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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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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부는 본래 중국에서 유래된 용어로, 왕을 대신하여 지휘를 맡은 원정군 장군의 진지를 의미했다. 일본에서는 근위대장의 거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다가, 가마쿠라 시대 이후 무가 정권의 수장과 그 거관을 지칭하는 용어로 발전했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에는 관념적인 무가 정권을 의미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최근에는 가마쿠라, 무로마치, 에도 막부 외에도 새로운 무가 정권을 '막부'로 칭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이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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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

2. 어원

」은 「만막(幔幕)」・「진막(陣幕)」・「장막(帳幕)」・「천막」을 의미하며, 「」는 왕실 등의 보물이나 문서를 수납하는 장소, 또는 관청을 의미한다. 중국의 전국 시대에 을 대신하여 지휘를 맡은 원정군 장군이 친 진지를 「막부」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일본에서는 근위부의 당나라 이름으로 사용되었고, 나아가 근위대장의 거처 및 근위대장 자신을 가리키게 되었다. 「막하(幕下)」 또는 「유영(柳営)」이라고도 했다.[2]

2. 1. 중국에서의 용례

」은 「만막(幔幕)」・「진막(陣幕)」・「장막(帳幕)」・「천막」을 의미하며, 「」는 왕실 등의 보물이나 문서를 수납하는 장소, 또는 관청을 의미한다.[2] 중국 전국 시대에 을 대신하여 지휘를 맡은 원정군 장군이 친 진지를 「막부」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일본에서는 근위부의 당나라 이름으로 사용되었고, 나아가 근위대장의 거처 및 근위대장 자신을 가리키게 되었다. 「막하(幕下)」 또는 「유영(柳営)」이라고도 했다.[2]

2. 2. 일본에서의 용례 변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겐큐 원년(1190년)에 권대납언과 우근위대장(우대장)에 임명되었다.[3] 따라서 정청(거관)이 "막부"라고 불렸다. 겐큐 3년(1192년)에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지만, 거관은 계속해서 "막부"라고 불렸고, 이후 "막부"는 무가 정권의 수장 및 그 거관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현대에 "가마쿠라 막부"라고 불리는 정체를 "동관유영" 또는 "동관막부"라고 불렀다는 당시의 사료가 존재한다.[4]

남북조 시대에는 가마쿠라 궁방(관동 궁방)의 정체를 "관동 막부"라고 부른 사례가 존재하지만, 교토와 대립하는 관동의 정권에만 사용되었고, 교토의 궁방(="무로마치 막부")은 이처럼 막부라는 용어로 불리지 않았다.

"막부"라는 말이 장군 개인이나 공간적인 장군의 거관·정청에서 벗어나, 오늘날처럼 관념적인 무가 정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과 마찬가지로 에도 시대 중기 이후의 일이며, 주자학의 보급에 따라 중국의 전국 시대를 연구하는 유학자에 의해 주창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나 "무로마치 막부"라는 말은 이 시대 이후에 고안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관동", "무가", "궁방" 등으로 불렸으며, 각각의 초대 장군이 "막부를 연다"는 선언을 한 적도 없고, 조정이 막부를 열도록 하는 칙서도 없었다.

이 때문에 막부의 성립 연도와 정이대장군의 선하(宣下)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의 선하를 받은 1192년이 가마쿠라 막부 창설의 해로 여겨져 왔지만, 현재는 7년 전에 수호·지두직의 설치·임면의 허가를 받은 1185년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더 거슬러 올라가 9년 전에 동국 지배권의 승인을 얻은 1183년설도 유력하다. 무로마치 막부의 실질적인 성립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권대납언에 임명된 1336년으로 여겨지지만, 정이대장군에 임명된 것은 1338년이다. 에도 막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장군 선하를 받은 1603년의 성립으로 여겨진다.

한편 왕정복고의 대칙령에서는 "섭관 막부 등 폐절"이라고 명기되어 있으며, 에도 막부의 종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3. 막부의 개념과 역사적 변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겐큐 원년(1190년)에 권대납언과 우근위대장(우대장)에 임명되었다.[3] 따라서 정청(거관)이 "막부"라고 불렸다. 그 후 겐큐 3년(1192년)에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지만, 거관은 계속해서 "막부"라고 불렸고, 이후 "막부"는 무가 정권의 수장 및 그 거관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현대에 "가마쿠라 막부"라고 불리는 정체를 "동관유영" 또는 "동관막부"라고 불렀다는 당시의 사료가 존재한다.[4]

남북조 시대에는 가마쿠라 궁방(관동 궁방)의 정체를 "관동 막부"라고 부른 사례가 존재하지만, 교토와 대립하는 관동의 정권에만 사용되었고, 교토의 궁방(="무로마치 막부")은 이처럼 막부라는 용어로 불리지 않았다.

