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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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청에 항복하지 않고 순절한 삼학사 윤집, 홍익한, 오달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숙종 14년(1688)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이후 김상헌과 정온을 추가로 배향하고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 때에도 존속되었으며, 현재까지 매년 제향이 열리고 있다. 현절사는 광주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경기도지사가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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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절사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위치 정보 | |
| 기본 정보 | |
| 한글 | 현절사 |
| 한자 | 顯節祠 |
| 로마자 표기 | Hyeonjeolsa |
| 종류 | 사당 |
| 상세 정보 | |
| 지정 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 |
| 지정일 | 1972년 5월 4일 |
|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32-42 (산성리) |
| 관련 위치 | 남한산성 |
| 추가 정보 | 삼전도의 굴욕에 반대한 오달제, 윤집, 홍익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후 김상헌, 정온, 최명길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
2. 역사
병자호란(1636) 때 삼학사 (윤집, 홍익한, 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숙종 14년(1688) 남한산성 기슭에 세워진 사당이다. 숙종 19년(1693) ‘현절사’라는 이름을 받았다. 우국충절을 장려할 목적으로 모든 경비를 나라에서 지원하였다. 숙종 37년(1711) 김상헌과 정온을 함께 모시게 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형태이다. 앞면은 제사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트여 있고, 옆면은 바람막이 풍판과 방화벽으로 마감하였다. 1871년(고종 8년) 서원 철폐 때에도 제외되어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2. 1. 건립 배경
병자호란(1636) 때 삼학사인 윤집, 홍익한, 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 현절사이다. 삼학사는 청나라에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다가 끌려가 참형을 당했다.[8]조선 숙종 14년(1688)에 남한산성 기슭에 처음 지어졌으며, 숙종 19년(1693)에 나라에서 ‘현절사’라는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 우국충절을 장려하기 위해 모든 경비를 나라에서 지원하였다. 숙종 37년(1711)에는 김상헌과 정온을 함께 모시게 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 지었다.[8]
삼학사의 사상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와 충군 사상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홍익한은 저서 『존주휘편』에서 “선조 대대로부터 중화의 번방으로 섬기며, 강대한 주군에게 일심으로 섬기는 것만이 도리”라고 주장했다.[3] 이는 중화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이 가장 충실한 모범 속국이었음을 의미한다.[4]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한 것은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조선에서는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야인(野人)”이라 부르며 경멸했고,[5]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커졌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며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만 했다.[5] 이후 조선은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은 중화 문명이 소멸한 땅이라 여기고, 조선만이 중화 문명의 정통 계승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5] 이러한 배경 속에서 송시열은 삼학사의 업적을 칭송하는 『삼학사전』을 저술하였고, 이를 계기로 1681년에 현절사가 건립되었다.[6]
2. 2. 건립과 변천
병자호란(1636) 때 삼학사 윤집, 홍익한, 오달제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삼학사는 청나라에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맞서 싸우다 결국 참형을 당했다.[8]숙종 14년(1688)에 삼학사가 척화의 의리를 내세우던 남한산성 기슭에 처음 지어졌으며, 숙종 19년(1693)에는 나라에서 ‘현절사’라는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렸다. 우국충절을 장려하기 위해 모든 경비를 나라에서 지원하였다. 숙종 37년(1711)에 김상헌과 정온을 함께 모시게 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8]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앞면은 제사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트여 있고, 옆면은 바람막이 풍판과 방화벽으로 마감하였다.
