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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다다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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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소카와 다다토시는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들로, 1586년에 태어났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호소카와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아, 1620년 고쿠라 번주가 되었고, 1632년 구마모토 번으로 이봉되어 초대 번주가 되었다. 다다토시는 도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가문을 번성시켰으며, 검술에 능하고 와인을 즐기는 등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1637년 시마바라의 난에 참전했고, 1641년에 사망했다.

2. 생애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셋째 아들로, 덴쇼 14년(1586년) 11월 단고 국에서 태어났다.[2] 어릴 적 이름은 미쓰치요(光千代)이다. 어머니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이자 다다오키의 정실인 다마(호소카와 가라샤)이다. 이복형으로 호소카와 다다타카[3], 호소카와 오키아키가 있다.

게이초 5년 7월, 오사카 다마쓰쿠리 호소카와 저택에서 집을 지키던 어머니 가라샤가 이시다 미쓰나리 군대의 기습을 받아 사망하고,[6][7] 다나베 성 전투가 시작되어 조부 호소카와 유사이가 궁지에 몰리는 등 다다토시는 고난의 시기를 겪었다.

다다토시는 아버지 다다오키와 연락을 취하며,[8]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가까이 모시며 도쿠가와 가의 신뢰를 얻었다.[9] 이후 원복하여 호소카와 나이키 다다타쓰(忠辰)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호소카와 가문은 탄고 18만 석에서 후쿠오카 고쿠라 39만 석의 거대 다이묘로 성장한다.[10] 게이초 5년 12월경, 적자였던 형 호소카와 다다타카가 폐적되면서, 다다토시는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게 된다. 게이초 9년 여름, 다다오키가 병에 걸리자 쇼군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다다토시를 계승자로 권고하였고,[13] 결국 다다토시가 가독을 계승하게 되었다.

게이초 14년,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딸이자 이에야스의 손녀인 치요히메를 정실로 맞이하였다.[14]

겐나 6년, 아버지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아 고쿠라 번주가 되었다. 간에이 9년, 가토 다다히로개역(改易)되자 구마모토 54만 석으로 이봉되어 구마모토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간에이 14년 시마바라의 난에 참진하여 무공을 세웠다.[16]

2. 1. 출생과 유년기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셋째 아들이다. 어릴 적 이름은 미쓰치요(光千代)이다. 덴쇼 14년(1586년) 11월에 단고 국에서 태어났다.[2] 어머니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이자 다다오키의 정실인 다마(호소카와 가라샤)이다. 이복형으로 호소카와 다다타카[3], 호소카와 오키아키가 있으며, 이복 여동생으로 조(長)와 다라(多羅)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기 때문에 가라샤가 기독교 세례를 받게 했다는 말도 있지만 여러 설이 있다.

유년 시절, 한 설에는 분로쿠 3년부터 게이초 3년까지 교토의 아타고 산 호쿠후쿠주인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했다고 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4] 그가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던 게이초 5년 7월부터이다.[5]

그러나 게이초 5년 7월은 호소카와 가와 겨우 열다섯 살이었던 다다토시에게 고난의 시기였다. 아버지 다다오키가 아이즈 정벌에 출정한 직후인 7월 17일, 오사카 다마쓰쿠리 호소카와 저택에서 집을 지키고 있던 어머니 가라샤가 이시다 미쓰나리 군대의 기습을 받아 가신들과 함께 비명횡사했다.[6][7] 19일에는 다나베 성 전투가 시작되어 조부인 호소카와 유사이가 궁지에 몰렸다.

이보다 앞선 게이초 5년 정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당시 정국 혼란 속에서 다다토시는 호소카와 가의 인질로 에도로 갔다. 어머니의 죽음과 조부의 위기에 처한 가운데 다다토시는 아버지 다다오키와 연락을 취하며,[8] 아이즈 정벌을 위한 준비로 우쓰노미야에 진을 친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가까이 모시며 도쿠가와 가의 신뢰를 얻었다.[9] 처음에는 나가오카 성을 칭했지만, 이 해 9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호소카와 성으로 복귀하고, 원복하여 호소카와 나이키 다다타쓰(忠辰)가 되었다.

2. 2. 가독 상속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호소카와 가문이 큰 공을 세워, 탄고 18만 석에서 후쿠오카 고쿠라 39만 석의 거대 다이묘로 성장한다.[10]

그 직후, 게이초 5년 12월경 다다오키는 적자 호소카와 다다타카를 폐적하였다. 정실 센세와의 이혼 문제가 원인이었다. 다다오키의 정실인 타마가 죽기 직전 센세가 도망친 것에 대해 다다타카가 정실을 감싸 다다오키의 감정을 크게 해쳤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10] 그러나 최근에는 마에다 도시나가가 센세와 이복 남매였고, 그와 관련하여 호소카와 가문에 혐의가 걸렸지만 센세와 다다타카는 이혼하지 않아 다다타카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우려로 폐적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11][12] 다다타카는 출가하여 센세와 함께 조부 유사이가 사는 교토로 갔다.

