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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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재근은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비학산 전투 등에서 활약하다 전사한 군인이다. 1928년 대구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 발발 직전에 자원 입대하여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었다. 비학산 전투에서 특공대 선봉으로 활약하여 15명의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자교리 전투에서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희생을 기려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를 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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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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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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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2. 생애
홍재근은 1928년 12월 10일 경상북도 대구부 비산동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에 자원입대하여, 육군 제2사단 17연대 3대대에 배속되었고, 9중대 3소대의 소총수[1]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었다.[2]
2. 1. 한국 전쟁 참전
홍재근은 1928년 12월 10일 경상북도 대구부 비산동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에 자원입대하여, 육군 제2사단 17연대 3대대에 배속되었고, 9중대 3소대의 소총수[1]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되었다.[2]2. 1. 1. 낙동강 방어선 전투
1950년 5월, 홍재근은 6.25 전쟁 발발 직전 자원입대하여, 제주도 신병훈련소를 거쳐 이등병 신분으로 제2사단 17연대 3대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9중대 3소대의 소총수[1]로서 낙동강 방어선 전장의 최일선에 투입되었다.[2]조선인민군은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을 목표로 총공세를 펼쳤으나, 낙동강 교두보 확보에 실패하였다. 기계지역 탈환을 위해 공격해 오던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은 국군 수도사단의 총공격으로 큰 손실을 입고 비학산으로 철수했다.[3]
1950년 8월, 조선인민군은 경주군 안강읍 기계면 인근 비학산에서 제12사단과 766유격부대를 재편성하고 새로운 공격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수도사단 제18연대가 여러 차례 비학산을 빼앗기 위해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공격 작전권은 홍재근 이병이 속한 제17연대로 넘어왔다. 17연대는 야간기습으로 아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던 조선인민군 766유격부대를 먼저 습격하기로 하고 특공대를 선발하였다. 홍재근 이병은 훈련소 동기인 김용식 이병과 함께 제일 먼저 지원하여, 돌격작전의 첨병을 맡았다. 홍재근 이병과 김용식 이병은 대열의 선봉에서 은밀하게 적진에 침투해 적 경계병을 처치하고, 다른 특공대원들과 함께 적 은거지를 기습 공격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4] 766유격부대 은거지는 결국 초토화되어 제12사단에 흡수돼 사라졌다.[2]
1950년 8월 24일 비학산 쟁탈전에서 이들은 다시 공격대열의 선봉에 섰다. 김용식 이등병은 군관을 덮치며 허벅지를 찌르고, 홍재근 이등병은 경기관총 사수와 부사수의 옆구리를 찌르는 등 분전하여 15명의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전과를 거뒀다. 비학산 전투 이후 홍재근 이병은 자교리 전투에서 조선인민군과 백병전을 전개해 5명을 처치했으나, 결국 적의 대검에 찔려 전사했다.[2]
2. 1. 2. 비학산 전투
1950년 8월, 조선인민군은 경주군 안강읍 기계면 인근 비학산에서 정예부대인 제12사단과 766유격부대를 재편성한 후 새로운 공격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 수도사단은 제18연대를 투입해 여러 차례 비학산을 빼앗기 위해 시도했으나 매번 실패했고, 결국 공격 작전권은 홍재근 이병이 속한 제17연대로 넘어왔다.[4] 17연대는 비학산 점령을 위해 야간기습으로 아군에게 많은 피해를 주던 조선인민군 766유격부대를 습격하기로 결정하고 특공대를 선발하였다. 홍재근 이병은 훈련소 동기인 김용식 이병과 함께 제일 먼저 지원하여, 돌격작전의 첨병을 맡았다.[4] 이들은 대열 선봉에서 은밀하게 적진에 침투해 적 경계병을 처치하고, 다른 특공대원들과 함께 적 은거지를 기습 공격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4] 766유격부대 은거지는 결국 초토화되어 제12사단에 흡수되었다.[2]1950년 8월 24일 비학산 쟁탈전에서 이들은 다시 공격대열 선봉에 섰다. 김용식 이등병은 군관을 덮치며 허벅지를 찌르고, 홍재근 이등병은 경기관총 사수와 부사수의 옆구리를 찌르는 등 분전하여 15명의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전과를 거뒀다. 비학산 전투 이후 홍재근 이등병은 자교리 전투에서 조선인민군과 백병전을 전개해 5명을 처치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적의 대검에 무수히 찔려 전사했다.[2]
3.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1951년 7월 26일 홍재근 이등병의 희생정신과 감투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군인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제11호)과 일 계급 특진을 추서했다.[2] 홍재근 이등병의 위패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되어 있다.[5]
참조
[1]
백과사전
홍재근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0-01-23
[2]
웹인용
용맹한 병사들 ‘영원히 기억되리’
http://kookbang.dema[...]
《국방일보》
2016-06-23
[3]
웹인용
6·25전쟁영웅에 홍재근 육군일병 선정
http://news1.kr/arti[...]
《뉴스1》
2020-01-23
[4]
웹사이트
호국인물 홍재근
https://www.warmemo.[...]
전쟁기념관
2020-01-17
[5]
웹사이트
홍재근
http://www.snmb.mil.[...]
국립서울현충원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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