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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키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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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키우스는 249년부터 251년까지 로마 황제였다. 일리리쿰 출신으로, 뛰어난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여러 행정직을 거쳐 245년경에는 도나우강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파카티아누스와의 반란을 진압한 후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베로나 전투에서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물리치고 황위에 올랐다. 그는 로마 전통 신에 대한 희생을 의무화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박해했으며, 고트족과의 전쟁 중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데키우스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 제국 내에서 최초의 조직적인 박해였으며, 이후 일곱 잠자는 이 전설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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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키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군주로마 황제
재위 기간249년 9월 – 251년 6월
이전 통치자필리푸스 아라브스
후임 통치자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공동 황제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본명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데키우스 발레리누스
칭호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종교고대 로마 종교
인물 정보
출생기원후 201년경
출생지일리카룸 부달리아(현재의 세르비아)
사망251년
사망 장소아브리투스, 모에시아 인페리오르
배우자헤레니아 에트루스키야
자녀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호스틸리아누스
흰색 조각상
뮌헨 글립토테크에 있는 흉상

2. 초기 생애 및 권력 장악

안토니니아누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명문: IMP. C. M. Q. TRAIANVS DECIVS AVG.


트라야누스 데키우스는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속주 부달리아 출신으로,[1] 일리리쿰 지역에서 배출된 여러 로마 황제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필리푸스 아라부스나 막시미누스 트락스와 같은 일부 전임 황제들과는 달리, 즉위 전에 원로원 의원으로서 집정관, 여러 속주의 총독, 로마의 도시 행정관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며 풍부한 행정 및 군사 경험을 쌓았다.[2]

245년경,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는 데키우스에게 도나우강 방위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이후 248년 말 또는 249년, 데키우스는 모에시아와 판노니아에서 일어난 파카티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자, 그의 군대는 데키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비잔틴 역사가 조시무스는 데키우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를 수락했다고 기록했다.[5] 황제로 추대된 데키우스는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249년 9월, 베로나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격파하고 그를 전사시켰다.[4] 이후 원로원은 데키우스를 정식 황제로 인정하고, 과거 위대한 황제였던 트라야누스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에게 '트라야누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2. 1. 출생 및 가문



트라야누스 데키우스는 190년경 로마 제국의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속주, 시르미움 인근 부달리아에서 태어났다.[1] 그의 본명은 Gaius Messius Quintus Decius Valerinusla였다. 데키우스는 일리리쿰이라 불리던 도나우강 지역 출신의 여러 로마 황제들 중 한 명으로,[1] 뛰어난 원로원 의원이었다.[2]

2. 2. 초기 경력

데키우스는 즉위 전에 광범위한 행정 경험이 없었던 필리푸스 아라부스나 막시미누스 트락스와는 달리, 뛰어난 원로원 의원으로서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2] 그의 주요 초기 경력은 다음과 같다.

시기직책
232년보결 집정관 (Suffect consul)
232년 직후모에시아 속주 총독
232년 직후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 총독
235년 ~ 238년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
필리푸스 아라부스 치세 초기로마 도시 행정관

[2]

2. 3. 황제 즉위



데키우스는 232년 수피엑트 집정관을 지내고, 이후 모에시아,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총독을 역임했으며,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 치하에서는 로마의 도시 행정관을 맡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은 원로원 의원이었다.[2] 이는 즉위 전 행정 경험이 부족했던 막시미누스 트락스나 필리푸스 아라부스와는 다른 점이었다.

245년경, 필리푸스 황제는 데키우스에게 도나우강 유역의 중요한 군 지휘권을 맡겼다. 248년 말 또는 249년, 데키우스는 모에시아와 판노니아에서 일어난 파카티아누스와 그의 군대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자, 휘하 군단은 데키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비잔틴 역사가 조시무스에 따르면, 데키우스는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를 수락했다고 한다.[5]

황제로 추대된 데키우스는 로마로 진군했고, 249년 9월 이탈리아베로나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필리푸스 아라부스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전사했다.[4] 이후 원로원은 데키우스를 정식 황제로 인정하고, 존경받는 황제였던 트라야누스를 기리는 의미로 그에게 '트라야누스'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3. 정치 및 기념비적 사업

