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이시 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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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라이시 다다오는 1900년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정치인이다. 호세이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입헌정우회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했으며, 여성 잡지사에서 근무하다가 런던 대학교에서 사회 정책을 공부했다. 중일 전쟁 시기 대만에서 활동했으며, 1947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자유민주당에서 노동상, 농림상, 법무상을 역임하며 노동 및 농업 정책에 기여했으나, 헌법 관련 발언, 골프장 문제, 록히드 사건 관련 발언 등으로 논란을 겪었다. 1983년 정계를 은퇴하고 198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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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이시 다다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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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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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구라이시 타다오 |
원어명 | 倉石 忠雄 |
로마자 표기 | Kuraishi Tadao |
출생일 | 1900년 7월 2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나가노현 사라시나군 이나리야마정 (현 지쿠마시) |
사망일 | 1986년 11월 8일 |
사망지 | 알려지지 않음 |
학력 | 호세이 대학 |
직업 | 정치인 |
정당 | 일본자유당→민주자유당→자유당→자유민주당 |
칭호 | 정3위 |
훈장 | 훈1등욱일대수장 |
기타 훈장 | 중의원 영년재직의원 법학사 |
경력 | |
이전 직업 | 부녀계사 상무이사 남일본화학공업 전무이사 (현 일본소다)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총무회장 | 제22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
총재 | 오히라 마사요시 |
정무조사회장 | 제21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총재 (정무조사회장) | 다나카 가쿠에이 |
국회대책위원장 | 제2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
총재 (국회대책위원장) | 이시바시 단잔, 기시 노부스케 |
국회의원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나가노현 제1구 |
당선 횟수 | 14회 |
임기 시작 | 1947년 4월 26일 |
임기 종료 | 1983년 11월 28일 |
주요 직책 | |
직책 | 법무대신 |
내각 | 제2차 오히라 내각 |
임기 시작 (법무대신) | 1979년 11월 8일 |
임기 종료 (법무대신) | 1980년 7월 17일 |
직책 (농림대신) | 농림대신 |
내각 (농림대신) | 제1차 사토 제3차 개조 내각 제2차 사토 내각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 내각 제3차 사토 내각 제2차 다나카 제1차 개조 내각 제2차 다나카 제2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 (농림대신) | 1966년 12월 3일 |
임기 종료 (농림대신) | 1968년 2월 23일 |
임기 시작2 (농림대신) | 1970년 1월 14일 |
임기 종료2 (농림대신) | 1971년 7월 5일 |
임기 시작3 (농림대신) | 1973년 11월 25일 |
임기 종료3 (농림대신) | 1974년 12월 9일 |
직책 (노동대신) | 노동대신 |
내각 (노동대신) | 제3차 하토야마 내각 제2차 기시 내각 |
임기 시작 (노동대신) | 1955년 11월 22일 |
임기 종료 (노동대신) | 1956년 12월 23일 |
임기 시작2 (노동대신) | 1958년 6월 12일 |
임기 종료2 (노동대신) | 1959년 6월 18일 |
2. 생애
1900년 7월 나가노현 사라시나군 이나리야마정(현 지쿠마시)에서 태어나 호세이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1]. 모리 가쿠의 추천으로 입헌정우회 활동을 시작했으며, 결혼 후 장인의 도움으로 런던 대학교에서 유학했다[3]. 중일 전쟁 시기에는 대만에서 기업 활동에 종사했다.
1947년 총선에서 일본자유당 공천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나, 초기에는 국회 내 폭행 사건[5]이나 정치 자금 및 뇌물 수수 의혹[6] 등으로 논란을 겪었다. 이후 자유당과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당내 요직을 거쳤고, 1952년에는 반 요시다 시게루 노선을 걸으며 민주화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보수합동 이후 여러 내각에서 노동대신, 농림대신 등을 역임했다. 노동대신으로서는 노동 관련 법안 정비에 참여했으며, 농림대신 재임 중에는 푸에블로함 피랍 사건 관련 실언으로 사임하거나[19], 개인 소유 골프장 관련 비리 의혹으로 야당의 추궁을 받기도 했다.
