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다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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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다카국은 일본 홋카이도에 설치되었던 옛 행정 구역으로, 1869년 8월 15일에 7개의 군으로 설치되어 1882년에 폐지되었다. 명칭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히다카미국'에서 유래되었으며, 마쓰우라 다케시로가 해당 지역에 '히다카'를 적용하여 상신한 데 기인한다. 헤이안 시대에는 엔닌이 수행했고,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에조가 존재했다. 에도 시대에는 마쓰마에 번에 의해 바쇼(치행지)가 개척되었으며, 메이지 시대 초 육상 및 해상 교통로가 정비되었다. 히다카국은 사루 군, 니이컵 군, 시즈나이 군, 미쓰이시 군, 우라카와 군, 사마니 군, 호로이즈미 군 등 7개의 군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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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다카국 | |
|---|---|
| 개요 | |
| 국명 | 히다카 국 (Hidaka-no Kuni) |
| 별칭 | 히타카미 (Hitakami) |
| 역사 | |
| 설치 시기 | 1869년 |
| 폐지 시기 | 1882년 |
| 행정 구역 | |
| 영역 | 히다카 지청 관할 구역 전체 |
| 군 | 니캇푸 군 미쓰이시 군 우라카와 군 사마니 군 호로이즈미 군 모노베쓰 군 히다카 군 |
2. 명칭과 표기
일본서기 게이코 천황 27년 2월 12일 조에 "동쪽 오랑캐 중에 히다카미국(日高見国)이 있다. (중략) 이를 모두 에미시(蝦夷)라고 한다."라고 기록된 것에서, 마쓰우라 다케시로가 이 히다카미국에 해당 지역을 적용하여 "히다카(日高)"라고 상신한 데 기인한다.[3]
3. 연혁
3. 1. 히다카국 성립 이전
헤이안 시대, 지각대사 엔닌이 사마니 등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히노모토[4]라고 불리는 에조가 있었고, 에조관령・안토 씨가 이를 통괄했다(『스와 대명신 그림말』).
무로마치 시대(15세기) 무렵에는 와진이 진출했던 것 같다.
에도 시대 무렵이 되면, 마쓰마에 번에 의해 마쓰마에 번 가신이 에조와 거래를 하는 7곳의 '''바쇼'''라고 불리는 치행지가 개척되었다. 번의 출장 기관의 기능도 겸비한 운상옥에서는 무육 정책으로 옴샤 등도 행해졌다. 제도적인 자세한 내용은 상장(바쇼) 치행제 및 바쇼 청부제를, 어장의 상황에 대해서는 홋카이도에서의 청어 어업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후에 설치된 군과의 상대는 다음과 같다.
에도 시대 초기, 텐다이 종의 승려・엔쿠가 수행을 위해 방문하여, 사마니 등에 발자취를 남겼다.
1611년(게이초 16)의 거대한 지진으로, 사루 강 유역에 큰 해일이 밀려왔다. 히라토리정 니나쓰미차시 유적의 해발은 61m, 지상 관수를 2m로 하면 해일 침수 해발은 63m이다[5]。
이 무렵 히다카국 지역에서는 시부차리 지방(시즈나이 강 유역)의 어업권을 둘러싸고 두 개의 아이누 집단 메나시쿠루와 슈무쿠루(사루 지방, 사루 군) 간의 분쟁이 계속되어 마쓰마에 번의 조정으로 한 번은 수습되었다. 그러나 분쟁이 재연되어 무기를 제공해 줄 것을 마쓰마에 번에 신청한 슈무쿠루 소을명 오니비시의 딸 사위로 을명 우타후(우토마사 또는 우토후라고도 함)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와진에 의한 독살로 오해한 아이누가 각지에서 봉기하는 샤쿠샤인의 싸움이 간분 9년 6월에 발발, 히다카국 지역 내에서도 다수의 와진이 살해되었지만 후에 지도자였던 소을명 샤쿠샤인은 암살되었고, 거점이었던 시부차리의 차시도 함락된다. 그러나 난에는 와진의 참가자도 있었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의 교통에 대해 육상 교통[6]은 도지마국의 하코다테에서 도토나 지시마국 방면에 이르는 길(우라카와 이서 국도 235호의, 우라카와 이동은 국도 336호의 전신)의 도중이었지만, 연안부에 일부 지형이 험한 난소가 있었기 때문에 간세이 11년 에조지 취체 어용을 명받은 오코치 젠베이 마사히사가 나카무라 고이치로, 모가미 도쿠나이 등에게 명하여 사마니 군의 사마니 산길 및 호로이즈미 군의 사루루 산길 등을 개착시켰다(국도 336호의 전신). 이러한 산길은 교와 2년 12월부터 다음 해 3년에 걸쳐 난부 번에 의해 수선되었다. 또한 이노 다다타카나 마쓰우라 다케시로 등도 통행하고 있다. 후유시마~호로만 사이의 사마니 산길은 도정 3리(12킬로미터) 약이었지만 "고토니 소휴소"가 설치되었고, 메이지 6년에는 산중에 여관 "하라다 숙"이 세워졌다. 히다카 국내의 하천에는 번정 시대부터 폐사치현까지 16곳의 도선장이 있어 나룻배 등도 운행되었다.
