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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다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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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센다이번은 1601년 다테 마사무네가 이와데야마 성에서 센다이 성으로 거점을 옮기면서 성립된 일본 에도 시대의 번이다. 쌀을 중심으로 한 농업을 기반으로 경제를 운영했으며, 18세기에는 100만 석을 넘는 내고를 기록하기도 했다. 센다이 번은 오슈에쓰 열번동맹의 맹주로서 보신 전쟁에 참여했으나, 신정부군에 패배하여 영지를 몰수당하고 폐지되었다. 이후 미야기현 등에 편입되었다. 센다이번은 봉토를 봉록으로 주는 지배 체제를 통해 가신들을 관리했으며, 남쪽은 센다이 성을 중심으로, 북쪽은 에아이가와를 방어선으로 하는 등 이중의 방어 체제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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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다이번
개요
센다이성 오테몬 스미야구라
센다이성 오테몬 스미야구라 재건
통칭다테 번 (伊達藩)
국가일본
시대에도 시대
성립게이초 6년 (1601년)
폐번메이지 4년 7월 14일 (1871년 8월 29일)
정치
정치 체제
번주다이묘
초대 번주다테 마사무네 (1600-1636)
마지막 번주다테 무네모토 (1868)
거성아오바성
가문다테 씨
신분외양 다이묘
격식국주
에도성 대기 장소오히로마 (大広間)
작위백작
역사
입번게이초 6년 (1601년)
폐번치현메이지 4년 (1871년)
행정 구역
구니무쓰국
현재의 행정 구역후쿠시마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경제
고쿠다카62만 석 → 28만 석
문장
다케니 스즈메 (竹に雀)
다테 씨의 몬

2.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다테 마사무네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에 필적하는 다이묘였다. 히데요시 사후, 마사무네는 이에야스와 협력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 마사무네는 옛 영지를 회복하려 했으나,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의 배신 행위를 눈감아주는 대신 100만 석 영지 약속을 무효로 했다.

1601년(게이초 6년), 마사무네는 고쿠분 가문의 거점인 지요 성을 수축해서 센다이 성으로 개칭하고, 거점을 이와데야마 성에서 센다이로 옮겼다. 이로써 마사무네를 초대 번주로 한 센다이 번(62만 석)이 성립되었다.

1613년(게이초 18년), 마사무네는 센다이 번과 스페인의 태평양 무역을 도모하여,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외교사절로 임명하여 멕시코, 스페인, 로마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듬해 막부가 금교령을 내리고 기독교를 탄압하면서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야스 사후,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막부의 중진이 되는 길을 택했다. 2대 번주 다테 다다무네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를 정실로 맞이하는 등 쇼군 가문과의 관계를 긴밀히 했다. 5대 번주 다테 요시무라는 번 재정을 재건하고, 이시노마키에 동전 주조장을 설치하여 간에이쓰호를 주조했다. 또한 비단, 말 생산을 장려했다.

메이지 유신 무렵, 센다이 번은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동맹의 맹주로 등장했다. 센다이 번은 신정부군에 뒤지지 않는 화력과 병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쓰마 번, 조슈 번이 영국으로부터 구입한 화기와의 성능 차이 등으로 신정부에 밀렸다. 센다이 번은 신정부군에 맞서 격전을 벌였으나 소마 나카무라 번의 배신으로 대패, 결국 항복했다. 센다이 번은 28만 석으로 감봉되었으며, 번사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고 홋카이도 개척에 나서기도 했다. 폐번치현으로 센다이 번은 폐지되어 미야기 현의 일부가 되었다.

2. 1. 센다이 번 성립 이전

16세기 중반, 현재의 미야기현 북부에서 이와테현 남부에 이르는 지역은 오사키 가문(大崎家)과 카사이 가문(葛西家)이 다스리고 있었다. 미야기현 중부는 루스 가문(留守家), 구니부케 가문(国分家), 구로카와 가문(黒川家)의 영지였다. 남쪽에서는 신다치 지방(信達地方)과 오키시마 지방(置賜地方)을 기반으로 하는 다테 가(伊達家)가 세력을 확장하여, 이들 여러 세력은 다테 가문의 영향을 받았다.[16]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우츠노미야(宇都宮)에서 오슈 시치쿠(奥州仕置)를 실시했다. 다테 마사무네는 전년에 아이즈의 아시나 가문(蘆名家)을 멸망시켜 넓은 영토를 확보했지만, 오슈 시치쿠에 의해 이전 영지만 인정받고 아이즈 영지는 몰수당했다. 오사키 가문, 카사이 가문 등은 개역(改易)되었다. 오사키 가문과 카사이 가문의 옛 영지에는 기무라 요시키요(木村吉清)가 임명되었지만, 곧 카사이 오사키 잇키(葛西大崎一揆)가 일어났다. 이 잇키는 마사무네와 가모 우지사토에 의해 진압되었고, 잇키의 책임을 추궁당한 요시키요는 영지를 빼앗겼다. 이 잇키에는 마사무네의 개입이 의심되었고, 히데요시는 다테 가문의 근거지였던 신다치 지방과 오키시마 지방을 빼앗고, 옛 오사키, 카사이 영지 전군과 카리타군(刈田郡)을 제외한 현재의 미야기현 중남부 지역을 마사무네의 영지로 하는 시치쿠를 실시했다.[16]

히데요시 사후,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했다. 1600년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에서 마사무네는 이에야스로부터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한 대비를 요구받았다. 이때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히데요시에게 몰수당한 다테군(伊達郡), 오키시마군(置賜郡) 등의 옛 영지를 회복하고, 영지를 100만 석까지 증가시킨다는 약속을 했다(소위 "백만 석의 어묵(お墨付き)").[16] 마사무네는 우에스기(上杉) 영토에 쳐들어가 시로이시 성 전투에서 우에스기 세력을 격파하고, 우에스기 세력에게 공격받은 야마가타(山形)의 모가미 요시아키에게 원군을 보냈지만, 원군은 전투를 방관하게 했다. 한편, 마사무네는 같은 도쿠가와(徳川) 측인 난부 도시나오의 영지에서 와가 다다치카를 지원하여 이와사키 잇키(岩崎一揆)를 일으켰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의 공훈 포상에서 이에야스가 마사무네에게 인정한 새로운 영지는 카리타군(刈田郡) 뿐이었다.[16]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의 노골적인 야망을 경계하여, 전승 후 유력한 다이묘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사무네는 에도의 천하부흥(天下普請)에 동원되는 등 2년간 영토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1601년, 마사무네는 구니부케 가문(国分家)의 거성이었던 지요 성(千代城)을 수축(실질적으로는 신축)하여 "센다이 성"으로 개칭하고, 그동안의 거성이었던 이와데야마 성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동시에 조카마치도 건설하여 마사무네를 초대 번주로 하는 센다이번(62만 석)이 성립되었다. 1611년에 센다이를 방문한 스페인령 멕시코(ヌエバ・エスパーニャ)의 대일 특파 대사(大使)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는 센다이 성에서 내려다본 센다이 조카마치의 모습을 "에도와 거의 같은 크기이지만, 건물은 더욱 웅장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시기의 센다이 성하 마을 인구는 5만 명으로 추정된다.[17]

2. 2. 센다이 번의 성립과 발전

1601년, 다테 마사무네는 지요 성을 수축하여 센다이 성으로 개칭하고, 거점을 이와데야마 성에서 센다이로 옮겨 센다이 번(62만 석)이 성립되었다.[1] 마사무네는 센다이 번과 스페인 간의 태평양 무역을 추진, 1613년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사절단장으로 임명하여 멕시코, 스페인, 로마에 파견했다. (게이초 유럽 사절단)[18]

유럽에서 작성된 보고서에 그려진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초상. Faxicura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서일본 지역의 번들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직접 유럽과 교역을 하게 되면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사절 파견에 작용했다. 혹은 이 외교 사절의 진짜 목적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일본으로 불러들여 마사무네 군과의 공동작전에 참여시켜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18] 그러나 막부금교령으로 인해 교섭은 실패로 끝났다.[19]

마사무네 사후, 다테 가문은 도쿠가와 막부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며 번 통치를 안정시켰다. 5대 번주 다테 요시무라는 번 재정을 재건하고, 동전 주조, 비단 생산, 말 생산 장려 등 산업 진흥책을 추진하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린다. 요시무라는 이시노마키에 동전 주조장을 설치하고 간에이쓰호를 주조했다.

