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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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화제는 후한 장제의 서자로 태어나 9세의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외척인 두헌이 정권을 장악했으나, 화제는 성장하며 두씨 일족의 전횡에 반감을 품고 환관 정중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친정을 시작했다. 이후 흉노 정벌, 서역 경영 등 외치와 문화 발전에 힘썼으며, 특히 채륜의 제지술 개량과 반고의 한서 편찬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화제 사후 어린 상제가 즉위하고 등태후가 섭정하면서 외척과 환관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며 후한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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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화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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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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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조(劉肇) |
휘 | 유조(劉肇) |
묘호 | 목종(穆宗) 190년 폐지 |
시호 | 효화황제(孝和皇帝) |
생년 | 79년 |
몰년 | 106년 2월 13일 |
아버지 | 장제 |
어머니 | 양귀인(梁貴人) |
배우자 | 음황후 등황후 |
통치 정보 | |
왕조 | 후한 |
재위 기간 | 88년 4월 9일 - 106년 2월 13일 |
연호 | 영원(89년 - 105년) 원흥(105년) |
즉위 | 88년 4월 9일 |
퇴위 | 106년 2월 13일 |
수도 | 낙양(雒陽) |
능묘 | 신릉(愼陵) |
계승자 | 상제 |
이전 통치자 | 장제 |
기타 정보 | |
존호 | 화제(和帝) |
2. 생애
장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귀인 양씨(貴人梁氏)였다. 이복형 청하효왕을 대신하여 태자가 되었다. 88년 9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이후 어린 황제가 계속 즉위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후한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어린 화제 대신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황태후의 오빠인 두헌(竇憲)이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했다. 두헌은 흉노 토벌에서 전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다.
화제는 성장하면서 두씨 일족의 전횡에 반감을 품고 실권을 되찾고자 했다. 두헌 역시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화제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화제는 환관 정중과 협력하여 두씨 일족을 제거하고 친정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정중은 비밀리에 모의를 할 수 있고, 뛰어난 인물이며 눈썰미도 있었고, 두뇌가 명석해 행동력도 있다고 알려져 있어 화제의 모신으로 선택되었다.
92년, 화제는 정중 등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두헌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대장군의 인수(印綬)를 빼앗고 실권을 박탈한 뒤, 영지로 보내 자살을 명했다. 이로써 두씨 일족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실권을 되찾았다. 정중은 이 공적으로 단향후(鄲郷侯)에 봉해지고 대장추(大長秋) 직책을 받았다. 화제는 이후에도 정중을 신임하여 측근 정치를 펼쳤는데, 이는 후한에서 환관의 횡포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외정 면에서는 후한 시대 중 가장 활발한 시기로, 서역의 50여 개국이 후한에 복종했다. 이러한 성공은 반초의 역량에 힘입은 바가 컸으며, 반초 사후 서역에서 후한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해졌다. 문화적으로는 반고, 반소 남매에 의한 『한서』(漢書) 성립(92년)과 채륜에 의한 제지법 개량(105년)이 주목할 만하다.
2. 1. 출생과 성장
장제의 넷째 아들로, 생모는 귀인 양씨(貴人梁氏)였다. 79년(건초 4년)에 태어났다. 생모 양귀인은 궁중 권력 다툼 속에서 장제의 황후 두씨에게 살해당했다.두황후는 아들이 없었기에, 장제가 총애하던 황자 조(화제)를 양자로 삼았다. 이는 시어머니 마황후가 명제의 후궁 가귀인에게서 태어난 장제를 양자로 삼았던 것을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1]
황자 조가 태어났을 당시, 다른 후궁 송귀인에게서 태어난 형 유청은 이미 황태자로 책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두황후는 자신의 양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고, 장제의 총애를 두고 경쟁하던 송귀인과 그 여동생을 제거하려 했다.[1]
