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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오 드 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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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훌리오 데 카로는 아르헨티나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이며, 탱고 음악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클래식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1923년 형 프란시스코 데 카로와 함께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훌리오 데 카로 악단은 탱고 음악의 편곡을 중시하며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했고, 1930년대에는 스윙 재즈를 시도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1954년 은퇴 이후에도 탱고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8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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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오 드 카로
기본 정보
사바토 벤 몰라르 데 카로
제일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 훌리오 데 카로임.
본명훌리오 데 카로
출생1899년 12월 11일
사망1980년 5월 11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지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적아르헨티나
활동 기간1924년 - 1954년
악기지휘, 바이올린
장르탱고
직업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2. 생애와 경력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산 텔모 지역에서 음악원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형제들과 함께 음악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탱고에 매료되어[2] 1917년 에두아르도 아롤라스 오케스트라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탱고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1] 이후 형 프란시스코와 함께 아롤라스 악단에서 활동하며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등지에서 공연하고 여러 곡을 작곡했다.

1919년 아롤라스 그룹을 떠난 뒤 잠시 사중주를 결성했고, 이후 오스발도 프레세도 악단에 합류하여 미국 투어를 다녀오거나 몬테비데오에서 활동했다. 1923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후안 카를로스 코비안 악단을 거쳐 1924년 자신의 이름을 딴 훌리오 데 카로 육중주단을 결성했다. 이 악단은 혁신적인 편곡과 연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라디오 방송과 RCA 빅터 음반 발매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특히 스트로 바이올린을 활용한 독특한 사운드가 특징이었으며, 웨일스 공 에드워드 등 유명 인사 앞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1931년 프랑스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귀국 후 콜론 극장, 테아트로 오페라 등 주요 무대에서 탱고 역사를 조망하는 공연을 선보였다. 이 시기에 부모님과 화해하기도 했다. 그의 오케스트라는 오랫동안 탱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며 에드문도 리베로 같은 후배를 발굴하기도 했으나, 1954년 공식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1975년 기념 앨범 ''Los 14 de Julio de Caro''를 발표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의 생일인 12월 11일을 '국가 탱고의 날'로 지정했다. 1980년 3월 11일 마르델플라타에서 80세로 사망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차카리타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친척 중에는 시인 훌리아 데 카로와 미국 펜싱 선수 나탈리 훌리아 비에가 있다.

2. 1. 초기 생애 ( ~ 1919년)

훌리오 드 카로는 음악원을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1913년 산 텔모 지역에 음악원을 열었으며, 이곳은 곧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음악, 악기, 부품, 레슨으로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훌리오는 형 프란시스코와 함께 각각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으나, 나중에는 서로 악기를 바꾸어 연주했다. (셋째 동생 에밀리오는 바이올린을 배웠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훌리오는 탱고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1915년 사르수엘라 공연을 위해 로레아 극장에서 두 번째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으며, 아버지의 처벌을 감수하며 형 프란시스코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인기 있는 탱고 리사이틀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밴드 리더 에두아르도 아롤라스, 후안 카를로스 코비안, 로베르토 피르포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2]

1917년, 친구들의 권유로 훌리오는 우아한 다목적 장소인 팔레 드 글라스에서 열린 탱고 공연 중 무대에 올랐다. 로베르토 피르포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악기를 빌려 연주했으며, 그의 공연은 청중으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이를 본 에두아르도 아롤라스는 자신의 오케스트라에 영입을 제안했다.[1] 그러나 대중음악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버지는 이를 반대했다. 결국 훌리오는 아버지 몰래 아롤라스 오케스트라에 합류했고, 그를 위해 첫 탱고 곡인 'Mon beguin'을 작곡했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깊어져 18세에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는 형 프란시스코가 동생을 따라 아롤라스 오케스트라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제는 아롤라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아르헨티나와 인접한 우루과이에서 성공적인 순회 공연을 펼쳤다. 이 시기에 형제는 여러 탱고 곡을 작곡하며 명성을 쌓았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Mala pinta(그늘진 모습), Mi encanto(나의 매력), Pura labia(모든 말), Don Antonio, A palada(삽으로), Era buena la paisana(그녀는 좋은 시골 소녀였다), Percanta arrepentida(후회하는 소녀), Bizcochito(작은 비스킷), Gringuita(금발), La cañada(개울) 등이 있다.

1919년, 사업상의 불화로 인해 훌리오 데 카로와 피아니스트 호세 마리아 리추티는 아롤라스 그룹을 떠났다. 그들은 반도네온 연주자 페드로 마피아와 바이올리니스트 호세 로시토와 함께 사중주를 결성하여 아르헨티나 대법원 맞은편 카페에서 공연하며 호평을 받았다.

