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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 에쓰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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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나 에쓰사부로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898년에 태어나 1979년에 사망했다. 그는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농상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만주국에서 산업 개발을 주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수성에서 활동했으며, 종전 후에는 공직 추방을 당했다. 이후 사업가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하여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을 8번 역임했다.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냈다. 외무상 재임 시절에는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주도했으며, 1972년에는 자유민주당 부총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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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 에쓰사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시나 에쓰사부로
본명시나 에쓰사부로
출생일1898년 1월 16일
출생지미즈사와, 이와테, 일본 제국
사망일1979년 9월 30일
사망지도쿄, 일본
국적일본
친족조카 후쿠다 다케오, 숙부 고토 신페이, 차남 시나 모토오
학력도쿄 제국대학
정당일본 민주당
자유민주당
관료 경력
전직농상무성 관료
상공성 관료
만주국 실업부 관료
군수성 관료
도호쿠 모직 주식회사 이사 사장
정치 경력
직책내각관방장관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선거구이와테현 제2구
당선 횟수8회
의원 임기 시작일1955년 2월 28일
의원 임기 종료일1979년 9월 7일
기타 직책자유민주당 부총재
(다나카 가쿠에이, 미키 다케오 총재)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사토 에이사쿠 총재)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이케다 하야토 총재)
자유민주당 부총재 임기 시작1972년 8월
자유민주당 부총재 임기 종료1976년 12월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임기 시작1966년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임기 종료1967년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임기 시작1960년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임기 종료1960년
주요 직책
직책통상산업대신
내각제2차 이케다 내각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 내각
임기 시작일1960년 12월 8일
임기 종료일1961년 7월 18일
임기 시작일1967년 11월 25일
임기 종료일1968년 11월 30일
직책외무대신
내각제3차 이케다 개조 내각
제1차 사토 내각
제1차 사토 제1차 개조 내각
제1차 사토 제2차 개조 내각
임기 시작일1964년 7월 18일
임기 종료일1966년 12월 3일
직책내각관방장관
내각제2차 기시 개조 내각
임기 시작일1959년 6월 18일
임기 종료일1960년 7월 19일
훈장
훈장종2위
[[파일:JPN Toka-sho BAR.svg|38px]]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중의원 영년 재직 의원
법학사

2. 생애

시나 에쓰사부로는 1898년 이와테현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농상무성과 상공성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83][84] 만주국에서 산업 개발에 참여했고,[86] 귀국 후 상공성과 군수성에서 전시 통제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89]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직 추방되었다가[91][92][93][94] 사업가로 변신했지만 실패했고,[91][96] 1955년 일본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99] 자유민주당 창당 후 기시 내각에서 당 경리국장,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하며[99] 안보조약 개정에 기여했다.[101]

1964년부터 제3차 이케다 내각 (개조), 제1차 사토 내각에서 외무상을 맡아[109][110]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주도했다.[110] 대한민국한일병합조약 유효성, 한국 정부 관할권 문제를 두고 이견이 있었지만, 애매한 문구로 합의했고,[110] 독도 문제는 의도적으로 논의에서 제외했다.[113]

1970년 가와시마 쇼지로 사망 후 파벌을 계승했고,[127][129]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자유민주당 부총재를 맡았다.[127] 중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중화민국에 파견되었으나 항의에 직면했고,[127] 1974년 김대중 납치 사건, 육영수 저격 사건으로 악화된 한일 관계 수습을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했다.[127]

1974년 다나카 금맥 문제로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임하자, 시나 재정을 통해 미키 다케오를 후임 총재로 지명했다.[135][136][137] 그러나 이후 미키 끌어내리기에 가담해 비판받았고,[141] 1976년 총재 선거 후 부총재에서 물러났다.[143][142] 1979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같은 해 9월 30일 결핵근위축증으로 사망했다.[144][142]