후쿠다 다케오 파벌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정무조사회장, 총무회장 등을 지냈다. 1979년 제2차 오히라 내각에서는 법무대신으로 입각하여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1974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으며, 1983년 정계를 은퇴했다. 1986년 11월 86세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1900년 7월 나가노현 사라시나군 이나리야마정(지금의 지쿠마시)에서 제사용 고치 도매상을 경영하던 구라이시 만페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 친구로는 만화가 곤도 히데조가 있다. 나가노 중학교를 거쳐, 1925년에 호세이 대학 법과[1]를 졸업했다. 호세이 대학 재학 중에는 호세이 대학 변론부에서 활동했다.대학 졸업 후 중의원 의원 모리 가쿠의 추천과 두터운 신임을 받아 입헌정우회에 입당해 원외 정당 활동에 잠시 종사했다. 이 활동으로 역시 원외단 멤버였던 오노 반보쿠와 알게 되었다. 이후 여성 잡지사인 『부녀계사』에 입사해 근무하다가 사장 도카와 류의 눈에 들어 그의 차녀 도쿠코와 결혼했다. 중매는 모리 가쿠가 맡았으며, 오토와의 하토야마 이치로 저택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저택 안에는 하야시 조지 부부도 있었다[2]. 장인 도카와의 지원을 받아 런던 대학교에 유학하여 해롤드 라스키 등에게 사회정책을 배웠다[3]. 런던으로 가는 유럽 항로 배에서 학생이었던 미키 다케오를 만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부녀계사 상무를 맡았다. 1927년의 동방회의에서는 모리 가쿠의 심복으로서 방일한 장제스 일행을 수행했다[4]. 1932년 총선거에서 나가노 1구(당시)에서 입헌정우회 공천으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중일 전쟁이 한창일 때는 대만으로 건너가 닛소 콘체른 계열의 남일본화학공업 전무, 대만제염 감사 등을 역임했다.
2. 2. 정치 활동 초기
1925년 호세이 대학 법과 졸업 후, 중의원 의원 모리 가쿠의 추천으로 입헌정우회에 입당하여 원외 정당 활동에 참여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2] 여성 잡지사 『부녀계사』에서 근무하다 사장 쓰가와 시게미의 차녀와 결혼했으며, 장인의 지원을 받아 런던 대학교로 유학하여 사회정책을 공부했다.[3]귀국 후 1932년 총선에 입헌정우회 공천으로 나가노 1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중일 전쟁 시기에는 대만으로 건너가 닛소 콘체른 계열의 남일본화학공업 전무, 대만제염 감사 등을 역임하며 기업 활동에 종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7년, 일본자유당 공천으로 구 나가노 2구에서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5일, 중의원 본회의장에서 의안에 반대하며 격분하여 이를 제지하려던 경비원을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징벌 동의가 발의되어 30일간의 등원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정치 자금 관련 문제와 탄광국관 의혹과 관련하여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소환되기도 했다.[5][6]
2. 3. 자유민주당 활동
자유당 국회대책위원장이던 1952년,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 이시다 히로히데와 함께 후쿠나가 겐지의 간사장 지명을 저지했다. 이후 이시다와 함께 당내에 '민주화 동맹'을 결성하여 반 요시다 시게루 운동을 전개했다[11].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출범하고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성립하자 노동대신으로 처음 입각했다[10]. 당시 사회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극단적인 파업을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전기 사업 및 석탄 광업에서의 쟁의 행위 규제에 관한 법률(파업 규제법)을 존속시키는 데 관여했다[10]. 1956년에는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을 지냈다[11]. 1958년 제2차 기시 내각에서 다시 노동대신을 맡아[1] 중소기업 퇴직금 공제 제도를 발족시키고[12] 산업 재해 방지를 위한 5개년 계획을 입안했다[13].
이케다 하야토와 사토 에이사쿠 정권 하에서는 자민당 노동문제조사회장으로서 ILO의 제87호 조약 비준 및 관련 국내법 정비에 힘썼다[14]. 또한 최저임금법 제정에도 기여했다[17].
후쿠다 다케오가 당풍쇄신연맹(훗날 세이와 정책연구회)을 결성하자, 오노 반보쿠 파벌에서 이탈하여 후쿠다파에 합류해 간부가 되었다. 사토 에이사쿠와 다나카 가쿠에이 정권 시기에는 세 차례에 걸쳐 농림대신을 역임했다.
