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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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익한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강경하게 저항하다가 순절한 인물이다. 1591년에 태어나 161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4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고령 현감을 지냈으나 김육의 탄핵으로 사퇴하고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으로 삼으려 하자 사신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주전론을 펼쳤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하자 제자들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처형당했다. 사후 삼학사로 불리며 충절을 기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존주휘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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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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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씨명 | 홍익한 |
한글 | 홍익한 |
한자 | 洪翼漢 |
히라가나 | 고우요쿠칸 |
카타카나 | 혼・이칸 |
기본 정보 | |
출생일 | 1586년 |
사망일 | 1637년 |
직업 | 문신 |
상세 정보 | |
아명 | 홍습(洪霫) |
자 | 택원(澤遠)·백승(伯升) |
호 | 화포(花浦)·운옹(雲翁) |
시호 | 충정(忠正)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강화유수부 |
사망지 | 청나라 만저우 지역 랴오닝 성 선양 소재 펑톈청 시먼(奉天城 西門, 봉천성 서문)의 앞거리 |
본관 | 남양(南陽) |
정당 | 무소속 |
거주지 | 조선 한성부 |
가족 관계 | |
양부 | 홍대성 |
양모 | 신평 이씨 부인 |
생부 | 홍이성 |
생모 | 부여 김씨 부인 |
형제 | 홍침(생가 친형), 홍붕(생가 친제), 홍회(생가 친제) |
배우자 | 사별 초배 양천 허씨 부인, 재혼 계배 능성 구씨 부인 |
자녀 | 2녀 |
친인척 | 홍애(생가 친할아버지), 이선(양외할아버지), 김임(친외할아버지), 홍숙(친가 고조부), 홍서주(친가 증조부), 허식(초배 빙부), 구곤원(계배 빙부), 심익선(맏사위), 이방(막내사위), 허윤(외손녀사위), 심지원(사돈댁), 이국량(사돈댁), 이환(사돈댁), 인조 이종(사돈댁), 효종 이호(사돈댁) |
경력 | |
관직 | 사헌부 장령, 경상도 고령현감, 평안도 평양 서윤 |
임관 기간 | 사헌부 장령 (1625년 11월 중순 ~ 1626년 3월 중순), 고령현감 (1626년 3월 중순 ~ 1628년 3월 중순), 평양 서윤 (1629년 3월 중순 ~ 1630년 8월 중순) |
임금 | 인조 이종 |
학력 | 성균관 사서, 1624년 정시문과 장원 급제 |
서훈 | 대광보국숭록대부(증 영의정) |
기타 | 경기도 광주 소재 남한산성 현절사 제향(삼학사 추념 사당) |
묘소 | 남양 홍공 화포 홍익한 선생 가묘(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소재) |
2. 생애
홍익한은 1591년(선조 25년) 여섯 살 때 큰아버지 홍대성의 양자로 들어갔다. 1615년(광해군 8년) 식년생원시에 갑과 2등으로 합격하여 9년간 생원으로 지냈고, 1624년(인조 2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626년까지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으며, 1628년까지 경상도 고령현감을 지냈다. 고령현감 재직 중 김육의 탄핵으로 스스로 물러난 후 강화유수부 향리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1629년 평안도 평양 서윤으로 잠시 임명되었으나, 1630년에 그만두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으로 삼으려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세워 사신(용골대)을 보내오자, 청 사신을 죽여 모욕을 씻자고 주장했다.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의 주화론을 극구 반대하였다.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 태종 숭덕제(홍타이지)에게 삼전도의 굴욕으로 항복하자, 제자 윤집, 오달제 등과 함께 청군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니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였다.[3]
2. 1. 출생과 가계
1586년 (선조 19년) 조선 한성부에서 출생하였으며, 여섯 살 때였던 1591년에 큰아버지 홍대성(洪大成)의 양자로 입적되었다.[1]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홍서주(洪叙疇) | 관찰사 역임. |
조부 | 홍애(洪磑) | |
아버지 | 홍이성(洪以成) | 진사 출신. |
어머니 | 부여 김씨 | 김임(金琳)의 딸 |
친형 | 홍침(洪𩂈) | |
친제 | 홍붕(洪䨜) | |
친제 | 홍회(洪𩆁) | |
양부(백부) | 홍대성(洪大成) | 큰아버지. 슬하 1녀(1580~1588)는 어린 시절에 요절. |
양모(백모) | 신평 이씨 | 이선(李宣)의 딸 |
부인(초배) | 양천 허씨 | 군수 허식(許寔)의 딸 |
장녀 | 남양 홍씨(1604~1675) | |
사위 | 청송 심씨 심익선(沈翼善, 1612~1668) | 심지원(1593~1662)의 아들, 황해도 풍덕부사 역임. |
부인(계배) | 능성 구씨 | 진사 구곤원(具坤源)의 딸 |
차녀 | 남양 홍씨(1617~1691) | |
사위 | 예안 이씨 이방(李炐, 1622~1694) | 이환(李瓛, 1591~1648)의 아들 |
