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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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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의는 하내 온현 출신으로, 후한 말에서 서진 초까지 활약한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그는 총명함과 넓은 식견으로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조조 휘하에서 문학연을 거쳐 조비, 조예를 섬기며 위나라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제갈량과의 대결에서 지구전을 펼쳐 촉나라의 북벌을 막아내기도 했다. 조예 사후에는 고평릉의 변을 통해 조상 일족을 제거하고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으며, 그의 손자 사마염이 진나라를 건국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사후에는 진 선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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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명나라 시대의 사마의 삽화
명나라 시대의 사마의 삽화
이름사마의
로마자 표기Sima Yi
중달
로마자 표기Jongdal
시호선황제
묘호고조
관직
태부239년 3월 13일 ~ 251년 9월 7일
군주조방
이전종요
이후사마부
녹상서사239년 1월 22일 ~ 239년 3월 13일
군주조방
이후조상
시중239년 1월 22일 ~ 239년 3월 13일
군주조방
군주조비
태위235년 2월 13일 ~ 239년 3월 13일
군주조예 / 조방
이전화흠
이후만총
대장군230년 3월 16일 ~ 235년 2월 13일
군주조예
이전조진
이후조우
형, 예주목227년 7월 ~ 230년 3월 16일
군주조예
표기장군227년 1월 또는 2월 ~ 230년 3월 16일
군주조예
무군장군224년 ~ 227년 1월 또는 2월
군주조비 / 조예
상서우복야221년 ~ 226년
군주조비
어사중승220년 ~ 221년
군주조비
상서220년
군주조비
승상군사마219년 ~ 220년
군주헌제
승상조조
승상주부215년 ~ ?
군주헌제
승상조조
문학연208년 ~ ?
군주헌제
승상조조
개인 정보
출생179년
출생지원 현, 하내군, 한나라
사망251년 9월 7일
사망지낙양, 조위
묻힌 곳맹진 현, 하남
아버지사마방
배우자장춘화
부인
장 부인
백 부인
자녀사마사
사마소
사마량
사마주
사마륜
친척사마랑 (형)
사마부 (동생)
사마지 (사촌)
사마의 가계도
기타 정보
직업군사, 정치가, 섭정
작위무양후
서진 추존 황제
이전무양성후(추존)
이후무양충무후
재위? ~ 251년
작위무양후
묘호고조
시호선황제
능묘고원릉

2. 생애

사마의는 하내(河內)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사람으로, 경조윤을 지낸 사마방의 둘째 아들이다. 형은 사마랑이며, 셋째 아우는 사마부이다. 사마의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큰 뜻을 품고 식견이 넓었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9] 후한 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항상 천하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최염은 사마랑에게 그의 동생 사마의가 더 낫다고 평했다.[9]

201년 사마의는 상계연(上計掾)으로 천거되었다. 조조가 사공이었을 때 사마의를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조조가 승상이 되었을 때 다시 사마의를 불렀는데, 거절한다면 가두겠다는 엄포를 놓자 문학연에 취임했다.[197] 이후 조조의 아들 조비와 교제하여 황문시랑, 의랑, 승상 동조속, 주부로 전임했다.[15]

조조는 사마의가 마음속에 큰 뜻을 품고 있음을 알아채고 그리 신임하지 않았다. 낭고상(狼顧相)이라는 소문을 듣고 불러 고개를 돌려보게 했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얼굴이 똑바로 뒤를 향했다. 또 세 마리의 이 한 구유(槽: 조조의 曹와 음이 같다)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어 매우 언짢게 여겼다고 한다. 훗날 이 세 말은 위나라를 멸망시키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비후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 황제가 되었을 때, 사마의를 상서로 임명했다.[227] 224년 무군대장군 가절로 전임되어 급사중과 녹상서사의 벼슬이 더해졌다.[227]

조예가 황제가 된 후 사마의는 무양후로 봉해졌고, 표기대장군이 되었으며, 태화 원년(227년)에는 형주와 예주 지역의 군사를 감독하는 독형예이주제군사를 겸했다.[227] 230년(태화 4년), 대장군에 임명되고 대도독, 가황월의 벼슬이 더해졌다.[227]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 형제를 처단하고 조위의 실권을 장악했다.[143] 247년 병을 핑계로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249년 조상이 조방을 수행하여 조예의 묘소를 참배하러 낙양을 비운 틈을 타 쿠데타(고평릉의 변)를 일으켰다.[133][135]

2. 1. 명문가의 자제

사마의는 하내군 온현 효경리 사람으로, 경조윤을 지낸 사마방의 둘째 아들이다. 형은 사마랑이고, 셋째 아우는 사마부이다. 사마의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식견이 넓었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후한 말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항상 천하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최염은 사마랑에게 그의 동생 사마의가 더 낫다고 평했다.[9]

사마의의 본관은 하내군 온현의 소경리였다. 그의 선조 사마앙은 초한쟁패기에 18제후국 중 하나인 음나라의 왕이었으나, 유방의 장수 한신에게 영토를 빼앗겼다. 사마앙의 후손들은 하내군에 거주했다.

