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당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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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진당(民進黨)은 2016년 3월 민주당(民主黨)과 유신당(維新黨)이 합당하여 창당된 일본의 정당이다. 창당 과정에서 당명 공모를 통해 결정되었으며, '국민과 함께 나아가는 정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초대 대표는 오카다 가쓰야였으며, 렌호, 마에하라 세이지, 오쓰카 고헤이가 대표직을 역임했다. 2017년 9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희망의 당을 창당하자, 마에하라 대표는 희망의 당과의 연대를 추진했으나, 당내 반발과 고이케 대표의 공천 심사 방침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자유주의 계열 의원들이 입헌민주당을 창당하고, 민진당은 희망의 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여 국민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며 소멸되었다. 민진당은 전수방위 원칙에 기초한 평화주의를 견지하며, 장시간 노동 규제, 기초 소득 보장 실현, 탈원전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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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당 (일본)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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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당명 | 민진당 |
로마자 표기 | Minshinto |
영어 표기 | The Democratic Party |
약칭 | DP |
일본어 표기 | 民進党 |
정당 역사 | |
창당일 | 2016년 3월 27일 |
해산일 | 2018년 5월 7일 |
합병 대상 | 민주당 일본유신회 |
합병 후 | 국민민주당 |
전신 정당 | 민주당 유신당 개혁결집회(일부) |
후신 정당 | 국민민주당 희망의 당 입헌민주당 |
주요 정보 | |
이념 | 자유주의 (일본) 입헌주의 공생주의 국민주권 행재정 개혁 정치 개혁 지역 주권 국제 협조주의 평화주의(전수방위) 지속 가능한 개발 |
정치적 위치 | 중도 ~ 중도좌파 |
본부 | 나가타초, 지요다구, 도쿄도, 일본 |
당원수 | 242,907명 (2016년 6월 6일) |
기관지 | MINSHIN Press (민진 프레스) |
공식 색상 | 파란색 빨간색 |
웹사이트 | 민진당 공식 웹사이트 |
지도부 | |
대표 | 오쓰카 고헤이 |
의회 구성 (해산 시점) | |
중의원 의석수 | 12석 |
중의원 정수 | 465석 |
참의원 의석수 | 41석 |
참의원 정수 | 242석 |
기타 정보 | |
정치자금 교부금 | 93억 4884만 8000엔 (2016년) |
2. 당명
민주당과 유신당의 합당 과정에서 신당의 명칭은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유신당의 마쓰노 요리히사 대표는 "민주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에 합류할 일은 없다"라고 말하며 '민주당'이라는 당명에 거부감을 표명했고,[356] 민주당과 유신당의 합당 협의 과정에서도 당명 변경이 그 조건에 포함되어 있었다.[357] 이후 민주·유신 양당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신당 협의회, 당명 검토팀"이 만들어져 양당 간에 당명을 협의하도록 했지만 서로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자 2016년 3월 3일에 양당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합당에 따른 새로운 당명 방안을 3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 간 양당의 홈페이지와 팩스를 통해 모집하기로 했다. 그 결과 총 1만 9933건의 공모가 모였다. 공모에서 많은 수를 얻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민주당"이 1456건으로 1위, "입헌민주당"이 725건으로 2위, "민신당/민신당일본어"이 352건으로 3위, "신민주당"이 248건으로 4위였다.[358]
민주·유신 양당은 공모 결과를 참고하여 3월 10일에 최종 당명 방안 2개를 결정했다. 민주당 측은 "입헌민주당"을, 유신당 측은 "민진당"을 제시했다. 이후 양당이 각각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 결과 민주당 조사에서는 "민진당"이 24.0%, "입헌민주당"이 18.7%였고, 유신당 조사에서는 "민진당"이 25.9%, "입헌민주당"이 20.9%였다. 이렇게 양당의 조사에서 모두 "민진당"을 지지하는 여론이 "입헌민주당"을 웃도는 것으로 나오면서 3월 14일 최종적으로 신당명은 "'''민진당'''"으로 결정되었다.[359] 이어 3월 22일에는 새 당명의 글꼴과 규격, 당명 결정에 따른 신당의 로고를 발표했다.[360]
"민진당"이라는 당명에 대해 발안자인 에다 겐지는 "말 그대로 '국민(民)'과 함께 '나아가는(進)' 정당이다. 국민의 입장에 서서 정치를 해 나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진(進)'이라는 글자는 진화, 진보라는 단어에서도 쓰이는 만큼 개혁을 진전시켜 나간다는 의미도 담았다"라고 설명했다.[361]
당명의 영문 표기에 대해서 유신당 측에서는 기존의 민주당의 영문 표기(Democratic Party of Japan/Democratic Party of Japan영어)와 유신당의 영문 표기(Japan Innovation Party/Japan Innovation Party영어)를 조합한 "Democratic Innovation Party/Democratic Innovation Party영어"를 제안했지만, 민주당 측이 이 표기를 사용할 경우 약칭이 되는 "DIP/DIP영어"가 영어 속어로 "멍청이"라는 뜻을 가진다는 점을 문제 삼으면서, 결국 직역하면 "민주당"이 되는 "The Democratic Party/The Democratic Party영어"가 영문 표기로 채택되었다.[362]
2. 1. 명칭 관련 논란
민주당과 유신당의 합당 과정에서, 유신당 대표 마쓰노 요리히사는 "민주당"이라는 당명에 거부감을 표하며 당명 변경을 합당 조건으로 제시했다.[357] 이에 따라 신당 협의회에서 당명 검토팀을 구성, 국민 공모를 통해 새 당명을 모집했다.[358] 그 결과, "민진당"이 "입헌민주당"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어 최종적으로 신당명이 "'''민진당'''"으로 결정되었다.[359] 에다 겐지는 "민진당"이라는 당명에 대해 "국민과 함께 나아가는 정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361]영어 당명의 경우, 유신당 측은 "Democratic Innovation Party"를 제안했으나, 민주당 측이 약칭 "DIP"가 영어 속어로 "멍청이"를 뜻한다는 점을 문제 삼아 "The Democratic Party"로 결정되었다.[362]
"민진당"의 약칭은 '민진'인데, 이는 대만의 민주진보당(약칭 민진당)과 동일하여 대만 내에서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이후 국민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면서 약칭이 '국민당'이 되었고, 이는 다시 대만의 중국 국민당과 같아져 대만 내에서 비판적인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3. 역사
=== 창당 이전 ===
민진당의 전신인 민주당은 2000년대에 자민당과 양당 구도를 이루었고, 2009년 제45회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에도 성공했으나, 2012년 제46회 총선거에서 참패하여 자민당에 다시 정권을 내준 이후 당세 회복에 어려움을 겪었다.[102] 아베 신조가 이끄는 자민당과 연립 여당인 공명당은 중의원의 3분의 2 의석을 유지했고, 아베 정권은 장기 집권의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2014년 제47회 총선거에서 야권은 지역구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으나, 자민·공명 양당의 의석수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민주당은 의석수가 소폭 증가했으나, 당 대표인 가이에다 반리가 낙선하면서 대표직에서 사임하였다.[102] 가이에다의 후임으로 취임한 오카다 가쓰야 체제 하에 민주당은 국회 활동에 있어 제2야당인 유신당과의 협력 체제를 강화하였다.
유신당은 마쓰노 요리히사 대표 등 옛 민주당 또는 두레당 출신 세력들과, 하시모토 도루 등 옛 일본유신회계(이른바 "오사카계") 세력 간의 대립이 존재했으며, 2015년 8월 하시모토를 비롯한 오사카계 의원들이 탈당하여 "오사카 유신회"(이후 일본유신회로 개칭)를 창당하였다.[102] 마쓰노와 하시모토 중 어느 쪽도 따르지 않는 세력들은 "개혁결집회"를 결성했다.
