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타치 훗토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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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타치 훗토 번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603년 야마오카 가게토모가 처음 수여받았으나 곧 개역되었고, 이후 니와 나가시게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1만 석 영지를 받아 세워졌다. 나가시게는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운 후 1619년 에도사키 번으로 옮겨가면서 훗토 번은 폐지되었다. 훗토 번의 영지였던 후루와타는 가스미가우라에 면한 항구로 발전했으며, 에도 시대에는 어업이 활발했다. 역대 번주로는 야마오카 가게토모와 니와 나가시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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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치 훗토 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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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번 이름 (한자) | 常陸古渡藩 |
번 이름 (가나) | ひたちふっとはん |
번 이름 (로마자) | Hitachi Futto-han |
종류 | 譜代 |
석고 | 1万石 |
거성 | 古渡陣屋 |
역사 | |
존속 기간 | 1622년 ~ 1700년 |
창건 연도 | 1622년 |
폐번 연도 | 1700년 |
창건자 | 마쓰다이라 시게츠나 |
폐번 사유 | 마쓰다이라 가문 전봉 |
위치 | |
국가 | 일본 |
위치 (현재) | 이바라키현 이시오카시 후루와타리 |
2. 역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오미의 야마오카 가게토모가 1603년(게이초 8년)에 훗토 번을 수여받았지만 곧 개역당하였고 이후 같은 전투에 참전한 니와 나가시게는 가게토모가 개역당한 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름을 받고 출사하여 히타치 국 가와치 군내 1만 석 영지를 받고 훗토 번을 세웠다. 나가시게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던 명장으로 유명한 니와 나가히데의 장남으로, 노부나가의 사위였던 인물이다. 훗토 번을 수여받기 전의 나가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속해 마에다 도시나가와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전후 가가 고마쓰(지금의 이시카와현 고마쓰시) 영지를 몰수당하였으나 오사카 전투에서도 도쿠가와 군에 속해 거둔 전공으로 1619년(겐나 5년) 1만 석을 추가로 받고 에도사키 번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에 따라 훗토 번은 폐지되었던 것이다.
관련 지도(이바라키현)
2. 1. 번 성립 이전
고도는 센고쿠 시대에는 에도자키성 주 도키 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덴쇼 18년(1590년) 이후에는 사타케 요시노부의 동생으로, 에도자키, 류가사키에서 4만 5000석을 지배한 아시나 모리시게의 소령에 포함되었다.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오미의 야마오카 가게토모는 1603년(게이초 8년)에 훗토 번을 수여받았지만 곧 개역당했다. 같은 해 야마오카 가게토모가 사망하자, 카게모토는 어리기 때문에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카게이가 카게토모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니와 나가히데의 장남 니와 나가시게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던 명장으로, 노부나가의 사위였던 인물이다. 나가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속해 마에다 도시나가와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전후 가가 고마쓰(지금의 이시카와현 고마쓰시) 영지를 몰수당했다.
1603년 (게이초 8년) 11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나가시게를 불러 히타치 국 가와치 군내 1만 석 영지를 주고 훗토 번을 세웠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에야스에게 자주 중재를 했기 때문에, 나가시게는 다이묘로 복귀할수 있었다.
이후 나가시게는 오사카 전투에서도 도쿠가와 군에 속해 공을 세웠다. 1619년 (겐나 5년) 1만 석을 추가로 받고 에도사키 번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에 따라 훗토 번은 폐지되었다.
2. 1. 1. 센고쿠 시대
고도는 센고쿠 시대에는 에도자키성 주 도키 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덴쇼 18년(1590년) 이후에는 사타케 요시노부의 동생으로, 에도자키, 류가사키에서 4만 5000석을 지배한 아시나 모리시게의 소령에 포함되었다.2. 1. 2.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오미의 야마오카 가게토모는 1603년(게이초 8년)에 훗토 번을 수여받았지만 곧 개역당했다. 같은 해 야마오카 가게토모가 사망하자, 카게모토는 어리기 때문에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카게이가 카게토모의 유산을 상속받았다.니와 나가히데의 장남 니와 나가시게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던 명장으로, 노부나가의 사위였던 인물이다. 나가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속해 마에다 도시나가와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전후 가가 고마쓰(지금의 이시카와현 고마쓰시) 영지를 몰수당했다.