사마의의 고조부 사마균은 한나라의 장군으로 정서장군을 지냈다. 사마균의 아들 사마량은 예장군 태수를, 사마량의 아들 사마준은 영천군 태수를 지냈다. 사마준의 아들 사마방은 낙양 현령, 경조윤을 지냈으며, 후한 말에는 기병교위를 역임했다. 사마의는 사마방의 차남이었다.

사마의는 형 사마랑 외에 여섯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여덟 형제는 모두 자(字)에 '달(達)'자가 들어가 '사마팔달(八達)'이라 불렸다.

사마의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지혜와 큰 야망을 보였다. 유교 경전에 정통하고 박식했다. 후한 말 혼란기에 백성에 대한 동정과 우려를 표했다. 19세 즈음, 양준은 그를 "비범한 재능"이라고 묘사했다. 최염은 사마의가 형 사마랑보다 더 뛰어나다고 말했다.[9]

사마의와 그의 가족은 황도 낙양에 살았는데, 사마방은 정부 관리로 일했다. 사마의는 엄격한 유교적 방식으로 양육되었다.[10] 190년, 동탁이 황도를 장안으로 옮기려 하자, 사마방은 사마랑에게 가족을 온현으로 데려가도록 했다. 몇 달 후, 사마랑은 가족을 여양군(여양군; 현재의 순현 부근)으로 옮겼다.[11] 194년, 조조여포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사마랑은 가족을 다시 온현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사마의와 형제들은 농사를 지으며 공부했다.[11]

201년경, 사마의는 하내군 행정 사무소의 추천으로 관직을 맡았고, 202년에는 수도로 보고관(上計掾|상계연중국어)으로 보내졌다.[12] 같은 해, 장춘화와 결혼했다. 조조는 사마의를 채용하려 했으나,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13]

어느 날, 사마의가 책을 말리다 하녀에게 발각되자, 장춘화는 하녀를 죽여 입을 막았다.[14]

하내군 온현 효경리 출신으로, 사마방의 차남이며, 초한 전쟁기 은왕 사마앙의 12세손이다.[194] 사마씨는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으로, 사마의 또한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사마랑, 동생 사마부, , , 사마진, 사마통, 사마민 등 8형제는 모두 자에 '달(達)' 자가 붙어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렸다. 아내는 장춘화이며, 아들로는 사마사사마소 등이 있다. 조조에게 출사했다.

사마의는 젊은 시절부터 총명하고 재기 넘치는 인물로, 사마팔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고, 최염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195]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속으로는 의심이 많고 임기응변에 능했다.[196]

2. 2. 조조 휘하

201년에 사마의는 상계연(上計掾)으로 천거되었다. 조조가 사공이었을 때 사마의를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조조가 승상이 되었을 때 다시 사마의를 불렀는데, 거절한다면 가두겠다는 엄포를 놓자 사마의는 이를 두려워해 문학연에 취임했다.[197] 이후 조조의 아들 조비와 교제하여 황문시랑(黃門侍郎), 의랑(議郎), 승상 동조속(丞相 東曹屬), 주부(主簿)로 전임했다.[15]

조조는 사마의가 마음속에 큰 뜻을 품고 있음을 알아채고 그리 신임하지 않았다. 조조는 사마의가 낭고상(狼顧相)이라는 소문을 듣고 불러 고개를 돌려보게 했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얼굴이 똑바로 뒤를 향했다. 또 조조는 세 마리의 이 한 구유(槽: 조조의 曹와 음이 같다)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어 매우 언짢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훗날 이 세 말은 위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조조는 조비에게 "사마의는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다"라며 항상 경계할 것을 충고했다. 조비는 사마의와 평소 도움을 주고받았기에 조조의 말을 듣고 그를 멀리하였다. 사마의는 조조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 하급 관리의 직무를 밤새워 보고 가축을 기르는 하찮은 일까지도 기꺼이 함으로써 조조를 안심시켰다.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굴복시켰을 때, 사마의는 유엽과 함께 유비가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익주를 칠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6][199] 결국 유비는 익주의 민심을 달래고 군을 정비한 뒤 한중을 점령하여 조조에게 큰 우환을 안겨주었다. 우금방덕 등이 관우에게 대패하고 관우의 기세가 중원에까지 뻗치자, 조조는 하북으로의 천도를 검토했다. 이때 사마의는 장제와 함께 "천도한다면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니 인근의 백성들이 크게 불안해 할 것입니다. 손권과 유비는 겉으로는 친밀하나 안으로는 소원하니, 손권을 달래 관우의 후방을 기습하면 번성의 포위는 자연히 풀릴 것입니다"라고 건의했고, 조조는 이를 따랐다.[200] 결국 손권은 여몽을 시켜 형주를 쳤고, 관우를 참수했다.