첫 번째 농림대신 임기 중이던 1968년, 미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에 푸에블로함 피랍 사건이 발생하여 동해에서의 일본 어선 조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국회 답변 중 "현행 헌법은 타력본원이다. 역시 군함이나 대포가 필요하다", "이런 바보 같은 헌법을 들고 있는 일본은 (미국의) 첩이나 다름없다"라고 발언하여 야당의 거센 비판을 받고 결국 사임했다.
두 번째 농림대신 임기 중에는 구라이시가 이사장으로 있던 골프장이 국유지를 무단 점유하여 사용하다가 일본주택공단에 전매한 사건과, 해당 골프장이 운영하는 별장에 국비를 들여 조림한 사실이 드러나 야당의 추궁을 받았다. 그러나 구라이시는 여행을 이유로 국회에 출석하지 않았고 차관이 대신 사과했다.
1972년에는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맡았고, 1973년에 세 번째로 농림대신을 지냈다.
1975년 가을, 공무원노동조합협의회가 파업권 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을 준비하자, 11월 7일 자민당 '공노법(공공 기업체 등 노동 관계법) 문제 조사회' 소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한때 파업권 부여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시나 에쓰사부로 당시 자민당 부총재와의 논의 끝에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렸고, 공무원의 파업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1978년에는 자민당 총무회장이 되었으며, 1979년 제2차 오히라 내각에서 법무대신으로 입각했다[25][1]. 법무대신 취임 기자회견에서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에 대해 "친구로서 공명정대하고 청천백일하기를 바란다"고 발언하여 다시 한번 논란을 일으켰다[26]. 법무대신 재임 중 형법, 민법, 가사심판법, 외국인등록법, 형사보상법 등의 개정과 국제수사공조법 제정 등 11건의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25][1].
정치적 처세술에 능하여 "세상살이에 능숙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무에서도 국회대책위원장, 전국조직위원장, 정무조사회장, 총무회장을 역임했으며, 중의원 의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27].
3. 주요 정책 및 활동
1947년, 총선에서 일본자유당 공천으로 구 나가노 2구에 출마하여 처음 당선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중의원 본회의장에서 의안에 반대하며 격분하여 이를 제지하던 경비원을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징벌 동의가 가결되어 30일간 등원 정지 처분을 받았다.[5] 1948년에는 정치 자금 문제와 탄광국관 의혹 관련 뇌물 수수 의혹으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소환되기도 했다.[5][6]
자유당 내에서는 국회대책위원장을 맡으며 두각을 나타냈고,[8] 1952년에는 이시이 히로히데와 함께 후쿠나가 겐지의 간사장 지명을 저지하고 당내 민주화 동맹을 결성하여 반 요시다 시게루 운동을 전개했다.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된 후, 오노 반보쿠 파벌을 나와 후쿠다 다케오가 이끄는 파벌(후일 세이와 정책연구회)에 합류하여 간부가 되었다.
1955년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노동대신으로 처음 입각했으며,[1] 1958년 제2차 기시 내각에서도 다시 노동대신을 맡았다.[1] 이후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내각 시기에는 자민당 노동문제조사회장을 지내며 국제 노동 기구(ILO) 관련 협약 비준 및 국내 노동법 정비, 최저임금법 제정 등에 관여했다.[14][17]
사토,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 농림대신을 역임했다.[1] 그러나 1968년 첫 농림상 재임 중, 푸에블로함 피랍 사건과 관련하여 동해에서의 일본 어선 조업 안전 문제가 불거지자 국회에서 "현행 헌법은 타력본원이다. 역시 군함이나 대포가 필요하다", "이런 바보 같은 헌법을 들고 있는 일본은 (미국의) 첩이나 다름없다"는 등의 발언으로 큰 파문을 일으켜 결국 사임했다.[1] 두 번째 농림상 재임 시기에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골프장의 국유지 무단 사용 및 전매 의혹, 다른 골프장 별장지에 대한 국비 조림 문제 등으로 야당의 추궁을 받았으나, 여행을 이유로 국회에 출석하지 않아 논란이 되었다.[22][23]
1972년에는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을, 1978년에는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을 지냈다. 1975년에는 공무원 노동조합의 파업권 요구 문제와 관련하여 자민당 '공노법 문제 조사회' 소위원장을 맡아, 파업권 부여는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역할을 했다.
1979년 제2차 오히라 내각에서 법무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 기자회견에서 록히드 사건으로 기소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에 대해 "친구로서 공명정대하고 청천백일하기를 희망한다"고 발언하여,[26] 법무 행정의 책임자로서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물의를 빚었다.
