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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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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서 분당은 16세기 후반 조선에서 사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 학파와 지역 기반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된 사건을 말한다. 15세기 말, 훈구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림은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갈등을 겪으며 분당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붕당은 동인과 서인, 그리고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정쟁을 벌였으며, 임진왜란, 정여립 모반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며 붕당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를 통해 남인이 몰락하면서 붕당정치는 종말을 맞이하고, 세도정치 시대를 거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

2. 붕당정치의 배경

조선 초기, 훈구파가 정권을 독점하며 여러 폐단이 나타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가 등용되면서 붕당정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2. 1. 사림의 정계 진출

고려 말 사회 혼란을 개혁하려 했던 신진사대부 중 온건개혁파는 낙향하여 성리학을 연구하며 성장하였고, 훈구파의 견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6][7] 1476년 정희왕후의 섭정이 끝나고[8] 성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사림파를 대거 중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9] 사림파는 주로 삼사(三司)에 기용되어[10] 계유정란(1453년) 이후 각종 특권을 누리며 매관매직 등 부정을 일삼던[9]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였고,[11] 양측은 빈번하게 대립하였다.[12]

2. 2. 사림의 좌절과 재기

연산군 대에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를 겪으며 사림파는 큰 타격을 입었다.[13]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조광조 등 사림파가 등용되어 개혁 정치를 추진했으나,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에 대한 반발로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다시 좌절되었다.[17][18]

인종은 즉위후 기묘사화로 희생된 사림을 복권하고 중용하여 외척을 견제했으나,[19] 후계없이 갑자기 사망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명종 즉위 후 수렴청정을 시작한 문정왕후1545년 을사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숙청했다.[20] 이후 문정왕후가 실권을 잡고 있었던 20년간 사림파는 탄압받았다.[20][21]

이와 같이 16세기 네 차례의 사화를 거치며 사림파는 큰 좌절을 겪었으나,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지방에 지지 세력을 키우며 재기를 도모했다.[22]

2. 3. 사림의 조정 장악

선조 즉위 후 사림파가 대거 등용되며 조정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했다. 선조는 기묘사화(1519년) 때 희생된 자들을 사면, 복권하여 사림의 조정 진출의 길을 열었다.[38] 조광조의 개혁 유산으로 강화된 이조전랑의 권한을 바탕으로 사림파는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였다.

선조는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사림을 가까이 하고 공신과 왕실의 외척을 배척하여 척신정치가 사라지고 훈구파는 사림으로 흡수되었다.[24]

3. 붕당의 형성

1575년(선조 8년), 이조전랑 자리를 둘러싼 김효원심의겸의 갈등으로 사림이 동인서인으로 나뉘면서 붕당이 시작되었다.[44]

이조전랑홍문관 출신의 명망 있고 젊은 문신 중에서 선임되는 중요한 자리였다.[37] 1575년, 후임 이조정랑으로 심충겸이 거론되었으나, 후임 지명권을 가진 이조정랑 김효원이발을 추천하며 심충겸을 강하게 반대했다.[44] 김효원심충겸이 외척이라는 이유를 들었으나,[37] 인순왕후는 이미 사망했고 심의겸은 사림에 합류했기에 명분이 약했다. 실제로는 1574년에 심의겸김효원의 이조정랑 취임을 반대했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39][40]

김효원의 반대로 심충겸 대신 이발이 이조정랑이 되자[42] 두 사람은 크게 다투었고, 사림은 김효원을 지지하는 젊은 세력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노장 세력으로 나뉘었다.[43]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낙산 아래 건천동에 있어 동인(東人),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 정동에 있어 서인(西人)이라 불렀다.[44]

1572년 이준경은 붕당의 조짐을 예견하고[45][46] 이이를 당쟁의 중심인물로 지적했으나, 이이는 반발했다. 그러나 붕당이 현실화되자 이이는 붕당 혁파와 사림 융합에 힘썼다.[47][48] 이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림은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었고, 선조는 붕당의 균형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49] 이이는 분란 당사자인 심의겸김효원을 지방관으로 보내는 해결책을 제시했고,[50][51] 선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이의 건의로 심의겸개성유수로, 김효원은 함경도 경흥부사로 보내졌는데, 개성보다 외진 경흥으로 간 것에 대해 동인들의 반발이 컸다.[52] 선조는 오히려 동인 세 명을 귀양보내며[52] 이이를 신임했고, 이이는 서인의 거두로 인식되었다.[53]

1578년 김성일윤두수 등이 뇌물을 받았다고 폭로하자[54] 서인은 이들을 옹호하고 동인은 공격하며 붕당 간 다툼이 격화되었다.