2. 3. 에도 시대 후기의 위기와 개혁

18세기 중엽부터 잦은 기근이 발생했다. 6대 번주 이달레 무네무라(伊達宗村) 시대의 호레이키 기근으로 매미제를 통한 재정 재건은 실패했고, 7대 번주 이달레 시게무라(伊達重村)의 실정과 덴메이 대기근으로 번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다. 19세기 초에는 가로(家老) 나카무라 카게사다(中村景貞)의 정책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덴포 대기근과 해안 방비 비용 조달로 재정난은 더욱 심각해졌다.[24]

1836년(덴포 6년) 기근 대응은 번의 현물 지급과 자금 조달 한계를 넘어 각 지역에 맡겨졌다. 시로이시의 카타쿠라 가문은 아키타의 사타케 북가에 3000석의 매입을 요청하는 등 과거의 인연을 의지해 대처했다.[24] 1837년(덴포 7년)에는 성 아래에서도 봉록미 지급이 지연된 하급 번사들이 소동을 일으키고, 강도나 방화가 빈발하는 등 불안한 상황이 이어졌다. 같은 해 2월 신발다 번의 거상, 이치시마 지로하치에게서 확보한 8000석이 해로를 통해 도착하여 구제 전망이 보였지만, 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다.[24]

2. 4. 보신 전쟁과 센다이 번

메이지 유신 무렵, 센다이 번은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동맹의 맹주로 참여했다. 아이즈 번과 쇼나이 번에 대한 동정적인 분위기와 신정부의 횡포에 대한 반발에 힘입어 일어난 센다이 번은 상당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에조치 경비 임무를 맡아 신정부군에 뒤지지 않는 화력과 병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사쓰마 번, 조슈 번이 영국으로부터 구입한 화기와의 성능 차이 등으로 인해 번벌 정부에 밀렸다.[10][11][12]

시라카와 성 공방전에서는 아이즈 번과 함께 북부 정부의 주력군으로서 분전했고, 히라카타 전선에서도 신정부군과 교전했으나, 양쪽 전선에서 패배하고 퇴각했다. 센다이 번은 북상해 오는 신정부군에 맞서 격전을 벌였으나 소마 나카무라 번의 배신으로 대패, 1266명이 전사하면서 결국 항복했다. 메이지 정부로부터 적군의 맹주라는 책임을 추궁당하고, 센다이 번은 28만 석으로 감봉되었으며, 이 급격한 감봉으로 인해 센다이 번의 번사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25][26][27]

번사들 중에는 살 길을 찾아 귀농하거나, 신천지를 찾아 홋카이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에 의한 홋카이도 개척은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한편 센다이 번의 주요 시설들은 신정부에 의해 접수되어, 센다이 성은 군사시설로, 와카바야시 성은 형무소 및 수용 시설로 사용되었다. 폐번치현으로 센다이 번은 폐지되어, 센다이 현, 가쿠다 현, 도메 현, 이사와 현으로 나뉘었다. 최종적으로는 북부 일부는 이와테 현으로, 소마 신치 정은 후쿠시마 현으로 편입되었고, 그 외 대부분의 지역은 미야기 현에 들어갔다.[28][29][30]

2. 5.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무렵, 센다이 번은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동맹의 맹주로 등장했다. 아이즈번쇼나이번에 대한 동정적 분위기와 신정부의 횡포에 대한 반발에 힘입어 센다이 번은 일본 내에서도 상당한 병사 수를 자랑했고, 에조치 경비 임무를 맡아 신정부군에 뒤지지 않는 화력과 병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쓰마번, 조슈번영국으로부터 구입한 화기와의 성능 차이 등으로 번벌 정부에 밀렸다. 시라카와 성 공방전에서는 아이즈 번과 함께 북부 정부의 주력군으로서 분전했고, 히라카타 전선에서도 신정부군과 교전했으나, 양쪽 전선에서 패하고 퇴각했다. 센다이 번은 북상해 오는 신정부군에 맞서 격전을 벌였으나 소마 나카무라 번의 배신으로 대패, 1266명이 전사하면서 결국 투항했다.

메이지 정부로부터 적군의 맹주라는 책임을 추궁당한 센다이 번은 28만 석으로 감봉되었으며, 이 급격한 감봉으로 인해 센다이 번의 번사들은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번사들 중에는 살 길을 찾아 귀농하거나, 신천지를 찾아 홋카이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에 의한 홋카이도 개척은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한편 센다이 번의 주요 시설들은 신정부에 의해 접수되어, 센다이 성은 군사시설로, 와카바야시 성은 형무소 및 수용 시설로 사용되었다. 폐번치현으로 센다이 번은 폐지되어 센다이 현, 가쿠다 현, 도메 현, 이사와 현으로 나뉘었다. 최종적으로 북부 일부는 이와테현으로, 소마 신치정후쿠시마현으로 편입되었고, 그 외 대부분의 지역은 미야기현이 되었다.[28]

3. 역대 번주

센다이번 역대 번주
대수이름초상화재위 기간비고
1다테 마사무네--1600년 ~ 1636년센다이번 초대 번주. 오다와라 공방전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영지를 하사받음. 아오바 성 건설 시작.
2다테 다다무네--1636년 ~ 1658년
3다테 쓰나무네--1658년 ~ 1660년
4다테 쓰나무라--1660년 ~ 1703년후견인: 다테 무네카쓰, 다무라 무네요시
5다테 요시무라--1703년 ~ 1743년
6다테 무네무라--1743년 ~ 1756년
7다테 시게무라--1756년 ~ 1790년
8다테 나리무라--1790년 ~ 1796년
9다테 지카무네--1796년 ~ 1809년(1812년)후견인: 호리타 마사아쓰
10다테 나리무네--1812년 ~ 1819년
11다테 나리요시--1819년 ~ 1828년
12다테 나리쿠니--1828년 ~ 1841년
13다테 요시쿠니--1841년 ~ 1868년보신 전쟁 후 징계 처분 및 영지 몰수[31]
14다테 무네모토--1868년 ~ 1870년28만 석으로 상속 인정[32], 백작
15다테 무네아쓰--1870년 ~ 1871년무네모토가 어려 센다이번 주사에 취임. 폐번치현, 남작


4. 경제

다테 마사무네가 세운 센다이 번은 메이지 시대폐번치현까지 다테 본가가 대대로 통치하였다. 도쿠가와 쇼군가로부터 마쓰다이라 을 허락받았으며,[15] 역대 번주 거의 전원에게 무쓰노카미 관위가 주어졌다.

