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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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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의 문학 평론가이자 사상가로, 중국 문학 연구와 일본 근대 사회 비판에 기여했다. 도쿄 제국 대학에서 중국 문학을 전공하고, 중국 문학 연구회를 결성하여 활동했으며, 1960년 미일안보조약 반대 시위로 도쿄도립대학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는 루쉰 연구를 통해 일본과 중국의 근대화 과정을 비교하고, 일본의 문화적 주체성 부재와 아시아에 대한 인식 문제를 제기했다. 주요 저서로는 《루쉰》, 《일본 이데올로기》, 《국민문학론》 등이 있으며, 한국에도 그의 사상이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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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케우치 요시미
1953년
원어 이름竹内 好
출생일1910년 10월 2일
출생지나가노현미나미사쿠군우스다정(현 사쿠시)
사망일1977년 3월 3일
사망지도쿄도무사시노시
직업중국 문학자
활동 기간미상
배우자미상
자녀미상
학력
출신 학교도쿄 제국대학
경력
연구 분야중국 문학
연구 기관게이오기주쿠 대학
도쿄도립대학
학위미상
칭호미상
주목할 만한 개념미상
주요 업적미상
주요 작품미상
수상
주요 수상 경력마이니치 출판 문화상(1970년)
기타
공식 웹사이트미상

2. 생애

나가노현 출신의 중국학자, 문화 평론가, 번역가이다.[23] 그는 특히 중국의 문호 루쉰 연구에 몰두하여 그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했으며, 1944년 출간된 저서 《루쉰》은 태평양 전쟁 중과 전후 일본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1년 구제 오사카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 지나문학과에 입학[25]하여 재학 중 다케다 다이준 등과 함께 중국 문학 연구회를 결성하고 활동했다.[26] 1937년부터 2년간 베이징에서 유학했으며, 1943년에는 일본 육군에 소집되어 중국 전선에서 복무하다 종전을 맞았다. 이 시기 실제 중국과 중국인을 만난 경험은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1]

전후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강사[32]를 거쳐 1953년부터 도쿄 도립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32] 그러나 1960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미일 안보 조약 개정을 강행 처리하자 이에 항의하며 교수직을 사임했다.[35][2] 그는 안보 투쟁 당시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대 운동의 중심적인 지식인으로 활동했다.[2]

다케우치는 전쟁 중부터 이어진 루쉰 연구를 통해 중국 근대화 문제에 주목했으며,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식 근대화 모델의 유일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아시아의 다양한 근대화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는 일본 문화가 가진 노예성과 주체성 결여를 비판하고 일본 지식인 사회의 진보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한 중일 관계에 대한 중요한 비평가로 활동했으며, 1963년부터는 잡지 『중국』을 간행하며 마오쩌둥과 중국 문화 대혁명을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다시 루쉰 연구와 번역에 전념했으며, 1977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37] 그의 전집(17권)은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지쿠마 쇼보에서 출판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910년, 나가노현 미나미사쿠군 우스다정 (현 사쿠시)에서 태어났다.[23] 도쿄시 고지마치구 후지미 초등학교, 도쿄부립 제1중학교(현 도립 히비야 고등학교)를 거쳐 1931년, 구제 오사카 고등학교[24]에서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 지나 문학과에 입학[25]했다. 1934년에 지나 철학 지나 문학과를 졸업[26]했다.

2. 2. 중국 문학 연구회 활동

1931년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 지나문학과에 입학한 다케우치는 재학 중 평생의 친구가 될 다케다 다이준을 만났다.[25] 둘은 함께 중국 문학 연구회를 결성했으며[26], 1934년 대학 졸업[26] 후에도 이 연구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연구회 멤버로는 마스다 와타루, 마츠에 시게오, 오카자키 토시오, 마츠이 타케오, 이치노헤 츠토무[27], 오노 시노부, 사네후지 에이슈, 센다 큐이치, 이이즈카 아키라[28] 등이 있었다.

