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정권 (센고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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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소카와 정권은 센고쿠 시대에 호소카와 가문이 무로마치 막부의 간레이 직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시기를 일컫는다. 오닌의 난 이후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명응의 정변을 통해 쇼군을 허수아비로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마사모토 사후 양자 간의 가독 다툼과 권력 투쟁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호소카와 다카쿠니가 집권했으나 미요시 나가요시의 등장으로 쇠퇴했다. 결국 호소카와 하루모토가 미요시 나가요시에게 패배하면서 미요시 정권으로 대체되었고, 호소카와 가문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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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정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정권을 계승하여 전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으나, 임진왜란 실패와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며 멸망했다. - 무가정권 -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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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요리유키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무장이자 정치가로, 아시카가 요시미츠 쇼군 시대에 관령으로서 막부를 통치하며 시코쿠 평정에 공헌하고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가네요키의 정변으로 실각 후 복귀했으나 메이토쿠의 난 이후 병사했다. - 게이초 호소카와씨 - 오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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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묘는 일본 역사에서 유력 무사를 지칭하는 용어로, 시대에 따라 슈고 다이묘, 센고쿠 다이묘로 변화했으며, 에도 시대에는 막부 통제 하에 번주로서 막번 체제를 구성하였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사라졌다. - 무로마치 막부 - 고가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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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정권 (센고쿠 시대)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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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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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연도 | 1493년 |
해체 연도 | 1549년 |
대표 | 호소카와 마사모토 호소카와 스미유키 호소카와 스미모토 호소카와 다카쿠니 호소카와 다네쿠니 호소카와 하루모토 ( 호소카와 씨) |
지역 | 야마시로 셋쓰 단바 도사 사누키 아와 |
이후 정부 | [[파일:Japanese crest Sanngai Hisi ni itutu Kuginuki.svg|25x20px]] 미요시 정권 |
비고 | 무로마치 막부가 건재했기 때문에 중앙 정권이라고 할 수 없음. |
기본 정보 | |
현지 이름 | 호소카와 정권 |
다른 표기 | 細川政権 |
지위 | 센고쿠 시대의 무가 정권 |
존속 기간 시작 | 1493년 |
존속 기간 끝 | 1549년 |
이전 국가 | 무로마치 막부 |
이전 국가 문장 | Ashikaga mon.svg |
이전 가문 | 호소카와 씨 |
이전 가문 문장 | Japanese Crest Hosokawa Kuyou.svg |
다음 국가 | 미요시 정권 |
다음 국가 문장 | Japanese crest Sanngai Hisi ni itutu Kuginuki.svg |
국가 | 일본 |
문장 그림 | Japanese crest Matu Kasa Hishi.svg |
수도 | 헤이안쿄 |
공용어 | 중세 일본어 |
종교 | 신불습합 |
정부 형태 | 무가 정권 |
천황 | 고쓰치미카도 천황 (1464년 ~ 1500년) 고카시와바라 천황 (1500년 ~ 1526년) 고나라 천황 (1526년 ~ 1557년) |
정이대장군 | 아시카가 요시즈미 (1494년 ~ 1508년) 아시카가 요시테루 (1546년 ~ 1565년) |
관령 | 호소카와 마사모토 (1494년 ~ 1507년) 호소카와 하루모토 (1531년 ~ 1549년) |
통화 | 일본 문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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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오닌의 난 당시 간레이이자 교토 가문 당주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마사모토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마사모토는 당시 7세에 불과했으므로, 실제로는 후견인 호소카와 마사쿠니와 호소카와 교토 가문의 가신(내중)들의 합의로 정치가 운영되었다. 내중은 무로마치 막부의 봉행중을 모방한 행정관 역할을 했다.
오닌의 난으로 다른 유력 다이묘들은 영지로 돌아갔지만, 호소카와 가문은 교토 주변에 영지를 두고 있었기에 교토에 머물며 막부 운영에 계속 관여했다. 이는 강점인 동시에 교토 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는 약점이기도 했다.[1]
1489년, 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사망하고 쇼군 계승 문제가 발생하자, 마사모토는 세이코를 차기 쇼군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아시카가 요시미 및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의 정쟁에서 패배, 요시미의 아들 요시타네가 10대 쇼군이 되었다.[2]
1491년 요시미가 사망하자 막부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가 독점했다. 1493년, 마사나가는 가와치 평정을 위해 쇼군 요시타네와 함께 하타케야마 요시토요를 공격했다. 이때 마사모토는 히노 도미코, 이세 사다무네와 결탁해 쿠데타를 일으켰다.('''명응의 정변''') 마사모토는 세이코를 교토로 불러들여 11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카로 옹립했다. 가와치에 있던 요시타네는 마사모토가 보낸 토벌군에 체포되어 교토에 유폐되었고, 마사나가는 자결했다. 이로써 마사모토는 쇼군을 꼭두각시로 세워 호소카와 정권을 수립했다.[3]
그러나 요시타네가 탈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마사모토는 요시타네를 아와지시마 부근으로 유배시키려 했지만, 요시타네는 진보 나가마사의 도움으로 탈출, 오우치 요시오키에게 의탁했다. 1499년, 마사모토는 요시타네에 호응한 세력들을 격파하고, 간레이 직을 독점하며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비에이 산 엔랴쿠지를 불태우는 등 반항 세력을 제압하고 호소카와 가문의 전성기를 구축했다.