유신당 분열 이후, 민주·유신 양당의 협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2015년 8월부터 9월까지 국회에서 열린 평화안전법제 심의 과정에서 민주, 유신 양당을 비롯해 일본공산당, 사회민주당, 생활의 당 등 야당이 공동으로 집단적 자위권 반대 운동을 펼치면서 야권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102] 8월 31일, 민주당 오카다 대표와 유신당 마쓰노 대표는 회담을 갖고, 이후 야권 재편을 염두에 둔 양당의 정책 및 선거 공조를 협의하는 기관을 제189회 국회 폐회 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102] 유신당 측은 야권 재편 방법으로 기존 민주당 해체 후 신당 창당을 내세웠고, 민주당 내에서도 당 해체론이 부상했다.[103] 9월 10일에는 민주당 지지 세력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의 고가 노부아키 회장이 "(민주당의 해체도) 선택해 볼 만한 사항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104]
11월 11일, 민주당 호소노 고시 정책조사회장과 마에하라 세이지 의원, 유신당 에다 겐지 전 대표가 회담하여 2015년 연내 민주·유신 양당 해체와 신당 창당에 의견을 같이했다.[105] 그러나 이후 민주당 호소노 정조회장과 마에하라 의원이 당 대표인 오카다 가쓰야에게 당 해체를 제의하자 오카다는 이를 거부하고 "연내 유신당과의 통일 회파(공동 교섭단체) 결성"을 주장하며 유신당과의 협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106][107] 오카다의 의사에 따라 12월 18일, 중의원에서 통일 회파인 "민주·유신·무소속 클럽"이 결성되었다.[108] 참의원에서의 통일 회파 결성은 유신당 측이 2016년 참의원 선거에서 역풍을 맞을 것을 우려해 잠정 연기되었으나,[109] 민주·유신 양당 간에 당시 국회에 제출된 급여법 개정안에 대한 찬반 입장이 엇갈리면서 무산된 측면도 있었다.[110]
2016년 1월 6일, 유신당은 참의원에서 민주당과의 통일 회파 구성이 지지부진해지자 대신 일본을 건강하게 하는 모임과 통일 회파를 구성하기로 하고 "유신·건강의 모임"을 결성했으나,[111] 중의원에서 회파를 결성한 민주당 측의 불만을 샀고,[112][113][114][115] 유신당이 민주당과 보조를 맞추어 급여법 개정안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일본을 건강하게 하는 모임과도 갈등이 생겨났다.[116][117](민주·유신 양당의 합당 이후 통일 회파인 "유신·건강의 모임"은 해체되었다.[118])
2월 22일, 민주당 오카다 대표와 유신당 마쓰노 대표가 회담하여 민주당이 유신당을 흡수 합병하기로 합의했다. 2월 26일, 양 대표는 다시 만나 민주·유신 양당의 3월 중순 합당을 목표로 설정했다.[119][120] 합당 방식은 1998년에 당시 민정당, 신당 우애, 민주개혁연합이 1996년에 창당된 구(舊) 민주당에 합류하여 현 민주당을 창당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121] 유신당이 해체된 후 기존 민주당에 합류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옛 모두의 당 시절 비례대표로 선출되어 두레당을 거쳐 유신당에 합류했던 참의원 의원 5명(오노 지로, 가와다 류헤이, 시바타 다쿠미, 데라타 스케시로, 마야마 유이치)은 국회법 제109조의 2의 규정에 의해 신당에 입당할 경우 의원직이 자동 박탈되기 때문에 유신당 해체와 함께 임기 만료 전까지 무소속 신분을 유지하게 되었다.[122]
3월 14일, 신당명을 "'''민진당'''"으로 결정하고,[96] 3월 22일에는 "개혁결집회" 소속 의원 5명 중 4명이 신당에 합류하기로 하였다.[123] 3월 25일, 민주당 오카다, 유신당 마쓰노 대표가 합당 협의서에 서명하였다.[124]
3월 27일, 민진당 창당 대회 개최에 앞서 오전 중에 열린 유신당 임시 당 대회에서는 민진당 창당을 위한 당 해체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유신당 해체와 함께 민진당에 합류한 의원 중에는 2010년 간 나오토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에 찬성하거나 2012년 소비세율 인상 법안 표결에서 반란 투표를 하는 등 해당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민주당에서 탈당 또는 제명되어 이후 창당된 신당(일본유신회, 국민 생활이 제일, 녹색 바람)에 가담한 이시제키 다카시, 이마이 마사토, 오타 가즈미, 하쓰시카 아키히로, 마키 요시오, 마쓰키 시즈히로, 마쓰노 요리히사, 미토 마사시 등도 포함되어 있어 사실상 이들의 복당이 이뤄지게 되었다.
=== 창당 ===
2016년 3월 27일, 도쿄도의 한 호텔에서 민진당 창당 대회가 개최되어 신당이 공식 출범했다.[374][375][376] 이 자리에는 연합 회장 고즈 리키오, 뇌과학자 모기 겐이치로, 도쿄 대학 교수 오사와 마리, SEALDs 회원 오쿠다 아키가 내빈으로 참석했다.[374][375][376] 창당 대회에서는 창당 선언과 당 강령을 채택하고, 초대 당 대표로 오카다 가쓰야 전 민주당 대표를 선출했다.[375]
초대 집행부에는 유신당 출신 에다 겐지와 이마이 마사토가 각각 대표 대행과 간사장 대리에 기용되었으나, 오카다 가쓰야 대표와 에다노 유키오 간사장을 비롯한 주요 당직은 민주당 출신 의원들이 차지했다.[377] 마쓰노 요리히사 전 유신당 대표는 과거 민주당 탈당 전력 등을 이유로 신당 당직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다.[377] 창당과 함께 유신당 출신 의원들은 에다 겐지를 중심으로 파벌 "에다 그룹"을 결성하여 당내 최대 파벌로 성장했다.[378]
창당 다음 날인 3월 28일, 중의원 회파(교섭단체) 명칭이 '민진당·무소속 클럽'으로 변경되었고,[379] 3월 30일에는 참의원 회파 명칭이 '민진당·신록풍회'로 변경되었다. 산케이 신문은 "'무소속 의원을 당 소속 의원으로 취급한다'라는 정당 정치의 근본이 흔들릴 만한 비정상적인 사태"라고 비판했다.[381]
지방 의회에서도 민주당과 유신당의 통합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고베시 의회 등 일부에서는 합당 후에도 분립 상태가 유지되었다.
민진당 창당 과정은 다음과 같다.
- 2016년
- * 2월 22일: 민주당 오카다 가쓰야 대표와 유신당 마쓰노 요리히사 대표가 민주당을 존속시키고 유신당을 흡수 합병하는 형태로 양당 합당 후 신당 창당에 합의했다.
- * 2월 26일: 국회에서 민주·유신 양당 대표 회담 개최, 3월 중 합당을 목표로 설정했다.
- * 3월 3일: 민주·유신 양당 대표 기자회견, 3월 4일부터 6일까지 새로운 당명 방안을 양당 홈페이지와 팩스로 모집한다고 발표했다.
- * 3월 10일: 신당명으로 민주당 측은 "입헌민주당", 유신당 측은 "민진당" 제시했다.
