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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나조노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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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하나조노 천황은 1419년에 태어나 1470년에 사망한 일본의 천황이다. 그는 1428년 쇼코 천황이 붕어한 후, 고코마쓰 상황의 유자로서 즉위하여 30여 년간 친정을 펼쳤다. 재위 기간 동안 에이쿄의 난, 가키쓰의 난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으며, 치벌윤지를 발급하여 조정의 권위를 높이는 역할을 수행했다. 1464년에는 고쓰치미카도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났으며, 오닌의 난 발발 후에는 출가하였다. 그는 시가와 학문에 능했으며, 아시카가 요시마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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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나조노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전(傳) 고하나조노 천황 상 (다이오지 소장)
추증 시호고하나조노 천황 (後花園天皇)
히코히토 (彦仁)
법명엔만치 (円満智)
출생일1418년 7월 10일
사망일1471년 1월 18일
릉묘노치노야마쿠니노미사사기 (後山國陵), 반슈인릉 (분골소)
서명
재위
즉위1428년 9월 7일
퇴위1464년 8월 21일
재위 기간 (음력)쇼초 원년 7월 28일 - 간쇼 5년 7월 19일
즉위례1430년 1월 21일 (음력 1429년 12월 27일)
대嘗祭1430년 12월 3일 (음력 1430년 11월 18일)
연호쇼초
에이쿄
가가키
분안
호토쿠
교토쿠
고쇼
초로쿠
간쇼
가계
아버지 (실제)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 (후고코인)
어머니 (실제)니와타 사치코 (시키세이몬인)
아버지 (양부)고코마쓰 천황
어머니 (양모)히노니시 스케코 (코한몬인)
배우자오오미노미카도 (후지와라) 노부코 (신시)
자녀칸신 여왕
고쓰치미카도 천황 (성인 친왕)
신조지 여왕
쇼곤 여왕
주요 사건
원복1433년 1월 24일 (음력 1433년 1월 3일)
정치
쇼군아시카가 요시노리
아시카가 요시카쓰
아시카가 요시마사
섭정니조 모토쓰구 → 이치조 가네라 → 니조 모토쓰구
관백니조 모토쓰구 → 고노에 후사쓰구 → 이치조 가네라 → 니조 모토미치 → 다카쓰카사 후사히라 → 니조 모토미치 → 이치조 노리후사 → 니조 모토미치
거주지
궁궐쓰치미카도 다카쿠라 저택
교토 고쇼
이치조히가시노토인 저택

2. 생애

오에이(応永) 26년(1419년) 6월 18일 사다나리 친왕(貞成親王)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쇼초(正長) 원년(1428년) 7월 20일, 쇼코 천황붕어(崩御)하자, 히코히토 왕은 고코마쓰 상황(後小松上皇)의 유자(猶子)가 되어 친왕 선하(親王宣下) 없이 7월 28일에 천황즉위(践祚)하고, 에이쿄(永享) 원년(1429년) 12월 27일에 즉위(即位)했다.

즉위한 이후에도 고코마쓰 상황에 의한 원정(院政)은 계속되었지만, 에이쿄 5년(1433년) 10월에 상황이 붕어(崩御)한 후에는 30여 년에 걸쳐 친정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에이쿄 11년(1439년) 6월에는 칙선와카슈(勅撰和歌集)인 『신쇼쿠고킨와카슈(新続古今和歌集)』가 완성되었다.

천황의 치세, 각지에서 토일쿠이(土一揆)가 발생하고, 에이쿄의 난(永享の乱)(에이쿄 10년, 1438년), 가키쓰의 난(嘉吉の乱)(가키쓰(嘉吉) 원년, 1441년) 등에서는 치벌윤지(治罰綸旨)를 발급하는 등의 정치적 역할도 맡아, 조정 권위의 고양을 도모했다.[18] 에이쿄의 난에서의 치벌윤지 발급은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시대 이후 폐지되었던 조적(朝敵) 제도가 60년 만에 부활한 것이었다.[18] 이후, 천황의 정치적 권위는 상승하고, 막부가 크고 작은 반란 진압에 있어 윤지를 청원했기 때문에, 황권의 부활에도 이어졌다.[18]

가키쓰 3년(1443년) 9월, 후남조(後南朝) 세력이 도고몬 도보인덴(土御門東洞院殿)을 야습하여 방화하고, 고하나조노 천황좌대신(左大臣)·고노에 후사쓰구(近衛房嗣) 저택으로 피신하지만, 삼종신기(三種の神器)의 일부를 빼앗겼다(금궐의 변(禁闕の変)). 빼앗긴 신기 중, 검은 기요미즈데라(清水寺)에서 발견되지만, 신지(곡옥)(神璽(曲玉))는 가져가졌다.