하지만 마사모토는 명응의 정변에서 활약한 우에하라 모토히데를 중용했다가 내부 사람들의 반발을 사 모토히데가 살해당하는 사건을 겪었다. 또한 야마시로 슈고 직위를 둘러싼 갈등에서 이세 사다미치와 타협하여 야마시로국 잇키를 탄압하고, 호소카와 요시하루가 구니진을 기용하는 등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마사모토는 슈겐도에 몰두하여 정무를 가신에게 맡기는 경우가 있었지만, 야스토미 모토이에, 야쿠시지 모토나가 등 뛰어난 가신들이 있었고, 1501년 내부 통제를 위한 '식조'를 제정하여 큰 혼란은 없었다. 그러나 1504년 야쿠시지 모토카즈의 반란 등 내부 불안이 가중되었다.
마사모토는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아 친자식이 없었다. 구조 마사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스미유키, 호소카와 나리유키의 손자 호소카와 스미모토,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양자로 맞이했으나, 이는 가독 다툼을 야기했다.
1506년 마사모토는 세력 확대를 위해 각지에 군대를 파견했다. 1507년 6월 23일, 마사모토는 스미유키를 추종하는 야쿠시지 나가타다 등에 의해 암살당했다(에이쇼의 착란).
마사모토 암살 후, 스미유키를 옹립한 야쿠시지 나가타다와 야쿠시지 모토나가는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암살도 꾀했지만, 스미모토는 가신 미요시 유키나가의 도움으로 오미로 탈출했다.[1] 오미로 도망친 스미모토·유키나가 등은 오미의 고쿠진들과 다른 호소카와 일족을 아군으로 삼아, 1507년 8월 1일에는 교토를 침공, 스미유키와 나가타다·모토나가등은 자결하여 스미유키 정권은 40일 만에 붕괴했다.[1]
스미유키를 제거한 스미모토는 호소카와 교초 가문의 가독을 이었다.[1] 이러한 내분은 스오로 도망가 있던 아시카가 요시타다(요시즈미)와 오우치 요시오키에게 알려졌고, 요시오키는 규슈·중국의 여러 다이묘들을 동원하여 상락을 시작했다.[1] 스미모토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에게 명하여 요시오키와 화목하려 했지만, 다카쿠니는 요시오키와 내통하고 배반했다.[1]
永正|에이쇼일본어 5년 (1508년) 4월, 서쪽에서 요시오키가 이끄는 군, 동쪽에서 다카쿠니가 이끄는 이가 등의 군세에 공격받은 스미모토는 교토를 포기하고 오미로 도망했다.[1] 이때, 스미모토에게 옹립되었던 아시카가 요시즈미도 오미로 도망했다. 다시 요시타다가 쇼군으로 복귀하여(후에 요시타네로 개명), 다카쿠니는 교초 가문의 가독을 잇고 간레이, 요시오키는 간레이다이가 되어 다카쿠니·요시오키의 연립에 의한 꼭두각시 정권이 성립했다.[1]
에이쇼 6년(1509년), 스미모토와 유키나가 등은 교토 탈환을 목표로 교토를 공격했지만 패배했다(뇨이카타케 전투). 1510년에는 다카쿠니와 요시오키가 오미를 침공했지만, 스미모토는 오미 국인(国人)들의 지지를 받아 격파하는 등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1511년, 스미모토는 마사카타, 요시무라 등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대군을 이끌고 교토를 공격, 각지에서 다카쿠니·요시오키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배후 세력이었던 오미 슈고 다카요리가 다카쿠니 측으로 돌아서고, 8월 14일에 스미모토가 옹립하고 있던 아시카가 요시즈미가 병사하면서, 후나오카야마 전투에서 스미모토는 패배하고 호소카와 마사카타는 전사했으며, 스미모토는 셋쓰로 도망쳤다.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옹립한 다카쿠니와 요시오키의 연립 정권은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1518년 요시오키가 스오로 귀국하면서 다카쿠니의 단독 정권이 되었다. 1519년 스미모토 등은 셋쓰를 공격했고(다나카성 전투), 1520년 야마시로에서 도잇키가 일어나는 등, 결국 다카쿠니는 오미로 도망쳤다. 이후 다카쿠니는 교토를 공격하여 스미모토는 셋쓰로 도망치고, 미요시 유키나가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도지인 전투), 스미모토도 아와 쇼즈이 성에서 병사했다.
스미모토의 죽음으로 다카쿠니는 강권 정치를 펼치며, 공신 숙청, 1521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추방,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새롭게 제12대 쇼군으로 옹립했다. 1525년 다카쿠니는 아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지만, 아들의 요절로 가독을 다시 상속했다.
1526년, 노리카타의 참언을 믿은 다카쿠니는 중신인 모토모리를 죽였다. 1527년 가쓰라가와 전투에서 다카쿠니가 패배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옹립하고 오미로 도망쳤다. 호소카와 로쿠로(스미모토의 적자) 등은 아시카가 요시쓰나를 옹립하여 사카이 막부를 수립했다.
1530년 다카쿠니는 다시 교토로 복귀했지만, 1531년 셋쓰 나카시마 전투에서 미요시 모토나가에게 패배, 덴노지 전투에서도 패하여 자결했다.
