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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쓰나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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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소카와 쓰나토시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히고 구마모토번의 3대 번주이다. 호소카와 미쓰나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사망 후 어린 나이에 번주 자리를 상속받았다.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아 쓰나토시로 개명했고, 종4위하 시종, 엣추노카미에 서임되었다. 동생과 조카에게 영지를 분여하고, 구마모토 신덴번을 건립하는 등 번의 발전에 기여했다. 겐로쿠 시대 아코 사건 당시 아코 낭사들을 보호하려 노력했으나, 결국 낭사들은 할복했다. 말년에는 은거했으며, 7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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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쓰나토시
기본 정보
씨명히고 호소카와 씨
시대에도 시대 전기 - 중기
출생간에이 20년 1월 8일 (1643년2월 26일)
사망쇼토쿠 4년 11월 12일 (1714년12월 18일)
통칭로쿠마루(ろくまる)
시호없음
신호없음
계명묘오인덴 운가쿠 소류 다이고지
묘소구마모토현구마모토시의 묘카이지
교토부교토시의 다이토쿠지고토인
호소카와 쓰나토시 초상 ([[에이세이 문고]] 소장)
호소카와 쓰나토시 초상(에이세이 문고 소장)
관직
관위종4위하・시종, 엣추노카미, 좌근위권소장
막부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미쓰이에쓰나→쓰나요시→이에노부
히고구마모토 번 번주
가계
씨족히고 호소카와 씨
부모아버지: 호소카와 미쓰나오, 어머니: 세이코인
형제쓰나토시, 도시시게
배우자정실: 마쓰다이라 요리시게 양녀・이누히메
자녀요시토시, 마쓰다이라 요리미치 정실, 미쓰히메, 호소카와 도시시게 양녀, 기치히메, 마쓰, 시미즈 가쓰사다 실, 양자: 노부노리구가 고레미치 실, 하쓰
번주
전임호소카와 미쓰나오
후임호소카와 노부노리
직책구마모토 번 번주 (히고 호소카와 가문)
대수3
임기1649년 ~ 1712년

2. 생애

간분 2년(1662년) 3월, 동생 도시시게에게 5,000석을 주었고, 간분 6년(1666년) 7월에는 신전 3만 5,000석을 지급하여 에도 뎃포즈에 정부의 구마모토 신덴번을 건립했다.

간분 3년(1663년) 6월, 정실 이누히메와 결혼했다. 겐로쿠 9년(1696년) 11월 5일, 사콘노고노쇼쇼 관위를 받았다. 겐로쿠 10년(1697년) 6월, 구마모토 신덴번주 도시마사의 동생이자 쓰나토시의 조카인 도시타케에게 5,000석을 주었다.

호에이 3년(1706년) 4월, 적남 요시토시가 사망하자 도시타케(노리키로 개명)를 양자로 삼겠다고 청원하여, 호에이 5년(1708년) 1월에 승인받았다.

쇼토쿠 2년(1712년) 7월 11일에 은거했고, 쇼토쿠 4년(1714년) 11월 13일에 사망했다. 향년 72세. 구마모토의 고코쿠산 묘게지 절에 매장되었다.[4]

2. 1. 유년기 및 번주 상속

호소카와 미쓰나오(미쓰토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쇼호 2년(1645년) 11월 11일,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처음으로 오메미에를 했다. 게이안 2년(1649년) 12월 28일에 아버지 미쓰나오가 사망했지만, 쓰나토시(당시 이름 로쿠마루)는 6세로 어렸기 때문에, 통상적으로는 호소카와 가문은 개역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쓰나오가 막부에 히고 영지 반환을 유언했고, 도쿠가와 가문의 총애를 받았던 점, 그리고 호소카와 가신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쓰나토시에게 상속해야 할지 여부에 대해 막부 내에서 논의가 있었다. 결국 게이안 3년(1650년) 4월 18일에 쓰나토시에게 상속이 인정되었지만, 영지 지배는 막부 감찰역과 친척인 오가사와라 다다자네(부젠국 고쿠라번주)의 감독을 받았다. 조오 2년(1653년) 12월 11일,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헨키를 받아 아버지의 이름 한 글자를 따서 '''쓰나토시'''로 개명했다. 또한 종4위하 시종, 엣추노카미에 서임되었다.

