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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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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복음 6장은 갈릴래아 호수, 가버나움, 티베리아스 등 여러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이 장에서는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이 묘사된다. 또한 가버나움 회당에서 생명의 떡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시는데, 많은 제자들이 이 가르침에 반발하여 떠나가고,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믿음을 묻는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 중 한 명이 배신자임을 암시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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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요한복음 6장
서기 250년경
파피루스 28, ~250 CE
요한복음 6장
이전 장5장
다음 장7장
성경신약성경
분류복음서

2. 장소

요한복음 6장은 갈릴래아 지역의 여러 장소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요 무대는 다음과 같다.


  • 갈릴래아호 동편의 산: 예수께서 군중을 가르치고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장소이다(요한복음 6:3, 15).[82]
  • 갈릴래아호: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제자들과 다시 만나는 사건이 일어난다(요한복음 6:16–21a). '티베리아스 바다'라고도 불렸다(요한복음 6:1).[10]
  • 카파르나움: 예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를 하신 곳이다(요한복음 6:21b, 6:24, 6:59).
  • 티베리아스: 이곳에서 온 배들이 오병이어 기적 이후 군중을 카파르나움으로 실어 나르는 데 사용되었다(요한복음 6:23–24).[8]


요한복음 5장의 배경이었던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약 160.93km 떨어진 갈릴래아 지역으로 무대가 갑작스럽게 옮겨지는데,[9][78] 유대에서 갈릴래아로 이동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이는 요한 복음서가 모든 사건을 순서대로 기록하기보다 중요한 사건과 가르침에 집중하여 서술하는 특징을 보여준다.[79][8]

2. 1. 갈릴리 호수

요한복음 6장은 요한복음 5장의 배경인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약 160.93km 떨어진 갈릴래아호에서 시작한다.[9][78] 유대에서 갈릴래아로 이동하는 과정은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는 요한 복음서가 중요한 사건에 집중하여 서술하는 특징 때문이다.[79][8] 일부에서는 5장과 6장 사이에 내용이 누락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근거 없는 추측이라는 반론도 있다.[80]

요한복음 6장 1절은 "이 일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로 건너가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10] 그리스어 원문은 '메타 타우타'(μετα ταυτα|메타 타우타el, 이 일 후에)로 시작하며, 일부 번역본에서는 시간적 간격이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11] 예수께서는 갈릴래아호를 건너가셨는데(πέραν|페란el), 신학자 앨버트 반스와 플러머는 이 이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12][8][81] 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랐는데, 이는 예수께서 행하신 치유의 "표적"(σημεια|세메이아el)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요한복음 6:3).[13] 이는 마태오의 복음서 5장 1절의 산상 수훈 시작과 유사한 장면이며, 루가의 복음서 6장 17절 이하의 평상 수훈과는 대조를 이룬다. 왓킨스와 같은 학자들은 여기서 언급된 '산'이 특정 봉우리가 아니라 호수 동편의 '언덕 지역'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5][82]

이후 사건들은 갈릴래아호 자체(요한복음 6:16–21a)와 카파르나움(요한복음 6:21b, 6:24, 6:59)에서 이어진다. 티베리아스에서 온 배들도 등장하는데(요한복음 6:23–24), 이 배들은 헤롯 안티파스가 호수 서쪽에 건설한 도시 티베리아스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8] 제네바 성경이나 킹 제임스 성경은 이 배를 '선박'으로, 다른 번역본이나 주석가들은 '작은 배' 또는 '작은 선박'으로 묘사한다.[40][18]

이스라엘 티베리아스의 항구


다음 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지 않고 제자들만 먼저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요한복음 6:22).[39] 이들은 티베리아스에서 온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건너갔다.[8]

무리는 "바다 건너편"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나 "랍비,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요한복음 6:25).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생각이나 동기에 대해 말씀하셨다.[5][41]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자신을 찾는다고 지적하셨다(요한복음 6:26). 이는 앞서 14절에서 무리가 표적을 보고 예수를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라고 인식했다는 기록과 대조된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러한 차이가 무리의 피상적인 이해 수준을 반영한다고 해석한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단지 물질적인 필요(빵)가 채워지는 것에 만족하며 더 큰 기적이나 메시아 왕국의 외적인 현상을 기대했다는 것이다.[42]

2. 2. 가버나움

요한복음 6장의 사건 중 일부는 가버나움에서 일어났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를 건너 가버나움에 도착했으며(요한복음 6:21b, 6:24), 예수님의 설교 중 일부도 이곳 회당에서 이루어졌다(요한복음 6:59).