호소카와 다카쿠니 사후, 미요시 나가모토에게 옹립되어 호소카와 교초가의 가독을 이은 것은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인 호소카와 하루모토였다. 1532년 나가모토를 주살하고 사카이 막부와 결별했다. 덴분의 착란에는 호케잇키, 롯카쿠 사다요리의 힘을 빌려 싸웠고, 덴분 5년 (1536년)에 화해, 덴분 호케의 난을 통해 교토의 안정을 확보하고 요시하루와 화해하여 요시하루를 괴뢰로 삼은 간레이 하루모토에 의한 막정이 이루어졌다.[1]
하지만 30년에 걸친 양 호소카와의 내분으로 호소카와 씨 일문 및 그 영지가 양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호소카와 교초가를 지탱하고 있던 내중의 많은 수가 죽거나 추방되어 호소카와 정권은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국인이 성장하고 내중은 몰락하거나 국인 영주화해갔다. 호소카와 정권은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거나, 유력 국인을 정권에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체제 재정비를 했다. 오우치 요시오키와 결탁한 것은 전자, 나가요시 부자나 이바라키 나가타카를 수호대로 발탁한 것은 후자이다. 다카쿠니・하루모토를 통해 호소카와 씨의 수호로서의 영지는 해체되고, 내중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된다.
덴분 2년(1533년), 호소카와 하루쿠니를 옹립하여 거병했지만, 호소카와 우지쓰나를 지지하는 세력으로부터 협력을 얻지 못해, 3년 후 하루쿠니가 패사하면서 일단 하루모토의 체제가 안정되었다.[3]
덴분 11년(1543년) 호소카와 우지쓰나가 거병하면서 다시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이 재연되었다. 미요시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가 하루모토의 가신으로서 두각을 나타내, 하루모토는 우지쓰나를 압도했다. 그러나 덴분 17년(1548년) 나가요시가 우지쓰나 측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하루모토 측이 불리하게 되었고, 덴분 18년(1549년) 에구치의 전투에서 나가요시에게 패배하여 마사나가는 전사하고, 하루모토는 요시하루, 요시테루 부자와 함께 오미로 도망쳤다. 우지쓰나는 간레이가 되었지만 나가요시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하루모토의 패배로 호소카와 정권은 종언하고, 나가요시에 의한 게세이조에 의해 새롭게 '''미요시 정권'''이 성립되었다.
에이로쿠 4년(1561년),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미요시 나가요시에게 패배하여 화해하였다.(구메다 전투) 하루모토는 2년 후 사망했고, 그의 아들 소겐은 호소카와 우지쓰나와 함께 미요시 씨의 괴뢰가 되었다. 오다 정권 하에서 소겐은 오다 노부나가의 매제가 되어, 명목상 구 영토인 단바의 기수로 명맥을 유지했다.
2. 1. 오닌의 난과 호소카와 가문의 부상
오닌의 난 당시 간레이이자 교토 가문 당주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마사모토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마사모토는 당시 7세에 불과했으므로, 실제로는 후견인 호소카와 마사쿠니와 호소카와 교토 가문의 가신(내중)들의 합의로 정치가 운영되었다. 내중은 무로마치 막부의 봉행중을 모방한 행정관 역할을 했다.오닌의 난으로 다른 유력 다이묘들은 영지로 돌아갔지만, 호소카와 가문은 교토 주변에 영지를 두고 있었기에 교토에 머물며 막부 운영에 계속 관여했다. 이는 강점인 동시에 교토 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는 약점이기도 했다.[1]
1489년, 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사망하고 쇼군 계승 문제가 발생하자, 마사모토는 세이코를 차기 쇼군으로 옹립하려 했으나, 아시카가 요시미 및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의 정쟁에서 패배, 요시미의 아들 요시타네가 10대 쇼군이 되었다.[2]
1491년 요시미가 사망하자 막부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가 독점했다. 1493년, 마사나가는 가와치 평정을 위해 쇼군 요시타네와 함께 하타케야마 요시토요를 공격했다. 이때 마사모토는 히노 도미코, 이세 사다무네와 결탁해 쿠데타를 일으켰다.('''명응의 정변''') 마사모토는 세이코를 교토로 불러들여 11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카로 옹립했다. 가와치에 있던 요시타네는 마사모토가 보낸 토벌군에 체포되어 교토에 유폐되었고, 마사나가는 자결했다. 이로써 마사모토는 쇼군을 꼭두각시로 세워 호소카와 정권을 수립했다.[3]
2. 2. 명응의 정변과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집권
오닌의 난 와중에 간레이로서 큰 힘을 가지고 있던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마사모토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마사모토는 당시 7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후견인인 호소카와 마사쿠니와 호소카와 교토 가문의 가신들(내중)의 합의로 정치가 운영되었다.마사모토는 1489년 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사망하자, 차기 쇼군으로 세이코를 옹립하려 했지만, 아시카가 요시미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의 정쟁에서 패배하여 요시미의 아들 요시타네가 10대 쇼군이 되었다.
1491년 요시미가 사망한 후, 마사나가는 하타케야마 요시토요를 공격하기 위해 쇼군 요시타네를 옹립하여 가와치로 원정을 떠났다. 이 틈을 타 1493년, 교토에 있던 마사모토는 히노 도미코, 이세 사다무네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켜(''명응의 정변'') 세이코를 11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카로 옹립했다. 요시타네는 교토 료안지에 유폐되었고, 마사나가는 자결했다. 이로써 마사모토는 쇼군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호소카와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요시타네가 탈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마사모토는 요시타네를 아와지시마 부근으로 유배시키려 했지만, 요시타네는 진보 나가마사의 도움으로 탈출, 오우치 요시오키에게 의탁했다. 1499년, 마사모토는 요시타네에 호응한 세력들을 격파하고, 간레이 직을 독점하며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비에이 산 엔랴쿠지를 불태우는 등 반항 세력을 제압하고 호소카와 가문의 전성기를 구축했다.