2. 3. 조비 휘하

조비후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의 황제가 되었을 때, 사마의를 상서(尙書)로 임명했다.[227] 같은 해,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 황제가 된 조비는 사마의를 독군, 어사중승에도 임명하고 안국향후에 봉했다.

224년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가절(假節)로 전임되어 급사중(給事中)과 녹상서사(錄尙書事)의 벼슬이 더해졌다.[227] 황초 2년(221년), 시중 · 상서 우복야가 되었다. 친정을 떠나는 조비를 대신하여 수도를 지키던 사마의는 황초 5년(224년)에 향향후로 개봉되었고, 가절 · 무군대장군 · 녹상서사에 임명되어 5,000명의 병권을 받았다. 이는 유력한 장군이었던 하후상이 병사했기 때문이었다.[226] 사마의가 너무 부담이 크다며 사퇴하려 하자 조비는 "잡무에 시달려 쉴 틈도 없구나. 영예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생을 덜어주려는 것이다."라고 말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비의 사마의에 대한 신뢰는 매우 두터웠는데, 사마의에게 “짐이 동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서쪽을 맡고, 짐이 서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동쪽을 맡으시오”라고 했다.[227] 위나라의 태자중서자가 되어 진군, 오질, 주삭과 함께 태자 조비의 신임을 받았다.[227]

216년, 헌제가 조조를 공작에서 위왕(魏王)으로 승진시킨 후, 사마의는 조조의 아들이자 후계자조비의 고문이 되었고, 조비는 사마의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존경했다. 사마의는 진군, 오질, 朱鑠(朱鑠)과 함께 조비의 측근이자 그의 "사우(Four Friends)" 중 한 명이었다.[19] 조비가 216년에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전, 그는 후계자 자리를 놓고 그의 동생인 조식과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사마의는 비밀리에 조비를 지원하여 그가 후계자 자리를 얻도록 도왔다고 여겨진다. 그는 또한 조비가 황제가 된 후 조식의 강등과 정치적 제거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었다.

조비가 220년 초 부친의 뒤를 이어 위나라의 제후왕이자 한나라의 승상이 되자, 사마의를 하진정후(河津亭侯)로 봉하고 그의 장사(長史)로 임명했다.[26] 건안 25년(220년), 조조가 사망했을 때 유해를 으로 옮겨 장례를 주관하라는 명령을 조비에게 받았다.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하자 사마의는 하진정후에 봉해졌다.

이후 손권이 군사를 이끌고 조비의 영토인 형주를 공격했을 때, 일부 관리들은 번성과 양양이 식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손권에 저항하는 것을 반대했다. 조인은 양양을 지키기 위해 번성에서 으로 재배치되었다. 사마의는 "손권은 최근 관우를 격파했습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사업을 묶으려고 할 것이고, 감히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양양의 육상과 수로는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매우 중요하므로, 우리는 도시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조비는 사마의의 조언을 무시하고 조인에게 양양과 번성을 불태우고 버리게 했다. 사마의의 예측대로 손권은 이후 공격하지 않았고, 조비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27]

220년 내내 사마의는 조비의 보좌관으로서 황위를 찬탈하도록 설득했으며, 다른 관리들의 지지를 받았다.

220년 말, 조비는 헌제로부터 황위를 찬탈하여 동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 건립된 위의 황제를 자칭했다. 조비는 처음 사마의를 상서로 임명했지만, 후에 그를 독군(督軍)과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재임명했다. 그는 사마의를 읍정후에서 안국향후(安國鄉侯)로 승진시켰다.[28]

221년, 사마의는 독군에서 해임되었고, 시중(侍中)과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로 임명되었다.[29] 이는 상당히 영향력 있는 직위로, 황제의 서신과 칙령을 담당하는 비서실의 부실장 중 하나였다.

222년, 조비가 완을 방문했을 때, 도시가 충분히 축하하지 않거나 현지 시장이 조비가 요청한 종류의 약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도시를 관할하는 남양 태수 양준(楊俊)이 체포되었다. 사마의는 다른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양준과 친분이 있었고, 젊은 시절에 그를 만났으며(그들은 모두 하내군 출신이었다)[30]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변호했다. 그는 머리를 땅에 찧어 피가 나도록 했지만, 조비는 호소를 기각했다. 양준은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고 자결했다. 사마의는 이러한 손실에 매우 슬퍼했다.[31]

2년 후인 224년 9월, 조비는 남쪽으로 순행하며 위나라와 오 국경 근처의 군대를 사찰했다. 사마의는 허창을 방어하기 위해 남아 있었고, 그의 후작 작위는 향향후(向鄉侯)로 변경되었다.