동인 내부에서도 정인홍 등이 우성전의 축첩 문제를 제기하며 갈등이 발생했다. 우성전은 동인의 지도자였으나,[56] 그의 애첩이 상례에 어긋나게 행동한 것이 알려지자[56] 이발, 정인홍 등이 우성전을 공격했다. 이는 훗날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3. 1. 붕당정치의 수용

유교적 정치 이념에서는 신하들이 붕당을 형성하는 것을 범죄로 여겼으며,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이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었다.[25] 그러나 송나라 이후 성리학에서는 구양수, 주희 등이 군자(君子)끼리 모인 '군자당'(君子黨)이 소인(小人)을 배제하고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하였다.[25][26] 조선의 사림(士林)은 이를 받아들였고, 선조는 명종 때까지 붕당 행위가 역모에 버금가는 중범죄였으나, 정책 공론화를 통해 발전적인 당파 정치를 이끌고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고자 붕당을 허용하였다.[27][28] 선조 때부터 시작된 붕당 정치는 상호 비판과 견제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으나, 과도기적 양상을 띠며 임진왜란에 효율적으로 대비하지 못하는 또 다른 혼란도 야기했다.

3. 2. 이조전랑

조선시대에는 무관보다는 문관의 인사권을 더 중요시 하였으므로 이조전랑이 특히 중요한 요직이 되었다. 태조 때 이조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각각 3명씩으로 정해 『경국대전』에 법제화하였다.[29] 이조의 정랑과 좌랑은 각 부서의 당하관(堂下官)에 대한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1516년(중종 11) 조광조가 개혁을 주도하면서 삼사(三司) 관리 선발권과 후임 이조정랑 지명권이 주어져 권한이 막강해졌다.[30] 1569년(선조 2)에는 재야 인사 추천권까지 주어지며 권한이 더욱 강해졌다. 또한 중죄가 아니면 탄핵받지 않았으며,[31] 정랑을 거치면 대개 재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32][33]

이조정랑의 이런 권한은 이조판서로부터 독립된 권리였으며, 가장 큰 권한은 사정기관인 삼사(三司) 관리 추천권이었다. 따라서 삼사(三司)의 여론은 은연중 정랑의 통제하에 있었고, 삼사(三司)를 통하여 대신들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주요 인사권과 언론권이 정랑에 집중되어, 정랑직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결정되기도 했다. 막강한 권한 때문에 당상관도 길에서 정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관리 임명 권한은 삼정승이 있는 의정부에 있지 않고 이조에 속해 있었다.[34] 따라서 이조의 수장인 이조판서는 삼정승보다 큰 권한을 누렸다. 이런 이조판서의 인사권 전횡을 방지하기 위하여 삼사 관리 추천권만은 독립시켜 이조정랑에게 전권을 주었다. 왕권과 유력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서 감시, 탄핵, 감찰하는 삼사의 인사권이 재상이나 이조판서에게 있으면 자기 사람을 심어 권력을 남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삼사에 대한 인사권을 대신들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삼사 관리들이 소신껏 감찰, 탄핵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일환이었다.[33]

또한 정5품에 지나지 않는 관료가 막강한 권한을 대신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사하려면 이조정랑 지위 역시 보장되어 있어야 했다. 따라서 이조정랑직에 대한 인사권도 대신들로부터 독립시켜서 이임하는 전임 이조정랑에게 후임 이조정랑 지명권도 주었다.[35] 전임자가 후임자를 지명하면 큰 결격사유가 없는 한 왕이 직접 임명하였다.[36]

3. 3. 붕당의 시작

1575년(선조 8년), 이조전랑 자리를 둘러싼 김효원심의겸의 갈등으로 동인서인이 분열되며 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44]

