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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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근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황의 문인이며 서인에 속했다. 1537년에 태어나 1616년에 사망했으며, 광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해평군에 봉해졌다. 관료 생활 동안 홍문관 부수찬, 암행어사, 대사성, 경상도 감사, 개성부 유수 등을 역임했고, 임진왜란 시기에는 예조판서로 선조를 호종하며 명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는 등 국난 극복에 기여했다. 저서로는 《월정집》, 《월정만필》 등이 있으며,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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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근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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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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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 尹根壽 |
한글 | 윤근수 |
자 | 자고(子固) |
호 | 월정(月汀), 외암(畏菴) |
시호 | 문정(文貞) |
작위 |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
출생 | 1537년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 | 1616년 8월 17일 (향년 80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정치 | |
정당 | 서인 후예 잔존 세력 |
주요 경력 | 문신, 정치가, 시인, 화가 |
관직 | 형조판서 |
임기 시작 | 1589년 5월 |
임기 종료 | 1589년 8월 |
군주 | 조선 선조 이연 |
학력 | |
학력 | 1558년 별시문과에 급제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풍양 조씨 부인 |
자녀 | 아들 윤환(尹晥), 아들 윤질(尹晊) |
부모 | 윤변(부), 팔기 현씨 부인(모) |
형제 | 윤춘수(이복 형), 윤두수(동복 형) |
친인척 | 조카 윤흔, 윤방, 윤훤, 서조카 윤우, 윤간, 종손 윤신지, 외할아버지 현윤명, 사돈 이전, 인척 원균 |
기타 | |
종교 | 유교(성리학) |
웹사이트 | 해당 사항 없음 |
2. 생애
1537년 윤변(尹忭)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과 의정부영의정 해징부원군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현씨는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은 고조부 윤연령의 사위였다.
아버지 윤변은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윤근수는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친동생이며, 20년 연상인 윤춘수, 윤기수, 윤담수는 이복 형이다. 아버지 윤변은 본처를 잃고 30대의 현씨를 만나 결혼하여 두수와 근수 형제를 낳았다.
이복형 윤담수의 아들 윤현의 사위는 이상의로, 이익의 증조부이자 유형원의 외증조부이다. 이상의는 북인으로, 후손들은 남인에 입당하여 근기남인이 된다. 서인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10세에 사서(四書)를 통달했으며, 역대(歷代)의 사실을 암기하여 물으면 외우듯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김덕수(金德秀)와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안국의 딸 풍양 조씨와 결혼하여 아들 6명을 얻었으나 윤환(尹晥), 윤질(尹晊) 등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식, 주자, 육구연(陸九淵) 등의 학문을 담론하였고, 원균과도 자주 교류하였다.[2]
155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뒤 승정원 주서, 춘추관 기사관, 봉상시 주부 등을 지냈다.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연천 현감 등을 역임하고, 1562년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정언을 거쳐 다시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1562년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으로 경연에서 조광조의 사면을 주장하였으나 훈구파의 비난을 받고 과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1]
1563년 이량이 아들 정빈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형 윤두수 등이 반대한 것에 연루되어 이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해 윤원형, 심통원의 상계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승문원 검교에 서용되었으나, 형 윤두수가 이조전랑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1]
1565년 홍문관부교리로 기용된 뒤 이조좌랑·정랑, 의정부사인·지제교 겸 교서관 교리, 병조좌랑, 홍문관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 홍문관에서 독서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하였다. 1567년 집의가 된 이후 검상·사인·장령·집의·사예·부응교를 역임하였으며, 1570년 충청도암행어사로 부임하여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해 5월 전한을 거쳐 구황 적간 어사로 다시 파견되었다.[1]