한편, 오병이어 기적 이후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지 않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헤롯 안티파스가 세운 도시인 티베리아스에서 온 배들이 도착했고(요한복음 6:23), 무리는 이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건너갔다(요한복음 6:24).[8][40][18]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난 무리는 "랍비,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요한복음 6:25).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고, 그들이 표적의 의미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단지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자신을 찾는 것이라고 지적하셨다(요한복음 6:26).[5][41] 이는 앞서 복음서 저자가 무리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로 인식했다고 기록한 것(요한복음 6:14)과 대조를 이룬다. 일부 해설가들은 이 차이가 무리가 기적의 피상적인 면만 보고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42]

2. 3. 티베리아스

요한복음 6장에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장소가 언급되는데, 그중 티베리아스도 포함된다. 5장의 배경이었던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약 160.93km 떨어진 갈릴리 호수(갈릴래아호)로 무대가 옮겨진다.[9] 이 호수는 '티베리아스 바다'라고도 불렸다. (요한복음 6:1)

요한복음 6장 22-24절에는 티베리아스에서 온 배들이 등장한다.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다음 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제자들과는 달리 배를 타지 않고 제자들만 먼저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마침 티베리아스에서 여러 척의 배가 기적이 일어난 곳 가까이에 도착했고, 무리는 이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가버나움)으로 건너갔다. (요한복음 6:23–24) 이 배들은 제네바 성경이나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선박"으로, 다른 번역본에서는 "작은 배" 또는 "작은 선박" 등으로 묘사된다.[40][18]

티베리아스는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호수 서쪽에 건설한 도시였다. 플러머는 요한복음 6장 22절의 문장이 다소 복잡하고 문학적으로 세련되지 못하게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오히려 사건의 역사적 정확성을 뒷받침하는 세부 사항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8]

무리는 "바다 건너편"인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랍비,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라고 묻는다(25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 답하거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기보다는, 그들이 표적의 의미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단지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자신을 찾는다고 지적하신다(26절).[5][41] 이는 무리가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하고도 그 이면에 담긴 영적인 의미보다는 당장의 물질적인 필요 충족에 더 관심을 두었음을 보여준다.[42]

3. 오병이어의 기적

요한복음 5장의 배경인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갈릴래아 호수 동쪽[78][12][8]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유대에서 갈릴래아까지의 여정은 생략되었는데, 이는 요한복음이 중요한 사건에 집중하여 서술하는 특징 때문이다.[79][8] 예수께서는 언덕(혹은 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앉아 가르침을 전했는데,[13][5] 이는 마태오의 복음서의 산상 수훈 시작과 유사한 배경이다. 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시점이었다.[15]

로마 산 칼리스토 카타콤에 그려진 3세기 초의 벽화. 빵과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큰 무리를 보고, 그들을 먹일 방법에 대해 제자 필립보안드레아에게 물으며 시험하셨다.[19]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모든 사람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계산했고,[23] 안드레아는 한 아이가 가진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아 예수께 가져왔다.[22]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풀밭에 앉히게 하신 후, 빵을 들고 감사 기도(ευχαριστησας|에우카리스테사스grc)를 드리셨다. 이 단어는 성찬을 뜻하는 영어 'Eucharist'의 어원이 되었다.[26] 기도를 마친 뒤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셨고, 모인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26] 식사가 끝난 후 남은 빵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27]

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를 모세가 예언했던 '세상에 오실 그 예언자'라고 인식했다.[29][4] 그러나 그들은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를 억지로 으로 삼으려 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그들을 피해 다시 혼자 산으로 가셨다.[29][30]

3. 1. 빌립과 안드레



예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많은 군중을 보고 그들을 먹이고자 제자들, 특히 빌립과 안드레를 시험하고자 하셨다.[19]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저녁에 일어났다고 명시하지 않고, 단지 유월절(과월절)이 가까웠다고만 언급한다.[26] 그러나 요한복음 2:13과 비교해 볼 때, 예수와 제자들은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으며, 요한복음 7:1-6에 따르면 다음 초막절 때까지 갈릴래아에 머물렀다.

5절에서 예수는 빌립에게 군중을 먹일 빵을 어디서 살 수 있을지 물었다. 이는 빌립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19] 감리교 목사 조셉 벤슨은 빌립이 벳새다 출신이라 그 지역을 잘 알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고 보았다.[17] (요한복음 1:44에 따르면 베드로와 안드레 역시 벳새다 출신이다.) 또한 빌립이 제자들의 재정과 식량 공급을 담당했을 가능성도 제기되는데,[18] 이는 그가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부족하다고 답한 점(요한복음 6:7)에 근거한다. 그러나 요한복음 13:29에서는 이 역할을 가룟 유다가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학자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빌헬름 마이어는 이 시험이 믿음보다는 빌립의 지적 성향을 시험한 것이라고 보았고,[20][16] 반면 에른스트 빌헬름 헹스텐베르크[16] 등은 믿음을 시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어치의 빵으로도 모든 사람이 조금씩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답했다.[23] 마태오의 복음서 20:2에 따르면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므로, 이백 데나리온은 약 200일 치의 임금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때 시몬 베드로의 형제인 제자 안드레가 나서서[22] "여기에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예수께 말했다. 안드레는 요한복음 1:40에서 이미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한번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 소개된다.[23]