데키우스의 정치 프로그램은 군사적으로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고, 국교의 부흥을 통해 공공의 경건함을 회복하는 등 국가의 힘을 회복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의 통치는 고대 로마의 신앙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졌으나, 이 과정에서 기독교를 박해하여 후대에 낮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3. 1. 감찰관 제도 부활 시도

데키우스는 원로원에 대한 양보의 표시이거나, 혹은 공공 도덕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감찰관의 직위와 권한을 되살리려 했다. 감찰관 선택은 원로원에 맡겨졌고,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훗날 황제가 되는 발레리아누스를 선택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당시 감찰관 자리가 가진 위험과 어려움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 책임을 맡기를 거절했다. 결국 고트족의 침입과 데키우스의 죽음으로 인해 이 시도는 무산되었다.

3. 2. 데키우스 욕장 건설

데키우스는 재위 기간 동안 로마에서 여러 건설 사업을 진행했다. 대표적으로 Thermae Decianae|테르마이 데키아나이lat, 즉 아벤티노 언덕에 지어진 데키우스 목욕탕이 있다. 이 목욕탕은 252년에 완공되었으며 16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또한 데키우스는 번개 피해를 입은 콜로세움을 보수하기도 했다.[2]

3. 3. 콜로세움 보수

데키우스는 또한 번개로 손상된 콜로세움을 보수했다.[2]

4. 기독교 박해



데키우스 황제 통치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기독교 박해였다. 이는 로마 제국의 전통적인 종교 의례를 강화하고 제국의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된다.[9] 249년 말, 데키우스는 제국 전역의 거주민에게 로마 신들에게 정해진 기한 내에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강제하는 칙령을 공포했다.[8] 이 명령 이행 여부는 리벨루스라는 증명서를 통해 확인되었다.[8]

이 칙령은 데키우스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고 당시 사회적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으나,[9] 기독교 공동체에는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10]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이유로 희생을 거부하여 고문과 처형을 당했으며,[12] 250년 교황 파비아누스의 순교[3]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의 폭력 사태[3]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데키우스 통치 말기에는 박해의 강도가 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3] 251년 6월, 데키우스와 그의 아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하자, 후임 황제 트라야누스 갈루스와 호스틸리아누스는 데키우스의 칙령을 철회하며 약 18개월간 이어진 박해를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한편, 박해가 진행 중이던 251년부터 키프리아누스 역병이 로마 제국을 휩쓸었다. 이 전염병은 일부 지역에서 기독교인 박해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데키우스의 박해 정책은 이후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 잠시 부활했으나, 갈리에누스 황제 시기에 최종 폐지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데키우스는 후대 기독교인들에게 "사나운 폭군"으로 기억되었다.[3]

4. 1. 데키우스 칙령 (249년)



249년 말, 데키우스는 로마 황제의 칙령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를 발표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희생을 기록한 수많은 문서를 통해 칙령의 내용은 상당히 명확하게 드러난다.[8]

역사가 D. S. 포터(D. S. Potter)에 따르면, 칙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국의 모든 거주민은 정해진 날짜까지 (날짜는 장소마다 다를 수 있으며, 칙령을 받은 후 특정 기간 내에 희생을 완료해야 했을 수 있음) 공동체의 치안 판사 앞에서 "제국의 안전을 위해" 희생을 하도록 요구받았다. 희생을 하면 명령을 준수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증명서(libellus)를 받게 된다. 즉, 이 증명서는 희생자가 조상신에 대한 충성심과 희생 음식 및 음료 섭취, 그리고 희생을 감독한 관리들의 이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8]

포터는 데키우스가 로마의 신들이 다른 신들보다 우월하다고 강요하려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이 칙령은 그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고, 로마 건국 천 년(서기 248년)이 지나며 퍼진 사회 전반의 불안감에 대응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높다.[9] 데키우스 자신은 이 칙령을 통해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 대한 그의 보수적인 비전을 재확인하고 제국이 여전히 안전하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려 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다양한 기독교 주교와 그들의 신자들이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면서 권위의 끔찍한 위기"를 촉발했다.[10]