225년 초, 그는 무군장군(撫軍將軍)으로 임명되어 5,000명의 군대를 지휘했고, 급사중(給事中)과 녹상서사(錄尙書事)를 겸임했다. 사마의가 이 직책을 수락하는 것을 거부하자, 조비는 그에게 "나는 밤낮으로 국가의 일로 바빠 쉴 틈이 없다.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단지 짐을 나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32]

다음 해, 조비는 군대를 이끌고 손권을 공격했고, 사마의는 그가 부재한 동안 황도(수도)를 방어하고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최전선에 있는 그의 군대에 증원군과 물자를 제공했다. 조비는 출발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나는 나의 후손들을 깊이 염려한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이 책임을 맡기는 이유이다. 조참이 전장에서 많은 공헌을 했지만, 소하는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가 서쪽(촉한)을 뒤돌아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비는 나중에 광릉군에서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마의에게 "내가 동쪽에 있으면 당신은 서쪽을 담당하고, 내가 서쪽에 있으면 당신은 동쪽을 담당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마의는 허창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었다.[33]

2. 4. 조예 휘하

조예가 황제가 된 후 사마의는 무양후로 봉해졌고, 표기대장군이 되었으며, 태화 원년(227년)에는 형주와 예주 지역의 군사를 감독하는 독형예이주제군사를 겸했다.[227] 맹달의 모반 의도가 노출되자, 서신을 보내 맹달을 안심시키는 한편 주둔지인 에서 맹달이 있는 상용성까지 급히 행군하여 8일 만에 도착하였고, 16일 만에 성중에 배반자가 생겨 성을 함락하고 맹달의 목을 서울로 보냈다.[227]

230년(태화 4년), 사마의는 대장군에 임명되고 대도독, 가황월의 벼슬이 더해졌다.[227] 그 해에 조진과 더불어 촉한을 공격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했다.[227] 231년 제갈량천수를 공격했을 때 사마의는 조예의 명을 받아 장안에 주둔해 옹주와 양주 지역의 군사를 감독하는 도독옹량이주제군사를 맡았다.[227] 이후 역사상 유명한 제갈량과의 대결을 벌인다.

제갈량의 북벌227년부터 7년 동안 6차례에 걸쳐 행해지는데, 1차 북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마의가 나섰고 총지휘한 것은 2번이다. 첫 대결은 231년으로, 조진이 죽은 뒤 촉군의 약점이 식량 보급에 있음을 간파한 사마의가 지구책을 쓰고 그 전략이 효과를 발휘해 촉한군은 퇴각했다. 그러나 장합의 진언을 무시하고 추격했다가 장합을 잃었다.

두 번째 대결은 234년으로, 제갈량은 장기전을 예상해 3년에 걸쳐 준비하는데, 오장원으로 출진한 제갈량에 대해 사마의는 또다시 지구전을 펼쳤다. 제갈량은 부인용 머리 장식과 여러 장신구들을 사마의에게 보내며 비웃었지만 사마의는 도발임을 눈치채고 편승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지고 온 사자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물었다. 이때 사마의는 수시로 촉한군의 진영을 염탐해 제갈량이 죽음에 임박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죽음을 안 사마의가 즉시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제갈량의 목상을 보고 아직 살아있는 줄 착각하고 놀라 도망쳤다고 한다.

촉한군이 퇴각한 뒤 진영을 살펴본 사마의는 제갈량을 ‘천하의 귀재’라고 평가했다.

238년(경초 2년), 전년에 위나라에 반기를 들고 독립한 요동의 공손연이 토벌군 4만을 이끌고 출진했다.[227] 연군이 요수에 의지하여 저항하자, 남쪽으로 도강하려는 체 하고 실은 북쪽으로 도강하여 연의 서울 양평으로 향했다.[227] 연군이 쫓아오자 이를 세 번 무찌르고, 양평성을 포위했다.[227] 당시 큰 비가 내려 진영의 침수가 염려되었으나, 버티고 비가 그치자 포위망을 완성하여 맹공격을 퍼부어 결국 성을 함락시키고, 15세 이상의 남자 7천 명을 죽여 경관을 세우고 연나라의 관원과 장수 등 2천여 명을 주륙했다.[227]

2. 5. 정권 탈취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 형제를 처단하고 조위의 실권을 장악했다.[143]

247년 병을 핑계로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249년 조상이 조방을 수행하여 조예의 묘소를 참배하러 낙양을 비운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켰다. (고평릉의 변)[133][135] 사마의는 곽태후에게 상주하여 조상 형제의 관직을 해임하는 명을 받았고, 사마사, 사마부에게 낙양의 궁성을 제압하게 했다. 고유, 왕관에게는 낙양의 조상, 조희의 진영을 제압하게 하여 낙양을 장악했다.[137][138] 낙수 기슭에 진을 친 사마의는 조상을 설득하여 싸우지 않고 항복시켰다. 조상과 그 일족은 연금되었으나, 249년 2월 9일 모반 혐의로 일족이 몰살당했다.[142] 조상의 측근 하안, 환범 등도 처형되었다.[143]

