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틸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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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스틸리아누스는 로마 황제 데키우스와 헤레니아 에트루스킬라의 아들로, 251년에 잠시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형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먼저 황태자로 지명된 후, 데키우스가 황위에 오르자 카이사르로 임명되었으며,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가 사망한 후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었다. 호스틸리아누스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역병으로 사망하거나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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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스틸리아누스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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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가이우스 발렌스 호스틸리아누스 메시우스 퀸투스 |
| 전체 이름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발렌스 호스틸리아누스 메시우스 퀸투스 아우구스투스 |
| 아버지 | 데키우스 |
| 어머니 | 헤렌니아 에트루스키야 |
| 통치 | |
| 직위 | 로마 황제 |
| 재위 기간 | 기원후 251년 6월 – 7월 |
| 이전 | 데키우스와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
| 이후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 |
| 섭정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
| 섭정 유형 | 공동 황제 |
| 로마자 표기 | Gaius Valens Hostilianus Messius Quintus |
| 출생 및 사망 | |
| 출생 | 230년경 실미움 |
| 사망 | 기원후 251년 7월 |
2. 생애
호스틸리아누스는 판노니아 속주의 주도인 시르미움(현재: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서 230년경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로마 황제가 된 데키우스이고, 어머니는 헤레니아 에트루스킬라였으며,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형이었다.
249년,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타도하고 데키우스가 로마 황위에 오르자 호스틸리아누스는 황족이 되었으나, 황태자는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였고 호스틸리아누스는 그 다음 순위였다.
251년, 데키우스는 헤렌니우스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키고 호스틸리아누스를 '''프린켑스 유벤투티스'''(princeps iuventutis)로 임명하여 황태자 지위에 올렸다. 데키우스와 헤렌니우스는 고트족을 격퇴하기 위해 친정을 나섰고, 호스틸리아누스는 어머니와 함께 로마에 남았다. 이때 헤레니아 에트루스킬라가 호스틸리아누스의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6월경,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데키우스와 헤렌니우스가 전사했다.
아브리투스 전투 이후 데키우스의 군대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황제로 옹립했고, 로마에서는 호스틸리아누스가 황위에 즉위했다. 제국 내 두 명의 황제가 공존하며 내전 위험이 있었으나, 역병으로 호스틸리아누스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종료되었다.
호스틸리아누스 사후, 트레보니아누스는 아들 가이우스 비비우스 볼루시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삼았다.
2. 1. 초기 생애와 가족
호스틸리아누스는 훗날 황제가 된 로마 장군 데키우스와 그의 아내 헤레니아 에트루스킬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정확한 출생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호스틸리아누스에게는 형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누이 한 명이 있었다. 주화와 비문에 따르면 그의 전체 이름은 가이우스 발렌스 호스틸리아누스 메시우스 퀸투스였다.2. 2. 데키우스의 즉위와 황태자 책봉
250년 9월경, 데키우스는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호스틸리아누스 두 아들을 ''카이사르''로 임명했다. 251년 5월,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데키우스와 공동 황제가 되었고, 호스틸리아누스는 그들의 후계자가 되었다.
2. 3. 공동 황제 즉위와 사망
251년 6월,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고트족과의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사망했고,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권력 교체 이후 대중을 달래기 위해 갈루스는 호스틸리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켜 공동 황제로 삼았다. 호스틸리아누스는 짧은 기간 동안 공동 황제로 있다가 사망했는데, 그 상황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의 사망 시기는 11월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동시대 자료에 따르면 8월 또는 그 이전, 아마도 7월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와 ''카이사르 평전''의 저자는 호스틸리아누스가 역병으로 사망했다고 말한다. 조시모스는 그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한다. 이후 갈루스의 아들 볼루시아누스가 새로운 공동 황제가 되었다.3. 주화

호스틸리아누스의 아우레우스는 앞면에 호스틸리아누스의 흉상이 새겨지고, 뒷면에는 다음 네 가지 유형이 있다.
| 뒷면 유형 |
|---|
| 오른쪽으로 걷는 마르스 |
| 제사용 도구 |
| 서 있는 메르쿠리우스 |
| 로마가 앉아 니케를 들고 있는 모습 |
4. 평가
호스틸리아누스는 데키우스 황제와 헤레니아 에트루스킬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형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로마 제국의 황제 계승 후보였다. 251년, 데키우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사망한 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황제가 되면서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다. 그러나 호스틸리아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는데,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와 ''카이사르 평전''은 그가 역병으로 사망했다고 기록한 반면, 조시모스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한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호스틸리아누스를 ''루도비시 전투 석관''에 묘사된 로마 장군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지만, 주화 속 호스틸리아누스는 수염이 없는 어린 소년으로 묘사되어 있어 가능성은 낮다. 호스틸리아누스와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는 사망 당시 어린이나 십 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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