2. 2. 번주 통치

쇼호 2년(1645년) 11월 11일,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처음으로 오메미에하였다. 게이안 2년(1649년) 12월 28일, 아버지 미쓰나오가 사망하였으나, 쓰나토시는 6세로 어렸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호소카와 가는 개역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쓰나오가 막부에 히고 영지 반환을 유언하였고, 도쿠가와 가문의 총애를 받았던 점, 호소카와 가신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쓰나토시의 상속 여부에 대해 막부 내에서 논의가 있었다. 결국 게이안 3년(1650년) 4월 18일 쓰나토시에게 상속이 인정되었지만, 영지 지배는 막부 감찰역과 친척 오가사와라 다다자네(부젠국 고쿠라번주)의 감독을 받았다. 조오 2년(1653년) 12월 11일,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헨키를 받아 아버지의 이름 한 글자를 따서 '''쓰나토시'''로 개명하였다. 또한 종4위하 시종, 엣추노카미에 서임되었다.

간분 2년(1662년) 3월, 동생 도시시게에게 5,000석을 분여하였고, 간분 6년(1666년) 7월에는 신전 35,000석을 내분 지급하는 형태로 에도 뎃포즈에 정부의 구마모토 신덴번을 건립했다.

간분 3년(1663년) 6월, 정실 이누히메와 결혼했다. 겐로쿠 9년(1696년) 11월 5일, 사콘노고노쇼쇼 관위를 더했다. 겐로쿠 10년(1697년) 6월, 구마모토 신덴번주 도시마사의 동생(쓰나토시의 조카) 도시타케에게 5,000석을 분여했다.

호에이 3년(1706년) 4월, 적남 요시토시가 사망하여 도시타케(노리키로 개명)를 양자로 맞이할 것을 청원하였고, 호에이 5년(1708년) 1월에 인정받았다.

쇼토쿠 2년(1712년) 7월 11일, 은거하였다.

2. 3. 아코 사건

겐로쿠 15년(1702년) 12월 15일 이른 아침, 기라 요시나카를 토벌하고 기라 저택을 나온 아코 46사[2]는 오메츠케센고쿠 히사나오에게 자수하러 간 요시다 가네아키라・도미모리 마사토모 두 명과 헤어져 다른 사람들은 주군 아사노 나가노리가 잠든 다카나와센가쿠지로 향했다. 센고쿠는 요시다와 도미모리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등성하여 막부에 보고하고 막부에서 대응을 협의했다.

한편, 호소카와 쓰나토시는 이날, 예년과 같이 에도성에 등성하고 있었다. 이때 로주이나바 마사미치로부터, 오이시 요시오를 시작으로 아코 낭사 17명을 맡아 돌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곧바로 쓰나토시는 가신의 후지사키 사쿠에몬을 전령으로 삼아 호소카와 가문 상가 저택으로 돌아가게 했다. 이 전령을 받은 호소카와 가문 가로 미야케 도헤이는 처음에는 센가쿠사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센가쿠사에 가까운 시로카네 중저택으로 가신들을 옮겨 받아들일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 46사는 오메츠케 센고쿠 히사나오의 저택에 있다는 보고가 들어와 급히 센고쿠 저택으로 향했다. 미야케가 이끄는 인수 부대의 총수는 847명이었다. 그들은 오후 10시가 넘어서 센고쿠 저택에 도착하여 17명의 낭사들을 한 명씩 신체 검사한 후 가마에 태워 오전 2시가 넘어서 호소카와 가문의 시로카네 시모야시키에 도착했다. 낭사들 중에는 부상자가 있어 상처에 닿지 않도록 천천히 수송했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고 『호리우치 덴에몬 각서』에 있다(야마요시 모리시(야마요시 모리사무라이)에게 베인 지카마쓰 유키시게의 일일 것이다).

이 동안, 쓰나토시는 의사들을 한 번 보고 싶어 도착을 기다리며 잠도 자지 않고 기다렸다. 17사가 도착한 후, 쓰나토시는 곧바로 직접 나와 오이시 요시오와 대면했다. 더욱이 쓰나토시는 곧 의사들에게 두 국과 다섯 가지 반찬의 요리, 과자, 차 등을 내놓도록 명했다. 맡아 돌보는 사람의 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정원을 마주한 방을 의사들에게 주고, 목욕은 매번 물을 갈아 넣고 "물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에"라며 모두 함께 들어갔다. "세탁물이 뜰에 널려 있는 것은 보기 흉하다"며 속옷도 일주일에 두 번씩 제공했다. 훗날에는 로주의 허가를 얻어 술과 담배도 대접했다. 더욱이 매일의 요리도 모두 진수성찬이어서 오이시 등으로부터 너무 사치스러우니 평범한 식사로 해달라고 간청받을 정도였다.

