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만주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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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의 만주 침공은 1860년대부터 기근을 피해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청나라 간의 영유권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대한제국은 의화단 운동 당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한 틈을 타 간도 장악을 시도, 이학균 등 관찰단을 파견하고 이범윤을 간도 감시자로 임명했다. 이범윤은 사포대를 조직하여 간도에서 활동했으며, 대한제국군은 청나라 영토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일본의 개입으로 간도 협약을 통해 간도 영유권을 상실했다. 이 협약은 대한제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본의 이익을 우선시한 불평등 조약으로 비판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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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개혁은 대한제국 시기 고종의 통치 아래 사회, 군사, 재정, 산업, 교육 등 다방면에서 근대화를 시도한 개혁 운동이었으나, 토지 제도, 경제, 관료 사회 문제 등으로 인해 한계를 보였다.
대한제국의 만주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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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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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대한제국의 만주 침공 |
다른 이름 | 간도 분쟁 |
기간 | 1901년 3월 ~ 1904년 12월 20일 |
위치 | 중국 만주 간도 |
결과 | 대한제국의 승리 |
영토 변화 | 대한제국의 간도 일시적 점령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대한제국 |
교전국 2 | 청나라 |
지휘관 | |
대한제국 | 이범윤 |
청나라 | 불명 |
병력 규모 | |
대한제국 | 5,000명 |
청나라 | 15,000명 |
2. 배경
1860년대부터 함경도 지역의 조선인들이 기근을 피해 간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은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영유권 분쟁 지역이 되었다.[15][1] 1885년과 1887년, 양국은 국경 회담을 열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청나라는 간도 내 조선인 추방을 주장하는 등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 간도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는 더욱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되었다.[15][1] 당시 제국신문, 독립신문 등 국내 언론에서도 민족 문제와 영토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며 간도 문제에 주목했다.[15][1] 또한 함경북도 관찰사 조천우는 토문강이 증산(增山)을 지나 쑹화강으로 흘러 들어감을 근거로 토문강 동쪽과 증산 이남 지역이 대한제국의 영토에 속한다는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
2. 1.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 회담
1860년대부터 함경도 지역의 조선인들이 기근을 피해 간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15][1]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나라는 국경 회담을 개최했다.[15][1] 당시 청나라는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국경 밖으로 추방하려는 입장이었다.[15][1] 그러나 두 차례의 회담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간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회담은 결렬되었다.이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간도를 둘러싼 영유권 주장은 더욱 중요해졌다.[1] 제국신문이나 독립신문과 같은 당시 언론에서도 민족 문제와 영토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15][1] 특히 함경북도 관찰사였던 조천우는 토문강이 증산(增山)을 지나 쑹화강으로 흘러 들어가므로, 토문강 동쪽과 증산 남쪽 지역은 대한제국의 영토에 속한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리기도 했다.[1]
2. 2. 대한제국 시기 간도 분쟁 심화
대한제국 선포 이후 간도를 둘러싼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제국신문과 독립신문과 같은 일부 신문들은 다시 민족과 영토 문제를 다루며 간도 영유권 주장에 힘을 실었다.[15][1] 함경북도 관찰사 조천우는 두만강이 증산(增山)을 지나 송화강으로 흘러 들어가므로, 두만강 동쪽과 증산 남쪽 지역은 대한제국 영토에 속한다고 보고했다.2. 3. 대한제국의 간도 침공 준비
의화단 운동 당시 러시아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대한제국은 이를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 지역인 간도 문제 해결의 기회로 여겼다. 1901년부터 대한제국은 간도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1901년에는 대한제국군 장군 이학균, 주한 외교관 샌즈(Sands), 프랑스 육군 페이외(Payeux) 대위 등이 현지 상황 파악을 위해 간도에 파견되었다. 당시 주한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는 대한제국 정부가 간도 거주 한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관리를 파견한다면 제국의 이익과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플랑시는 러시아 공사관 측에서는 자국 영토 손실 가능성을 우려하여 대한제국의 간도 진출에 반대했다고 덧붙였다.[14][2]1901년 3월, 간도 관할을 위한 경찰서가 설치되어 1906년까지 운영되었으며, 총 200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었다. 이 경찰서는 간도를 북간도, 종성간도, 회령간도, 무산간도, 경원간도의 5개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1902년 대한제국은 간도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범윤을 시찰원(觀察員)으로 파견했다.[15][16][1][3] 이어 1903년에는 대한제국군 정규군 소속이 아닌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파견했으며[17][4], 이와 함께 두만강 이남 지역에 진위대를 창설했다. 대한제국은 종성에 150명, 무산군에 200명, 회령에 200명, 추가로 종성에 100명, 온성군에 100명, 경원군에 50명의 진위대 병력을 파견했다. 진위대의 강력한 국경 방어로 인해 청나라 관리들이 간도 내 한인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간도에 경찰 병력이 주둔하게 되면서 진위대의 주된 임무는 국경 수비로 전환되었다.