하지만 마사모토는 명응의 정변에서 활약한 우에하라 모토히데를 중용했다가 내부 사람들의 반발을 사 모토히데가 살해당하는 사건을 겪었다. 또한 야마시로 슈고 직위를 둘러싼 갈등에서 이세 사다미치와 타협하여 야마시로국 잇키를 탄압하고, 호소카와 요시하루가 구니진을 기용하는 등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마사모토는 슈겐도에 몰두하여 정무를 가신에게 맡기는 경우가 있었지만, 야스토미 모토이에, 야쿠시지 모토나가 등 뛰어난 가신들이 있었고, 1501년 내부 통제를 위한 '식조'를 제정하여 큰 혼란은 없었다. 그러나 1504년 야쿠시지 모토카즈의 반란 등 내부 불안이 가중되었다.
마사모토는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아 친자식이 없었다. 구조 마사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스미유키, 호소카와 나리유키의 손자 호소카와 스미모토, 호소카와 다카쿠니를 양자로 맞이했으나, 이는 가독 다툼을 야기했다.
1506년 마사모토는 세력 확대를 위해 각지에 군대를 파견했다. 1507년 6월 23일, 마사모토는 스미유키를 추종하는 야쿠시지 나가타다 등에 의해 암살당했다(에이쇼의 착란).
2. 3. 마사모토 사후의 권력 투쟁
마사모토 암살 후 6월 24일, 나가타다와 모토나가는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암살도 꾀했지만, 스미모토는 가신 미요시 유키나가의 도움으로 오미로 탈출했다.[1] 유키나가는 스미모토가 양자로 들어갈 때 아와 호소카와 가문에서 따라와 마사모토의 가신이 되었다.[1] 그리하여 나가타다와 모토나가는 스미유키를 옹립했다.[1]그러나 오미로 도망친 스미모토·유키나가 등은 오미의 고쿠진들과 다른 호소카와 일족을 아군으로 삼아, 8월 1일에는 교토에 침공했다.[1] 이 전투에서 스미유키는 패배하여, 유쇼켄(스미유키의 자택)에서 자결했다.[1] 나가타다·모토나가 등도 자결하여, 스미유키 정권은 불과 40일 만에 붕괴했다.[1]
스미유키를 자결하게 만든 스미모토는 호소카와 교초 가문의 가독을 이었다.[1] 그런데, 이러한 내분이 스오로 도망가 있던 아시카가 요시타다(요시즈미)와 오우치 요시오키에게 알려지자, 요시오키는 규슈·중국의 여러 다이묘들을 동원하여 상락을 시작했다.[1] 스미모토는 다카쿠니에게 명하여 요시오키와 화목하려 했지만, 다카쿠니는 그 뜻에 반하여 요시오키와 내통하고 배반했다.[1] 이 때문에 화목 교섭은 결렬되었다.[1]
永正|에이쇼일본어 5년 (1508년) 4월, 서쪽에서 요시오키가 이끄는 군, 동쪽에서 다카쿠니가 이끄는 이가 등의 군세에 공격받은 스미모토는 교토를 포기하고 오미로 도망했다.[1] 이때, 스미모토에게 옹립되었던 아시카가 요시즈미도 오미로 도망했다.[1] 이 때문에, 다시 요시타다가 쇼군으로 복귀하여(후에 요시타네로 개명), 다카쿠니는 교초 가문의 가독을 잇고 간레이, 요시오키는 간레이다이가 되어 이번에는 다카쿠니·요시오키의 연립에 의한 꼭두각시 정권이 성립했다.[1]
2. 4.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집권과 몰락
에이쇼 6년(1509년), 스미모토와 유키나가 등은 교토 탈환을 목표로 교토를 공격했지만 패배했다(뇨이카타케 전투). 1510년에는 오히려 다카쿠니와 요시오키가 오미를 침공했지만, 스미모토는 오미 국인(国人)들의 지지를 받아 이를 격파하는 등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1511년, 스미모토는 마사카타, 요시무라 등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대군을 이끌고 교토를 공격하여 각지에서 다카쿠니·요시오키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배후 세력이었던 오미 슈고 다카요리가 다카쿠니 측으로 돌아서고, 8월 14일에 스미모토가 옹립하고 있던 아시카가 요시즈미가 병사했다. 이 때문에 8월 24일에 벌어진 후나오카야마 전투에서 스미모토는 패배하고 호소카와 마사카타는 전사했으며, 스미모토는 셋쓰로 도망쳤다.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옹립한 다카쿠니와 요시오키의 연립 정권은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1518년 8월 2일, 오우치 요시오키가 스오로 귀국하면서 다카쿠니의 단독 정권이 되었다. 그러나 반격의 기회를 엿보던 스미모토 등은 1519년 10월에 셋쓰를 공격했다(다나카성 전투). 다카쿠니는 이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1520년 1월에는 야마시로에서 도잇키가 일어나는 등, 결국 오미로 도망쳤다. 이때 다카쿠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요시타네는 다카쿠니와 함께하지 않고 스미모토의 비호를 받았다. 그러나 5월에 오미로 도망친 다카쿠니는 대군을 이끌고 교토를 공격하여 스미모토는 셋쓰로 도망치고, 미요시 유키나가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도지인 전투). 그리고 6월 10일, 스미모토도 도망친 아와 쇼즈이 성에서 병사했다.
