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쿠라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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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쿠라번은 1600년 호소카와 다다오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공로로 부젠국 일대를 하사받아 시작되었다. 이후 호소카와 가문을 거쳐 1632년부터 오가사와라 가문이 통치했으며,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될 때까지 15만 석의 영지를 유지했다. 고쿠라 신덴 번(지즈카 번)은 고쿠라 번의 지번으로 오가사와라 가문이 다스렸다. 고쿠라 번은 규슈 지역의 중요 거점 역할을 했으며, 막부 말기에는 조슈 번과의 갈등, 해상 방어 강화 등의 사건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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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쿠라번 - 고쿠라성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고쿠라기타구에 위치한 고쿠라성은 가마쿠라 시대 축성 추정,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에 걸쳐 주인이 바뀌고 개축되었으며, 1959년 재건된 천수각 내부에 민속 박물관이 있고 속 일본 100명성으로 선정된 시민 휴식 및 관광 명소이다. - 부젠국의 번 - 나카쓰번
나카쓰번은 에도 시대 부젠국 나카쓰 지역을 다스린 번으로, 구로다 씨가 처음 다스렸으나 이후 호소카와 씨, 오가사와라 씨를 거쳐 오쿠다이라 씨가 155년간 통치하며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인재를 배출하여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 부젠국의 번 - 쓰시마 후추번
쓰시마 후추번은 에도 시대 쓰시마섬을 다스린 소 씨가 다이묘로서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독점하며 존속한 번으로, 막부 외교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되었다. - 오슈 호소카와씨 - 호소카와 가라샤
호소카와 가라샤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로 태어나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결혼하였으며, 혼노지의 변 이후 남편의 보호 아래 신앙을 지키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인질이 되려 하자 가신에게 죽임을 당했다. - 오슈 호소카와씨 - 호소카와 오키모토
호소카와 오키모토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자 다이묘로,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차남으로 태어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공로로 야타베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고쿠라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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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원래 이름 (1600–1867) | 일본어: |
다른 이름 (1867–1870) | 일본어: |
다른 이름 (1870–1871) | 일본어: |
위치 | 후쿠오카현 |
존속 기간 | 1600년 - 1871년 |
시대 | 에도 시대 메이지 시대 |
수도 | 고쿠라성(1600–1867) 가와라 진야 (1867–70) (187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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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이전 | 일본 |
사건 시작 | 1600년 |
사건 끝 | 1871년 |
추가 정보 |
2. 역사
1587년(덴쇼 15년), 다카하시 아키타네의 양자 다카하시 모토타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때 고쿠라성을 넘겨주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모리 가쓰노부가 부젠 국 고쿠라 6만 석(일설에는 10만 석)을 받아 고쿠라성에 입성했다. 아들 가쓰나가에게도 부젠국에 1만 석(4만 석이라고도 함)이 주어졌으며, 이때 히데요시의 배려로 원래 성인 모리에서 주고쿠 지방의 태수 모리 씨의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모리 가쓰노부와 가쓰나가 부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영지를 몰수당했다.[4][5]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나베 성을 성공적으로 지켜낸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탄고 국 18만 코쿠(石高)와 부젠 국(다나베와 기쓰키), 분고 국(구니사키와 하야미) 39만 9천 코쿠를 추가로 하사하여 고쿠라 번이 시작되었다. 호소카와 씨는 처음에는 나카쓰 성을 거점으로 삼았지만, 곧 모리 가문의 옛 고쿠라 성 부지에 새로운 성하 마을과 성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602년에 완료했다.[1] 이 시대에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의 결투가 고쿠라 번의 일부였던 간류 섬에서 벌어졌다.[1]
1620년, 다다오키가 은퇴하고 그의 셋째 아들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고쿠라 번의 두 번째 다이묘가 되었다. 1632년, 다다토시는 구마모토 번 54만 코쿠로 이봉되었다.[1]
하리마국 아카시 번에서 오가사와라 다다자네[6]가 부젠국 북부 15만 석을 영유하며 고쿠라 번의 영주가 되었다. 그때, 지성인 부젠 나카쓰 성에는 다다자네의 조카인 오가사와라 나가츠구가 8만 석으로 입봉하여 나카쓰 번이, 분고국 기쓰키 성에는 다다자네의 동생 오가사와라 타다토모가 4만 석으로 입봉하여 기쓰키 번이 성립했다.
