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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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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268년부터 270년까지 로마 황제였다. 일리리아 출신으로, 214년경에 태어났다. 갈리에누스 사후 권력을 잡은 그는 고트족과 알레만니족을 격파하여 "고티쿠스" 칭호를 얻었으며, 갈리아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270년, 역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연관성, 종교적 활동, 성 발렌타인과의 관계 등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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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금화에 묘사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모습 (월계관을 쓰고 오른쪽을 향하고 있음)
금화 (8 아우레이 가치)에 묘사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비문: claudius }}}}
전체 이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로마자 표기Mareukuseu Aureulliuseu Keullaudiuseu
즉위명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출생일214년 5월 10일
사망일270년 8월 (추정) (55세)
사망 장소불명
매장지불명
정치
통치 기간268년 – 270년
이전 통치자갈리에누스
다음 통치자퀸틸루스
가문
왕조고르디아누스?
아버지불명, 아마도 고르디아누스 2세
어머니불명

2. 생애

안토니니아누스 클라우디우스 2세. 문구: 황제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일리리아 출신으로 추정되며[47], 로마 군대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268년, 갈리에누스 황제가 암살된 혼란 속에서 군대의 추대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1] 그는 3세기 위기 당시 제국의 분열과 외침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군인 황제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10][11]

서기 268년의 로마 제국. 제국은 중앙 로마,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즉위 직후, 그는 제국을 침략한 고트족과 알레만니족을 상대로 중요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나이수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대파하여 '고티쿠스'(Gothicus|고티쿠스la, 고트족 정복자)라는 칭호를 얻었으며[1][13], 베나쿠스 호수 전투에서는 알레만니족을 격퇴하여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Germanicus Maximus|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la, 게르만족의 위대한 정복자) 칭호를 받았다.[18][1] 또한 서방의 갈리아 제국에 맞서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남부를 일부 탈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제국 전체를 재통합하려는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 269년 말, 판노니아를 침략한 반달족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270년 시르미움 근처에서 키프리안 역병으로 추정되는 전염병으로 사망했다.[47][28] 그의 사후 동생 퀸틸루스가 잠시 제위를 이었으나, 곧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로마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를 신격화하여 '신성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Divus Claudius Gothicus|디우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la)로 칭했다.[29]

2. 1. 초기 생애와 출신

클라우디우스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5월 10일에 태어났다는 점은 비교적 일치하지만, 연도는 210년, 213년, 214년,[1] 또는 219년/220년[1] 등으로 다양하게 제시된다. 이 중 214년 설이 6세기 비잔틴 역사가 요한 말라라스가 클라우디우스가 사망 당시 56세였다고 기록한 점[1] 등을 근거로 다수 역사가들에게 지지받고 있다.

그의 출신 배경 역시 불분명하다. 일리리아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으며[47], 판노니아나 달마티아 출신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다뉴브강 인근 지역 출신일 가능성도 제기된다.[2] 일부에서는 그가 황제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사생아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나[3], 이는 후대의 기록인 ''카이사르들의 개요''에 나오는 내용으로 많은 역사가들은 신빙성을 의심하며[4], 오히려 비천한 출신이었을 가능성을 높게 본다.

클라우디우스의 초기 생애에 대한 정보는 주로 황제들의 전기 모음집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의존하는데, 이 문서는 다른 황제들의 이야기처럼 날조와 과장이 심하다는 비판을 받는다.[1] 특히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클라우디우스를 플라비아 씨족의 일원으로 묘사하는데[5], 이는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클라우디우스를 연결하여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적인 시도였을 가능성이 크다.[1][5]

로마 황제 열전에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클라우디우스의 조카인 클라우디아와 달다니아 출신 귀족 에우트로피우스 사이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여 클라우디우스와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혈연 관계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계보 역시 콘스탄티우스 1세의 손자인 콘스탄티누스 2세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명망 높은 황제의 후손임을 내세우기 위한 조작이라는 것이 현대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와 콘스탄티우스 가문 사이에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없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의 초기 생애를 연구할 때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외에도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유사-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에우트로피우스, 오로시우스, 요안네스 조나라스, 조시모스 등의 기록과 동전, 비문 같은 고고학적 자료를 함께 참고하여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1]

