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크루핀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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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터 크루핀스키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197기의 격추 기록을 세운 독일 공군 에이스이자, 전후 독일 공군에서 중장으로 예편한 군인이다. 1920년 동프로이센에서 태어나 히틀러 유겐트 해군 지부에서 항해 훈련을 받았고, 1939년 루프트바페에 입대하여 훈련을 거쳐 제52전투비행단에 배속되었다. 동부 전선에서 177기를 격추하고 철십자 기사 십자장 橡葉付를 수여받았으며, 서부 전선에서도 20기를 격추했으나, 1945년 미군에 포로로 잡혔다. 전후에는 서독 공군에 재입대하여 여러 요직을 거쳐 공군 함대 사령관까지 올랐으나, 루델 스캔들에 연루되어 1976년 조기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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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크루핀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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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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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그라프 푼스키 (Graf Punski), 백작 |
출생일 | 1920년 11월 11일 |
사망일 | 2000년 10월 7일 |
출생지 | 돔노보, 동프로이센 |
사망지 | 노인키르헨젤샤이트 |
군사 경력 | |
소속 | (1945년까지) |
군종 | 루프트바페 |
복무 기간 | 1939년–1945년 |
계급 | 하웁트만(국방군) |
이후 계급 | 게네랄로이츠난트(독일 연방군)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전투/작전 | 동부 전선 바르바로사 작전 서부 전선 노르망디 상륙 제국 방위 보덴플라테 작전 |
부대 | JG 52 JG 5 JG 11 JV 44 |
지휘 | 7./JG 52 1./JG 5 II./JG 11 III./JG 26 JaBoG 33 |
훈장 | 柏葉付騎士鉄十字章 |
2. 생애
(내용 없음)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크루핀스키는 1920년 11월 11일, 동프로이센 돔나우(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 도무노보)에서 공무원인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루핀스키와 어머니 아우구스테(결혼 전 성 헬름케)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현재의 폴란드 바르미아-마주리 현 브라니에보인 브라운스베르크에서 성장했다. 그에게는 파울과 귄터라는 두 남동생이 있었다. 동생 파울은 크리그스마린(독일 해군)에 입대하여 유보트에 복무했으며, 1944년 11월 11일 U-771에서 오버로이테난트 츠어 제(해군 중위)로 복무 중 영국 잠수함 HMS 벤처러에 의해 노르웨이 해안에서 격침되어 전사했다.1936년 브라운스베르크에 히틀러 유겐트의 해군 지부가 창설되자 크루핀스키는 이 조직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항해 훈련을 받고 항해 면허를 취득했다. 같은 해, 그는 댄스 수업에서 의사의 딸인 일제 하르퉁을 만났고, 두 사람은 1944년에 결혼했다. 1939년 3월 21일, 크루핀스키는 브라운스베르크의 리세움 호시아눔(김나지움)에서 아비투어(대학 입학 자격 시험)를 통과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등 교육을 받고 아비투어를 취득한 그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처음에는 파일럿에 관심이 없었고 해군 사관을 지망했다.
1939년 4월 1일, 크루핀스키는 현재 폴란드 키실리체인 프라이슈타트에서 의무적인 국가노동봉사를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1일 군대에 입대하여, 현재 러시아 피오네르스키, 칼리닌그라드주인 노이쿠렌에 주둔한 제10 비행 훈련 연대(''Fliegerausbildungs-Regiment 10'')에서 파넨준커(사관 후보생)로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다.
6주간의 기초 훈련 후, 그는 베를린 가토에 위치한 제2 공군 전쟁 학교(''Luftkriegsschule'' 2)에 배치되었다. 크루핀스키는 1939년 11월 9일에 첫 비행을 했다. 그는 다음 9개월 동안 포케불프 Fw 44, 하인켈 He 72, 그리고 쌍발 엔진 Fw 58 조종법을 배웠다. 융커스 W 34로는 계기 비행을 훈련했다. 또한 아라도 Ar 65, Ar 66, 뷔커 Bü 131, Bü 133, Fi 156, Fw 56, 고타 Go 145, 하인켈 He 46, He 51, 헨쉘 Hs 123 등 다양한 기종을 조종했다. 1940년 6월 24일, 크루핀스키는 B2 조종사 면허를 받았다.
