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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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영랑은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휘문의숙을 거쳐 일본 아오야마학원에서 공부했으며, 3·1 운동 참여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0년 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시를 발표했고, 1935년 첫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했다. 일제강점기 말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하며 시작 활동을 이어갔으며,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한국전쟁 중 서울에서 사망했으며, 대표작으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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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 |
---|---|
기본 정보 | |
본명 | 김윤식 (金允植) |
예명 | 김영랑 (金永郞) |
로마자 표기 | Gim Yeongnang |
로마자 표기 (출생명) | Kim Yunsik |
생애 | |
출생 | 1903년 1월 16일 |
사망 | 1950년 9월 29일 |
출생지 | 대한제국 전라남도 강진군 |
학력 | |
학교 | 휘문의숙 |
직업 | |
직업 | 시인 |
활동 | |
활동 시기 | 일제강점기 |
대표 작품 | 모란이 피기까지는 |
주요 활동 | 문예 동인지 《시문학》 동인 |
기타 | |
관련 인물 | 박용철 |
2. 생애
김영랑은 전라남도 강진에서 대지주 집안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3세에 결혼했으나 1년 만에 사별했다.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으나 1919년 3·1 운동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다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하다 간토 대지진으로 귀국했다. 1926년 두 번째 결혼을 했다.
1930년 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이 무렵 발표했고, 1935년 첫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저항시를 썼고, 해방 후에는 대한독립촉성회 등에서 우익 활동을 하다가 공보처 출판국장을 잠시 역임했다. 한국 전쟁 중 서울 수복 전투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영랑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김영랑은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문학 활동이 활발했다. 그의 시 대부분은 한국 전통의 운율을 탐구하는 동시에 모더니즘을 실험했으며, 독특한 전라도 방언으로 시를 쓰기로 유명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일본의 금지 조치로 인해 애국적인 한국인들이 전통적인 미학을 강조했기 때문이다.[1]
그의 번역가인 태제의 안토니 형제는 김영랑 시인의 명성이 현재 한국에서 커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1919년 잠시 투옥된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억압받지 않았지만, 해방 이후 문단의 영향과 파벌이 형성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정치적 시대에 간과되는 경향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는 수많은 시집에 실린 단 한 편의 시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2] 2008년 정부가 문화예술 분야 최고 영예인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함으로써 그의 업적이 인정받게 되었다. 최근 그의 전 시집 번역이 출간되면서 한국 밖 사람들에게도 그의 작품이 알려지고 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전라남도 강진에서 대지주 집안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자랐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3세에 결혼하였으나 1년 만에 사별하였다.[1]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다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1] 출옥 후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하다 간토 대지진으로 학업이 중단되었다.[1] 1926년에 두 번째로 결혼하였다.[1]
2. 2. 일본 유학과 문학 활동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 운동 때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다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하다가 관동대지진 때 귀국하였다. 1926년에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1]1930년 정지용,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가입하여 동지에 여러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이 무렵 쓴 시이다. 이때의 문학사조를 문학사학자들은 순수서정시라고 부른다.[1]
1935년 첫 시집 《영랑시집》을 간행하였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뚜렷해지자 《독(毒)을 품고》등의 저항시를 썼다. 이후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에 저항하여 두어 차례 붓을 꺾기도 하였다.[1]
2. 3. 창씨개명 거부와 해방 이후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였고, 신사참배도 거부하였다. 그 때문에 매주 한 번씩 당국이 김영랑의 집을 방문하여 신변조사를 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강진에서 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기뻐했다. 곧바로 대한독립촉성회에 가입하여 대한청년단 강진지부장이 되었다. 너무나 눈에 띄는 우익적인 활동 때문에 좌익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였기에, 1947년 가족과 함께 서울 성동구 신당동 290의 74호로 이사했다. 1949년 이승만에게 불려가 공보처 출판국장에 임명되었으나 7개월 정도 근무한 후 사임했다. 그 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진 서울 시내에서 아는 사람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 살았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유엔군에 의해 탈환되려고 할 무렵, 빗나간 총탄에 맞아 다음 날 사망하였다.2. 4. 한국전쟁 중 사망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서울 수복 전투 중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포탄 파편에 맞아 48세로 사망하였다.[1] 김영랑은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공산군 치하의 서울 시내에서 아는 사람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 살다가,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유엔군에 의해 탈환되려고 할 무렵 빗나간 총탄에 맞아 다음 날 사망했다.[2]3. 문학 세계
김영랑은 사회주의 문인들인 카프 문인들이 쓴 목적의식이 담긴 시를 거부하고, 이상적인 순수서정시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어 속을 흐르는 조용한 저항의식이 담긴 민족주의적 시를 쓰기도 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말에 쓴 《독(毒)을 품고》가 그 예이다. 주로 ㄴ, ㄹ, ㅁ, ㅇ같은 부드러운 소리(유음, 흐르는 소리), 남도 방언등으로써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살린 섬세한 시적 표현을 사용하였다.[1]
영랑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김영랑은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문학 활동이 활발했다. 그의 시 대부분은 한국 전통의 운율을 탐구하는 동시에 모더니즘을 실험했으며, 독특한 전라도 방언으로 시를 쓰기로 유명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일본의 금지 조치로 인해 애국적인 한국인들이 전통적인 미학을 강조했기 때문이다.[1]
그의 번역가인 안토니 형제는 김영랑 시인의 명성이 현재 한국에서 커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1919년 잠시 투옥된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억압받지 않았지만, 해방 이후 문단의 영향과 파벌이 형성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정치적 시대에 간과되는 경향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는 수많은 시집에 실린 단 한 편의 시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2] 2008년 정부가 문화예술 분야 최고 영예인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함으로써 그의 업적이 인정받게 되었다. 최근 그의 전 시집 번역이 출간되면서 한국 밖 사람들에게도 그의 작품이 알려지고 있다.
