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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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장제는 명제의 아들로, 19세에 즉위하여 유학을 장려하고 관대한 정치를 펼쳤다. 그의 치세 동안 후한은 안정기를 유지했으며, 경제와 문화가 발전했다. 그는 서역 원정을 중단하고, 반초에게 서역 작전을 맡기는 등 유연한 정책을 펼쳤다. 두황후가 송귀인과 양귀인을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황태자를 폐하는 등 외척 세력의 득세가 시작되었으며, 장제 사후에는 외척의 전횡으로 후한 왕조가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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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장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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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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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제 (章帝) |
전체 시호 | 효장황제 (孝章皇帝) |
개인 이름 | 유달 (劉炟) |
출생 | 56년 |
사망 | 88년 4월 9일 (32세) |
묘호 | 숙종 (肅宗) |
통치 정보 | |
왕조 | 한나라 |
재위 기간 | 75년 9월 5일 – 88년 4월 9일 |
전임자 | 명제 |
후임자 | 화제 |
연호 | 건초 (76년 - 84년) 원화 (84년 - 87년) 장화 (87년 - 88년) |
가계 | |
아버지 | 명제 |
어머니 | 가귀인 |
배우자 | 두황후 공회황후 송귀인 |
자녀 | 화제 유경 |
능묘 | |
능묘 | 경릉 (敬陵) |
2. 생애
명제의 5남으로, 생모는 가귀인이다. 가귀인은 명제의 황후 마황후(마원의 딸)와 사촌 자매처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1]
어릴 적부터 유학을 좋아한 장제는 관대한 성격으로, 유학의 덕목에 맞는 너그러운 덕치를 이끌었다. 장제의 치세에는 큰 내우외환(内憂外患)도 없었기 때문에, 후한은 명제 시대부터 이어진 안정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1]
건초 4년(79년), 스스로 조서를 내려 궁중의 백호관에 유학자를 모아 오경의 이견을 논하게 했다. 스스로 회의에 임석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며, 반고에게 명하여 이 회의를 토대로 고금의 학설을 묶은 『백호통의』를 편집하게 했다.[2]
86년에는 강족 반란이 시작되었는데, 비교적 빨리 진압되었지만, 이후 수십 년 동안 강족은 한나라 관리들에게 학대를 받아 계속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 멸망의 주요 요인이 될 것이었다.
88년 3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태자 유조가 뒤를 이었다.
2. 1. 초기 통치
60년(영평 3년)에 3세의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75년(영평 18년)에 부친 명제가 사망하자 1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동시에 적모인 마황후(광무제의 유력한 부장 마원의 딸)가 황태후로 책봉되어 후견했다.[1]마황후는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친가인 마씨 일족이 고위직에 등용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장제의 시대에는 후한 왕조의 숙폐가 된 외척의 전횡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생모인 가귀인은 명제의 정실 부인인 마황후와 사촌지간으로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지지만, 장제는 어린 시절부터 마씨에게 길러졌기 때문에 마태후에게만 효도를 다했다. 가귀인은 어머니 대접을 받지 못했다.[1]
부친 명제가 법치 정치를 행한 데 반해, 장제는 어린 시절부터 유학을 좋아하여, 유학의 덕목에 맞는 관용적인 덕치 정치를 펼쳤다. 그 때문에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1]
79년, 그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던 마태후가 사망했다. 마태후가 죽은 후에도 장제는 그의 생모인 가귀인을 어머니로 예우하지 않고 단지 황태자의 작위를 갖도록 허락했다.[2]