1935년, 연구회는 공식 기관지로 《중국 문학 월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구식"으로 평가받던 일본 중국학의 한계를 넘어 현대 중국 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다. 1940년에는 잡지명을 《중국 문학》으로 변경하여 간행[29]했다.

1953년, 중국 문학 연구회에서의 다케우치 (뒤쪽 오른쪽에서 두 번째). 뒤쪽 오른쪽 끝은 다케다 타이준.


한편, 다케우치는 1937년부터 2년간 베이징에서 유학했다. 그러나 당시 격화되던 중일 전쟁의 지정학적 상황 속에서 그는 우울증을 겪으며 술에 의지하는 힘든 시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1942년 1월, 《중국 문학》에 "대동아 전쟁과 우리의 결의"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1943년 1월, 다케우치는 연구회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문학 연구회를 해체하고 《중국 문학》의 출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2. 3. 종전과 전후 활동

1943년 일본 육군에 소집되어 중국으로 파견되었고, 1945년 8월 후난성 웨저우에서 패전을 맞이했다.[31] 이 시기 실제 중국과 중국인을 접한 경험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현대 구어체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1] 그의 첫 저서인 《루쉰》(1944)은 이 기간 중에 출판되었다. 1946년 7월에 복원(제대)하였다.[31]

귀국 후인 1948년, 점령기 일본에서 발표한 에세이 "지도자 의식에 관하여"와 "현대성이란 무엇인가?"가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중요한 전후 비평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그는 전쟁 중 일본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근대 극복" 심포지엄과 같은 지식인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그는 고바야시 히데오, 교토학파, 일본 낭만주의자 야스다 요주로 등을 비판하며, 이들의 논의가 사고의 형성에 실패하고 오히려 사고를 파괴했다고 지적했다.[15] 그는 태평양 전쟁이 가진 식민주의적 침략성과 반제국주의라는 이중적 측면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PRC)의 건국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후 그의 저술 활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 게이오기주쿠 대학 강사가 되어 1955년까지 재직했다.[32] 1950년에는 잡지 '전망'에 「일본 공산당에 묻다」를 발표하여 일본 공산당을 비판하기도 했다.[33] 1952년부터 1년간 도쿄 대학 비상근 강사를 겸임했다.[32]

1953년에는 사상의 과학 연구회 회장이 되었고[32] 잡지 『사상의 과학』 편집장도 맡았다.[34] 같은 해 도쿄 도립 대학 인문학부 교수로 취임했다.[32]

1960년 5월 20일,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국민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 안보 조약 비준을 중의원 본회의에서 강행 처리하자, 다케우치는 이에 강력히 항의하며 다음 날인 5월 21일 도쿄 도립 대학에 사표를 제출했다.[35][2] 그는 "헌법의 요점 중 하나인 의회주의가 사라졌다", "내각총리대신에 의한 헌법 무시 상태 하에서 도쿄 도립 대학 교수의 직에 머무는 것은 공무원으로서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한다는 취업 당시의 서약에 위배되며, 또한 교육자로서의 양심에 위배된다"고 사임 이유를 밝혔다. 인문학부 교수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표는 6월 27일에 최종 수리되었다.[36] 안보 투쟁 기간 동안 다케우치는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대 운동의 주도적인 지식인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2]

교수직 사임 후에는 잡지 『중국』을 간행하는 데 힘썼다. 1963년부터는 이 잡지를 통해 마오쩌둥과 중국 문화 대혁명을 옹호하는 글들을 발표했으며, 이는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시점까지 이어졌다. 그는 특히 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원리를 포함하는 마오의 "기반/토대의 철학"('''공거지 철학''')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를 루쉰의 '''성차'''(저항/인내) 개념과 연결지어 이해했다. 만년에는 루쉰 작품의 새로운 번역 작업에 몰두했다.