타다자네의 어머니는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의 딸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증손에 해당했기 때문에, 이후 고쿠라 오가사와라 씨는 서국 후다이 다이묘의 필두로서 규슈의 현관을 지키며, "규슈 탄다이"의 역할을 수행하며 도자마 다이묘를 감시했는데, 이것이 막말의 고쿠라 성 함락의 원인이 되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후계자 미야모토 이오리는 아버지와 함께 출진했던 시마바라의 난의 군공 등으로 4000석의 고쿠라 번 필두 가로가 되어 타다자네를 보좌했고, 이후 미야모토 가는 대대로 그 지위를 세습했다.
2대 오가사와라 타다오는 1667년(간분 7년) 번주 상속 시, 동생 오가사와라 마사카타에게 고쿠라 신덴 번(센조쿠 번) 1만 석을 나누어 주었다.
3대 오가사와라 타다모토의 차남 오가사와라 나가미치는 1730년(교호 15년) 후계자가 없었던 반슈 안시 번 초대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오키의 양자가 되어 이를 상속했고, 이후 고쿠라 번·고쿠라 신덴 번·안시 번의 오가사와라 삼가는 후계자의 양자 등으로 인척 관계를 돈독히 했고, 고쿠라 신덴 번뿐만 아니라 본래 오가사와라 씨의 적류였던 안시 번마저 고쿠라 번의 분가와 같은 위치로 놓이게 되었다.
4대 오가사와라 타다후사는 1758년(호레키 8년)에 고쿠라 성 내에 번사의 문무교련장 "시요사이"를 설치했다. 이것이 이후의 번교 "시요칸"이 되었다.
1777년(안에이 6년) 이누카이 토모히로가 가로로 취임하여 번 재정 개혁을 했다. 이누카이의 노력으로 1798년(간세이 10년)경에는 재정이 호전되었지만, 반대파의 음모로 1803년(교와 3년)에 실각, 무고한 죄로 투옥되어 그곳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번 내에서는 중신 간의 파벌 싸움이 계속되었다.
6대 번주 오가사와라 타다카타의 시대인 1811년(분카 8년) 분카의 변 또는 시로쿠로 소동이라고 불리는 오가 소동이 일어났다.
1820년(분세이 3년)에는 군대 스기우 사다노리에 의한 산업 진흥책이 시작되어, 이마가와의 하천 개수, 각지의 도로 정비, 우시마 항 축항 등이 이루어졌다. 분세이 연간에는 무라카타 소동도 일어났다.
1863년(분큐 3년), 간몬 해협 연안에 포대를 건설하고, 보조 병력으로 농민을 훈련시키는 등 해상 방어를 강화했다. 같은 해, 조슈 번이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해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했지만, 고쿠라 번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조슈 번과의 분쟁이 계속되었으나, 고쿠라 번은 무력 충돌을 피하고 교섭을 통해 해결하려 노력했다. 8월 18일의 정변 이후 조슈 번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분쟁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고쿠라 번은 1865년(게이오 원년)에 증기선 히류마루를 구입하는 등 방비를 강화했다.
조슈 정벌에서 고쿠라 번은 규슈 최전선에서 제1차, 제2차 정벌에 모두 참여했다. 1864년(겐지 원년) 제1차 조슈 정벌에서는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듬해 1865년(게이오 원년) 제2차 조슈 정벌(사경 전쟁)에서는 오가사와라 나가미치[7]의 지휘 아래 고쿠라 방면 선봉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전투는 고쿠라 번에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모지가 함락되자 오가사와라 총독은 전선을 이탈했다. 고립된 고쿠라 번은 1866년(게이오 2년) 8월 1일 고쿠라 성에 불을 지르고 가와라마치로 후퇴했다. 이후 가로 시마무라 시즈마를 중심으로 군을 재편하여 유격전을 펼쳐 한때 고쿠라 성을 탈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슈 번의 병력 증강으로 압박을 받게 되자 정전 교섭이 시작되었고, 1867년(게이오 3년) 1월 20일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 조건에 따라 기쿠 군은 조슈 번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고, 고쿠라 번은 이를 회복하지 못했다.
1867년(게이오 3년) 3월, 번청을 가와라로 이전하여 '''가와라 번'''으로 불리게 되었다. 1869년(메이지 2년) 12월 24일에는 미야코 정 도요쓰로 번청을 옮겨 '''도요쓰 번'''이 되었다.
