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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 (15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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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온은 1569년에 태어나 1641년에 사망한 조선의 문신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돕고 정인홍의 제자가 되었으며, 광해군 때 폐모론을 반대하다 유배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척화론을 주장하며 청나라에 항거하다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은거했다. 그는 기자에 대한 고증을 통해 조선의 정체성을 강조했으며, 거창 동계 종택, 거창 모리재, 정온 동계문집 목판 등 관련 문화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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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 (1569년)
인물 정보
씨명정온
蘊 (온)
본관영일(迎日)
생년월일1569년
몰년월일1641년
직업문신, 유학자
가족 관계
정경세 (鄭經世)

2. 생애

1569년(선조 2)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서 태어난 정온은 1641년 덕유산 자락의 모리(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조선 격동기를 살았다.

1583년(선조 16) 아버지 정유명의 스승 임훈은 어린 정온을 장차 큰 인물로 예견했고, 약관에 정온은 조월천과 정한강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도와 의병을 일으켰고, 1599년(선조 32) 가야산에서 정인홍의 제자가 되었다.

1604년(선조 37) 도내 선비들과 5현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선조가 실시한 정시에서 2등을 했다.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합격, 1607년 고을 사람들의 천거를 받았다.

1610년(광해군 2) 별시 문과에 급제했으나, 영창대군 사건과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강화도에서 인조를 호위했고, 이후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척화를 주장하다 조선청나라에 항복하자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 고향에 은거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임진왜란

1569년(선조 2) 경상도 안음현 역동리(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서 태어났다. 1583년(선조 16) 아버지 정유명의 스승 갈천 임훈은 어린 정온이 지은 시문을 보고 그가 과거 급제에 그치지 않고 장차 큰 공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였다고 한다. 정온은 약관에 조월천과 정한강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를 도왔고, 1599년(선조 32) 가야산에 가서 정인홍의 제자가 되었다.

2. 2. 관직 생활과 유배

1610년(광해군 2)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서 피살되자,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은 분노하여 이원익, 심희수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하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온은 곧장 강화도의 행재소로 가서 능양군을 호위하였다. 후금 군사가 물러간 후, 한성부 우윤과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정온은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시국이 어지러우니 계속 머물러 직임을 보라며 이를 거부하였다. 1628년 승정원 도승지·예조참판, 1629년 이조참판·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나가지 않았다. 이후 고향에 머무르면서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으며, 상소문을 올려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1636년(인조 14)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상소를 올려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척화를 주장하였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맞섰다. 1637년 전세가 불리해지자 최명길 등이 화평 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정온은 이를 매국으로 보고 강력하게 척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가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한 정온은 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끝내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2. 3.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온은 곧장 강화도의 행재소로 가서 능양군을 호위하였다. 후금 군사가 물러간 후, 한성부 우윤과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정온은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시국이 어지러우니 계속 머물러 직임을 보라며 거부하였다. 1628년 승정원 도승지·예조참판, 1629년 이조참판·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나가지 않았다. 이후 고향에 머무르면서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으며, 상소문을 올려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1]

1636년(인조 14)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이때 상소를 올려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척화를 주장하였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맞섰다. 1637년 전세가 불리해지자 최명길 등이 화평 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정온은 이를 매국으로 보고 강력하게 척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능양군은 남한산성에서 내려가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한 정온은 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끝내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1]

같은 해 12월, 이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공하자(병자호란), 청을 오랑캐로 여기고, 주군중국천자에게 충실한 제후로서, 또한 중화 제국의 가장 충실한 모범 속국으로서 명나라를 성심껏 섬길 것을 주장하며, 끝까지 청과 싸울 것을 주장했다.[1] 홍익한 등과 척화론을 부르짖으며, 과의 강화에 완강히 반대했다.[1]

1637년 1월 30일, 인조한강 남안의 청군 본영에 나아가 홍타이지가 천자임을 삼궤구고두례로 인정하는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게 되자, 청에 대한 항복을 반대하며 자결을 시도했지만 죽지는 않았다.[2]

2. 4. 은거와 죽음

1638년(인조) 덕유산의 모리(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 은거하였다. 모리는 인적이 드문 골짜기로, 정온은 이곳에 풀을 엮어 집을 만들고 흙을 쌓아 침상을 만든 뒤 ‘모리구소’(某里鳩巢)라 이름 붙였다. 또한 산밭을 개간하여 기장과 조를 심어 자급자족하다 1641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3. 사상과 평가

1636년 12월, 이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공하자(병자호란), 정온은 청을 오랑캐로 여기고 명나라를 섬길 것을 주장하며 끝까지 청과 싸울 것을 주장했다.[1] 홍익한 등과 척화론을 부르짖으며, 과의 강화에 완강히 반대했다.[1]

1637년 1월 30일, 인조한강 남안의 三田渡|삼전도중국어에 있는 청군 본영에 나아가 홍타이지가 천자임을 삼궤구고두례로 인정하는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게 되자, 정온은 청에 대한 항복을 반대하며 자결을 시도했지만 죽지는 않았다.[2]

정온은 조선정복한 후 기자조선을 건국한 중국 은의 정치가 기자에 대해 고증했다. 그는 주 문왕이 기자에게 부여한 칭호에 대해 "봉함은 무왕이 봉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봉한 것이오. 받음은 기자가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받은 것이오. 하늘로 봉하고 하늘로 받았으니, 그 봉함은 기자에게 봉한 것이 아니라 그의 도에 봉한 것이오. 그 받음은 무왕의 봉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도의 봉함을 받은 것이오"라고 말했다.[3] 즉,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처럼 기자가 주 무왕에 의해 조선에 봉해진 것은 천명에 의한 인도라기보다는 기자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며, 자발적으로 동쪽으로 가서 조선정복했음을 밝히고, 기자에 의한 조선인 교화의 의의를 강조했다.[3]

4. 관련 문화재

참조

[1] 서적 李朝五百年史 https://www.google.c[...] 朝鮮研究会 1912
[2] 뉴스 日本の侵奪に対する韓国の人々の認識 https://dokdo.mofa.g[...] 外交部
[3] 뉴스 朝鮮儒者中華認同的新解釋 ─「天下」與「國家」的整合分析 http://www.mh.sinica[...] 中央研究院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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