『루쉰 문집』 간행 중이던 1977년 3월 3일, 식도암으로 도쿄도 무사시노시의 병원에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7] 장례위원장은 하니야 유타카가 맡았으며, 묘소는 다마 영원에 있다.

2. 4. 사망

1977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3. 사상과 활동

나가노현 출신으로, 1931년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 지나문학과에 입학하여 다케다 타이준 등과 함께 중국문학 연구회를 결성하고 활동했다. 1937년부터 2년간 베이징에 유학했으며, 1943년 일본 육군에 소집되어 중국에서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다. 중국에서의 경험과 루쉰 연구는 이 시기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첫 저서 《루쉰》(1944)은 당시 일본 사상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1]

전후 게이오기주쿠 대학 강사를 거쳐 1953년부터 도쿄 도립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귀국 후 발표한 "지도자 의식에 관하여", "현대성이란 무엇인가?"(1948) 등의 에세이를 통해 중요한 전후 비평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1949)에 주목하며 중국 관련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다케우치는 루쉰 연구를 통해 중국의 근대화 문제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식 근대화 모델이 유일한 길이 아니며,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의 근대화에는 더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일본 마르크스주의 사학에 회의를 표했으며, 존 듀이의 중일 문화 비교론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44] 그는 일본 문화가 노예적 속성과 주체성 결여를 보인다고 비판하고, 일본 지식인 사회의 진보주의가 민족주의 문제를 외면한다고 지적했다.[44][45]

또한 일본인아시아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강조하며 아시아주의를 재조명하고 대동아 전쟁에 대한 재평가를 촉구했다. 그는 대동아 전쟁식민지침략 전쟁인 동시에 반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졌다고 분석하며[47], 침략 행위 자체는 비판하면서도 그 안에 왜곡된 형태로나마 '연대'의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복합적인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다.[46]

1960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국민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정 미일 안보 조약을 국회에서 강행 처리하자, 다케우치는 이를 비민주적 처사로 규탄하며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라는 슬로건 아래 안보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2] 그는 정부의 행태에 항의하는 의미로 도쿄 도립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며[2][35] 저항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교수직 사퇴 후인 1963년부터는 잡지 『주고쿠』(中国)를 간행하며 마오쩌둥과 중국 문화 대혁명을 포스트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마오쩌둥 사상의 원형을 징강산 투쟁 시기 '근거지 이론'에서 찾으며, 약자가 강자에 맞서면서도 불패를 확신하는 모순적 결합이야말로 중국 혁명의 근본 동력이라고 평가했다.[48] 중국의 핵실험에 대해서는 이성적 비판과 별개로, 서구 열강에 맞서는 행위라는 점에서 감정적인 통쾌함을 느꼈다고 솔직하게 밝히기도 했다.[49] 만년에는 다시 루쉰 연구와 번역에 몰두했으며, 그의 전집(17권)은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지쿠마 쇼보에서 출판되었다.

3. 1. 루쉰 연구와 중국 근대 문학 연구

도쿄 제국 대학 재학 중이던 1934년, 다케우치는 다케다 타이준과 함께 중국 문학 연구회를 결성했고[1], 1935년에는 기관지 《중국 문학 월보》를 창간하여 기존 일본 중국학의 틀을 벗어나 현대 중국 문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는 일본 근대 중국학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1] 그는 동시대 중국 문학 작품을 번역하고 소개하는 데 힘썼다.

1937년부터 2년간 베이징에 유학하며 실제 중국과 중국인을 접한 경험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는 그의 연구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전쟁 시기부터 이어져 온 루쉰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의 학문 여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1944년에는 그의 첫 저서인 《루쉰》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태평양 전쟁 중과 전후 일본 사상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1]

다케우치는 루쉰을 단순한 문학가를 넘어, 근대 중국의 정신을 구현한 사상가로 높이 평가했다. 그는 루쉰의 문학이 단순한 현실 비판을 넘어, 끊임없는 자기부정과 저항을 통해 새로운 주체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루쉰 평가에서도 드러난다.