2. 2. 권력 장악



클라우디우스는 황제가 되기 전 로마 군대에서 복무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고, 최고위 군사 직책까지 올랐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그가 데키우스 황제(재위 249년–251년) 시절 군사 호민관이었다고 기록한다.[6] 같은 자료는 그가 테르모필레 방어를 위해 파견되었으며, 이를 위해 아카이아 총독에게 병력 지원 명령이 내려졌다고 전한다. 하지만 당시 고트족의 침략이 발칸 중부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테르모필레 지역이 위협받았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록은 테르모필레 수비대가 254년에 나타났다는 사실과 맞지 않아 연대기적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역사가 프랑수아 파슈는 이 기록이 성공적인 이교도 사령관 클라우디우스를, 396년 고트족 지도자 알라리크 1세에게 그리스 함락을 허용한 불운한 기독교 장군들과 대조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트레벨리우스 폴리오는 또한 데키우스 황제가 클라우디우스가 마르스 게임에서 다른 병사와의 싸움에서 힘을 과시하자 그에게 보상했다고 기록했다.[7]

로마 황제 갈리에누스 (재위 253년–268년)


260년대 로마 제국은 핵심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으로 분열되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서방의 포스투무스를 제압하지 못했고, 동방에서는 오다에나투스가 사실상 독립 왕국을 다스리는 것을 용인하면서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268년, 오다에나투스가 암살되고 (아마도 궁정 음모로 추정됨) 갈리에누스 역시 군 내부 반란의 희생양이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오다에나투스의 권력은 어린 아들에게 넘어갔으나 실권은 그의 어머니인 제노비아가 쥐게 되었다.[12]

게르만 부족들의 발칸 반도 침략 위협 속에서 갈리에누스는 주로 포스투무스 문제에 발목 잡혀 있었다. 마크리아누스 마요르가 일으킨 반란과 스키타이족의 침략 위협에 대처하느라 포스투무스를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 4년이 지난 265년에야 갈리에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 제국의 한 도시에서 포스투무스를 격파하고 포위했다. 그러나 승리가 임박했을 때 갈리에누스가 성벽에 너무 가까이 접근했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는 바람에 작전을 중단해야 했다. 이후 3년간 갈리에누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68년 초 스키타이족이 발칸 반도를 성공적으로 침략했고, 밀라노에 주둔하던 기병대 사령관 아우레올루스는 포스투무스와 동맹을 맺고 스스로 황제를 참칭하기까지 했다.

같은 해, 헤룰리족이라 불리는 부족이 소아시아를 거쳐 해상 원정을 통해 그리스까지 침공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당시 갈리에누스가 자신을 배신한 장군 아우레올루스 문제에 집중했기 때문에, 헤룰리족 격퇴는 그의 후계자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에게 맡겨졌을 것으로 추정한다.[13]

갈리에누스의 죽음은 여러 황제들의 최후와 마찬가지로 음모와 배신으로 얼룩져 있다. 여러 기록이 존재하지만, 고위 관리들이 갈리에누스의 죽음을 원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주요 음모자로는 프라이토리아니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가 지목된다. 한 기록은 헤라클리아누스가 클라우디우스를 음모에 끌어들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클라우디우스를 무고한 것으로 묘사하고 대신 장군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마르키아누스를 공모자로 추가한다. 클라우디우스를 음모에서 제외시킨 것은 그가 훗날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조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수 있으며, 이는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만들어진 허구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갈리에누스는 저녁 식사 중 아우레올루스의 부대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선으로 나가다가 자신의 기병대 사령관에게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논란이 많은 설명에 따르면, 아우레올루스가 갈리에누스가 장군들을 모함하는 문서를 위조하여 퍼뜨렸고, 이 음모에는 아우렐리아누스도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연루설은 훗날 그 자신도 비슷한 상황에서 암살당한 것에 대한 정당화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14]

