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쓰카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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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쓰카 히로시는 일제강점기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난 요트 선수 출신으로, 1976년 도쓰카 요트 스쿨을 설립하여 정서 장애 아동의 치료를 표방했으나, 과도한 훈련과 체벌로 인한 사망 사건으로 논란이 되었다. 그는 '뇌간론'을 바탕으로 한 스파르타 교육을 주장하며, 뇌과학적 근거 없이 난치병 치료 효과를 주장했다. 극우적이고 혐한적인 발언으로 비판받았으며, 음모론 및 사이비 종교와 연루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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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쓰카 히로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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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호즈카 히로시 |
한자 표기 | 戸塚 宏 |
후리가나 | とつか ひろし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함경북도 청진시 (생육지는 아이치현 나고야시) |
직업 | 호즈카 요트 스쿨 경영 |
학력 | 나고야 대학 공학부 |
직함 | 호즈카 요트 스쿨 교장 |
상세 정보 |
2. 생애
일제강점기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했으며, 나고야 대학 공학부를 졸업했다.[1] 대학 시절 요트를 접하여 선수로 활동했고, 1975년에는 태평양 횡단 레이스에서 우승하며 세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
1976년 도쓰카 요트 스쿨을 설립하여 처음에는 요트 선수 양성을 목표로 했으나, 점차 등교 거부 등 정서 장애 아동의 교정을 주요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의학적 근거가 부족하고 가혹한 훈련과 체벌로 인해 훈련생 5명이 사망하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 논란이 불거졌다.[10][11] 이 도쓰카 요트 스쿨 사건으로 1983년 상해치사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2002년 최고 재판소에서 "훈련은 인권을 무시한 행위이며, 교육도 치료도 아니다"라는 판결과 함께 징역 6년형이 확정되었다.
2006년 만기 출소한 후에도 스쿨 운영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현재까지도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2. 1. 초기 생애
일제강점기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나 중학교 졸업 때까지 후쿠오카현 야하타시 (현: 기타큐슈시),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자랐다. 나고야 시립 키쿠사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1]1959년, 나고야 대학 공학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며, 재학 중 요트를 접했다. 1965년 나고야 대학 공학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2. 2. 요트 선수 경력
1959년 나고야 대학 공학부 재학 중 요트를 처음 접했다. 1975년에는 오키나와 국제 해양 박람회 기념 태평양 횡단 레이스에 참가하여, 1인승 요트로 41일 만에 태평양을 횡단하는 최단 세계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1]2. 3. 도쓰카 요트 스쿨 설립과 논란
1976년, 주식회사 도쓰카 요트 스쿨이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키우기 위한 요트 스쿨로 시작했으나, 이듬해 가을부터 등교 거부 등 정서 장애를 겪는 아이들의 갱생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언론에 소개되면서, 점차 정서 장애 아동의 치료를 주요 활동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를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자료나 기록은 거의 없으며, 의학적·과학적 근거도 부족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일본 아동 청소년 정신의학회와 일본 종합 병원 정신의학회 이사회는 도쓰카의 강연과 이론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10][11] 도쓰카 히로시는 의사나 의학자가 아니다.도쓰카 요트 스쿨의 합숙 훈련에 참가했던 작가 가미노고 토시아키는 『스파르타의 바다』라는 책을 통해 스쿨의 활동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책은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었으나(배우 이토 시로 주연), 도쓰카의 체포로 제작이 보류되었다가 그의 출소 후인 2005년에 DVD로 출시되었고, 2011년에는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책에서는 코치진의 가혹한 훈련과 체벌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며, 실제로 이러한 과정에서 훈련생 5명이 사망(상해치사 2명, 병사 1명, 행방불명 후 간주 사망 2명)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83년 6월 13일, 도쓰카 요트 스쿨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도쓰카 히로시는 코치들과 함께 감금 및 상해 치사 혐의로 체포되었다.