1871년(고종 8년) 전국의 서원 및 사우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 때에도 현절사는 제외되어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한 것은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경악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조선에서는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은 이미 중국 문명(中國文明)이 소멸한 “성예수역(腥穢讐域)(생臭하고 더러운 원수의 땅)”이며, 대중화(大中華)인 명나라가 멸망함으로써 지상에 존재하는 중화는 조선뿐이라고 보았다. 조선의 양반들은 자국을 “소화(小華)”, “소중화(小中華)”라고 자칭하며, 중국 문명(中國文明)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5] 이러한 상황에서 1671년, 송시열이 삼학사(三學士)의 업적을 칭송하고,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저술한 것을 계기로 1681년에 현절사(顯節祠)가 건립되었다.[6]
3. 제향
1871년(고종 8년) 전국의 서원 및 사우 철폐 때에도 현절사는 제외되어 존속되었으며, 매년 음력 9월 10일(양력 10월 20일경)에 제향을 올린다.[1] 봄에는 하남시, 가을에는 광주시에서 문화원을 통해 250만원을 지원하고 있으며, 진행은 각 유도회에서 맡고 있다.[1] 2008년 4월 21일 광주시의 향토문화유산(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1]
3. 1. 삼학사와 배향 인물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맞서 싸운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현절사가 세워졌다. 숙종 14년(1688년)에 유수 이세백이 처음 사당을 세웠고, 숙종 19년(1693년)에 임금이 '현절사'라는 이름을 내렸다.[8] 이후 숙종 25년(1699년)에는 삼학사와 함께 청에 항복하길 거부했던 김상헌과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8]삼학사의 사상은 명나라에 대한 충성과 주군에 대한 충성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홍익한은 자신의 저서 『존주휘편』에서 "선조 대대로부터 중화의 번방(제후국)으로 섬기며, 강대한 주군에게 일심으로 섬기는 것만이 도리"라고 주장했다.[3] 이는 중화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이 가장 충실한 모범 속국이며, "예의의 나라" 그 자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4]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것은 조선의 양반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조선에서 "야인"이라 불리며 경멸받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5] 병자호란에서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삼전도의 맹약을 맺어야 했다.[5]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양반들은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은 이미 중화 문명이 사라진 땅이며, 명나라가 멸망했으므로 조선만이 유일한 중화 문명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을 "소중화"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5] 1671년 송시열은 삼학사의 업적을 기리는 『삼학사전』을 저술했고, 이를 계기로 1681년 현절사가 건립되었다.[6]
3. 2. 제향 의례
1871년(고종 8년) 전국의 서원 및 사우 철폐 때에도 제외되어 존속되었으며, 매년 음력 9월 10일(양력 10월 20일경)에 제향을 올린다.[1] 봄에는 하남시, 가을에는 광주시에서 문화원을 통해 250만원을 지원하고 있으며, 진행은 각 유도회에서 맡고 있다.[1] 2008년 4월 21일 광주시의 향토문화유산(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1]4. 관리
2016년 12월 20일부터 경기도지사가 관리하고 있다.[7]
5. 비판적 시각
오달제, 윤집, 홍익한 삼학사의 사상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와 충군(忠君) 사상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홍익한은 저서 『존주휘편』에서 "선조 대대로부터 중화의 번방(제후국)으로 섬기며, 강대한 주군(황제)에게 일심으로 섬기는 것만이 도리"라고 주장했다.[3] 이는 중화의 천자(황제)에게 충실히 제후의 예를 다해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중화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천년 속국" 조선이야말로 가장 충실한 모범 속국이었고, 완강하게 저항하며 순순히 따르지 않는 베트남에 비하면, 바로 "예의의 나라"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4]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한 것은 조선 양반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여진족은 조선에서 "야인(野人)"이라 불리며, 남쪽의 "왜(倭)"와 함께 야만스러운 사이(四夷)로 경멸받고 있었는데,[5] 조선은 "왜"와 "야인"에 의해 잇달아 공격(임진왜란, 병자호란)을 받았다.[5] 병자호란의 결과, 1637년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겪어야 했다.[5]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은 이미 중국 문명(中國文明)이 소멸한 "성예수역(腥穢讐域, 생臭하고 더러운 원수의 땅)"이며, 명나라가 멸망함으로써 지상에 존재하는 중화는 조선뿐이라고 보았다. 조선의 양반들은 자국을 "소화(小華)", "소중화"라고 자칭하며, 중국 문명(中國文明)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청나라와 책봉 관계인 군신사대관계(君臣事大關係)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 연행사를 파견하고 공적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해야 했다.[5] 이러한 상황에서 1671년, 송시열은 삼학사의 업적을 칭송하는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저술하였고, 이를 계기로 1681년에 현절사가 건립되었다.[6]
5. 1. 삼학사 인식에 대한 비판