76년, 그의 조언자 양종(楊終)과 재상 제오륜(第五倫)의 건의에 따라, 장제는 아버지의 서역(현대 신장 및 구 소련 중앙아시아) 원정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서역에 주둔하고 있던 한나라 장군 반초는 서역에서 한나라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철수를 거부했고, 장제는 결국 뜻을 굽혀 반초에게 서역에서의 한나라 작전을 책임지도록 했다.[2]
그의 외삼촌들과 가까웠던 장제는 즉위 초부터 그들을 제후로 봉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마태후는 이를 부적절하다고 여겨 처음에는 거부했다. 그러나 79년, 그는 마태후의 반대와 그들이 임시 제후가 되기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제후로 봉했다.[2]
77년, 장제는 그의 사촌이자 대신 두융 (竇融)의 증손녀인 비양공주(沘陽公主)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했다. 그는 그녀를 매우 사랑했고, 78년에 두후궁을 황후로 책봉했다.[2]
2. 2. 외척 세력의 득세
두황후는 명제의 황후 마황후가 죽자 후궁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유경의 생모 송귀인과 유조를 낳은 양귀인을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1] 또한 태자 유경을 폐하고 유조를 황태자로 세웠다.[1] 88년 장제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자, 불과 10세의 유조가 화제로 즉위했다.[1] 화제의 옹립에 관여한 두씨는 황태후로서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두고를 비롯한 두씨 일족이 권세를 쥐게 되었다.[1] 이로써 후한은 황제의 외척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는 시대에 돌입했다.[1]장제의 치세는 내정은 안정적이었으나, 흉노의 공격으로 서역 지역을 일시적으로 상실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었다.[1] 그러나 이후 반초의 활약으로 서역을 되찾아 통치하게 되었다.[1]
황후 장씨가 사망한 이후에도 장제는 근면한 황제였지만, 궁궐 안에서는 두 황후와 다른 후궁들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고, 이는 장기적으로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다.[1]
마태후가 살아있는 동안, 그녀는 송씨 자매를 장제의 후궁으로 들였다.[1] 78년, 언니인 송귀인이 유칭을 낳았고, 두 황후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79년 유칭이 태자가 되었다.[1]
그러나 79년 이후, 두 황후는 양귀인의 아들 유조를 양자로 입양하고, 자신의 양자를 태자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1] 마태후가 사망한 후, 두 황후는 송씨 일족의 과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송씨 자매의 시종과 환관에게 뇌물을 주어 그들의 과오를 수집하게 했다.[1]
82년, 두 황후는 언니 송귀인이 병에 걸린 틈을 타 새삼을 이용해 마법을 사용했다고 모함했다.[1] 장제는 송씨 자매를 체포하여 채륜에게 심문하게 했고, 송씨 자매는 자살했다.[1] 유칭은 태자에서 폐위되고 유조가 대신 태자가 되었다.[1]
송씨 자매가 죽은 후, 두 황후는 유조의 생모인 양귀인과 그녀의 여동생도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1] 83년, 두씨 일족은 양귀인의 아버지 양숭을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고, 양씨 자매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죽었다.[1]
83년, 장제는 마씨 사촌들의 비행을 보고 마씨 외삼촌들에 대한 총애를 거두고 그들을 변방으로 돌려보냈다.[1] 이후 두 황후의 형제인 두헌과 두독이 권력을 장악했다.[1] 이는 한나라 역사상 태후의 일족이 아닌 황후의 일족이 가장 강력한 외척이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1]
2. 3. 서역 경영
76년, 그의 조언자 양종(楊終)과 재상 제오륜(第五倫)의 건의에 따라, 장제는 아버지 명제의 서역 (신장 및 구 소련 중앙아시아) 원정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서역에 주둔하고 있던 한나라 장군 반초는 서역에서 한나라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철수를 거부했고, 장제는 결국 뜻을 굽혀 반초에게 서역에서의 한나라 작전을 책임지도록 했다.내정은 꽤 잘 다스려지고 있었지만, 원정 쪽에는 후퇴되어, 서역에 대한 흉노의 공격이 격렬해져서 일단은 서역지역을 철수하였고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후 반초의 활약에 의해, 서역은 되찾아 통치하게 되었다.[1]