2. 1. 학창 시절

1898년 1월 16일, 이와테현 이사와군 미즈사와정(지금의 오슈시)에서 고토 히로시의 아들로 태어났다.[83] 아버지 고토 히로시는 교사 출신으로, 미즈사와 정장과 이와테현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83] 고토 가는 난학다카노 조에이의 후손인데, 시나의 이름은 다카노 조에이의 아명을 따온 것이다.[83]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시나는 어린 시절 빈궁한 생활을 했다.[83] 어린 시절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다가[83] 고등소학교 4학년 때 혼자 상경했다. 실업가 하라 구니조의 집에서 글방 일을 하며 공부했으나, 하라가 야학을 허락해주지 않아 3개월 만에 집을 나왔다. 이후 골동품점에서 살면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녔는데, 이마저도 3개월 만에 관두고 동향 선배 집에 머물렀다.[83]

아버지의 알선으로 이웃 가네가사키정의 중의원 의원 시가 와타리의 집에서 서생으로 일하며 야학을 다녔고,[83] 긴조 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84] 중학교 졸업 무렵, 아버지가 수리권을 얻은 이사와 강의 수력 발전소 사업이 궤도에 올라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본가로 돌아갔다.[84] 이후 구제 제이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 독법과에 진학했다.[84] 이때 이모의 시댁인 시나 가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성이 고토에서 시나로 바뀌었다.[84][85]

2. 2. 관료 시절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1923년 3월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농상무성에 들어갔다.[84] 이듬해 농상무성이 농림성과 상공성으로 분리되자 상공성에 소속되었다.

1925년 아이치현 공업조합감독관 겸 상공과장으로 부임하여 나고야에서 근무했다.[86] 이때 만주를 찾아 나고야항과 다롄항을 잇는 정기편 운행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논의했다.[86] 1929년 상공성에 돌아와 공무국 공무과 사무관이 되었고,[86] 1932년 8월 구미 각국의 불황 대책과 산업 정책을 시찰하기 위해 출장을 갔다가 다음 해 5월에 귀국했다.[86] 같은 해 6월 임시산업합리국 주임사무관이 되었다.[86]

기시 노부스케의 요청에 따라 1933년 10월 만주국 실업부 총무사 계획과장이 되어 신징에 갔다.[86] 이후 문서과장 겸 통제과장이 되었고, 실업부의 외국으로 임시산업조사국을 설치해 3년 동안 만주국의 산업 조사를 지휘했다.[88] 이 조사를 바탕으로 일본으로부터 만몽개척이민을 얼마나 받아들일지 파악하고 쑹화강압록강에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계획도 세웠다. 25억에 달하는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도 이 조사에 기반해서 만들어졌다.[88] 또한 시나는 「중요산업통제법」이 규정하는 1업종 1회사에 의한 독점을 통해 국책 특수회사를 중심으로 하는 통제 경제를 구축하고자 했다.[88]

1936년 봄 관동군의 요청에 따라 기시가 실업부 차장이 되었다.[88] 다음 해 7월 시나는 실업부 광공사장에 취임해 기시의 지휘하에 만주국의 경제 통제와 산업 개발을 추진했다.[88] 1939년 시나는 기시에게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청하여, 4월에 귀국했다.[88]

귀국 후 시나는 상공성 임시물자조정국 소속이 되었다.[89] 6월에는 총무국 총무과장으로 옮겨갔다.[89] 당시 상공상은 고도 다쿠오였는데, 고도는 상공차관 무라세 나오카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에 고도는 기시를 본국으로 보내줄 것을 군부에 요청했으며 시나도 이를 지지했다.[89] 무라세는 이에 반발했지만, 일본에 돌아온 기시는 10월에 상공차관이 되었고 시나는 총무국장 대리가 되어 사실상 수석 국장이 되었다.[89] 군부에 장악된 기획원이 전시 경제 통제를 입안하면 상공성이 실무를 담당했는데, 이때 상공성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기시와 시나였다.[89] 시나는 12월에 정식으로 총무국장으로 임명됐다.[89]

1940년 7월 제2차 고노에 내각이 발족하면서 고바야시 이치조가 신임 상공상으로 취임했다. 혁신관료의 대표 주자였던 기시는 고바야시와 대립했고, 그해 말 기시는 상공차관에서 경질됐다. 1941년 10월 도조 내각이 들어서자 기시는 상공상이 되어 돌아왔고, 시나는 상공차관이 되었다.[89]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기시와 시나는 군부에 협조해 엄격한 전시 통제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1942년 4월에는 「기업정비령」을 제정해 평화산업의 전면적인 군수공업화를 추진했다.[89]