249년 2월 18일 또는 3월, 조방은 사마의를 상국으로 임명하고 식읍을 늘렸으며, 황제에게 말할 때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부여했지만, 사마의는 상국 임명을 거절했다.[147] 250년 1월 또는 2월, 조방은 사마의에게 구석을 하사하고 조정 회의 중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부여했지만, 사마의는 구석을 거절했다.[148]

가평 3년(251년), 왕릉 등이 조표를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사마의는 이를 진압하고 왕릉과 조표를 자결하게 했다.[153] 이후 위나라 황족을 업에 연금하고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게 했다.[156]

3. 제갈량과의 대결

227년 조예가 황제가 된 후, 사마의는 무양후로 봉해졌고 표기대장군이 되었으며, 태화 원년에는 형주, 예주 2주의 군사를 감독하게 되었다.[227] 맹달의 모반 의도가 드러나자, 서신을 보내 맹달을 안심시키는 한편, 완에서 상용성까지 급히 행군하여 8일 만에 도착, 16일 만에 성을 함락하고 맹달의 목을 서울로 보냈다.[227]

230년(태화 4년), 사마의는 대장군, 대도독, 가황월(假黃鉞)의 벼슬을 받았다.[227] 그 해에 조진과 함께 촉한을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했다.[227]

231년부터 제갈량과의 역사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1차 대결 (231년)과 2차 대결 (234년)의 구체적인 내용은 각각 하위 섹션을 참조하라.

두 번의 대결 이후, 촉한군이 퇴각한 뒤 진영을 살펴본 사마의는 제갈량을 ‘천하의 귀재’라고 평가했다.

3. 1. 1차 대결 (231년)

231년 제갈량천수를 공격했을 때, 사마의는 조예의 명을 받아 장안에 주둔하여 과 양주의 군사 작전을 감독했다.[227] 이때부터 제갈량과의 역사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제갈량의 북벌227년부터 7년 동안 6차례 이루어졌는데, 1차 북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마의가 상대했으며, 그중 2번은 총지휘를 맡았다. 첫 대결은 231년으로, 조진이 죽은 뒤 촉군의 약점이 식량 보급에 있음을 간파한 사마의는 지구전을 펼쳤다. 이 전략은 효과를 발휘하여 촉군은 퇴각했다. 그러나 장합의 진언을 무시하고 추격했다가 장합을 잃었다.[57]

구체적인 전투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은 천수군을 공격했고, 가사와 위평이 이끄는 위군은 기산에서 포위되었다. 조예는 사마의에게 장안으로 이동하여 옹주와 량주의 군사 작전을 감독하라고 명령했다. 사마의는 페요대령에게 정예 병력 4,000명으로 상규현을 방어하도록 명령하고,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출발하여 산악 전장으로 구원하려 했다. 장합은 별동대를 이끌고 옹과 미현에 주둔하고 싶어했지만, 사마의는 군대를 나누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전투 준비를 마친 후, 사마의는 장합, 페요, 대령, 곽회를 부하로 삼아 위군을 이끌고 유미현으로 가서 주둔했다.[47]

제갈량은 위군의 도착 소식을 듣고 수확을 거두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상규현으로 향했다. 위군의 별동대는 촉군을 공격하려다 패배했다. 제갈량은 인근에서 수확할 수 있는 이른 봄 밀을 확보했다. 사마의는 이틀 안에 상규현에 도착하여 제갈량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처음에 위나라 황제 조예는 관중에서 전선으로 곡물을 수송하자는 제안을 거절했지만, 제갈량의 움직임은 조예가 예상했던 것보다 빨랐다. 곽회는 현지 유목 부족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위군을 위한 식량을 넘겨주도록 강요하여 위군은 낙양의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마의는 상규현 동쪽의 한양에서 제갈량과 다시 마주쳤지만, 직접적인 교전은 없었다. 사마의는 군대를 물리고 대형을 갖추는 동안 인근의 협곡에서 방어를 하며 기다렸다. 우진에게 가벼운 무장 기병 부대를 이끌고 적을 기산으로 유인하도록 보냈고, 그 과정에서 촉군의 선봉 지휘관 마대와 짧게 교전하여 적에게 약간의 피해를 입혔다. 제갈량은 동시에 군대를 철수시켰고, 사마의는 그 후 제갈량을 뒤에서 밀착 추격했다. 장합기산에 주둔하여 병력을 합치고 불규칙한 원정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추격을 반대했지만, 사마의는 이 조언을 무시하고 추격을 계속했다. 제갈량은 촉군이 북쪽과 남쪽의 언덕을 장악하고, 강을 천연 방벽으로 삼아 강둑 근처에 "엄호 진영"을 설치하여 수로를 완전히 장악한 기산 능선의 동쪽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52]