1974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으며, 1983년 정계를 은퇴했다.
3. 1. 노동 정책
1949년에는 노동위원장에 기용되어 노동 정책 전문가로서 경력을 시작했다.[7] 중의원 의원 당선 2년 만의 이례적인 발탁이었다. 노동조합법, 공공 기업체 등 노동 관계법 등 전후 노동 문제 관련 법률 제·개정을 다루었다.[7]1955년 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노동대신으로 처음 입각했다.[1] 그는 사회 통념상 용납될 수 없는 극단적인 반사회적 파업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전기 사업 및 석탄 광업에서의 쟁의 행위 방법의 규제에 관한 법률(통칭 파업 규제법)을 존속시켰다.[10]
1958년 제2차 기시 내각에서도 노동대신을 맡아[1] 중소기업 퇴직금 공제 제도를 발족시켰고,[12] 산업 재해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산업 재해 방지 5개년 계획을 입안했다.[13]
이케다 하야토와 사토 에이사쿠 정권 하에서는 자유민주당 노동문제조사회장으로서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보장을 규정한 국제 노동 기구(ILO) 87호 조약 비준과 관련 국내법 정비에 힘썼다.[14] 또한 공공 기업체 등 노동 관계법(공로법) 개정을 통해 교섭 단위를 직장 단위에서 노동조합으로 변경하고, 중재 재정에 대한 정부 존중 정신 명확화 및 위원회 기구 간소화 등을 추진했다.[14] 제네바에서 열린 ILO 총회에서는 노동력의 국제적 조정을 주장하며 서독으로 일본 탄광 노동자를 파견하는 길을 열기도 했다.[15] 그는 "중소기업 노동자에게 햇볕이 드는 노동 행정"을 기치로 내걸고 급여 심의실을 설치하여 급여 정책 연구를 시작하게 했으며, 최저임금법 제정을 이끌었다.[17] 파업 규제법의 무기한 존속도 결정시켰다.[16]
1975년 가을, 공무원노동조합협의회가 파업권 보장을 요구하며 파업을 준비하자, 구라이시는 11월 7일 자민당 '공노법 문제 조사회' 소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한때 파업권 부여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시나 에쓰사부로 자유민주당 부총재와의 회담 후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공무원의 파업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3. 2. 농업 정책
1966년 제1차 사토 제3차 개조 내각에서 처음으로 전문 분야가 아니었던 농림대신에 취임했다. 그는 취임 직후 농정 전문가인 아카기 무네노리를 찾아가 지도를 요청했고, 아카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18] 구라이시는 후생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농민 연금 제도 도입을 추진했으며, 농업 구조 개혁을 위해 '구조 개혁 추진 회의'를 설치했다. 이 회의를 통해 농지 유동화 촉진, 토지 기반 정비, 경영 규모 확대 지원, 협업 등 집단 생산 방식 장려, 기계화 기술 확립 및 보급 등의 기본 방침을 발표했다. 그는 "경제 전체 속에서 농업의 역할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농업과 공업, 농촌과 도시가 올바르게 조화된 형태로 유지되어야 안정된 국민 경제 사회의 기반이 된다"는 철학 아래 '구라이시 농정'을 추진했다.[18] 농림대신에 유임된 후에는 아베 신타로를 정무 차관으로 기용했으며, 1967년에는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 무역 경제 합동 위원회에 참석했다. 예산 편성 과정에서는 미즈타 미키오 대장대신과의 협상을 통해 신규 경비 예산을 확보하며 농림 관료들로부터 "감각이 좋고, 숫자에 강하며, 배짱이 있는 거물 대신"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19]그러나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동해에서의 일본 어선 조업 안전 문제가 불거지자 국회에서 "현행 헌법은 타력 본원이다. 역시 군함이나 대포가 필요하다", "이런 바보 같은 헌법을 가진 일본은 메카케와 같다"라고 발언하여 야당의 거센 비판을 받고 결국 사임했다.[1]
이후 1970년 제3차 사토 내각에서 다시 농림대신으로 복귀했다.[1] 그러나 이 시기에도 논란은 이어졌다. 11월 6일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는 구라이시가 이사장으로 있던 골프장이 국유지를 무단으로 사용하다 주택공단에 전매한 문제와, 다른 골프장이 운영하는 별장지에 국비로 조림이 이루어진 문제가 제기되었다.[22] 구라이시는 여행을 이유로 위원회에 출석하지 않았고, 대신 출석한 정부 위원이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23]
1973년 제2차 다나카 제1차 개조 내각에서 세 번째로 농림대신에 임명되었다.[1] 이 시기에는 와타나베 미치오를 정무 차관으로 기용했다. 당시 720만 톤에 달하는 묵은 쌀 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규 개답 금지, 정부 쌀 매입 한도 설정, 자주 유통미 제도 도입, 전작(논에 다른 작물을 심는 것) 면적 배분 등을 골자로 하는 감산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또한 벼농사 위주에서 벗어나 국민 수요에 맞는 다각적인 농산물 생산으로 전환하고자 농지법을 개정하고, "축산 3배, 과수 2배"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를 위해 생산·유통·소비 시스템 전반에 걸친 개혁과 농림성 내 부서 간 칸막이(섹션주의) 해소에 힘썼다.[21]