개역개정판과 새번역 성경 등에서는 "한 아이(παιδάριον ἓνgrc)"라고 번역했지만, 일부 현대 비평가들은 '하나'를 뜻하는 ἓν|헨grc이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본다.[23] 공동번역성서는 이를 반영하여 "웬 아이"로 번역했다. 아이를 뜻하는 παιδάριον|파이다리온grc은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유일하게 등장하는 단어(단발어)다.[24] 마태오의 복음서 14장에서는 제자들이 직접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다고 기록된 점을 들어, 신학자 존 길은 이 아이가 예수를 따르며 식량 등 물품을 운반하던 사람이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25]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앉히게 한 뒤, 빵을 들고 감사 기도(ευχαριστησας|에우카리스테사스grc)를 드렸다. 이 단어는 성찬을 뜻하는 영어 단어 'Eucharist'의 어원이 되었다.[26] 케임브리지 학교 및 대학 성경 등에서는 이 감사가 단순한 식사 기도를 넘어 기적이 일어나는 중요한 요소였다고 보는데, 사복음서 모두 이 행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6:23에서도 특별히 언급되기 때문이다.[8] 식사가 끝난 후, 제자들이 남은 빵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는 열두 사도가 각각 광주리를 들고 모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27] (복음서의 이 시점에서는 아직 '열두 제자'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다.[28]) 루터교 신학자 크리스토프 에른스트 루타르트는 이 열두 광주리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연결지어 해석하기도 했다.[27]

3. 2. 감사의 기도와 기적



안드레아는 한 소년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예수께 말한다. 여기서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 다시 한번 소개된다.[85] 개역개정판새번역 성경은 "한 아이(παιδάριον ἓνgrc)"라고 번역했지만, 현대의 비평가들은 "한(ἓνgrc)"이라는 부분이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본다.[86] 공동번역성서는 이를 반영하여 "웬 아이"로 번역했다. 아이를 나타내는 παιδάριον|파이다리온grc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만 사용된 단어이며, 마태복음 14장에서는 단순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언급된다.[87] 신학자 존 길은 이 아이가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음식을 비롯한 물품을 운반하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88] 근처 호수에서 물고기를 더 잡자는 제안은 없었지만, 예수의 행동은 적은 양의 빵과 물고기로도 충분함을 보여주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앉히라고 지시한 뒤, 빵을 들고 감사 기도(ευχαριστησας|에우카리스테사스grc)를 드렸다. 여기서 성찬을 뜻하는 영어 단어 '[https://en.wiktionary.org/wiki/Eucharist Eucharist]'가 유래했다.[26] 이 감사 기도가 당시 일반적인 관습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복음서 모두 이 축사를 언급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6장 23절에서 "주님께서 감사하신 후 그들이 빵을 먹었던" 사건으로 특별하게 언급되기 때문이다.[89][8] 예수는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주어 군중에게 나누어 주게 했다.

식사가 끝난 후, 제자들이 남은 보리빵 조각들을 모으자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는 12명의 제자가 각각 광주리를 들고 조각을 모았기 때문이라는 해설이 있다.[90][27] 다만 제자의 수가 열둘이라는 사실은 이후 67절에서 처음 명확히 언급된다.[28] 루터교 신학자 크리스토프 에른스트 루타르트는 열두 광주리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했다.[91][27]

예수가 행한 이 표적을 본 사람들은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시다"라고 말했다.[29] 이는 모세가 예언했던 인물이며, 예수는 앞서 요한복음 5장에서 모세의 증언을 인정한 바 있다. (요한복음 5:45, 신명기 18:18 비교).[4] 그러나 군중은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했다. 이는 예수의 의도가 아니었으므로, 그는 다시 산으로 올라가 혼자 시간을 보냈다 (요한복음 6:14-15).[30] 아우구스티누스는 군중이 세속적인 왕국을 기대하고 하나님 나라가 즉시 임할 것이라 생각한 점에서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하며, 예수는 인간이 세우는 왕이 아니라 인간에게 왕국을 주시는 분이라고 설명했다.[32]

3. 3. 예언자와 왕

군중은 예수가 행한 표적을 보고 모세신명기 18장 18절에서 예언했던 '오실 그 예언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29] 이는 요한복음 5장 45절에서 예수 스스로도 인정한 내용이다. 키퍼는 6장 전체를 "모세가 예수에 대해 어떻게 기록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 본다.[4]