스미모토의 죽음으로 적대자가 없어진 다카쿠니이지만, 원래 실력자인 오우치 요시오키의 힘을 배경으로 한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 정권 기반은 취약했고, 요시오키가 귀국한 후의 다카쿠니는 강권 정치를 펼치며 이를 유지해야 했다. 공신인 카와라바야시 마사요리와 토시쿠라 민부(利倉民部) 등을 숙청하고, 1521년에는 대립하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추방하고 요시즈미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새롭게 제12대 쇼군으로 옹립하는 등, 그 위엄이 날로 증가했다.
1525년 4월, 다카쿠니는 아들 토시쿠니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지만, 토시쿠니는 12월에 요절하여 부득이 가독을 다시 상속했다.
1526년, 5촌 조카에 해당하는 단바의 수호 노리카타의 참언을 믿은 다카쿠니는 중신인 모토모리를 죽였다. 이로 인해 모토모리의 형제인 하타노 모토키요와 야나기모토 겐지 등은 호소카와 로쿠로(스미모토의 적자, 후의 하루모토)와 미요시 모토나가(유키나가의 손자)와 내통하여 다카쿠니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다카쿠니는 하타노 토벌을 실행했지만, 나이토 구니사다 등의 반항도 있어 실패했다. 1527년 2월에는 가쓰라가와 전투에서 하타노·미요시 군에게 다카쿠니가 패배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옹립하고 오미로 도망쳤다. 로쿠로 등은 요시하루의 형제에 해당하는 아시카가 요시쓰나를 옹립하여 가짜 정권인 사카이 막부를 수립했다.
1530년 5월, 다카쿠니를 대신하여 교토에서 권세를 떨치던 야나기모토 겐지가 가신인 나카무라 스케사부로에게 암살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카쿠니는 다시 교토로 복귀했지만, 1531년 3월에는 셋쓰 나카시마 전투에서 미요시 모토나가에게 패배하고, 6월 4일 덴노지 전투(다이모쓰 붕괴)에서도 모토나가에게 패하여 사로잡혀 6월 8일에 자결했다. 이렇게 다카쿠니 정권은 붕괴했다.
2. 5.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집권과 미요시 나가요시의 등장
호소카와 다카쿠니 사후, 미요시 나가모토에게 옹립되어 호소카와 교초가의 가독을 이은 것은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인 호소카와 하루모토였다. 그러나 교로쿠 5년 (1532년) 미요시 마사나가, 키자와 나가마사, 이바라키 나가타카의 참언을 받고, 혼간지 제10세 쇼뇨를 통해 잇코잇키를 움직여, 잇키군에 대한 패전 책임을 구실로 나가모토를 주살하고 사카이 막부와 결별했다. 잇코잇키의 폭주 (덴분의 착란)에는 호케잇키, 롯카쿠 사다요리의 힘을 빌려 싸웠고, 덴분 5년 (1536년)에 화해, 교토에서 세력을 뻗은 호케잇키는 사다요리와 히에이 산 엔랴쿠지에 가담하여 진압 (덴분 호케의 난), 교토의 안정을 확보하고 요시하루와 화해하여 요시하루를 괴뢰로 삼은 간레이 하루모토에 의한 막정이 이루어졌다.[1]
하지만 30년에 걸친 양 호소카와의 내분으로 호소카와 씨 일문 및 그 영지가 양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호소카와 교초가를 지탱하고 있던 내중의 많은 수가 죽거나 추방되어 호소카와 정권은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호소카와 씨의 수호나 내중에 의해 억압받던 국인이 내분의 혼란을 틈타 재지에서 힘을 키우면서, 재경 생활이 많아 재지에서의 기반을 굳히지 못한 내중은 몰락하거나, 혹은 그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 재지로 돌아와 스스로 국인 영주화해갔다.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호소카와 정권은 체제 재정비를 강요받았다. 하나는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아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미요시 씨나 이바라키 씨와 같이 원래 내중에 포함되지 않았던 유력 국인을 정권에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오우치 요시오키와 결탁한 것은 전자의 전략에 의한 것이고, 호소카와 하루모토가 교초가에게는 외부인인 미요시 나가모토・나가요시 부자나 이바라키 나가타카를 수호대로 발탁한 것은 후자의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다카쿠니・하루모토를 통해 호소카와 씨의 수호로서의 영지는 해체되고, 내중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 시점에서 호소카와 정권의 전제가 되는 호소카와 씨 일족의 동족 연합과 내중의 합의제에 근거한 의사 결정은 포기되었다.