분안(文安) 원년(1444년) 2월, 동생 후시미궁 정조친왕(伏見宮貞常親王)에게 친왕 선하를 하고, 분안 4년(1447년) 11월에 아버지 사다나리 친왕(貞成親王)에게 태상천황(太上天皇)의 존호를 봉했다. 교토쿠(享徳) 4년(1455년) 1월, 고니조 천황(後二条天皇)의 5대손인 키데라궁 쿠니야스왕(木寺宮邦康王)에게 친왕 선하를 했다.

조로쿠(長禄) 원년(1457년) 12월, 가키쓰의 난에서 몰락한 아카마쓰 씨(赤松氏)의 유신(遺臣)들이 후남조의 행궁(行宮)을 습격하여 신지를 탈환하고(조로쿠의 변(長禄の変)), 조로쿠 2년(1458년) 8월에는 조정에 반환되었다.

간세이(寛正) 2년(1461년) 4월,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의 5대손인 츠키와이궁 마사아키왕(常盤井宮全明親王))에게 친왕 선하를 했다. 간세이 3년(1462년) 10월 황자 세이닌 친왕(後土御門天皇)(成仁親王)에게 『고하나조노인어소식(後花園院御消息)』[19]를 주었다.

간세이 5년(1464년) 7월 19일, 세이닌 친왕(後土御門天皇)에게 양위(譲位)하고 상황이 되어, 좌대신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를 원집사(院執事)로 하여 원정(院政)을 펼쳤다.

오닌(応仁) 원년(1467년) 교토에서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발발했을 때, 동군의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로부터 서군 치벌의 윤지(綸旨) 발급을 요청받았지만, 상황은 이를 거절했다. 같은 해 9월 20일에 출가(出家), 법명(戒名)을 '''엔만치'''(円満智)라 하였다. 상황의 출가는, 과거 자신이 발급한 하타케야마 마사나가(畠山政長)에 대한 치벌윤지가 난의 발단이 된 것으로부터 자책감에 사로잡혀, 불덕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8]

고하나조노인은 후시미궁 정조친왕과 이치조 가네요시(一条兼良) 등을 칙사로 하여 동군의 호소카와 가쓰모토에게 정전을 요청하거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畠山義就)와 스파 요시스다(斯波義廉)(斯波義簾)의 양 진영에 칙사를 파견하여 정전을 촉구하는 등 난의 수습에 노력했지만, 이러한 노력도 소용없이 오닌의 난은 장기화되었다.

분메이(文明) 2년(1470년) 12월 27일, 중풍(中風)으로 무로마치 제(室町第)에서 붕어(崩御)했다.

2. 1. 즉위 과정

오에이(応永) 26년(1419년) 6월 18일에 정성친왕(貞成親王)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쇼코 천황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고코마쓰 상황쇼코 천황이 죽기 전에 다이카쿠지 계열에 맞서 지묘인 계열의 상속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4] 그래서 후시미노미야(伏見宮) 가문에서 아들을 입양하였고, 쇼코 천황의 사후 그가 고하나조노 천황이 되었다.

쇼초(正長) 원년(1428년) 7월 20일 쇼코 천황이 2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고, 그의 양자인 고하나조노 천황이 계승(즉위)하였다.[4] 같은 해 7월 28일 고하나조노 천황은 고코마쓰 상황의 유자(猶子)가 되어 친왕선하(親王宣下)도 없이 등극하였고,[5] 에이쿄(永享) 원년(1429년) 12월 27일에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의 즉위는 스코 천황(崇光天皇) 이래 스스로 정적(正嫡)이라 칭하며 왕위가 자신들에게로 귀래하기를 염원하던 후시미노미야 가(伏見宮家)에 있어서는 실로 바라던 바였으며, 아버지 사다나리 친왕도 이를 두고 「신려」(神慮)라고, 신께서 굽어 살피신 결과라고 기뻐하였다.