82년(건초 7년), 두황후는 송귀인이 병에 걸려 새삼을 구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주술에 사용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장제는 크게 분노하여 황태자 청을 폐위하고 청하왕으로 강등시켰으며, 송귀인과 그 여동생은 채륜의 심문을 받다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황자 조는 황태자가 되었지만, 형 유청과 우애가 깊어 자주 함께 시간을 보냈다.[1]
두황후는 황자 조의 생모 양귀인과 그 여동생도 모함하여 장제의 총애를 잃게 만들었다. 83년, 두씨 일족은 양귀인의 아버지 양송(梁竦)을 익명으로 고발하여 감옥에서 죽게 만들었고, 두 양귀인 자매 역시 슬픔과 두려움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1]
88년(장화 2년), 장제가 사망하자 황태자 조는 아홉 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2. 2. 즉위와 두씨 일족의 섭정
88년 9세의 어린 나이로 화제가 즉위하면서, 후한은 어린 황제가 계속 즉위하는 상황에 놓이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1] 9살 아이에게 정치를 맡길 수 없었기에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황태후의 오빠인 두헌이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다.[1] 두헌은 흉노 토벌에서 전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다.[1]한 광무제 시대 이후 흉노는 남흉노와 북흉노로 나뉘었는데, 남흉노는 후한에 충성하는 제후국이었고 북흉노는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이었다.[3] 두헌은 두태후의 허락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89년에 북흉노를 격파했다.[3] 91년에는 북흉노에 대한 또 다른 주요 승리를 거두어 북흉노를 사실상 정치적 실체에서 지워버렸다.[3]
이러한 승리 이후 두헌은 더욱 오만해졌고, 두태후의 지지를 다시 얻어 정부를 완전히 장악했다.[3] 모든 반대하는 관리들은 좌천되거나 심지어 죽음의 위협에 직면했다.[3] 화제는 성장하면서 두씨 일족의 전횡에 반감을 품고 실권을 되찾으려 했고, 두헌 등도 이를 눈치채고 화제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4]
2. 3. 쿠데타와 친정 시작
장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화제는 이복형 청하효왕을 대신하여 태자가 되었고, 88년 9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1] 이 때문에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두태후의 오빠인 두헌이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했다.[1]화제는 성장하면서 두씨 일족의 전횡에 반감을 품고 실권을 되찾고자 했다.[1] 두헌 역시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화제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1] 이에 화제는 환관 정중과 협력하여 두씨 일족을 제거하고 친정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1]
화제가 정중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1]
- 환관은 비밀리에 모의를 진행하기에 유리했다.
- 정중은 뛰어난 인물로, 눈썰미가 좋고 명석하여 행동력이 있었다.
- 정중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두텁고 사심이 없었다.
92년, 화제는 정중 등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4] 두헌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대장군의 인수(印綬)를 빼앗고 실권을 박탈한 뒤, 영지로 보내 자살을 명했다.[1] 이로써 두씨 일족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실권을 되찾았다.[1]
정중은 이 공적으로 단향후(鄲郷侯)에 봉해지고 대장추(大長秋) 직책을 받았다.[1] 화제는 이후에도 정중을 신임하여 측근 정치를 펼쳤는데, 이는 후한에서 환관의 횡포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1]
2. 4. 환관 정치와 외척 세력의 발호
장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화제는, 이복형 청하효왕을 대신하여 태자가 되고 88년 9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고, 황태후의 오빠인 두헌이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다. 두헌은 흉노 토벌에서 전공을 세워 대장군이 될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다.화제는 나이가 들면서 두씨 일족의 전횡에 반감을 품고 실권을 되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눈치챈 두헌은 화제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화제는 환관 정중과 함께 두씨 일족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정중은 비밀리에 모의를 할 수 있고, 뛰어난 인물이며 눈썰미도 있었고, 두뇌가 명석해 행동력도 있다고 알려져 있어 화제의 모신으로 선택되었다.