표고는 62만 56석 5두 4승 4합으로 제번 가운데 3위였으며, 실고는 지번인 이치노세키 번을 포함하여 18세기 초에는 100만 석을 넘었다. 영내에서 생산된 쌀은 에도의 식량을 지탱했고, 말린 전복이나 상어 지느러미는 나가사키 다보물로 에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였다.[35]

이 외에도 호소쿠라 광산에서 채굴되는 , 와쿠야 정에서 채굴되는 등 광산 자원이 풍부했고, 제철업을 장려했다. 센다이는 말 생산에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번 차원에서 육성에 힘썼다.[35] 소금, 옻, 담배, 홍화도 번의 전매품이었다.

하지만 쌀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는 번 재정을 쌀 생산량과 시세에 크게 좌우되게 만들었다. 특히 매입미제는 흉작에 취약하여, 흉작 시 번은 큰 빚을 졌고, 풍작이고 쌀 시세가 높으면 장기간의 빚이 일거에 상환되기도 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잦은 기근과 구미 열강에 대한 해안 방비에 의한 지출이 번 재정을 압박했다. 덴포 10년에는 막부에 허가를 받아 참근교대를 연기하기도 했다. 막말에는 시바타 조노리(시바타 다미부)가 번표(藩札) 발행을 실시하여 경제 혼란을 일으켰고, 다테기 나리유키는 표고 62만 석이면서 10만 석 한정으로 번 재정 운영을 선언했다.

4. 1. 농업

다테 마사무네가 세운 센다이 번의 주요 생산품은 쌀이었다. 에도 시대에는 기타카미가와(北上川) 유역 습지대 개척 등의 신전 개발(新田開発)을 통해 18세기 이후 내고(内高)가 100만 석을 넘을 정도로 많은 쌀을 수확했다. 또한, 사실상의 전매제도(専売制度)라 불리는 매입미제(買米制)를 도입하여 쌀을 해로(海路)로 에도(江戸)에 운반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15]

가야바 기코(萱場木工)의 『고덴미츠요(古伝密要)』에 따르면, 대흉작이 아닌 한 센다이 번은 매년 약 25만~30만 석의 쌀과 농산물(주로 콩)을 수출했는데, 이 중 10만 석은 에도 이외의 지역으로 수출되는 "탈석(脱石)"이 되었고, 또한 난부 번(南部藩)에서 수입된 "북미(北米)" 5만 석을 더하여 이시마키(石巻)에서 에도로 매년 약 20만~25만 석의 쌀과 농산물이 수송되었다. 이 중 에도에서의 등미(登米)와 역미(役米)를 제외한 약 절반인 10만 석이 "센다이 쌀(仙台米)"로서 에도에 유통되었다고 한다. 센다이 쌀의 에도 수출은 간에이 9년(1632년)에 시작되었으며, 메이와 7년(1770년)에 쓰여진 『연가기담(煙霞綺談)』에는 "지금 에도의 3분의 1은 오슈(奥州) 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33]

이치노세키 번(一関藩)을 포함한 센다이 번 내고(1관=10석으로 환산)의 변천은 다음과 같다.

센다이·이치노세키 번 내고의 변천
연호(元号)서력(西暦)고(高)(석고로 환산)출전(出典)
덴쇼(天正)1591년경428,142.57센다이 국어군 방식목(仙台国御郡方式目)
분로쿠(文禄)1595년경513,771.08센다이 국어군 방식목
게이쵸 3년(慶長3年)1598년557,602.00센다이총서별집(仙台叢書別集)
게이쵸 6년(慶長6年)1601년600,000.00다테가(伊達家) 기록 발췌(記録抜書)
간에이 11년(寛永11年)1634년(영지고(領知高)) 600,000.00쇼군 이에미쓰(将軍家光) 어판물(御判物)
(본지분(本地分)) 654,110.88간에이 총검지(寛永惣検地)
간에이 17년(寛永17年)1640년745,293.38센고쿠어군 방식목(仙国御郡方式目)(간에이 총검지고(寛永惣検地高))
칸분 3년(寛文3年)1663년829,801.82센고쿠군촌제구기초(仙国郡村諸旧記抄)
엔보 4년(延宝4年)1676년850,057.30고조입엔보 4년지서상(御蔵入延宝四年之書上)
테이쿄 원년(貞享元年)1684년930,195.42센고쿠군촌제구기초
테이쿄 2년(貞享2年)1685년930,208.76센고쿠군촌제구기초
테이쿄 3년(貞享3年)1686년935,383.23센고쿠군촌제구기초
겐로쿠(元禄)?1690년경945,084.40센고쿠군촌제구기초
호에이 7년(宝永7年)1710년839,991.80무케테콘(武家手控)
쿄호 2년(享保2年)1717년995,880.00센다이총서별집
쿄호 3년(享保3年)1718년1,007,676.91출입사직감(出入司職鑑)
겐분 3년(元文3年)1738년1,016,486.99출입사직감
엔쿄 원년(延享元年)1744년1,019,953.62출입사직감
호레이 4년(宝暦4年)1754년1,021,831.68
(오슈분(奥州分)) 999,002.76
고덴미츠요
분카 12년/분카 13년(文化12年/文化13年)1815년/1816년1,017,218,30다테가출입사문서(伊達家出入司文書)
분세이 7년(文政7年)1824년1,009.461.00고자이용방십가조신달류(御財用方十ヶ条申達留)
템포 9년(天保9年)1838년1,014,909.76다테가간정방(伊達家勘定方)
카에이 5년(嘉永5年)1852년1,012,829.42
(오슈분) 947,736.95
다테가간정방
안세이 원년(安政元年)1856년1,013,521.62다테가출입사문서
메이지 원년(明治元年)1868년(오슈분) 980,000.00구 센다이 번치개요(旧仙台藩治概要)



간에이 17년의 검지(検地) 결과, 총 농산고 74만 5293석 3두 8승 중 쌀 수확량이 8할 이상을 차지했다. 상세 내역은 다음과 같다.

간에이 17년 총검지(寛永17年惣検地)
전·답·차밭(田・畑・茶畑)고(高)(석고로 환산)반별(反別)1정(町)당 수량(収量)
전(田)608,571.665만 244정 4반 2무 22보(歩)12.1122석
답(畑)126,048.984만 5109정 6반 6무 13보2.7943석
차밭(茶畑)10,672.74305정 4반 7무 19보3.4939석
합계(合計)745,293.389만 5659정 5반 6무 24보7.7904석



테이쿄 연간의 지행(知行) 구성은 다음과 같다.