: 루쉰은 근대 문학을 건설한 사람이다. 루쉰을 근대 문학 이전이라고 볼 수는 없다. [생략] 루쉰에게는 전근대적인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를 포함하는 형태로, 역시 그것은 근대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43] (「근대란 무엇인가(일본과 중국의 경우)」, 1948년)

루쉰 연구는 자연스럽게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다케우치는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식 근대화 모델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유일한 길이 아니며, 다양한 근대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 문화가 가진 노예적 속성과 주체성 결여를 비판하며, 일본 지식인 사회의 진보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만년에는 다시 루쉰 연구에 집중하여 새로운 번역 작업에 힘썼다. 그는 특히 루쉰 사상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성차(聲叉)' 즉, 끊임없는 저항과 인내의 정신에 주목했다.

3. 2. 일본 근대화 비판과 아시아적 가치 모색

루쉰 연구에 몰두하면서 중국근대화 문제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 다케우치는, 기존 일본 마르크스주의 사학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식 근대화가 유일한 모델이 아니며,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의 근대화 과정에는 더 다양한 길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44]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전후 존 듀이의 중국과 일본 문화 비교론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44] 다케우치는 일본의 문화 구조가 노예적이고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일본 지식인층의 진보주의가 민족주의 문제를 회피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외면한다고 비판했다.[44][45]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를 포함한 근대주의자들이 피로 얼룩진 민족주의를 외면하고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했으며, 특히 "일본 낭만파"와 같은 세력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외부의 힘에 의해 그들이 사라진 것을 마치 자신들의 성과인 양 착각했다고 지적했다.[45]

다케우치는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 시기 일본 지식인 사회를 휩쓴 "근대의 극복"이라는 구호에 주목했다. 이 구호는 대동아 전쟁과 밀접하게 연관된 상징으로 작용했으며[5], 전후 많은 비평가들은 이와 관련된 심포지엄을 지식인들의 전쟁 협력 사례로 비판했다.[6][7] 오다기리 히데오와 같은 평론가는 이를 군국주의천황제 국가를 옹호하고 전쟁 체제에 복종하는 이념적 캠페인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다케우치는 이러한 단순한 비판에 반대하며, 심포지엄의 아이디어 자체와 이를 악용한 체제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9] 그는 대동아 전쟁식민주의적 침략과 반제국주의라는 모순된 두 측면을 동시에 가졌으며[10],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불가능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전후 도쿄 재판에서 팔 판사의 소수 의견을 통해 비로소 이러한 이중성을 분리하는 논리가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고 술회했다.[47]

다케우치는 "근대의 극복"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주요 그룹들을 비판했다. 그는 교토학파 철학자들이 현실을 무시하고 교리에만 집착했다고 지적했으며[11], 일본 낭만파의 중심인물인 야스다 요지로에 대해서는 그가 "영매"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모든 가치와 사고의 범주를 파괴함으로써 사고 자체를 근절하고 지식인들에게서 책임감을 덜어주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13] 또한 고바야시 히데오를 중심으로 한 ''문학 세계'' 그룹은 사실에서 의미를 박탈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야스다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사상의 무장을 해제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평가했다.[14] 다케우치에게 "근대의 극복" 심포지엄은 사고를 형성하려는 마지막 시도였지만, 결국 사고의 파괴로 끝나버린 실패한 기획이었다.[15]

전후 다케우치는 일본인아시아에 대해 가져야 할 도의적 책임을 강조하며 아시아주의를 재조명하고 태평양 전쟁에 대한 재평가를 촉구했다. 그는 아시아주의가 고정된 이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경향이며, 일본 아시아주의 역사 속에서 '침략'과 '연대'라는 모순된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분리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침략은 좋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나 침략에는 연대감이 왜곡된 표현이라는 측면도 있다. 무관심하고 남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건강하기조차 하다[46]"고 언급하며, 일종의 복합적인 평가를 시도했다.