즉위한 뒤에도 고코마쓰 상황의 원정(院政)은 계속되었으나, 1433년 상황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30년여에 걸쳐 친정을 행했다.

2. 2. 치세

오에이(応永) 26년(1419년) 6월 18일 사다나리 친왕(貞成親王)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쇼초(正長) 원년(1428년) 7월 20일, 쇼코 천황붕어(崩御)하자, 히코히토 왕은 고코마쓰 상황(後小松上皇)의 유자(猶子)가 되어 친왕 선하(親王宣下) 없이 7월 28일에 천황즉위(践祚)하고, 에이쿄(永享) 원년(1429년) 12월 27일에 즉위(即位)했다.

즉위한 이후에도 고코마쓰 상황에 의한 원정(院政)은 계속되었지만, 에이쿄 5년(1433년) 10월에 상황이 붕어(崩御)한 후에는 30여 년에 걸쳐 친정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에이쿄 11년(1439년) 6월에는 칙선와카슈(勅撰和歌集)인 『신쇼쿠고킨와카슈(新続古今和歌集)』가 완성되었다.

천황의 치세, 각지에서 토일쿠이(土一揆)가 발생하고, 에이쿄의 난(永享の乱)(에이쿄 10년, 1438년), 가키쓰의 난(嘉吉の乱)(가키쓰(嘉吉) 원년, 1441년) 등에서는 치벌윤지(治罰綸旨)를 발급하는 등의 정치적 역할도 맡아, 조정 권위의 고양을 도모했다.[18] 에이쿄의 난에서의 치벌윤지 발급은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시대 이후 폐지되었던 조적(朝敵) 제도가 60년 만에 부활한 것이었다.[18] 이후, 천황의 정치적 권위는 상승하고, 막부가 크고 작은 반란 진압에 있어 윤지를 청원했기 때문에, 황권의 부활에도 이어졌다.[18]

가키쓰 3년(1443년) 9월, 후남조(後南朝) 세력이 도고몬 도보인덴(土御門東洞院殿)을 야습하여 방화하고, 고하나조노 천황좌대신(左大臣)·고노에 후사쓰구(近衛房嗣) 저택으로 피신하지만, 삼종신기(三種の神器)의 일부를 빼앗겼다(금궐의 변(禁闕の変)). 빼앗긴 신기 중, 검은 기요미즈데라(清水寺)에서 발견되지만, 신지(곡옥)(神璽(曲玉))는 가져가졌다.

분안(文安) 원년(1444년) 2월, 동생 후시미궁 정조친왕(伏見宮貞常親王)에게 친왕 선하를 하고, 분안 4년(1447년) 11월에 아버지 사다나리 친왕(貞成親王)에게 태상천황(太上天皇)의 존호를 봉했다. 교토쿠(享徳) 4년(1455년) 1월, 고니조 천황(後二条天皇)의 5대손인 키데라궁 쿠니야스왕(木寺宮邦康王)에게 친왕 선하를 했다.

조로쿠(長禄) 원년(1457년) 12월, 가키쓰의 난에서 몰락한 아카마쓰 씨(赤松氏)의 유신(遺臣)들이 후남조의 행궁(行宮)을 습격하여 신지를 탈환하고(조로쿠의 변(長禄の変)), 조로쿠 2년(1458년) 8월에는 조정에 반환되었다.

간세이(寛正) 2년(1461년) 4월,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의 5대손인 츠키와이궁 마사아키왕(常盤井宮全明親王))에게 친왕 선하를 했다. 간세이 3년(1462년) 10월 황자 세이닌 친왕(後土御門天皇)(成仁親王)에게 『고하나조노인어소식(後花園院御消息)』[19]를 주었다.

간세이 5년(1464년) 7월 19일, 세이닌 친왕(後土御門天皇)에게 양위(譲位)하고 상황이 되어, 좌대신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를 원집사(院執事)로 하여 원정(院政)을 펼쳤다.

오닌(応仁) 원년(1467년) 교토에서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발발했을 때, 동군의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로부터 서군 치벌의 윤지(綸旨) 발급을 요청받았지만, 상황은 이를 거절했다. 같은 해 9월 20일에 출가(出家), 법명(戒名)을 '''엔만치'''(円満智)라 하였다. 상황의 출가는, 과거 자신이 발급한 하타케야마 마사나가(畠山政長)에 대한 치벌윤지가 난의 발단이 된 것으로부터 자책감에 사로잡혀, 불덕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8]

고하나조노인은 후시미궁 정조친왕과 이치조 가네요시(一条兼良) 등을 칙사로 하여 동군의 호소카와 가쓰모토에게 정전을 요청하거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畠山義就)와 스파 요시스다(斯波義廉)(斯波義簾)의 양 진영에 칙사를 파견하여 정전을 촉구하는 등 난의 수습에 노력했지만, 이러한 노력도 소용없이 오닌의 난은 장기화되었다.