테이쿄 연간의 지행(貞享年間の知行)
고·반별(高・反別)합계(合計)본지(本地)신전(新田)차밭(茶畑)
고 합계(石高로 환산)935,383.23765,606.48159,487.5710,289.18
내, 고조입(御蔵入)278,809.43214,253.6754,472.4310,083.33
내, 급인(給人)655,131.69549,937.13104,909.09195.43
내, 제야식(除屋敷)1,442.111415.6816.0510.38
본지·신전 반별(町歩)126,19099.60626.584
내, 전(田)66,18352,66313.520
내, 답(畑)60,00746,94313.064
1정당 수량(収量)7.4125석7.6863석5.9994석



이처럼 쌀에 의존한 경제는 번(藩)에 다른 산품 개발 동기를 잃게 하고, 번 재정은 쌀 풍흉과 시세에 좌우되어 불안정했다. 특히 매입미제는 흉작에 취약하여, 흉작 시 번은 큰 빚을 졌고, 풍작이고 쌀 시세가 높으면 장기간의 빚이 일거에 상환되기도 했다. 이는 "농업은 도박이다"라는 속담을 그대로 보여주는 번 경영이었다.[33]

흉작 시 영내는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농민뿐 아니라 무사 계급까지 기아로 사망했다. 이는 다른 번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덴메이 원년 50만 2124명이던 무쓰(陸奥) 영내 군방(郡方) 인구는 덴메이 대기근(天明の大飢饉) 이후 칸세이 원년 40만 9632명으로 감소했다. 주요 사인은 대흉작에 의한 기아보다는 체력 약화 상태에서 유행한 장티푸스(腸チフス) 등이었다. 기아 사망자 20만 명은 과장된 수치이나, 번 전체 인구가 10만 명 단위로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흉작 원인으로는 야마세(やませ)에 의한 한해(冷害), 덴메이 3년 아사마산(浅間山) 덴메이 대분화(天明大噴火), 기타카미가와 홍수에 의한 반복된 수해 등이 있었다. 기근의 인위적 요인으로는 매입미·회미(廻米) 제도가 지적되기도 한다.[33]

4. 2. 상업 및 수공업

센다이 번은 쌀을 해로로 에도에 운반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말린 전복이나 상어 지느러미는 나가사키 다보물로 에 수출했다.[35] 특히 산리쿠산 건전복은 센다이 번령의 기센군(気仙郡) 요시하마무라(吉浜村)(현 이와테현(岩手県) 오후나토시(大船渡市))에서 이름을 따서 吉品鮑|캇판파오중국어라고 불렸다.

견직물 생산, 광산 개발, 말 생산 등도 장려했다. 소금, 옻, 담배, 홍화 등도 번의 전매품이었다.

이러한 유리한 환경이었지만, 고조입지에서의 연공은 약 10만~20만 석 정도로 변동했다. 에도 시대 후기 이후는 덴메이 대기근, 템포 대기근 등의 흉작이나 구미 열강에 대한 해안 방비에 의한 지출이 번 재정을 압박했다.

4. 3. 재정

센다이 번은 쌀 생산량과 시세에 따라 재정이 크게 좌우되는 불안정한 구조였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잦은 기근과 해안 방비 등으로 인해 재정난이 심화되었다.[24]

센다이 번의 주요 생산품은 쌀이었다. 에도 시대에는 기타카미 강 유역 습지대 개척 등의 신전 개발을 통해 18세기 이후 내고(内高)가 약 100만 석에 달할 정도로 많은 쌀과 농작물을 수확하게 되었다. 또한, 사실상의 전매제도라 불리는 매입미제(買米制)가 도입되었다. 그 쌀을 해로로 에도에 운반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가야바 기코(萱場木工)의 『고덴미츠요(古伝密要)』에 따르면, 대흉작이 아닌 한 센다이 번은 매년 약 25만~30만 석의 쌀과 농산물(주로 콩)을 수출했는데, 이 중 10만 석은 에도 이외의 지역으로 수출되는 "탈석(脱石)"이 되었고, 또한 난부 번에서 수입된 "북미(北米)" 5만 석을 더하여 이시마키에서 에도로 매년 약 20만~25만 석의 쌀과 농산물이 수송되었다. 이 중 에도에서의 등미(登米)와 역미(役米)를 제외한 약 절반인 10만 석이 "센다이 쌀"로서 에도에 유통되었다고 한다. 센다이 쌀의 에도 수출은 간에이 9년(1632년)에 시작되었으며, 메이와 7년(1770년)에 쓰여진 『연가기담(煙霞綺談)』에는 "지금 에도의 3분의 1은 오슈 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부 쌀은 해산물과 함께 오사카에도 운반되었고, 센다이 번은 오사카에 창고 숙소(蔵屋敷)를 설치했다. 이시마키는 이러한 항로의 거점으로 크게 발전했다.[33]

이치노세키 번을 포함한 센다이 번 내고(1관=10석으로 환산)의 변천은 다음과 같다. 표고(表高)는 62만 56석 5두 4승이지만, 신전 개발에 의해 18세기 초에 내고는 100만 석을 초과했다.[33]

센다이·이치노세키 번 내고의 변천
연호(元号)서력(西暦)고(高)(석고로 환산)출전(出典)
덴쇼(天正)1591년경428,142.57센다이 국어군 방식목(仙台国御郡方式目)
분로쿠(文禄)1595년경513,771.08센다이 국어군 방식목
게이초 3년(慶長3年)1598년557,602.00센다이총서별집(仙台叢書別集)
게이초 6년(慶長6年)1601년600,000.00다테가(伊達家) 기록 발췌(記録抜書)
간에이 11년(寛永11年)1634년(영지고(領知高)) 600,000.00쇼군 이에미쓰(将軍家光) 어판물(御判物)
(본지분(本地分)) 654,110.88간에이 총검지(寛永惣検地)
간에이 17년(寛永17年)1640년745,293.38센고쿠어군 방식목(仙国御郡方式目)(간에이 총검지고(寛永惣検地高))
칸분 3년(寛文3年)1663년829,801.82센고쿠군촌제구기초(仙国郡村諸旧記抄)
엔보 4년(延宝4年)1676년850,057.30고조입엔보 4년지서상(御蔵入延宝四年之書上)
테이쿄 1년(貞享元年)1684년930,195.42센고쿠군촌제구기초
테이쿄 2년(貞享2年)1685년930,208.76센고쿠군촌제구기초
테이쿄 3년(貞享3年)1686년935,383.23센고쿠군촌제구기초
겐로쿠(元禄)1690년경945,084.40센고쿠군촌제구기초
호에이 7년(宝永7年)1710년839,991.80무케테콘(武家手控)
쿄호 2년(享保2年)1717년995,880.00센다이총서별집
쿄호 3년(享保3年)1718년1,007,676.91출입사직감(出入司職鑑)
겐분 3년(元文3年)1738년1,016,486.99출입사직감
엔쿄 1년(延享元年)1744년1,019,953.62출입사직감
호레이 4년(宝暦4年)1754년1,021,831.68
(오슈분(奥州分)) 999,002.76
고덴미츠요
분카 12년/분카 13년(文化12年/文化13年)1815년/1816년1,017,218,30다테가출입사문서(伊達家出入司文書)
분세이 7년(文政7年)1824년1,009.461.00고자이용방십가조신달류(御財用方十ヶ条申達留)
템포 9년(天保9年)1838년1,014,909.76다테가간정방(伊達家勘定方)
카에이 5년(嘉永5年)1852년1,012,829.42
(오슈분) 947,736.95
다테가간정방
안세이 1년(安政元年)1856년1,013,521.62다테가출입사문서
메이지 1년(明治元年)1868년(오슈분) 980,000.00구 센다이 번치개요(旧仙台藩治概要)