부하들은 사마의에게 적을 공격하라고 거듭 촉구했지만, 그는 촉군의 진영 배치를 보고 주저했다. 부하들이 공격을 거부하면 비웃음을 살 것이라고 비판하고 조롱하자 그는 마침내 마음을 바꿨다. 사마의는 장합을 보내 왕평이 지키는 남쪽 촉군 진영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중앙 통로에서 육성을 정면 공격했다.[53] 이에 대응하여 제갈량은 위연, 오반, 고상에게 군대를 이끌고 육성 밖에서 적과 교전하여 저항하라고 명령했다. 위군은 예상치 못한 대패를 겪었다. 병사 3,000명이 사망했고, 촉군은 갑옷 5,000벌과 참나무 쇠뇌 3,100개를 노획했지만, 사마의는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여 자신의 진영으로 되돌아갔다.[54]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군량 부족으로 적에게 대규모 공세를 펼칠 수 없었다. 제갈량은 육성을 포기하고 밤에 후퇴했지만, 사마의는 그를 추격했다. 제갈량은 패배가 아닌 식량 부족으로 후퇴했고,[56] 위군은 그를 추격했다. 사마의는 장합에게 그들의 기세를 이용하여 적을 더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위략에 따르면, 장합은 처음에는 사마의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고전 군사 교리에 따라 적군이 본국으로 후퇴할 때는 추격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의는 말을 듣지 않고 장합에게 이 명령을 수행하도록 강요했다. 장합은 목문도에서 매복에 걸렸고, 제갈량은 쇠뇌병들에게 높은 지대에서 숨어 좁은 협곡에 들어서는 적군을 향해 사격하도록 명령했었다. 장합은 유탄에 맞아 오른쪽 무릎을 맞고 사망했다.[57]

3. 2. 2차 대결 (234년)

231년 제갈량이 천수를 공격했을 때, 사마의는 조예의 명을 받아 장안에 주둔하며 옹주, 양주 지역의 군사를 감독했다.[227] 이후 제갈량과 유명한 대결을 벌인다.

제갈량의 북벌은 227년부터 7년 동안 6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차 북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마의가 나섰고 총지휘한 것은 2번이다. 첫 대결은 231년으로, 조진이 죽은 뒤 촉군의 약점이 식량 보급에 있음을 간파한 사마의가 지구전을 펼쳐 촉한군은 퇴각했다. 그러나 장합의 진언을 무시하고 추격했다가 장합을 잃었다.

234년의 두 번째 대결에서, 제갈량은 장기전을 예상해 3년에 걸쳐 준비하고 오장원으로 출진했다. 사마의는 또다시 지구전을 펼쳤다. 제갈량은 부인용 머리 장식과 여러 장신구들을 사마의에게 보내며 비웃었지만, 사마의는 도발임을 눈치채고 편승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마의는 사자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물었고, 수시로 촉한군의 진영을 염탐해 제갈량이 죽음에 임박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죽음을 안 사마의가 즉시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제갈량의 목상을 보고 아직 살아있는 줄 착각하고 놀라 도망쳤다고 한다.

촉한군이 퇴각한 뒤 진영을 살펴본 사마의는 제갈량을 ‘천하의 귀재’라고 평가했다.