해상 교통은 와진지나 기나이 등과의 사이에 기타마에 배의 항로가 열려 사루 군 몬베쓰나 사마니 등에도 기항하고 있었다.
에도 시대 후기, 히다카국 지역은 동에조지에 속해 있었다. 국방을 위해 간세이 11년 동에조지는 공의어료(막부 직할령)로 되어, 간세이 12년(1800년) 이노 다다타카가 연안부를 측량. 분세이 4년에는 일단 마쓰마에 번령으로 복귀했지만, 안세이 2년 다시 공의어료가 되어 센다이 번이 경비를 담당했다.
3. 2. 히다카국 성립 이후
1869년 일본 북부의 섬은 홋카이도로 알려지게 되었고, 히다카국을 포함한 지역 행정 구역이 식별되었다.[2]메이지 2년 8월 15일에 히다카국 7군이 제정되어 79촌이 속했다. 같은 해 8월부터 메이지 4년 8월까지 5군이 도외의 번이나 사족, 사원 등에 의해 분령 지배되었다.
메이지 15년 2월 8일, 폐사치현에 따라 삿포로현의 소관이 되었다.
4. 시설
히다카국에는 에도 시대 이전에 창건된 신사가 많다. 간분 9년(1669년) 우라카와 신사가, 간세이 10년(1798년)경 요시츠네 신사가, 호에이 3년(1706년) 사마니 군에 스미요시 신사가 창건되었다. 사마니군에는 에조 삼관사 중 하나로 분카 연간에 건립된 등주원이 있다.
| 군 | 신사 | 비고 |
|---|---|---|
| 사루 군 | 요시츠네 신사 (사루 군비라토리정) | |
| 시즈나이 군 | 히루코 신사 (현재의 시즈나이 신사, 히다카 군신히다카정시즈나이 지구) | |
| 미쓰이시 군 | 미쓰이시 신사 (히다카 군 신히다카정 미쓰이시 지구) | |
| 우라카와 군 | 우라카와 신사 (우라카와 군우라카와정) | |
| 사마니 군 | 스미요시 신사 (사마니 군사마니정) | |
| 호로이즈미 군 | 스미요시 신사 (호로이즈미 군에리모정) |
위 신사들은 모두 향사(鄕社) 이하의 사격(社格)을 가지며, 히다카국에는 현사(縣社) 이상의 신사는 없다.
4. 1. 사원
에조 삼관사 중 하나로 분카 연간에 건립된 등주원이 사마니군에 있다.4. 2. 신사
간분 9년(1669년)에 창건된 우라카와 신사, 간세이 10년(1798년)경에 창건된 요시츠네 신사, 호에이 3년(1706년)에 창건된 사마니 군의 스미요시 신사 등 아래의 신사를 비롯하여 에도 시대 이전에 창건된 것이 많다.- 사루 군: 요시츠네 신사 (사루 군비라토리정)
- 시즈나이 군: 히루코 신사 (현재의 시즈나이 신사. 히다카 군신히다카정시즈나이 지구)
- 미쓰이시 군: 미쓰이시 신사 (히다카 군 신히다카정 미쓰이시 지구)
- 우라카와 군: 우라카와 신사 (우라카와 군우라카와정)
- 사마니 군: 스미요시 신사 (사마니 군사마니정)
- 호로이즈미 군: 스미요시 신사 (호로이즈미 군에리모정)
위의 사격(社格)은 모두 향사(鄕社) 이하이다. 히다카 국에는 현사(縣社) 이상의 사격에 열거된 신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5. 지역
에도 시대 마쓰마에 번은 마쓰마에 번 가신이 에조와 거래를 하는 7곳의 '''바쇼'''라고 불리는 지행지를 개척했다. 이 바쇼는 번의 출장 기관 기능을 겸비했으며, 운상옥에서는 무육 정책으로 옴샤 등도 행해졌다. 제도적인 내용은 상장(바쇼) 지행제 및 바쇼 청부제를, 어장 상황은 홋카이도에서의 청어 어업사를 참조하면 된다. 각 바쇼와 설치된 군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 바쇼 이름 | 설치된 군 |
|---|---|
| 사루 바쇼 | 사루 군 |
| 니이컵 바쇼 | 니캇푸 군 |
| 시쓰나이 바쇼 | 시즈나이 군 |
| 미쓰이시 바쇼 | 미쓰이시 군 |
| 우라카와 바쇼 | 우라카와 군 |
| 샤마니 바쇼 | 사마니 군 |
| 호로이즈미 바쇼 | 호로이즈미 군 |