칸세이 9년(1797년) 가야바 기코의 『고덴미츠요』에 따르면, 오슈령 분 내고 99만 9002석 7두 6승에 대해 공조율 53%인 52만 9476석 7두 6승 2합 8작을 세수로 하고, 실제 쌀의 수확량은 세수의 3배, 잡곡의 수확량은 세수와 거의 같다는 과잉의 가정에 의해, 센다이 번 오슈령 분의 쌀·잡곡의 실고 합계를 세수의 4배(내고의 2.12배)인 211만 7906석 1두 5승 1합으로 추산하고 있다. 에도 시대 말기의 안이 소켄(安井息軒)의 『독서여적(読書余適)』에는 "200만 석 이상", 마찬가지로 에도 시대 말기의 호아시 만리(帆足万里)의 『동잠부론(東潜夫論)』에는 "250만 석"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부터 센다이 번의 실고는 200만~250만 석에 달했다는 설이 널리 유포되고 있지만, 이러한 숫자는 모두 추론에 근거한 과장된 숫자이며, 실태와는 동떨어져 있다. 지조 개정(地租改正) 후의 구 센다이 번령 분의 메이지 10년~메이지 12년 3개년 평균 농작물 쌀 환산 석고는 130만 석(내, 쌀 91만 석, 콩 12만 석(쌀값 환산으로 12만 석 상당), 보리 22만 석(쌀값 환산으로 10만 석 상당) 등)이며, 풍작 시에는 쌀 수확량만으로 내고를 상회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 실태이다.[34]

간에이 17년(1640년)의 검지고 7만 4529관 338문(74만 5293석 3두 8승 상당)에 차지하는 전답(田畑)의 고와 반별(反別)은 다음과 같으며, 쌀의 수확량은 총 농산고의 8할 이상을 차지했다. 또한 잡곡으로는 콩이 중요한 상품 작물로서 널리 재배되었지만, 내한성이 강하다고 여겨지는 조(稗)는 상품 가치가 낮아 별로 재배되지 않았다.[33]

간에이 17년 총검지(寛永17年惣検地)
전·답·차밭(田・畑・茶畑)고(高)(석고로 환산)반별(反別)1정(町)당 수량(収量)
전(田)608,571.665만 244정 4반 2무 22보(歩)12석 1두 1승 2합 2작(勺)
답(畑)126,048.984만 5109정 6반 6무 13보2석 7두 9승 4합 3작
차밭(茶畑)10,672.74305정 4반 7무 19보3석 4두 9승 3합 9작
합계(合計)745,293.389만 5659정 5반 6무 24보7석 7두 9승 4작



엔보 4년(1676년)에는 창입지(蔵入地)가 31%를 차지했지만, 테이쿄 연간(1684년경)에는 다음과 같은 지행 구성(知行構成)이 되어 창입지가 약간 감소하고 있다.

테이쿄 연간의 지행(貞享年間の知行)
고·반별(高・反別)합계(合計)본지(本地)신전(新田)차밭(茶畑)
고 합계(石高로 환산)935,383.23765,606.48159,487.5710,289.18
내, 고조입(御蔵入)278,809.43214,253.6754,472.4310,083.33
내, 급인(給人)655,131.69549,937.13104,909.09195.43
내, 제야식(除屋敷)1,442.111415.6816.0510.38
본지·신전 반별(町歩)126,19099.60626.584
내, 전(田)66,18352,66313.520
내, 답(畑)60,00746,94313.064
1정당 수량(収量)7석 4두 1승 2합 5작7석 6두 8승 6합 3작5석 9두 9승 9합 4작



전답의 반별은 안에이 4년(1775년)에는 13만 1031정 7반 3무 보에까지 증가했고, 고조입지의 비율도, 바쿠마쓰(幕末)안세이 3년(1858년)에는 39%까지 증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조입지의 비율은 낮아, 흉작 시 등의 긴축 재정 시에는 큰 부담을 센다이 번에 주었다. 예를 들어 나카츠가와 무사시(中津川武蔵)의 『고자이방전체지희등품품고봉행중피고문득취조십가조신달코우류(御在方全体之犠等品々御奉行衆被御聞届取調十ヶ条申達候留)』에 따르면, 분세이 6년(1823년)에 고조입지에서의 연공은 쌀 7만 1900석, 콩 4300석, 금 42000냥에 지나지 않았다.[33]

이와 같이 쌀에 의존한 경제는, 번에 다른 산품의 개발의 동기를 잃게 하고, 번 재정은 쌀의 풍흉과 쌀 시세의 상황에 의해 좌우되어 불안정했다. 특히 매입미제는 흉작에 약하고, 흉작이 일어나면 번은 큰 빚을 지고, 풍작이고 쌀 시세가 고가 추세인 해에는 장기간의 빚이 일거에 상환되어 버리는 등이었다. 센다이 번이 막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덴메이 3년(1783년), 덴메이 4년(1784년)에는 각각 56만 5000석, 53만 2000석의 손모고(損毛高)를 계상했고, 내고 기준의 쌀 생산량은 평년의 절반이었다고 한다. 또한 템포 7년(1836년)에는 91만 5784석의 손모고를 계상했고, 쌀 생산량은 10만 석밖에 없었다.

흉작이 일어나면 영내는 대단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농민뿐만 아니라 무사 계급까지 기아로 죽었다고 전해지지만, 이것은 다른 번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실제로 덴메이 원년(1781년)에 50만 2124명을 헤아린 무쓰 영내 군방(郡方) 인구는 덴메이 대기근(天明の大飢饉) 후의 칸세이 원년(1789년)에는 40만 9632명으로 감소하고 있다. 사인으로는 대흉작에 의한 기아보다, 체력이 약해진 곳에서 유행한 전염병("상한(傷寒)"(장티푸스)인가), "다라병(多羅病)" 등)이 훨씬 크고, 기아 사망자 20만 명이라는 것은 과장된 전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번 전체의 인구가 10만 명 단위로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흉작의 원인으로는 야마세(やませ)에 의한 한해(冷害)와 덴메이 3년(1783년)에 일어난 아사마산(浅間山)의 덴메이 대분화(天明大噴火) 외에, 신전 개발이 집중된 기타카미가와의 홍수에 의한 반복되는 수해가 들 수 있다. 한편 기근의 인위적 요인으로는 매입미·회미(廻米) 제도가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덴메이 대기근에서는 흉작 전년의 덴메이 2년(1782년)에 투기적 회미 때문에 식량 비축을 허물어버린 것도 기근에 박차를 가했다고 이가라시 소자에몬(五十嵐荘左衛門)의 『기근록(飢饉録)』에서 비난받고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바쿠마쓰까지는 센다이 번의 신전 개발은 지체되어, 거의 내고 100만 석으로 유지되었다.