다다타카가 폐적된 후 수년 동안 호소카와 가문의 가독은 차남 오키아키와 삼남 다다토시 중 누가 계승할지 불분명했다.[13] 오키아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아버지, 형과 함께 종군하여 고쿠라 성주가 되었지만,[14] 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 부자 곁에서 섬기며 도쿠가와 막부와 그 중신들과의 관계를 갖고 있던 것은 다다토시였다.[14]

게이초 9년 여름경, 다다오키가 갑자기 병에 걸리자 쇼군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다다토시를 계승자로 하도록 다다오키에게 권고하였다.[13] 병에서 회복한 다다오키는 오키아키를 다다토시 대신 에도로 인질로 보냈고, 오키아키는 출가하여 조부 유사이의 곁으로 도망쳤다.[15] 오키아키는 후에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에 가담하여 오사카 성에 들어갔지만, 게이초 20년에 자결한다.

이로써 다다오키에게 남은 유일한 정실 소생 남자아이인 다다토시는 호소카와 가문의 가독을 계승하게 되었다.

게이초 14년, 다다토시는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딸이자 이에야스의 손녀를 어머니로 둔 치요히메를 정실로 맞이하였다. 이 혼인은 쇼군이 된 히데타다가 주도한 것이며, 치요히메는 이때 히데타다의 양녀가 되었다.[14]

2. 3. 구마모토 번주

겐나 6년(1620년)에 아버지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아 고쿠라 번주가 되었다. 겐나 8년(1622년)에는 게이초 12년(1607년)에 망명하여 오사카성에 입성, 오사카 전투에서 오사카 측으로 싸우고 전후 낭인이 되었던 요네다 요리쓰네를 귀참시켜 후에는 가로로 삼았다.

간에이 9년(1632년)에 히고 구마모토 번의 가토 다다히로개역(改易)되었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 고쿠라에서 구마모토 54만 석으로 증가 이봉되었다(후임 고쿠라 번주에는 다다토시의 의형제인 오가사와라 다다마사가 취임했다). 다다토시는 구마모토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고, 아버지 다다오키는 은거지로 야쓰시로에 거주했다. 간에이 14년(1637년)의 시마바라의 난에도 참진하여 무공을 세웠다.[16]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호소카와 다다오키
어머니아케치 다마 (아케치 미쓰히데의 셋째 딸)
정실치요히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둘째 딸)
측실금자씨(金子氏)
측실누카다씨(額田氏)
장남호소카와 미쓰나카
아들소겐(宗玄)
아들호소카와 나가후사
후지히메 (마쓰다이라 타다히로 정실)
타케히메 (아리요시 히데야스 처)
넷째 아들난죠 모토토모 (난죠 모토노부의 양자)