92년, 화제는 두헌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대장군의 인수(印綬)를 빼앗고 실권을 박탈한 뒤, 영지로 보내 자살을 명했다. 이로써 두씨 일족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실권을 되찾는 데 성공하였다. 정중은 이 공적으로 단향후(鄲郷侯)에 봉해지고, 대장추(大長秋)의 직책을 받았다. 그 후에도 화제의 신임을 받아, 후한에서 환관 정치의 시작점이 되었다. 정중 자신은 정치적으로 유능하고 사심이 없는 인물이었기에, 그가 정치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문제가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그 이후의 환관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무능하고 금전에 탐욕스러운 인물이 많아, 그들의 횡포로 정치 부패가 심각해졌다.[3]
화제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어린 황제를 보좌하기 위해 화제의 황후인 등씨(鄧氏) 일족이 외척으로서 정치 실권을 쥐면서 외척 세력이 다시 발호하였다. 이후 후한에서는 어린 황제가 계속 즉위하면서 외척 세력과 환관 세력 간의 격렬한 다툼이 계속되었다.[3]
3. 치세와 정책
장제의 서자로 태어난 화제는 9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두태후의 오빠인 두헌은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흉노 토벌에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다.[2] 화제는 나이가 들면서 두씨 일족에게 반감을 품고 권력을 되찾고자 했다. 92년, 환관 정중과 함께 두헌을 제거하고 실권을 되찾았다. 정중은 이 공으로 단향후에 봉해지고 대장추 직책을 받았다. 이 사건은 후한에서 환관의 횡포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2]
외정 면에서는 반초의 활약으로 서역 50여 개국이 후한에 복속하는 등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그러나 반초가 은퇴한 후 서역에서 후한의 영향력은 약해졌다.[2] 문화적으로는 반고, 반소 남매의 『한서』 완성(92년)과 채륜의 제지법 개량(105년)이 주목할 만하다.[2]
3. 1. 내치
장제의 서자이자 넷째 아들로 태어난 화제는 귀인 양씨 소생이었다. 생모 양귀인은 궁중 암투 속에서 장제의 황후 두씨에게 살해당했다. 이복형 청하효왕이 폐위되자 태자가 되었고, 88년 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황제가 직접 정치를 할 수 없었고, 두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외척인 두헌이 정권을 장악했다.[2]화제는 나이가 들면서 두씨 일족에게 반감을 품고 자신의 권력을 되찾고자 했다. 92년, 화제는 환관 정중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두헌을 궁궐로 불러들여 대장군의 인수를 빼앗고 영지로 보내 자결하게 했다. 이로써 두씨 일족을 정권에서 몰아내고 실권을 되찾았다. 정중은 큰 공을 세워 단향후에 봉해지고 대장추 직책을 받았다. 이후에도 화제는 정중을 신임하여 측근 정치를 펼쳤는데, 이는 후한에서 환관의 횡포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2]
두씨를 상대로 한 쿠데타 이후, 화제는 실제로 권력을 잡은 것으로 보였다. 두태후는 모든 권력을 잃었다. 화제는 정중과 청왕을 신뢰하여 조언자로 삼았는데, 이는 동한 왕조의 나머지 기간 동안 환관들이 정부 문제에 관여하는 추세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02년, 정중은 전례 없는 조치로 제후에 봉해졌다. 쿠데타 이후, 두헌의 수석 보좌관이자 두헌의 독재에 공모했던 것으로 보이는 역사학자 반고와 무장군 사령관 송유를 포함하여 두씨의 협력자로 지목된 수많은 관리들이 체포되거나 직위에서 해임되었다.[2]
화제의 치세는 일반적으로 큰 부패가 없는 시기였으며, 젊은 황제는 겸손하고 소탈했다. 그는 또한 백성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백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선정을 펼치는 면에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보다 부족하여 황제로서 뚜렷한 특징을 보이지는 못했다.[2]
97년 두태후가 사망한 후, 관리들은 화제에게 친어머니가 양귀인임을 밝혔다. 화제는 양씨 형제들을 찾아 높은 벼슬을 내렸고, 이후 양씨는 동한 귀족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씨족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친어머니에게 황후 칭호를 추존했다. 그러나 두태후를 강등하라는 제안은 거부하고, 아버지 장제와 함께 황제의 예우로 장례를 치렀다.[2]
3. 2. 외교와 서역 경영