1943년 11월 군수성 (일본)이 창설되자 시나도 군수성으로 자리를 옮겨 총동원국장이 되었고, 나중에는 육군사정장관을 겸임했다.[89] 1944년 7월 기시가 내각 불일치를 일으켜 도조 내각이 붕괴하자[90] 시나는 총동원국장에 유임됐다가, 1945년 4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발족하자 시나는 군수차관으로 승진했다.[89]

종전 후인 8월 26일 군수성이 폐지되고 상공성이 부활하자 시나는 상공차관으로 돌아왔다. 시나는 상공성에 재적하고 있는 군인을 정리하고 전후 경제 재건을 위한 새로운 조직 구축을 의뢰받았다. 성의 재편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의 퇴진과 함께 10월 12일 차관에서 물러났다.[91]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된 기시 노부스케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1947년 11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했다.[91][92][93][94]

2. 3. 사업가

공직추방을 당한 시나는 1947년 11월 모리오카시에 본사가 있는 도호쿠진흥섬유공장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이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강한 요청을 받은 결과였다. 이후 다이토 방적의 도쿄 가나정의 공장과 소모 기계를 매수하고 새 기술자를 고용했다. 이 재원은 부흥금융금고의 융자로 충당할 계획이었지만, 1949년 닷지 라인이 실시되면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부흥금융금고의 융자가 폐지되고 말았다.[91][96]

시나는 자금을 얻기 위해 분투했으나, 회사의 낮은 기술 수준 때문에 한국 전쟁 특수도 누리지 못한 채 1952년 5월 파산했다. 시나는 같은 해 7월에 대표이사에서 물러났으며 회사는 구레하 방적에 흡수되었다. 이후 시나는 심적으로 고생을 해 건강을 해쳐 요양 생활을 했다.[96]

한편 1948년 10월에는 병기 처리 문제와 관련해 중의원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에 나카지마 지쿠헤이, 사타와 함께 소환되었다.[97]

2. 4. 정계 입문

1951년, 시나 에쓰사부로는 공직 추방에서 해제되었다.[98] 1953년 3월 바카야로 해산으로 치러진 총선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96] 당시 시나는 자유당 공천을 희망했으나, 이와테현 제2구에는 이미 공천자가 확정된 상태여서 무소속 출마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96]

1955년 총선을 앞두고 일본민주당 간사장 기시 노부스케의 권유로 민주당 후보로 출마, 기시의 전폭적인 지원과 하토야마 붐에 힘입어 최하위로 당선되며 처음으로 정계에 입문했다.[99] 같은 해 11월, 일본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당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자민당 소속이 되었다.[99]

2. 5. 기시 내각

1957년 2월 이시바시 단잔이 취임 2개월 만에 병으로 총리대신을 사임하자 제1차 기시 내각이 출범했다. 시나는 상공차관 출신으로 산업계에 인맥이 풍부하여 자유민주당 간사장 가와시마 쇼지로의 추천으로 당 경리국장이 되었다. 시나가 경리국장이 된 뒤 재계로부터 받는 자민당의 헌금은 종래 2억에서 10억으로 크게 늘어났다.[99] 1959년 6월 제2차 기시 내각 (개조)이 발족하자 재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내각관방장관에 취임했다.[99]

기시는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을 위해 시나가 필요하다며 관방장관에 앉혔다고 설명했다.[101] 시나는 내각의 대변인이지만 기자회견에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자세한 건 총리에게 물어보라"라고만 답했다. 한편 안보조약 개정에 주력하는 기시를 지지했다.[101]

2. 6. 선거법 위반 논란

1958년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 시나 에쓰사부로 선거 캠프에서 총괄주재자 겸 출납책임자였던 전 이치노세키시장 마쓰카와 쇼조와 그의 아내가 매수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게 되자 도주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전국에 지명수배도 당했는데[103][104] 야당은 시나가 마쓰카와 부부의 도주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시나는 이를 부정했지만, 마쓰카와 부부는 시나의 지인인 한 기업인의 집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정치 활동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1961년 6월 제2차 이케다 내각 (제1차 개조) 출범을 앞두고 통산상에서 물러났고 마쓰카와 부부에게 자수를 권해 사건을 종결시켰다.[102] 훗날 시나는 "경찰이 너무 불쌍해서 자수하게 했다"라고 술회했다.[105]