국제적으로는 헨리 키신저의 제창으로 1972년 로마에서 열린 세계 식량 회의에 참석하여 연설했다. 그는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한 생산 증대, 개발도상국의 자조 노력 지원(토지·물 개발, 비료·농업 투입, 기술 원조 등), 식량 안보를 위한 국제 농업 정보 시스템 구축 및 비축, 인도적 식량 원조의 유엔 주도 실시, GATT를 통한 식량 무역 안정 등을 주장했으며, 구라이시의 제안은 대부분 채택되었다.[20]
3. 3. 기타 활동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를 앞두고 미국 양원의 초청으로 일본 국회 대표단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시다 히로에, 아이치 키이치 등 초당파 의원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1951년 9월 10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를 방청했다.[9]1957년 오리온 맥주 창업 무렵부터 오키나와 실업계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노동대신 시절에는 오키나와를 방문하여 노동조합 간부들과 만나 노동 관계 규칙 제정에 힘썼다. 오키나와에 본토 정치인의 후원회가 생긴 것은 구라이시가 처음이었다. 그는 야마나카 사다노리, 하세가와 슌, 후지에다 센스케와 함께 사토 에이사쿠 총리에게 오키나와 반환에 관해 진언하기도 했다. 오키나와 측 인사들은 복귀 요청을 위해 도쿄에 오면 가장 먼저 구라이시 사무소를 찾았고, 구라이시는 이들을 후쿠다 다케오 등 관계 장관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36]
지역구인 나가노현의 사회 기반 시설 확충에도 관여했다. 1957년 착공되었으나 지지부진했던 오부세 다리 건설을 1962년 완공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외에도 세키자키 다리, 이와노 다리 등 지쿠마강에 놓인 여러 다리 건설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1970년 5월, 후쿠시마현 이나와시로에서 열린 쇼와 천황 부부 참석 식수제에서는, 천황에게 올리는 글(주상문)의 표현이 부적절하다며 농림성 관료들을 질책했다. 그는 주상문에 사용된 '임석(臨席)'이라는 단어 대신 '광림(光臨)'을 써야 하며, '어해를 받으시어(御理解を賜り)'라는 표현도 천황에게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주상문에 외래어 사용을 비판하며 황실에 대한 존경심을 강조했다.[39] 구라이시는 평소 호리 시바야마, 야스오카 마사히로 등에게 한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39]
노동성 외곽 단체인 고용 촉진 사업단이 도쿄 나카노역 앞 옛 육군 헌병 학교 부지에 문화 시설을 건설할 때, "후생 연금 회관 같은 관청스러운 이름 대신 젊은이들이 모이기 쉬운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카노 선플라자라는 이름이 붙는 데 영향을 미쳤다.[37]
1979년 제2차 오히라 내각의 법무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 기자회견에서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에 대해 "친구로서 공명정대하고 청천백일하기를 바란다"고 발언하여[26], 사건의 중대성을 외면하고 개인적인 친분을 앞세운다는 비판을 받으며 물의를 빚었다. 구라이시와 다나카는 중의원 당선 동기였다.[26]
구라이시는 정계 최고의 베스트 드레서로 알려졌으며, 영국식으로 맞춘 양복에 승마 바지, 입에는 엽궐련을 문 스타일로 '정계 제일의 멋쟁이'로 불렸다.[28][29][30] 그의 정치 스타일은 영미식 합리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했다.[31]
4. 논란 및 비판
구라이시 다다오는 정치 활동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1947년 총선에서 당선된 직후인 같은 해 12월 5일, 중의원 본회의장에서 의안 토론 중 감정이 격해져 자신을 제지하려던 경비원을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일로 징벌 동의가 가결되어 30일간 등원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정치 자금 문제와 '탄광국가관리법' 처리 과정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소환되기도 했다.[5][6]
이후에도 그의 발언과 행적은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농림대신 재임 시절에는 헌법과 관련된 부적절한 발언으로 물의를 빚어 사임했으며, 그가 이사장으로 있던 골프장의 국유지 무단 사용 및 전매 문제, 국비를 이용한 조림 문제 등이 불거져 야당의 비판을 받았다. 또한 법무대신으로 임명된 후에는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으로 비판에 휩싸이기도 했다.[26] 이러한 논란들은 그의 정치 경력에 오점으로 남았다.