1871년(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으로 도요쓰 현이 되었다가 고쿠라 현을 거쳐 후쿠오카 현에 편입되었다.
1869년(메이지 2년) 오가사와라 가는 화족이 되었고, 1884년(메이지 17년)에는 백작이 되었다.
1876년(메이지 9년) 아키즈키의 난에서 도요쓰 사족은 봉기 권유를 받았으나,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고쿠라 진대와 함께 아키즈키 당을 물리쳤다.
2. 1. 번 이전의 역사
1587년(덴쇼 15년), 다카하시 아키타네의 양자 다카하시 모토타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때 고쿠라성을 개성(성을 넘겨줌)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모리 가쓰노부가 부젠 국 고쿠라 6만 석(일설에는 10만 석)을 받아 고쿠라성에 입성했다. 아들 가쓰나가에게도 부젠국에 1만 석(4만 석이라고도 함)이 주어졌으며, 이때 히데요시의 배려로 원래 성인 모리에서 주고쿠 지방의 태수 모리 씨의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모리 가쓰노부와 가쓰나가 부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개역(영지를 몰수당함)되었다.[4][5]2. 2. 호소카와 가문 시대 (1600년 ~ 1632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나베 성을 성공적으로 지켜낸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탄고 국 18만 코쿠(石高)와 부젠 국(다나베와 기쓰키), 분고 국(구니사키와 하야미) 39만 9천 코쿠를 추가로 하사했다. 이것이 고쿠라 번의 시작이었다. 호소카와 씨는 처음에는 나카쓰 성을 거점으로 삼았지만, 곧 모리 가문의 옛 고쿠라 성 부지에 새로운 성하 마을과 성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602년에 완료했다.[1] 이 시대에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의 결투가 고쿠라 번의 일부였던 간류 섬에서 벌어졌다.[1]1620년, 다다오키가 은퇴하고 그의 셋째 아들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고쿠라 번의 두 번째 다이묘가 되었다. 1632년, 다다토시는 구마모토 번 54만 코쿠로 이봉되었다.[1]
2. 3. 오가사와라 가문 시대 (1632년 ~ 1871년)
하리마국 아카시 번에서 오가사와라 다다자네[6]가 입봉하여, 고쿠라 번의 영주로서 부젠국 북부 15만 석을 영유했다. 그때, 지성인 부젠 나카쓰 성에는 다다자네의 조카인 오가사와라 나가츠구가 8만 석으로 입봉하여 나카쓰 번이, 분고국 기쓰키 성에는 다다자네의 동생 오가사와라 타다토모가 4만 석으로 입봉하여 기쓰키 번이 성립했다.타다자네의 어머니는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의 딸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증손에 해당했기 때문에, 이후 고쿠라 오가사와라 씨는 서국 후다이 다이묘의 필두로서 규슈의 현관을 지키며, "규슈 탄다이"의 역할을 수행하며 도자마 다이묘를 감시했는데, 이것이 막말의 고쿠라 성 함락의 원인이 되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후계자 미야모토 이오리는 아버지와 함께 출진했던 시마바라의 난의 군공 등으로 4000석의 고쿠라 번 필두 가로가 되어 타다자네를 보좌했고, 이후 미야모토 가는 대대로 그 지위를 세습했다. 2대 오가사와라 타다오는 간분 7년(1667년) 번주 상속 시, 동생 오가사와라 마사카타에게 고쿠라 신덴 번(센조쿠 번) 1만 석을 나누어 주었다.
교호 15년(1730년)에는, 3대 오가사와라 타다모토의 차남 오가사와라 나가미치가, 후계자가 없었던 반슈 안시 번 초대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오키의 양자가 되어 이를 상속했고, 이후 고쿠라 번·고쿠라 신덴 번·안시 번의 오가사와라 삼가는 후계자의 양자 등으로 인척 관계를 돈독히 했고, 고쿠라 신덴 번뿐만 아니라 본래 오가사와라 씨의 적류였던 안시 번마저 고쿠라 번의 분가와 같은 위치로 놓이게 되었다.
4대 오가사와라 타다후사는, 호레키 8년(1758년)에 고쿠라 성 내에 번사의 문무교련장 "시요사이"를 설치했다. 이것이 이후의 번교 "시요칸"이 되었다.
안에이 6년(1777년) 이누카이 토모히로가 가로로 취임하여 번 재정 개혁을 했다. 이누카이의 노력으로 간세이 10년(1798년)경에는 재정이 호전되었지만, 반대파의 음모로 쿄와 3년(1803년)에 실각, 무고한 죄로 투옥되어 그곳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번 내에서는 중신 간의 파벌 싸움이 계속되었다.
