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몽재 유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훈몽재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 김인후가 을사사화를 피해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장소로, 현재는 복원되어 교육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인후는 1548년 훈몽재를 짓고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했으며, 훈몽재 동쪽 추령천변의 바위에 그의 문하생 정철이 '대학암'을 새기기도 했다. 훈몽재는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으나, 2009년 복원되었으며, 김인후는 호남 성리학의 중심지로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없어진 건축물 - 곤지암 남양신경정신병원
곤지암 남양신경정신병원은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했던 폐업한 병원이며, CNN 선정 이후 공포 체험 방문객 증가로 지역 주민들이 불편을 겪었고, 드라마와 영화에 등장하며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 대한민국의 없어진 건축물 - 중앙데파트
대전천 복개지에 건설되었던 중앙데파트는 철거 후 목척교 복원 사업을 통해 지역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형 유통 매장이었다. - 순창군의 문화유산 - 신경준 고지도
신경준 고지도는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이 제작한 고지도를 통칭하며, '북방강역도'와 '강화도 이북해역도'가 대표적이고, 18세기 조선의 지리학적 지식과 측량 기술을 보여주며 국방 정책 수립과 영토 의식 강화에 기여했다. - 순창군의 문화유산 - 순창 합미성
순창 합미성은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시대에 군량미 저장 용도로 사용되었고, 내성과 외성을 갖춘 구조적 특징을 보인다. - 전북특별자치도의 문화유산자료 - 광제정
광제정은 조선 초 양돈이 지어 그의 호를 딴 이름으로 불리게 된 광양의 정자로, 택지 개발로 위치가 이전되었으며, 양돈의 후손이 다시 지었고, 내부에 온돌방과 현판들이 걸려 있으며, 광산김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향사례를 지낸다. - 전북특별자치도의 문화유산자료 - 오괴정
인공지능은 기계가 인간의 지능적인 행동을 모방하거나 수행하는 기술 및 연구 분야로, 머신러닝과 딥 러닝 기술 발전을 통해 이미지 인식, 자연어 처리 등 복잡한 문제 해결에 기여하며 윤리적, 사회적 영향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훈몽재 유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훈몽재 유지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
유형 | 문화재자료 |
지정번호 | 189 |
지정일 | 2012년 11월 2일 |
주소 |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2길 83 |
2. 생애
하서 김인후는 1510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태어나 조선 중기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활동했다.[1]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이황과 교류했다. 1540년 문과에 급제, 1541년 사가독서를 하고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 1543년 세자시강원 설서로서 인종을 가르쳤고,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 검토관으로 기묘명현의 신원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옥과현감으로 부임했다.[1]
1545년 인종 승하와 을사사화 발생 후, 사직하고 고향 장성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2]
2. 1. 출생과 가계
하서 김인후는 조선 중기 대표적 성리학자로, 1510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출생하였다.[1]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 이황을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1]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되었다.[1] 1541년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였다.[1] 이후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1]2. 2. 관직 생활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 이황을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되었다. 1541년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하였다. 이후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어 당시 세자이던 인종을 가르쳤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 검토관이 되어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을 문신으로서 처음 개진하였다. 그러나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같은 상황을 견딜 수 없어 하며 연로하신 부모 봉양을 청하여 그해 겨울 12월 고향과 가까운 옥과현감에 제수되었다.
2. 3. 낙향과 훈몽재
1545년 인종이 즉위한 후 8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자, 이에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발작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였다. 곧이어 을사사화가 발생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2]1548년(명종 3) 문정왕후를 위시한 집권 세력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를 피해 처의 고향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은거하여 초당을 짓고 편액을 훈몽(訓蒙)이라 걸고 제자 월계 조희문을 비롯한 고암 양자징, 금강 기효간, 영웅 이지남 등과 강학하며 쉬고 노닐었다.
동쪽 추령천변에는 수십 인이 앉을 만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훗날 문하생이었던 송강 정철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바위에 『大學巖』을 각자하였다고 한다.[2] 세상이 이를 『대학암』이라 일컫는다.
하서 김인후는 자연에 귀의하여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은 태평스러웠다.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시(詩)가 『자연가』이다.
3. 훈몽재와 대학암
1548년(명종 3) 하서 김인후는 을사사화를 피해 처가인 순창군 쌍치면에 은거하며 초당을 짓고 훈몽(訓蒙)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논하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았다. 훗날 그의 제자 송강 정철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근처 바위에 '大學巖'(대학암)을 새겼다.[2]
김인후는 자연에 귀의하여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은 태평스러웠다.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시가 『자연가』이다.