하지만 군중들은 이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를 "억지로라도" 으로 삼으려고 했다. 이것은 예수의 의도가 아니었기에, 예수는 "다시" 산에 올라가 혼자 시간을 보냈다.[29] 일부 사본에는 예수가 산에서 기도했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루터교 신학자 해롤드 H. 불스는 이 사건이 큰 유혹의 근원이었음에 틀림없으므로, 예수가 기도할 필요가 있었으며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했다고 생각한다.[30] 시리아어 성경과 에티오피아어, 페르시아어 번역본에는 "다시"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31]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군중이 예수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한 열망 속에서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세상적인 왕국을 생각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임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분은 확실히 인간에 의해 세워질 왕이 아니라, 인간에게 왕국을 주실 분이셨다"고 언급하며, 예수가 즉시 통치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주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의미에서 통치하실 분"이라고 설명한다.[32]

4. 물 위를 걸으심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던 밤, 예수가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나타났다.[34][36]

4. 1. 제자들의 두려움과 믿음

배에 올라 가버나움으로 바다를 건너갔다. 그러나 이미 어두워졌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다.[34] 여기서 "배"는 열두 제자를 태울 수 있을 만큼 큰 배를 의미한다.[35] 1986년 가뭄과 호수 수위 저하로 인해 서기 1세기의 어선이 갈릴리 호수 서쪽 해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배는 현재 티베리아스 북쪽 키부츠 기노사르에 있는 이갈 알론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크기는 길이 약 8.23m, 너비 약 2.29m이며, 돛을 위한 돛대가 있었고 네 명의 노 젓는 사람이 노를 저을 수 있었다.[35] 이 배는 현재 "예수 보트" 또는 "갈릴리 호수 보트"로 알려져 있다. 예수님이나 그의 제자들과의 직접적인 역사적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당시 갈릴리 호수 배의 설계와 건조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35]

제자들이 약 25~30 스타디온(약 4.83km~약 6.44km)을 저어 "호수의 가장 넓은 부분"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 배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갈릴리 호수는 가장 넓은 곳의 폭이 약 약 8.05km이다.[36] 제자들은 두려워했지만 "기꺼이 예수님을 배에 영접하니 즉시 배가 그들이 가려던 땅(가버나움)에 이르렀다"(요한복음 6:21).

신학자 존 길은 4세기 또는 5세기의 시인 논누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 구절이 "즉시 도착"이라는 추가적인 기적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논한다. 존 길은 논누스를 인용하여 "바람이 멈췄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배는 그들이 가려던 곳에 즉시 도달했습니다."[37]라고 언급했다.

ευθεως|에우테오스el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 번역본에서 "즉시"로 번역되었지만, 두에-랭스 성경에서는 "곧"으로 번역되었다. 설교 해설집에서는 ευθεως|에우테오스el가 항상 "즉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단순히 다음에 주목하거나 관찰해야 할 것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한다.[38]

5.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가르침

4세기의 가버나움(Kfar Nahum)의 고대 대성전 유적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 날, 많은 무리가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왔다. 예수님은 그들이 기적의 참된 의미를 찾기보다 물질적인 필요 때문에 자신을 따랐음을 지적하셨다([42]).

이후 요한복음 6장 25절부터 58절까지는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과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59절 참조).[43]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계시하며 영생에 대해 설교하시는 내용으로, 니고데모(3장)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4장)과의 대화처럼 깊이 있는 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신학자 알프레드 플러머는 이 부분을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아들에 대한 담론"이라고 평가했다.[8] 이 설교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의 핵심을 드러내는 중요한 부분이다.

5. 1. 생명의 떡



앨프레드 플러머는 요한복음 6장 26절부터 58절까지의 본문을 나누지 않는 것을 선호하며, 이 본문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한 번에 말한 하나의 연결된 담론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8]

: 다음 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무리들은 거기에 배 한 척만 있었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제자들끼리 따로 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John6:21-23&version=PHILLIPS 요한복음 6:22] (J. B. 필립스 번역)[39]

플러머는 "우리는 여기서 요한복음에서 매우 드문 복잡한 문장을 보게 된다(그러나 요한복음 13:1–4를 비교하라); 이것은 약간의 문학적 어색함을 드러내지만, 훌륭한 역사적 정확성을 보여준다... 문장의 구조는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진실성에 대한 반론이 되지 않는다."고 평가한다.[8] 배들은 헤롯 안티파스가 호수 서쪽에 건설한 새로운 도시인 티베리아스에서 도착했고, 무리는 이 배들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이동했다. 제네바 성경킹 제임스 성경은 배를 "선박"으로 묘사하고, Disciples' Literal New Testament는 "작은 배"로 묘사했으며,[40] 요한 알브레히트 벵겔의 Gnomon은 "작은 선박"으로 묘사했다.[18]