덴분 2년(1533년), 이전의 다카쿠니 진영은 다카쿠니의 친동생인 호소카와 하루쿠니를 옹립하여 거병했다. 그러나 하루쿠니는 원래 다카쿠니를 대신하여 그 친가인 야슈가(당시에는 보슈가라고도 불렀다)를 이을 존재였으며, 교초가의 후계자로서 덴큐가에서 다카쿠니의 양자로 받아들여졌고, 연장자였던 호소카와 우지쓰나를 지지하는 세력으로부터 협력을 얻지 못해, 3년 후 하루쿠니가 패사하면서 일단 하루모토의 체제가 안정되었다.[3]
덴분 11년(1543년) 호소카와 우지쓰나가 거병하면서 다시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이 재연되었다. 이때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가 하루모토의 가신으로서 두각을 나타내, 하루모토는 우지쓰나를 압도했다. 그러나 덴분 17년(1548년) 나가요시가 우지쓰나 측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하루모토 측이 불리하게 되었고, 덴분 18년(1549년) 에구치의 전투에서 나가요시에게 패배하여 마사나가는 전사하고, 하루모토는 요시하루, 요시테루 부자와 함께 오미로 도망쳤다. 우지쓰나는 간레이가 되었지만 나가요시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하루모토의 패배로 호소카와 정권은 종언하고, 나가요시에 의한 게세이조에 의해 새롭게 '''미요시 정권'''이 성립되었다.
2. 6. 미요시 정권의 성립과 호소카와 가문의 쇠퇴
덴분 2년(1533년),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친동생인 호소카와 하루쿠니를 옹립하여 거병했다. 그러나 하루쿠니는 다카쿠니를 대신하여 친가인 야슈가(당시에는 보슈가라고도 불렀다)를 이을 존재였으며, 호소카와 우지쓰나를 지지하는 세력으로부터 협력을 얻지 못해, 3년 후에 하루쿠니가 사망하면서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체제가 안정되었다.[3]
덴분 11년(1543년)에 호소카와 우지쓰나가 거병하면서 다시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이 재연되었다. 이때, 미요시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가 하루모토의 가신으로서 두각을 나타내, 하루모토는 우지쓰나를 압도했다. 그러나 덴분 17년(1548년), 나가요시가 우지쓰나 측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하루모토 측이 불리하게 되었고, 덴분 18년(1549년) 에구치의 전투에서 나가요시에게 패배하여 마사나가에게 죽임을 당한 하루모토는 요시하루, 요시테루 부자와 함께 오미로 도망쳤다. 우지쓰나는 간레이가 되었지만 나가요시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하루모토의 패배로 호소카와 정권은 종언하고, 나가요시에 의한 게세이조에 의해 새롭게 '''미요시 정권'''이 성립되었다. 미요시 정권은 쇼군, 간레이와 같은 상위 권력을 옹호하고 있었지만, 그 의사(상의)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었으며, 호소카와 정권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2. 7. 호소카와 가문의 이후
에이로쿠 4년(1561년),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미요시 나가요시에게 패배하여 화해하였다.(구메다 전투) 하루모토는 2년 후 사망했고, 그의 아들 소겐은 호소카와 우지쓰나와 함께 미요시 씨의 괴뢰가 되었다. 오다 정권 하에서 소겐은 오다 노부나가의 매제가 되어, 명목상 구 영토인 단바의 기수로 명맥을 유지했다.3. 호소카와 정권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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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요 인물
-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 1466년 ~ 1507년)
오닌의 난 중 간레이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아들. 1493년 명응의 정변을 일으켜 쇼군을 교체하고 호소카와 정권을 수립했다. 반항 세력을 진압하며 세력을 확대했지만, 슈겐도에 몰두하고 후계 문제로 1507년 암살당했다(에이쇼의 착란).
- 호소카와 스미유키(細川澄之, ? ~ 1507년)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양자. 마사모토 암살 후 옹립되었으나,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공격을 받고 자결했다.
- 호소카와 스미모토(細川澄元, 1489년 ~ 1520년)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양자. 마사모토 암살 후 오미로 피신했다가 교토를 공격해 호소카와 스미유키를 제거하고 가독을 이었다. 오우치 요시오키와 다카쿠니에게 밀려 오미로 도망쳤고, 이후 교토 탈환에 실패하고 1520년 병사했다.
-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国, 1484년 ~ 1531년)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양자. 오우치 요시오키와 결탁하여 호소카와 스미모토를 몰아내고 간레이가 되었다. 단독 정권을 수립하고 쇼군을 교체하는 등 강권을 휘둘렀으나, 내분으로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패배하고 자결했다.
-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 1514년 ~ 1563년)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다카쿠니 사후 미요시 나가모토에게 옹립되어 가독을 이었다. 잇코잇키를 이용하여 나가모토를 제거하고 요시하루와 화해하여 막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미요시 나가요시의 배신으로 오미로 도망쳤다.
-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 1522년 ~ 1564년)
미요시 모토나가의 아들.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가신으로 활약했으나, 후에 호소카와 우지쓰나 측으로 돌아서서 하루모토를 몰아내고 미요시 정권을 수립했다.
4. 1. 호소카와 마사모토
오닌의 난 중에 간레이이자 교토 가문의 당주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마사모토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당시 마사모토는 7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후견인과 가신들의 합의로 정치가 운영되었다.마사모토는 1489년 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사망하고 쇼군 계승 문제가 발생하자, 세이코를 옹립하려 했지만, 아시카가 요시미와의 정쟁에서 패배하여 요시타네가 10대 쇼군으로 옹립되었다.