5. 1. 군
| 군 |
|---|
| 사루 (沙流郡) |
| 니캇푸 (新冠郡) |
| 시즈나이 (静内郡) |
| 미쓰이시 (三石郡) |
| 우라카와 (浦河郡) |
| 사마니 (様似郡) |
| 호로이즈미 (幌泉郡) |
히다카국은 사루 군, 니캇푸 군, 시즈나이 군(현재는 소멸), 미쓰이시 군(현재는 소멸), 우라카와 군, 사마니 군, 호로이즈미 군의 7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5. 2. 에도 시대의 번
에도 시대 무렵, 마쓰마에 번은 마쓰마에 번 가신이 에조와 거래를 하는 7곳의 '''바쇼'''라고 불리는 지행지를 개척했다. 이 바쇼는 번의 출장 기관 기능을 겸비했으며, 운상옥에서는 무육 정책으로 옴샤 등도 행해졌다. 제도적인 내용은 상장(바쇼) 지행제 및 바쇼 청부제를, 어장 상황은 홋카이도에서의 청어 어업사를 참조하면 된다. 후에 설치된 군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바쇼 이름 | 설치된 군 |
|---|---|
| 사루 바쇼 | 후의 사루 군 |
| 니이컵 바쇼 | 후의 니이캇푸 군 |
| 시쓰나이 바쇼 | 후의 시즈나이 군 |
| 미쓰이시 바쇼 | 후의 미쓰이시 군 |
| 우라카와 바쇼 | 후의 우라카와 군 |
| 샤마니 바쇼 | 후의 사마니 군 |
| 호로이즈미 바쇼 | 후의 호로이즈미 군 |
에도 시대 초기에는 텐다이 종의 승려인 엔쿠가 수행을 위해 방문하여, 사마니 등에 발자취를 남겼다.[4]
1611년(게이초 16년)에는 거대한 지진으로 사루 강 유역에 큰 해일이 밀려왔다. 히라토리정 니나쓰미차시 유적의 해발은 61미터, 지상 관수를 2미터로 하면 해일 침수 해발은 63미터이다.[5]
이 무렵 히다카국 지역에서는 시부차리 지방(시즈나이 강 유역)의 어업권을 둘러싸고 메나시쿠루와 슈무쿠루(사루 지방, 사루 군) 두 아이누 집단 간의 분쟁이 계속되어 마쓰마에 번의 조정으로 한 번은 수습되었다. 그러나 분쟁이 재연되어 무기를 제공해 줄 것을 마쓰마에 번에 신청한 슈무쿠루 소을명 오니비시의 딸 사위로 을명 우타후(우토마사 또는 우토후라고도 함)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와진에 의한 독살로 오해한 아이누가 각지에서 봉기하는 샤쿠샤인의 싸움이 간분 9년 6월에 발발했다. 히다카국 지역 내에서도 다수의 와진이 살해되었지만 후에 지도자였던 소을명 샤쿠샤인은 암살되었고, 거점이었던 시부차리의 차시도 함락되었다. 다만, 이 난에는 와진 참가자도 있었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육상 교통[6]은 도지마국의 하코다테에서 도토나 지시마국 방면에 이르는 길(우라카와 이서 국도 235호, 우라카와 이동은 국도 336호의 전신) 도중이었지만, 연안부에 일부 지형이 험한 난소가 있었다. 간세이 11년 에조지 취체 어용을 명받은 오코치 젠베이 마사히사가 나카무라 고이치로, 모가미 도쿠나이 등에게 명하여 사마니 군의 사마니 산길 및 호로이즈미 군의 사루루 산길 등을 개착시켰다(국도 336호의 전신). 이러한 산길은 교와 2년 12월부터 다음 해 3년에 걸쳐 난부 번에 의해 수선되었다. 이노 다다타카나 마쓰우라 다케시로 등도 통행했다. 후유시마~호로만 사이의 사마니 산길은 약 3리(12km)였지만 '고토니 소휴소'가 설치되었고, 메이지 6년에는 산중에 여관 '하라다 숙'이 세워졌다. 히다카 국내의 하천에는 번정 시대부터 폐사치현까지 16곳의 도선장이 있어 나룻배 등도 운행되었다.
해상 교통은 와진지나 기나이 등과의 사이에 기타마에 배 항로가 열려 사루 군 몬베쓰나 사마니 등에도 기항하고 있었다.