영원 6년(94년), 서역도호 반초의 활약으로 서역 50여 개국이 후한에 복속하였다. 그러나 반초가 중앙으로 소환된 후 후한의 서역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했다.[2] 흉노와의 관계는 흉노 내분으로 후한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7년, 반초는 감영을 로마 제국에 파견했으나, 감영은 파르티아 제국의 페르시아 만으로 추정되는 해안에 도착한 후 되돌아갔다.[2]3. 3. 강족 문제
강족의 반란은 후한 시대에 지속적으로 발생했으며, 후한 화제의 통치 기간에도 발생했다. 이 반란은 후한 장제 통치 기간에 처음 시작되었지만, 화제의 치세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3] 92년, 강족 업무를 담당하던 관료 등훈(鄧訓)이 사망하자, 등훈의 훌륭한 통치 전술로 진압된 것으로 보였던 강족은 새로운 관료 섭상(聶尚)이 의도치 않게 강족 추장 미당(迷唐)을 불쾌하게 만들어 미당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3] 93년, 강족 업무를 담당하는 새로운 관료 관우(貫友)는 다른 부족들을 미당으로부터 이간질하여 미당을 격파할 수 있었지만, 미당은 체포되지 않고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남았다.[3] 관우의 죽음 이후, 그의 후임 사충(史充)은 미당에게 큰 손실을 입었다.[3] 그러나 미당은 98년 동맹군이 고갈된 후 항복했고, 화제는 그 해 미당을 공식적으로 알현했다.[3] 100년, 미당은 한 관료들이 그에게 먼 거리를 이동하도록 명령한 의도(척박한 토지에서 살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지역이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유)를 의심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3] 그러나 미당은 남은 생애 동안 성가신 존재였을 뿐, 주요 위협은 아니었다.[3]3. 4. 황후들과의 관계
광무제의 황후 음려화의 형제 후손인 음귀인은 96년에 황후로 책봉되었다. 음황후는 아름다웠지만 키가 작고 질투심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화제의 총애를 받던 등수를 질투했다. 등수는 광무제의 재상 등우(鄧禹)의 손녀로, 음황후 앞에서 겸손하게 행동했지만 오히려 음황후의 분노를 샀다.[2]화제가 병이 들었을 때, 음황후는 자신이 황태후가 되면 등씨 가문을 몰살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등수는 자살을 고려했지만, 시녀의 거짓말로 목숨을 건졌다. 102년, 음황후와 그녀의 할머니 등주(鄧朱)는 마법으로 후궁들을 저주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등씨 부인과 아들들, 음황후의 오빠 음보(陰輔)는 심문과 고문 끝에 사망했다. 음황후는 폐위되었고, 아버지 음강(陰綱)은 자살했으며, 나머지 가족은 유배되었다. 음황후 역시 슬픔 속에 죽었다.[2]
음황후가 폐위된 후, 등수가 황후로 책봉되었다. 등황후는 황후가 된 후에도 화제가 오빠들을 승진시키려는 것을 계속 거절하여, 화제 재위 기간 동안 등씨 가문은 큰 권력을 갖지 못했다.[2]
4. 문화적 업적
반고와 반소 남매는 한서를 편찬하였고, 채륜은 제지법을 개량하여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1]
4. 1. 『한서』 편찬
반고와 반소 남매는 한서를 편찬하였다.[1] 반고가 영원 4년(92년)에 사망하자, 반소가 작업을 이어받아 완성하였다.[1] 이 시기에는 채륜이 영원 17년(105년)에 제지법을 개량하기도 하였다.[1]4. 2. 채륜의 제지술 개량
채륜은 영원 17년(105년)에 제지법을 개량하였다.[1]이는 후한 시대의 중요한 문화적 성과 중 하나이다.
4. 3. 두 아들과 후계자 선정
劉勝|유승중국어과 劉隆|유륭중국어은 후한 화제의 두 아들이다. 화제는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린 나이에 죽었다.[3] 화제 말년에 얻은 두 아들 유승과 유륭은 어머니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당시 미신에 따르면, 다른 형제들이 요절했기 때문에 이 두 아들은 궁궐 밖에서 양부모에게 맡겨져 자라야 더 잘 생존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106년 2월, 화제가 사망했다. 당시 장남 유승은 어린 나이였고(정확한 나이는 기록되지 않음), 병약하다고 알려졌다. 반면 차남 유륭은 겨우 100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등황후는 유륭이 더 건강하다고 판단하여 그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화제가 죽은 밤, 유륭은 상제로 즉위했다. 106년 4월 27일,[3] 화제는 매장되었고 묘호는 '''목종'''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상제는 겨우 한 살밖에 살지 못하고 106년 9월에 사망했다. 상제가 죽은 후, 등태후는 유승이 자신을 황제로 삼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할 것을 우려하여 유승 대신 청왕의 아들 劉祜|유호중국어를 안제로 옹립했다.