이조정랑은 조선 시대에 중요한 청요직(淸要職) 중 으뜸으로, 홍문관 출신의 명망 있고 젊은 문신 중에서 선임되었다.[37] 1575년(선조 8년), 후임 이조정랑에 심충겸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후임 지명권을 가진 이조정랑 김효원이발을 천거하며 강하게 반대했다.[44] 김효원심충겸 같은 외척에게 이조정랑을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37] 그러나 인순왕후는 선조 즉위 1년 만에 섭정에서 물러났고, 1575년에 이미 사망했으며, 선조는 명종의 양자였고 심충겸처럼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된 경우는 척신으로 분류되지 않았으며,[38] 심의겸 조차 사림에 합류하였기에 이 명분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실질적인 이유는 1574년(선조 7년)에 심의겸김효원의 이조정랑 취임에 반대했었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 이조정랑 오건(吳健)이 김효원을 이조정랑으로 지명하자,[39] 당시 이조참의 심의겸은 과거 김효원이 권세가 윤원형의 식객이었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40] 윤원형은 1545년에 을사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숙청한 자였다. 김효원윤원형의 사위인 이조민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을 뿐 식객이 아니었음이 밝혀지면서 이조정랑에 등용되었으나,[37] 이 일로 개인적인 악감정이 남게 되었다.

결국 김효원의 반대로 심충겸이 이조정랑에 오르지 못하고 이발이 차지하자[42] 두 사람은 격하게 다투었고, 사림(士林)의 내부 의견도 두 패로 나뉘었다.[43] 젊은 사림들은 김효원을, 노장 사림들은 심의겸을 지지했다.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낙산 밑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하였고, 심의겸 집은 도성 서쪽 정동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西人)이라 불렀다.[44]

3. 4. 을해당론

이준경은 1572년(선조 5)에 붕당의 조짐을 예견했다.[45][46] 이준경은 당쟁의 중심인물로 율곡 이이를 지적했고, 이이는 이에 즉각 반발했다. 그러나 붕당이 현실화되자 이이는 반성하며[47] 붕당 혁파와 사림(士林) 융합에 앞장섰다.[48] 그러나 율곡 이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림은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었고, 300년 조선 당쟁이 시작되었다. 선조는 대신들의 분열을 왕권 강화에 이용하고자 다수인 동인보다 서인을 가까이하며 붕당의 균형을 꾀하였다.[49] 사림의 융합을 원했던 율곡은 양측의 다툼이 격렬해지자 분란 당사자 두 명을 지방관으로 파견하는 해결책을 건의했고,[50][51] 선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3. 5. 계미삼찬

이율곡의 건의에 따라 심의겸개성유수(開城留守)로, 김효원을 함경도 경흥부사로 보냈는데, 개성에 비해 함경도 경흥은 외진 곳이었기 때문에 서인을 우대하고 동인을 홀대한 것으로 받아들인 동인들의 반발이 극심했다.[52] 이율곡을 비판하는 상소가 연일 올라갔고 삼사(三司)에서도 이율곡을 비판했다. 하지만 선조는 오히려 동인 세력인 송응개와 박근원, 허봉 3명을 1583년(계미년)에 귀양보내며[52] 이율곡에 대한 신임을 드러냈다. 결국 붕당을 반대했던 이율곡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서인의 거두로 인식되었고[53] 서인에 대한 선조의 지지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3. 6. 이수의 옥사

김성일은 1578년 윤헌, 윤두수, 윤근수가 진도군수 이수(李銖)로부터 뇌물로 쌀을 받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54] 경연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자 이들은 탄핵받았으나, 쌀을 운반한 장세량(張世良)은 혐의를 끝까지 부인했다. 이때 심충겸 등 서인은 윤헌, 윤두수, 윤근수를 옹호하였고, 이산해 등 동인은 이들 3윤의 죄상을 공격하였다. 동인과 서인의 다툼이 격해지던 중 진도군수 이수에게 악감정이 있었던 고을 아전이 이수의 쌀 제공 사실을 증언하여, 결국 3윤은 파면되었다.[55] 이 사건은 붕당정치의 여파로 일어난 초기의 사건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3. 7. 동인의 내부 갈등

