했지만 질병에 시달렸고, 혁련창은 반격하여 북위 군대를 안정으로 피신하게 했다. 혁련창은 매일 공격을 가했고, 안정이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닥시의 부하 안치길(安遲頡)과 위치권은 닥시의 허락 없이 혁련창을 사로잡으려 공격했다. 혁련창은 말에서 떨어졌고, 안치길(安遲頡)에게 포로로 잡혔다. 혁련정은 평량으로 철수하고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2. 1. 즉위 전
414년, 혁련발발은 장남 혁련규를 태자로 삼고, 혁련창을 태원공으로 삼았다. 416년, 혁련발발이 음밀(현재 감숙성 평량시)을 점령하자 혁련창을 옹주(대략 현재의 섬서성 중부 및 북부 지역) 지사로 임명하여 음밀을 방어하게 했다.[1]417년, 동진의 유유가 후진을 멸망시키고 장안을 지배했으나, 어린 아들 유의진에게 맡기고 동진으로 돌아갔다. 이에 혁련발발은 혁련규, 왕매덕과 함께 혁련창에게 장안을 공격하게 했다. 혁련창이 동관(현재 섬서성 위남시 동관현)을 포위하자 동진군은 도망갈 곳을 잃었고, 이듬해 퇴각하던 중 하나라에 의해 격파되었다.[2] 동진의 주령석과 주초석은 장안 시민에게 쫓겨 조공루(위남에 위치)로 도망쳤으나 혁련창에게 포위당해 물길이 끊긴 채 포로로 잡혀 죽임을 당했다.[3]
424년, 혁련발발은 장안에 주둔한 태자 혁련규를 폐하고, 넷째 아들 주천공 혁련륜을 태자로 삼았다. 폐위된 혁련규는 아버지에게 반발하여 장안에서 군사를 일으켜 7만 명의 군사로 통만성을 공격했고, 3만 명으로 항전한 이복 동생 혁련륜을 고평(현재 영하 회족 자치구 고원시)에서 죽였다. 그러나 혁련창이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혁련규를 습격하여 죽이고, 8만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통만으로 돌아왔다. 혁련발발은 크게 기뻐하며 혁련창을 태자로 삼았다.[4]
2. 2. 즉위 후
425년 혁련발발이 죽자 하나라의 세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혁련발발의 아들이자 2대 대선우가 된 혁련창은 이듬해 5만 명의 병력을 두 갈래 길로 보내 서진을 공격하여 수도 부한을 함락하고 서평까지 진출했으나, 북위는 이 기회를 틈타 하나라에 대한 제1차 원정군을 보내 관중의 여러 성을 점령했다.427년, 북위는 제2차 원정군을 파견해 수도 통만성을 함락시켰다. 혁련창은 통만성을 탈출해 안정을 수도로 삼아 저항을 계속했으나, 각지에서 북위에게 패배해 정권은 와해되었다.[1]
428년, 혁련창은 북위에게 사로잡혔다. 이후 혁련정이 평량에서 대선우로 즉위하였다.[2]
434년, 혁련창은 북위에 의해 살해당했다.[3]
진흥 7년(425년)에 부황의 사망으로 황위를 계승하여 제2대 황제로 즉위했다. 승광 2년(426년)에 5만 명의 병사를 두 갈래로 이끌고 서진을 공격하여 수도인 부한을 함락시키고 서평까지 진출했으나, 오히려 틈을 노린 본국을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에게 공격받아 관중의 여러 성을 점령당했다. 승광 3년(427년)에는 북위의 침공을 받아 수도인 통만성을 점령당했다. 혁련창은 통만성에서 탈출하여 상규를 수도로 정하고 항전했으나, 각지에서 북위군에게 패배하여 승광 4년(428년)에 안정에서 북위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 후 북위의 보호를 받아 회계공이 되었고, 신가 3년(430년)에 진왕으로 봉해졌으나, 연화 3년(434년)에 북위에 의해 살해당했다.
2. 3. 북위에서의 생활과 최후
428년, 혁련창은 북위에 사로잡혀 수도 평성(지금의 다퉁시, 산시성)으로 보내졌다. 태무제는 그를 죽이지 않고 서궁을 거처로 하사하고 황제에 걸맞은 물품을 지급했다. 태무제는 그를 회계공(會稽公)으로 봉하고 자신의 누이 십평공주를 혁련창에게 시집보냈다. 그는 종종 혁련창과 함께 사냥에 나섰는데, 혁련창이 강대한 군인으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북위 관리들은 혁련창이 황제를 암살할까 두려워했지만, 황제는 혁련창을 신뢰하며 계속해서 그를 잘 대했다.429년, 혁련창은 재상 최호가 유연에 대한 원정을 반대하는 점성가 장연(張淵)과 서변(徐辯)과 대립할 때 황실 자문 회의에서 증인으로 활용되었다. 이전에 하나라 궁정 점성가였던 이들은 별들이 유연에게 유리하며 원정이 무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호는 자신도 점성가였기에, 장연과 서변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혁련창이 통만성이 함락되기 전에 그에게 경고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만약 그들이 일어날 일을 알고도 혁련창에게 경고하지 않았다면 불충한 것이고, 몰랐다면 예언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혁련창이 참석한 가운데 장연과 서변은 그가 자신들이 그에게 임박한 재앙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반대를 철회했다.
430년, 태무제는 혁련창의 작위를 진왕(秦王)으로 승격시켰다. 그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혁련창을 이용하여 그의 형제 혁련정에게 대항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겨울, 태무제는 혁련창으로 하여금 혁련사간에게 평량을 항복하도록 설득하게 했다. 혁련사간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두 달도 안 되어 항복했다. 431년, 북위군의 압박을 받은 혁련정은 먼저 서진과 그 군주 걸복모말을 멸망시킨 후 서쪽으로 향하여 북량을 공격하고 그 영토를 점령하려 했으나, 도중에 토욕혼 칸 모용목궤에게 가로막혀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 이로써 하나라는 멸망했다.
434년, 알 수 없는 이유로 혁련창은 북위에 반기를 들고 평성에서 서쪽으로 도주했다. 그는 황하 서쪽에서 북위 장수들에게 가로막혀 살해되었다. 북위는 이후 그의 살아남은 형제들을 처형했다.
3. 연호
연호 | 기간 |
---|---|
승광(承光) | 425년 ~ 428년 |
4. 가족 관계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魏書
[6]
서적
資治通鑑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