이치노세키 번을 포함한 센다이 번의 구성별 인구의 변천은 다음과 같다.[33]

센다이·이치노세키 번의 구성별 인구의 변천
신분·지역(身分・地域)칸분 8년(1668년)엔보 2년(1674년)테이쿄 3년(1686년)겐로쿠 3년(1690년)겐로쿠 8년(1695년)겐로쿠 15년(1702년)쿄호 2년(1717년)쿄호 17년(1732년)칸포 2년(1742년)호레이 7년(1757년)덴메이 6년(1786년)칸세이 1년(1789년)쿄와 2년(1802년)분세이 8년(1825년)분세이 11년(1828년)케이오 3년(1867년)
일문·제사·제조·제직인(一門・諸士・諸組・諸職人)151,211176,057194,203205,916×185,570133,174143,208149,465
센다이 번(仙台藩)202,541×182,678171,639130,509140,438146,352
이와누마/이치노세키 번3,375×2,8922,6652,7703,113
센다이 마치가타(仙台町方)18,49320,07322,50122,706×20,37411,61013,30213,749
센다이 지인방(仙台寺院方)9,2099,2242,5542,884×6,2494,0074,4964,695
군방(郡方)428,955515,472557,019599,241588,251617,323×647,427603,868447,491478,064519,893
무쓰령473,892512,941507,900542,268819,162559,204534,901411,496409,632440,799481,180490,571556,983
이와누마/이치노세키 번41,58025,75626,69431,31426,29321,87720,25921,67123,032
오미령8,3329,0959,3808,9177,9828,0898,129
히타치령9,99010,1949,8409,2997,6117,3587,402
시모우사령 (1712년 이후)colspan=6|150155143147150
총인구(総人口)607,868720,826776,277819,749869,846816,061596,282598,001639,070687,802699,334



센다이 번 총인구에 차지하는 무케(武家)의 비율은 22~25%로 매우 높았다. 그러나 메이지 2년 시점에서 3만 3128가구 17만 2239명 있던 시분(士分) 중, 배신(陪臣) 2만 3477가구 11만 5771명의 거의 전부와, 다테가 직속 가신단(伊達家直属家臣団) 9651가구 5만 6468명 중 1993가구 9965명은 귀농하게 되었고, 시졸족(士卒族)의 지위를 얻은 것은 시족(士族) 2만 9408명, 졸족(卒族) 1만 3091명뿐이다.

수산업에서는 산리쿠 해역(三陸沖)에 어장을 가지고, 양항에 있어서 등의 이유로, 산리쿠 해안(三陸海岸)에서 잡히는 전복이나 상어를 건전복(干鮑)이나 상어 지느러미(フカヒレ)로 가공하여 "나가사키 다와라모노(長崎俵物)"로서 청(清)에 수출했다. 특히 산리쿠산 건전복은 센다이 번령의 기센군(気仙郡) 요시하마무라(吉浜村)(현 이와테현(岩手県) 오후나토시(大船渡市))에서 이름을 따서 "요신보(吉品鮑)()"라고 불리고 있었다.

호소쿠라 광산에서 채굴되는 , 와쿠야정(涌谷町)에서 채굴되는 등 광산 자원이 일본 국내로서는 풍부하고, 제철업을 장려했다.

센다이는 말 생산에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번을 들어 육성에 힘썼다.[35]

이 외에 소금, 옻칠, 담배, 홍화(紅花)도 번의 전매품이었다.

이러한 유리한 환경이었지만, 고조입지에서의 연공은 약 10만~20만 석 정도로 변동했다. 에도 시대 후기 이후는 흉작이나 구미 열강에 대한 해안 방비에 의한 지출이 번 재정을 직격했다. 템포 10년에는 막부에 허가를 받아 참근교대를 연기하는 상황이었지만, 막말에는 시바타 조노리(芝多常則)(시바타 타미부(芝多民部))가 번표(藩札) 발행을 실시하여 경제 혼란을 일으켰고, 다테기 나리유키(但木成行)는 표고 62만 석이면서 10만 석 한정으로 번 재정 운영을 선언했다.


  • 3000석 이상(대진) - 의복 제한 완화, 탈 것 이용을 통한 성내 출입 등의 특권이 주어졌다.
  • 100석 이상 - 군역 규정에 따라 기마 출진이 의무화되었다. 평사(平士) 중 100석 이상의 집안은 이달 세신가보(伊達世臣家譜)에 기재되었다.
  • 100석 미만


록(禄)의 지급 형태로는 지방 지급, 창미 지급, 절미 지급, 부지방 지급 등이 있었다. 또한, 한 집안인 흑천씨(黒川氏)보다 준(準)일가인 덴도씨(天童氏)의 석고가 더 많은 것처럼 "가격이 높다 = 석고가 많다"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경우도 존재한다. 또한, 센다이번(仙台藩)에서는 다치가미(太刀上) 이상의 가격에 의한 지방 지행의 대상지를 '''급인전(給人前)'''이라고도 칭하며, 백성의 토지를 지배하여 조세를 납부하게 하는 "백성전지(百姓前地)"와 급인명청지(給人名請地)(가신 자신의 사유지가 근세 이후에도 안도되어 급지에 편입된 것)에 유래하여 자신의 가신, 봉공인에게 경작하게 하거나, 소작지(小作地)로서 경영하는 "봉공인전지(奉公人前地)"로 세분화되어 있었다.[50]

5. 지배 체제

Sendai-tsuho
센다이 번이 발행한 지방 화폐인 센다이 통보(Sendai Tsūhō)


센다이 번은 다른 많은 번들과 마찬가지로 성시(현재의 센다이시)에 정치 중심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가신들은 번 영토 전역에 걸쳐 개인적인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번의 영토가 대부분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센다이 번의 고위 가신들 중 일부는 본 번에서 분리되어 자신의 영토를 세우기도 했다. 미즈사와 번(Mizusawa Domain)은 그러한 단명한 분번 중 하나였다. 다무라 가문이 통치한 이치노세키 번(Ichinoseki Domain)은 또 다른 분번이었으며, 에도 시대 말까지 존속했다.

도자마 다이묘다테 마사무네가 세운 센다이 번은 메이지 유신 시대의 폐번치현까지 다테 본가가 대대로 통치하였다. 다테 본가는 대광간 쓰메 국주 다이묘였다.[15] 대대로 도쿠가와 쇼군가로부터 마쓰다이라 성을 허락받았으며, 역대 번주 거의 전원에게 무쓰노카미 관위가 주어졌고, 세습자의 전상 겐푸쿠・사휘(편휘의 수여)가 있었다.

표고는 62만 56석 5두 4승 4합으로 제번 가운데 3위였으며, 실고는 지번인 이치노세키 번을 포함하여 18세기 초에는 100만 석을 넘었다. 지방 지행에 의해 많은 배신을 거느리고, 직속 가신 약 7000명(에도 중기 이후에는 약 1만 명), 배신을 합쳐 2만 수천 명에서 3만 명의 병력(에도 중기 이후에는 약 3만 5000명)을 거느렸다. 영내의 생산 쌀은 대소비지인 에도의 식량을 지탱했고, 말린 전복이나 상어 지느러미는 나가사키 다보물로 외화를 벌어들였다.

내분 지번으로는 무쓰 국내에 이와누마 번, 이치노세키 번, 나카쓰야마 번이 있으며, 센다이 번 지행역내에 섬과 같은 형태[49]로 존재했다. 이들 번은 센다이 번으로부터도 일문의 가격을 받아 센다이 성하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 이와누마 번주 및 엔포 9년(1681년)부터 이치노세키 번주인 다무라 씨는 마사무네의 정실 메고히메의 손자에 의해 재흥된 이래, 다테 씨의 일문이 되고 있다.
  • 나카쓰야마 번 - 제3대 번주 쓰네무네의 아들·다테 무라카즈가 3만 석을 분지받아 입번. 에도 성 등성 중에 기본과의 다툼을 일으켰기 때문에 일대로 개역되었다.


센다이 번의 별가로서 이요국에 마사무네의 장남·히데무네를 번조로 하는 우와지마 번과 그 지번·요시다 번이 있지만, 우와지마 번령은 히데무네의 오사카의 진에서의 군공에 대한 신은급여이며, 센다이 번으로부터의 분지에 의한 지번이 아니다.