무리는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난다(25절). 그들은 예수님께 "랍비,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라고 묻는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답하거나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주지 않으신다.[5] 조지 레오 헤독은 그분이 그들의 말에 답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에 답하셨다"고 제안한다.[41] 예수님은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John+6%3A26&version=NKJV 26절]에서 사람들이 그분이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그분을 찾았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John+6%3A14&version=NKJV 14절]에서 복음 전파자는 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그분께서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임을 깨달았다고 증언했다. Pulpit Commentary는 이러한 차이가 그들의 피상적인 이해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 너희는 외적인 모습, 피상적인 현상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너희가 내가 너희의 선지자이자 왕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은, 너희가 내가 준 표적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너희는 이제 진정으로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그) 빵을 먹고 너희의 일용할 양식에 대한 일시적인 공급으로 배불렀기 때문에, 어제보다 더 인상적인 메시아 왕국의 새로운 특징을 오늘 기대하며 나를 찾고 있는 것이다.[42]

25절에서 58절은 가버나움의 회당(59절 참조)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대화와 담론을 제시하며,[43] 이는 예수께서 이전에 니고데모(3장)와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4장)과 나누셨던 대화와 유사하다. 플러머는 이 전체 부분을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아들에 대한 담론"이라고 부른다.[8]

요한복음 6장 25절에서 34절까지의 첫 번째 부분은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의 대화를 담고 있다.

  •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이는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니, 이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를 인치셨느니라." (요한복음 6:27, NKJV)
  •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6:28, NKJV)
  •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요한복음 6:29, NKJV)
  •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게 하려고 무슨 표징을 행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으니, 기록된 바 '그가 그들에게 하늘에서 빵을 주어 먹게 하셨다' 하였나이다." (요한복음 6:30–31, NKJV)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준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참된 하늘의 빵을 주시느니라.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자이시니라." (요한복음 6:32–33, NKJV)
  • "주님(또는 선생님) [44] (κυριεel), 우리에게 이 빵을 항상 주십시오." (요한복음 6:34, NKJV)


수고 또는 고통스러운 노동(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슬픔", 위클리프 성경에서는 "노고")과 음식 획득 사이의 연관성은 창세기 3:17에서 확립되었으며, 전도서의 저자는 "사람의 모든 수고는 그의 입을 위함이나, 그의 욕망은 채워지지 아니한다." (전도서 6:7, KJV)라고 관찰했다. 윌리엄 로버트슨 니콜은 Expositor's Greek Testament에서 심지어 "예수께서 전날 저녁에 그들에게 주신 '썩을 양식'( βρῶσιν ἀπολλυμένηνel)이라고 부르셨다: 그들은 이미 다시 배가 고팠고, 그를 따라 몇 마일을 걸어 또 다른 식사를 하려 했다"고 언급했다.[45] 대신 예수님은 그의 청중이 일해야 할 다른 종류의 음식을 약속한다. 즉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βρωσιν την μενουσαν εις ζωην αιωνιονel)이다. 많은 영어 번역본은 예수(인자)가 영원한 양식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예수께서 언급하시는 선물이 썩지 않는 음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다양한 번역본이 있다.[46] 따라서 리빙 바이블의 의역은 다음과 같다:

: 당신은 음식과 같이 썩을 것들에 대해 너무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요, 나는 메시아로서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데 에너지를 쓰십시오.[47]

마이어는 예수께서 주시는 선물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분투와 고투"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한다.[16] 빌헬름 마르틴 레베레흐트 데 베테는 "일"과 "선물" 사이의 일치를 "이상한" 조합으로 본다.[16]

또한 27절에서 복음 전도자는 요한복음 3:33에서 이전에 언급했던 인장(σφραγίςel)의 개념을 다시 언급한다.

: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인치셨느니라.[48]

세례 요한은 예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심을 증명(εσφραγισενel)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인(εσφραγισενel)을 치셨다고 선언하신다. 종교 개혁가 존 칼빈은 이 선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 교부들은 그리스도께서 인침을 받으셨다고 말함으로써 이 구절을 오역하고 왜곡했다. 이는 그가 아버지의 도장이며 살아있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그의 영원한 본질에 대한 난해한 기독론에 대해 논하지 않고, 그가 무엇을 하도록 위임받았고 명해졌는지, 우리와의 관계에서 그의 직무가 무엇이며, 우리가 그에게서 무엇을 구하고 기대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적절한 은유를 통해 그는 고대 관습을 언급한다. 그들은 그들의 권위로 승인하려는 것을 인장으로 봉인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가 스스로 아무것도 주장하거나 개인적인 권위로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이 직무가 아버지에 의해 그에게 명해졌고, 아버지의 이 명령이 마치 인장이 그에게 새겨진 것처럼 나타났다고 선언한다.[49]

28-29절의 "일들"(τα εργα του θεουel)과 "일"(το εργον του θεουel)의 구분은 개신교 교리인 오직 믿음("오직 믿음")의 성경적 토대를 제공한다. 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 그들이 그들의 법적 관점에 따라 염두에 두었던 많은 ἔργα θεοῦ 대신에, 예수는 단 하나의 ἔργον을 언급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즉, 믿음의 (도덕적 행위) 일이다.[16]