먼저 주교와 교회의 주요 인물들에게 황제를 위해 희생하라는 요구가 내려졌다. 당시 살아있는 황제는 으로 간주되지 않았기에, 희생은 황제 '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황제 '를 위해'(라틴어 ''pro'') 행해졌다. 데키우스 시대의 기독교 박해 동안, 규정을 따라 희생을 치른 사람들에게는 증명서가 발급되었다. 현재까지 250년에 발행된 46개의 리벨루스가 발견되었으며, 그중 4개는 옥시린쿠스에서 나왔다.[11] 정해진 날짜까지 황제와 제국의 안녕을 위해 희생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특히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고문과 처형의 대상이 되었다.[12] 실제로 많은 저명한 기독교인들이 희생을 거부하다 목숨을 잃었는데, 250년에는 교황 파비아누스도 순교했다. 또한 카르타고알렉산드리아에서는 반기독교 감정이 격화되어 살인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3]

전 울피아 트라리아나 사르미제게투사에서 온 데키우스의 청동 두상. 루마니아 국립 역사 박물관, 부쿠레슈티.


그러나 데키우스 통치 2년 차가 끝나갈 무렵, "[반기독교] 박해의 강도는 누그러졌고, 이전의 관용적인 분위기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3]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이 박해를 결코 잊지 않았으며, 데키우스를 "그 사나운 폭군"으로 기억하게 되었다.[3]

251년 6월, 데키우스는 공동 황제였던 아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고트족과의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들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 갈루스와 호스틸리아누스는 데키우스의 칙령을 철회했고, 이로써 약 18개월간 지속된 박해는 종식되었다.

한편, 251년부터 키프리아누스 역병(안토니우스 역병의 두 번째 대규모 발병)이 발생하여 266년까지 로마에서만 매일 5,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역병은 당시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의 이름을 따서 불리는데, 카르타고는 역병과 기독교 박해가 특히 심했던 지역이었다. 키프리아누스의 전기 작가 카르타고의 폰티우스는 역병이 사회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을 생생하게 기록했으며, 키프리아누스 자신도 그의 저서 ''De mortalitate''에서 이 사건을 도덕적으로 해석했다. 카르타고에서는 역병이 확산되면서 시작된 "데키우스 박해"가 기독교 희생양을 찾았다. 데키우스의 칙령은 253년 발레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다시 시행되었으나,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 황제 때인 260년에서 261년 사이에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4. 2. 박해의 영향

249년 말, 데키우스는 제국 거주민에게 정해진 날짜까지 "제국의 안전을 위해"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명령하는 칙령을 발표했다.[8] 희생을 마친 자에게는 이를 증명하는 리벨루스(증명서)가 발급되었다.[8] 이 증명서는 희생자가 조상신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고, 희생 제물로 바쳐진 음식과 음료를 섭취했으며, 희생 의식을 감독한 관리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내용을 담았다.[8]

역사가 D. S. 포터에 따르면, 이 칙령은 데키우스가 로마의 신들이 다른 신들보다 우월하다고 강요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고 로마 건국 천 년을 맞는 시점의 사회적 불안감에 대응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높다.[9] 데키우스는 이를 통해 팍스 로마나에 대한 자신의 보수적 비전을 재확인하고 제국의 안정을 과시하려 했을 수 있다.[10]

그러나 이 칙령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심각한 혼란과 분열을 야기했다.[10] 처음에는 주교와 성직자들이 황제를 '위하여'(라틴어 ''pro'') 희생하도록 요구받았다. 당시 황제는 살아있는 동안 신으로 간주되지 않았기에, 황제 '에게' 바치는 희생이 아닌 황제 '를 위한' 희생을 요구한 것이다.[11] 250년에 작성된 46개의 리벨루스가 발견되었으며, 이 중 4개는 옥시린쿠스에서 나왔다.[11]

정해진 기한까지 희생을 거부한 기독교인들은 고문과 처형의 위협에 직면했다.[12] 실제로 250년 교황 파비아누스를 포함한 많은 저명한 기독교인들이 순교했다.[3] 또한 카르타고알렉산드리아 같은 도시에서는 반기독교 감정이 고조되어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3]

하지만 데키우스 통치 2년 차 말에는 박해의 강도가 약해졌고, 이전의 관용적인 분위기가 일부 회복되었다.[3]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데키우스를 "사나운 폭군"으로 기억하며 그의 통치를 잊지 않았다.[3]