센다이 번에서는 일반 번과 달리 봉록으로 봉토(지행지)를 주는 제도를 취했다. 봉토 내에서는 일정한 재판권도 인정되었다. 센다이 번은 대번이었으므로, 가신 중에는 3만 석, 2만 석과 같은 다이묘급의 봉토를 가진 자도 있었다. 이러한 지배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개혁을 목표로 했던 것이 이다테 소동의 원인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5. 1. 영지 구성

센다이 번의 영지는 무쓰국 내의 일원지행지와, 오미국, 히타치국 등의 62만 석으로 구성되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에조치에도 영지나 경계지를 보유했다.[1]

세키가하라 전투의 공으로 게이초 5년(1600년)에 가리타군 3만 8천 석이 추가되었고, 게이초 6년(1601년)에는 오미국 가모군 내 5천 석, 게이초 11년(1606년)에는 히타치국 시나타군, 쓰쿠바군, 가와치군 내 1만 석, 간에이 11년(1634년)에는 오미국 가모군 내 5천 석이 추가되었다. 이 결과, 무쓰국 내의 일원지행지에 60만 석, 무쓰국 외의 뛰어난 땅으로 오미국에 1만 석, 히타치국에 1만 석으로 총 62만 석이 되어, 이것이 막말까지의 센다이 번의 기본적인 석고가 되었다. 그 후, 히타치국 내에서 다테 영지의 대체가 여러 번 이루어지고, 쇼토쿠 2년(1712년)에 시모우사국 토요다군내가 편입됨에 따라, 이후 막말까지 본토에서 지번을 포함한 센다이 번의 영지 620056.544가 확정되었다.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계목판물』 기재의 석고(표고)와 메이지 유신기의 『구고구령취조장』 기재의 석고(내고)는 다음과 같다.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계목판물』 기재의 석고(표고)와 메이지 유신기의 『구고구령취조장』 기재의 석고(내고)
구국군명계목판물구고구령취조장
마을 수석고(표고)마을 수석고(내고)
무쓰국도오생군 일원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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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오가군 일원||6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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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도메군 일원||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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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이와이군 일원||8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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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혼요시군 일원||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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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기센군 일원||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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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단자와군 일원||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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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가미군 일원||3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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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타마즈쿠리군 일원||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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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쿠리하라군 일원||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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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시다군 일원||6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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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온다군 일원||5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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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가리타군 일원||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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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시바타군 일원||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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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이구군 일원||3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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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와타리군 일원||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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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나토리군 일원||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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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미야기군 일원||7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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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쿠로카와군 일원||4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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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에사군 일원||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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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우타군 이내||9||||9||

|-style="background:#d1e8ff;"

|align=left|소계||970||||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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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 rowspan=4|히타치국||align=left|시나타군 이내||13||||13||5598.66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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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쓰쿠바군 이내||3||3202.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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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가와치군 이내||1||1238.249||1||

|-style="background:#d1e8ff;"

|align=left|소계||17||9786.148||17||11474.53216

|-

|align=left|시모우사국||align=left|토요다군 이내||1||270.3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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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left rowspan=3|오미국||align=left|가모군 이내||18||8842.794||18||

|-

|align=left|야스군 이내||2||1157.206||2||

|-style="background:#d1e8ff;"

|align=left|소계||20||||20||

|-style="background:#e8ffd1;"

|colspan=2 align=left|합계||1,008||620056.544||1,009||1018818.66116

|}

에도 시대 후기가 되면 에조치에도 영지나 경계지가 존재했다. 에도 막부는 북방으로부터의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간세이 11년(1799년)에 히가시에조치를, 분카 4년(1807년)에는 니시에조치를 덴료로 하고, 오우 4번(쓰가루, 모리오카, 구보타, 쇼나이)에 경비를 명령했다. 분카 5년(1808년)에는 에도 막부는 센다이 번에 대해서도 하코다테·쿠나시리·에토로후로의 출병을 명령하여, 센다이 번은 약 2,000명의 병사를 파견했다. 파병은 분세이 4년(1821년)까지 계속된 후, 이들 지역은 일단 마쓰마에번령으로 복귀했다.

막말기의 안세이 2년(1855년), 다시 에도 막부마쓰마에번령을 제외한 에조치를 덴료로 하고, 오우 6번(모리오카, 센다이, 아이즈, 구보타, 쇼나이, 쓰가루)에 경비를 명령하여, 센다이 번은 히가시에조치의 시라오이에서 에토로후까지의 경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때, 센다이 번은 현재의 홋카이도 시라오이정에 진야를 두고, 또한, 네무로·아키시·에토로후·쿠나시리에 각각 출장 진야를 설치했다. 안세이 6년(1859년) 11월에는 시라오이, 토카치, 아키시, 쿠나시리, 에토로후를 센다이 번의 영지로 하는 것이 인정되었고, 센다이 번 예하의 덴료의 경계위지(히다카, 쿠시로, 하보마이, 시코탄)를 포함한 센다이 번의 영지·경계지는 홋카이도의 전체 면적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5. 2. 가신단 구성

센다이 번은 봉록으로 봉토를 주는 제도를 채택하여 중세적인 지배 체제가 유지되었다.[3] 상급 가신은 일문, 일가, 일족, 준일가, 착좌, 태도상, 대번의 7가지 가격으로 분류되었다.[3] 번사들은 번 내에 흩어진 성, 요해, 관, 소, 재소에 거주했고, 센다이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센다이 번의 가신 계급은 다음과 같이 11개로 세분화되었다.[3]

계급설명
일문(一門)다테 씨의 혈족으로, 명예는 있었으나 실질적인 정치/행정 역할은 없었다.[4]
일가(一家)다테 씨의 고위직 일상 업무를 담당했던 가문
준일가(準一家)다테 씨 내부 분쟁으로 가주를 잃거나 무능해진 가문
일족(一族)다테 씨의 부대(譜代, 오랫동안 섬긴) 가신
숙로(宿労)세습 부교(奉行, 관리)[5]
착좌(着座)성 출입 및 영주에게 신년 축하를 위해 검과 등자를 바치고 술 한 잔을 받는 가신. 다테 마사무네 이후 설립.
태도상(太刀上)신년 축하 행사에서 영주에게 검을 바치고 술 한 잔을 받는 가신. 다테 마사무네 이후 설립.
소출(召出)번의 신년 축하 행사에 참석 권한이 있던 가신. 착좌, 태도상과 마찬가지로 다테 마사무네 시대 이후 설립.[6]
평사(平士)와 대번사(大番士)센다이 번 주력 전투 부대 계급. 다테 마사무네 시대에 조직, 4대 다이묘 다테 쓰나무라 재임 중 부활. 1개 구미(組, 부대)는 360명, 총 10개 부대 3600명.
구미사(組士)평사, 대번사 아래 병사. 보병, 다도 강사, 매사냥 보조, 수행원 등.[7]
졸(卒)보병, 짐꾼, 하급 하인 등



일족 이상의 가문을 역역이라 칭하며, 의복 제한 완화, 탈것 이용 등성 등의 특권이 주어졌다. 숙로가 봉행직에 취임했을 때도 역역과 동일한 특권이 발생했다.

태도조 이상의 가문을 문벌이라고 칭했다. 조사 이상의 가문이 사분에 해당하며, 그 이하 가문은 사분 이외로 취급되었다. 각 가격의 집안은 가신단(배신)을 형성했다. 대진·역역 집안은 배배신까지 있었으며, 평사보다 녹고가 많은 배신도 존재했다.