어떤 이야기가 진실이든, 갈리에누스는 268년 여름 (아마도 7월에서 10월 사이)에 살해되었고,[15][16] 클라우디우스는 밀라노 외곽의 군대에 의해 그의 후계자로 추대되었다.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갈리에누스의 가족들을 살해하려 했으나, 클라우디우스가 전임자의 명예를 존중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진정되었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는 사망한 갈리에누스를 신격화하고 아피아 가도에 있는 그의 가족 묘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반란자 아우레올루스는 항복 시도가 실패한 후 포위군에게 살해당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군대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지만,[1] 이 과정에서 그가 전임자 갈리에누스를 살해했다는 입증되지 않은 혐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즉위 직후 로마 원로원에 갈리에누스의 가족과 지지자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청하며 무자비한 인물만은 아님을 보여주었다. 다만 로마의 적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데, 이러한 단호함이 그의 인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8]

클라우디우스는 신체적으로 강인하고 때로는 잔인한 면모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이 그의 지위와 병사들의 존경을 얻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주먹 한 방으로 말의 이빨을 부러뜨렸다고 한다. 또한 250년대 레슬링 선수로 활동할 당시, 경기 중 상대방이 그의 성기를 잡자 상대의 이빨을 모두 부러뜨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9]

클라우디우스는 막시미누스 트락스처럼 야만족 출신이었다. 막시미누스 사후 귀족 출신 황제들이 연이어 실패한 후, 클라우디우스는 3세기 위기로 혼란에 빠진 제국을 결국 회복시킨 강인한 "군인 황제" 시대의 첫 주자로 평가받는다.[10][11]

2. 3. 통치와 업적



268년 여름, 갈리에누스 황제가 밀라노 근교에서 군사 반란 중 암살되면서 클라우디우스는 군대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15][16] 갈리에누스의 죽음에는 그의 고위 장군들이 연루된 음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마르키아누스, 그리고 훗날 황제가 되는 아우렐리아누스 등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클라우디우스 역시 음모에 가담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가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조상으로 여겨지면서 후대에 그의 연루 사실이 지워졌을 수도 있다.[14]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후, 전임자인 갈리에누스를 신격화하고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주었으나, 반란을 일으켰던 아우레올루스는 처형했다.

클라우디우스가 통치를 시작했을 때, 로마 제국갈리아 제국팔미라 제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고트족과 알레만니족 등 외부 민족의 침입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일리리쿰과 판노니아를 침공한 고트족이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직후 이 문제 해결에 착수하여 나이수스 전투에서 고트족 군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3] 이 공로로 '고티쿠스'(Gothicus|고티쿠스la, 고트족 정복자)라는 칭호를 얻었으며,[1] 고트족은 이 패배 이후 다뉴브강 너머로 밀려났고 한동안 제국에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13]



같은 해 말, 알프스산맥을 넘어 침공한 알레만니족 역시 베나쿠스 호수 전투에서 격파하고,[18]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Germanicus Maximus|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la, 게르만족의 위대한 정복자)라는 칭호를 추가로 얻었다.[1]

이후 클라우디우스는 서방의 갈리아 제국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는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히스파니아갈리아 남부의 론 강 유역을 로마 제국으로 복귀시켰다. 이는 훗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갈리아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기반이 되었다.[1] 하지만 갈리아 제국의 황제 빅토리누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으며, 270년 오텡이 클라우디우스를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클라우디우스는 이를 지원하지 못했고, 결국 오텡은 빅토리누스에게 함락되었다.[22]

클라우디우스 치세에는 발칸 반도 출신 인물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전까지 발칸 출신 황제는 단 두 명뿐이었으나, 클라우디우스 이후로는 378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즉위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황제가 판노니아, 모에시아, 일리리쿰 등 발칸 지역 출신이었다. 클라우디우스 휘하의 주요 장군이었던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 마르키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등은 대부분 군사적 공로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었다.[21] 동시에 클라우디우스는 파테르누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등 로마의 전통적인 원로원 가문 출신들과도 협력하며 집정관 직을 맡기는 등 기존 세력과의 관계도 유지하려 했다.[21]

클라우디우스의 메달. 뒷면에는 로마 화폐 개혁 시도를 상징하는 세 ''모네타''(금, 은, 동전)의 의인화가 새겨져 있다.