데키우스가 251년 6월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공동 황제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사망한 후, 그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 갈루스와 호스틸리아누스는 데키우스의 칙령을 철회하여 약 18개월 만에 박해를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한편, 251년부터 시작된 키프리아누스 역병(안토니우스 역병의 재발)은 박해와 맞물려 기독교인들에게 더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이 역병은 266년까지 이어졌으며, 절정기에는 로마에서만 매일 5,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특히 역병과 박해가 극심했던 카르타고에서는 키프리아누스 주교가 이 상황을 기록했으며, 역병 확산과 함께 기독교인들이 희생양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데키우스의 칙령은 253년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 잠시 부활했으나, 260년에서 261년 사이 갈리에누스 황제에 의해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4. 3. 박해의 중단

데키우스 통치 2년 차가 끝나갈 무렵, 기독교 박해의 강도는 점차 약해졌고 이전의 관용적인 분위기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3]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박해의 주요 대상이었으며, 데키우스를 "사나운 폭군"으로 기억하며 그의 통치를 잊지 않았다.[3]

251년 6월, 데키우스는 공동 황제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고트족과 벌인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 갈루스와 호스틸리아누스는 데키우스의 박해 칙령을 철회했고, 이로써 약 18개월간 지속된 박해는 끝나게 되었다.

5. 고트족과의 전쟁 및 죽음

250~251년 고트족의 침략


250년, 데키우스는 다시 도나우강을 넘어 침입한 고트족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트라키아 총독의 반란 등으로 장기화되었다.

251년 7월경 벌어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데키우스는 고트족의 함정에 빠져 장남이자 공동 황제였던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전사했다.

데키우스의 사후, 로마에 남아 있던 차남 호스틸리아누스가 후계 황제가 되었으나, 패배한 도나우 원정군은 군 내부 장군이었던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내란 방지 목적이었는지, 군의 압력 때문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호스틸리아누스를 양자로 삼아 공동 황제가 되었다.

5. 1. 고트족의 발칸 침입

데키우스 황제 시대에는 야만족의 제국 침입이 더욱 대담해지고 빈번해졌으며, 제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데키우스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고트족에 맞서 중요한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들은 다뉴브강을 건너 모에시아와 트라키아 지역을 습격했다.[6] 이는 고트족이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중요하게 등장하는 사건 중 하나이다.

크니바 왕이 이끄는 고트족은 니코폴리스에서 데키우스 황제에게 포위당했으나,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고트족은 발칸 반도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도주했지만, 곧 베로에(현재의 스타라 자고라) 근처에서 로마군을 다시 기습하여 야영지를 약탈하고 로마군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후 고트족은 필리포폴리스(현재의 플로브디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혼란 속에서 트라키아 총독 티투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는 데키우스에 반기를 들고 고트족의 보호 아래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다. 하지만 프리스쿠스는 곧 살해당하면서 그의 도전은 무위로 돌아갔다.[2] 이후 고트족 침략자들은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포로 중에는 원로원 계급의 인사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13]

5. 2. 아브리투스 전투 (251년)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의 동전. 비문: HER. ETR. MES. DECIVS NOB. C. / CONCORDIA AVG. F


데키우스는 군대를 재정비하여 아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장군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함께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전리품을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 고트족이 크니바의 지휘 아래 필사적으로 싸운 최후의 교전인 아브리투스 전투는 251년 6월 둘째 주에 루도고리에(불가리아 북동부)의 습지대에서 작은 정착지 아브리투스[1] 또는 ''포룸 테레브로니이''(현대 라즈그라드) 근처에서 벌어졌다. 요르다네스는 데키우스의 아들 헤레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전투 초반에 화살에 맞아 죽었고, 데키우스는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해 "아무도 슬퍼하지 마라. 병사 한 명의 죽음은 공화국에 큰 손실이 아니다"라고 외쳤다고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키우스의 군대는 늪에 갇혀 이 전투에서 전멸했고, 그 자신도 전장에서 죽었다.[10]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데키우스(즉, ''데키우스''와 그의 아들)는 도나우강을 건너 야만족을 추격하던 중 2년 동안 통치한 후 아브리투스에서 배신으로 죽었다. ... 많은 사람들이 아들이 너무 대담하게 공격하다가 전투에서 죽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병사의 손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재개했고,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 비슷한 방식으로 죽었다.[14]