2. 2. 아롤라스 그룹 탈퇴 및 오스발도 프레세도 합류 (1919년 ~ 1923년)

1919년, 데 카로는 사업상의 불화로 피아니스트 호세 마리아 리추티와 함께 에두아르도 아롤라스 그룹을 떠났다. 이후 반도네온 연주자 페드로 마피아와 바이올리니스트 호세 로시토와 함께 사중주를 결성하여 아르헨티나 대법원 앞 카페에서 공연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 사중주는 1920년에 해체되었고, 데 카로와 리추티는 밴드 리더 오스발도 프레세도에 합류하여 미국 투어를 함께 했다. 1922년, 데 카로는 우루과이몬테비데오로 이주하여 결혼하고 미노토 디 치코의 오케스트라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3년, 그는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후안 카를로스 코비안이 이끄는 악단에 합류하며 페드로 마피아와 다시 함께하게 되었다.[2] 이 시기에 그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났다.

2. 3. 훌리오 데 카로 육중주단 결성 (1923년 ~ 1930년대)

1924년, 대표 겸 피아니스트인 후안 카를로스 코비안이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후안 카를로스 코비안 악단을 계승하여 멤버가 교체되고, 훌리오 데 카로 육중주단이 결성되었다.

이들의 성공은 상류 사회의 새해 전야 무도회 공연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인기 있는 시내 카페 출연과 새로운 매체였던 라디오 방송 계약으로 이어졌다. 훌리오 데 카로 오케스트라는 RCA 빅터와 음반 계약을 체결했고, 1925년 4월에는 웨일스 공 에드워드 앞에서 공연하는 영예를 안았다.

훌리오 데 카로 육중주단의 가장 큰 공헌은 탱고 음악에서 '편곡'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점이다. 대담한 편곡을 통해 악단만의 개성을 살렸고, 이는 탱고 음악의 특징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1925년 말, 미국의 재즈 밴드 리더 폴 화이트먼은 데 카로에게 스트로 바이올린을 소개했다. 이 악기는 한쪽 끝에 코넷 나팔이 달려 있어 라디오 방송 시 다른 악기 소리보다 더 명확하게 소리를 전달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으로, 데 카로는 이를 연주에 필수적인 도구로 활용했다. 또한 데 카로는 자신의 공연에 참석한 아르헨티나의 저명인사들, 특히 수석 외과 의사 엔리케 피노키에토와 마르셀로 토르쿠아토 데 알베아르 대통령 등을 기리는 다수의 탱고 곡을 작곡했다.

반도네온 연주자 페드로 마피아는 1926년에 악단을 떠났지만, 또 다른 유명 반도네온 연주자인 페드로 라우렌스를 영입하면서 악단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오케스트라는 1931년 초청을 받아 프랑스 순회공연을 떠났다. 니스의 팔레 드 라 메디테라네에서 움베르토 디 사보이아 왕자, 로스차일드 가문의 갈라 행사 등에서 공연했으며,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에서는 카를로스 가르델이 출연한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빛''을 위해 연주했다.

프랑스 순회공연 후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오케스트라는 성공을 이어갔다. 1935년에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인 콜론 극장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고, 1936년에는 테아트로 오페라에서 1870년대부터 시작된 탱고의 역사를 아우르는 "탱고의 진화"라는 공연을 선보이며 큰 호평을 받았다. 이 시기 공연 중 하나가 끝난 후, 오랫동안 소원했던 부모님이 예고 없이 방문하여 가족 간의 화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2. 4. 국제적인 활동 및 새로운 시도 (1930년대 ~ 1954년)

훌리오 데 카로 오케스트라는 1931년 초청을 받아 프랑스를 순회 공연했다. 이들은 니스의 팔레 드 라 메디테라네에서 이탈리아움베르토 디 사보이아 왕자를 위한 공연, 로스차일드 가문의 갈라 행사, 그리고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에서 카를로스 가르델이 출연한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빛''을 위해 연주했다.

1930년대 아르헨티나에서는 재즈가 유행했는데, 데 카로 악단 역시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드럼과 목관 악기 등을 편성한 Orquesta Melódica Internacional|오르케스타 멜로디카 인터나시오날es이라는 이름으로 스윙 재즈 스타일의 편곡을 시도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시도였으나, 대중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그의 노력은 훗날 높이 평가받아, 오라시오 살간이나 아스토르 피아졸라와 같은 혁신적인 탱고 음악가들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된다.

오케스트라는 아르헨티나에서도 성공을 이어갔다. 1935년에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인 콜론 극장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고, 1936년에는 테아트로 오페라에서 1870년대부터 당대까지의 탱고 역사를 총망라하는 "탱고의 진화"라는 공연을 선보였다. 이 공연 중 하나가 끝난 후, 오랫동안 소원했던 부모님이 공연장을 찾아오면서 감동적인 가족의 화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데 카로의 오케스트라는 이후에도 수년간 탱고 팬들 사이에서 꾸준한 인기를 누렸으며, 가수 에드문도 리베로와 같은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청중의 수가 점차 줄어들었고, 훌리오 데 카로는 1954년 오케스트라 활동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그는 은퇴하며 탱고계에 decarismo|데카리스모es, 즉 "데 카로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남겼다. 이는 춤을 추기 위한 탱고의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작곡과 편곡 면에서 혁신을 추구했던 그의 독특한 음악 스타일을 일컫는다. 데 카로 이후 탱고는 점차 감상용 음악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춤곡으로서의 매력과 음악적 혁신을 동시에 이룬 그의 업적은 탱고 역사상 독보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2. 5. 은퇴 이후 (1954년 ~ 1980년)