분메이(文明) 2년(1470년) 12월 27일, 중풍(中風)으로 무로마치 제(室町第)에서 붕어(崩御)했다.

2. 2. 1. 인세 기간

에이쿄(永享) 5년(1433년) 10월에 고코마쓰 상황(後小松上皇)이 붕어(崩御)한 후, 고하나조노 천황은 30여 년에 걸쳐 친정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에이쿄 11년(1439년) 6월에는 칙선와가슈(勅撰和歌集)(21대집(二十一代集))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신속고금와가슈(新続古今和歌集)』가 완성되었다.

고하나조노 천황의 치세에는 각지에서 토일쿠이(土一揆)가 발생하고, 에이쿄의 난(永享の乱)(에이쿄 10년, 1438년), 가키쓰의 난(嘉吉の乱)(가키쓰(嘉吉) 원년, 1441년) 등에서는 치벌윤지(治罰綸旨)를 발급하는 등의 정치적 역할도 맡아, 조정 권위의 고양을 도모했다.[18] 에이쿄의 난에서의 치벌윤지 발급은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시대 이후 폐지되었던 조적(朝敵) 제도가 60년 만에 부활한 것이었다.[18] 이후, 천황의 정치적 권위는 상승하고, 막부가 크고 작은 반란 진압에 있어 윤지를 청원했기 때문에, 황권의 부활에도 이어졌다.[18]

가키쓰 3년(1443년) 9월, 후남조(後南朝) 세력이 도고몬 도보인덴(土御門東洞院殿)을 야습하여 방화하고, 고하나조노 천황좌대신(左大臣)·코노에 부시(近衛房嗣) 저택으로 피신하지만, 삼종신기(三種の神器)의 일부를 빼앗겼다(금궐의 변(禁闕の変)). 빼앗긴 신기 중, 검은 기요미즈데라(清水寺)에서 발견되지만, 신지(곡옥)(神璽(曲玉))는 가져가졌다.

분안(文安) 원년(1444년) 2월, 동생 후시미궁 정조친왕(伏見宮貞常親王)에게 친왕 선하(親王宣下)를 하고, 분안 4년(1447년) 11월에 아버지 정성친왕(貞成親王)에게 태상천황(太上天皇)의 존호를 봉했다. 교토쿠(享徳) 4년(1455년) 1월, 고니조 천황(後二条天皇)의 5대손인 키데라궁(쿠니야스왕(木寺宮邦康親王))에게 친왕 선하를 했다.

조로쿠(長禄) 원년(1457년) 12월, 가키쓰의 난에서 몰락한 아카마쓰씨(赤松氏)의 유신(遺臣)들이 후남조의 행궁(行宮)을 습격하여 신지를 탈환하고(조로쿠의 변(長禄の変)), 조로쿠 2년(1458년) 8월에는 조정에 반환되었다. 이로써 모든 신기가 천황의 손에 돌아오게 된다.

간세이(寛正) 2년(1461년) 4월, 게이잔 천황(亀山天皇)의 5대손인 츠키와이궁(마사아키왕(常盤井宮全明親王))에게 친왕 선하를 했다. 간세이 3년(1462년) 10월 황자 세이닌 친왕(後土御門天皇)(成仁親王)에게 천황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설명한 『고하나조노인어소식(後花園院御消息)』[19]를 주었다.

간세이 5년(1464년) 7월 19일, 세이닌 친왕(成仁親王)(고쓰치미카도 천황(後土御門天皇))에게 양위(譲位)하고 상황이 되어, 좌대신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를 원집사(院執事)로 하여 원정을 펼쳤다.