다케우치는 아시아주의의 기원을 타루이 도키치와 후쿠자와 유키치에서 찾았다. 그는 일본한국의 대등한 연합을 주장한 타루이의 사상을 높이 평가했지만, 서구를 따라 아시아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 후쿠자와의 탈아론이 대중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21] 그는 청일 전쟁러일 전쟁 승리 이후 일본이 아시아와의 연대를 강화하기보다는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냈다고 비판하며, 이러한 일본의 아시아주의를 '탈아(脫亞)'를 계승하여 아시아 전체를 일본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거아(擧亞)'로 해석했다.

다케우치에게 아시아는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차별권위주의로 특징지어지는 "근대 유럽"에 저항하고 극복하는 가치를 상징하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그는 일본서구 중심의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극복할 때 비로소 진정한 아시아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가 과거 침략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아시아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며 일본의 '아시아화'를 촉구했다. 그는 반둥 회의와 같은 사건에서 아시아 연대의 가능성을 보았으며, 동양서양 문명의 가치를 수용하되 이를 비판적으로 넘어서 더 보편적인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22]

한편, 그는 마오쩌둥 사상, 특히 항일 전쟁 시기 징강산 투쟁 경험에서 나온 '근거지 이론'에 주목하며, 이를 통해 서구와 다른 중국 혁명의 독자성과 저력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을 약자가 강자에 맞서면서도 불패를 확신하는 모순적 결합으로 파악하고, 이것이 반봉건, 반식민지의 중국 현실 속 혁명에서 도출된 가장 포괄적인 원리이자 보편적 진리라고 평가했다.[48] 중국의 핵실험에 대해서는, 잡지 『세계』 1965년 1월호 기고문 "저우쭤런에서 핵실험까지"에서 이성적으로는 비판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서구 열강에 맞서는 포스트식민적 관점에서 "잘했다, 잘 앵글로색슨과 그 수하들(일본인을 포함)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었다"는 통쾌함을 느꼈다고 솔직하게 밝히기도 했다.[49]

3. 3. 국민 문학 논쟁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문학 평론가 이토 세이, 노마 히로시 등과 함께 국민 문학의 본질을 둘러싼 국민 문학 논쟁을 벌였다. 이 시기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되던 때와 맞물린다. 다케우치는 이 논쟁 과정에서 발표한 「근대주의와 민족의 문제」(1951), 「국민 문학의 문제점」(1952), 「문학에 있어서 독립이란 무엇인가」(1954) 등의 관련 논문을 묶어 1954년 『국민문학론』(国民文学論일본어)을 출판했다.

그는 이 논쟁과 저서를 통해 민족 문학이 단순한 문학 활동을 넘어, 문화적 실천으로서 국가가 직면한 어려운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당시 일본 모더니즘이 '국가'라는 중대한 문제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3. 4. 저항 지식인으로서의 실천

1953년부터 도쿄 도립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다케우치 요시미는 1960년 안보 투쟁 국면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당시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이끄는 일본 정부는 국민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정된 미일 안보 조약을 중의원에서 강행 채결했다. 1960년 5월 20일, 여당 단독으로 조약 비준안이 통과되자[35], 다케우치는 이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규정하고 저항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라는 슬로건 아래 안보 조약 반대 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2], 정부의 비민주적인 행태를 강력히 비판했다. 강행 채결 다음 날인 5월 21일, 다케우치는 "헌법의 요점 중 하나인 의회주의가 사라졌다"고 지적하며, "내각총리대신에 의한 헌법 무시 상태 하에서 도쿄 도립 대학 교수의 직에 머무는 것은 공무원으로서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한다는 취업 당시의 서약에 위배되며, 또한 교육자로서의 양심에 위배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도쿄 도립 대학 교수직 사표를 제출했다.[35]