대화는 유대인들이 예수께 "주님(또는 선생님) (κυριεel), 우리에게 이 빵을 항상 주십시오" (요한복음 6:34, NKJV)라고 묻는 것으로 끝난다. 더 보이스 번역은 'κυριε'를 '주인'(Master)으로 번역했으며,[50] 플러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주'(Lord)는 너무 강한 [번역]이며, 이 요청을 겸손한 신자의 기도와 너무 비슷하게 만든다. 우리의 번역자들은 현명하게 Kyrie의 번역을 다양하게 하여 때로는 '주'(Lord), 때로는 '선생님'(Sir)을 사용한다. 여기,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처럼 '선생님'(Sir)이 더 나을 것이다.[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 요한복음 6:35, NKJV

예수께 오는 것은 그를 믿는 것과 동일시된다. εἶπενel은 일반적으로 "말했다"를 의미하지만, 새 국제 버전은 이를 더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로 번역한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나는 ...이다" 형식으로 선언하시는 일곱 번의 경우 중 첫 번째이다. 루터교 신학자 루돌프 에발트 슈티어는 이 담화의 나머지 부분에서 예수께서 "나" 또는 "나를" 언급하는 35개의 언급을 세었다.[51]

어떤 시점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또는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52]

그분은 지금 그 말씀을 다시 언급하시지만, 이것에 대한 다른 기록은 없다.[5]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기록되지 않은 대화 (앨포드, 웨스트코트)를 언급하는 것이거나, 심지어는 이제는 사라진 담화의 일부가 된 어떤 기록된 문장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추측했다."[53] 보고 믿는 것 사이의 상호 작용은 요한복음에서 자주 언급된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6:30에서 유대인들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요구한다. 예수의 부활 후, "무덤에 먼저 도착한 제자"는 무덤에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요한복음 20:8, NKJV); 일주일 후, 도마는 "보았기 때문에 믿었다"(요한복음 20:29, a)고,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자"를 칭찬하셨다(요한복음 20:29, b). 요한복음 6:40에 따르면, "아들을 보고 믿는 모든 자"가 영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자신의 성육신을 언급하신다(요한복음 6:38, NKJV). 그분의 사명은 그분에게 주어진 "어떤 것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보수적'이며, 마지막 날에 아버지의 선물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이다(요한복음 6:39, NKJV). 몇몇 해설가들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παν ο διδωσιν μοι ο πατηρel) (요한복음 6:37, NKJV)이 단수 중성 명사임을 지적했다:[54] "말하자면, 모든 질량이 아버지에 의해 아들에게 하나의 통일체로 주어졌다."[55]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나에게 주신 것 중에 내가 하나도 잃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그분께서 체포되실 때(요한복음 18:9) "나사렛 예수"는 바로 그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며 "이들은" 가게 해달라고 확인하신 것에서 성취되었을 것이다.[56] 그분은 또한 대제사장 기도에서 "멸망의 아들 외에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다"고 확인하신다.[57]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서로 불평했다(요한복음 6:41, 43, 52, 60). 예수님의 가르침 중 이의가 제기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주장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는 그의 발언
  • 믿는 자들에게 자신의 살을 먹으라는 제안 (그리고 확장하여 그의 피를 마시라는 제안)


이러한 말씀들은 집단적인 논쟁과 지적 어려움을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Common English Bible은 유대 공동체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논쟁'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The Disciples' Literal New Testament는 그들이 '싸웠다'고 말한다.[58] 존 위클리프는 '불평했다' 또는 '투덜거렸다'는 단어를 사용했으며,[59] ἐγγόγυζονel이라는 단어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해 70인역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60] 존 길의 주석은 유대인들의 일관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사막에서 "빵 부족"으로 불평했고,[61]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된 빵, 하나님의 빵,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가르침에 대해 불평했다.[62]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의 가르침은 도전적이었다. The Disciples' Literal New Testament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받아들이기 어렵고, 불쾌하고, 가혹하고, 반대할 만한 것"으로 여긴다.[63]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주장은 예수님과 그의 부모에 대한 지역적 지식을 바탕으로 거부된다.

: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그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

: — 요한복음 6:42

The Pulpit Commentary는 복음서 저자가 여기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잉태와 예수 탄생에 대한 공관 복음서의 설명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 이 구절을 괴롭히는 어려움은 오히려 주님의 탄생 방식에 대해 여기서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침묵하는 요한의 침묵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알고,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내용을 알고 있었을 그는 주님의 말씀을 옹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는 공관 복음서의 설명을 지지함으로써 "유대인"을 잘못되게 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놀랍다. 그것은 그가 기록하는 모든 기적, 그리고 그가 모호하게 언급하는 기적들의 도덕적, 영적 의미를 항상 바라보았다는 사실로 가장 잘 설명된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에 만족한다. 그것들은 공관 복음서의 설명을 가장 확실하게 설명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일반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당황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비합리적이거나 악의적인 비판이 아니었다. 이 질문은 엄청난 주장을 처음 들은 사람들이 했을 것이다.[64]

또한 요한의 기록은 예수의 형제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공관 복음서의 유사한 부분과는 다르다:

: "이는 그 목수, 마리아의 아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하였다.