오닌(応仁) 원년(1467년), 교토에서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발발했을 때, 동군의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로부터 서군 치벌의 윤지(綸旨) 발급을 요청받았지만, 상황은 이를 거절했다. 화재를 피해 천황과 함께 무로마치 제(花の御所)(室町第)로 옮겼지만, 같은 해 9월 20일에 출가(出家), 법명(戒名)(法名)을 '''엔만치'''(円満智)라 하였다. 상황의 출가는, 과거 자신이 발급한 하타케야마 마사나가(畠山政長)에 대한 치벌윤지가 난의 발단이 된 것으로부터 자책감에 사로잡혀, 불덕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8] 이 출가는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무책임함에 대해 제왕 불덕의 책임을 진 행위로서,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8]

고하나조노인은 후시미궁 정조친왕과 이치조 카네요시(一条兼良) 등을 칙사로 하여 동군의 호소카와 가쓰모토에게 정전을 요청하거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畠山義就)와 스파 요시스다(斯波義廉)(斯波義簾)의 양 진영에 칙사를 파견하여 정전을 촉구하는 등 난의 수습에 노력했지만, 이러한 노력도 소용없이 오닌의 난은 장기화되었다.

2. 2. 2. 친정 기간

오에이(応永) 26년(1419년) 6월 18일 정성친왕(貞成親王)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쇼초(正長) 원년(1428년) 7월 20일, 칭광천황(称光天皇)이 붕어(崩御)하자, 히코히토왕은 고코마쓰 상황(後小松上皇)의 유자(猶子)가 되어 친왕 선하(親王宣下) 없이 7월 28일에 천황즉위(践祚)하고, 에이쿄(永享) 원년(1429년) 12월 27일에 즉위(即位)했다.

즉위한 이후에도 고코마쓰 상황에 의한 원정(院政)은 계속되었지만, 에이쿄 5년(1433년) 10월에 상황이 붕어(崩御)한 후에는 30여 년에 걸쳐 친정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에이쿄 11년(1439년) 6월에는 칙선와가슈(勅撰和歌集)인 『신속고금와가슈』(新続古今和歌集)가 완성되었다.

천황의 치세, 각지에서 토일쿠이(土一揆)가 발생하고, 영쿄의 난(永享の乱)(에이쿄 10년, 1438년), 카키쓰의 난(嘉吉の乱)(카키쓰 원년, 1441년) 등에서는 치벌윤지(治罰綸旨)를 발급하는 등의 정치적 역할도 맡아, 조정 권위의 고양을 도모했다.[18] 영쿄의 난에서의 치벌윤지 발급은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시대 이후 폐지되었던 조적(朝敵) 제도가 60년 만에 부활한 것이었다.[18] 이후, 천황의 정치적 권위는 상승하고, 막부가 크고 작은 반란 진압에 있어 윤지를 청원했기 때문에, 황권의 부활에도 이어졌다.[18]

가키쓰(嘉吉) 3년(1443년) 9월, 후남조(後南朝) 세력이 도고몬 도보인덴(土御門東洞院殿)을 야습하여 방화하고, 고하나조노 천황좌대신(左大臣)·코노에 부시(近衛房嗣) 저택으로 피신하지만, 삼종신기(三種の神器)의 일부를 빼앗겼다(금궐의 변(禁闕の変)). 빼앗긴 신기 중, 검은 기요미즈데라(清水寺)에서 발견되지만, 신지(곡옥)(神璽(曲玉))는 가져가졌다.

분안(文安) 원년(1444년) 2월, 동생 후시미궁 정조친왕(伏見宮貞常親王)에게 친왕 선하를 하고, 분안 4년(1447년) 11월에 아버지 정성친왕(貞成親王)에게 태상천황(太上天皇)의 존호를 봉했다. 교토쿠(享徳) 4년(1455년) 1월, 고니조 천황(後二条天皇)의 5대손인 키데라궁(쿠니야스왕(木寺宮邦康親王))에게 친왕 선하를 했다.

조로쿠(長禄) 원년(1457년) 12월, 카키쓰의 난(嘉吉の乱)에서 몰락한 아카마쓰씨(赤松氏)의 유신(遺臣)들이 후남조의 행궁(行宮)을 습격하여 신지를 탈환하고(초로쿠의 변(長禄の変)), 조로쿠 2년(1458년) 8월에는 조정에 반환되었다.

간세이(寛正) 2년(1461년) 4월, 게이잔 천황(亀山天皇)의 5대손인 츠키와이궁(마사아키왕(常盤井宮全明親王))에게 친왕 선하를 했다. 간세이 3년(1462년) 10월 황자 세이닌 친왕(後土御門天皇)(成仁親王)에게 『고후가든인 고소쿠쇼』(後花園院御消息)[19]를 주었다.