에도 시대 후기, 히다카국 지역은 동에조지에 속했다. 간세이 11년 국방을 위해 동에조지는 공의어료(막부 직할령)가 되었고, 간세이 12년(1800년) 이노 다다타카가 연안부를 측량하였다. 분세이 4년에는 일단 마쓰마에 번령으로 복귀했지만, 안세이 2년 다시 공의어료가 되어 센다이 번이 경비를 담당했다.
마쓰마에 번령, 마쓰마에 씨(1만 석 각→3만 석 각)는 1599년 - 1799년, 1821년 - 1855년 동안 히다카 전역을 다스렸다.
6. 교통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히다카국 지역의 교통은 육상 교통과 해상 교통으로 나눌 수 있다.[6] 육상 교통은 도지마국 하코다테에서 도토나 지시마국 방면으로 가는 길(우라카와 이서쪽은 국도 235호, 우라카와 이동쪽은 국도 336호의 전신)의 중간 지점이었으나, 해안 지역의 일부 험한 지형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간세이 11년(1799년) 사마니 산길과 사루루 산길 등이 개척되었고, 교와 2년(1802년)부터 다음 해까지 난부 번에 의해 수리되기도 했다. 이노 다다타카, 마쓰우라 다케시로 등도 이 길을 이용했으며, 휴식 시설과 여관도 설치되었다. 히다카 국내의 하천에는 번정 시대부터 폐사치현까지 16곳의 도선장이 설치되어 나룻배 등이 운행되었다.
해상 교통은 기타마에 배 항로를 통해 와진지나 기나이 등과 연결되었으며, 사루 군 몬베쓰나 사마니 등에 기항했다.
6. 1. 육상 교통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육상 교통은 도지마국의 하코다테에서 도토나 지시마국 방면으로 가는 길(우라카와 이서쪽은 국도 235호, 우라카와 이동쪽은 국도 336호의 전신) 중간에 있었다. 그러나 해안 지역에 일부 험한 지형이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6] 간세이 11년(1799년) 에조지 취체 어용을 명받은 오코치 젠베이 마사히사가 나카무라 고이치로, 모가미 도쿠나이 등에게 명하여 사마니 군의 사마니 산길 및 호로이즈미 군의 사루루 산길 등을 개척하게 하였다.(국도 336호의 전신) 이러한 산길은 교와 2년(1802년) 12월부터 다음 해 3년에 걸쳐 난부 번에 의해 수리되었다. 이노 다다타카나 마쓰우라 다케시로 등도 이 길을 다녔다. 후유시마~호로만 사이의 사마니 산길은 약 12km였지만, "고토니 소휴소"가 설치되었고, 메이지 6년(1873년)에는 산중에 여관 "하라다 숙"이 세워졌다. 히다카 국내의 하천에는 번정 시대부터 폐사치현까지 16곳의 도선장이 설치되어 나룻배 등도 운행되었다.6. 2. 해상 교통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육상 교통은 도지마국의 하코다테에서 도토나 지시마국 방면으로 가는 길(우라카와 이서 국도 235호, 우라카와 이동은 국도 336호의 전신) 중간이었지만, 연안부에 일부 험한 지형이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6] 간세이 11년(1799년) 에조지 취체 어용을 명받은 오코치 젠베이 마사히사가 나카무라 고이치로, 모가미 도쿠나이 등에게 명하여 사마니 군의 사마니 산길 및 호로이즈미 군의 사루루 산길 등을 개척하였다(국도 336호의 전신). 이 산길은 교와 2년(1802년) 12월부터 다음 해 3년에 걸쳐 난부 번에 의해 수선되었다. 이노 다다타카, 마쓰우라 다케시로 등도 이곳을 지나갔다. 후유시마~호로만 사이의 사마니 산길은 약 12km였지만 '고토니 소휴소'가 설치되었고, 1873년(메이지 6년)에는 산중에 여관 '하라다 숙'이 세워졌다. 히다카 국내의 하천에는 번정 시대부터 폐사치현까지 16곳의 도선장이 있어 나룻배 등도 운행되었다.해상 교통은 와진지나 기나이 등과의 사이에 기타마에 배 항로가 열려 사루 군 몬베쓰나 사마니 등에도 기항하고 있었다.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2]
서적
Transactions of the Asiatic Society of Japan
https://books.google[...]
1882
[3]
서적
北海道の地名(日本歴史地名大系 1)
[4]
문서
シュムクルとメナシクルの祖先にあたる
[5]
논문
ミレニアム津波にどう備えるか
朝日新聞出版
2013
[6]
간행물
北海道道路誌
北海道庁
192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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