4. 1. 헌법 관련 발언
농림대신으로 재임 중이던 1968년, 미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에 푸에블로함 피랍 사건이 발생하면서 동해에서 일본 선박의 조업이 위협받는 상황에 놓였다. 이와 관련하여 구라이시는 국회에서 "현행 헌법은 타력본원(他力本願)이다. 역시 군함이나 대포가 필요하다", "이런 바보 같은 헌법을 들고 있는 일본은 (미국의) 첩이나 다름없다"라고 발언했다. 이는 전후 일본의 평화 헌법 체제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어 큰 논란을 일으켰고, 야당의 거센 추궁을 받아 결국 농림대신직에서 사임했다.4. 2. 골프장 관련 문제
두 번째 농림상으로 재임하던 시기, 구라이시가 이사장으로 있던 골프장이 국유지를 무단으로 사용하다가 일본주택공단에 되판 사건이 불거졌다. 또한 해당 골프장이 운영하는 별장에 국비를 사용하여 조림을 한 사실도 드러나 야당의 거센 추궁을 받았다. 하지만 구라이시는 여행을 핑계로 국회에 출석하지 않았고, 차관이 대신 사과하는 것으로 논란을 마무리하려 했다.4. 3. 록히드 사건 관련 발언
1979년 제2차 오히라 내각에서 법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법무상 취임 기자회견에서 록히드 사건과 관련하여 "다나카 전 총리에게는 친구로서 공명정대하고 청천백일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발언하여 물의를 일으켰다.[26] 구라이시와 다나카는 당선 동기로 오랜 친구 사이였으며, 다나카의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구라이시가 총리 대리로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개인적인 관계가 부패 사건 연루 의혹을 받는 인물에 대한 부적절한 옹호 발언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5. 평가
노동 정책 전문가로서 1949년 노동위원장에 기용된 것을 시작으로[7], 노동조합법, 공공 기업체 등 노동 관계법 제·개정을 다루며 전후 일본의 노동 문제 해결에 기여했다[7]. 노동대신을 두 차례(제3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제2차 기시 내각) 역임했으며, 자민당 노동문제조사회장으로서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 비준과 관련된 국내법 정비 및 「최저임금법」 제정에 힘썼다. 농업 분야에서도 세 차례 농림대신을 지냈고, 농림성과 후생성의 갈등으로 지지부진하던 농민 연금 도입을 사토 에이사쿠 총리에게 진언하여 공약으로 만들고 추진하는 성과를 냈다[35]. 또한, 법무대신으로서 형법, 민법, 가사심판법, 외국인 등록법, 형사보상법 등의 개정과 국제수사공조법 제정을 포함한 11건의 법안을 국회에서 성립시켰다[25][1]. 지역구인 나가노현에서는 치쿠마강의 여러 다리 건설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오키나와 반환 문제에도 관여하여 사토 에이사쿠 총리에게 진언했으며, 오키나와의 노동 관계 규칙 제정에도 관여하여 오키나와에 본토 정치인 최초로 후원회가 결성되기도 했다[36].