1986년 7월 보석으로 풀려난 도쓰카는 와세다제에서 인물 연구회의 초청 강연을 하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니혼 TV의 「EX 텔레비전」 등 여러 매체에 출연하여, 뇌간을 단련하면 암, 아토피, 우울증, 등교 거부 등 모든 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소위 "뇌간론"을 주장했다.
1992년 7월 7일, 나고야 지방 법원은 도쓰카 히로시와 코치 6명에게 상해 치사죄를 인정하여 집행 유예가 포함된 유죄 판결을 내렸다. 검찰과 피고 측 모두 항소했다.
1997년 3월 12일, 나고야 고등 법원은 항소심에서 상해 치사로 사망한 2명에 대해 외상성 쇼크가 사망 원인임을 인정하고, "훈련은 인권을 무시한 행위이며, 교육도 치료도 아니다"라고 판시하며 1심 판결을 파기했다. 도쓰카 히로시에게는 징역 6년, 코치 3명에게도 실형을 선고했다. 도쓰카 등은 즉시 최고 재판소에 상고했다.
2002년 2월 15일, 최고 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했다. 같은 해 3월 11일, 도쓰카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징역 6년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로써 도쓰카를 포함한 관련자 15명 전원의 유죄가 확정되었다. 그럼에도 도쓰카는 체벌과 사망 사건 사이의 인과 관계를 부정하며 현재까지도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2002년 3월 29일, 도쓰카는 나고야 고등 검찰청에 출두했으며, 즉시 호송차로 시즈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미결 구류 기간이 일부 형기에 포함되어 실제 복역 기간은 4년이었다.
2. 4. 출소 후 활동
2006년 4월 29일, 시즈오카 형무소를 만기 출소했다. 출소 후, 도쓰카는 시즈오카 시내에서 취재진에게 "돌아오셨습니다. 스쿨은 아직 계속합니까?"라는 질문에 "아직도 계속할 것입니다."라고 답하며 도쓰카 요트 스쿨 운영 재개 의사를 밝혔다. 그 후에도 도쓰카 요트 스쿨 훈련생 사건이 계속되었다.3. 교육 철학 및 비판
도쓰카 히로시는 소위 "뇌간론"이라는 독자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스파르타 교육과 체벌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교육 철학을 펼쳤다. 그는 1976년 주식회사 형태로 도쓰카 요트 스쿨을 설립했는데, 초기에는 올림픽 메달리스트 육성을 목표로 했으나 점차 등교 거부 등 정서 장애를 겪는 아동들의 교정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활동의 초점을 옮겼다.
도쓰카는 자신의 요트 스쿨 훈련이 정서 장애는 물론 각종 난치병까지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9], 이는 의학적·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관련 분야 전문가가 아니며,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도 거의 없다. 이에 일본 아동 청소년 정신의학회 등 관련 학계는 그의 이론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0][11].
그의 강압적인 훈련 방식은 결국 훈련생 사망 사건(도쓰카 요트 스쿨 사건)으로 이어졌고, 도쓰카는 상해 치사 혐의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했다. 출소 후에도 그는 자신의 교육 방식을 고수하며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고, 그의 교육 철학은 과학적 근거 부족과 아동 인권 침해라는 점에서 지속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3. 1. 뇌간론 비판
도쓰카 히로시는 소위 "뇌간론"을 기초로 한 스파르타 교육을 자신의 교육 철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는 뇌과학자나 의학 박사는 아니다.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요트 스쿨의 훈련을 통해 악성 종양, 파킨슨병, 교원병, 간 기능 장애, 간염, 신염, 부정맥, 백혈구 과다, 백혈구 부족, 만성 두통, 동공 반사 이상, 메니에르병으로 의심되는 이명, 축농증, 알레르기성 비염, 편도선 비대, 슬개건 반사 이상, 혈색소 과소, 위·십이지장 궤양, 궤양성 대장염, 류마티스 관절염, 젊은 당뇨병, 소아 천식, 아토피성 피부염, 신증후군 등 다양한 난치병이 치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9].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의학적인 근거는 전혀 제시된 바 없다.