1962년 3월 마쓰카와 부부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또한 시나의 부인[106]과 비서 2명도 도주 중인 마쓰카와 부부에게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유죄를, 마쓰카와 부부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시나의 지인도 유죄가 선고됐다.[107] 당시 언론은 시나의 도의적 책임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시나는 의원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108]

2. 7. 기시파의 분열

후쿠다 다케오가 1962년 11월에 새로운 파벌을 만들고자 하자 기시는 자신의 파벌인 십일회의 해산을 선언했다. 하지만 가와시마 쇼지로를 중심으로 한 일부 의원들은 후쿠다를 리더로 인정하지 않아 기시파는 분열했다. 기시와 후쿠다는 소득 배증 계획으로 대변되는 이케다의 정책에 부정적이었는데 시나는 이를 납득하지 못해 기시와 결별하고 가와시마가 이끄는 교우 클럽에 참여했다. 가와시마와 시나는 옛날부터 기시를 지지해 왔는데 기시는 후쿠다를 지나치게 중용하여 기시에 대한 불만도 강했다.[109]

가와시마파에는 가와시마, 시나, 아카기 무네노리, 후지에다 센스케, 하마노 세이고, 아라후테 세이주로, 하세가와 시로, 아키타 다이스케 등 중의원 의원 19명이 속해 있었다. 시나는 전전부터 가와시마와 교류가 있었으며 특히 고토 신페이와도 인연이 있었다.[109]

2. 8. 외무상 재임

1964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이케다 하야토제3차 이케다 내각 (개조)을 출범시키면서 시나 에쓰사부로를 외무상에 기용했다.[109] 이는 기상천외한 인사로 평가받았으며, 시나 본인도 난색을 표했지만 마에오 시게사부로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09] 후두암으로 이케다가 총리대신에서 물러난 뒤, 제1차 사토 내각에서도 시나는 외무상에 유임되었다.[110]

시나는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위해 대한민국과의 교섭에 나섰다.[110] 당시 한일병합조약의 유효성과 한국 정부의 관할권 문제가 남아있었는데, 일본은 1945년 이후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한국은 처음부터 무효라고 주장했다. 관할권 문제에서 일본은 한반도 비무장 지대 이남 지역만이 한국의 관할권이라고 주장했지만, 한국은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내세웠다.[110] 시나는 한국 외무장관 이동원에게 애매한 문구로 합의를 볼 것을 제안했고,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의 재가를 얻어 이 제안이 수용되었다. 독도 문제는 처음부터 논의하지 않기로 했다.[113]

1965년 2월, 시나는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을 방문하여 일본의 과거를 깊이 반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10][113] 시나는 한국 기자들의 질문에 적절히 대답하여 한국 여론을 신경 썼고, 이는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에 도움이 되었다.[110][113]

시나는 미결정 상태였던 민간 협력 규모를 1억달러에서 3억달러로 증액했고, 어업 협력에 대해서도 4000만달러로 정했다.[113] 4월 3일, 이동원과 시나는 「한일청구권협정」, 「한일어업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 협정」에 가조인했다. 이후 6월 22일 도쿄도에서 양국 외무장관 사이에서 정식 조인이 이루어졌다.[113]

조약 비준을 둘러싸고 일본사회당일본공산당좌익 정당은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괴뢰정권이라며 강경하게 반대했다. 11월 9일, 야당은 시나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25표 차이로 부결되었다.[113][125][118] 12월 11일, 참의원에서 자민당 단독으로 「한일기본조약」 비준이 가결되었다. 12월 18일, 「한일기본조약」 비준서 교환식이 이동원과 시나 사이에서 이루어져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113][125][121]

1966년 1월, 시나는 일본 외무상으로는 처음으로 전후에 소련을 방문하여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 외무상 안드레이 그로미코와 회담하여 「일소항공협정」, 「일소무역협정」을 체결했다.[126][127][128]