"막부"라는 말이 장군 개인이나 공간적인 장군의 거관·정청에서 벗어나, 오늘날처럼 관념적인 무가 정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과 마찬가지로 에도 시대 중기 이후의 일이며, 주자학의 보급에 따라 중국의 전국 시대를 연구하는 유학자에 의해 주창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나 "무로마치 막부"라는 말은 이 시대 이후에 고안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관동", "무가", "궁방" 등으로 불렸으며, 각각의 초대 장군이 "막부를 연다"는 선언을 한 적도 없고, 조정이 막부를 열도록 하는 칙서도 없었다.

이 때문에 막부의 성립 연도와 정이대장군의 선하(宣下)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교과서 등에서는 종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의 선하를 받은 1192년이 가마쿠라 막부 창설의 해로 여겨져 왔지만, 현재는 7년 전에 수호·지두직의 설치·임면의 허가를 받은 1185년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더 거슬러 올라가 9년 전에 동국 지배권의 승인을 얻은 1183년설도 유력하다. 무로마치 막부의 실질적인 성립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권대납언에 임명된 1336년으로 여겨지지만, 정이대장군에 임명된 것은 1338년이다. 에도 막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장군 선하를 받은 1603년의 성립으로 여겨진다.

한편 왕정복고의 대칙령에서는 "섭관 막부 등 폐절"이라고 명기되어 있으며, 에도 막부의 종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3. 1. '막부' 용어의 사용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겐큐 원년(1190년)에 권대납언과 우근위대장(우대장)에 임명되었다.[3] 따라서 정청(거관)이 "막부"라고 불렸다. 겐큐 3년(1192년)에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지만, 거관은 계속해서 "막부"라고 불렸고, 이후 "막부"는 무가 정권의 수장 및 그 거관의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현대에 "가마쿠라 막부"라고 불리는 정체를 "동관유영" 또는 "동관막부"라고 불렀다는 당시의 사료가 존재한다.[4]

남북조 시대에는 가마쿠라 궁방(관동 궁방)의 정체를 "관동 막부"라고 부른 사례가 존재하지만, 교토와 대립하는 관동의 정권에만 사용되었고, 교토의 궁방(="무로마치 막부")은 이처럼 막부라는 용어로 불리지 않았다.

"막부"라는 말이 장군 개인이나 공간적인 장군의 거관·정청에서 벗어나, 오늘날처럼 관념적인 무가 정권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과 마찬가지로 에도 시대 중기 이후의 일이며, 주자학의 보급에 따라 중국의 전국 시대를 연구하는 유학자에 의해 주창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나 "무로마치 막부"라는 말은 이 시대 이후에 고안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관동", "무가", "궁방" 등으로 불렸으며, 각각의 초대 장군이 "막부를 연다"는 선언을 한 적도 없고, 조정이 막부를 열도록 하는 칙서도 없었다.

이 때문에 막부의 성립 연도와 정이대장군의 선하(宣下)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교과서 등에서는 종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의 선하를 받은 1192년이 가마쿠라 막부 창설의 해로 여겨져 왔지만, 현재는 7년 전에 수호·지두직의 설치·임면의 허가를 받은 1185년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더 거슬러 올라가 9년 전에 동국 지배권의 승인을 얻은 1183년설도 유력하다. 무로마치 막부의 실질적인 성립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권대납언에 임명된 1336년으로 여겨지지만, 정이대장군에 임명된 것은 1338년이다. 에도 막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장군 선하를 받은 1603년의 성립으로 여겨진다.

한편 왕정복고의 대칙령에서는 "섭관 막부 등 폐절"이라고 명기되어 있으며, 에도 막부의 종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3. 2. 막부 성립 시기에 대한 논란

3. 3. 에도 막부의 종언

4. 새로운 '막부' 호칭에 대한 논의

최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가마쿠라(鎌倉), 무로마치(室町), 에도(江戸) 막부 이외의 무가 정권에 대해 새롭게 ‘막부’라는 명칭을 제창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 육파라(六波羅) 막부: 평청성(平清盛)의 권력을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간주한다. 다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가 제창.[5]
  • 후쿠하라(福原) 경(京) 막부: 헤이케(平家)의 무가 정권이 확립된 시기를 육파라를 근거지로 한 시대가 아닌 후쿠하라 천도 이후로 본다. 혼고 카즈토(本郷和人)가 제창.[6]
  • 오슈(奥州) 막부: 후지와라 히데히라(藤原秀衡)가 구상한 정권을 막부라고 표현한다. 이리마다 노부오(入間田宣夫)가 제창.[7]
  • 사카이(堺) 막부: 무로마치 막부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루(足利義晴)와 함께 사카이를 근거지로 ‘사카이 칸포’라고 불린 아시카가 요시쓰네(足利義維)를 중심으로 한 세력을 ‘사카이 막부’라고 부르는 가설. 이마타니 아키라(今谷明)가 제창.[8]
  • 토모(鞆) 막부: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교토에서 추방된 후, 비고국(備後国) 토모(鞆)에서의 망명 정권을 독자적인 막부로 본다. 후지타 타쓰오(藤田達生)가 제창.[9]
  • 아즈치(安土) 막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정권을 막부로 본다. 후지타 타쓰오(藤田達生)가 제창.[10]