1603년 (게이초 8년) 11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나가시게를 불러 히타치 국 가와치 군내 1만 석 영지를 주고 훗토 번을 세웠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에야스에게 자주 중재를 했기 때문에, 나가시게는 다이묘로 복귀할수 있었다.
이후 나가시게는 오사카 전투에서도 도쿠가와 군에 속해 공을 세웠다. 1619년 (겐나 5년) 1만 석을 추가로 받고 에도사키 번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에 따라 훗토 번은 폐지되었다.
2. 2. 야마오카 가게토모 시대 (1603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오미의 야마오카 가게토모는 1603년(게이초 8년)에 훗토 번을 수여받았지만 곧 개역당했다.간세이 중수 제보기에는 야마오카 가게토모가 고토와타에서 1만 석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도쿠가와 실기에서는 야마오카 가게토모의 사망 기사에서 "가게토모는 1만 석에 들지 못했지만, 창업의 공신이므로 전기를 여기에 쓴다"고 하여 다이묘는 아니지만 특별히 졸기를 기록했다고 한다.
1603년(게이초 8년) 10월 3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후시미의 가게토모 저택을 방문했을 때, 가게토모는 조카 야마오카 가게모토(야마오카 가게타카의 아들, 3000석)의 아들인 가게모토(8세)를 이에야스에게 어목견시켜 양자로 삼을 것을 말하여 승낙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20일에 야마오카 가게토모가 사망하자, 가게모토는 어리기 때문에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가게이가 가게토모의 유적을 상속하여 코우가조를 맡게 되었다(가게이의 기존 3000석은 수공).
2. 2. 1. 가게토모의 배경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야마오카 카게토모는 오미 국내에서 9000석(그 중 4000석은 휘하 코우가조의 급료)을 영유했다, 게이초 8년(1603년)에 코토와타 1만 석으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다.『간세이 중수 제보기』에는 야마오카 카게토모가 코토와타에서 1만 석을 받았다는 기술은 없다.。『도쿠가와 실기』에서는 야마오카 카게토모의 사망 기사 중에서 "카게토모는 1만 석에 들지 못했지만, 창업의 공신"이므로 특별히 졸기를 기록했다고 한다.
게이초 8년(1603년) 10월 3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후시미의 카게토모 저택을 방문했을 때, 카게토모는 조카 야마오카 카게모토(야마오카 카게타카의 아들, 3000석)의 아들인 카게모토(8세)를 이에야스에게 어목견시켜 양자로 삼을 것을 말하여 승낙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20일에 야마오카 카게토모가 사망하자, 카게모토는 어리기 때문에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카게이가 카게토모의 유적을 상속하여 코우가조를 맡게 되었다(카게이의 기존 3000석은 수공).
2. 2. 2. 개역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오미의 야마오카 가게토모는 1603년(게이초 8년)에 훗토 번을 수여받았지만 곧 개역당했다.간세이 중수 제보기에는 야마오카 가게토모가 고토와타에서 1만 석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도쿠가와 실기에서는 야마오카 가게토모의 사망 기사에서 "가게토모는 1만 석에 들지 못했지만, 창업의 공신이므로 전기를 여기에 쓴다"고 하여 다이묘는 아니지만 특별히 졸기를 기록했다고 한다.
1603년(게이초 8년) 10월 3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후시미의 가게토모 저택을 방문했을 때, 가게토모는 조카 야마오카 가게모토(야마오카 가게타카의 아들, 3000석)의 아들인 가게모토(8세)를 이에야스에게 어목견시켜 양자로 삼을 것을 말하여 승낙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20일에 야마오카 가게토모가 사망하자, 가게모토는 어리기 때문에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가게이가 가게토모의 유적을 상속하여 코우가조를 맡게 되었다(가게이의 기존 3000석은 수공).