1572년(선조 5) 사헌부집의, 대독관, 동부승지, 성균대사성, 부제학, 사헌부대사헌,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듬해 주청사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를 요청하였으나 성과 없이 귀국하였다. 1575년 동인과 서인이 나뉘게 되자 김효원 등을 따르지 않고 이이, 심의겸, 성혼을 따라 서인에 가담하였다.[1]
1574년 경상도감사, 1575년 부제학, 개경부유수,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578년 뇌물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강릉부사·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을 지냈다.[1]
1584년 대사간, 경연특진관, 1587년 특진관, 1589년 공조참판을 지냈다.[1]
1589년 홍순언의 인연으로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후 명나라에 성절사 겸 종계변무사로 파견되어 개정된 《대명회전전서》를 가져왔다. 이후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1590년 광국공신 1등관에 정헌대부로 승진, 해평군에 봉해졌다. 같은 해 정여립의 난과 계축옥사 때 동인을 공격했다. 1591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1]
1591년 우찬성 재직 중, 정철의 건저 문제(왕세자 책봉 문제)로 동인과 서인 간 싸움이 벌어졌을 때 정철에게 광해군을 적극 추천할 것을 당부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형 윤두수와 함께 관직을 삭탈당했다.[1]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가 되고, 의주까지 어가를 호종하였으며, 그해 6월 숭정으로 승진하고 해평군에 봉작되었다. 문안사, 판의금부사 등을 겸하며 국난 극복에 노력하였다. 6개월간 광영에 세 번, 요동에는 여섯 번 파견되어 명나라 고관들을 만나 조선에 파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3]
원접사·주청사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명나라에 장계를 올려 파병을 청하였다.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그의 인품을 신뢰하여 군사 전략과 파병 결정을 도왔다. 1593년 대제학에 임명되고, 2월에는 접반사가 되었다.[3]
임진왜란 중 원균과 이순신이 갈등할 때 형 윤두수와 함께 원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3]
1595년 의정부좌찬성에 오르고, 1596년 보국숭록대부로 특별 승진,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해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그해 9월 판의금부사가 되고, 1597년 왕비를 수안으로 시종한 뒤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역임했으며, 전란 종결 이후 왕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1598년 승문원제조가 되었다. 1599년 사역원 제조를 거쳐 경리 도감 당상으로 관왕묘 신설 때 병력을 동원하여 건립에 투입하였다.[3]
1601년 지경연사, 1603년 상의원 제조, 1604년 의주 호종의 공로로 호성공신 2등관에 책록되었다.[3]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祖)로 칭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적극 주청한 덕에 광해군 집권 초 서인들 중 상당수가 숙청당했는데도 그와 그의 아들들, 서자들은 계속 관직에 있을 수 있었다. 광해군 즉위 초반에는 원로 대신으로 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1610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관료생활 중에도 퇴청 후에는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고, 만년에도 후학 양성과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조익(浦渚 趙翼) 등이 배출되었다.
1614년 법을 어기고 휴가를 다녀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하였다. 청백간손(淸白簡遜)하고 문장이 고아하며 필법이 주경(遒勁)하여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또한 그림도 잘 그려서 난초화와 죽화(竹畵)를 여러 편 남기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서토석 四書吐釋≫, 《월정집 月汀集》, 《조천록 朝天錄》, 《마한사초》, 《조경창수》 등이 있고, 향토지인 《송도지》, 수필집인 《월정만필 (月汀漫筆)》 등을 남겼다. 1616년 8월 17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특별 추증되었다. 1614년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추록되었다. 그 후 1630년 문정(文貞)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독바위(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 사당이 세워졌다. 사당은 후에 전란으로 훼손됐으나 1990년 10월 후손들에 의해 복구되어 현 위치에 세워졌다. 그의 사당은 양주시 향토유적 제 16호로 지정되었다.
2. 1. 생애 초반
윤근수는 1537년 할아버지 사용(司勇)을 지낸 윤희림(尹希林)이고,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과 의정부영의정 해징부원군에 추증된 지족암 윤변(尹忭)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현씨는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고조부 윤연령의 딸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의 형수였다.