녹(禄) 지급 형태로는 지방 지급, 창미 지급, 절미 지급, 부지방 지급 등이 있었다. "가격이 높다 = 석고가 많다"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센다이 번에서는 태도상 이상 가격에 의한 지방 지행 대상지를 '''급인전(給人前)'''이라 칭했다.[50]

5. 3. 방어 체제

센다이 번은 16세기 말에 설립되었으며, 남쪽과 북쪽에 방어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남쪽 방면에는 여러 겹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리쿠젠하마가도(陸前浜街道)(하마도리(浜通り)) 연변에는 야치고야조(谷地小屋城), 사카모토조(坂元城), 와타리조(亘理城)을 배치했다.[1] 아부쿠마가와(阿武隈川) 연변에는 가네야마조(金山城)과 카쿠다조(角田城)을, 오슈 가도(奥州街道)(나카도리(中通り)) 연변에는 카타쿠라씨(片倉氏)가 지키는 시로이시조(白石城)을 배치하여 최초 방어선으로 삼았다.[1]

오슈 가도와 아부쿠마가와(阿武隈川)가 만나는 지점에는 후나오카조(舟岡城)를, 오슈 가도와 리쿠젠하마가도(陸前浜街道)가 만나는 지점에는 이와누마조(岩沼城)를 배치했다.[1] 오슈 가도 연변, 히로세가와(広瀬川) 북쪽에는 와카바야시조(若林城)를 배치하여 센다이조(仙台城) 아래쪽 입구를 방어했다. 센다이 성은 북쪽에서 동쪽에 걸쳐 히로세가와(広瀬川)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에 니노마루 공호(二の丸空堀), 동쪽에 니노마루 토루이(二の丸土塁), 사노마루 수호(三の丸水濠) 등을 구축했다. 본마루 동쪽은 히로세가와(広瀬川) 절벽, 남쪽은 류노쿠치 계곡(竜の口渓谷), 서쪽은 아오바야마 규류(青葉山丘陵)와 같은 자연 장벽으로 둘러싸여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1]

북쪽 방면에는 에아이가와(江合川)를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동쪽부터 와쿠야조(涌谷城), 니시칸(西館), 미야자와조(宮沢城), 이와데야마조(岩出山城)을 배치했다.[1] 키타카미가와(北上川) 연변에는 토메데라이케조(登米寺池城), 이치노세키조(一関城), 미즈와조(水沢城), 가네가사키조(金ヶ崎城) (리쿠오쿠쿠(陸奥国))를 배치했다.[1]

센다이 번은 장기간의 포위전에 대비하여 센다이 성과 시로이시 성을 구축했다. 또한, 마쓰시마 만, 시오가마 만 등 천연 요새를 활용했다. 마쓰시마 만의 즈이간지와 시오가마 만의 시오가마 신사는 방어 거점으로서의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仙台藩 http://www.asahi-net[...]
[2] 웹사이트 Genealogy http://reichsarchiv.[...]
[3] 웹사이트 仙台藩家臣団 http://st.cat-v.ne.j[...]
[4] 웹사이트 仙台藩家臣団 http://st.cat-v.ne.j[...]
[5] 웹사이트 仙台藩家臣団 http://st.cat-v.ne.j[...]
[6] 웹사이트 仙台藩家臣団 http://st.cat-v.ne.j[...]
[7] 웹사이트 仙台藩家臣団 http://st.cat-v.ne.j[...]
[8] 웹사이트 A picture of the still extant main gate of Yōkendō can be seen here http://deko0625.at.w[...]
[9] 서적 Japan and the Dutch, 1600-1853 https://books.google[...]
[10] 서적 Naval Surgeon: Revolt in Japan, 1868–1869 Indiana University Press 1963
[11] 웹사이트 世良修蔵暗殺事件の周辺−世良修蔵の密書について− http://www.page.sann[...]
[12] 웹사이트 世良修蔵暗殺事件の周辺−世良修蔵の密書について− http://www.page.sann[...]
[13] 웹사이트 仙台領柱 https://www.city.ryu[...]
[14] 웹사이트 仙台藩 https://kotobank.jp/[...]
[15]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16] 서적 角川日本地名大辞典4 宮城県
[17] 서적 仙臺 1924
[18] 서적 支倉常長 慶長遣欧使節の悲劇 中央公論新社 1999
[19] 서적 支倉常長 武士、ヨーロッパを行進す ミネルヴァ書房 2007
[20] 간행물 伊達政宗羅馬遣使の目的 1901
[21] 간행물 大久保長安と伊達政宗 1903
[22] 서적 伊達政宗の研究 吉川弘文館 2008
[23] 서적 仙台藩士幕末世界一周 2010
[24] 서적 気候変動から読み直す日本史6 近世の列島を俯瞰する 臨川書店 2020-11-30
[25] 웹사이트 白鳥事件について http://shibata-y2.or[...] 2019-02-14
[26] 웹사이트 <奥羽の義 戊辰150年>(34)新政府兵に発砲 領主切腹 https://www.kahoku.c[...] 2019-01-13
[27] 서적 内閣文庫蔵諸侯年表 東京堂出版
[28] 서적 仙台市史
[29] 서적 仙台市史
[30] 서적 明治・大正・昭和 仙台じけん帳 河北新報社
[31] 웹사이트 伊達慶邦 https://kotobank.jp/[...]
[32] 웹사이트 伊達宗基 https://kotobank.jp/[...]
[33] 논문 江戸時代の人口問題 ―仙台藩の場合― 1942
[34] 서적 全国農産表/農産表 1876-1882
[35] 웹사이트 仙台藩における馬の歴史(馬政史)、宮城県の馬政史について。 https://crd.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22-09-18
[36] PDF 1 市域の変遷 2 北上市の位置 http://www.city.kita[...] 北上市
[37] 웹사이트 国勢調査 http://www.city.kita[...] 北上市
[38] PDF 市の面積 http://www.city.kama[...] 釜石市
[39] PDF 18 地域別人口及び世帯の推移 http://www.city.kama[...] 釜石市
[40] 웹사이트 平成22年全国都道府県市区町村別面積調 http://www.gsi.go.jp[...] 국토교통성, 국토지리원
[41] 웹사이트 岩手県 http://www.machimura[...] 농림수산성
[42] 웹사이트 いわての統計情報 http://www3.pref.iwa[...] 岩手県
[43] 웹사이트 宮城県 http://www.machimura[...] 농림수산성
[44] 웹사이트 平成17年国勢調査1次結果 https://web.archive.[...] 宮城県統計課
[45] 웹사이트 福島県 新地町 http://wwwcms.pref.f[...] 농림수산성
[46] 웹사이트 平成17年国勢調査 http://www.machimura[...] 福島県
[47] 서적 国宝大崎八幡宮 仙台・江戸学叢書15 『本石米と仙台藩の経済』 大崎八幡宮 2009-10-30
[48] 서적 『仙台市史』通史編3 近世1 仙台市 2001-09
[49] PDF 1 研究ノート 「岩手県の誕生」 http://www.pref.iwat[...] 岩手県立博物館だより
[50] 서적 給人前 吉川弘文館 1984
[51] 문서 仙台藩祖伊達政宗 終焉の地 仙台市 2014
[52] 문서 国宝 上杉家文書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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