2. 3. 니와 나가시게 시대 (1603년 ~ 1619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니와 나가시게는 1603년(게이초 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히타치 국 가와치 군 내 1만 석 영지를 받고 훗토 번을 세웠다. 나가시게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던 니와 나가히데의 장남이다. 나가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해 마에다 도시나가와 싸웠기 때문에 전후 가가 고마쓰(지금의 이시카와현 고마쓰시) 영지를 몰수당했다.간세이 제보에 따르면, 나가시게는 평소 마에다 도시나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도시나가를 경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우에스기 정벌 때 나가시게는 마쓰토에 출진했는데, 마에다 도시나가의 공동 출병 제안을 거절했고, 마에다 도시나가·도시마사가 고마쓰 부근을 침범하자 양측은 교전하여 나가시게가 마에다 군을 격파했다(아사이 나와테 전투 참조). 니와·마에다 양측은 8월 22일에 화해했고, 9월 13일 이에야스의 편지를 받고 함께 에치젠 국을 평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본전(9월 15일) 이후, 나가시게가 "원한" 때문에 마에다 도시나가와 교전하여 자신의 성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이 죄가 되었다. 나가시게는 마에다 도시나가의 참언이라 생각하여 성을 떠나 에도로 가서 시나가와에 칩거하며 이심이 없음을 나타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자주 중재하여 다이묘로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
1614년(게이초 19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나가시게는 시기노 전투에 참가하여, 적의 총탄이 칼에 맞는 혼전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가신 15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용전을 펼쳐 칭찬받았다. 1615년(게이초 20년/겐나 원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히라노구치로 진출, 5월 7일 가신 2명이 전사하고 14명의 적 수급을 올리는 공을 세웠다(야오·와카에 전투, 텐노지·오카야마 전투 참조). 오사카 전투 후 귀환할 때 도토미 국 니시사카(히노사카슈쿠)에서 도적 5명을 체포하여 능지형에 처했고, 이에야스에게 포상받았다.
1619년(겐나 5년), 오사카 전투에서 거둔 전공으로 1만 석을 추가로 받아 에도사키 번으로 옮겨갔고, 훗토 번은 폐지되었다.
2. 3. 1. 나가시게의 배경
니와 나가시게는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로, 1600년(게이초 5년)의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는 가가국 고마쓰 성주로 12만 5400석을 영유하고 있었다, 서군에 가담하여 동군의 마에다 토시나가와 싸웠기 때문에, 전투 후에 개역된 인물이다。『간세이 제보』의 니와 가문 가계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니와 나가시게는 평소 마에다 토시나가와 불화였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토시나가를 경계하도록 명령받은 것을 배경으로 기록하고 있다。우에스기 정벌 때 나가시게는 마쓰토에 출진했는데, 마에다 토시나가로부터 공동 출병을 제안받았지만, 나가시게는 이를 거절, 마에다 토시나가·토시마사가 고마쓰 부근을 침범했기 때문에 양가는 교전하여 나가시게는 마에다 세력을 격파했다(아사이 나와테 전투 참조)。니와·마에다 양가 사이에는 8월 22일에 화의가 성립되었고, 9월 13일에 이에야스로부터의 편지가 도착하여 양가가 함께 에치젠국을 평정하도록 명령받았다고 한다。그러나 세키가하라 본전(9월 15일) 전투 후, 나가시게가 "나의 원한" 때문에 마에다 토시나가와 교전하여, 자신의 성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이 죄로 지목되었다。나가시게는 마에다 토시나가의 참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성을 떠나 에도로 나가 시나가와에 칩거하며 이심이 없음을 나타냈다。「옛날의 어여쁨」이 있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에야스에게 자주 중재를 했기 때문에, 다이묘로의 복귀가 실현되었다고 한다。
2. 3. 2. 오사카 전투
1614년(게이초 19년)의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11월 26일의 시기노 전투에 니와 나가시게는 참가했다. 나가시게의 칼에 적의 총탄이 맞는 혼전 중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가신들로부터 사상자 15명을 내면서도 용전을 펼쳐 칭찬을 받았다.다음 해 1615년(게이초 20년/겐나 원년)의 여름 전투에서는 히라노구치로 진출하여, 5월 7일에는 가신들에게 전사 2명을 내면서 적의 수급 14급을 올리는 공적을 세웠다(야오·와카에 전투, 텐노지·오카야마 전투 참조).