2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크루핀스키는 1940년 7월 1일에 오스트리아 비엔나 근교 슈베하트에 있는 제5 전투기 조종사 학교(''Jagdfliegerschule'' 5)에 배치되어 훈련을 마쳤다. 당시 학교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에이스이자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은 에두아르트 리터 폰 슈라이히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의 동기생 중 한 명은 한스요아힘 마르세유였는데, 그는 1939년 말에 학교에 배치되었지만 징계 문제로 아직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다. 학교에서 그의 룸메이트는 발터 노보트니, 아돌프 갈란트의 동생인 파울 갈란트, 그리고 ''국가원수'' 헤르만 괴링의 조카인 페터 괴링이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발터 크루핀스키는 1939년 9월 루프트바페에 입대하여 사관후보생이 되었고, 1940년 10월까지 전투기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 훈련 중 한스요아힘 마르세이, 발터 노보트니 등 훗날 유명해지는 조종사들과 교류했다.[1] 1940년 10월 보충 훈련 부대를 거쳐 11월 제52전투비행단(JG 52)에 배속되었으며, 이곳에서 "푼스키 백작"(Graf Punski|그라프 푼스키d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함께 동부 전선에 투입되어 첫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 이후 격추 기록을 꾸준히 쌓아 1942년 8월 50기 격추로 독일십자장 금장을, 이후 6기를 더 격추하여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했다. 1943년 3월에는 제7비행중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당시 그의 요기(僚機) 중 한 명이 훗날 최고의 격추 기록을 세우는 에리히 하르트만이었다. 1943년 8월 18일에는 100번째 적기를 격추했으며, 1944년 3월 2일, 174기 격추 기록으로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훈했다.
동부 전선에서 총 177기의 적기를 격추한 후, 크루핀스키는 독일 본토 방공 임무를 위해 서부 전선으로 재배치되었다. 1944년 5월 대위로 승진하며 제11전투비행단(JG 11) 제2비행집단장으로 임명되었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연합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10기를 추가로 격추했다. 그러나 8월 12일 비행 중 엔진 고장으로 탈출하며 화상을 입었다. 회복 후 9월에는 제26전투비행단(JG 26) 제3비행집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전쟁 말기인 1945년 3월에는 아돌프 갈란트가 지휘하는 엘리트 제트 전투기 부대 제44전투단(JV 44)에 합류하여 메서슈미트 Me 262를 조종했다. Me 262로 2기의 추가 격추를 기록한 후, 1945년 5월 5일 미군에 항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총 197기(동부 전선 177기, 서부 전선 20기)를 격추했으며, 약 1,100회 출격했다. 전쟁 중 4번의 비상 탈출과 5번의 부상을 겪었다.
2. 2. 1. 동부 전선
1939년 사관후보생으로 루프트바페에 입대한 크루핀스키는 1940년 10월까지 전투기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 1940년 10월 1일, 메르제부르크의 보충 훈련 부대를 거쳐 10월 15일 제52전투비행단(JG 52)의 훈련 비행대(Ergänzungsstaffelde)에 배치되었다. 이곳에서 메서슈미트 Bf 109 E 기종 추가 훈련을 받았으며,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빌리 네미츠 등과 교류했다.1941년 2월 1일, 크루핀스키는 JG 52 제2비행집단(II./JG 52) 소속 제6비행중대(6. ''Staffel'')로 정식 배속되었다. 당시 중대장이던 루돌프 레슈는 크루핀스키에게 "푼스키 백작"(Graf Punskide) 또는 "백작"(Der Grafde)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이는 그의 동프로이센 출신과 이름의 어미 '-ski'에 관한 농담에서 비롯되어 평생 그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크루핀스키가 속한 II./JG 52는 육군 집단 중앙군 북익을 지원하는 제VIII. ''플리에거코어'' 예하에서 작전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폴란드 북동부의 수바우키와 소보레보 등지에 주둔했다. 8월 5일, 부대는 육군 집단 북부 지원을 위해 솔치로 이동하여 일멘 호수 남쪽과 레닌그라드 방면 전투에 참여했다. 크루핀스키는 8월 16일 시므스크 북쪽 상공에서 I-18 전투기(MiG-1의 독일측 명칭)를 격추하며 첫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다. 9월에는 레닌그라드에서 약 70km 떨어진 류반으로 이동하여 작전을 지속하며 일리우신 DB-3 폭격기와 폴리카르포프 I-153 전투기를 격추했다.