2. 2. 관직 생활
1615년(광해군 8년) 식년생원시에 갑과 2등으로 입격하여 9년간 생원으로 지냈다. 1624년(인조 2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사서(司書)를 거쳐 1626년까지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다. 1628년까지 2년 동안 경상도 고령현감을 지냈지만, 김육의 탄핵으로 1628년 고령현감을 스스로 사퇴하였다. 강화유수부 향리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고, 1629년 평안도 평양 서윤으로 잠시 임명되었지만 1630년에 그만두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으로 삼으려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세워 사신(용골대)을 보내오자, 청 사신을 죽여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의 주화론을 반대하였다.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홍타이지(청 태조 숭덕제)에게 삼전도의 굴욕으로써 항복하자, 윤집, 오달제 등과 함께 청군에게 끌려가 사살되었고,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였다.[1]2. 3. 병자호란과 최후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으로 삼으려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세워 사신(용골대)을 보내오자, 청 사신을 죽여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3]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의 주화론을 극구 반대하였다.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 태종 숭덕제(홍타이지)에게 삼전도의 굴욕으로 항복하자, 자신의 두 제자 윤집, 오달제 등과 함께 청군에게 끌려갔고, 결국 청나라에 잡혀가 사살됨으로써 죽음을 당하니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였다.병자호란 당시 홍익한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칭하며,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다.[3] 1637년 음력 1월 30일 인조가 한강 남안의 청군 본영으로 가서 홍타이지가 천자임을 삼배구고두례로 인정하는 굴욕적인 의식을 신하들 앞에서 치르고, 신종을 맹세했으며, 굴욕적인 삼전도의 맹약을 맺게 되자 척화신(斥和臣)으로 체포되어 심양에서 처형되었다.[3]
홍익한의 사상은 전통적인 주자학 입장에 서 있었으며, 명나라에 대한 숭모, 충군 사상이 근간을 이루었다. 저서 『존주휘편』에서는 "열성상승, 세번직수, 사대일심(선조 대대로부터 중화의 번병으로 섬기며, 강대한 주군에게 일심전심으로 충성할 뿐)"이라고 주장했다.[4] 요컨대, 중화의 천자에게 충실히 제후의 예를 다해 왔다는 것이며, 중화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천년 속국" 조선이야말로 가장 충실한 모범 속국이었고, 집요하게 저항하며,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베트남에 비하면, "예의의 나라" 그 자체였다.[5]
3. 사상
홍익한의 사상은 전통적인 주자학 입장에 서 있었으며, 명나라에 대한 숭모와 충군 사상이 그 근간을 이루었다. 1636년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와서 조선을 속국으로 취급하는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요구를 했을 때, 청나라 사신을 죽일 것을 주장했다.[3]
병자호란 당시 홍익한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칭하며 끝까지 주전론을 주장했다. 1637년 음력 1월 30일 인조가 한강 남안의 三田渡|삼전도중국어에 있는 청군 본영으로 가서 홍타이지가 천자임을 삼배구고두례로 인정하는 굴욕적인 의식을 신하들 앞에서 치르고 신종을 맹세했으며, 굴욕적인 삼전도의 맹약을 맺게 되자 척화신으로 체포되어 심양에서 처형되었다.[3]
그의 저서 『존주휘편』에서는 "열성상승, 세번직수, 사대일심(선조 대대로부터 중화의 번병으로 섬기며, 강대한 주군에게 일심전심으로 충성할 뿐)"이라고 주장했다.[4] 요컨대, 중화의 천자에게 충실히 제후의 예를 다해 왔다는 것이며, 중화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천년 속국" 조선이야말로 가장 충실한 모범 속국이었고, 집요하게 저항하며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베트남에 비하면 그야말로 "예의의 나라" 그 자체였다.[5]
4. 사후 평가 및 추숭
병자호란 때 항쟁한 열사인 김익겸(삼전도의 굴욕 직전 강화산성 남문에서 분신 순절)과 함께 이역만리 타국에서 절개를 지키다 죽은 제자 윤집, 오달제와 더불어 충절을 높이 평가받았다. 사후 우국충정을 인정받아, 병자호란 관련 항쟁으로 죽은 4명은 모두 대광보국숭록대부 및 영의정에 추서(추증)되었다.
5. 저서
- 존주휘편
6. 관련 문화재
참조
[1]
뉴스
呉達済筆 墨梅図
https://www.museum.g[...]
국립중앙박물관
[2]
웹사이트
홍익한(洪翼漢)
http://encykorea.aks[...]
2022-07-18
[3]
뉴스
홍익한 洪翼漢,1586~1637
https://www.doopedia[...]
2022-06-26
[4]
서적
もしもの近現代史
https://www.google.c[...]
扶桑社
2013-08-31
[5]
뉴스
"中国が世界で一番信用できない」韓国人が日本より中国を嫌う訳"
https://www.mag2.com[...]
2022-01-14
[6]
문서
음력 11월 22일
[7]
문서
음력 3월 5일
[8]
문서
송시열, 《송자대전》 권173, 장령 홍 공 묘갈명; 이의현 (조선), 《도곡집》 권19, 화포선생 묘표; 이재 (1680년), 《도암집》 권40, 화포 홍 충정공 묘지
[9]
문서
이의현 (조선), 《도곡집》 권10, 지중추 허 공 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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