청중이 줄어들면서 1954년 오케스트라에서 은퇴했다. 1959년 재혼했으며, 1975년에는 녹음 스튜디오로 돌아와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 작곡가 벤 몰라르, 작곡가 겸 편곡가 루이스 스타조 등과 협력하여 ''Los 14 de Julio de Caro''(''훌리오 데 카로의 14'') 앨범을 발표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의 생일이자 카를로스 가르델과 같은 날인 12월 11일을 '국가 탱고의 날'로 지정하여 그에게 영예를 안겼다. 1977년 이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루나 파크 아레나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서는 열렬한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와 함께 기립 박수를 받았다.

데 카로는 1954년 은퇴하며 탱고계에 '데카리스모'(decarismo), 즉 '데 카로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남겼다. 그의 은퇴 이후 탱고는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춤곡으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 작곡과 편곡에서 그만큼의 혁신을 이룬 사례는 데 카로 이전이나 이후에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 3월 11일 마르델플라타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차카리타 묘지에 형 프란시스코 데 카로 옆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

훌리오 데 카로는 에두아르도 아롤라스의 오케스트라에 합류하며 첫 탱고 곡 "Mon beguin"을 작곡했다.[1] 이후 그의 형제 프란시스코 데 카로와 함께, 또는 단독으로 다음과 같은 곡들을 작곡했다.[2]


  • ''Mala pinta'' (그늘진 모습)
  • ''Mi encanto'' (나의 매력)
  • ''Pura labia'' (모든 말)
  • ''Don Antonio''
  • ''A palada'' (삽으로)
  • ''Era buena la paisana'' (그녀는 좋은 시골 소녀였다)
  • ''Percanta arrepentida'' (후회하는 소녀)
  • ''Bizcochito'' (작은 비스킷)
  • ''Gringuita'' (금발)
  • ''La cañada'' (개울)
  • ''Boedo'' (보에도)
  • ''Todo corazón'' (토도 코라손)
  • ''Guardia vieja'' (과르디아 비에하)
  • ''Orgullo criollo'' (오르골로 크리오요)


1975년에는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 작곡가 벤 몰라르, 작곡가 겸 편곡가 루이스 스타조 등과 협력하여 ''Los 14 de Julio de Caro''(''훌리오 데 카로의 14'') 앨범을 녹음했다.

4. 유산과 영향

미국의 재즈 밴드 리더 폴 화이트먼은 1925년 데 카로에게 스트로 바이올린을 소개했다. 한쪽 끝에 코넷 혼이 달린 이 바이올린은 라디오 공연 시 다른 악기 소리보다 더 잘 들리도록 발명된 것으로, 데 카로는 이를 자신의 오케스트라에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다.[1]

1930년대 아르헨티나에서도 재즈가 유행하자, 훌리오 데 카로 악단은 드럼과 목관 악기 등을 도입한 '오르케스타 멜로디카 인터나시오날'(Orquesta Melódica Internacionalspa)이라는 편성을 통해 스윙 재즈풍의 편곡을 시도하는 등 획기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당시 청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새로운 연주를 지향하려는 그의 자세는 후에 높이 평가받아 오라시오 살간이나 아스토르 피아졸라와 같은 후대 음악가들의 선구자로 칭송받게 된다.

1954년에 공식적으로 은퇴한 훌리오 데 카로는 탱고계에 '데카리스모'(decarismospa), 즉 "데 카로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남겼다. 이는 춤을 추기 위한 탱고로서의 기능을 잃지 않으면서도 작곡과 편곡 면에서 혁신을 추구했던 그의 독특한 음악 스타일을 일컫는다. 데 카로 이후 탱고는 점차 감상용 음악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춤곡으로서의 성격과 음악적 혁신을 성공적으로 결합한 사례는 데 카로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데 카로는 은퇴 후에도 간헐적으로 활동했으며, 1975년에는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 작곡가 벤 몰라르, 작곡가 겸 편곡가 루이스 스타조 등과 협력하여 ''Los 14 de Julio de Caro|훌리오 데 카로의 14spa'' 앨범을 녹음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려 그의 생일이자 카를로스 가르델과 같은 날인 12월 11일을 "국가 탱고의 날"로 선포했다. 1977년 12월 11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루나 파크 아레나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서 그는 열렬한 환호와 함께 기립 박수를 받았다.

5. 기타

훌리오 드 카로의 다른 주목할 만한 친척으로는 그의 사촌인 시인 훌리아 데 카로(1917년 7월 11일 ~ 2009년 6월 26일)와 그의 증손녀인 미국 펜싱 선수 나탈리 훌리아 비에(1986년 4월 19일 출생)가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Tango Composer, Julio De Caro {{!}} Brisbane House Of Tango https://brisbanehous[...] 2024-06-14
[2] 웹사이트 Julio De Caro Biography https://www.jango.co[...]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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