아버지 지족암 윤변은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윤근수는 20년 연상인 윤춘수, 윤기수, 윤담수와 윤씨의 이복 동생이고,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친동생이다. 그는 후처 소생으로, 아버지 윤변은 본처를 잃고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30대의 과년한 처녀 현씨를 만나 결혼하여 두수와 근수 형제를 낳았다.
이복형 윤담수의 아들이자 조카 윤현의 사위는 소릉 이상의로, 그는 근기 남인 성호 이익의 증조부이자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외증조부가 된다. 이상의는 북인으로 그의 후손들은 북인 몰락 후 남인에 입당하여 근기남인이 된다. 서인 당원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영리하고 민첩하여 10세에 사서(四書)를 통달했으며, 역대(歷代)의 사실을 암기하여 물으면 외우듯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 뒤 학업에 전념하였으며, 김덕수(金德秀)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황(李滉)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조안국의 딸 풍양 조씨와 결혼했는데, 부인 풍양 조씨에게서 아들 6명을 얻었으나 윤환(尹晥), 윤질(尹晊) 등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고 모두 요절하였다.
이후로도 이황과 계속 서신을 주고받고 의문점이 있으면 그에게 연락하여 꼭 답을 얻곤 하였다. 주로 스승 이황과 조식, 주자, 육구연(陸九淵) 등의 학문을 담론하였다. 원균과도 자주 교류하였다.[2]
2. 1. 1. 출생과 가계
월정 윤근수는 1537년 할아버지 사용(司勇)을 지낸 윤희림(尹希林)이고,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과 의정부영의정 해징부원군에 추증된 지족암 윤변(尹忭)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현씨는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고조부 윤연령의 딸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박팽년의 형수였다.
아버지 지족암 윤변은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0년 연상인 윤춘수, 윤기수, 윤담수와 윤씨의 이복 동생이고,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친동생이다. 그는 후처 소생으로, 아버지 윤변은 본처를 잃고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30대의 과년한 처녀 현씨를 만나 결혼하여 두수와 근수 형제를 두게 되었다 한다.
이복형 윤담수의 아들이자 조카 윤현의 사위는 소릉 이상의로, 그는 근기 남인 성호 이익의 증조부이자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외증조부가 된다. 이상의는 북인으로 그의 후손들은 북인 몰락 후 남인에 입당하여 근기남인이 된다. 서인 당원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2. 1. 2. 소년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영리하고 민첩하여 10세에 사서(四書)를 통달했으며, 역대(歷代)의 사실을 암기하여 물으면 외우듯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 뒤 학업에 전념하였으며, 김덕수(金德秀)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황(李滉)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조안국의 딸 풍양 조씨와 결혼했는데, 부인 풍양 조씨에게서 아들 6명을 얻었으나 윤환(尹晥), 윤질(尹晊) 등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고 모두 요절하였다.