190년, 한나라 헌제 치세 동안 화제의 묘호는 폐지되었다.[4]
4. 4. 상제의 죽음과 안제의 즉위
등황후와 다른 황후들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 화제는 어린 나이에 죽은 여러 아들이 있었지만, 음황후 또는 등황후가 아이를 낳았는지는 불분명하며, 낳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화제의 말년에 그는 두 아들 유승(劉勝)과 유륭(劉隆)을 두었는데, 이들의 어머니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당시 미신에 따르면, 다른 형제들이 요절했기 때문에 이 두 아들은 궁궐 밖에서 양부모에게 맡겨져 자라면 더 잘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06년 2월, 화제가 사망했다. 당시 장남 유승은 어린 나이였고(실제 나이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음), 병약하다고 여겨졌다. 차남 유륭은 겨우 100일이었다. 두 아들은 모두 궁궐로 돌아왔고, 등황후는 유륭이 더 건강할 것이라고 믿고 그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화제가 죽은 밤, 유륭은 상제로 즉위했다. 106년 4월 27일,[3] 화제는 매장되었고 묘호는 "'''목종'''"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상제는 한 살을 겨우 넘기고 106년 9월에 사망했다. 상제의 죽음 이후, 등태후는 유승이 자신을 황제로 삼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할까 봐 두려워 그를 황제로 옹립하는 것을 거부하고, 청왕의 아들 유호(劉祜)를 안제로 옹립했다.
190년, 한나라 헌제 치세 동안 화제의 묘호는 폐지되었다.[4]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부황 | 후한 장제 유달 | 제3대 황제 |
모후 | 장덕황후 두씨 | 양모 |
생모 | 귀인 양씨 | 사후 공회황후로 추존 |
이모 | 귀인 양씨 | 후한 장제의 후궁, 생모 양귀인의 친언니 |
이복형 | 천승정왕 유항 | 제10대 질제의 조부 |
이복형 | 덕제 | 추존, 제7대 안제의 아버지 |
황후 | 폐후 음씨 | |
황후 | 화희황후 등씨 | |
후궁 | 귀인 주씨 | |
후궁 | 귀인 풍씨 | |
장남 | 평원회왕 유승 | 생모 미상 |
차남 | 상제 유융 | 생모 미상, 화희황후 등씨의 양자 |
장녀 | 수무공주 유보 | 생모 미상 |
차녀 | 공읍공주 유성 | 생모 미상 |
3녀 | 임영공주 유리 | 생모 미상, 마후(摩侯) 가건과 결혼[1] |
4녀 | 문희공주 유흥 | 생모 미상 |
기타 | 아들 10명 | 모두 요절, 생모 미상 |
6. 연표
서력 | 간지 | 연호 | 주요 사건 |
---|---|---|---|
89년 | 기축(己丑) | 영원 원년 | 두헌이 이끄는 후한군이 북흉노를 격파함. |
90년 | 경인(庚寅) | 영원 2년 | |
91년 | 신묘(辛卯) | 영원 3년 | 두헌이 이끄는 후한군이 북흉노에 다시 큰 승리를 거두어, 북흉노가 사실상 멸망함. |
92년 | 임진(壬辰) | 영원 4년 | |
93년 | 계사(癸巳) | 영원 5년 | |
94년 | 갑오(甲午) | 영원 6년 | |
95년 | 을미(乙未) | 영원 7년 | |
96년 | 병신(丙申) | 영원 8년 | |
97년 | 정유(丁酉) | 영원 9년 | |
98년 | 무술(戊戌) | 영원 10년 | |
99년 | 기해(己戌) | 영원 11년 | |
100년 | 경자(庚子) | 영원 12년 | |
101년 | 신축(辛丑) | 영원 13년 | |
102년 | 임인(壬寅) | 영원 14년 | |
103년 | 계묘(癸卯) | 영원 15년 | |
104년 | 갑진(甲辰) | 영원 16년 | |
105년 | 을사(乙巳) | 영원 17년, 원흥 원년 |
7. 평가
화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정치는 두태후와 그녀의 오빠 두헌을 비롯한 외척 세력에 의해 좌우되었다.[1] 두헌은 권력을 남용하여 반대파를 숙청하고, 독향후 유창을 암살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1]
그러나 두헌은 북흉노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워 두태후의 신임을 회복하고 더욱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1] 91년에는 북흉노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는 대승을 거두면서, 두헌은 사실상 정부를 장악하고 모든 반대 세력을 억압했다.[1] 이러한 외척 세력의 전횡은 후한의 정치적 안정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참조
[1]
서적
xinwei day of the 12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uan'xing era, per Emperor He'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2]
서적
Thornton 1844
https://books.google[...]
[3]
서적
jiashen day of the 3rd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an'ping era, per Emperor Shang'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4]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vol.09
[5]
서적
後漢書』巻4、孝和孝殤帝 劉肇 紀第四
[6]
서적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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