10월 태풍 작전이 시작되자, II./JG 52는 스몰렌스크 북쪽 스타브나, 노보두기노, 칼리닌(현 트베리), 루자, 클린 등지로 이동하며 모스크바 공세를 지원했다. 이 기간 크루핀스키는 투폴레프 SB 폭격기, I-18 전투기, 폴리카르포프 R-5 정찰기, 일리우신 Il-2 지상 공격기 등을 격추하며 1941년 말까지 총 7기의 격추 기록을 세웠다. 11월 30일, 부대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85km 떨어진 클린으로 이동했다. 12월 중순 소련군의 반격으로 클린이 함락되기 직전, 크루핀스키는 부대 장비 수송 임무를 받고 인스터부르크로 후송되었다.
1942년 1월 말, II./JG 52는 동부 전선에서 철수하여 쾨니히스베르크 근처 예사우에서 휴식 및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신형 Bf 109 F-4 기체를 수령했으며, 4월에는 요하네스 슈타인호프가 새로운 비행집단장으로 부임했다. 4월 말, 부대는 크림반도 키로브스케 인근 마을인 쥐리히탈(현재 솔로테 폴레)로 이동하여 5월 8일 시작된 케르치반도 전투 중 독일군의 반격 작전인 '트라펜야크트 작전'에 참여했다.
이후 부대는 제2차 하르코프 전투 지원을 위해 5월 14일 하르코프 인근, 16일 아르티오모프스크, 23일 바르빈코베, 6월 1일 그라코보 등으로 계속 이동했다. 크루핀스키는 이 시기 MiG-1과 LaGG-3 전투기 등을 격추하며 1942년 6월 말까지 총 12기의 누적 격추 수를 기록했다.
6월 28일 독일군의 여름 공세인 청색 작전이 시작되자, JG 52는 공군함대 4 소속으로 스탈린그라드와 코카서스 유전 지대 방향 진격을 지원했다. 크루핀스키의 격추 기록은 꾸준히 증가하여 7월 말 20기, 8월 말에는 31기에 달했다. 8월 20일부터는 칼라치-나-도누에서 남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투소프 비행장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지역 작전에 투입되었다.
1942년 9월, II./JG 52는 코카서스 전투 지원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여 테레크강의 모즈도크 북동쪽에 위치한 곤슈타코프카 비행장에 배치되었다. 크루핀스키는 9월 10일부터 30일까지 부상당한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을 대신하여 제4비행중대(4. ''Staffel'') 지휘를 잠시 맡았다. 이 기간 중 9월 17일에는 엔진 고장으로 Bf 109 G-2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9월 말까지 그의 격추 기록은 47기로 늘어났다.