데키우스의 아우레우스


어떤 문학 전통에서는 데키우스가 그의 후계자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게 배신당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는 고트족과의 비밀 동맹에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뒷받침될 수 없으며 갈루스가 데키우스의 어린 아들 가이우스 발렌스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입양해야 할 정도로 늦은 시기에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15][16] 또한 산산이 부서진 로마 군단이 그렇게 많은 병사들을 잃게 한 책임자인 배신자를 황제로 선포할 가능성은 낮다.[17] 데키우스는 외국의 적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최초의 로마 황제였다.[3]

6. 유산

데키우스 시대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 제국 최초의 조직적인 박해이자, 후일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의 전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18][19] 그의 통치는 비록 짧았지만, 로마 제국의 종교 정책과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6. 1. 후대의 평가

데키우스의 통치는 현명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고대 로마의 전통 신앙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기독교를 박해했기 때문에 후대의 평가는 대체로 낮은 편이다.

데키우스의 박해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기독교 박해였으며,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벌어진 제국 내 마지막 주요 기독교 박해인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의 기반이 되었다.[18][19]

이 박해와 관련하여 후대에 에페소스의 일곱 잠자는 이 전설이 생겨났다. 이 이야기는 데키우스의 박해를 피해 동굴에 숨어 약 300년 동안 잠들었다 깨어난 일곱 명의 기독교 청년들에 대한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의 18번째 장(수라)인 알-카흐프(동굴 장)에도 기록되어 있다.[20][21] 또한,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페르시아어 표현인 ahd-e daqyānus|아흐데 다키야누스fas("데키우스 시대") 또는 daqyānus|다키야누스fas는 매우 오래되거나 구식인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어떤 것이 오래되고 낡았을 때 "이것은 데키우스 시대의 것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22]

6. 2. 한국적 관점

데키우스 황제의 통치는 로마 제국의 역사, 특히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시대에 벌어진 기독교 박해는 국가 권력이 특정 종교를 어떻게 탄압했는지 보여주는 초기 사례 중 하나로, 종교와 권력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데키우스 박해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조직적인 박해였으며[18][19], 이는 제국 내 마지막 대규모 기독교 박해인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의 기반이 되었다.[18][19] 이러한 국가 주도의 박해는 이후 세계사에서 나타나는 종교 탄압 및 갈등의 양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수 있다.

이 시기의 박해는 일곱 잠자는 이 전설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데키우스의 박해를 피해 에페소스 근처 동굴에 숨었다가 약 300년 동안 잠들었다 깨어난 일곱 명의 기독교 청년들에 대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쿠란의 알-카흐프(동굴) 수라(장)에도 기록될 만큼[20][21] 널리 알려졌으며, 페르시아어에서는 ahd-e daqyānus|아흐데 다키야누스fas("데키우스 시대") 또는 daqyānus|다키야누스fas라는 표현이 생겨나, 오래되거나 구식인 것을 지칭하는 관용구로 사용되기도 한다.[22] 이는 특정 역사적 사건이 후대에 문화적으로 어떻게 기억되고 변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조

[1] 서적 Handbook to life in ancient Rome https://books.google[...] Infobase 2004
[2] 문서 1995
[3] 문서 2004
[4] 문서 2004
[5] 문서 New History
[6] 백과사전 Decius, Gaius Messius Quintus Trajanus
[7] 뉴스 Statue of slain Roman emperor dressed as Hercules found near sewer in Rome https://www.livescie[...]
[8] 문서 2004
[9] 문서 2004
[10] 웹사이트 Decius: 249–251 AD https://web.archive.[...] 2011-03-30
[11] 웹사이트 Ancient History Sourcebook https://web.archive.[...] 2006-09-26
[12] 문서 1995
[13] 문서 1988
[14] 문서 Book of the Caesars
[15] 문서 1995
[16] 문서 2001
[17] 문서 2004
[18] 백과사전
[19] 웹사이트 Diocletian https://www.thefreed[...]
[20] 서적 Allusions Cultural, Literary, Biblical, and Historical: A Thematic Dictionary https://encyclopedia[...] The Gale Group
[21] 사전 Seven Sleepers
[22] 웹사이트 Travel to the Age of Decius https://www.hamshahr[...] 2007-02-13
[23] 웹사이트 Decius https://www.britanni[...]
[24] 문서 In Classical Latin, Decius' name would be inscribed as GAIVS MESSIVS QVINTVS DECIVS AVGVST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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