분카 8년(1811년) 제6대 번주 오가사와라 타다카타의 시대에 분카의 변 또는 시로쿠로 소동이라고 불리는 오가 소동이 일어났다.
분세이 3년(1820년)에는 군대 스기우 사다노리에 의한 산업 진흥책이 시작되어, 이마가와의 하천 개수, 각지의 도로 정비, 우시마 항 축항 등이 이루어졌다. 분세이 연간에는 무라카타 소동도 일어났다.
막부 말기에는 가로 시마무라 시즈마와 고노 시로 아래에서 번 행정 개혁이 시작되었다. 농산물, 석탄, 도자기와 같은 주요 제품의 수집 및 판매는 번의 독점 사업이 되었다. 1863년, 해상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해안 포병 포대가 건설되었다. 특히 간몬 해협을 따라 농업 노동자를 징집하여 보조 부대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이 해에, 간몬 해협 반대편의 조슈 번이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해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1864년과 1866년에 조슈 정벌을 수행했다. 고쿠라 번은 당시 전투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조슈는 일방적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간몬 해협의 고쿠라 번 지역을 점령했다. 친 막부 번의 병력이 공황 상태에 빠져 후퇴했고, 고쿠라 번 행정부는 고쿠라 성이 조슈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불태웠다. 조슈와 고쿠라 사이의 평화는 1867년에 협상되었지만, 이 협상의 결과로 조슈는 고쿠라 성 부지를 포함하여 점령한 지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쿠라 번 본부는 현재 후쿠오카현 가와라 마을에 건설된 진야로 이전되었고 번은 香春藩일본어으로 개명되었다. 1년 후, 번은 현재 후쿠오카현 미야코 마을의 도요쓰 마을에 있는 새로운 진야로 이전되었고, 번은 豊津藩일본어으로 개명되었다.
1871년 7월 14일, 이 번은 폐번치현으로 인해 "도요쓰 현"이 되었고, 그 후 고쿠라 현에 통합되었으며, 1876년에 후쿠오카 현으로 병합되었다. 1884년, 오가사와라 씨는 화족의 백작 작위를 받았다.
2. 4.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분큐 3년(1863년), 간몬 해협 연안에 포대를 건설하고, 보조 병력으로 농민을 훈련시키는 등 해상 방어를 강화했다. 같은 해, 조슈 번이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해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했지만, 고쿠라 번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조슈 번과의 분쟁이 계속되었으나, 고쿠라 번은 무력 충돌을 피하고 교섭을 통해 해결하려 노력했다. 8월 18일의 정변 이후 조슈 번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분쟁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고쿠라 번은 게이오 원년(1865년)에 증기선 히류마루를 구입하는 등 방비를 강화했다.조슈 정벌에서 고쿠라 번은 규슈 최전선에서 제1차, 제2차 정벌에 모두 참여했다. 겐지 원년(1864년) 제1차 조슈 정벌에서는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듬해 게이오 원년(1865년) 제2차 조슈 정벌(사경 전쟁)에서는 오가사와라 나가미치[7]의 지휘 아래 고쿠라 방면 선봉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전투는 고쿠라 번에 불리하게 전개되었고, 모지가 함락되자 오가사와라 총독은 전선을 이탈했다. 고립된 고쿠라 번은 게이오 2년(1866년) 8월 1일 고쿠라 성에 불을 지르고 가와라마치로 후퇴했다. 이후 가로 시마무라 시즈마를 중심으로 군을 재편하여 유격전을 펼쳐 한때 고쿠라 성을 탈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슈 번의 병력 증강으로 압박을 받게 되자 정전 교섭이 시작되었고, 게이오 3년(1867년) 1월 20일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 조건에 따라 기쿠 군은 조슈 번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고, 고쿠라 번은 이를 회복하지 못했다.
게이오 3년 3월, 번청을 가와라로 이전하여 '''가와라 번'''으로 불리게 되었다. 메이지 2년(1869년) 12월 24일에는 미야코 정 도요쓰로 번청을 옮겨 '''도요쓰 번'''이 되었다.
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으로 도요쓰 현이 되었다가 고쿠라 현을 거쳐 후쿠오카 현에 편입되었다.
메이지 2년 오가사와라 가는 화족이 되었고, 메이지 17년에는 백작이 되었다.