50번째 격추를 달성한 후, 크루핀스키는 1942년 9월 13일 루프트바페 명예컵(Ehrenpokal der Luftwaffede)을 수상했다. 10월 25일에는 공중전 중 기체가 심하게 손상되어 프로클라드니 북북서쪽 약 15km 지점의 솔다츠카야 인근 비행장에 불시착했으며, 이틀 후인 10월 27일 독일 십자장 금장(Deutsches Kreuz in Goldde)을 받았다. 10월 29일, 59기 격추를 기록한 크루핀스키는 루돌프 미에티히와 함께 기사십자 철십자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de)을 수훈했다. 11월, 우라노스 작전으로 스탈린그라드 주변의 추축국 군대가 포위될 무렵, 크루핀스키는 무릎 부상 치료를 위해 후방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943년 1월, 크루핀스키는 동부 전선 보충 조종사 훈련 부대인 ''에르겐충스-야크트그루페 오스트''의 교관으로 잠시 전출되었으나, 3월 15일 JG 52로 복귀하여 제3비행집단(III./JG 52) 예하 제7비행중대(7. ''Staffel'')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III./JG 52는 케르치 근처 비행장에 주둔하며 쿠반 교두보 상공에서 전투를 벌였다. 크루핀스키는 5월 2일 아빈스크 남서쪽에서 야코블레프 Yak-1을 격추하며 1943년 첫 승리를 기록했고, 6월 말까지 쿠반 상공에서 총 88기의 누적 격추 수를 달성했다. 이 시기 그의 중대에는 훗날 최고의 격추 기록을 세우게 되는 에리히 하르트만이 요기(僚機)로 배속되어 크루핀스키의 근접 사격술 등을 배웠다.
7월 초, III./JG 52는 쿠르스크 전투(시타델 작전) 준비를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작전 개시일인 7월 5일, 크루핀스키는 LaGG-3 2기를 격추했으나, 착륙 중 이륙하던 다른 Bf 109와 충돌하는 사고로 두정골 및 갈비뼈 골절, 뇌출혈 등 심각한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그가 부재한 동안에는 에리히 하르트만이 임시로 7중대를 지휘했다. 8월 6일 부대로 복귀한 크루핀스키는 8월 18일 100번째 공중전 승리를 기록하며 루프트바페 전체에서 51번째로 100기 격추를 달성한 조종사가 되었다. 8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는 휴가를 떠난 비행집단장 귄터 랄을 대신하여 III./JG 52 지휘를 대행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드네프르 전투에 참여했으며, 10월 10일에는 하루에 LaGG-3 4기와 벨 P-39 에어라코브라 2기를 격추하여 "하루의 에이스(Ace in a day)"가 되었다.
1944년 3월 2일, 크루핀스키는 174번째 격추를 기록한 공로로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에리히 하르트만과 함께 베르그호프의 총통본부에서 훈장을 받았다. 동부 전선에서 총 177기의 적기를 격추한 후, 크루핀스키는 독일 본토 방어를 위해 서부 전선으로 재배치되었다.
2. 2. 2. 서부 전선
1944년 4월, 동부 전선에서 177기의 격추 기록을 세운 후, 발터 크루핀스키는 독일 본토 방공전(Reichsverteidigung) 임무를 위해 서부 전선으로 재배치되었다. 이는 제5 전투비행단(JG 5) 제1비행집단(I./JG 5) 소속 제1비행대대의 Staffelkapitän|슈타펠카피탄de(비행대대장) 에드가 하버만(Edgar Habermannde) 상급대위가 4월 11일에 전사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당시 제1비행집단은 헤르초게나우라흐 비행장에 주둔하며 호르스트 카르가니코(Horst Carganicode) 소령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1944년 5월 1일 대위로 진급한 크루핀스키는, 같은 달 귄터 랄 소령이 부상으로 이탈하자 그의 뒤를 이어 제11전투비행단(JG 11) 제2비행집단(II./JG 11)의 Gruppenkommandeur|그루펜코만되르de(비행집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개시되자, 그의 부대는 노르망디로 이동하여 저고도 지상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크루핀스키는 JG 11 소속으로 연합군 항공기 10기를 격추했다.