- * 3월 14일: 민주당과 유신당 기자회견, 합당에 따른 신당명이 '''민진당'''으로 결정되었음을 발표했다.[359]
- * 3월 22일: 개혁결집회 소속 의원 5명 중 4명이 신당 합류 표명했다.
- * 3월 25일:
- ** 개혁결집회가 중의원 사무국에 회파 해산 신고, 정식 해산되었다.
- ** 민주·유신 양당 대표 회담이 국회에서 열려 양 대표가 합당 협의서에 서명, 합당 절차 완료했다.
- * 3월 27일:
- ** 당 강령 제정했다.
- ** 유신당 임시 당 대회, 당 해체 결의했다.
- ** 민주·유신 양당 합당, 민진당 창당 대회 도쿄도 미나토구 시나가와 프린스 호텔에서 개최했다.
- * 3월 30일: 기본 정책 제정했다.
- * 4월 4일: 당 로고안 공모 시작(~ 4월 12일)했다.
- * 5월 19일: 민진당의 새 로고가 최종 후보 4개 작품 중 A안으로 결정되었다.
=== 오카다 대표 시기 ===
2016년 3월 창당 직후 연이어 치러진 대규모 선거(4월 보궐선거, 7월 참의원 선거와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민진당은 일본공산당, 사회민주당, 생활의 당 등 다른 야당들과 단일 후보를 옹립하며 협력을 이어갔다.[139]
2016년 4월 24일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에서 교토부 제3구는 일본공산당이 후보 공천을 포기하고, 자민·공명 연립 여당 역시 후보를 내지 않아 민진당 소속(사회민주당 공동 추천) 이즈미 겐타가 압승했다. 홋카이도 제5구에서는 전직 민주당 직원 이케다 마키가 무소속(민진·공산·사민·생활 4당 공동 추천)으로 출마했으나, 자민·공명 연립 여당이 추천한 와다 요시아키에게 패배했다.
7월 10일 제24회 참의원 선거에서는 민진당을 비롯한 야4당이 1인 선거구(소선거구)에서 후보를 단일화하여, 최종적으로 지역구 21석, 비례 11석을 얻어 총 32석을 획득했다.[137] 이는 직전 선거에서 민주당이 획득한 17석을 웃도는 결과였지만, 개선(선출) 대상 45석에는 미치지 못했다. 선거 이후 야권 단일 후보로 무소속 당선된 2명이 입당하면서 의석은 51석이 되었다.[138]
7월 31일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야4당은 도리고에 슌타로를 단일 후보로 옹립했으나,[140][141] 고이케 유리코에게 큰 표차로 패배하고, 자민·공명 양당이 공동 추천한 마스다 히로야에도 뒤쳐진 3위를 기록했다.[142] 이러한 선거 결과로 인해 당내에서 야권 선거 협력을 주도한 오카다 가쓰야 대표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 당 대표 선거와 오카다의 불출마 ===
오카다 가쓰야의 후임을 선출하기 위한 민진당의 첫 대표 선거는 2016년 9월 15일에 치러졌다.[383]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야권 단일화를 한 1인 선거구(소선거구)에서 11승 21패로 패배하고,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도 야당통일 후보가 고이케 유리코에게 패배하면서 당내에서 오카다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다. 결국 7월 30일, 오카다는 차기 대표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384]
대표 선거에는 렌호, 마에하라 세이지, 다마키 유이치로 등 3명이 입후보했다.[385] 선거 기간 동안 일본공산당, 사회민주당 등 다른 야당과의 협력 지속 여부와 아베 정권이 추진하던 헌법 개정 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386] 선거전 후반에는 렌호의 이중 국적 문제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151]
9월 15일 진행된 투개표에서는 렌호가 마에하라와 다마키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여성이 당 대표가 된 것은 민진당의 전신인 민주당 시절을 포함해 처음 있는 일이었다.[387] 또 제1야당 당수에 여성이 선출된 것은 과거 1986년 일본사회당의 도이 다카코 위원장 이후 30년 만이었다.[388]
=== 렌호 대표 시기 ===
렌호 대표는 취임과 함께 단행한 당직 인선에서 자신이 소속된 노다 그룹의 회장인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를 간사장에 임명하고, 대표대행에는 호소노 고시 전 환경상과 아즈미 준 전 국회대책위원장, 에다 겐지 등 3명을 임명했다. 정무조사회장(정조회장)에는 오구시 히로시 전 정조회장 대리, 국회대책위원장에는 야마노이 가즈노리 전 국회대책위원장 대리, 선거대책위원장에는 마부치 스미오 전 국토교통상을 각각 기용했다.[389] 또 렌호는 당 대표 선거에서 경쟁자였던 마에하라 세이지를 당 고문으로 위촉할 뜻을 밝혔지만, 당사자인 마에하라가 고사하였다. 이 같은 집행부 인사는 9월 21일에 열린 중참 양원의원 총회에서 승인되었다. 이렇게 렌호 대표 체제가 막이 올랐다. 한편 같은 날 렌호는 일본을 방문한 중화민국의 쑤자취안 입법원장 등과 회동하여 당 대표 선출에 관한 축의를 받았다.[390]
렌호 대표 체제 하의 첫 선거인 10월 23일의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를 앞두고 민진당은 도쿄도 제10구에 전직 NHK 기자인 스즈키 요스케를, 후쿠오카현 제6구에 전직 인도 첸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직원을 후보로 옹립했다. 일본공산당은 지난 4월 보궐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야권 단일화를 위해 자당 후보 공천을 철회할 의사를 표명했다.[391] 사회민주당 역시 민진당에 대해 야권 후보 단일화에 임할 것을 촉구했다.[392] 렌호는 "그동안의 (야권 협력의) 기본적 틀을 유지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지 앞으로 따져보자"며 야권 협력을 지속할 뜻을 밝혔다. 한편 정권을 결정하는 차기 중의원 선거에 대해서는 "강령이 다른 당과는 연합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393]
10월 5일에 열린 야4당(민진·공산·사민·생활)의 간사장(공산당은 서기국장) 회담에서 후쿠오카 6구, 도쿄 10구 모두 민진당 후보로 단일화하기로 합의했고, 이에 따라 2개 선거구의 공산당 후보는 다음 날 출마 철회의 뜻을 밝혔다.[394][395][396]
10월 16일에 실시된 2016년 니가타현 지사 선거에는 일본공산당, 자유당, 사회민주당 등 주요 야당을 비롯해 신사회당, 녹색당의 추천을 받은 요네야마 류이치(민진당 출신)가 출마했다.[397] 민진당은 당의 지역 조직인 니가타현 연합과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후보를 추천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렌호 대표를 비롯한 다수의 소속 의원들이 요네야마를 지지하고 선거 운동을 지원했다.[398] 선거 결과 요네야마는 과반의 득표로 자민당·공명당 추천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10월 23일 치러진 2개 선거구(도쿄 10구·후쿠오카 6구)의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에서는 모두 여권 후보가 승리하였다(후쿠오카 6구는 무소속이 당선 후 자민당 입당).[399]
2017년 3월 12일에는 2016년 창당 대회 이후 최초로 당 대회를 개최했다.[400]
4월 10일에는 당내 보수 성향 의원인 나가시마 아키히사가 "공산당을 비롯한 야권의 협력 노선이 채택된 이후 당의 기본 정책까지 영향을 받게 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탈당을 표명했으나,[401] 당 집행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제명 처분했다.[402][403] 같은 달 13일에는 호소노 고시가 당 대표대행직을 사퇴한 뒤,[404] 8월 8일 탈당계를 제출했다. 또 8월 1일에는 "민진당은 선거 공조의 이름 아래 점점 왼쪽(좌익)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며 탈당계를 제출했던 후지스에 겐조가 당에서 제명됐다.[405]
=== 2017년 도쿄도의회 선거 참패 ===
2017년 7월 2일에 치러지는 도쿄도의회 선거에 민진당은 당초 36명의 후보자를 공천할 계획을 세우고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이끄는 도쿄도 내 지역 정당인 도민퍼스트회와 선거 공조 및 후보 단일화에 나서기로 했으나, 고이케 지사 측은 민진당과의 전면적 연대에는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406][407][408] 이후 민진당 공천자 중 일부가 탈당해 도민퍼스트회에 입당했으며,[409] 민진당의 핵심 지지 조직으로 꼽히는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의 도쿄 지부는 도민퍼스트회와 선거 운동 지원을 약속하는 합의서를 체결했다.[410] 다만 연합회는 기존대로 민진당 후보에 대한 지원도 계속하기로 했다.