: — 마가복음 6:3, NKJV

5. 2. 예수의 살과 피



다음 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무리들은 그곳에 배가 한 척뿐이었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요한복음 6장 22절).[39] 알프레드 플러머(Alfred Plummer)는 이 구절이 요한복음에서는 드물게 복잡한 문장 구조를 가지지만, 이는 문학적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정확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8] 이때 헤롯 안티파스가 호수 서쪽에 세운 새 도시 티베리아스에서 배들이 도착했고, 무리는 이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건너갔다. 요한 알브레히트 벵겔(Johann Albrecht Bengel)은 이 배들을 "작은 선박"으로 묘사했다.[18]

무리들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랍비,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25절).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 답하는 대신, 그들이 표적을 보고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서가 아니라, 단지 빵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에 자신을 찾았다고 지적하셨다(26절). 이는 앞서 14절에서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로 인식했다는 기록과 대조를 이룬다. 펄핏 주석(Pulpit Commentary)은 이 차이가 사람들의 피상적인 이해 수준, 즉 기적의 참된 의미보다 당장의 물질적 필요 충족에 더 관심을 두었음을 반영한다고 설명한다.[42]

이후 25절부터 58절까지는 가버나움의 회당에서(59절 참조)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대화와 설교를 담고 있다.[43] 이는 예수님이 이전에 니고데모(3장)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4장)과 나누었던 대화와 유사한 형식을 띤다. 플러머는 이 전체 부분을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아들에 대한 담론"이라고 명명했다.[8]

첫 번째 대화(26-34절)에서 예수님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인자인 예수님 자신이 주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인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27절). '인치셨다'(ἐσφράγισεν|에스프라기센el)는 표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사명과 권위를 보증하셨음을 의미한다.[48] 존 칼빈은 이를 예수님의 신적 본질 자체보다는 그의 사명과 권위에 대한 아버지의 승인으로 해석했다.[49]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28절)라고 묻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29절)이라고 답하신다. 이는 행위가 아닌 믿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개신교오직 믿음 교리의 중요한 근거 구절 중 하나로 여겨진다.[16]

그러자 사람들은 믿을 만한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며,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예를 든다(30-31절). 예수님은 만나를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아버지가 주시는 참된 하늘의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자신이라고 밝히신다(32-33절). 이에 사람들은 "주님(κύριε|퀴리에el), 이 빵을 항상 우리에게 주십시오"(34절)라고 요청한다. 플러머는 여기서 '퀴리에'를 '주님'보다는 '선생님'(Sir)으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더 적절하다고 보았다.[8]

예수님은 이에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라고 선언하신다. 이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일곱 가지 "나는 ...이다" 선언 중 첫 번째이다. 예수께 오는 것과 그를 믿는 것은 동일시된다. 예수님은 또한 자신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으며, 그 뜻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38-40절).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특히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주장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불평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41, 43, 52절). 그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배경, 즉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신적인 기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그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 (요한복음 6장 42절)

펄핏 주석은 요한이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공관 복음서의 기록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예수의 신적인 기원을 변호하기 위해 그 내용을 언급하지 않은 점에 주목한다. 요한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을 수 있으며, 유대인들의 반발은 그들의 피상적인 지식에 근거한 당연한 반응이었을 수 있다고 해설한다.[64] 유대인들의 불평(ἐγγόγυζον|엥공귀존el)이라는 단어는 70인역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불평했던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와 같아, 과거와 현재의 불신앙적인 반응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시사한다.[60]

논쟁이 심화되자 예수님은 더욱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장 51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 사이에 더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절)라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강하게 반발했다. 일부 번역본에서는 이 상황을 '논쟁' 또는 '싸움'으로 묘사할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었다.[58]

이에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한복음 6장 53-58절).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영생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제시하며, 이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 자신과의 신비로운 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모든 가르침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이루어졌다(59절).