4. 작품
영랑 김영랑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한국 전통 운율을 탐구하고 모더니즘을 실험했으며, 전라도 방언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일제의 금지 조치에 대한 저항으로 한국인들이 전통적인 미학을 강조했기 때문이다.[1]
김영랑은 1919년 잠시 투옥된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억압을 받지 않았으나, 해방 이후 문단의 영향력과 파벌이 형성되기 전에 사망하여 오랫동안 간과되었다. 그는 주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2] 2008년 정부는 그에게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하여 그의 업적을 인정했다. 최근 그의 전 시집 번역 출간으로 그의 작품은 한국 밖에도 알려지고 있다.
4. 1. 시집
- 영랑시집 (1935)
4. 2. 주요 시
5. 평가
영랑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김영랑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했다. 그의 시 대부분은 한국 전통의 운율을 탐구하는 동시에 모더니즘을 실험했으며, 독특한 전라도 방언으로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부분적으로 일본의 금지 조치로 인해 애국적인 한국인들이 전통적인 미학을 강조했기 때문이다.[1]
그의 번역가인 태제의 안토니 형제는 김영랑 시인의 명성이 현재 한국에서 커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1919년 잠시 투옥된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억압받지 않았지만, 해방 이후 문단의 영향과 파벌이 형성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정치적 시대에 간과되는 경향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는 수많은 시집에 실린 단 한 편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2] 2008년 정부가 문화예술 분야 최고 영예인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함으로써 그의 업적이 인정받게 되었다. 최근 그의 전 시집 번역이 출간되면서 한국 밖 사람들에게도 그의 작품이 알려지고 있다.
6. 연보
- 1903년 1월 16일,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탑동에서 아버지 김종호와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 1909년, 강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 1915년, 강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 1916년, 김해 김씨 가문의 여성과 결혼했으나, 1년 반 만에 사별했다. 같은 해 상경하여 YMCA에서 영어를 배웠다.
-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 1919년, 3·1 운동에 참여, 강진에서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다 조선총독부 당국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수감되었다.
- 1920년, 일본 도쿄 아오야마가쿠인 중학부에 편입했다.
- 1921년, 성악을 공부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일시 귀국했다.
- 1922년, 아오야마가쿠인 영문과에 입학, 박용철을 만났다.
-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유학을 중단했다.
- 1925년, 개성 호수돈여자학교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 1930년, 박용철, 정지용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 창간호에 13편의 시를 발표했다.
- 1935년, 박용철의 도움으로 『영랑시집』을 간행했다.
- 1945년, 대한독립촉성회 참여, 대한청년단 강진지부장을 역임했다.
- 1948년, 서울 성동구 신당동으로 이사했다.
- 1949년, 공보처출판국 국장을 7개월간 역임했다.
- 1950년 9월 29일, 한국 전쟁 중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유해는 이태원 인근 남산 기슭에 화장되었다가 4년 후 망우리묘지에 안장되었다.
7.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48년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 한국민주당 | 7,405표 (17.46%) | 4위 | 낙선 | 전남 강진군[5] |
참조
[1]
서적
New trends in modern literature
https://books.google[...]
Delhi
2006
[2]
웹사이트
Korean Studies
http://koreanstudies[...]
[3]
웹사이트
김영랑(金永郎)
http://encykorea.aks[...]
2022-08-20
[4]
서적
https://books.google[...]
[5]
뉴스
[총선으로 본 강진정치사]제헌국회(1948.5.31~1950.5.30)
http://www.nsori.com[...]
강진일보
201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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