정인홍 등은 같은 동인 소속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삼아 동인 내부에 갈등이 발생했다. 우성전은 학문적 소양이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했기에 동서 분당 후 당시 동인들이 새로운 지도자로 떠받들던 인물이었다.[56] 그러나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 그의 애첩인 한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56] 이발, 정인홍 등이 상례에 어긋난 일이라고 우성전을 공격하면서 동인 내부 갈등으로 작용했다. 선조는 우성전의 처신에 대해 문제를 삼지는 않았으나, 이는 훗날 기축옥사(1589)와 건저 문제(세자 책봉 파동) 이후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라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3. 8. 동인의 분열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이 벌어지고[59][60] 정여립이 자결하면서[61] 역모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관련자들에 대한 취조가 시작되자, 서인들은 정여립이 탈당 후 동인과 합세하여 서인을 비난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고, 1584년 이이가 사망한 후 잃었던 정권을 되찾을 기회로 삼아 사건을 옥사로 확대시켰다. 이발, 이산해 등은 증거가 불충분하고 정여립은 역모를 꾀할 인물이 아니며, 설령 반역을 꾀했다 하더라도 동인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서인들과 대립했다. 이때 동인들은 서인에 적극적으로 맞서며 옥사를 규탄한 북인과, 서인들의 주장에 동조한 유성룡, 우성전 등의 남인으로 점차 분열되기 시작했다.[62]

선조는 비대해진 동인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서인 소속 송강 정철을 위관으로 임명했고, 정여립과 교류가 많았던 동인(북인)들이 주로 구속된 상태에서 옥사가 무리하게 진행되었다. 3년 가까이 진행된 옥사 기간 동안 위관 정철의 가혹한 처결로 1,000명의 동인이 숙청당했으며,[63][64] 정철은 이로 인해 '동인백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65] 기축옥사를 계기로 서인이 동인을 누르고 다시 집권 세력이 되었고, 동인과 서인 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져 비판, 견제, 공존이라는 붕당정치의 기본 원칙이 무너지고 당쟁은 유혈 숙청으로 번져갔다.[66]

4. 붕당의 변천사

붕당은 시대에 따라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며 변화했다.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동인북인남인으로 나뉘었다.[59][60][62] 1591년 정철이 광해군 세자 책봉을 주청하다가 실각하면서 동인이 다시 정권을 잡았고, 이때 서인에 대한 처결 문제를 두고 북인과 남인으로 갈렸다.[68]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606년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후계 구도가 복잡해졌다. 북인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나뉘었다.[69][70]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대북이 득세하고 소북은 몰락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남인이 협력하여 정권을 주도했다.[71] 현종 때 예송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했다.[73]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송시열윤증의 불화, 남인에 대한 처결 방식을 두고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었다.[74]

영조탕평책을 통해 당쟁을 완화하려 했으나,[80][81] 1762년 임오화변 이후 노론은 사도세자에 대한 입장에 따라 벽파시파로 나뉘었다.[85] 정조는 탕평책을 계승하고 남인과 시파를 중용했다.[86]

1801년 신유박해로 남인과 시파가 숙청되면서[87] 노론 벽파가 조정을 장악했으나, 1804년 순조의 친정 시작과 함께 안동 김씨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89] 이로써 붕당정치는 붕괴되고, 흥선대원군서원 철폐로 300년간 이어진 붕당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90]

4. 1. 북인과 남인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이 벌어지고[59][60] 정여립이 자결하자[61] 역모는 기정사실로 굳어졌고 관련자들에 대한 취조가 시작되었다. 서인들은 정여립이 탈당 후 동인과 합세하여 서인을 비난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 1584년 이이가 죽은 후 빼앗긴 정권을 되찾을 기회로 판단하여 옥사로 사건을 확대시켰다. 이발, 이산해 등은 증거가 불충분하고 정여립은 역모를 꾀할 위인이 못되며 설사 반역을 꾀했다 해도 동인과는 무관하다 주장하여 서인들과 팽팽히 맞섰다. 이때 동인들은 서인과 적극적으로 맞서며 옥사를 규탄한 북인과 서인들의 주장에 동조한 유성룡, 우성전 등의 남인으로 서서히 나뉘기 시작했다.[62]