또한, 오사카 전투 후에 귀환할 때, 도토미국 니시사카(히노사카슈쿠)에서 도적 5명을 체포하여 능지형에 처했고,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그 조치를 포상받았다.
2. 3. 3. 에도사키 번 이봉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니와 나가시게는 1603년(게이초 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히타치 국 가와치 군 내 1만 석 영지를 받고 훗토 번을 세웠다. 나가시게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던 니와 나가히데의 장남이다. 나가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해 마에다 도시나가와 싸웠기 때문에 전후 가가 고마쓰(지금의 이시카와현 고마쓰시) 영지를 몰수당했다.간세이 제보에 따르면, 나가시게는 평소 마에다 도시나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도시나가를 경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우에스기 정벌 때 나가시게는 마쓰토에 출진했는데, 마에다 도시나가의 공동 출병 제안을 거절했고, 마에다 도시나가·도시마사가 고마쓰 부근을 침범하자 양측은 교전하여 나가시게가 마에다 군을 격파했다(아사이 나와테 전투 참조). 니와·마에다 양측은 8월 22일에 화해했고, 9월 13일 이에야스의 편지를 받고 함께 에치젠 국을 평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본전(9월 15일) 이후, 나가시게가 "원한" 때문에 마에다 도시나가와 교전하여 자신의 성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이 죄가 되었다. 나가시게는 마에다 도시나가의 참언이라 생각하여 성을 떠나 에도로 가서 시나가와에 칩거하며 이심이 없음을 나타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자주 중재하여 다이묘로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
1614년(게이초 19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나가시게는 시기노 전투에 참가하여, 적의 총탄이 칼에 맞는 혼전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가신 15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용전을 펼쳐 칭찬받았다. 1615년(게이초 20년/겐나 원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히라노구치로 진출, 5월 7일 가신 2명이 전사하고 14명의 적 수급을 올리는 공을 세웠다(야오·와카에 전투, 텐노지·오카야마 전투 참조). 오사카 전투 후 귀환할 때 도토미 국 니시사카(히노사카슈쿠)에서 도적 5명을 체포하여 능지형에 처했고, 이에야스에게 포상받았다.
1619년(겐나 5년), 오사카 전투에서 거둔 전공으로 1만 석을 추가로 받아 에도사키 번으로 옮겨갔고, 훗토 번은 폐지되었다.
2. 4. 훗토 번 폐지 이후
니와 나가시게가 겐나 5년(1619년) 1만 석을 추가로 받고 에도사키 번으로 옮겨가면서 훗토 번은 폐지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오미의 야마오카 가게토모가 게이초 8년(1603년)에 훗토 번을 수여받았지만 곧 개역당하였고 이후 같은 전투에 참전한 니와 나가시게는 가게토모가 개역당한 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름을 받고 출사하여 히타치 국 가와치 군내 1만 석 영지를 받고 훗토 번을 세웠다. 나가시게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던 명장으로 유명한 니와 나가히데의 장남으로, 노부나가의 사위였던 인물이다. 훗토 번을 수여받기 전의 나가시게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속해 마에다 도시나가와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전후 가가 고마쓰(지금의 이시카와현 고마쓰시) 영지를 몰수당하였으나 오사카 전투에서도 도쿠가와 군에 속해 거둔 전공으로 겐나 5년(1619년) 1만 석을 추가로 받고 에도사키 번으로 옮겨가게 되었다.가스미가우라에서는 에도 시대부터 어업이 시작되었고, 1908년(메이지 41년)에는 어업권 취득을 위해 답사 동맹 휴업 사건이 발생했다. 1920년(다이쇼 9년)에는 어업조합이 설립인가를 받았다.