민진당은 렌호 대표의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활용해 도의회 선거 공약으로 보육 시설 대기 아동이 있는 가정에 월 5만 엔 정도의 수당 지급, 초·중등학교 무상 급식 등의 육아 지원 정책을 중심으로 7개 중점 정책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지만,[411] 선거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수록 "도민퍼스트" 대 "자민", 즉 "고이케" 대 "아베"의 구도가 굳어졌고, 민진당은 이 구도 속에서 묻히고 말았다. 결국 민진당은 선거 직전 7석에서 2석이 줄어든 5석을 획득하는 데 그치며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옛 민주당 창당 이후 최저 의석수였던 2013년 선거의 15석마저 밑돌았다.[412]
선거 직후 마쓰바라 진 도쿄도 연합회장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회장직에서 사임했다.[413] 당내에서는 렌호 대표의 사임에는 부정적 기류가 강했지만,[412] 도의회 선거 이후 지역 간담회에서 당 집행부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는 등 당내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414] 7월 26일 중참 양원의원 간담회에서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노다 요시히코가 간사장직 사퇴를 선언했다. 한편 렌호는 차기 중의원 선거에서 전면에 나서지 않고 당의 참의원 활동 지휘에 전력하겠다고 밝혔으나,[415] 결국 다음 날인 7월 27일 대표직 사임을 표명했다.[416]
8월 23일 당 집행부는 탈당계를 제출한 요코야마 히로유키, 기우치 다카타네 등 2명의 중의원 의원을 제명 처분했다.[417]
렌호의 후임을 선출하는 대표 선거에는 마에하라 세이지와 에다노 유키오가 입후보했다. 8월 21일 고시, 9월 1일 투개표의 일정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옛 민주당 시절 대표를 역임한 바 있는 마에하라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 마에하라 대표 시기 ===
마에하라 대표는 오시마 아쓰시를 간사장에 임명하는 등 새 집행부를 구성했다.[202][203] 그러나 야마오 시오리 전 정조회장의 불륜 의혹이 주간문춘에 의해 제기되면서,[199][200] 마에하라 대표 체제는 출범부터 삐걱거렸다.[418]
탈당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마에하라 대표는 "렌호 전 대표 때부터 탈당한다, 탈당한다 하던 사람이 있어 왔다. 그런데 모두가 그것에 겁을 먹고 있다. 참 비정상적인 정당이다"라며 탈당 의사를 밝히면서도 정작 탈당은 하지 않는 의원들을 비판하며, 다른 의원들에게 동요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4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즈키 요시히로,[421] 류 히로후미, 고토 유이치가[421] 탈당계를 제출했고, 당은 이들을 제명했다.[421] 마쓰바라 진 전 국가공안위원장도 탈당계를 제출하여 제명되었다.[211] 마에하라 대표는 탈당한 의원의 선거구에 대립 후보를 옹립하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424] 그러나 당세 저하가 현실화되자, 오시마 아쓰시 간사장은 "새로운 정치 상황이 전개된다면 우리도 한번 생각을 바꿔보겠다"며 9월 25일 궤도수정을 시사했다.[215]
=== 희망의 당과의 합류 추진 및 입헌민주당 창당 ===
2017년 9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희망의 당을 창당하자,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는 연대 의사를 표명했다.[425] 9월 28일, 민진당은 총선거에서 후보를 공천하지 않고, 소속 의원들이 희망의 당에 공천을 신청하도록 하는 방침을 결정했다.[221] 이는 사실상 희망의 당과의 합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언론에서는 '당 해체'로 보도되었다.[222]
그러나 고이케 유리코 대표는 민진당 출신 의원 전원을 공천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당 측에서 심사를 거친 사람만 공천하겠다고 밝혔다.[428] 이에 반발한 민진당 내 자유주의계 의원들은
3. 1. 창당 이전
민진당의 전신인 민주당은 2000년대에 자민당과 양당 구도를 이루었고, 2009년 제45회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에도 성공했으나, 2012년 제46회 총선거에서 참패하여 자민당에 다시 정권을 내준 이후 당세 회복에 어려움을 겪었다.[102] 아베 신조가 이끄는 자민당과 연립 여당인 공명당은 중의원의 3분의 2 의석을 유지했고, 아베 정권은 장기 집권의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2014년 제47회 총선거에서 야권은 지역구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으나, 자민·공명 양당의 의석수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민주당은 의석수가 소폭 증가했으나, 당 대표인 가이에다 반리가 낙선하면서 대표직에서 사임하였다.[102] 가이에다의 후임으로 취임한 오카다 가쓰야 체제 하에 민주당은 국회 활동에 있어 제2야당인 유신당과의 협력 체제를 강화하였다.
유신당은 마쓰노 요리히사 대표 등 옛 민주당 또는 두레당 출신 세력들과, 하시모토 도루 등 옛 일본유신회계(이른바 "오사카계") 세력 간의 대립이 존재했으며, 2015년 8월 하시모토를 비롯한 오사카계 의원들이 탈당하여 "오사카 유신회"(이후 일본유신회로 개칭)를 창당하였다.[102] 마쓰노와 하시모토 중 어느 쪽도 따르지 않는 세력들은 "개혁결집회"를 결성했다.