오달제, 윤집, 홍익한 삼학사의 사상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와 충군(忠君) 사상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홍익한은 저서 『존주휘편』에서 "선조 대대로부터 중화의 번방(제후국)으로 섬기며, 강대한 주군(황제)에게 일심으로 섬기는 것만이 도리"라고 주장하고 있다.[3] 요컨대, 중화의 천자(황제)에게 충실히 제후의 예를 다해 왔다는 것이며, 중화 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천년 속국" 조선이야말로 가장 충실한 모범 속국이었고, 완강하게 저항하며 순순히 따르지 않는 베트남에 비하면, 바로 "예의의 나라" 그 자체였다.[4]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를 자살로 몰고 간 이자성을 몰아낸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한 것은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경악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은 조선에서는 "야인(野人)"이라 불리며, 남쪽의 "왜(倭)"와 함께 야만스러운 사이(四夷)로 경멸당하고 있었다.[5] 조선은 그러한 "왜"와 "야인"에 의해 잇달아 공격을 받았다. 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5]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원군에 의해 왜군을 격퇴했지만, 병자호란은 굴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1637년 1월 30일(음력), 인조가 한강 남안 삼전도(三田洞)에 있는 청나라 군대 본영에 나아가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홍타이지가 천자(天子)임을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로 인정하는 것을 신하들 앞에서 굴욕적으로 행하고, 신종을 맹세하게 되어 굴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을 강요당했다.[5]
조선에서는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은 이미 중국 문명(中國文明)이 소멸한 "성예수역(腥穢讐域, 생臭하고 더러운 원수의 땅)"이며, 대중화(大中華)인 명나라가 멸망함으로써 지상에 존재하는 중화는 조선뿐이라고 보고, 조선의 양반들은 자국을 "소화(小華)", "소중화"라고 자칭하며, 중국 문명(中國文明)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는 책봉 관계인 군신사대관계(君臣事大關係)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조선 연행사가 파견되었고, 연호(年號)도 공적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해야 했다(조선의 양반들은 사적인 편지나 묘지 등에서는 명나라 숭정제의 연호인 숭정기원(崇禎紀元)을 19세기 말까지 계속 사용했다).[5] 그러한 시점에 1671년, 송시열이 중국의 천자에 대한 충실한 제후의 예를 다하고 중국 역대 왕조(中華帝國)의 가장 충실한 모범적인 속국(屬國)으로서 "예의의 나라"를 구현한 삼학사(三學士)의 업적을 칭송하고,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저술하여 삼학사의 업적을 칭송한 것을 계기로 1681년에 현절사가 건립되었다.[6]
5. 2. 소중화(小中華) 인식에 대한 비판
오달제, 윤집, 홍익한 삼학사의 사상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와 충군(忠君) 사상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홍익한은 저서 『존주휘편』에서 "선조 대대로부터 중화의 번방으로 섬기며, 강대한 주군에게 일심으로 섬기는 것만이 도리"라고 주장하고 있다.[3] 요컨대, 중화의 천자에게 충실히 제후의 예를 다해 왔다는 것이며, 중화제국의 관점에서 보면, 이 "천년 속국" 조선이야말로 가장 충실한 모범 속국이었고, 완강하게 저항하며 순순히 따르지 않는 베트남에 비하면, 바로 "예의의 나라" 그 자체였다.[4]1644년, 명이 멸망하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를 자살로 몰고 간 이자성을 몰아낸 청이 북경에 입성한 것은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경악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청을 건국한 여진족은 조선에서는 "야인(野人)"이라 불리며, 남쪽의 "왜(倭)"와 함께 야만스러운 사이(四夷)로 경멸받고 있었다.[5] 조선은 그러한 "왜"와 "야인"에 의해 잇달아 공격을 받았다. 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5]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원군에 의해 왜군을 격퇴했지만, 병자호란은 굴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1637년 1월 30일(음력), 인조가 한강 남안 삼전도에 있는 청나라 군대 본영에 나아가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홍타이지가 천자임을 삼궤구고두례로 인정하는 것을 신하들 앞에서 굴욕적으로 행하고, 신종을 맹세하게 되어 굴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을 강요당했다.[5]
조선에서는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은 이미 중국 문명(中國文明)이 소멸한 "성예수역(腥穢讐域, 생臭하고 더러운 원수의 땅)"이며, 대중화(大中華)인 명나라가 멸망함으로써 지상에 존재하는 중화는 조선뿐이라고 보고, 조선의 양반들은 자국을 "소화(小華)" "소중화"라고 자칭하며, 중국 문명(中國文明)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는 책봉(冊封) 관계인 군신사대관계(君臣事大關係)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조선 연행사가 파견되었고, 연호(年號)도 공적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해야 했다(조선의 양반들은 사적인 편지나 묘지 등에서는 명나라 숭정제의 연호인 숭정기원(崇禎紀元)을 19세기 말까지 계속 사용했다).[5] 그러한 시점에 1671년, 송시열이 중국의 천자에 대한 충실한 제후의 예를 다하고 중화제국의 가장 충실한 모범적인 속국(屬國)으로서 "예의의 나라"를 구현한 삼학사(三學士)의 업적을 칭송하고,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저술하여 삼학사의 업적을 칭송한 것을 계기로 1681년에 현절사가 건립되었다.[6]
참조
[1]
웹사이트
경기도 유형문화재 현절사 (顯節祠)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https://www.heritage[...]
2023-12-21
[2]
뉴스
조선왕조의 임시 수도, 남한산성
http://world.kbs.co.[...]
KBSワールドラジオ
2016-00-00
[3]
서적
만약의 근현대사
https://www.google.c[...]
扶桑社
2013-08-31
[4]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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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ag2.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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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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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대학
2014-03-26
[7]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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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0
[8]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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