1944년 7월 23일, 그는 브라운스베르크에서 일제 하퉁(Ilse Hartungde)과 결혼했다. 1944년 8월 12일, 크루핀스키는 재배치 비행 중 마르부르크 근교 상공에서 적과의 교전 없이 Bf 109 G-5(Werknummer 110244) 전투기의 엔진이 폭발하는 사고를 겪었다. 그는 낙하산으로 탈출했으나 손과 얼굴에 화상을 입어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이는 전쟁 중 그의 다섯 번째 부상이었으며, 이로 인해 1945년 1월 금색 부상장(Verwundetenabzeichen in Gold)을 수여받았다. 그의 후임 JG 11 제2비행집단장으로는 카를 레온하르트(Karl Leonhardde) 대위가 임명되었다.
요양 후, 크루핀스키는 1944년 9월 27일에 제26전투비행단 "슐라게터"(JG 26 "Schlageter") 제3비행집단(III./JG 26)의 Gruppenkommandeur|그루펜코만되르de로 임명되어, 9월 17일에 전사한 클라우스 미투슈의 자리를 이었다. 당시 JG 26은 요제프 프릴러 중령의 지휘 하에 있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크루핀스키의 지휘 스타일은 다소 느슨했으며, 이로 인해 제3비행집단의 전투 성과가 저하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1944년 12월 18일, 크루핀스키는 제11비행대대 Staffelkapitän|슈타펠카피탄de 페터 라이셔(Peter Reischerde) 상급대위의 자살 사건에 연루되었다. 라이셔는 아르덴 상공 전투 임무에 대한 허위 보고가 Y-제어 시스템을 통해 발각되자, 크루핀스키로부터 재임무 수행 또는 비겁죄 군사 재판 회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라이셔는 두 번째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45년 3월 25일, JG 26 제3비행집단이 해산되면서 크루핀스키는 아돌프 갈란트가 이끄는 엘리트 제트 전투기 부대인 제44전투단(JV 44)으로 전속되었다. 그는 메서슈미트 Me 262 제트 전투기를 수령하여 1945년 4월 16일과 26일에 각각 1기씩, 총 2기의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했다. 1945년 4월 24일 오후, 크루핀스키는 귄터 뤼초 대령, 클라우스 노이만 등 동료 조종사들과 함께 뮌헨 림 공항에서 미국 육군 항공군의 B-26 폭격기 편대를 요격하기 위해 마지막 임무에 나섰다. 이 출격에서 편대장이었던 뤼초 대령은 실종되었다.
1945년 5월 5일, 크루핀스키는 미군에게 항복하며 전쟁을 마쳤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그가 서부 전선에서 격추한 연합군 항공기는 총 20기로 기록되었다.
2. 2. 3. 가족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전쟁 후에는 공무원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소집되어 폴란드 전역에 참전했고, 중위 계급으로 제대한 후 다시 공무원으로 복직했다. 전쟁 말기에는 국민돌격대에 참가하기도 했다.크루핀스키에게는 파울과 귄터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2살 아래인 동생 파울은 독일 해군에 입대하여 잠수함 승조원으로 복무했으나, 1944년 11월 11일 노르웨이 연안에서 그가 타고 있던 함선이 영국 잠수함 HMS Venturer에 의해 격침당하면서 전사했다. 12살 아래인 동생 귄터는 1945년 어머니와 함께 동프로이센에서 탈출했으며, 1970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크루핀스키는 1936년부터 알고 지내던 일제 하퉁(Ilse Hartung)과 1944년 7월 23일 브라운스베르크에서 결혼했다. 결혼 당시 두 사람은 딸 카롤라(Carola)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딸은 1944년 9월에 태어났다. 카롤라는 훗날 공군 장교와 결혼했다. 크루핀스키는 두 명의 손자를 두었다.