유신당 분열 이후, 민주·유신 양당의 협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2015년 8월부터 9월까지 국회에서 열린 평화안전법제 심의 과정에서 민주, 유신 양당을 비롯해 일본공산당, 사회민주당, 생활의 당 등 야당이 공동으로 집단적 자위권 반대 운동을 펼치면서 야권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102] 8월 31일, 민주당 오카다 대표와 유신당 마쓰노 대표는 회담을 갖고, 이후 야권 재편을 염두에 둔 양당의 정책 및 선거 공조를 협의하는 기관을 제189회 국회 폐회 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102] 유신당 측은 야권 재편 방법으로 기존 민주당 해체 후 신당 창당을 내세웠고, 민주당 내에서도 당 해체론이 부상했다.[103] 9월 10일에는 민주당 지지 세력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의 고가 노부아키 회장이 "(민주당의 해체도) 선택해 볼 만한 사항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104]
11월 11일, 민주당 호소노 고시 정책조사회장과 마에하라 세이지 의원, 유신당 에다 겐지 전 대표가 회담하여 2015년 연내 민주·유신 양당 해체와 신당 창당에 의견을 같이했다.[105] 그러나 이후 민주당 호소노 정조회장과 마에하라 의원이 당 대표인 오카다 가쓰야에게 당 해체를 제의하자 오카다는 이를 거부하고 "연내 유신당과의 통일 회파(공동 교섭단체) 결성"을 주장하며 유신당과의 협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106][107] 오카다의 의사에 따라 12월 18일, 중의원에서 통일 회파인 "민주·유신·무소속 클럽"이 결성되었다.[108] 참의원에서의 통일 회파 결성은 유신당 측이 2016년 참의원 선거에서 역풍을 맞을 것을 우려해 잠정 연기되었으나,[109] 민주·유신 양당 간에 당시 국회에 제출된 급여법 개정안에 대한 찬반 입장이 엇갈리면서 무산된 측면도 있었다.[110]
2016년 1월 6일, 유신당은 참의원에서 민주당과의 통일 회파 구성이 지지부진해지자 대신 일본을 건강하게 하는 모임과 통일 회파를 구성하기로 하고 "유신·건강의 모임"을 결성했으나,[111] 중의원에서 회파를 결성한 민주당 측의 불만을 샀고,[112][113][114][115] 유신당이 민주당과 보조를 맞추어 급여법 개정안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일본을 건강하게 하는 모임과도 갈등이 생겨났다.[116][117](민주·유신 양당의 합당 이후 통일 회파인 "유신·건강의 모임"은 해체되었다.[118])
2월 22일, 민주당 오카다 대표와 유신당 마쓰노 대표가 회담하여 민주당이 유신당을 흡수 합병하기로 합의했다. 2월 26일, 양 대표는 다시 만나 민주·유신 양당의 3월 중순 합당을 목표로 설정했다.[119][120] 합당 방식은 1998년에 당시 민정당, 신당 우애, 민주개혁연합이 1996년에 창당된 구(舊) 민주당에 합류하여 현 민주당을 창당했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121] 유신당이 해체된 후 기존 민주당에 합류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옛 모두의 당 시절 비례대표로 선출되어 두레당을 거쳐 유신당에 합류했던 참의원 의원 5명(오노 지로, 가와다 류헤이, 시바타 다쿠미, 데라타 스케시로, 마야마 유이치)은 국회법 제109조의 2의 규정에 의해 신당에 입당할 경우 의원직이 자동 박탈되기 때문에 유신당 해체와 함께 임기 만료 전까지 무소속 신분을 유지하게 되었다.[122]
3월 14일, 신당명을 "'''민진당'''"으로 결정하고,[96] 3월 22일에는 "개혁결집회" 소속 의원 5명 중 4명이 신당에 합류하기로 하였다.[123] 3월 25일, 민주당 오카다, 유신당 마쓰노 대표가 합당 협의서에 서명하였다.[124]
3월 27일, 민진당 창당 대회 개최에 앞서 오전 중에 열린 유신당 임시 당 대회에서는 민진당 창당을 위한 당 해체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유신당 해체와 함께 민진당에 합류한 의원 중에는 2010년 간 나오토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에 찬성하거나 2012년 소비세율 인상 법안 표결에서 반란 투표를 하는 등 해당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민주당에서 탈당 또는 제명되어 이후 창당된 신당(일본유신회, 국민 생활이 제일, 녹색 바람)에 가담한 이시제키 다카시, 이마이 마사토, 오타 가즈미, 하쓰시카 아키히로, 마키 요시오, 마쓰키 시즈히로, 마쓰노 요리히사, 미토 마사시 등도 포함되어 있어 사실상 이들의 복당이 이뤄지게 되었다.
3. 2. 창당
2016년 3월 27일, 도쿄도의 한 호텔에서 민진당 창당 대회가 개최되어 신당이 공식 출범했다.[374][375][376] 이 자리에는 연합 회장 고즈 리키오, 뇌과학자 모기 겐이치로, 도쿄 대학 교수 오사와 마리, SEALDs 회원 오쿠다 아키가 내빈으로 참석했다.[374][375][376] 창당 대회에서는 창당 선언과 당 강령을 채택하고, 초대 당 대표로 오카다 가쓰야 전 민주당 대표를 선출했다.[375]초대 집행부에는 유신당 출신 에다 겐지와 이마이 마사토가 각각 대표 대행과 간사장 대리에 기용되었으나, 오카다 가쓰야 대표와 에다노 유키오 간사장을 비롯한 주요 당직은 민주당 출신 의원들이 차지했다.[377] 마쓰노 요리히사 전 유신당 대표는 과거 민주당 탈당 전력 등을 이유로 신당 당직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다.[377] 창당과 함께 유신당 출신 의원들은 에다 겐지를 중심으로 파벌 "에다 그룹"을 결성하여 당내 최대 파벌로 성장했다.[378]
창당 다음 날인 3월 28일, 중의원 회파(교섭단체) 명칭이 '민진당·무소속 클럽'으로 변경되었고,[379] 3월 30일에는 참의원 회파 명칭이 '민진당·신록풍회'로 변경되었다. 산케이 신문은 "'무소속 의원을 당 소속 의원으로 취급한다'라는 정당 정치의 근본이 흔들릴 만한 비정상적인 사태"라고 비판했다.[381]
지방 의회에서도 민주당과 유신당의 통합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고베시 의회 등 일부에서는 합당 후에도 분립 상태가 유지되었다.
민진당 창당 과정은 다음과 같다.
- 2016년
- * 2월 22일: 민주당 오카다 가쓰야 대표와 유신당 마쓰노 요리히사 대표가 민주당을 존속시키고 유신당을 흡수 합병하는 형태로 양당 합당 후 신당 창당에 합의했다.
- * 2월 26일: 국회에서 민주·유신 양당 대표 회담 개최, 3월 중 합당을 목표로 설정했다.
- * 3월 3일: 민주·유신 양당 대표 기자회견, 3월 4일부터 6일까지 새로운 당명 방안을 양당 홈페이지와 팩스로 모집한다고 발표했다.
- * 3월 10일: 신당명으로 민주당 측은 "입헌민주당", 유신당 측은 "민진당" 제시했다.
- * 3월 14일: 민주당과 유신당 기자회견, 합당에 따른 신당명이 '''민진당'''으로 결정되었음을 발표했다.[359]
- * 3월 22일: 개혁결집회 소속 의원 5명 중 4명이 신당 합류 표명했다.
- * 3월 25일:
- ** 개혁결집회가 중의원 사무국에 회파 해산 신고, 정식 해산되었다.
- ** 민주·유신 양당 대표 회담이 국회에서 열려 양 대표가 합당 협의서에 서명, 합당 절차 완료했다.
- * 3월 27일:
- ** 당 강령 제정했다.
- ** 유신당 임시 당 대회, 당 해체 결의했다.
- ** 민주·유신 양당 합당, 민진당 창당 대회 도쿄도 미나토구 시나가와 프린스 호텔에서 개최했다.
- * 3월 30일: 기본 정책 제정했다.
- * 4월 4일: 당 로고안 공모 시작(~ 4월 12일)했다.
- * 5월 19일: 민진당의 새 로고가 최종 후보 4개 작품 중 A안으로 결정되었다.
3. 3. 오카다 대표 시기
2016년 3월 창당 직후 연이어 치러진 대규모 선거(4월 보궐선거, 7월 참의원 선거와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민진당은 일본공산당, 사회민주당, 생활의 당 등 다른 야당들과 단일 후보를 옹립하며 협력을 이어갔다.[139]2016년 4월 24일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에서 교토부 제3구는 일본공산당이 후보 공천을 포기하고, 자민·공명 연립 여당 역시 후보를 내지 않아 민진당 소속(사회민주당 공동 추천) 이즈미 겐타가 압승했다. 홋카이도 제5구에서는 전직 민주당 직원 이케다 마키가 무소속(민진·공산·사민·생활 4당 공동 추천)으로 출마했으나, 자민·공명 연립 여당이 추천한 와다 요시아키에게 패배했다.