이범윤은 무력 없이는 간도 내 한인들을 보호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의병과 대한제국군 출신 등으로 구성된 사포대(射砲隊)라는 민병 조직을 창설했다.[18][5] 1904년, 주한 일본 공사관은 대한제국 정부가 간도가 청나라 영토임을 명시하는 문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보고했다.[19][6] 1903년 9월부터 이범윤은 군사력 증강에 나서 봉천, 만주, 길림, 간도 일대에 참호를 구축하고, 러시아 교관을 초빙하여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서울에서 소총 500정을 구입했다. 고종의 간도 확보 의지와 이용익의 지지에 힘입어 대한제국 정부는 사포대를 지원했다.[20][7] 청나라 측 기록에 따르면, 1903년 9월 4일 약 1,000명의 한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영토를 소각하고 약탈했으며, 10월 2일에는 700~800명이 임강현 관청을 습격했다고 한다. 청나라와의 추가적인 충돌을 우려한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이범윤에게 소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범윤은 이를 거부하고 휘하 병력을 이끌고 연해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최재형, 안중근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합류했다.[21][8]
2. 4. 이범윤의 간도 관리 파견과 사포대 활동
1902년 대한제국은 간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범윤을 간도 관리로 파견했다.[15][16][1][3] 1903년 대한제국 정부는 대한제국군 소속이 아닌 이범윤을 간도 감시자로 파견하여, 현지 한국인 보호 및 대한제국의 영향력 강화를 추진했다.[17][4] 이 시기 두만강 이남에는 국경 수비를 위한 진위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강력한 국경 방어는 청나라 관리들이 한국인들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이범윤은 무력 없이는 현지 한국인들을 보호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의병과 대한제국군 병력으로 구성된 민병대인 사포대를 창설했다.[18][5] 사포대는 대한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이는 간도를 장악하려는 고종의 의지와 이용익의 지지에 따른 것이었다.[20][7] 이범윤은 러시아 교관을 고용해 군대를 훈련시키고 서울에서 소총 500정을 구입하는 등 무력을 강화했다. 또한 1903년 9월부터 봉천(현 심양), 만주, 길림, 간도 사이에 대규모 참호를 파며 군대를 키우기 시작했다.
청나라 관리의 기록에 따르면, 사포대의 활동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1903년 9월 4일 대한제국군 약 1,000명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땅을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10월 2일에는 700~800명이 린장 현청을 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1904년 주한 일본 공사관은 대한제국 정부에 간도가 청나라 영토임을 명시적으로 기록한 문서가 없다고 보고했다.[19][6] 청나라와의 추가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이범윤에게 소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범윤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군대를 이끌고 연해주로 이동하여 최재형, 안중근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합류했다.[21][8]
2. 5. 대한제국군의 활동과 청나라와의 충돌
대한제국은 의화단 운동 이후 러시아 제국이 만주를 점령한 상황을 청나라와의 국경 문제, 특히 간도 문제 해결의 기회로 인식하였다.[14][2] 1901년부터 대한제국은 간도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 확보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같은 해 3월, 간도 관할 경찰서가 설립되어 1906년까지 운영되었으며, 200명의 경찰 인력이 배치되었다. 이 경찰서는 간도를 북간도, 종성간도, 회령간도, 무산간도, 경원간도 등 5개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1902년에는 간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이범윤을 관찰사로 파견하였다.[15][16][1][3]1903년, 대한제국 정부는 고종의 의지와 이용익의 지지에 힘입어 이범윤을 간도 관리자로 임명하고, 간도 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본격화했다.[17][20][7] 이 과정에서 두만강 이남 지역에 진위대가 창설되었다. 초기에는 경찰 병력의 성격이었으나, 간도에 경찰이 주둔하게 되면서 점차 국경 수비 임무에 집중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아래와 같이 진위대 병력을 국경 지역에 배치했다.