도쓰카는 생리학자 한스 셀리에의 주장을 인용하며, 질병의 종류와 관계없이 환자에게 공통적인 '환자다움'이 있듯이, 문제아에게도 공통된 '문제아다움'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문제아다움'을 나약함으로 규정하고, 이는 정신이 약하고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2]. 이러한 주장은 그의 강압적인 훈련 방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진다.
3. 2. 체벌 옹호론 비판
도쓰카 히로시는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인 "뇌간론"을 근거로 스파르타 교육과 체벌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요트 스쿨의 강압적인 훈련을 통해 악성 종양, 파킨슨병, 아토피성 피부염과 같은 난치병은 물론, 등교 거부와 같은 정서적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9].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의학적·과학적 근거가 매우 부족하며, 도쓰카 자신도 의사나 관련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자료나 연구 결과는 거의 제시되지 않았다.이러한 비과학적 주장에 대해 일본 아동 청소년 정신의학회와 일본 종합 병원 정신의학회 등 관련 학계에서는 도쓰카의 이론과 강연 내용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10][11]. 전문가들은 그의 방법이 교육이나 치료가 아닌, 단순한 폭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도쓰카는 자신의 교육 철학을 정당화하기 위해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어린이는 칭찬하면 진보하지 않는다"[12]고 말하며 긍정적 강화 방식의 교육을 비판했고, "문제아의 문제는 정신적 나약함에서 비롯되며, 이는 트레이닝(체벌) 부족 때문"[12]이라고 주장하며 체벌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더 나아가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12], "이성은 만들어내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12], 심지어 "힘은 정의다"[12]와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통해 자신의 폭력적인 훈련 방식을 합리화하려 했다. 이는 세계 인권 선언에서 천명한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과 같은 보편적 인권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도쓰카 요트 스쿨에서는 그의 비인간적인 훈련 방식으로 인해 훈련생 5명이 사망(상해 치사 2명, 병사 1명, 행방불명 후 간주 사망 2명)하는 비극적인 도쓰카 요트 스쿨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도쓰카는 1983년 상해 치사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고, 긴 법정 공방 끝에 1997년 나고야 고등 법원은 "훈련은 인권을 무시한다. 교육도 치료도 아니다"라고 판시하며 1심 판결(집행 유예)을 파기하고 그에게 징역 6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2002년 최고 재판소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최종 확정되었지만[10][11], 도쓰카는 시즈오카 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이후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 없이 체벌과 사망 사건 사이의 인과 관계를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하는 태도를 보였다.
도쓰카의 체벌 옹호론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아동 학대와 폭력을 정당화하고 아동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했다는 점에서 일본 사회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비판을 받았다. 그의 사례는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자행될 수 있는 폭력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3. 3. 유사 과학 및 사이비 의학 비판
도쓰카 히로시는 요트 스쿨 훈련을 통해 정서 장애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체적 질병까지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열론』 등에서 요트 스쿨 훈련을 받으면 암, 파킨슨병, 교원병, 간 기능 장애, 간염, 신염, 부정맥, 백혈구 과다, 백혈구 부족, 만성 두통, 동공 반사 이상, 메니에르병으로 의심되는 이명, 축농증, 알레르기성 비염, 편도선 비대, 슬개건 반사 이상, 혈색소 과소, 위·십이지장 궤양, 궤양성 대장염, 류마티스 관절염, 젊은 당뇨병, 소아 천식, 아토피성 피부염, 신증후군 등 난치병을 포함한 여러 질병이 낫는다고 주장했다[9].특히 그는 "뇌간을 단련하면 암이나 아토피, 우울증, 등교 거부 등 모든 병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뇌간론'을 핵심 이론으로 내세웠다. 그는 "암과 비행은 같은 원인"이며, "암은 뇌간의 허약, 교원병은 뇌간의 엇나감, 비행은 뇌간과 대뇌 변연계의 허약"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9]. 또한 "암도 면역계의 도피"이며, "등교 거부나 비행을 고치는 방법으로 암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9].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의학적·과학적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도쓰카 요트 스쿨의 정서 장애 개선 효과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자료나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 아동 청소년 정신의학회와 일본 종합 병원 정신의학회 이사회는 도쓰카의 강연과 이론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10][11], 도쓰카 본인 역시 의사나 의학자가 아니다. 그의 주장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유사과학 또는 사이비 의학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 논란 및 사회적 영향
도쓰카 히로시는 그가 운영한 도쓰카 요트 스쿨과 관련된 여러 논란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다. 당초 요트 선수 육성을 목표로 설립된 스쿨은 점차 등교 거부 등 정서 장애 아동의 '갱생'을 표방하며 운영되었으나, 그 효과에 대한 객관적·과학적 근거는 부족했고 오히려 전문가 단체의 비판을 받았다.[10][11] 특히 스쿨 내에서 발생한 훈련생 사망 사건(도쓰카 요트 스쿨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도쓰카는 상해 치사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했다.