1491년 요시미가 사망한 후, 마사모토는 1493년 명응의 정변을 일으켜 요시타네를 몰아내고 세이코(아시카가 요시타카)를 11대 쇼군으로 옹립하여 호소카와 정권을 수립했다. 이로써 마사모토는 쇼군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마사모토는 여러 다이묘들의 공격을 격파하고 비에이 산 엔랴쿠지를 불태우는 등 반항 세력을 진압하며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내부 권력 다툼과 야마시로국 잇키 탄압 등으로 인해 점차 내부에 불안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마사모토는 슈겐도에 몰두하여 정무를 가신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아 친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호소카와 스미유키, 호소카와 스미모토, 호소카와 다카쿠니 등 3명의 양자를 맞이했지만, 이는 오히려 가독 다툼을 일으켰다.
1506년 마사모토는 세력 확대를 위해 여러 국가에 군대를 파견했고, 1507년 신변에 군대가 없는 상황에서 스미유키를 추종하는 가신들에게 암살당했다(에이쇼의 착란).
4. 2. 호소카와 스미유키
호소카와 마사모토 암살 후 6월 24일, 나가타다와 모토나가는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암살도 꾀했지만, 스미모토는 가신 미요시 유키나가의 도움으로 오미로 탈출했다.[1] 미요시 유키나가는 스미모토의 양자로 들어갈 때 아와 호소카와 가문에서 따라와 마사모토의 가신으로 편입되었다.[1] 이로써 나가타다와 모토나가는 호소카와 스미유키를 옹립했다.[1]그러나 오미로 도망친 스미모토와 미요시 유키나가 등은 오미의 고쿠진들과 다른 호소카와 일족을 아군으로 삼아, 8월 1일에는 교토에 침공했다.[2] 이 전투에서 스미유키는 패배하여, 유쇼켄(스미유키의 자택)에서 자결했다.[2] 나가타다·모토나가 등도 자결하여, 스미유키 정권은 불과 40일 만에 붕괴했다.[2]
4. 3. 호소카와 스미모토
호소카와 마사모토 암살 후 6월 24일, 나가타다와 모토나가는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암살도 꾀했지만, 스미모토는 가신 미요시 유키나가의 도움으로 오미로 탈출했다.[1] 유키나가는 스미모토가 양자로 들어갈 때 아와 호소카와 가문에서 따라와 마사모토의 가신이 되었다.[1] 이후 나가타다와 모토나가는 호소카와 스미유키를 옹립했다.[1]그러나 오미로 도망친 스미모토와 유키나가 등은 오미의 고쿠진들과 다른 호소카와 일족을 아군으로 삼아, 8월 1일에는 교토에 침공했다.[1] 이 전투에서 스미유키는 패배하여 유쇼켄(스미유키의 자택)에서 자결했고, 나가타다·모토나가 등도 자결하여 스미유키 정권은 불과 40일 만에 붕괴했다.[1]
스미유키를 자결하게 만든 스미모토는 호소카와 교초 가문의 가독을 이었다.[1] 그런데, 이러한 내분이 스오로 도망가 있던 아시카가 요시타다(요시즈미)와 오우치 요시오키에게 알려지자, 요시오키는 규슈·중국의 여러 다이묘들을 동원하여 상락을 시작했다.[1] 스미모토는 타카쿠니에게 명하여 요시오키와 화목하려 했지만, 타카쿠니는 그 뜻에 반하여 요시오키와 내통하고 배반했다.[1] 이 때문에 화목 교섭은 결렬되었다.[1]
에이쇼 5년 4월, 서쪽에서 요시오키가 이끄는 군, 동쪽에서 타카쿠니가 이끄는 이가 등의 군세에 공격받은 스미모토는 교토를 포기하고 오미로 도망했다.[1] 이때 스미모토에게 옹립되었던 아시카가 요시즈미도 오미로 도망했다.[1] 이 때문에 다시 요시타다가 쇼군으로 복귀하여(후에 요시타네로 개명), 타카쿠니는 교초 가문의 가독을 잇고 간레이가 되었으며 요시오키는 간레이다이가 되어 타카쿠니·요시오키의 연립에 의한 꼭두각시 정권이 성립했다.[1]
4. 4. 호소카와 다카쿠니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암살된 후, 호소카와 스미모토는 미요시 유키나가의 도움으로 오미로 피신했다. 그 후 스미모토는 오미의 고쿠진들과 다른 호소카와 일족을 아군으로 삼아 교토를 공격하여, 호소카와 스미유키를 자결하게 하고 호소카와 교초 가문의 가독을 이었다.[1] 그러나 이 내분은 스오로 도망가 있던 아시카가 요시타다(요시즈미)와 오우치 요시오키에게 알려졌고, 요시오키는 상락을 시작했다. 스미모토는 다카쿠니에게 요시오키와 화목할 것을 명했지만, 다카쿠니는 요시오키와 내통하여 배반했다.[1]1508년 4월, 다카쿠니는 요시오키와 함께 스미모토를 공격하여 오미로 몰아냈다. 이로써 요시타다가 쇼군으로 복귀하고, 다카쿠니는 교초 가문의 가독을 잇고 간레이가 되었으며, 요시오키는 간레이다이가 되어 다카쿠니·요시오키의 연립에 의한 꼭두각시 정권이 성립되었다.[1]
1509년, 스미모토는 교토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뇨이카타케 전투).[2] 1511년, 스미모토는 다시 교토를 공격했지만, 후나오카야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셋쓰로 후퇴했다.[2]
1518년 8월 2일, 오우치 요시오키가 스오로 귀국하면서 다카쿠니의 단독 정권이 되었다.[2] 1519년 10월, 스미모토는 셋쓰를 공격했지만, 다카쿠니는 이를 막지 못하고 1520년 1월 야마시로에서 도잇키가 일어나자 오미로 도망쳤다.[2] 그러나 5월, 다카쿠니는 대군을 이끌고 교토를 공격하여 스미모토를 셋쓰로 몰아냈고, 미요시 유키나가를 처형했다. 6월 10일, 스미모토는 아와 쇼즈이 성에서 병사했다.[2]