간도 침공 이후, 일부 한국인들은 간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인식하여 1907년 지도에 포함하기도 했다.[9] 그러나 일본의 영향력 확대와 을사늑약을 통한 외교권 박탈[9]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의 간도 문제 개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으나,[9] 결국 일본은 청나라와 간도 협약(1909년)을 체결하여 간도를 청나라 영토로 인정했다.[10][11][12] 이는 대한제국의 의사와 무관하게 진행되었으며, 이듬해 대한제국은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다.[13]
진위대의 강력한 국경 방어로 인해 청나라 관리들이 간도 내 한국인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이범윤은 무력 없이는 한국인들을 보호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의병과 대한제국군 출신으로 구성된 민병 조직인 사포대(射砲隊)를 창설했다.[18][5] 그는 러시아 교관을 초빙하여 군대를 훈련시키고 서울에서 소총 500정을 구입하는 등 군사력 증강에 힘썼으며, 만주의 봉천(현 선양), 길림, 간도 일대에 참호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적극적인 활동은 청나라와의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청나라 측 기록에 따르면, 1903년 9월 4일에는 대한제국군 약 1,000명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영토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으며, 같은 해 10월 2일에는 700~800명의 대한제국군이 린장(임강) 현청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청나라와의 추가적인 충돌을 우려한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이범윤에게 소환 명령을 내렸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휘하 병력을 이끌고 연해주로 이동하여 최재형, 안중근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합류하여 항일 투쟁에 참여하게 된다.[21][8]
3. 일본의 개입과 간도 협약 체결
3. 1.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20세기 초 일본 제국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다. 특히 1905년, 일본 제국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 주권을 박탈하고, 모든 외교 관련 권한을 일본 외무성에 넘겼다.[22][9]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간도 문제와 같은 중요한 외교 현안에 대해 독자적으로 대응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3. 2. 간도 협약 체결과 그 결과
간도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여기는 시각이 있었으며, 1907년에는 간도가 대한제국 영토로 표시된 지도가 발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본 제국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력을 점차 강화해 나갔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 주권을 강제로 박탈하고, 외교에 관한 모든 권한을 일본 외무부에 넘겨받았다.[22][9]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당시 러일 전쟁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 중이었고, 사포대가 간도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본의 간섭을 침략 행위로 간주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본이 만주 국경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자, 한때 간도를 한국 영토라고 언급했던 대한매일신보마저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9]
결국 1909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간도 협약이 체결되면서 간도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이 협약은 간도를 청나라의 영토로 공식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23][24][10][11][12] 그리고 다음 해인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었다.[25][13]
4. 간도 협약에 대한 비판적 시각
을사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은 한국의 모든 외교 사안을 일본 외무성에서 관장하게 하였다.[9]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09년, 일본은 중국과 일방적으로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간도가 중국 영토임을 인정하였다.[10][11][12] 이 협약 과정에서 당사자인 대한제국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었으며,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이익 관철을 위한 불평등 조약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서울대학교의 이태진 교수는 당시 한국인들이 러일 전쟁 등 일련의 과정에서 나타난 일본의 간섭을 명백한 침략 행위로 인식했다고 지적한다.[9] 일본의 압력이 거세지자, 과거 간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했던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여론 역시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9] 결과적으로 간도 협약은 대한제국의 영토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간도 지역에 대한 한민족의 역사적 권리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협약이 체결된 다음 해인 1910년, 대한제국은 한일 병합 조약으로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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