동방에서는 팔미라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오다에나투스 사후 그의 아내 제노비아는 아들 바발라투스를 내세워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를 강화했다. 바발라투스의 이름으로 발행된 동전은 황제의 권위를 모방하지는 않았지만,[26] 팔미라의 독자적인 세력 확장을 보여주었다. 270년, 자브다스가 이끄는 팔미라 군대는 아라비아와 이집트를 침공하여 로마군을 격파하고 이집트 총독 테나지노 프로부스를 살해했다.[23] 클라우디우스가 오텡을 돕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팔미라와의 갈등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22] 또한,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제국의 재정난이 심화되어 안토니니아누스 은화의 가치가 더욱 하락했다.[23]

thumb에 있는 시르미움의 황궁 유적]]

269년, 반달족이 판노니아를 침입하자 클라우디우스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270년 시르미움(현재 스렘스카 미트로비차) 근처의 진중에서 전염병(키프리아누스 역병으로 추정)에 걸려 사망했다.[23] 그의 뒤를 이어 동생 퀸틸루스가 잠시 제위에 올랐으나, 곧 군대의 지지를 받은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밀려나고 살해되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짧은 통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고트족과 알레만니족을 상대로 거둔 뛰어난 군사적 성공으로 로마 제국의 붕괴를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황제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고트족 격퇴는 라틴어 문학 전통에서 영웅적인 업적으로 기록되었으며, 그의 승전지인 나이수스에서 태어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그를 자신의 조상으로 삼아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23]

2. 3. 1. 나이수스 전투

황제 갈리에누스 사후의 혼란을 평정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268년 황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혹은 이듬해인 269년, 사료에 따라 다름) 판노니아에 고트족이 침입하자, 클라우디우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여 이들을 격파했다. 이 전투가 바로 나이수스 전투이다. 이 전투에는 훗날 황제가 되는 아우렐리아누스도 장군으로 참전했다. 나이수스 전투의 승리로 고트족은 도나우강 북쪽으로 물러났으며, 클라우디우스는 이 공로로 고트족을 정복한 자라는 의미의 "고티쿠스"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2. 3. 2. 베나쿠스 호수 전투

나이수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파한 지 몇 달 후, 같은 해(268년 또는 269년)에 알프스산맥을 넘어 게르만족의 일파인 알라만니족이 이탈리아 북부로 침입해 왔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이에 맞서 싸워 알라만니족을 성공적으로 격파하였다. 이 전투는 베나쿠스 호수(현재의 가르다호) 인근에서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4. 갈리아 제국과의 관계

알프스산맥을 넘어 침입한 알라만니족을 격파한 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당시 갈리아히스파니아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갈리아 제국의 공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갈리아 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누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갈리아 제국이 최종적으로 로마 제국에 다시 통합된 것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사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치세 때였다.

2. 5. 팔미라 제국과의 관계

268년 갈리에누스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황제로 즉위할 무렵, 동방의 팔미라 제국에서는 오다에나투스 사후 그의 아내 제노비아가 어린 아들 바발라투스를 내세워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12] 오다에나투스는 생전에 로마로부터 동방 전체의 군사 지휘권과 속주 총독에 대한 감독권을 포함하는 Corrector totius Orientis|코렉토르 토티우스 오리엔티스la라는 막강한 지위를 부여받았는데, 제노비아는 이 지위를 아들 바발라투스에게 계승시키려 했다. 이는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중앙 정부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행보였다.

클라우디우스 즉위 초기, 팔미라와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유지되는 듯 보였으나 점차 긴장이 고조되었다. ''아우구스타 열전''에는 클라우디우스가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 휘하의 군대를 동방으로 파견했으나 제노비아에게 패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헤라클리아누스는 당시 갈리에누스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서방에 있었으므로 이 기록의 정확성은 의심스럽다. 이는 후대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상으로 여겨진 클라우디우스의 치세를 미화하기 위해 갈리에누스 시대의 혼란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2] 만약 이 기록을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사건으로 본다면, 이는 오다에나투스 사후 동방에 대한 로마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회복하려는 시도였으나 실패했음을 시사한다.[22]