스미모토의 죽음 이후, 다카쿠니는 강권 정치를 펼치며 정권을 유지했다. 1521년에는 대립하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추방하고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새 쇼군으로 옹립했다.[2]
1525년 4월, 다카쿠니는 아들 토시쿠니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지만, 토시쿠니는 12월에 요절하여 가독을 재상속했다.[2]
1526년, 다카쿠니는 중신 고사이 모토모리를 주살했다. 이로 인해 모토모리의 형제들이 호소카와 하루모토(스미모토의 아들)와 미요시 모토나가(유키나가의 손자)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3] 1527년 2월, 가쓰라가와 전투에서 다카쿠니는 패배하고 오미로 도망쳤다. 로쿠로 등은 아시카가 요시쓰나를 옹립하여 사카이 막부를 수립했다.[3]
1530년 5월, 다카쿠니를 대신하여 권세를 떨치던 야나기모토 겐지가 암살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카쿠니는 다시 교토로 돌아왔지만, 1531년 3월 나카시마 전투와 6월 덴노지 전투에서 모토나가에게 패배하고 사로잡혀 자결했다.[3]
4. 5. 호소카와 하루모토
호소카와 스미모토의 아들로, 호소카와 다카쿠니가 사망한 후 미요시 나가모토에게 옹립되어 호소카와 교초 가문의 가독을 이었다. 그러나 1532년, 미요시 마사나가, 키자와 나가마사, 이바라키 나가타카 등의 참언을 받아 혼간지 제10세 쇼뇨를 통해 잇코잇키를 움직였다. 잇키군에 대한 패전 책임을 구실로 나가모토를 주살하고, 사카이 막부와 결별했다. 잇코잇키의 폭주(덴분의 착란)에는 호케잇키・롯카쿠 사다요리의 힘을 빌려 싸웠고, 1536년에 화해했다. 교토에서 세력을 뻗은 호케잇키는 사다요리와 히에이 산 엔랴쿠지에 가담하여 진압하고(덴분 호케의 난), 교토의 안정을 확보하고 쇼군・요시하루와 화해, 요시하루를 괴뢰로 삼은 간레이 하루모토에 의한 막정(정치)이 이루어졌다.[1]하지만 30년에 걸친 양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으로 호소카와 씨 일문 및 그 령국이 양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호소카와 교초 가문을 지탱하고 있던 가신들의 많은 수가 죽거나 추방되어 모습을 감추면서 호소카와 정권은 그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호소카와 씨의 수호나 가신들에 의해 억압의 대상이 되고 있던 국인(国人)이 내분의 혼란을 틈타 재지에서 힘을 키우면서, 재경 생활이 많아 재지에서의 기반을 굳히지 못한 가신들은 몰락하거나, 혹은 그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 재지로 돌아와 스스로도 국인 영주화해갔다.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호소카와 정권은 체제 재정비를 강요받았다.
1533년, 예전의 다카쿠니 진영은 다카쿠니의 친동생인 호소카와 하루쿠니를 옹립하여 거병했다. 그러나 하루쿠니는 3년 후 패사하면서 일단은 하루모토의 체제가 안정되었다.[3]
1543년에 호소카와 우지쓰나가 거병하면서 다시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이 재연되었다. 이때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가 하루모토의 가신으로서 두각을 나타내 하루모토는 우지쓰나를 압도했다. 그러나 1548년, 나가요시가 우지쓰나 측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하루모토 측이 불리하게 되었고, 1549년에는 에구치의 전투에서 나가요시에게 패배하여 마사나가에게 죽임을 당한 하루모토는 요시하루, 요시테루 부자와 함께 오미로 도망쳤다.
4. 6. 미요시 나가요시
1543년, 호소카와 우지쓰나가 거병하면서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이 다시 일어났다. 이때 모토나가의 아들 미요시 나가요시가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가신으로 두각을 나타내 하루모토는 우지쓰나를 압도했다. 그러나 1548년, 나가요시가 우지쓰나 측으로 돌아서면서 하루모토 측이 불리해졌고, 1549년 에구치의 전투에서 나가요시에게 패배하여 마사나가에게 죽임을 당한 하루모토는 요시하루, 요시테루 부자와 함께 오미로 도망쳤다.[3]
우지쓰나는 간레이가 되었지만 나가요시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하루모토의 패배로 호소카와 정권은 막을 내리고 나가요시에 의해 미요시 정권이 성립되었다. 미요시 정권은 쇼군, 간레이와 같은 상위 권력을 옹호했지만, 그 의사(상의)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하여 호소카와 정권과는 성격이 달랐다.
참조
[1]
서적
室町・戦国期研究を読みなおす
思文閣出版社
[2]
서적
戦国期政治史論集 西国編
岩田書院
[3]
서적
戦国・織豊期の西国社会
日本史史料研究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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