4. 평가 및 일화


  • 아버지 호소카와 다다오키로부터 영양 균형을 고려한 식사를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실제로 다다토시가 병에 걸렸을 때에도 다다오키는 같은 음식을 많이 먹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며, 계란이 담에 좋지 않고, 천연두에 전복이 독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17]
  • 다다토시는 에도에서 인질 생활을 했기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공적이 없었고, 두 명의 친형을 제치고 세자가 된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남겨진 편지[18]를 보면, 도쿠가와가와 아버지 다다오키는 물론, 폐적된 장남 호소카와 다다타카를 비롯한 삼촌·숙모 등에게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무의 시대에서 막번체제로 넘어가던 새로운 시대에, 처가인 도쿠가와가와 개성이 강한 아버지 다다오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고 호소카와가를 대명가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 아버지 다다오키에게 명도 "다이산겐"을 원했지만 주어지지 않아 불만을 품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계책을 써서 다다오키를 수욕에 초대하고, 다다오키가 벗어놓은 다이산겐을 가져다가 다다토시에게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자세한 내용).
  • 가토가 개역 후 구마모토번을 맡은 것처럼 막부로부터 신임을 받았으며, "도도 다카토라처럼 에도에 상주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1634년에는 참근교대 개선책을 제안하여 채택되기도 했다. 다다토시가 죽자,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에치젠이 너무 빨리 죽었다"고 한탄했다.
  • 외양대명이었지만 막부 측의 대리자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 다른 다이묘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유모인 가스가노 쓰보네는 아케치씨의 친척이었고, 아케치씨의 피를 이은 다다토시에게는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 소년 시절 에도에 있었기 때문에 히데타다 시대 막부의 유력한 기본들과 어린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다. 기본들과의 굵은 파이프를 이용하여 막부의 동향을 파악했다.[19]
  • 무예에 열심이었고, 검술에서는 류생 소우켄에게 사사하여 류생 신온류의 대표적인 검객 중 한 명이다. 소우켄도 다다토시를 높이 평가하여 비전인 "병법가전서"를 주었다. 말년의 미야모토 무사시를 초대하여 손님으로 대접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20]
  • 다다토시는 포도주를 좋아했고, 부젠 고쿠라번주 시절인 1627년부터 1632년까지 6년 동안 가신에게 명령하여 매년 만들게 했다.[21] 포도를 알코올에 담근 과실주나 리큐르가 아니라, 야마부도의 일종인 갈라미를 흑콩의 효모를 첨가물로 하여 알코올 발효시킨 양조주, 즉 와인이었다.[22] 이것은 일본 최초의 국산 와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금교령 강화와 함께 히고 구마모토번으로 전봉을 계기로 와인 제조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23]
  • 유언에 따라 구마모토시의 슈운인에서 화장되었지만, 애완 매 두 마리가 순사했다고 전해진다.
  • 화폐 주조 사업을 1624년부터 1628년까지 실시했다. 막부의 간에이쓰호 도입에 앞서 대명 영주가 실시한 본격적인 화폐 주조였다. 호소카와 고쿠라번에서 실시된 화폐 주조는 여러 화폐 주조소의 경쟁적인 도급 제도를 채택, 이웃 나라 하기번의 화폐 주조 장인 집단을 초빙하여 선진적인 화폐 주조 기술을 도입했다. 이렇게 주조된 호소카와 고쿠라번의 신화폐는 일부가 무역품으로 베트남 등에도 수출되어 베트남에서 상질의 화폐로 이미 유통되고 있었고, 수요가 있던 교전과 함께 정전 범주에 속하는 "대전"으로 유통되었다.[24]