팔미라와 로마 중앙 정부 사이의 긴장은 바발라투스의 칭호 문제와 동전 발행으로 더욱 분명해졌다. 오다에나투스는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발행한 적이 없지만,[24] 그의 사후 발행된 동전에는 아들 바발라투스의 초상이 새겨졌다.[25] 이는 오다에나투스가 누렸던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였다.[26] 다만 바발라투스의 동전에는 황제를 직접 칭하는 표현 대신 vir consularis|비르 콘술라리스la(집정관급 인사), rex|렉스la(왕), imperator|임페라토르la(개선 장군), dux Romanorum|둑스 로마노룸la(로마 총독) 등 다양한 칭호가 사용되었다. 이는 로마 황제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모방하지는 않으면서도, 오다에나투스로부터 물려받은 강력한 지위를 과시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특히 rex|렉스la(왕)는 팔미라 현지어로 왕을 뜻하는 mlk|말리크pal의 라틴어 번역이며, dux Romanorum|둑스 로마노룸la은 Corrector totius Orientis|코렉토르 토티우스 오리엔티스la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로마 문화에서는 개인의 업적으로 얻은 지위는 상속될 수 없었지만, 팔미라에서는 오다에나투스의 지위가 사실상 세습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있다.[23]

270년 여름, 자브다스가 이끄는 팔미라 군대는 아라비아 속주를 침공하고 이집트로 진격했다. 당시 이집트 총독 테나지노 프로부스는 유능한 군인이었으나, 팔미라와 동맹을 맺은 티마게네스 세력의 방해로 고전했다. 결국 프로부스는 270년 늦여름, 현재의 카이로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23] 로마 총독의 전사는 사실상 전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즉각적인 전면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클라우디우스는 당시 고트족과의 전쟁 및 제국 서부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갈리아 제국의 도시 오툉이 클라우디우스를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돕지 못한 것도 동방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웠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22][23] 이러한 클라우디우스의 소극적인 대응은 제노비아의 팔미라가 더욱 대담하게 세력을 확장하는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3] 270년 여름이 끝날 무렵 로마 제국은 서방의 갈리아 제국 문제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대신, 동방에서 팔미라 제국의 도전에 직면하며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23]

2. 6. 죽음

클라우디우스는 로마 제국의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회복하려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269년 말, 그는 시르미움으로 이동하여 판노니아를 약탈하던 반달족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제국 전역에 퍼져 큰 피해를 입히던 키프리안 역병(아마도 천연두)에 걸려 270년 초(혹은 7월)[47]에 사망했다.[28]

클라우디우스가 죽기 전 아우렐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그의 동생 퀸틸루스가 잠시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퀸틸루스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고, 곧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클라우디우스가 죽자마자 그를 "신성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로 신격화했다.[29]

클라우디우스의 정확한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여 1월,[16] 4월,[15] 8월, 또는 9월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된다. 이러한 불일치는 서로 상충하는 역사 기록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 ''354년 연대기''는 클라우디우스의 통치 기간을 "1년 4개월"로 기록하고 있으며,[30] 제롬과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1년 9개월"이라고 기록했다.[31] 일부 알렉산드리아에서 발행된 동전에는 그의 통치 3년차에 발행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콥트력의 시작일(8월 29일)을 고려할 때 270년 9월 사망설을 뒷받침한다.[32][15]

역사학자 아르투어 슈타인은 아우렐리아누스 시대의 문서 날짜(270년 5월 25일)를 근거로 클라우디우스가 4월에 사망했다고 추정했으나,[15][16] 현대 학자들은 해당 문서가 실제로는 271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33][34] 이 문서에는 "3년"과 "1년"이라는 날짜 표기가 있는데, 이는 클라우디우스의 통치 3년차와 아우렐리아누스의 통치 1년차를 함께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클라우디우스 사망 시점부터 자신의 통치 기간을 계산했다).[35] 현재까지 확인된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마지막 문서는 270년 9월 20일자이며, 날짜가 명확하지 않은 또 다른 파피루스 기록은 잠정적으로 10월의 것으로 추정된다.[36]