4. 평가

사마의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 당 태종 이세민진서에서 사마의의 뛰어난 재능과 군사적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조예에게 받은 신임을 저버리고 정변을 일으킨 것을 비판하며 충신이 아니라고 평가했다.[227]
  • 동진명제는 선조들이 정변과 같은 속임수로 진나라를 건국한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227]
  • 후조를 세운 석륵은 조조와 사마의를 함께 비판하며, 남의 고아나 과부를 속이고 아첨하여 천하를 빼앗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228]
  • 배잠론(裴潛論)에서는 사마의가 농지 개발과 인사 관리에 특화된 인물로 묘사되며, 그의 추천을 받아 활동한 인물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의는 농업을 장려하고 공적 기금 낭비를 줄여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41]
  • 진나라 명제(323–325)는 왕도에게 진나라의 기원에 대해 듣고, 진나라가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174]
  • 당나라 역사가 방현령은 《진서》에서 사마의가 관대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의심 많고 질투심이 많았다고 언급했다. 또한 요동 인구 학살과 조상 일족 몰살 등 잔혹함을 비판했다.[176]
  • 당 태종은 사마의가 덕이 있는 신하의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처음에는 충성스러웠지만 나중에는 반역적인 마음을 품었다고 비판했다. 석륵은 사마의의 배신을 비웃었고, 옛사람들은 '하루의 악행은 천하에 알려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언급했다.[177]
  • 사마의 사후, 그의 아들들과 손자 사마염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사마의는 위(魏) 왕조를 찬탈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노미 릿코는 사마의가 위 왕조 찬탈을 꾀한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다고 언급했다.
  • 석륵은 사마의가 과태후를 이용한 것을 비난하며, 조조나 사마의 부자처럼 고아나 과부를 속여 천하를 얻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221]
  • 당 태종은 이정에게 사마의가 노령에도 불구하고 위나라에서 훈공을 세웠다고 말하며, 사마의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223]
  • 명나라왕부지는 사마의가 조조와 달리 공적이 없고, 찬탈에 대한 대의명분이 없다고 비판했다.[224]
  • 일본의 요시다 쇼인은 조조와 사마의를 난신적자의 표본으로 삼아, 이러한 신하가 있다는 것은 군주의 죄이자 수치라고 말했다.[225]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사마준영천부군
사마방경조부군
사마랑
장춘화선목황후
복부인
장부인
백부인
장남사마사세종 경황제, 장춘화 소생
며느리하후휘경회황후 하후씨
며느리양휘유경헌황후 양씨
차남사마소태조 문황제, 장춘화 소생
며느리왕원희문명황후 왕씨
아들사마간평원왕, 장춘화 소생
장녀남양공주장춘화 소생, 순익과 혼인
아들사마량여남문성왕, 복부인 소생
아들사마주낭야무왕, 복부인 소생
아들사마경청혜정후, 복부인 소생
아들사마준(司馬駿)부풍무왕, 복부인 소생
아들사마융양효왕, 장부인 소생
아들사마륜조왕, 백부인 소생
차녀고륙공주두예와 혼인
동생사마부
동생사마욱
동생사마규
동생사마순
동생사마진
동생사마통
동생사마민