한편, 히가시지마 마코토(東島誠)는 “새로운 막부 명칭”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며, “사카이 막부”나 “토모 막부” 등 쇼군의 거처에만 의존한 막부 명칭에는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고, “‘〇〇막부’는 동국 국가론, 두 개의 왕권론, 여러 개의 막부론 등 열도 중심의 다점화를 묻는 논의에 한정하여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참고로, 카와치 하루토(河内春人)는 5세기 전반의 왜의 오왕(倭の五王)에 관해, 중국 송(宋) 조정으로부터 안동 장군(安東将軍)에 임명된 왜왕 찬(讃)의 정권은 “천황이 임명한 정이대장군의 막부”와 “구조적으로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11]

4. 1. 새로운 '막부' 호칭의 예

최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가마쿠라(鎌倉), 무로마치(室町), 에도(江戸) 막부 이외의 무가 정권에 대해 새롭게 ‘막부’라는 명칭을 제창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 육파라(六波羅) 막부: 평청성(平清盛)의 권력을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 간주한다. 다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가 제창.[5]
  • 후쿠하라(福原) 경(京) 막부: 헤이케(平家)의 무가 정권이 확립된 시기를 육파라를 근거지로 한 시대가 아닌 후쿠하라 천도 이후로 본다. 혼고 카즈토(本郷和人)가 제창.[6]
  • 오슈(奥州) 막부: 후지와라 히데히라(藤原秀衡)가 구상한 정권을 막부라고 표현한다. 이리마다 노부오(入間田宣夫)가 제창.[7]
  • 사카이(堺) 막부: 무로마치 막부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루(足利義晴)와 함께 사카이를 근거지로 ‘사카이 칸포’라고 불린 아시카가 요시쓰네(足利義維)를 중심으로 한 세력을 ‘사카이 막부’라고 부르는 가설. 이마타니 아키라(今谷明)가 제창.[8]
  • 토모(鞆) 막부: 무로마치 막부 제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교토에서 추방된 후, 비고국(備後国) 토모(鞆)에서의 망명 정권을 독자적인 막부로 본다. 후지타 타쓰오(藤田達生)가 제창.[9]
  • 아즈치(安土) 막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정권을 막부로 본다. 후지타 타쓰오(藤田達生)가 제창.[10]


한편, 히가시지마 마코토(東島誠)는 “새로운 막부 명칭”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며, “사카이 막부”나 “토모 막부” 등 쇼군의 거처에만 의존한 막부 명칭에는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고, “‘〇〇막부’는 동국 국가론, 두 개의 왕권론, 여러 개의 막부론 등 열도 중심의 다점화를 묻는 논의에 한정하여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참고로, 카와치 하루토(河内春人)는 5세기 전반의 왜의 오왕(倭の五王)에 관해, 중국 송(宋) 조정으로부터 안동 장군(安東将軍)에 임명된 왜왕 찬(讃)의 정권은 “천황이 임명한 정이대장군의 막부”와 “구조적으로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11]

4. 2. 비판적 견해

4. 3. 추가적 관점

참조

[1] 서적 日本大百科全書、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山川日本史小辞典(改訂新版) 小学館、ブリタニカジャパン、山川書店
[2] 서적 漢書 周勃伝
[3] 문서 발음
[4] 논문 「幕府」論のための基礎概念序説 https://www.ritsumei[...]
[5] 서적 平家と六波羅幕府 東京大学出版会 2013
[6] 서적 謎とき平清盛 文春新書 2011
[7] 서적 藤原秀衡の奥州幕府構想、藤原秀衡―義経を大将軍として国務せしむべし 文英堂、ミネルヴァ書房 2004, 2016
[8] 서적 室町幕府解体過程の研究、戦国三好一族、戦国期の室町幕府 岩波書店、新人物往来社、講談社学術文庫 1985, 1985, 2006
[9] 간행물 京都復帰を画策する足利義昭と「鞆幕府」 歴史読本 2011-07
[10] 서적 信長革命―「安土幕府」の衝撃 角川選書 2010
[11] 서적 倭の五王 中公新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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