7월 10일 제24회 참의원 선거에서는 민진당을 비롯한 야4당이 1인 선거구(소선거구)에서 후보를 단일화하여, 최종적으로 지역구 21석, 비례 11석을 얻어 총 32석을 획득했다.[137] 이는 직전 선거에서 민주당이 획득한 17석을 웃도는 결과였지만, 개선(선출) 대상 45석에는 미치지 못했다. 선거 이후 야권 단일 후보로 무소속 당선된 2명이 입당하면서 의석은 51석이 되었다.[138]
7월 31일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야4당은 도리고에 슌타로를 단일 후보로 옹립했으나,[140][141] 고이케 유리코에게 큰 표차로 패배하고, 자민·공명 양당이 공동 추천한 마스다 히로야에도 뒤쳐진 3위를 기록했다.[142] 이러한 선거 결과로 인해 당내에서 야권 선거 협력을 주도한 오카다 가쓰야 대표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오카다 가쓰야의 후임을 선출하기 위한 민진당의 첫 대표 선거는 2016년 9월 15일에 치러졌다.[383]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야권 단일화를 한 1인 선거구(소선거구)에서 11승 21패로 패배하고,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도 야당통일 후보가 고이케 유리코에게 패배하면서 당내에서 오카다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다. 결국 7월 30일, 오카다는 차기 대표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384]
대표 선거에는 렌호, 마에하라 세이지, 다마키 유이치로 등 3명이 입후보했다.[385] 선거 기간 동안 일본공산당, 사회민주당 등 다른 야당과의 협력 지속 여부와 아베 정권이 추진하던 헌법 개정 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386] 선거전 후반에는 렌호의 이중 국적 문제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151]
9월 15일 진행된 투개표에서는 렌호가 마에하라와 다마키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여성이 당 대표가 된 것은 민진당의 전신인 민주당 시절을 포함해 처음 있는 일이었다.[387] 또 제1야당 당수에 여성이 선출된 것은 과거 1986년 일본사회당의 도이 다카코 위원장 이후 30년 만이었다.[388]
3. 3. 1. 반(反)자민당 세력의 선거 협력
2016년 3월 창당 직후 연이어 치러진 대규모 선거(4월 보궐선거, 7월 참의원 선거와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민진당은 일본공산당, 사회민주당, 생활의 당 등 다른 야당들과 단일 후보를 옹립하며 협력을 이어갔다.[139]2016년 4월 24일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에서 교토부 제3구는 일본공산당이 후보 공천을 포기하고, 자민·공명 연립 여당 역시 후보를 내지 않아 민진당 소속(사회민주당 공동 추천) 이즈미 겐타가 압승했다.}}. 홋카이도 제5구에서는 전직 민주당 직원 이케다 마키가 무소속(민진·공산·사민·생활 4당 공동 추천)으로 출마했으나, 자민·공명 연립 여당이 추천한 와다 요시아키에게 패배했다. 도신 웹/전자판(정치)|date=20160424135633}}}}
7월 10일 제24회 참의원 선거에서는 민진당을 비롯한 야4당이 1인 선거구(소선거구)에서 후보를 단일화하여, 최종적으로 지역구 21석, 비례 11석을 얻어 총 32석을 획득했다.[137] 이는 직전 선거에서 민주당이 획득한 17석을 웃도는 결과였지만, 개선(선출) 대상 45석에는 미치지 못했다. 선거 이후 야권 단일 후보로 무소속 당선된 2명이 입당하면서 의석은 51석이 되었다.[138]
7월 31일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야4당은 도리고에 슌타로를 단일 후보로 옹립했으나,[140][141] 고이케 유리코에게 큰 표차로 패배하고, 자민·공명 양당이 공동 추천한 마스다 히로야에도 뒤쳐진 3위를 기록했다.[142] 이러한 선거 결과로 인해 당내에서 야권 선거 협력을 주도한 오카다 가쓰야 대표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3. 3. 2. 당 대표 선거와 오카다의 불출마
오카다 가쓰야의 후임을 선출하기 위한 민진당의 첫 대표 선거는 2016년 9월 15일에 치러졌다.[383]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야권 단일화를 한 1인 선거구(소선거구)에서 11승 21패로 패배하고,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도 야당통일 후보가 고이케 유리코에게 패배하면서 당내에서 오카다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다. 결국 7월 30일, 오카다는 차기 대표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384]대표 선거에는 렌호, 마에하라 세이지, 다마키 유이치로 등 3명이 입후보했다.[385] 선거 기간 동안 일본공산당, 사회민주당 등 다른 야당과의 협력 지속 여부와 아베 정권이 추진하던 헌법 개정 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386] 선거전 후반에는 렌호의 이중 국적 문제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151]
9월 15일 진행된 투개표에서는 렌호가 마에하라와 다마키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여성이 당 대표가 된 것은 민진당의 전신인 민주당 시절을 포함해 처음 있는 일이었다.[387] 또 제1야당 당수에 여성이 선출된 것은 과거 1986년 일본사회당의 도이 다카코 위원장 이후 30년 만이었다.[388]
3. 4. 렌호 대표 시기
렌호 대표는 취임과 함께 단행한 당직 인선에서 자신이 소속된 노다 그룹의 회장인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를 간사장에 임명하고, 대표대행에는 호소노 고시 전 환경상과 아즈미 준 전 국회대책위원장, 에다 겐지 등 3명을 임명했다. 정무조사회장(정조회장)에는 오구시 히로시 전 정조회장 대리, 국회대책위원장에는 야마노이 가즈노리 전 국회대책위원장 대리, 선거대책위원장에는 마부치 스미오 전 국토교통상을 각각 기용했다.[389] 또 렌호는 당 대표 선거에서 경쟁자였던 마에하라 세이지를 당 고문으로 위촉할 뜻을 밝혔지만, 당사자인 마에하라가 고사하였다. 이 같은 집행부 인사는 9월 21일에 열린 중참 양원의원 총회에서 승인되었다. 이렇게 렌호 대표 체제가 막이 올랐다. 한편 같은 날 렌호는 일본을 방문한 중화민국의 쑤자취안 입법원장 등과 회동하여 당 대표 선출에 관한 축의를 받았다.[390]렌호 대표 체제 하의 첫 선거인 10월 23일의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를 앞두고 민진당은 도쿄도 제10구에 전직 NHK 기자인 스즈키 요스케를, 후쿠오카현 제6구에 전직 인도 첸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직원을 후보로 옹립했다. 일본공산당은 지난 4월 보궐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야권 단일화를 위해 자당 후보 공천을 철회할 의사를 표명했다.[391] 사회민주당 역시 민진당에 대해 야권 후보 단일화에 임할 것을 촉구했다.[392] 렌호는 "그동안의 (야권 협력의) 기본적 틀을 유지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지 앞으로 따져보자"며 야권 협력을 지속할 뜻을 밝혔다. 한편 정권을 결정하는 차기 중의원 선거에 대해서는 "강령이 다른 당과는 연합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393]
10월 5일에 열린 야4당(민진·공산·사민·생활)의 간사장(공산당은 서기국장) 회담에서 후쿠오카 6구, 도쿄 10구 모두 민진당 후보로 단일화하기로 합의했고, 이에 따라 2개 선거구의 공산당 후보는 다음 날 출마 철회의 뜻을 밝혔다.[394][395][396]
10월 16일에 실시된 2016년 니가타현 지사 선거에는 일본공산당, 자유당, 사회민주당 등 주요 야당을 비롯해 신사회당, 녹색당의 추천을 받은 요네야마 류이치(민진당 출신)가 출마했다.[397] 민진당은 당의 지역 조직인 니가타현 연합과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후보를 추천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렌호 대표를 비롯한 다수의 소속 의원들이 요네야마를 지지하고 선거 운동을 지원했다.[398] 선거 결과 요네야마는 과반의 득표로 자민당·공명당 추천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10월 23일 치러진 2개 선거구(도쿄 10구·후쿠오카 6구)의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에서는 모두 여권 후보가 승리하였다(후쿠오카 6구는 무소속이 당선 후 자민당 입당).[399]