서역과의 교통은 신의 멸망 이후 후한 초까지 잠시 끊겼지만, 명제 시대에 다시 본격적인 진출이 시작되었다. 장제의 시대에도 흉노와 이에 동조하는 서역 제국과의 싸움이 계속되었고, 장화 원년(87년)에는 반초 등의 활약으로 오랫동안 한에 반항했던 사차를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2]
3. 가족 관계
장덕황후 두씨, 공회황후 양씨, 경은황후 송씨를 황후로 두었다. 이외에 귀인 두씨, 귀인 송씨, 귀인 양씨, 귀인 신씨를 후궁으로 두었다. 장덕황후 두씨는 유강의 딸 비양공주의 딸이다.[4]
아들 8명과 딸 3명을 두었으며, 이들의 생모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3. 1. 자녀
배우자 | 성씨 | 자녀 | 비고 |
---|---|---|---|
장덕황후 두씨 | 부풍 두씨 | 황후 | |
공회황후 양씨 | 안정 양씨 | 한 화제 유조 | 황후 |
경은황후 송씨 | 송씨 | 청하효왕 유경 | 황후, 아들 한 안제 유호 |
귀인 두씨 | 두씨 | 장덕황후 두씨의 언니 | |
귀인 송씨 | 송씨 | 경은황후 송씨의 언니 | |
귀인 양씨 | 양씨 | 공회황후 양씨의 여동생 | |
귀인 신씨 | 신씨 | 제북혜왕 유수, 하간효왕 유개 | 아들 소황제 유의, 손자 효숭황제 유익(한 환제의 아버지), 손자 효원황제 유숙(한 영제의 조부) |
미상 | 성양회왕 유숙, 광종상왕 유만세, 무덕공주 유남, 평읍공주 유왕, 음안공주 유길 |
4. 연호
5. 평가
어릴 적부터 유학을 좋아했던 장제는 관대한 성격으로, 유학의 덕목에 맞는 너그러운 덕치(德治)를 펼쳤다. 장제의 치세에는 큰 내우외환(内憂外患)도 없었기 때문에, 후한은 명제의 시대부터 이어져 온 안정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1]
그러나 장제의 시대는 외척 세력이 후한 역사에서 처음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황후 두씨는 마황후가 죽은 뒤 후궁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태자 유경의 생모 송귀인과 태자 유조를 낳은 양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태자를 폐하고 유조를 황태자로 세웠다. 88년 장제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자, 불과 10세였던 유조가 화제로 즉위했다. 화제의 옹립에 관여한 두씨는 황태후로서 어린 황제를 대신해 정권을 장악했고, 그 친족인 두고를 비롯한 두씨 일족이 권세를 쥐게 되었다. 이로써 후한은 황제의 외척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는 시대에 들어섰다.[1]
내정은 꽤 잘 다스려졌지만, 원정에서는 후퇴를 보였다. 서역에 대한 흉노의 공격이 격렬해져 일단 서역 지역을 철수했고,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후 반초의 활약으로 서역을 되찾아 통치하게 되었다.[1]
장제는 황제로서 아버지의 근면한 성향을 이어받았지만, 엄격했던 아버지보다 더 관대했다. 그는 정직한 관료들을 찾아 승진시켰고,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했다. 또한 대체로 겸손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충실하게 섬긴 원로 관료들을 존경했다.[1]
76년, 장제는 조언자 양종(楊終)과 재상 제오륜(第五倫)의 건의에 따라, 아버지의 서역(현대 신장 및 구 소련 중앙아시아) 원정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서역에 주둔하고 있던 한나라 장군 반초는 서역에서 한나라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철수를 거부했고, 장제는 결국 뜻을 굽혀 반초에게 서역에서의 한나라 작전을 책임지도록 했다.[1]
86년에는 첫 번째 강족(羌) 반란이 시작되었는데, 비교적 빨리 진압되었지만, 이는 향후 수십 년 동안 불길한 징조가 되었다. 강족은 한나라 관리들에게 자주 학대를 받았고, 동한 왕조의 나머지 기간 동안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 멸망의 주요 요인이 될 것이었다.[1]
참조
[1]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2]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3]
서적
後漢書
[4]
서적
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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