1964년(쇼와 39년)에는 가스미가우라 개발 사업으로 가스미가우라와 기타우라의 호수 수위가 저하되면서 어업에 큰 타격을 받았다. 1965년(쇼와 40년)에는 어업 근대화 자금 융자를 받아 1969년(쇼와 44년)에는 빙어 양식을 위한 인공 부화장을 설치했다. 1976년(쇼와 51년)에는 어업협동조합 연합회가 발족되었다. 1995년(헤이세이 7년)에는 가스미가우라 북부 수산 가공업 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2. 4. 1. 가스미가우라 어업
가스미가우라에서는 에도 시대부터 어업이 시작되었고, 1908년(메이지 41년)에는 어업권 취득을 위해 답사 동맹 휴업 사건이 발생했다. 1920년(다이쇼 9년)에는 어업조합이 설립인가를 받았다.1964년(쇼와 39년)에는 가스미가우라 개발 사업으로 가스미가우라와 기타우라의 호수 수위가 저하되면서 어업에 큰 타격을 받았다. 1965년(쇼와 40년)에는 어업 근대화 자금 융자를 받아 1969년(쇼와 44년)에는 빙어 양식을 위한 인공 부화장을 설치했다. 1976년(쇼와 51년)에는 어업협동조합 연합회가 발족되었다. 1995년(헤이세이 7년)에는 가스미가우라 북부 수산 가공업 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
3. 역대 번주
'''야마오카 가문'''
- 야마오카 가게토모(야마오카 가게토모/山岡景友일본어) 재위 1603년
'''니와 가문'''
3. 1. 야마오카 가문
야마오카 가게토모야마오카 가게토모/山岡景友일본어 재위 1603년3. 1. 1. 야마오카 가게토모 (山岡景友)
야마오카 가게토모(야마오카 가게토모/山岡景友일본어) 재위 1603년3. 2. 니와 가문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일본어) 재위 1603년 ~ 1619년외양. 1만 석.
나가시게
3. 2. 1. 니와 나가시게 (丹羽長重)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일본어) 재위 1603년 ~ 1619년외양. 1만 석.
나가시게
4. 영지
4. 1. 후루와타 (古渡)

후루와타는 가스미가우라로 흘러드는 오노가와 하구에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가스미가우라(가토리 해)에 면한 항구로서 발전했으며, 남북조 시대에는 "후토노쓰"(福戸津)라고 기록된 사료가 남아 있다. 중세에는 오노가와를 경계로 오른쪽 강둑(동쪽)은 도조장, 왼쪽 강둑(서쪽)은 시타장으로 포함되어, 각각 "도조 후루와타", "훗토노쓰토테이", "신타 후루와타", "훗토노쓰시다"라고 불렸다. 두 개의 후루와타에는 어떤 거점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왼쪽 강둑 측의 신타 후루와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이하, 본 기사의 "후루와타"는 오른쪽 강둑 측의 도조 후루와타이다.
후루와타성(별명으로 후루야성・코타니성・쿠라마에성)은 80m 사방의 구루와를 가진 소규모 성으로, 이나시키시 교육위원회가 설치한 현지 게시판에서는 "야마오카 카게히사"가 축성했다고 기록한다[1]. 이바라키현 교육위원회 발행의 『이바라키현의 중세 성관』(2003년)은 "니와 나가시게가 축성에 관여한 근세 성곽"이라고 하면서, "그 흥취는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 있다. 『이바라키현의 중세 성관』에서는, 니와 나가시게가 근세 성곽으로 개수한 것은 후루와타성터의 동쪽 450m 정도 지점(미네 쿠마노 곤겐 및 그 후방 대지)에 있던 "후루와타 히가시성터"의 가능성을 추측하고 있다. 후루와타의 성은, 니와 나가시게가 에도자키로 옮겨간 시기에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에도 시대 초에는 가스미가우라 연안 어촌 "요시하치쓰"의 우라가타 조합이 성립했지만, 후루와타 마을이 "미나미쓰가시라"가 되어 "키타쓰가시라"의 다마쓰쿠리 마을과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가스미가우라의 어업은 원칙적으로 입회이며, 우라가타 조합이 자치적인 관리를 하고 있었다).
4. 1. 1. 위치와 지형
후루와타는 가스미가우라로 흘러드는 오노가와 하구에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가스미가우라(가토리 해)에 면한 항구로서 발전했으며, 남북조 시대에는 "후토노쓰"(福戸津)라고 기록된 사료가 남아 있다. 중세에는 오노가와를 경계로 오른쪽 강둑(동쪽)은 도조장, 왼쪽 강둑(서쪽)은 시타장으로 포함되어, 각각 "도조 후루와타", "훗토노쓰토테이" "신타 후루와타", "훗토노쓰시다"라고 불렸다.