3.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관계

4세기에 이르러, 클라우디우스 2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이자 사두 정치 시대의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혈연적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시도로 여겨진다.[1] 이러한 주장의 주요 근거는 황제들의 전기 모음집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이지만, 이 문헌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날조와 황실에 대한 아첨으로 가득 차 있어 사료로서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1] 따라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내용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에우트로피우스, 오로시우스, 요안네스 조나라스, 조시모스 등의 다른 기록 및 동전, 비문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1]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클라우디우스 2세를 플라비아 씨족의 일원으로 묘사하고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라는 이름까지 부여했는데, 이는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의 연관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5][39] 또한, 이 문헌과 『로마 황제 열전』 등은 클라우디우스 2세와 그의 형제 퀸틸루스에게 크리스푸스라는 또 다른 형제가 있었고, 그의 딸인 클라우디아가 달다니아 출신의 귀족 에우트로피우스와 결혼하여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낳았다고 주장한다.[38] 이 계보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클라우디우스 2세의 외조카가 된다. 반면, 요안네스 조나라스와 유트로피우스는 클로루스가 클라우디아의 '딸'의 아들이라고 다르게 기록하기도 해[40] 기록 간에도 차이가 존재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러한 계보 이야기가 콘스탄티누스 1세 혹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치세에 만들어진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는 자신들의 가문을 명망 높은 전 황제와 연결하여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계보 조작으로 의심받는다.[1]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2세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사이에 실제 혈연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4. 종교

361년에 아우렐리우스 빅토르가 저술한 로마 제국사 요약본 《황제전》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고트족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기 전에 ''시빌린 문서''에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이는 클라우디우스가 데키우스 황제의 전통을 부활시켰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이를 통해 클라우디우스의 전임자인 갈리에누스 황제의 종교 정책이 지나치게 관대했다고 여긴 당시 원로원의 시각을 보여준다.[37]

5. 성 발렌타인과의 관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중세 시대부터 성 발렌타인과 연관되어 왔다. 그의 통치 시기에 대한 동시대 기록은 4세기 초 디클레티아누스 박해 동안 대부분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41] 성 발렌타인의 순교 이야기는 5세기 또는 6세기에 출판된 ''파시오 마리 에 마르타이''라는 작품에 기록되었다.[41][42] 20세기 역사가들은 이 시기 기록들의 역사적 정확성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41][42]

전설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언급되는데, 클라우디우스 1세는 기독교인을 박해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수에토니우스유대인 분파로 보이는 이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는 언급은 있으나, 이는 기독교 박해와는 다름 ''참조'' 수에토니우스의 기독교인 관련 내용), 사람들이 이 황제를 클라우디우스 2세, 즉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로 여기게 되었다.[41] 다만,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로마 영토 밖에서 전쟁으로 보냈다는 점에서 전설의 내용과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41]

이 전설은 후대의 여러 문헌에서 다시 등장한다. 1493년의 ''뉘른베르크 연대기''에는 로마의 한 사제가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중에 순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성 발렌타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돕다가 발각되어 곤봉으로 맞은 뒤 참수당했다.[41] 또한, 1260년의 ''황금 전설''에는 성 발렌타인이 270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여 참수되었다고 전한다.[42] 이러한 전설을 바탕으로, 2월 14일은 로마의 사제이자 의사였던 성 발렌타인을 기리는 발렌타인 데이로 기념되고 있다.[43]