대학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표는 6월 27일에 최종 수리되었다.[36] 이 사건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다케우치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지식인의 양심과 사회적 책임을 다한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는 일본 국민의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민주적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했으나, 안보 조약 강행 처리 이후 "지금, 나는 일본 민족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미래에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 일본은 무국적 상태이다."라고 말하며 당시 일본 사회의 위기와 자신의 깊은 절망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4. 주요 저작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학자이자 문화 평론가로서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그의 첫 저서이자 대표작인 '''《루쉰》'''(1944)은 일본평론사에서 출간되었으며, 태평양 전쟁 중과 전후 일본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1] 이후 미래사(1961), 고단샤 문예문고(1994) 등에서 재출간되었다.

주요 저작으로는 다음이 있다.


  • '''《일본 이데올로기》''' (지쿠마 서방, 1952)
  • '''《루쉰 입문》''' (동양서관, 1953)
  • '''《국민문학론》''' (도쿄 대학 출판회, 1954)
  • '''《근대의 초극》''' (지쿠마 서방, 1983)


또한, 그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주요 평론으로는 '''「현대성이란 무엇인가?」'''(1948), '''「근대성의 극복」'''(1959), '''「방법으로서의 아시아」'''(1960) 등이 있으며, 이 글들은 영어로 번역되어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다케우치 요시미의 글''(2005)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 외 다수의 저작과 평론집이 있으며, 그의 사후에는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다케우치 요시미 전집》'''(전 17권)이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지쿠마 서방에서 간행되었다.

'''다케우치 요시미 전집 (전 17권, 지쿠마 서방, 1980-1982)'''
권차제목
1루쉰
2루쉰 입문
3현대 중국의 문학
4현대 중국론: 중국의 인민 혁명, 중국 혁명과 일본
5방법으로서의 아시아: 중국・인도・조선, 마오쩌둥
6일본 이데올로기: 민중・지식인・관료주의, 국가의 독립과 이상
7국민 문학론: 근대 일본의 문학 표현에 관하여
8근대 일본의 사상: 인간의 해방과 교육
9불복종의 유산: 1960년대
10중국을 알기 위해 1
11중국을 알기 위해 2
12작가에 관하여・서적에 관하여
13자화상: 나의 저작, 루쉰의 벗・중국의 모임
14전전・전중집
15일기 상
16일기 하
17보유: 초기 습작, 저작 목록・연보・인명 색인



기타 저작 목록:


  • 《루쉰 잡기》 (세계평론사, 1949)
  • 《현대 중국론》 (구 가와이데 문고, 1951)
  • 지식인의 과제》 (대한웅변회 고단샤, 1954)
  • 《불복종의 유산》 (지쿠마 서방, 1961)
  • 《다케우치 요시미 평론집》 (전 3권, 지쿠마 서방, 1966)
  • 《중국을 알기 위해》 (전 3권, 경초서방, 1967-1973)
  • 《예견과 착오》 (지쿠마 서방, 1970)
  • 《일본과 중국 사이》 (분게이슌주, 1973)
  • 《전형기 전후 일기초》 (창수사, 1974)
  • 《속 루쉰 잡기》 (경초서방, 1978)
  •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나의 전전 · 전중 · 전후 1935-1976》 (창수사, 1978)
  • 《다케우치 요시미 담론집 1: 국민문학론의 행방》 (란카도, 1985)
  • 《내부의 중국》 (지쿠마 총서, 1987)
  • 《일본과 아시아》 (지쿠마 학예문고, 1993)
  • 《다케우치 요시미 셀렉션》 (전 2권, 일본경제평론사, 2006)