에도 시대 초에는 가스미가우라 연안 어촌 "요시하치쓰"의 우라가타 조합이 성립했지만, 후루와타 마을이 "미나미쓰가시라"가 되어 "키타쓰가시라"의 다마쓰쿠리 마을과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가스미가우라의 어업은 원칙적으로 입회이며, 우라가타 조합이 자치적인 관리를 하고 있었다).
4. 1. 2. 역사적 변천
후루와타는 가스미가우라로 흘러드는 오노가와 하구에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가스미가우라(가토리 해)에 면한 항구로서 발전했으며, 남북조 시대에는 "후토노쓰"(福戸津)라고 기록된 사료가 남아 있다. 중세에는 오노가와를 경계로 오른쪽 강둑(동쪽)은 도조장, 왼쪽 강둑(서쪽)은 시타장으로 포함되어, 각각 "도조 후루와타", "훗토노쓰토테이", "신타 후루와타", "훗토노쓰시다"라고 불렸다. 두 개의 후루와타에는 어떤 거점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왼쪽 강둑 측의 신타 후루와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이하, 본 기사의 "후루와타"는 오른쪽 강둑 측의 도조 후루와타이다.
후루와타성(별명으로 후루야성・코타니성・쿠라마에성)은 80m 사방의 구루와를 가진 소규모 성으로, 이나시키시 교육위원회가 설치한 현지 게시판에서는 "야마오카 카게히사"가 축성했다고 기록한다[1]. 이바라키현 교육위원회 발행의 『이바라키현의 중세 성관』(2003년)은 "니와 나가시게가 축성에 관여한 근세 성곽"이라고 하면서, "그 흥취는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 있다. 『이바라키현의 중세 성관』에서는, 니와 나가시게가 근세 성곽으로 개수한 것은 후루와타성터의 동쪽 450m 정도 지점(미네 쿠마노 곤겐 및 그 후방 대지)에 있던 "후루와타 히가시성터"의 가능성을 추측하고 있다. 후루와타의 성은, 니와 나가시게가 에도자키로 옮겨간 시기에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에도 시대 초에는 가스미가우라 연안 어촌 "요시하치쓰"의 우라가타 조합이 성립했지만, 후루와타 마을이 "미나미쓰가시라"가 되어 "키타쓰가시라"의 타마즈쿠리 마을과 함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가스미가우라의 어업은 원칙적으로 입회이며, 우라가타 조합이 자치적인 관리를 하고 있었다).
4. 1. 3. 후루와타 성
후루와타는 카스미가우라로 흘러드는 오노가와 하구에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카스미가우라(가토리 해)에 면한 항구로서 발전했으며, 남북조 시대에는 "후토노쓰"(福戸津)라고 기록된 사료가 남아 있다. 중세에는 오노가와를 경계로 오른쪽 강둑(동쪽)은 도조장, 왼쪽 강둑(서쪽)은 시타장으로 포함되어, 각각 "도조 후루와타", "훗토노쓰토테이" "신타 후루와타", "훗토노쓰시다"라고 불렸다.
후루와타성(별명으로 후루야성・코타니성・쿠라마에성)은 80m 사방의 구루와를 가진 소규모 성으로, 이나시키시 교육위원회가 설치한 현지 게시판에서는 "야마오카 카게히사"가 축성했다고 기록한다[1]. 이바라키현 교육위원회 발행의 『이바라키현의 중세 성관』(2003년)은 "니와 나가시게가 축성에 관여한 근세 성곽"이라고 하면서, "그 흥취는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 있다. 『이바라키현의 중세 성관』에서는, 니와 나가시게가 근세 성곽으로 개수한 것은 후루와타성터의 동쪽 450m 정도 지점(미네 쿠마노 곤겐 및 그 후방 대지)에 있던 "후루와타 히가시성터"의 가능성을 추측하고 있다. 후루와타의 성은, 니와 나가시게가 에도자키로 옮겨간 시기에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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