참조

[1] harvnb Eighth month. On the day wu-yin (Sept. 7), Sima Yi, the Lord Xuan-Wen of Wu-Yang, died.
[2] harvnb When Sima Yi was young he was already intelligent, and he had ambitious plans. Cui Yan said to his elder brother Sima Lang, "Your young brother has a clear intelligence and a keen sense of justice, firm decision and exceptional bravery. You are not so good as that!" Cao Cao heard about this and appointed Sima Yi to office, but Sima Yi sought to excuse himself on the grounds that he had rheumatism. Cao Cao was angry and was going to have him arrested. Sima Yi was frightened and took the post.
[3] harvnb "楚漢間,司馬卬為趙將,與諸侯伐秦。秦亡,立為殷王,都河內。漢以其地為郡,子孫遂家焉。"
[4] harvnb "自卬八世,生征西將軍鈞,字叔平。"
[5] harvnb "鈞生豫章太守量,字公度。"
[6] harvnb "量生潁川太守儁,字元異。"
[7] harvnb "儁生京兆尹防,字建公。帝即防之第二子也。"
[8] harvnb 安平獻王孚字叔達,宣帝次弟也。初,孚長兄朗字伯達,宣帝字仲達,孚弟馗字季達,恂字顯達,進字惠達,通字雅達,敏字幼達,俱知名,故時號為「八達」焉。
[9] harvnb "少有奇節,聰朗多大略,博學洽聞,伏膺儒教。漢末大亂,常慨然有憂天下心。南陽太守同郡楊俊名知人,見帝,未弱冠,以為非常之器。尚書清河崔琰與帝兄朗善,亦謂朗曰:「君弟聰亮明允,剛斷英特,非子所及也。」"
[10] 문서 Xuzhuan
[11] harvnb "是時董卓遷天子都長安,卓因留洛陽。朗父防為治書御史,當徙西,以四方雲擾,乃遣朗將家屬還本縣。 ...後數月,關東諸州郡起兵,衆數十萬,皆集熒陽及河內。諸將不能相一,縱兵鈔略,民人死者且半。久之,關東兵散,太祖與呂布相持於濮陽,朗乃將家還溫。"
[12] harvnb "Under the system of Han, heads of commandery units and provinces were required to present accounts to the court each New Year. The local officer sent to do so was known for that purpose as the Reporting Officer..."
[13] harvnb "漢建安六年,郡舉上計掾。魏武帝為司空,聞而辟之。帝知漢運方微,不欲屈節曹氏,辭以風痺,不能起居。魏武使人夜往密刺之,帝堅卧不動。"
[14] harvnb "宣帝初辭魏武之命,託以風痹,嘗暴書,遇暴雨,不覺自起收之。家惟有一婢見之,后乃恐事泄致禍,遂手殺之以滅口。"
[15] harvnb "及魏武為丞相,又辟為文學掾,勑行者曰:「若復盤桓,便收之。」帝懼而就職。於是使與太子游處,遷黃門侍郎,轉議郎、丞相東曹屬,尋轉主簿。"
[16] 문서 Sima Yi, Master of Records to the Chancellor, said to Cao Cao, 'Liu Bei has captured Liu Zhang by deceit and force, and the people of Shu are not yet attached to him. Now that he is fighting far away in Jiangling, this is too good a chance to miss. You have conquered Hanzhong, and Yi province is trembling. Send your soldiers against them, and their position will disintegrate. The sage does not oppose the time, and he cannot let such opportunity slip.' 'A man who cannot be satisfied', remarked Cao Cao, 'will get Long and look to Shu.'
[17] harvnb "從討張魯,言於魏武曰:「劉備以詐力虜劉璋,蜀人未附而遠爭江陵,此機不可失也。今若曜威漢中,益州震動,進兵臨之,勢必瓦解。因此之勢,易為功力。聖人不能違時,亦不失時矣。」魏武曰:「人苦無足,既得隴右,復欲得蜀!」言竟不從。既而從討孫權,破之。"
[18] harvnb "軍還,權遣使乞降,上表稱臣,陳說天命。魏武帝曰:「此兒欲踞吾著爐炭上邪!」荅曰:「漢運垂終,殿下十分天下而有其九,以服事之。權之稱臣,天人之意也。虞、夏、殷、周不以謙讓者,畏天知命也。」"
[19] harvnb "魏國既建,遷太子中庶子。每與大謀,輒有奇策,為太子所信重,與陳羣、吳質、朱鑠號曰四友。"
[20] harvnb "遷為軍司馬,言於魏武曰:「昔箕子陳謀,以食為首。今天下不耕者蓋二十餘萬,非經國遠籌也。雖戎甲未卷,自宜且耕且守。」魏武納之,於是務農積穀,國用豐贍。"
[21] harvnb "帝又言荊州刺史胡脩麤暴,南鄉太守傅方驕奢,並不可居邊。魏武不之察。及蜀將關羽圍曹仁於樊,于禁等七軍皆沒,脩、方果降羽,而仁圍甚急焉。"
[22] harvnb "是時漢帝都許昌,魏武以為近賊,欲徙河北。帝諫曰:「禁等為水所沒,非戰守之所失,於國家大計未有所損,而便遷都,既示敵以弱,又淮沔之人大不安矣。孫權、劉備,外親內踈,羽之得意,權所不願也。可喻權所,令掎其後,則樊圍自解。」魏武從之。權果遣將呂蒙西襲公安,拔之,羽遂為蒙所獲。"
[23] harvnb "魏武以荊州遺黎及屯田在潁川者逼近南寇,皆欲徙之。帝曰:「荊楚輕脫,易動難安。關羽新破,諸為惡者藏竄觀望。今徙其善者,既傷其意,將令去者不敢復還。」從之。其後諸亡者悉復業。"
[24] harvnb "Sima Fu reprimanded them: 'Now the King is dead, we ought to pay our respects to his successor as early as possible, for the stabilization of the myriad states. Must we indulge in weeping only?' He then dismissed all of the officials from court, appointed palace guards, and attended to the business of the funeral."
[25] harvnb "及魏武薨于洛陽,朝野危懼。帝綱紀喪事,內外肅然。乃奉梓宮還鄴。"
[26] harvnb "魏文帝即位,封河津亭侯,轉丞相長史。"
[27] harvnb "會孫權帥兵西過,朝議以樊、襄陽無穀,不可以禦寇。時曹仁鎮襄陽,請召仁還宛。帝曰:「孫權新破關羽,此其欲自結之時也,必不敢為患。襄陽水陸之衝,禦寇要害,不可棄也。」言竟不從。仁遂焚棄二城,權果不為寇,魏文悔之。"
[28] harvnb "及魏受漢禪,以帝為尚書。頃之,轉督軍、御史中丞,封安國鄉侯。"
[29] harvnb "黃初二年,督軍官罷,遷侍中、尚書右僕射。"
[30] 문서 Sanguozhi
[31] 문서 Sanguozhi
[32] harvnb "五年,天子南巡,觀兵吳疆。帝留鎮許昌,改封向鄉侯,轉撫軍、假節,領兵五千,加給事中、錄尚書事。帝固辭。天子曰:「吾於庶事,以夜繼晝,無須臾寧息。此非以為榮,乃分憂耳。」"
[33] harvnb "六年,天子復大興舟師征吳,復命帝居守,內鎮百姓,外供軍資。臨行,詔曰:「吾深以後事為念,故以委卿。曹參雖有戰功,而蕭何為重。使吾無西顧之憂,不亦可乎!」天子自廣陵還洛陽,詔帝曰:「吾東,撫軍當總西事;吾西,撫軍當總東事。」於是帝留鎮許昌。"
[34] harvnb "及天子疾篤,帝與曹真、陳羣等見於崇華殿之南堂,並受顧命輔政。詔太子曰:「有間此三公者,慎勿疑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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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문서 삼국지 문제기에서 조휴 언급, 진서에는 빠짐
[227] 위키문헌 《晉書》卷1 帝紀第1 宣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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