쓰나토시는 의사들에게 몹시 감동하여 막부에 구명을 간청하고, 만약 구명이 된다면 맡고 있는 사람 전원을 그대로 호소카와 가문에서 등용하겠다는 희망까지 내놓았다. 또한 12월 18일과 12월 24일 두 차례에 걸쳐 직접 아타고 산에 가서 의사들의 구명 기원을 하기까지 했으며, 이 기원이 이루어지도록 쓰나토시는 맡아 돌보는 동안 정진 요리만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호소카와 가문의 의사들에 대한 후한 대우는 에도의 서민들에게 칭찬을 받은 듯하며, "호소카와의 물(미즈노) 흐름은 맑지만, 다만 대해(모리 가이노카미)의 바다(마쓰다이라 이키노카미)만이 흐려졌네"라는 광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는 호소카와 가문과 미즈노 가문이 의사를 후하게 대접한 것을 칭찬하고, 모리 가문과 마쓰다이라 가문의 대우가 좋지 않았던 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즈노 가문에서는 의사를 "아홉 명의 무리"라고 부르며 "추위가 강하니 침구를 늘려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 일에 미치지 못하고 처음 그대로 있사옵니다"라고 마치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3] 박정한 기술이 있다. (『미즈노 가문 어맡김 기록』)

호소카와 저택에서는 시오타와 두 오이시(요시오·노부키요) 등은 흥을 돋우며 밤에 광대춤 등을 추며 소란을 피웠고, 제공된 을 엿보러 온 호리우치에게 실컷 먹여 만취시키기도 했다. 마지막 날에는 호리우치가 술안주나 담배, 술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차나 과자를 내놓지 않아 의사들로부터 불평이 나왔다. 호리우치는 "잊었다"고 말하며 내놓으려 하지 않아 다시 술을 마셨다. 할복하는 날 호리우치는 의사를 내버려두고 귀가해 동료에게 로 데려와졌다. 또한 맡아 돌보는 기간 동안 호리우치는 의사들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토벌의 모습이나 의사의 가족 등 많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 (『호리우치 덴에몬 각서』)

그러나 해가 바뀌어 겐로쿠 16년(1703년) 2월, "패를 지어 쳐들어가는 짓은, 매우 부당하므로 할복을 명한다"라는 취지의 명령서를 가지고 막부의 상사가 호소카와 저택에 도착한다. 스기모토 기린의 『아코 종수기』에서는, 오이시가 이 명령서에 두려워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할복에 있어서도, 쓰나토시는 "경솔한 자의 개작으로는 의사들에게 무례하다"며, 오이시 요시오는 중신 아바 잇페이에게 개작을 시켰고, 그 외의 사람들도 소성조에서 개작인을 선택했다. 오치아이 가쓰노부의 『에코 견문기』에는 오이시 요시오의 개작을 실패하여 오이시가 큰 소리를 내어 두 번 베었다고 하지만, 호소카와 가문의 기록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4].

그러나, 아바 가문에 전해지는 오이시의 개작도에는 칼날이 닳아 있었고[5], 전 당주로 전국 의사 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한 아바 야스마사는 "오이시의 목뼈에 여러 번 부딪혀, 베어 넘기는데 시간이 걸려 고생한 흔적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사들은 할복 후, 호소카와 저택 뒷문에서 나온 서쪽에 있는 저지대(오와리야 세이시치 판 『시바 미타 니혼노키 에도』에서는 검게 칠해져 "지고쿠타니토 이우"라고 적혀 있다)에 통에 넣어 이름이 적힌 팻말을 각 통에 밧줄로 묶은 상태로 놓여졌고, 모두 모이면, 인력거에 태워 앞뒤를 족경으로 굳게 하여 센가쿠사로 운반되었다. 또한 별도로 선발대로 보행두나 중간 등 십여 명을 센가쿠사 문 앞에 대기시켰다[6].

센가쿠사 또한 "다수의 매장지가 없어 부사가 갑자기 생각하여, 수풀을 제거하고 급히 넓혔다"라고 기록되어, 나가노리 무덤 옆에 있는 수풀을 제거한 자리에 매장되었고, 그 위에 묘비 대신 돌을 놓았다. 쓰나토시는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금 30냥의 장례 비용과 금 50냥의 부조를 센가쿠사에 보냈다[7]. 의사들의 묘비가 건조된 것은, 할복으로부터 한 달 이상이 지난 3월 8일이었다.