메이지 9년 아키즈키의 난에서 도요쓰 사족은 봉기 권유를 받았으나,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고쿠라 진대와 함께 아키즈키 당을 물리쳤다.
3. 지번
1587년, 다카하시 모토네는 규슈 정벌 당시 고쿠라성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고 부젠 국에 6만 코쿠(일설에는 10만 코쿠)의 영지를 모리 가쓰노부에게 하사받았다. 그의 아들 가쓰나가도 부젠 국에서 1만 코쿠 또는 4만 코쿠를 받았다. 모리 가쓰노부와 가쓰나가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영지를 포기해야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나베 성을 서군으로부터 지켜낸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탄고 국 18만 코쿠와 부젠 국(다나베와 기쓰키)과 분고 국(구니사키와 하야미) 39만 9천 코쿠를 하사했다. 이것이 고쿠라 번의 시작이었다. 호소카와 씨는 나카쓰 성을 거점으로 삼았지만, 곧 고쿠라성 부지에 새로운 성하 마을과 성을 건설하여 1602년에 이전했다. 이 시대에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의 결투가 간류 섬에서 벌어졌다. 1620년,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고쿠라 번의 두 번째 다이묘가 되었다. 1632년, 그의 영지는 54만 코쿠로 증가했고 구마모토 번으로 이봉되었다.
같은 해, 오가사와라 타다자네가 하리마 국 아카시 번에서 북부 부젠에 15만 코쿠의 영지를 받아 고쿠라로 이봉되었다. 동시에, 오가사와라 타다자네의 조카 나가쓰구는 나카쓰 번을, 동생 타다토모는 기쓰키 번을 형성했다.
오가사와라 타다자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증손녀를 어머니로 두었기 때문에, 규슈로 가는 관문을 지키고 도자마 다이묘들을 감시하는 규슈 탄다이 역할을 수행했다. 미야모토 이오리는 시마바라의 난에서의 군사적 공로로 고쿠라 씨의 가로가 되었다. 1667년 오가사와라 타다오는 동생 마사카타를 위해 고쿠라 신덴 번(지즈카 번)을 세웠다.
1730년, 오가사와라 타다키의 둘째 아들이 하리마 국 안지 번의 오가사와라 나가오키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고쿠라, 고쿠라 신덴, 안지 세 번은 상호 결혼과 후계자 입양을 통해 번을 강화했다. 1758년, 오가사와라 타다후사는 번의 가신들을 위한 문무 훈련장인 한 학교 '시에이사이'(이후 '시에이칸'으로 개명)를 설립했다. 1777년, 이누카이 토모히로가 가로가 되어 번의 재정을 개혁했지만, 1803년에 실각했다.
1811년, 오가사와라 타다타츠 시대에 고이에 소동이 일어났다. 1820년, 지구 지사 스기우 사다노리는 산업 진흥 조치를 시작했다. 분세이 시대(1818-1830)까지 농민 봉기가 계속 발생했다.
막부 말기에는 가로 시마무라 시즈마와 고노 시로 아래에서 번 행정 개혁이 시작되었다. 1863년, 해상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해안 포병 포대가 건설되었고, 간몬 해협을 따라 농업 노동자를 징집하여 보조 부대로 훈련시켰다. 이 해, 조슈 번이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해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했다. 1864년과 1866년에 조슈 정벌이 수행되었고, 고쿠라 번은 조슈에 의해 고쿠라 성을 점령당했다. 이후 고쿠라 번은 가와라 번(1867), 도요쓰 번으로 개명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도요쓰 현"이 되었고, 고쿠라 현을 거쳐 1876년에 후쿠오카 현으로 병합되었다. 1884년, 오가사와라 씨는 화족의 백작 작위를 받았다.