이후로도 이황과 계속 서신을 주고받고 의문점이 있으면 그에게 연락하여 꼭 답을 얻곤 하였다. 주로 스승 이황과 조식, 주자, 육구연(陸九淵) 등의 학문을 담론하였다. 원균과도 자주 교류하였다.[2]
2. 2. 관료 생활
1558년(명종 1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뒤 승정원 주서, 춘추관 기사관, 봉상시 주부 등을 지냈다.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연천 현감 등을 역임하고, 1562년 6월 홍문관 부수찬, 7월 사간원 정언을 거쳐 다시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1562년 9월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으로 경연에서 조광조의 사면과 신원 회복을 주장하였으나 훈구파의 비난을 받고 과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1]1563년 8월 이량이 아들 정빈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형 윤두수와 박소립, 기대승 등이 반대한 것에 연루되어 대사헌 이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해 9월 윤원형, 심통원의 상계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승문원 검교에 서용되었으나, 형 윤두수가 이조전랑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1]
1565년 홍문관부교리로 기용된 뒤 이조좌랑·이조정랑, 의정부사인·지제교 겸 교서관 교리, 병조좌랑, 홍문관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명종 22) 홍문관에서 독서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년) 선조 즉위 직후 집의가 된 이후 검상·사인·장령·집의·사예·부응교를 역임하였으며, 1570년 충청도암행어사로 부임하여 의문의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해 5월 전한을 거쳐 구황 적간 어사로 다시 파견되었다.[1]
1572년(선조 5) 사헌부집의, 대독관, 동부승지, 성균대사성, 부제학, 사헌부대사헌,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듬해 주청사 주청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를 요청하였으나 성과 없이 귀국하였다. 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인과 서인이 나뉘게 되자 김효원 등을 따르지 않고 이이, 심의겸, 성혼을 따라 서인에 가담하였다.[1]
1574년 경상도감사, 1575년 부제학, 개경부유수,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578년 뇌물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강릉부사·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을 지냈다.[1]
1584년 대사간, 경연특진관, 1587년 특진관, 1589년 공조참판을 지냈다.[1]
1589년 홍순언의 인연으로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후 명나라에 성절사 겸 종계변무사로 파견되어 개정된 《대명회전전서》를 가져왔다. 이후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1590년 광국공신 1등관에 정헌대부로 승진, 해평군에 봉해졌다. 같은 해 정여립의 난과 계축옥사 때 동인을 공격했다. 1591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1]
1591년 우찬성 재직 중, 정철의 건저 문제(왕세자 책봉 문제)로 동인과 서인 간 싸움이 벌어졌을 때 정철에게 광해군을 적극 추천할 것을 당부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형 윤두수와 함께 관직을 삭탈당했다.[1]
2. 2. 1. 과거 급제
1558년(명종 13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다음,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등을 지냈다. 그 뒤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연천 현감(漣川縣監) 등을 역임하고, 1562년(명종 17년) 6월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7월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고 7월 말 다시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되었다. 1562년 9월 부수찬으로 경연검토관(檢討官)을 겸하였다가 경연에서 조광조(趙光祖)의 사면과 신원 회복을 주장하였으나 훈구파의 비난을 받고 9월말 과천 현감으로 좌천되었다.1563년 8월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형 윤두수와 박소립, 기대승 등이 반대하였는데, 이에 연루되어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때 이감은 그가 그의 형 윤두수, 박소립, 이문형, 허엽, 기대승 등과 파벌을 만들고 부박(浮薄)하게 선동한다며 탄핵했으나, 심의겸이 이감이 이량의 당여라고 공격하여 대호군으로 전임되면서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 해 9월 영의정 윤원형, 우의정 심통원의 상계(上啓)로 인하여 죄가 없음이 밝혀져 승문원 검교에 서용되었으나, 형 윤두수가 이조전랑 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
2. 2. 2. 정치 활동
1565년 2월 홍문관부교리로 다시 기용된 뒤 3월 이조좌랑·이조정랑(正郞)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의정부사인·지제교 겸 교서관 교리(知製敎兼校書館校理)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검교, 병조좌랑, 교리를 역임하고 1566년 4월 홍문관 부교리, 5월 다시 이조정랑이 되었다. 1567년(명종 22) 홍문관에서 독서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년) 선조 즉위 직후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후 검상·사인·장령·집의·사예·부응교를 역임하였으며, 1570년에는 충청도암행어사로 부임하여 의문의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해 5월 전한(典翰)을 거쳐 구황 적간 어사(救荒摘奸御史)로 다시 파견되었다.1572년(선조 5) 사헌부집의를 거쳐 대독관(對讀官)으로 그 해의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그해 동부승지를 거쳐 성균대사성에 승진, 부제학, 사헌부대사헌을 지내고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주청사가 파견될 때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요청하였으나 성과 없이 귀국하였다. 그 뒤 1575년의 을해당론으로 동인과 서인이 나뉘게 되자 그는 동문인 김효원 등을 따르지 않고 이이, 심의겸, 성혼을 따라 서인에 가담하였다.