2017년 3월 12일에는 2016년 창당 대회 이후 최초로 당 대회를 개최했다.[400]
4월 10일에는 당내 보수 성향 의원인 나가시마 아키히사가 "공산당을 비롯한 야권의 협력 노선이 채택된 이후 당의 기본 정책까지 영향을 받게 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탈당을 표명했으나,[401] 당 집행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제명 처분했다.[402][403] 같은 달 13일에는 호소노 고시가 당 대표대행직을 사퇴한 뒤,[404] 8월 8일 탈당계를 제출했다. 또 8월 1일에는 "민진당은 선거 공조의 이름 아래 점점 왼쪽(좌익)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며 탈당계를 제출했던 후지스에 겐조가 당에서 제명됐다.[405]
3. 4. 1. 2017년 도쿄도의회 선거 참패
2017년 7월 2일에 치러지는 도쿄도의회 선거에 민진당은 당초 36명의 후보자를 공천할 계획을 세우고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이끄는 도쿄도 내 지역 정당인 도민퍼스트회와 선거 공조 및 후보 단일화에 나서기로 했으나, 고이케 지사 측은 민진당과의 전면적 연대에는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406][407][408] 이후 민진당 공천자 중 일부가 탈당해 도민퍼스트회에 입당했으며,[409] 민진당의 핵심 지지 조직으로 꼽히는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의 도쿄 지부는 도민퍼스트회와 선거 운동 지원을 약속하는 합의서를 체결했다.[410] 다만 연합회는 기존대로 민진당 후보에 대한 지원도 계속하기로 했다.민진당은 렌호 대표의 "젊은 여성"의 이미지를 활용해 도의회 선거 공약으로 보육 시설 대기 아동이 있는 가정에 월 5만 엔 정도의 수당 지급, 초·중등학교 무상 급식 등의 육아 지원 정책을 중심으로 7개 중점 정책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지만,[411] 선거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수록 "도민퍼스트" 대 "자민", 즉 "고이케" 대 "아베"의 구도가 굳어졌고, 민진당은 이 구도 속에서 묻히고 말았다. 결국 민진당은 선거 직전 7석에서 2석이 줄어든 5석을 획득하는 데 그치며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옛 민주당 창당 이후 최저 의석수였던 2013년 선거의 15석마저 밑돌았다.[412]
선거 직후 마쓰바라 진 도쿄도 연합회장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회장직에서 사임했다.[413] 당내에서는 렌호 대표의 사임에는 부정적 기류가 강했지만,[412] 도의회 선거 이후 지역 간담회에서 당 집행부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는 등 당내 분위기가 안 좋아지자,[414] 7월 26일 중참 양원의원 간담회에서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노다 요시히코가 간사장직 사퇴를 선언했다. 한편 렌호는 차기 중의원 선거에서 전면에 나서지 않고 당의 참의원 활동 지휘에 전력하겠다고 밝혔으나,[415] 결국 다음 날인 7월 27일 대표직 사임을 표명했다.[416]
8월 23일 당 집행부는 탈당계를 제출한 요코야마 히로유키, 기우치 다카타네 등 2명의 중의원 의원을 제명 처분했다.[417]
렌호의 후임을 선출하는 대표 선거에는 마에하라 세이지와 에다노 유키오가 입후보했다. 8월 21일 고시, 9월 1일 투개표의 일정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옛 민주당 시절 대표를 역임한 바 있는 마에하라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3. 5. 마에하라 대표 시기
마에하라 대표는 오시마 아쓰시를 간사장에 임명하는 등 새 집행부를 구성했다.[202][203] 그러나 야마오 시오리 전 정조회장의 불륜 의혹이 주간문춘에 의해 제기되면서,[199][200] 마에하라 대표 체제는 출범부터 삐걱거렸다.[418]탈당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마에하라 대표는 "렌호 전 대표 때부터 탈당한다, 탈당한다 하던 사람이 있어 왔다. 그런데 모두가 그것에 겁을 먹고 있다. 참 비정상적인 정당이다"라며 탈당 의사를 밝히면서도 정작 탈당은 하지 않는 의원들을 비판하며, 다른 의원들에게 동요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4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즈키 요시히로,[421] 류 히로후미, 고토 유이치가[421] 탈당계를 제출했고, 당은 이들을 제명했다.[421] 마쓰바라 진 전 국가공안위원장도 탈당계를 제출하여 제명되었다.[211] 마에하라 대표는 탈당한 의원의 선거구에 대립 후보를 옹립하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424] 그러나 당세 저하가 현실화되자, 오시마 아쓰시 간사장은 "새로운 정치 상황이 전개된다면 우리도 한번 생각을 바꿔보겠다"며 9월 25일 궤도수정을 시사했다.[215]
3. 5. 1. 희망의 당과의 합류 추진 및 입헌민주당 창당
2017년 9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희망의 당을 창당하자,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는 연대 의사를 표명했다.[425] 9월 28일, 민진당은 총선거에서 후보를 공천하지 않고, 소속 의원들이 희망의 당에 공천을 신청하도록 하는 방침을 결정했다.[221] 이는 사실상 희망의 당과의 합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언론에서는 '당 해체'로 보도되었다.[222]그러나 고이케 유리코 대표는 민진당 출신 의원 전원을 공천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당 측에서 심사를 거친 사람만 공천하겠다고 밝혔다.[428] 이에 반발한 민진당 내 자유주의계 의원들은 에다노 유키오를 중심으로 입헌민주당을 창당했다.[429]
10월 27일,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는 희망의 당과의 합류 협의가 당내 의견 조율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되었음을 인정하고 사임했다.[229]
3. 6. 오쓰카 대표 시기
2017년 10월 31일, 마에하라 세이지의 후임 대표 선거가 공시되었고, 오쓰카 고헤이 외에 입후보자가 없어 무투표로 당 대표에 선출되었다.[292]오쓰카 대표는 입헌민주당 및 희망의 당과의 통일 회파(공동 교섭단체) 결성을 추진했다. 2017년 12월, 민진당은 입헌민주당·희망의 당에 대해 통일 회파 구성을 요구하는 결의를 중참 양원의원 총회에서 발표했다.[240] 그러나 입헌민주당은 이를 거부했다. 에다노 유키오 대표는 2018년 1월 4일에 열린 연두 회견에서 "끝난 얘기라고 생각하니 우리가 말려드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440]
희망의 당과의 통일 회파 결성 역시 당내 반발로 무산되었다. 희망의 당과의 교섭 후에 열린 당 전체회의에서는 호소노 고시 등 희망의 당 창당 멤버가 아직 남아 있다며 반대 의견이 분출했다. 이 때문에 오쓰카 대표는 희망의 당과의 협상 결렬에 내몰려 통일 회파 결성은 무산되고 말았다.[441][442]
3. 6. 1. 희망의 당과의 합당, 국민민주당으로

2018년 3월, 요미우리 신문은 민진당과 희망의 당이 합당하여 신당 창당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민진당 간사장 마시코 데루히코는 기자회견에서 "늦어도 지방선거 전년의 4월에서 노동절 전까지 새로운 당의 형태를 갖추는 것이 좋다"며, 희망의 당 이외에도 입당 희망자를 모집할 방침을 밝혔다.[444]
3월 29일, 산케이 신문은 민진당 대표 오쓰카 고헤이가 희망의 당에 합당을 제안하고, 4월 중 신당 창당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보도했다.[445] 민진당 집행부는 희망의 당을 흡수 합병하는 형태로 신당을 창당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446] 희망의 당 측 역시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가 당내 보수파와 분당한 뒤 신당에 합류할 뜻을 표명했다. 그러나 양당 모두 합당에 반대하는 의원이 많아, 분당 가능성도 제기되었다.[447]
민진당은 입헌민주당에도 신당 합류를 제안했으나, 에다노 유키오 대표는 "나가타초의 수 맞추기와 같은 권력 게임에는 말려들지 않겠다"며 거부했다.[448]
4월 9일, 민진당 오쓰카 고헤이 대표와 희망의 당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는 회담을 통해 신당 대표를 복수의 공동 대표로 세우는 방침에 합의하고 합당 협의를 재개했다. 스기오 히데야 참의원 의원은 합당에 반발하며 민진당을 탈당하고 입헌민주당에 입당했다.