3. 1. 고쿠라 신덴 번 (지즈카 번)
1667년 오가사와라 타다오가 다이묘가 되면서, 동생 오가사와라 마사카타에게 1만 곡의 고쿠라 번 영지를 나누어 고쿠라 신덴 번을 세웠다. 이는 오가사와라 본가의 계승에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으로, 분가이자 방계 가문을 설립한 것이다.[1] 고쿠라 신덴 번은 처음에는 본 번의 일반 수입에서 수입을 할당받고 자체적인 영지를 직접 소유하지 않은 "서류상 번"이었다.[1] 고쿠라 신덴 번의 다이묘는 영구적으로 에도에 거주했으며, 산킨코타이의 의무가 없었다.[1]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이 번은 현재 후쿠오카현 부젠에 진야를 설립하고 지즈카 번으로 이름을 바꾸었다.[1] 2년 후, 폐번치현으로 지즈카 현이 되었고, 곧 고쿠라 현과 후쿠오카현에 흡수되었다.[1] 마지막 다이묘인 오가사와라 사다마사는 화족 제도의 자작이 되었다.[1]
4. 역대 번주
1587년, 다카하시 모토네는 규슈 정벌 당시 고쿠라 성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시켰다. 이후 모리 가쓰노부와 그의 아들 가쓰나가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하여 영지를 잃었다.[1]
이후 고쿠라 번은 호소카와 다다오키를 시작으로 호소카와 가문과 오가사와라 가문이 통치하게 된다.
;고쿠라(도요쓰) 번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
1 | 호소카와 다다오키 | 1602년 - 1620년 | 엣추노카미 (越中守) | 종4위하 | 399,000 코쿠 |
2 | 호소카와 다다토시 | 1620년 - 1632년 | 엣추노카미 (越中守) | 종4위하 | 399,000 코쿠 |
1 | 오가사와라 다다자네 | 1632년 - 1667년 | 사콘에노쇼겐 (左近将監) | 종4위하 | 150,000 코쿠 |
2 | 오가사와라 타다오 | 1667년 - 1725년 | 사콘에노쇼겐 (左近将監) | 종4위하 | 150,000 코쿠 |
3 | 오가사와라 타다모토 | 1725년 - 1752년 | 도토미노카미 (遠江守) | 종4위하 | 150,000 코쿠 |
4 | 오가사와라 타다후사 | 1752년 - 1790년 | 이요노카미 (伊予守) | 종4위하 | 150,000 코쿠 |
5 | 오가사와라 타다미츠 | 1791년 - 1804년 | 이요노카미 (伊予守) | 종4위하 | 150,000 코쿠 |
6 | 오가사와라 타다카타 | 1804년 - 1843년 | 다이젠노다이후 (大膳大夫) | 종4위하 | 150,000 코쿠 |
7 | 오가사와라 타다아키라 | 1843년 - 1856년 | 사쿄노다이후 (左京大夫) | 종4위하 | 150,000 코쿠 |
8 | 오가사와라 타다히로 | 1856년 - 1860년 | 우콘에노쇼겐 (右近将監) | 종4위하 | 150,000 코쿠 |
9 | 오가사와라 타다요시 | 1860년 - 1865년 | 다이젠노다이후 (大膳大夫) | 종4위하 | 150,000 코쿠 |
10 | 오가사와라 타다노부 | 1865년 - 1871년 | 사콘에노쇼겐 (左近将監) | 종4위하 | 150,000 코쿠 |
;고쿠라 신덴(지즈카) 번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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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가사와라 씨, 1667년 - 1871년 (후다이 다이묘) | |||||
1 | 오가사와라 사네카타 | 1667년 - 1709년 | 빗추노카미 (備中守) | 종5위하 | 10,000 코쿠 |
2 | 오가사와라 사다미 | 1709년 - 1747년 | 오미노카미 (近江守) | 종5위하 | 10,000 코쿠 |
3 | 오가사와라 사다아키 | 1747년 - 1782년 | 단조노스케 (弾正少弼) | 종5위하 | 10,000 코쿠 |
4 | 오가사와라 사다아츠 | 1782년 - 1822년 | 오미노카미 (近江守) | 종5위하 | 10,000 코쿠 |
5 | 오가사와라 사다토시 | 1822년 - 1843년 | 오미노카미 (近江守) | 종5위하 | 10,000 코쿠 |
6 | 오가사와라 사다요시 | 1843년 - 1851년 | 분고노카미 (豊後守) | 종5위하 | 10,000 코쿠 |
7 | 오가사와라 타다히로 | 1851년 - 1854년 | 이요노카미 (伊予守) | 종5위하 | 10,000 코쿠 |
8 | 오가사와라 사다야스 | 1854년 - 1856년 | -없음- | -없음- | 10,000 코쿠 |
9 | 오가사와라 사다마사 | 1856년 - 1871년 | 오미노카미 (近江守) | 종5위하 | 10,000 코쿠 |
4. 1. 호소카와 가문
細川忠興|호소카와 다다오키일본어
細川忠利|호소카와 다다토시일본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