1574년 9월 경상도감사, 1575년 12월 부제학 등을 지냈다. 이어 개경부유수,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578년 뇌물을 받았다는 동인(東人) 계열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기용되어 강릉부사·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을 지냈다.
1584년 대사간, 경연특진관, 1587년 특진관, 1589년 공조참판을 지냈다.
2. 2. 3. 계축옥사 전후
1589년 홍순언의 인연으로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윤근수는 명나라에 성절사 겸 종계변무사로 파견되었고, 귀국 시 개정된 《대명회전전서》를 가져왔다. 이후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1등관에 정헌대부로 승진, 해평군에 봉해졌다. 같은 해 정여립의 난과 계축옥사 때 동인을 공격했다. 1591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1591년 우찬성 재직 중, 정철의 건저 문제(왕세자 책봉 문제)로 동인과 서인 간 싸움이 벌어졌다. 이 때 윤근수는 정철에게 광해군을 적극 추천할 것을 당부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형 윤두수와 함께 관직을 삭탈당했다.
2. 3. 생애 후반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가 되고, 의주까지 어가를 호종하였으며, 그해 6월 숭정으로 승진하고 해평군에 봉작되었다. 문안사, 판의금부사 등을 겸하며 국난 극복에 노력하였다. 이후 6개월간 광영에 세 번, 요동에는 여섯 번 파견되어 명나라 고관들을 만나 조선에 파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3]원접사·주청사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명나라에 장계를 올려 파병을 청하였다.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그의 인품을 신뢰하여 군사 전략과 파병 결정을 도왔다. 1593년 1월 대제학에 임명되고, 2월에는 접반사가 되었다.[3]
임진왜란 중 원균과 이순신이 갈등할 때 형 윤두수와 함께 원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3]
1595년 의정부좌찬성에 오르고, 1596년 보국숭록대부로 특별 승진,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해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그해 9월 판의금부사가 되고, 1597년 왕비를 수안으로 시종한 뒤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역임했으며, 전란 종결 이후 왕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1598년 승문원제조가 되었다. 1599년 사역원 제조를 거쳐 경리 도감 당상으로 관왕묘 신설 때 병력을 동원하여 건립에 투입하였다.[3]
1601년 지경연사, 1603년 상의원 제조, 1604년(선조 37년) 의주 호종의 공로로 호성공신 2등관에 책록되었다.[3]
2. 3. 1. 임진왜란 전후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고, 왕의 어가를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그해 6월 숭정(崇政)으로 승진하고 해평군(海平君)에 봉작되었다. 문안사(問安使),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겸하며 국난 극복에 노력하였다. 이후 6개월간 광영(廣寧)에 세 번, 요동(遙東)에는 여섯 번 파견되어 명나라의 고관들을 만나 조선에 파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원접사(遠接使)·주청사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명나라에 장계를 올려 조선에 파병해줄 것을 청하였다.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은 그의 인품을 신뢰하여 군사 전략과 파병결정을 얻는 것을 도왔다. 1593년에는 명나라의 사절단과 교섭하였고, 1월 대제학에 임명되고, 2월에는 접반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중 원균과 이순신이 갈등할 때 원균의 손을 들어주었다. 형 윤두수와 함께 원균은 고금에 없는 명장이라고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3]
1595년 의정부좌찬성에 오르고, 1596년 보국숭록대부로 특별 승진, 부원군으로 진봉되어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그해 9월 판의금부사가 되고, 1597년에는 왕비를 수안(遂安)으로 시종한 뒤의정부좌찬성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했다.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의정부좌찬성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으며, 전란 종결 이후 왕의 각별한 신임을 얻고, 1598년 승문원제조가 되었다. 1599년에는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를 거쳐 경리 도감 당상(經理都監堂上)으로 관왕묘 신설 문제 때 병력을 동원하여 건립에 투입하였다.