5. 문화


  • 아버지 호소카와 다다오키로부터 영양 균형을 고려한 식사를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실제로 다다토시가 병에 걸렸을 때에도 다다오키는 같은 음식을 많이 먹지 말라고 거듭 당부하며, 계란이 담에 좋지 않고, 천연두에 전복이 독이 된다는 점을 지적했다.[17]
  • 다다토시는 에도에서 인질로 있었기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공적이 없었고, 두 명의 친형을 제치고 세자(世子)가 된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남겨진 편지[18]를 보면, 도쿠가와 가문과 아버지 다다오키는 물론, 폐적된 장남 호소카와 다다타카를 비롯한 삼촌·숙모 등에게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무(武)의 시대에서 막번체제로 넘어가던 새로운 시대에, 처가인 도쿠가와 가문과 개성이 강한 아버지 다다오키 사이의 조화에 고심하면서도, 호소카와 가문을 대명가(大名家)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 아버지 다다오키에게 명도(名刀) "다이산겐(大三原)"을 원했지만, 주어지지 않아 불만을 품고 있던 중,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계책을 써서 다다오키를 수욕(水浴)에 초대하고, 다다오키가 벗어놓은 다이산겐을 가져다가, 쇼군이 중재한다면 다다오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다다토시에게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자세한 내용은 정가(正家)#유사이 다이산겐(幽斎大三原)).
  • 가토 가문 개역(改易) 후 구마모토번을 맡은 것처럼 막부로부터도 신임을 받았으며, "언젠가 후지토라 타카토라처럼 에도에 상주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1634년에는 참근교대 개선책을 막각(幕閣)에 제안하여 채택되기도 했다. 다다토시가 죽자,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에치젠(越中)이 너무 빨리 죽었다"고 한탄했다.
  • 외양대명이었지만 막부 측의 대리자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다이묘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유모인 가스가노 쓰보네는 아케치 가문의 친척이었고, 아케치 가문의 피를 이은 다다토시에게는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 소년 시절 에도에 있었기 때문에 히데타다 시대 막부의 유력한 기본(旗本)들과 어린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것도 결과적으로 다다토시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기본들과의 굵은 파이프를 이용하여 막부의 동향을 파악했다.[19]
  • 무예(武芸)에 열심이었고, 특히 검술(剣術)에서는 야규 소켄에게 사사(師事)하여, 다이묘 중에서는 나베시마 모토시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야규 신온류의 대표적인 검객 중 한 명이다. 야규 소켄도 다다토시를 높이 평가하여 비전(秘伝)인 "병법가전서(兵法家伝書)"를 주었다. 또한 말년의 미야모토 무사시를 초대하여 손님으로 대접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20]
  • 다다토시는 포도주(葡萄酒)를 좋아했고, 문헌에 따르면, 부젠고쿠라번주 시절인 1627년부터 1632년까지 6년 동안 가신에게 명령하여 매년 만들게 했다.[21] 포도를 알코올에 담근 과실주(混成酒)나 리큐르류가 아니라, 야마부도(ヤマブドウ)의 일종인 갈라미를 흑콩(黒大豆)의 효모를 첨가물로 하여 알코올 발효시킨 양조주, 즉 와인이었던 것이 밝혀졌다.[22] 이것은 일본 최초의 국산 와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음료로 여겨졌기 때문인지, 금교령(禁教令)의 강화와 함께 고쿠라 번에서 히고 구마모토번으로 전봉(転封)을 계기로 와인 제조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23]
  • 유언에 따라 구마모토시의 슈운인(岫雲院)에서 화장(荼毘)되었지만, 애완 매(鷹) 두 마리가 순사(殉死)했다고 전해진다.
  • 화폐 주조 사업을 1624년부터 1628년까지 실시했다. 이것은 막부의 간에이쓰호 도입에 앞서 대명 영주(大名領主)가 실시한 본격적인 화폐 주조였다. 이 무렵 호소카와 고쿠라 번에서 실시된 화폐 주조는 여러 화폐 주조소(銭屋)의 경쟁적인 도급 제도를 채택하여, 기술 면에서는 이웃 나라 하기번의 화폐 주조 장인 집단을 초빙하여 선진적인 화폐 주조 기술을 도입하여 실시했다. 또한 이렇게 주조된 호소카와 고쿠라 번의 신화폐(新銭)는 일부가 무역품으로 베트남 등에도 수출되어 베트남에서 상질(上質)의 화폐로 이미 유통되고 있었고, 수요가 있던 교전(京銭)과 함께 정전(精銭) 범주에 속하는 "대전(大銭)"으로 유통되어 사용되었다.[24]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2013-05-29
[2] 문서 綿考輯録 巻二十八
[3] 문서 細川内膳家初代
[4] 서적 細川忠利 ポスト戦国時代の国づくり 吉川弘文館
[5] 서적 細川忠利 ポスト戦国時代の国づくり 吉川弘文館
[6] 서적 細川ガラシャ―キリシタン史料から見る生涯― 中公新書
[7] 문서 霜女覚書
[8] 서적 江戸城の宮廷政治 熊本藩細川忠興・忠利父子の往復書状 講談社文庫
[9] 서적 細川忠利 ポスト戦国世代の国づくり 吉川弘文館
[10] 서적 江戸城の宮廷政治 熊本藩細川忠興・忠利父子の往復書状 講談社
[11] 문서 前田家と縁戚関係にある細川家は疑いをかけられ、その結果として忠利が人質になり江戸へ赴くことになった。
[12] 서적 細川忠利 ポスト戦国世代の国づくり 吉川弘文館
[13] 서적 細川忠利 ポスト戦国世代の国づくり 吉川弘文館
[14] 서적 江戸城の宮廷政治 熊本藩細川忠興・忠利父子の往復書状 講談社
[15] 문서 このとき、興秋に関係していたとみられる重臣、飯河豊前・長岡肥後が忠興の命で誅伐され、それに不満を持った米田是季が細川家を出奔している。
[16] 웹사이트 北岡自然公園(妙解寺跡・細川家御廟所) https://kumamoto.gui[...] 熊本県・(公社)熊本県観光連盟 2023-08-19
[17] 서적 歴史をつくった人びとの健康法―生涯現役をつらぬく― 中央労働災害防止協会
[18] 서적 江戸城の宮廷政治 熊本藩細川忠興・忠利父子の往復書状
[19] 학술지 細川家、情報戦を制す 新潮社
[20] 웹사이트 熊本城の歴史 https://castle.kumam[...] 2023-08-19
[21] 웹사이트 国産最古の細川家ワイン 国替え機に製造終了 永青文庫研究センターが忠利の新史料 https://kumanichi.co[...] 熊本日日新聞 2020-12-10
[22] 웹사이트 400 年前の国産ワイン醸造の詳細が明らかに https://www.kumamoto[...] 熊本大学 2019-12-16
[23] 웹사이트 日本産ワインは400年前に作られていたことが明らかに https://www.eurekale[...] 熊本大学 2017-04-13
[24] 학술지 近世初期細川小倉藩の鋳銭事業
[25] 웹사이트 [2020年度]第1期 細川コレクション細川忠利と三宅藤兵衛 肥後にやってきた、光秀の孫たち https://www.pref.kum[...] 熊本県教育委員会 202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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