2. 3. 전후
아돌프 갈란트가 전투기 총감에서 해임된 후, 그는 Me 262 제트 전투기를 운용하는 Jagdverband 44(JV 44)를 창설할 기회를 얻었다. 갈란트는 회복 중이던 크루핀스키와 바르크호른을 찾아 JV 44 합류를 제안했고, 두 사람은 이를 수락하여 1945년 3월 31일 뮌헨-림 공항으로 이동한 부대에 합류했다.1945년 4월 24일, 크루핀스키는 귄터 뤼초가 이끄는 4기의 Me 262 편대에 속해 미국 육군 항공대(USAAF)의 마틴 B-26 머로더 폭격기 요격 임무에 나섰다. 이 임무에서 뤼초는 실종되었다. 같은 날 오후, 크루핀스키는 보잉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 편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자신이 손상을 입혔다고 생각한 B-17의 방어 사격으로 기체가 손상된 그는, 호위하던 리퍼블릭 P-47 선더볼트 전투기와 공중 충돌 후 탈출했다. 이 P-47기는 추락했으나 크루핀스키는 격추 전과를 주장하지 않았다.
1945년 5월 4일, JV 44는 잘츠부르크 인근 막스글란에서 미군에게 항복했다. 크루핀스키와 다른 조종사들은 바트 아이블링 근처의 임시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다. 며칠 후, 그는 바르크호른, 에리히 호하겐, 카를하인츠 슈넬, 발데마르 뷔브케 등 다른 JV 44 조종사들과 함께 하이델베르크, 비스바덴-에르벤하임을 거쳐 영국 런던 근처 래티머에 있는 연합군 상세 심문 센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6월에 크루핀스키는 사우샘프턴을 거쳐 배편으로 프랑스 셰르부르로 이송되었는데, 도착 직후 프랑스 군인에게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으로 그는 뮌헨-오버푀링의 루프트바페 병원과 바서부르크 암 인의 미군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며, 1945년 9월 28일에 포로에서 석방되었다.
석방 후 크루핀스키는 친구 바르크호른의 도움으로 테게른제의 가족에게 돌아갔으나, 아내와 딸은 바트잘츠슐리프에 있는 그의 누나에게 피신해 있었다. 머리 부상으로 인해 크루핀스키는 일을 할 수 없었고, 가족은 바트잘츠슐리프의 미군 주둔지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아내의 수입으로 생활했다.
한편, 전 독일 국방군 동부외래육군(FHO) 부대장이었던 라인하르트 겔렌 중장은 1945년 말 미군을 위해 겔렌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겔렌 조직은 공중전 경험이 있는 인력을 필요로 했고, 크루핀스키를 채용하여 소련 점령 지역의 군사 정보 수집 임무를 맡겼다. 그는 1953년까지 겔렌 조직에서 활동했으나, 이 시기 그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고 정보가 상충되거나 누락된 부분이 많다. 크루핀스키 본인도 이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2. 3. 1. 서독 공군 복무
크루핀스키는 1953년 4월 7일, 독일 연방 국방부의 전신인 블랑크청(Amt Blank, 테오도어 블랑크의 이름을 땀)에 입사했다. 1955년 11월 19일, 새로 창설된 독일 공군(당시 Bundesluftwaffe)에 소령 계급으로 입대했다. 그는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헤르베르트 베넬트와 함께 영국으로 파견되어 영국 공군(RAF)의 훈련을 받은 두 번째 조종사 그룹에 속했다. 이들은 영국 주재 독일 대사관의 한스 폰 헤르바르트 대사의 환영을 받았다. 훈련은 1956년 1월 19일 RAF 펠트웰에서 프로펠러 구동 훈련기인 퍼시벌 프로보스트로 시작되었다. 조종사들은 3월 23일에 재교육 훈련을 마쳤고, 크루핀스키는 이후 데 하빌랜드 뱀파이어 및 호커 헌터 제트기 훈련을 받았다. 1956년 6월 18일, 크루핀스키, 바르크호른, 베넬트는 스탠퍼드 공원에서 조지 필립 체임벌린 공군 중장으로부터 RAF 공군 승무원 훈장을 받았다.