1601년 지경연사, 1603년 상의원 제조, 1604년(선조 37년)에는 의주 호종의 공로로 호성공신 2등관(扈聖功臣二等管)에 책록되었다.
2. 3. 2. 만년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祖)로 칭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적극 주청한 덕에 광해군 집권 초 서인들 중 상당수가 숙청당했는데도 그와 그의 아들들, 서자들은 계속 관직에 있을 수 있었다. 광해군 즉위 초반에는 원로 대신으로 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1610년 기로소에 들어갔다.관료생활 중에도 퇴청 후에는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고, 만년에도 후학 양성과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포저 조익(浦渚 趙翼) 등이 문인으로 배출되었다.
1614년 법을 어기고 휴가를 다녀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하였다. 청백간손(淸白簡遜)하고 문장이 고아하며 필법이 주경(遒勁)하여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또한 그림도 잘 그려서 난초화와 죽화(竹畵)를 여러 편 남기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서토석 四書吐釋≫, 《월정집 月汀集》, 《조천록 朝天錄》, 《마한사초》, 《조경창수》 등이 있고, 향토지인 《송도지》, 수필집인 《월정만필 (月汀漫筆)》 등을 남겼다. 1616년 8월 17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향년 80세였다.
2. 4. 사후
사후 증직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특별 추증되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추록되었다. 그 후 1630년(인조 8년) 문정(文貞)의 시호가 추서되었다.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독바위(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 사당이 세워졌다. 사당은 후에 전란으로 훼손됐으나 1990년 10월 후손들에 의해 복구되어 현 위치에 세워졌다. 그의 사당은 양주시 향토유적 제 16호로 지정되었다.
3. 사상과 신념
이황과 조식에게서 배운 그는 성리학만이 올바른 학문이라 생각했다. 당시 명나라에서 소개되어 들어오기 시작한 양명학은 해롭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 배척했고, 왕양명과 이탁오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또한 양명학이 퍼지면서 나온 육구연, 왕수인의 문묘종사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4. 평가
사람됨이 청백간솔(淸白簡率)하고 문장이 고아(古雅)하며, 필법이 준경(遒勁)하여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으로 평가받았다.[1]
5. 가계
월정 윤근수는 1537년 할아버지 윤희림(尹希林)과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사후 이조참판과 의정부영의정 해징부원군에 추증된 윤변(尹忭)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인 팔기 현씨이다. 그의 고조부 윤연령의 딸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형수였다.
아버지 윤변은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윤근수는 20년 연상인 이복 형 윤춘수, 윤기수, 윤담수와 이복 형제간이며,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와는 친형제이다. 그는 후처 소생으로, 그의 아버지 윤변은 본처를 잃고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30대의 과년한 처녀 현씨를 만나 결혼하여 두수와 근수 형제를 두게 되었다고 한다.