참조

[1] 웹사이트 Claudius II Gothicus (268—270) http://www.roman-emp[...] An Online Encyclopedia of Roman Emperors 2001
[2] 논문 Claudius (II) Gothicus, Marcus Aurelius, Roman emperor, 268–270 CE https://oxfordre.com[...] 2016-03-07
[3] 웹사이트 Many think this man was fathered by Gordian, when, as a youth, he was being prepared by a grown woman for a wife. https://www.roman-em[...]
[4] 서적 Emperors and Ancestors: Roman Rulers and the Constraints of Tradit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5] 웹사이트 Historia Augusta, The Life of Claudius https://penelope.uch[...]
[6] 문서 See SHA, Vita Claudii, 14. It is in fact doubtful that Claudius was a military tribune at the time of Gallienus's murder. At that time a military tribune was usually the commander of a legionary cohort or an ala of auxiliary cavalry. For Claudius to have been demoted to this level from the heights he had previously occupied (Hipparchos of the Cavalry and Deputy Commander-in-Chief of the Imperial Armies) would suggest a serious rift between himself and Gallienus. It is possible, but there is no evidence for it in any of the ancient sources; even Zosimus, who is notably cool towards Claudius, gives no hint of it. The most likely explanation for the suggestion is that the author of the Historia Augusta, writing in the Fourth Century AD after the Constantinian reform of the army, had no notion what the term 'tribune' denoted in the seventh decade of the previous century.
[7] 문서 Aurelius Victor, 33
[8] 문서 Gibbon, Ch. 11
[9] 문서 Meijer, pg. 98
[10] 웹사이트 The Roman empire (27 B.C.-393 A.D.) http://www.metmuseu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0-10
[11] 웹사이트 What were the causes of the 3rd century crisis in the Roman Empire? https://dailyhistory[...] 2018
[12] 문서 Potter, pg. 263
[13] 서적 The Roman empire at bay, AD 180-395 2004
[14] 문서 Potter, pg. 264
[15] 학술지 Zur Chronologie der römischen Kaiser von Decius bis Diocletian
[16] 서적 The Roman Emperors: A Biographical Guide to the Rulers of Imperial Rome, 31 BC–AD 476 https://archive.org/[...] Charles Scribner's Sons
[17] 문서 Southern, pg. 109
[18] 문서 Southern, pg. 110
[19] 서적 The Roman Emperor Aurelian: Restorer of the World https://archive.org/[...] Casemate Publishers and Book Distributors
[20] 학술지 Une carrière équestre sous le règne de l'empereur Gallien
[21] 문서 Potter, p. 265
[22] 문서 Potter, p. 266
[23] 문서 Potter, p. 267
[24] 서적 Rome's Eastern Trade: International Commerce and Imperial Policy 31 BC – AD 305 Routledge 2003
[25] 서적 Empress Zenobia: Palmyra's Rebel Queen A&C Black 2008
[26] 뉴스 Coins with power https://openaccess.l[...] Jaarboek voor Munt 2015
[27] 웹사이트 Claudius Gothicus https://viamus.uni-g[...]
[28] 문서 Now when the war with the Goths was finished, there spread abroad a most grievous pestilence, and then Claudius himself was stricken by the disease, and, leaving mankind, he departed to heaven, an abode befitting his virtues. (Historia Augusta).
[29] 문서 Bowman,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The Crisis of Empire, A.D. 193-337, pg. 50
[30] 웹사이트 Filocalus, Chronicle of the City of Rome. https://www.tertulli[...]
[31] 웹사이트 Chronicon, s. 269; Epitome de Caesaribus s. 34 https://www.tertulli[...]
[32] 서적 Roman Imperial Titulature and Chronology, A.D. 235–284 https://archive.org/[...] Gieben
[33] 서적 Aurélien et Zénobie: l'unité ou la division de l'Empire? https://books.google[...] Uniwersytetu Wrocławskiego 1997
[34] 서적 Die Zeit der Soldatenkaiser: Krise und Transformation des Römischen Reiches im 3. Jahrhundert n. Chr. (235-284)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GmbH & Co KG 2014
[35] 서적 The Oxyrhynchus papyri http://archive.org/d[...] London : Egypt Exploration Fund 1898
[36] 논문 The Dates of the Recognition in Egypt of the Emperors from Caracalla to Diocletianus 1986
[37] 문서 Curran
[38] 문서 Historia Augusta, Claudius
[39] 웹사이트 Life of Claudius https://penelope.uch[...]
[40] 서적 Emperors and Ancestors: Roman Rulers and the Constraints of Tradition OUP Oxford
[41] 논문 St. Valentine, Chaucer, and Spring in February 1981-07
[42] 문서 Chaucer and the cult of Saint Valentine
[43] 문서 Larue
[44] 문서 In Classical Latin, Claudius' name would be inscribed as MARCVS AVRELIVS VALERIVS CLAVDIVS AVGVSTVS.
[45] 문서 Jones
[46] 문서 Canduci
[47] 웹사이트 Illyria http://www.britan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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