그러나 여러 차례 논란과 비판에 휩싸이기도 했다. 1947년 중의원 본회의장에서 의안에 반대하며 격앙된 상태로, 이를 제지하던 경비원을 폭행하여 30일간 등원 정지 처분을 받았다[5]. 1948년에는 정치 자금 문제와 「탄광국가관리법」안 처리 과정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소위 탄광국관 의혹)로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소환되기도 했다[5][6]. 1968년 농림상 재임 중 푸에블로함 피랍 사건과 관련하여 국회에서 "현행 헌법은 타력본원이다", "이런 바보 같은 헌법을 들고 있는 일본은 (미국의) 첩이나 다름없다"라고 발언하여 야당의 거센 비판을 받고 결국 사임했다. 두 번째 농림상 임기 중에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골프장의 국유지 무단 사용 및 전매, 국비 조림 문제 등이 불거졌으나 국회에 출석하지 않고 차관이 대신 사과하는 태도를 보여 비판받았다. 1979년 법무대신 취임 기자회견에서는 록히드 사건으로 기소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구라이시와는 당선 동기이자 오랜 친구)에 대해 "친구로서 공명정대하고 청천백일하기를 바란다"고 발언하여[26] 또다시 물의를 빚었다.
정치적으로는 국회대책위원장으로서 직무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8]와 함께, 정계 유영술에 능하고 "세상살이에 능숙하다"는 평을 받았다. 후쿠다 다케오가 당풍쇄신연맹(후의 세이와 정책연구회)을 결성하자 이에 호응하여 오노 반보쿠 파벌을 이탈, 후쿠다 파벌의 간부가 되었다. 당내 주요 직책(전국 조직 위원장, 정무조사회장, 총무회장)을 두루 거치며 중의원 의장 후보로도 거론되었다[27]. 한편, 영국식으로 맞춘 세련된 정장에 엽궐련을 피우는 모습으로 '정계 최고의 댄디남'[28], '베스트 드레서'로 불렸으며[28], 외모뿐 아니라 정치 스타일도 영미식 합리주의자로 평가받았다[31].
6. 역대 선거 기록
연도 | 선거 종류 | 회차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
1932년 | 총선 | 18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입헌정우회 | 낙선 | |||
1947년 | 총선 | 23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당 | 55,316표 | 27% | 1위 | 당선 |
1949년 | 총선 | 24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민주자유당 | 38,354표 | 17% | 3위 | 당선 |
1952년 | 총선 | 25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당 | 51,431표 | 21.4% | 2위 | 당선 |
1953년 | 총선 | 26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당 | 46,233표 | 19.4% | 3위 | 당선 |
1955년 | 총선 | 27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당 | 53,227표 | 20.8% | 3위 | 당선 |
1958년 | 총선 | 28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3,007표 | 27.9% | 2위 | 당선 |
1960년 | 총선 | 29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57,397표 | 23.3% | 2위 | 당선 |
1963년 | 총선 | 30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59,291표 | 23.4% | 3위 | 당선 |
1967년 | 총선 | 31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5,044표 | 25% | 2위 | 당선 |
1969년 | 총선 | 32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6,923표 | 24.6% | 2위 | 당선 |
1972년 | 총선 | 33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3,880표 | 25.3% | 2위 | 당선 |
1976년 | 총선 | 34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3,151표 | 19.7% | 1위 | 당선 |
1979년 | 총선 | 35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6,067표 | 23% | 2위 | 당선 |
1980년 | 총선 | 36회 | 중의원 의원 | 나가노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6,955표 | 21.8% | 3위 | 당선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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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倉石忠雄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3-08-18
[2]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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経済時代社
1973-09
[3]
서적
保守人材論
民族と政治社
1969
[4]
서적
倉石忠雄 : その人と時代
倉石忠雄先生顕彰会
1987-09
[5]
웹사이트
第2回国会 衆議院 不当財産取引調査特別委員会 第15号 昭和23年4月14日
https://kokkai.ndl.g[...]
[6]
서적
戦後政治裁判史録 1
[7]
간행물
経済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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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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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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倉石労政の歩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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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派閥と多党化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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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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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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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の動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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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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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ゴルフ場二つの怪 黒柳議員(公明)きょう参院委で追及 国有地を無断転売 別荘地に国費植林
朝日新聞
197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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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金は取りたてる」ゴルフ場問題 政府、国会で平謝り
朝日新聞
197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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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山欽司 ─反骨のヒューマニスト─ 第十八章
http://www.mayumi.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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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悪vs言論―田中ロッキードから自民党分裂まで
文藝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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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員外交四十年 : 私の履歴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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