1549년(명종 4) 봄, 김인후는 《대학강의》 발문을 짓고,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를 수정 보완한 《천명도》를 저술하여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해 10월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 장성군으로 돌아갔다.[3]
3. 1. 훈몽재
1548년(명종 3) 문정왕후를 위시한 집권 세력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김인후는 이를 피해 처의 고향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초당을 짓고 훈몽(訓蒙)이라 편액을 걸었다. 이곳에서 제자 월계 조희문을 비롯한 고암 양자징, 금강 기효간, 영웅 이지남 등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다.[2]동쪽 추령천변에는 수십 명이 앉을 만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훗날 김인후의 문하생이었던 송강 정철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바위에 '大學巖'(대학암)을 새겼다고 한다.[2]
김인후는 자연에 귀의하여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은 태평스러웠다고 한다.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시가 '자연가'이다.[2]
3. 2. 대학암
동쪽 추령천변에는 수십 인이 앉을 만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훗날 김인후의 문하생이었던 송강 정철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바위에 ‘대학암(大學巖)’을 새겼다고 한다.[2] 세상 사람들은 이를 ‘대학암’이라 부른다.4. 학문적 업적
김인후는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여 조선 성리학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특히 정지운의 《천명도》를 수정 보완하고, 《대학강의》 발문을 짓는 등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3]
4. 1. 성리학 연구
1549년(명종 4) 봄 2월 《대학강의》 발문을 짓고,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를 얻어 보고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한 《천명도》를 저술하여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3]4. 2. 주요 저술
1549년(명종 4) 봄 2월, 김인후는 《대학강의》 발문을 짓고,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를 수정 보완하여 《천명도》를 저술하였다. 이 저술에서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하여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3]5. 복원 사업과 역사적 가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훈몽재는 1680년경 김인후의 5세손 김시서가 김인후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다시 지었다.[4] 1827년(순조 27) 후손과 순창 유림들이 어암서원을 건립하고 김인후를 중심으로 이이, 정철, 김시서를 모셨다. 훈몽재 재실은 1840년(헌종 6)에 완성되었다. 이후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중건되었으나 1951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2003년 강인형 순창군수가 '훈몽재 복원사업'을 추진, 김상열이 부지를 순창군에 기부하여 2009년 훈몽재와 자연당, 양정관, 삼연정으로 이어지는 목조 한옥을 복원하였다.[5],[3] 2011년 1월부터 김충호가 훈몽재 산장을 운영하며 예절교육, 한학 교육, 숙박공간을 제공하고, 2013년에는 양생당도 건립했다.[6]
훈몽재는 조선 중기 호남 성리학을 이끈 김인후의 교육 관련 유적지로서, 전북 지역 유학 발달사에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5. 1. 복원 사업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훈몽재는 1680년경 김인후의 5세손인 김시서가 장성에서 이곳으로 와 김인후의 학문을 계승하고자 다시 지었다.[4] 시간이 흘러 훈몽재가 낡자 1827년(순조 27) 후손과 순창 유림들이 힘을 합쳐 1831년(순조 31) 어암서원을 건립하고 김인후를 중심으로 이이, 정철, 김시서를 모셨다. 훈몽재의 재실은 1840년(헌종 6)에 완성되었다. 이후 1864년(고종 1)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다시 지어졌으나 1951년 한국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었다.2003년 강인형 순창군수가 김인후의 정신과 가르침을 계승하고 역사적 가치를 관광자원으로 만들기 위해 '훈몽재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지역 출신이자 후손인 김상열이 김인후가 《대학》을 가르치던 대학암 근처 '훈몽재 유지'로 추정되는 부지를 순창군에 기부하여 6년에 걸쳐 2009년 훈몽재와 자연당, 양정관, 삼연정으로 이어지는 목조 한옥을 복원하였다.[5],[3]
2011년 1월부터 김충호가 훈몽재 산장을 운영하며 예절교육 및 한학 등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숙박공간도 마련되어 있으며, 2013년에는 교육시설과 취사장을 갖춘 양생당도 건립했다.[6]
5. 2. 역사적 가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80년경 김인후의 5세손인 자연당 김시서가 장성에서 이곳에 은거하여 선조 하서 김인후의 유업을 계승하고자 훈몽재를 다시 짓고, 그 옆에 초당 자연당을 지어 학문을 닦으며 명사들과 교류하였다.[4]훈몽재는 조선 중기 호남 성리학을 이끌어간 대표적 학자인 하서 김인후의 교육 관련 유적지로서, 전북 지역 유학 발달사에 있어서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6. 김인후에 대한 현대적 평가
하서 김인후는 조선 중기 호남 성리학을 이끈 대표적인 학자이며, 그의 교육 관련 유적은 전북 지역 유학 발달사에서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1]
참조
[1]
간행물
전라북도 고시 제2012-278호, 《전라북도 문화재(민속문화재,문화재자료) 지정고시》
http://www.jeonbuk.g[...]
전라북도지사
2012-11-02
[2]
문서
[3]
뉴스
훈몽재 유지, 도 문화재자료 지정
http://www.sjbnews.c[...]
새전북신문
2012-11-06
[4]
문서
[5]
문서
[6]
뉴스
(온누리) 순창 훈몽재(訓蒙齋)
http://www.sjbnews.c[...]
새전북신문
2014-05-08
[7]
웹사이트
디지털순창문화대전
http://sunchang.gra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