간세이 5년(1464년) 7월 19일, 세이닌 친왕(後土御門天皇)에게 양위(譲位)하고 상황이 되어, 좌대신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를 원집사(院執事)로 하여 원정(院政)을 펼쳤다.

오닌(応仁) 원년(1467년) 교토에서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발발했을 때, 동군의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로부터 서군 치벌의 윤지(綸旨) 발급을 요청받았지만, 상황은 이를 거부했다. 같은 해 9월 20일에 출가(出家), 법명(戒名)을 '''엔만치'''(円満智)라 하였다. 상황의 출가는, 과거 자신이 발급한 하타케야마 마사나가(畠山政長)에 대한 치벌윤지가 난의 발단이 된 것으로부터 자책감에 사로잡혀, 불덕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8]

분메이(文明) 2년(1470년) 12월 27일, 중풍(中風)으로 무로마치 제(室町第)에서 붕어(崩御)했다.

2. 3. 양위와 사망

고하나조노 천황은 1428년 쇼코 천황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고코마쓰 천황의 유자(猶子)로서 즉위하였다.[4][5] 1433년 고코마쓰 상황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상황의 원정이 계속되었고, 이후 30여 년간 친정을 행했다.[15]

고하나조노 천황의 치세 동안 에이쿄의 난(1438년), 가키쓰의 난(1441년) 등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천황은 치벌윤지(治罰綸旨)를 발급하여 진압을 명하는 등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18] 이는 아시카가 요시미쓰 이후 폐지되었던 조적(朝敵) 제도의 부활을 의미하며, 이후 천황의 정치적 권위가 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18] 1443년에는 금궐의 변으로 삼종신기 중 일부를 후남조 세력에게 빼앗기기도 했으나, 1458년 조로쿠의 변으로 되찾아왔다.[13]

1464년 아들 고쓰치미카도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어 원정을 폈다.[14] 1467년 오닌의 난이 발발하자, 동군으로부터 서군에 대한 치벌 윤지 발급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출가하였다. 이는 자신이 발급했던 치벌윤지가 난의 발단 중 하나였다는 것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다.[18]

1470년 중풍으로 사망하였다.[15] 처음에는 고분토쿠인(後文徳院)으로 추호되었으나, 이치조 가네요시 등의 의견에 따라 고하나조노인(後花園院)으로 고쳐졌다.

3. 연표

고하나조노 천황(後花園天皇)의 통치 기간 동안 대정관(太政官)의 정점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 세씨(摂政) / 간파쿠(関白) (섭정/관백):
  • * 니조 모치모토(1428~1432)
  • * 이치조 카네요시(1432)
  • * 니조 모치모토(두 번째, 1432~1433)

  • 간파쿠(関白) (관백):
  • * 니조 모치모토(계속, 1433~1445)
  • * 고노에 후사쓰구(1445~1447)
  • * 이치조 카네요시(1447~1453)
  • * 니조 모치미치(1453~1454)
  • * 다카쓰카사 후사히라(1454~1455)
  • * 니조 모치미치(두 번째, 1455~1459)
  • * 이치조 노리후사(1459~1463)
  • * 니조 모치미치(세 번째, 1463~1467)

  • 대정대신(太政大臣) (태정대신):
  • * 니조 모치모토(1432~1433)
  • * 이치조 카네요시(1446~1450)
  • * 고가 기요미치(1452~1453)
  • * 사이온지 킨나(1455~1457)
  • * 니조 모치미치(1458~1460)
  • * 고노에 후사쓰구(1462)

  • 좌대신(左大臣) (좌대신):
  • * 니조 모치모토(1427~1429)
  • * 이치조 카네요시(1429~1432)
  • * 아시카가 요시노리(1432~1438)
  • * 고노에 후사쓰구(1438~1446)
  • * 다카쓰카사 후사히라(1446~1455)
  • * 도인 사네히로(1455~1457)
  • * 이치조 노리후사(1457~1460)
  • * 산조 사네카즈(1460)
  • * 아시카가 요시마사(1460~1467)