막부에서 의사들의 피로 물든 정원을 청소하기 위해 사자가 방문했을 때도, 쓰나토시는 "그들은 호소카와 가문의 수호신이다"라며 거절하고, 반대하는 가신들에게도 정원을 영원히 그대로 남겨두도록 명하여, 손님이 보였을 때에는 저택의 명소로 소개했다고도 한다.

2. 4. 말년

쇼토쿠 2년(1712년) 7월 11일에 은거하였고, 쇼토쿠 4년(1714년) 11월 13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72세였다. 구마모토의 고코쿠산 묘게지 절에 매장되었다.[4]

3. 인물평


  • "도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장수"[16], "모든 재주에 능하지만, 문학에는 전혀 조예가 없다"[17]는 평가가 있었다. 다만, 쓰나토시의 혈통이 모두 끊어져 반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일방적인 "어리석은 평"이 되었다.
  • 번의 기록에는 "쓰나토시 때문에 번의 재정이 파탄 직전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실제로 1712년에는 37만 냥이 넘는 빚이 있었고, 상인들로부터 공소가 일어났다.[18]

3. 1. 호소카와 치다루마(細川血達磨)

1698년(겐로쿠 11년) 9월 6일, 주도 화재로 에도 성에 가까운 상옥 저택이 불타자 오오카와 토모에몬은 할복하고 주가(主家)의 보물이었던 족자를 자신의 배 속에 넣어 목숨을 걸고 훌륭하게 지켜냈다. 오오카와가 죽은 후, 쓰나토시는 그 족자를 화재를 면한 표좌식에 장식하여 방문객에게 공개했다고 한다.[1]

쓰나토시와 오오카와가 남색 관계였다는 설도 있으며, 강담 『호소카와 치다루마(細川血達磨)』로 구연되고 있다. 오오타니 히데오 주연으로 영화화도 되었다. 메이레키 대화재 때라는 설도 있지만, 쓰나토시는 당시 14세였다.[1]

4. 계보


  • 아버지: 호소카와 미쓰히사
  • 어머니: 세이코인 - 시미즈 씨
  • 정실: 이누히메(1634년 ~ 1675년), 혼겐인 - 마쓰다이라 요리시게의 양녀, 도쿠가와 요리후사의 아홉째 딸, 마쓰다이라 요리시게의 이복 여동생
  • 측실: 곰 - 니타 씨
  • 양자: 호소카와 노리키(1676년 ~ 1732년) - 옛 이름 도시타케, 호소카와 도시시게의 차남
  • 자녀

이름비고
장녀마쓰다이라 요리미치 정실
차녀미쓰히메사카이 다다자네 정실
삼녀마쓰사이온지 킨미쓰의 아들과 약혼했지만 17세에 사망
사녀호소카와 도시시게 양녀마쓰다이라 나오오카 정실
오녀깃키신쇼인, 호소카와 도시마사 정실
차남호소카와 요시토시1689년 ~ 1706년
시미즈 가쓰사다의 처
쿠가 코레미치의 처 - 호소카와 도시시게의 딸
첫 - 마쓰다이라 사다모토 정실, 마쓰다이라 나오오카의 딸


5. 등장 작품

참조

[1] 서적 金玉ねぢぶくさ
[2] 문서 寺坂信行
[3] 문서 神崎則休는 케다모노 같은 무서운 얼굴이었다
[4] 문서 浅野長矩와 武林隆重는 두 번 벤 시체 확인이 되어 있으며, 그에 관련된 유구가 泉岳寺에 현존한다
[5] 웹사이트 内蔵助介錯の刀も「元禄赤穂事件」展 https://www.ako-minp[...] 2019-12-13
[6] 서적 泉岳寺『白明話録』
[7] 서적 赤穂市『忠臣蔵』第一巻
[8] 서적 大谷木醇堂『醇堂叢稿』、『旗本御家人』
[9] 문서 肥後細川家侍帳」「肥後細川藩拾遺
[10] 서적 旦夕覚書
[11] 간행물 広報やまが 2020年7月号 宗教法人「平成堀口組」
[12] 서적 駒澤大学名誉教授・廣瀬良弘『禅宗地方展開史の研究』
[13] 논문 赤穂義士御預始末 永青文庫特別展
[14] 논문 熊本時代の大塚磨について
[15] 법률 港区環境美化の推進及び喫煙による迷惑の防止に関する条例
[16] 서적 武家諫忍記 大聖寺本(加賀市立博物館)
[17] 서적 大名評判記 池田本
[18] 문서 細川家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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