1957년, 소령 계급을 받은 크루핀스키는 전후 최초의 독일 제트 전투 비행단인 제33전투폭격비행단(JaBoG 33)의 비행단장이 되었다. 1966년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여 미국 텍사스주 포트 블리스에 있는 독일 공군교육특공대(''Luftwaffen-Ausbildungs-Kommando'') 사령관을 맡았다. 1968년 11월 19일, 그는 공군청(Luftwaffenamt) 내의 항공 안전 감찰관으로 임명되어 1969년 6월 30일까지 근무했다. 이후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3공군사단 사단장이 되었고, 1971년에는 NATO 제2연합전술공군의 참모장이 되었다. 1974년 10월, 중장으로 진급하며 공군함대(''Luftwaffenflotte'')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76년 루델 스캔들에 연루되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사건은 나치 독일 시절의 공군 에이스 한스울리히 루델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과 관련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결국 크루핀스키는 1976년 11월 8일 중장 계급으로 조기 퇴역하게 되었다.
퇴역 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노인키르헨젤샤이트에서 지내다가 2000년 10월 7일 사망했다. 11월 11일 요르크 쿠에바르트의 조사 하에 군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2. 3. 2. 루델 스캔들과 퇴역
1952년 9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크루핀스키는 같은 해 11월, 연방방위부의 전신인 블랑크청(테오도어 블랑크의 이름을 따옴)에 자문 역할로 합류했다.1957년 독일 연방군이 창설되자 소령 계급을 받고, 전후 독일의 제트 전투기 운용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영국에서 연수를 받았다. 같은 해 9월에는 냉전 시기 서독 최초의 제트 전투기 부대인 제33전투폭격항공단(JaBoG 33)의 초대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크루핀스키는 다음과 같은 주요 경력을 쌓았다.
연도 | 계급 | 주요 보직 |
---|---|---|
1957년 | 소령 | 제33전투폭격항공단 단장 |
1966년 6월 | 준장 | 미국 텍사스주 독일 공군교육특공대 사령관 |
1969년 7월 | 소장 | 제3공군사단 사단장 |
1971년 | 소장 | NATO 제2연합전술공군(ATAF) 참모장 |
1974년 10월 | 중장 | 공군지휘사령부 사령관 |
그러나 1976년 11월 8일, 나치 독일 공군 에이스였던 한스울리히 루델을 옹호하는 발언 등으로 논란이 된 루델 스캔들에 연루되어 중장 계급으로 조기 퇴역하게 되었다.
퇴역 후에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노인키르헨젤샤이트에서 은거했으며, 2000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2. 3. 3. 말년
전 나치 독일 공군의 동부 전선 군사 정보 부대인 ''Fremde Heere Ost의 수장을 지낸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은 1945년 말 미국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끌던 겔렌 기관은 공중전 전문가가 필요했고, 크루핀스키는 고용되어 1953년까지 소련 점령 지역의 군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했다. 이 시기 크루핀스키의 행적에 대해서는 상충되거나 누락된 정보가 많으며, 본인 스스로도 이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1952년 11월, 크루핀스키는 연방방위부의 전신인 블랑크청에 고문으로 합류했다. 1957년 독일 연방방위군이 창설되자 소령 계급을 받고 영국에서 전후 독일의 전투기 운용을 위한 연수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서독 최초의 제트 전투기 부대인 제33전투폭격항공단(JaBoG 33)의 비행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크루핀스키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계급 | 주요 보직 |
---|---|---|
1966년 6월 | 준장 | 미국 텍사스주 독일 공군교육특공대 사령관 |
1969년 7월 | 소장 | 제3공군사단 사단장 |
1971년 | NATO 제2연합전술공군 참모장 | |
1974년 10월 | 중장 | 공군함대 사령관 |
그러나 1976년, 나치 독일 공군 에이스였던 한스울리히 루델을 옹호하는 발언 등으로 논란이 된 루델 스캔들에 연루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1976년 11월 8일, 중장 계급을 끝으로 조기 퇴역하게 되었다.
퇴역 후에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노인키르헨젤샤이트에서 은거했으며, 2000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3. 수상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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