4월 24일, 신당 협의회에서 신당명을 "국민민주당"으로 결정했다.[449] 4월 26일, 양당 대표는 신당 창당 합의서에 서명하고, 5월 7일 신당 창당에 공식 합의했다. 합당 절차는 희망의 당을 해체하고, 신당 합류파가 "국민당"을 창당, 합당 반대파가 "희망의 당"을 재창당하는 형태로 분당한 후, "국민당"이 민진당에 흡수 합병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450]
민진당 내에서는 신당 불참을 표명하는 의원들이 속출했다. 4월 25일, 오카다 가쓰야 당 상임고문 등 6명이 집단 탈당을 조율했고,[451] 4월 26일에는 오가와 도시오 당 참의원 의원회장 등 17명이 탈당할 전망이라고 밝혔다.[452] 신당 "국민민주당" 참여 의원은 60명 정도에 그쳐 입헌민주당을 밑돌 것이 확실해졌다.[453]
5월 7일, 국민민주당 창당 대회에서 민진당 소속 의원 27명이 탈당계를 제출했다. 이 중 10명이 입헌민주당에 입당계를 제출했다.[454] 최종적으로 민진당에서 국민민주당에 참여한 의원은 26명에 그쳤다.[455]
같은 날, 민진당은 국민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며 법적으로 소멸되었다.[457]
5월 8일, 희망의 당에서 분당하여 창당된 "국민당"을 흡수하여 국민민주당 창당의 법적 절차가 완료되었다.[458]
국민민주당 창당 이후 민진당 원 소속 의원의 이적처는 다음과 같다.
: ※ : 민진당 당적을 가진 채 무소속 지위로 있던 중의원 의원
국민민주당 (중의원 3명, 참의원 23명) | |
---|---|
입헌민주당 (중의원 1명, 참의원 10명) | |
민우회 (입헌민주당과의 통일 회파) (참의원 6명) | |
무소속의 모임 (중의원 7명) | |
무소속 (중의원 1명, 참의원 2명) |
4. 정책 및 강령
민진당은 전수방위 원칙에 기초한 평화주의를 견지하고, 헌법 제9조에 자위대를 명기하는 것에 반대했다.[466][71] 또한, 장시간 노동 규제, 기초 소득 보장 실현, 탈원전 실현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걸었다.[466][71]
당 강령에는 '자유', '공생', '미래에 대한 책임'을 당의 이념으로 명시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 더불어 사는 사회,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사회를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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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입장
: 우리 당은 "생활자", "납세자", "소비자", "노동자"의 입장에 선다.
: 미래·차세대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기득권과 유착 구조와 싸우는, 국민과 함께 나아가는 개혁 정당이다.
; 우리가 지향하는 것
:1. 자유와 민주주의에 입각한 입헌주의를 지킨다
:: 우리는 일본국 헌법이 내건 "국민주권", 기본적 인권의 존중", "평화주의"를 견지하며, 자유와 민주주의에 입각한 입헌주의를 단호하게 지킨다. 상징 천황제 아래, 새로운 인권, 통치 기구 개혁 등 시대의 변화에 대응한 미래 지향적인 헌법을 국민과 함께 구상한다.
:2. 공생 사회를 만든다
::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더없이 소중한 개인으로서 존중받고,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서로 지지하며, 모든 사람에게 머물 곳과 기회가 있는, 강하고 유연한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든다.
:: 남녀가 그 개성과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양성평등을 추진한다.
:: "새로운 공공"을 담당하는 시민의 자치를 존중하며, 지방 자치 단체, 학교, NPO, 지역 사회와 각 개인들이 충분히 연계하는 사회를 실현한다.
:: 정의와 공정을 관철하고, 개인의 자립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약자에 놓인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3. 미래에 대한 책임, 개혁을 미루지 않는다
:: 우리는 미래를 살아갈 차세대를 위해, 세금 낭비를 배제함과 동시에, 국가의 빚 의존 체질을 바꾸는 행정·재정 개혁, 정치인이 스스로를 다스리고 희생하는 등의 정치 개혁, 지방의 창의적 구상에 의한 자립을 가능하게 하는 지역 주권 개혁을 단행한다.
:: 원전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지향함과 동시에,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의 부흥을 실현하고, 미래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
:4. 사람에 대한 투자로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을 실현한다
:: 우리는 시장 경제를 기본으로, 지구 환경과의 조화 아래, 경제 성장을 실현한다. 안전·안심을 최우선으로 하여, 시장에 신규 참가를 촉진하고, 창업을 촉진하는 규제 개혁을 실행한다.
:: 경제 성장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한다. 공정한 분배를 통한 사람에 대한 투자 없이는 지속 가능한 성장은 달성할 수 없다. 지속 가능한 사회 보장 제도의 확립, 평생에 걸친 배움의 기회 보장 등 사람에 대한 투자를 통해, 사람들의 능력 발휘를 가로막고 있는 격차를 시정한다. 그것을 통해 서로 돕는 힘을 키우고, 행복을 위한 성장을 실현한다.
:5. 국가를 지키고 국제 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공헌한다
:: 우리는 전수방위를 전제로 외교 안보에 있어서의 현실주의를 관철한다. 우리나라 주변의 안보 환경을 직시하고, 자위력을 착실히 정비하여 국민의 생명·재산, 영토·영해·영공을 지킨다. 미일 동맹을 심화시키고,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과의 공생을 실현한다.
:: 국제 연합을 비롯한 다자간 협력의 틀을 기조로 국제 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공헌하고, 핵무기 폐절, 인도적 지원, 경제 연계 등을 통해, 열린 국익과 광범위한 인간의 안전 보장을 실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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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경제를 기본으로 하되, 공정한 분배를 통한 사람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며, 지속 가능한 사회 보장 제도 확립, 평생 교육 기회 보장 등을 통해 격차를 해소하고 행복한 성장을 실현하고자 했다.
외교 안보에 있어서는 현실주의를 관철하며,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과의 공생을 실현하고자 했다.
5. 역대 당직자
(출생–사망)
(1953년 출생)

(1967년 출생)

(1962년 출생)

(1959년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