2. 9. 파벌 영수

1970년 가와시마 쇼지로가 사망하자 시나는 만장일치로 교우 클럽을 계승하여 파벌의 영수가 되었다. 이때 시나파는 중의원 의원 19명, 참의원 의원 4명인 중간 규모의 파벌이었다. 시나는 아카기와 하마노에게 상담역을 맡기고 마쓰자와 유조를 파벌 간사장으로 임명했다.[127][129] 한편 시나는 가와시마가 담당하던 일본프로레슬링커미션의 커미셔너 역할도 1971년부터 이어받았다.[130]

2. 10. 자민당 부총재

1972년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가 승리하자, 시나는 자유민주당 부총재로 기용되었다.[127] 다나카는 중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하며 시나를 중화민국에 파견했다. 시나는 장징궈 행정원장 등을 만나 중일국교정상화의 불가피함을 설명했지만, 항의 여론에 직면했다.[127] 시나는 중화민국(대만)과 모든 관계를 유지하며 중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이는 자민당 방침과 달라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상은 "의례적인 표현"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132] 이후 다나카와 오히라는 중일공동성명을 발표, 오히라는 중일화평조약을 파기하고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다.[127]

1974년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육영수 저격 사건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자, 시나는 다나카의 요청으로 방한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127] 시나는 문세광이 연루된 육영수 저격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 등을 약속한 다나카의 서신을 전달, 한일 관계를 수습했다.[133][134]

같은 해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부진하자, 미키 다케오후쿠다 다케오는 다나카를 비판하며 사임했다. 시나는 다나카에게 당 개혁을 주문했고, 다나카는 '당 기본문제 및 운영에 관한 조사회'를 설치했다.[135] 그러나 다나카 금맥 문제로 다나카는 퇴진했고, 시나는 후임 총재 지명을 맡았다.[135] 시나는 합의를 통해 미키를 후임으로 지명하는 시나 재정을 내렸다.[136][137]

미키 내각에서도 부총재에 유임된[137][140] 시나는 나다오 히로키치를 총무회장에 추천, 당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정치자금규정법 개정, 록히드 사건 대응 등을 두고 미키와 갈등을 빚었다. 시나가 미키의 정책에 간섭하자 '미키 원정'이라는 비판이 나왔고, 시나는 미키 끌어내리기에 가담했다.

1976년 5월, 시나는 다나카, 후쿠다, 오히라와 미키 퇴진에 합의했으나, 미키는 록히드 사건 석명에 주력하며 퇴진 요구를 거절했다.[141] 여론은 시나를 비판했고, 후쿠다와 오히라는 시나와 만난 사실을 숨겼다.[141] 결국 미키 끌어내리기는 실패하고 시나의 영향력은 후퇴했다.[142]

이후 다나카가 체포되자, 다나카파, 오히라파, 후쿠다파 등은 거당체제확립협의회(거당협)를 결성, 제2차 미키 끌어내리기를 시도했다. 미키는 중의원 해산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총선 후 퇴진을 표명했다.[142] 시나는 자신이 총재로 추대한 미키를 끌어내린 것에 대해 "낳기는 했지만 키우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140] 총선 후 후쿠다 다케오가 총재에 취임했고, 시나는 부총재에서 물러났다.[143][142]

2. 11. 만년과 사망

시나는 오랫동안 도쿄도 시부야구 히로오에서 거주했으나 1978년 6월에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다마구 이쿠타로 이사했다.[142] 같은 해 10월에는 후원회 간부에게 정계에서 은퇴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으며 시나의 후원회는 차남인 시나 모토오를 후계자로 결정했다.[142]

1979년 6월 노인성 결핵과 하반신 근위축증을 치료하기 위해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표명한 뒤, 총선 유세가 한창이던 9월 30일 병원에서 사망했다.[144][142] 향년 81세. 사후에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추증받고 종2위에 추서됐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숙부고토 신페이도쿄 시장, 내무상, 제도부흥원 총재 등 역임
차남시나 모토오중의원 의원(4선), 참의원 의원(재선) 역임
부인모리 기미에야마구치 은행 중역 모리 노부케이지의 장녀



모리 노부케이지는 1882년 히로시마현의 타다 반조의 육남으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마치다 추우지의 부하로서 야마구치 은행의 재건에 기여했다.[7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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