4. 1. 한국어 번역서


  • ''루쉰'', 서광덕 역, 문학과지성사, 2003년 10월 24일
  • ''일본 이데올로기'', 돌베개, 2017년 1월
  • ''일본과 아시아'', 서광덕ㆍ백지운 공역, 소명출판, 2004년 11월 20일
  • ''고뇌하는 일본''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1), 마루카와 데쓰시ㆍ스즈키 미사히사 공편, 윤여일 역, 휴머니스트, 2011년 11월 7일
  • ''내재하는 아시아''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 2), 마루카와 데쓰시ㆍ스즈키 미사히사 공편, 윤여일 역, 휴머니스트, 2011년 11월 7일

5. 한국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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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비판적 시각

다케우치 요시미는 1942년 1월, 자신이 참여하던 잡지 《중국 문학》에 "대동아 전쟁과 우리의 결의"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1] 이는 당시 일본의 전쟁 수행에 대한 그의 입장을 보여주는 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마오쩌둥 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1963년부터는 자신이 발행하던 잡지 《중국》을 통해 마오쩌둥과 중국 문화 대혁명을 옹호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러한 활동은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시점까지 이어졌다. 특히 그는 적을 포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원리를 담고 있다고 해석한 마오쩌둥의 "기반/토대의 철학"(공거지 철학)에 주목했다.[2] 중국 문화 대혁명은 후일 많은 비판을 받은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를 옹호했던 다케우치의 당시 입장은 비판적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6. 수상


  • 1970년: 「중국을 알기 위해」로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을 수상.[38]

참조

[1] 인용
[2]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3] 인용
[4] 인용
[5] 인용
[6] 문서 "[[Overcoming modernity]]" and "[[World-Historical Standpoint]]" symposiums
[7] 인용
[8] 인용
[9] 인용
[10] 인용
[11] 인용
[12] 문서 Yasuda's texts
[13] 인용
[14] 인용
[15] 인용
[16] 인용
[17] 인용
[18] 문서 Se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and [[war crime]].
[19] 인용
[20] 인용
[21] 인용
[22] 인용
[23] 웹사이트 竹内好 https://kotobank.jp/[...] 2023-03-22
[24] 서적 大阪高等学校一覧 自昭和6年4月至昭和7年3月 https://dl.ndl.go.jp[...] 大阪高等学校
[25] 간행물 『官報』第1290号、昭和6年4月21日、p.546 https://dl.ndl.go.jp[...]
[26] 간행물 東京帝国大学 1934-06-05
[27] 서적 竹内好 ある方法の伝記 岩波現代文庫
[28] 서적 本はおもしろければいい 연합출판
[29] 서적 本はおもしろければいい 연합출판
[30] 서적 本はおもしろければいい 연합출판
[31] 웹사이트 井出孫六「竹内好 研究よ興れ」 http://www.avis.ne.j[...]
[32] 서적 竹内好 ある方法の伝記 岩波現代文庫
[33] 서적 近代日本総合年表 第四版 岩波書店
[34] 서적 『「思想の科学」五十年 源流から未来へ』 思想の科学社
[35]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36] 웹사이트 旧東京都立大学における安保改定反対運動と竹内教授の辞職 https://toritsu-conn[...] 2020-03-07
[37] 뉴스 中国文学の竹内好氏死去 朝日新聞 1976-03-04
[38] 간행물 日外アソシエーツ現代人物情報
[39] 서적 戦後文学論争 下巻 番町書房 1972
[40] 서적 荒野も歩めば径になる ロマンの猟人・尾崎秀樹の世界 実業之日本社
[41] 서적 荒野も歩めば径になる ロマンの猟人・尾崎秀樹の世界 実業之日本社
[42] 서적 荒野も歩めば径になる ロマンの猟人・尾崎秀樹の世界 実業之日本社
[43] 서적 竹内好全集
[44] 논문 Characters and events: popular essays in social and political philosophy H. Holt & Co. 1929
[45] 서적 竹内好全集
[46] 서적 日本人のアジア観
[47] 서적 竹内好全集
[48] 서적 竹内好全集
[49] 서적 竹内好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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