선조는 그동안 지나치게 세력이 비대해진 동인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위관으로 서인 소속 송강 정철을 임명하였고, 정여립과 교류가 많았던 동인(북인)들이 주로 구속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옥사가 진행되었다. 3년 가까이 진행된 옥사 기간 동안 위관 정철이 지나치게 가혹한 처결로 일관함에 1,000명의 동인이 유혈 숙청을 당했고,[63][64] 이로 인해 정철은 훗날 '동인백정'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했다.[65] 또한 금번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이 동인을 누르고 다시 집권 세력이 되었으며 동인과 서인 간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며 비판, 견제, 공존이라는 붕당정치의 금도가 깨어진 후 당쟁은 유혈 숙청으로 비화되었다.[66]

1591년 정철이 광해군 세자 책봉을 주청하다가 선조의 진노를 사서 실각하며 서인들이 대거 몰락하였다.( 건저문제) 다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들은 서인에 대한 처결 문제 있어서 강경하게 대처하자는 북인과 온건한 처결을 주장하는 남인으로 갈리게 되었다.[68]

4. 2. 대북과 소북

임진왜란 중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606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영창대군을 낳자, 후계 구도가 복잡해졌다. 선조가 서자인 광해군을 폐하고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듯한 의중을 드러냈기 때문이다.[69] 임진왜란을 거치며 정권을 잡은 북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적통론을 내세운 소북(小北)은 영창대군을 지지했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자들은 대북(大北)을 이루었다.[70] 1608년, 선조가 사망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이 득세하고 소북은 몰락하였다.

4. 3. 서인과 남인

인조반정 이후 서인남인이 협력하여 정권을 주도하였다.[71]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으로 큰 시련을 겪은 후, 현종 때 기해예송(1659)으로 서인이 집권하였으나 갑인예송(1674)에서는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73]

4. 4. 노론과 소론

경신환국(1680)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74] 정권을 잡은 서인은 주도권 다툼, 송시열윤증의 불화, 남인에 대한 처결 방식을 두고 온건파인 소론과 강경파인 노론으로 분열되었다. 기사환국(1689) 때 다시 남인이 집권했지만 곧 갑술환국(1694)으로 소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후 남인은 완전히 몰락했다.[75][76]

4. 5. 시파와 벽파

영조탕평책을 통해 당쟁의 폐단을 없애고자 노력하여, 이전처럼 격렬한 당쟁은 많이 줄어들었다.[80][81] 1762년 임오화변 이후 노론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당시하는 벽파와 동정하는 시파로 분열되었다.[85] 영조에 이어 즉위한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다.[86] 정조는 벽파보다 자신의 국정 운영에 부합하는 세력인 남인시파를 중용하며 정국을 이끌었다.

4. 6. 붕당의 종말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수렴청정을 시작했는데, 그녀는 1801년에 신유박해를 일으켜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명분은 사교 철폐였으나 실질적인 목표는 정조 재위기에 성장한 남인과 시파의 숙청에 있었다.[87] 남인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천주교에 가까운 자가 많았으니 이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1년간의 박해로 300명 이상이 죽고 많은 이들이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남인과 시파는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88] 이로써 조정은 노론 벽파가 완전히 장악했으나 1804년에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그의 장인 김조순이 득세하여 벽파를 숙청하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89] 이로써 붕당정치가 붕괴되고 외척 중심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으며,[90]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붕당의 뿌리인 서원을 철폐하며 300년간 이어진 붕당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참조

[1] 서적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010
[2] 웹사이트 붕당 [朋黨] https://terms.naver.[...]
[3] 웹사이트 붕당 [朋黨] https://terms.naver.[...]
[4] 서적 우리역사를 읽는 33가지 테마 푸른숲 1997
[5] 웹사이트 동서분당 [東西分黨]
[6]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1996
[7] 서적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8
[8] 서적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8
[9] 서적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8
[10] 문서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11] 웹사이트 무오사화 [戊午士禍] https://terms.naver.[...]
[12] 웹사이트 사화 [士禍] https://terms.naver.[...]
[13] 서적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14] 서적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랜덤하우스중앙 2004
[15] 서적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16] 웹사이트 조광조 [趙光祖] https://terms.naver.[...]
[17] 서적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랜덤하우스중앙 2004
[18] 웹사이트 조광조 [趙光祖]
[19] 서적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20] 서적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21] 웹사이트 윤원형 [尹元衡] https://terms.naver.[...]
[22] 서적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23]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1996
[24] 서적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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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적 우리역사를 읽는 33가지 테마 푸른숲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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