이복 형 윤담수의 아들이자 조카 윤현의 사위는 소릉 이상의로, 그는 근기 남인 성호 이익의 증조부이자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외증조부가 된다. 이상의는 북인으로 그의 후손들은 북인 몰락 후 남인에 입당하여 근기남인이 되었다. 서인 당원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구분 | 내용 |
---|---|
조부 | 윤희림(尹希琳) |
조모 | 죽산 박씨(竹山朴氏) |
아버지 | 윤변(尹忭) |
어머니(생모) | 팔기 현씨, 현윤명(玄允明)의 딸 |
부인 | 풍양 조씨, 병마절도사 증 의정부좌찬성 조안국(趙安國)의 딸 |
장남 | 윤환(尹晥, 1556년 - ?) |
자부 | 이씨, 이반(李磐)의 딸 |
손자 | 윤응지(尹應之, 1582년 - 1641년 11월 5일) |
차남 | 윤질(尹晊) |
손자 | 윤택지(尹擇之) |
손자 | 윤상지(尹尙之), 삼촌 윤유(尹曘)의 양자로 출계 |
손자 | 윤열지(尹悅之) |
손자 | 윤종지(尹宗之), 숙부 윤민(尹旼)의 양자로 출계 |
삼남 | 윤명(尹㫥) |
손자 | 윤정지(尹挺之) |
사남 | 윤유(尹曘) |
오남 | 윤환(尹㬇) |
자부 | 우계 이씨, 이준헌의 딸, 이복남의 누이 |
육남 | 윤민(尹旼) |
친형 | 윤두수(尹斗壽, 1533년~1601년) |
6. 저서
- 《월정집》
- 《월정만필》
- 《사서토석》
- 《조천록》
- 《한문질의》
- 《경조창수》
- 《마한사초》
- 《송도지》
7. 작품
8. 시
奉送李參判以陳奏副使如京|봉송이참판이진주부사여경중국어 : 진주부사로 연경에 가는 이참판을 전송하다[1]
문장과 외교사령은 파도처럼 풍부하고[1]
젊은 시절 뛰어난 재주는 다투어 다시 보았네[1]
자줏빛 기운은 문득 머나먼 유주와 계주에 홀연히 피어오르고[1]
검은 표범 가죽은 차가운 눈서리에 응당 찢어지리라[1]
태양은 넓은 길에 임해 끝없이 밝고[1]
모함은 중산과 같으나 큰 어려움을 해결하리라[1]
압록강에서 돌아오는 사절단을 기다릴 테니[1]
남쪽 가지에 앉은 까막까치는 모두 평안하길[1]
9. 기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祖)로 칭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적극 주청한 덕에 광해군 집권 초 서인들 중 상당수가 숙청당했는데도 그와 그의 아들들, 서자들은 계속 관직에 있을 수 있었다. 광해군 즉위 초반에는 원로 대신으로 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1610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관료생활 중에도 퇴청 후에는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고, 만년에도 후학 양성과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포저 조익(浦渚 趙翼) 등이 문인으로 배출되었다.
1614년 법을 어기고 휴가를 다녀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하였다. 청백간손(淸白簡遜)하고 문장이 고아하며 필법이 주경(遒勁)하여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또한 그림도 잘 그려서 난초화와 죽화(竹畵)를 여러 편 남기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서토석 四書吐釋≫, 《월정집 月汀集》, 《조천록 朝天錄》, 《마한사초》, 《조경창수》 등이 있고, 향토지인 《송도지》, 수필집인 《월정만필 (月汀漫筆)》 등을 남겼다. 1616년 8월 17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향년 80세였다.
성리학적 지식에 해박하여 성혼(成渾), 송익필, 이이(李珥)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이황의 문인이었음에도 형 윤두수와 함께, 성혼, 송익필, 이이 등과 친하게 지냈으므로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원균이 서인이면서, 친척관계였던 윤두수 형제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은 사실이다.[4] 서인(西人)이었던 그는 임진왜란 당시 동인의 지지를 받는 이순신(李舜臣)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북인이던 이산해도 대체로 원균을 지지했고, 남인인 류성룡과 이원익은 대체로 이순신의 편이었다.[4] 한편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尹潽善), 서울특별시장 윤치영(尹致瑛) 등은 그와 윤두수가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 문제가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되자, 누군가에 의한 무고라고 해명한다.
10. 사육신과의 관계
윤근수의 고조부 윤연령과 고성 박씨 내외는 사육신 박팽년과 인척 관계였다.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증대고모 윤씨는 사육신 박팽년의 형 박대년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사육신이 화를 당하면서 박팽년의 형수인 윤씨는 봉석주 집의 노비로 들어갔다. 그런데 봉석주가 윤씨에게 자신의 첩이 되기를 원하자, 윤씨는 봉석주의 첩이 되었다.[1]
11. 출연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윤근수
http://people.aks.ac[...]
[2]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007
[3]
서적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휴머니스트
2007
[4]
서적
다시 쓰는 간신열전
페이퍼로드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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