  • 우대신(右大臣) (우대신):
  • * 이치조 카네요시(1424~1429)
  • * 고노에 후사쓰구(1429~1438)
  • * 다카쓰카사 후사히라(1438~1446)
  • * 니조 모치미치(1446~1454)
  • * 도인 사네히로(1454~1455)
  • * 이치조 노리후사(1455~1457)
  • * 산조 사네카즈(1457)
  • * 고노에 노리모토(1457~1462)
  • * 도쿠다이지 키나리(1462~1464)

  • 중대신(中大臣) (내대신):
  • * 고노에 후사쓰구(1426~1429)
  • * 고가 기요미치(1429~1432)
  • * 아시카가 요시노리(1432)
  • * 오이노미카도 노부무네(1432~1433)
  • * 다카쓰카사 후사히라(1435~1438)
  • * 사이온지 킨나(1438~1441)
  • * 가사노인 모치타다(1442~1443)
  • * 마데노코지 도키후사(1446)
  • * 도인 사네히로(1446~1450)
  • * 산조니시 기미야스(1450)
  • * 산조 사네카즈(1450~1452)
  • * 이치조 노리후사(1452~1455)
  • * 고노에 노리모토(1455~1457)
  • * 오기마치산조 사네마사(1457~1458)
  • * 아시카가 요시마사(1458~1460)
  • * 도쿠다이지 키나리(1460~1461)
  • * 고가 미치히로(1461~1464)
  • * 구조 마사타다(1464~1465)

4. 연호

고하나조노 천황의 재위 기간은 하나 이상의 일본 연호(年號)(''넨고/年号일본어'')로 더 구체적으로 구분된다.[3] 고하나조노 천황의 재위 기간은 8개의 연호가 연이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거의 유일하며, 이는 혼란스러웠던 고다이고 천황의 재위 기간과 비슷한 수준이다.[3]


  • 쇼초(正長) (1428년–1429년)
  • 에이쿄(永享) (1429년–1441년)
  • 카키츠(嘉吉) (1441년–1444년)
  • 분안(文安) (1444년–1449년)
  • 호토쿠(宝徳) (1449년–1452년)
  • 쿄토쿠(享徳) (1452년–1455년)
  • 코쇼(康正) (1455년–1457년)
  • 초로쿠(長禄) (1457년–1460년)
  • 칸쇼(寛正) (1460년–1466년)

5. 인물 및 평가

고하나조노 천황은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책봉됨으로써 촉발된 이른바 '찬탈 미수' 사건 이후 왕권을 회복한 「중흥군주」로써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25] 시가(詩歌) ・ 관현(管弦)에도 능통하였으며, 『신속고금집』(新続古今集)에 12수, 『신선토쿠하집(新撰菟玖波集)』에 11구가 실려 있는 것 외에도 노래집 『고하나조노인 어제』(後花園院御製)를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일기 『고하나조인 어기』(後花園院御記)를 남겼다. 투계(闘鶏) ・ 사루가쿠(猿楽) ・ 마쓰하야시(松はやし) 등을 좋아하였으며 또한 학문에도 뛰어났다.

간세이(寛正) 2년(1461년) 봄 천황이 조로쿠 간세이 기근(長禄・寛正の飢饉) 와중에도 고쇼를 개축하는 등 사치로 나날을 보내는 쇼군 ・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 한시(漢詩)를 써 보내어 지적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26] "쇠잔한 백성들은 다투어 수양산 고사리를 캐고(残民争採首陽薇)/가는 곳마다 쌀독 문은 잠겨 있구나(処々閉廬鎖竹扉)/시 짓는 것조차 괴로운 봄 2월인데(詩興吟酸春二月)/성안에 가득한 꽃과 나무는 누구를 위해 활짝 피었더냐(満城紅緑為誰肥)"[26] 하지만, 이 일화는 『신선장록관정기(新撰長禄寛正記)』에 기록된 것으로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요시마사의 조영 사업은 기근 대책의 공공 사업이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실제로 요시마사는 기근 대책을 실행하고 있었다. 만약 이 일화가 사실이었다면, 고하나조노의 간언은 빗나간 것이 되어 버린다. 천황은 쇼군 요시마사와는 축국(蹴鞠)을 통해 친교가 있었는데, 천황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무로마치의 쇼군 저택에 있었을 정도였다. 아시카가 요시마사히노 도미코(日野富子) 부부가 천황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 보았으며 요시마사는 전란 와중의 외출에 반대하는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의 반대도 무릅쓰고 천황의 인산부터 49재 법요(法要)까지 모두 참석하였다.[27]

중세사 연구자 하시노 유우스케에 따르면, 고하나조노 천황은 연어를 싫어했다고 한다.