그는 의학적 근거 없이 뇌간 훈련으로 각종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위 "뇌간론"을 주장했으며,[9] 출소 후에도 체벌을 옹호하는 등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며 논란을 이어갔다. 또한, 수감되었던 시즈오카 형무소의 처우를 "헌법에 반하는 인권 침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사상적으로는 유학 등을 내세워 혐한 감정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재일 한국·조선인 특별 영주자에 대한 배타주의적 활동을 벌였으며,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들의 고통을 "훈련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발언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더불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음모론과 관련된 활동('전자기장 등을 생각하는 심포지엄 교토 회의' 발기인 참여 등)에도 연루된 바 있다.
4. 1. 도쓰카 요트 스쿨 사건의 사회적 파장
1976년 주식회사 형태로 개교한 도쓰카 요트 스쿨은 본래 올림픽 메달리스트 육성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가을 무렵부터 등교 거부와 같은 정서 장애를 겪는 아동들의 '갱생'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언론에 소개된 이후 점차 정서 장애 아동의 치료를 표방하는 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자료나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의학적·과학적 근거 또한 부족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실제로 일본 아동 청소년 정신의학회와 일본 종합 병원 정신의학회 이사회는 도쓰카 히로시의 강연과 이론에 대해 비판적인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10][11]。 도쓰카 본인 역시 의사나 의학자가 아니었다.스쿨의 실상은 합숙 훈련에 참가했던 작가 가미노고 토시아키가 저술한 『스파르타의 바다』를 통해 일부 알려졌다. 이 책은 스쿨의 활동과 훈련 방식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이후 영화화가 추진되기도 했다. (영화는 도쓰카의 체포로 제작이 보류되었다가, 그의 출옥 후인 2005년 DVD로 출시되었고 2011년에야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러나 스쿨에서 벌어진 코치진의 과도한 훈련과 체벌은 결국 5명의 사망자(상해 치사 2명, 병사 1명, 행방불명 후 간주 사망 2명)를 낳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단순한 교육 문제를 넘어 심각한 아동 인권 침해 문제로 비화되었다.1983년 6월 13일, 도쓰카 요트 스쿨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도쓰카 히로시는 코치들과 함께 감금 및 상해 치사 혐의로 체포되었다. 1986년 7월 보석으로 석방된 이후에도 그는 니혼 TV의 「EX 텔레비전」 등 다양한 미디어에 출연하여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뇌간을 단련하면 암, 아토피, 우울증, 등교 거부 등 모든 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비과학적인 "뇌간론"을 설파하며 논란을 이어갔다.
1992년 7월 7일, 나고야 지방 법원은 도쓰카와 코치 6명에게 상해 치사죄로 유죄 판결(집행 유예 포함)을 선고했으나, 검찰과 피고 측 모두 항소했다. 1997년 3월 12일, 나고야 고등 법원은 항소심에서 2명의 사망 원인이 외상성 쇼크임을 인정하며, "훈련은 인권을 무시한 행위이며, 교육도 치료도 아니다"라고 명확히 판시했다. 이에 1심 판결을 파기하고 도쓰카에게 징역 6년, 코치 3명에게도 실형을 선고했다. 도쓰카 등은 최고 재판소에 상고했으나, 2002년 2월 15일 상고는 기각되었다.