5. 1. 비판적 시각

고하나조노 천황은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명으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됨으로써 촉발된 이른바 '찬탈 미수' 사건 이후 왕권을 회복한 「중흥군주」로써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25] 시가(詩歌) ・ 관현(管弦)에 능통하였으며, 투계(闘鶏) ・ 사루가쿠(猿楽) ・ 마쓰하야시(松はやし) 등을 좋아하였고 학문에도 뛰어났다.

간세이(寛正) 2년(1461년) 봄, 조로쿠 간세이 기근(長禄・寛正の飢饉) 와중에 고쇼를 개축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에게 한시(漢詩)를 보내어 지적한 일화가 있다.[26]

6. 가계도

스코 천황의 손자인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리 친왕(伏見宮貞成親王, 後崇光院)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니와다 쓰네아리(庭田経有)의 딸 니와다 사치코(庭田幸子, 敷政門院)이다.[3] 고하나조노 천황은 1428년 8월 27일(음력 7월 17일)에 고코마쓰 천황의 유자가 되었다. 후시미노미야 가는 지묘인 왕통의 적류에 해당한다.

관계이름출생 - 사망비고
증조부스코 천황1334년 ~ 1398년
증조모안사쓰텐지(按察典侍) 니와타(미나모토) 시코(시시)? ~ 1394년
조부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伏見宮榮仁親王)1351년 ~ 1416년1대 후시미노미야 당주
조모요우소우인(陽照院) 오기마치산죠(후지와라) 하루코(지시)(正親町三條(藤原) 治子)? ~ 1399년
백부후시미노미야 하루히토 왕(伏見宮治仁王)1370년 ~ 1417년2대 후시미노미야 당주
부친고스코인(後崇光院)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伏見宮貞成 親王)1372년 ~ 1456년3대 후시미노미야 당주
모친시키세이몬인(敷政門院) 니와다 사치코 (庭田 幸子)1390년 ~ 1448년
형제후시미노미야 사다쓰네 친왕(伏見宮貞常 親王)1426년 ~ 1474년4대 후시미노미야 당주
중궁(中宮)가라쿠몬인(嘉樂門院) 오미노미카도(후지와라) 노부코(신시)(大炊御門(藤原) 信子)1411년 ~ 1488년후지와라 다카나가의 딸
장녀간진 여왕(觀心女王)1434년 ~ 1490년
장남나리히토 친왕(成仁親王)1442년 ~ 1500년고쓰치미카도 천황
텐지히노(후지와라) 사토코(교시)(日野(藤原) 鄕子)? ~ ?히노 히데미쓰의 딸
황녀신조지노미야(眞乘寺宮)? ~ 1482년
후궁산조(후지와라) 후유코(도시)(三條(藤原) 冬子)1441년 ~ 1489년산죠 사네카즈의 딸
생모 불명황녀쇼겐 여왕(照嚴女王)? ~ 1464년



고하나조노 천황은 스코 천황의 증손자이며, 그의 전임자인 쇼코 천황의 사촌 형제였다.[3] 또한 고후시미 천황의 5대손으로, 고코마쓰 천황과 그의 전임자 고카메야마 천황의 관계 다음으로 먼 황제-계승자 관계이다.

7. 더 읽어보기

참조

[1] 웹사이트 後花園天皇 (102) http://www.kunaicho.[...] 2013-08-28
[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34
[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4]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5]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6]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7]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8]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9]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0]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 Notes on Loochoo https://books.google[...]
[1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4]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5]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6]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8-01-25
[17] 문서 후원융천황상
[18] 백과사전 후화원천황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19] 문서 후화원원어소식 https://dl.ndl.go.jp[...]
[20] 웹사이트 https://kokusho.nijl[...]
[21] 서적 의정기의 장군가와 천황가 면성출판 2015
[22] 서적 중세의 천황과 음악 기카와 히로후미관 2006
[23] 문서 정정친왕어기 1455-10
[24] 서적 천황과 장의-일본인의 사생관 株式会社新潮社 2013-12-20
[25] 백과사전 후화원천황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26] 웹사이트 http://base1.nijl.ac[...]
[27] 서적 의정기의 장군가와 천황가 면성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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