결국 2002년 3월 11일, 도쓰카의 징역 6년형이 최종 확정되었으며, 그를 포함한 관련자 15명 전원의 유죄가 확정되었다. 그럼에도 도쓰카는 체벌과 사망 사건 사이의 인과 관계를 전면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같은 해 3월 29일, 나고야 고등 검찰청에 출두한 그는 시즈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미결 구류 일수가 형기에 산입되어 실제 복역 기간은 4년이었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교육의 의미와 아동 인권의 중요성에 대한 깊은 성찰과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4. 2. 극우 및 혐한 발언 논란
도쓰카 히로시는 유학 등을 사상적 근거로 삼아 소위 "혐한"을 주장하며, 재일 한국·조선인의 특별 영주자에 대한 배타주의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문제로 이에나가 사부로와 격렬하게 대립하기도 했다.4. 3. 음모론 및 사이비 종교 연루 논란
도쓰카 히로시는 옴진리교, 파나웨이브 연구소 등 논란이 있는 단체와 연관되거나 음모론을 주장하는 인물들과 교류한 사실이 있다.도쓰카는 2020년 옴진리교의 후계 단체인 히카리의 고리 대표 우에사토 후미히로와 두 차례 대담[18][19]을 가졌다. 이 대담과 2020년 2월 21일 니코니코 동화에 게시된 일본 문화 채널 사쿠라 영상[4] 등에서 도쓰카는 아사하라 쇼코와 옴진리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3][5]。 그는 매스 미디어가 "아사하라 쇼코가 젊은이들을 세뇌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아사하라가 자유주의 사상에 세뇌된 젊은이들의 세뇌를 푼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아사하라가 수행을 통해 진리를 획득했으며, 이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젊은이들을 세뇌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3][5]。 나아가 '''"옴진리교는 불교", "불교는 과학"'''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4]。 반면, 현재 아사하라와 알레프를 비판하는 우에사토(와세다 대학 이공학부 출신)에 대해서는 "그저 곗값 수재", "동료를 경찰에 판 배신자", "수행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3]。
1999년, 도쓰카는 '전자기장 등을 생각하는 심포지엄 교토 회의'에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2000년대 초 사회 문제가 되었던 파나웨이브 연구소가 스칼라 전자기파에 대해 발표했으며, 이들은 스칼라 전자기파의 영향으로 인류 멸망이나 지구 붕괴가 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선명의 지시에 따라 통일교와 국제승공연합이 출자하여 설립한 단체인 세계일보가 발행하는 월간 뷰포인트 2011년 9월호에 도쓰카의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다.[13][14][15][16] 또한, WEB판 뷰포인트에는 뷰포인트 기자가 도쓰카 요트 스쿨 창립 37주년 파티에 참석했다는 칼럼이 2013년 11월 25일에 게재되었다.[17]
도쓰카 요트 스쿨의 지지자이자 그의 소송 대리인을 맡았던 변호사 미나미데 키쿠지는 빌 게이츠에 의한 인구 감축 음모론을 주장하고 소위 반 백신파로 활동하는 인물이다[20]。 미나미데는 과거 신마토 Q의 변호인을 맡았으며[21], 해당 단체의 시위나 집회에도 참가했다. 또한, 2023년 2월 24일에는 친러시아파의 '돈바스의 인권과 우크라이나 문제를 생각하는 국민 집회'에 사회자로 참가[22]하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실지 회복을 위한 군사 행동으로 정당화하고 크림반도 병합이 당연하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도쓰카와 『그래도, 체벌은 필요하다!』를 공저한 타모가미 토시오 역시 딥 스테이트 음모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저서
(1985년 11월 카도카와 쇼텐에서 문고화)
(온라인 열람 가능)
(왁 타모가미 토시오와의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