5. 3. 유대인들의 반발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서로 불평했다(요한복음 6:41, 43, 52, 60). 예수님의 가르침 중 이의가 제기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주장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는 그의 발언
  • 믿는 자들에게 자신의 살을 먹으라는 제안 (그리고 확장하여 그의 피를 마시라는 제안)


이러한 말씀들은 집단적인 논쟁과 지적 어려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Common English Bible은 유대 공동체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논쟁'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The Disciples' Literal New Testament는 그들이 '싸웠다'고 말한다.[58] 존 위클리프는 '불평했다' 또는 '투덜거렸다'는 단어를 사용했으며,[59] ἐγγόγυζονel이라는 단어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해 70인역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60] 존 길의 주석은 유대인들의 행동이 과거와 일관됨을 지적한다. 그들은 출애굽 당시 사막에서 "빵 부족"으로 불평했고,[61]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된 빵, 하나님의 빵,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가르침에 대해 불평했다.[62]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그의 가르침은 도전적이었다. The Disciples' Literal New Testament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받아들이기 어렵고, 불쾌하고, 가혹하고, 반대할 만한 것"으로 여긴다.[63]

특히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주장은 예수님과 그의 부모에 대한 지역적 지식을 바탕으로 거부되었다.

: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그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 (요한복음 6:42)[42]

The Pulpit Commentary는 복음서 저자가 여기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예수 탄생에 대한 공관 복음서의 설명을 언급하지 않는 점에 주목한다.

: 이 구절을 둘러싼 어려움은 오히려 주님의 탄생 방식에 대해 여기서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침묵하는 요한의 태도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알고,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내용을 알고 있었을 그는 주님의 말씀을 옹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는 공관 복음서의 설명을 지지함으로써 "유대인"의 잘못을 지적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놀랍다. 이는 그가 기록하는 모든 기적, 그리고 그가 모호하게 언급하는 기적들의 도덕적, 영적 의미를 항상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로 가장 잘 설명된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 자체에 만족한다. 그 말씀들은 공관 복음서의 설명을 가장 확실하게 뒷받침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일반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당황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비합리적이거나 악의적인 비판이 아니었다. 이 질문은 엄청난 주장을 처음 들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했을 법한 질문이다.[64]

또한 요한의 기록은 예수의 형제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공관 복음서의 유사한 부분과는 다르다.

: "이는 그 목수, 마리아의 아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하였다. (마가복음 6:3, NKJV)[64]

6. 많은 제자들이 떠나감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자, 많은 제자들이 이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65] 그들은 "이것은 어려운 말씀이다. 누가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요한복음 6:60) 라고 수군거렸다. 여기서 '어렵다'는 것은 단순히 이해하기 난해하다는 의미를 넘어, 제자들의 기존 생각이나 기대와 너무 달라 받아들이기 불쾌하고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66][12] 신학자 앨버트 반스는 이 교리가 제자들의 편견에 부딪혔고 터무니없게 느껴졌기 때문에 거부감을 일으켰다고 설명한다.[12]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요한복음 6:61-62) 라고 물으셨다. 이는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질문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혹은 예수의 승천을 목격하면 오히려 더 큰 확신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67]

결국 이 가르침을 계기로[68][69][70]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나고 더 이상 함께 다니지 않았다. (요한복음 6:66) 이에 예수께서는 남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 6:67) 라고 물으셨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열두 제자'라는 집단이 처음으로 명확하게 언급되는 부분이다.

6. 1. 열두 제자의 믿음 고백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이 말씀을 하셨다.[65] 59절은 이야기의 흐름에 잠시 멈춤을 표시하는 듯하다. 앞선 구절들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유대인 공동체에게 가르치신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후 구절들은 제자들이 그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하려 애쓰며 예수와 나누는 사적인 대화를 다룬다. 여기서 제자들은 "더 넓은 의미에서 제자들, 즉 어느 정도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를 따르는 자들로 여겨졌던 사람들"[5]이었으나, 이제 그들의 반응은 "이것은 어려운 말씀이다. 누가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요한복음 6:60)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 가르침은 "단순히 가혹한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66] 신학자 앨버트 반스는 "'어렵다'는 단어는 여기서 '불쾌하고, 용납할 수 없는'이라는 의미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이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했지만, 이는 문맥에 맞지 않는다. 예수가 전한 교리는 그들의 편견에 반하는 것이었고, 터무니없어 보였기에 거부했다."[12]고 설명한다. 예수의 응답,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요한복음 6:60–61)는 "이 말이 너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느냐? 그러면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된다면 너희는 훨씬 더 실망하게 될 것이 아니냐?"로 해석될 수도 있고, 혹은 "그러면 너희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 아니냐?"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윌리엄 로버트슨 니콜은 "두 번째 해석이 더 나은 의미를 제공한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믿는 것이, 내가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될 때 더 쉬워질 것이다."[67]라고 보았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전에 있던 곳으로"의 승천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수의 부활 40일 후에 일어나는 예수의 승천 사건 자체는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복음사가 요한은 그 때[68] 또는 "이 시점에서"[69] 또는 "이런 이유로"[70]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 일부가 떠나갔다고 기록한다.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났"고 "더 이상 그와 함께 걷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그 후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그들도 떠날 것인지 묻는다 (요한복음 6:67). 이는 요한이 "열두 제자"를 언급하는 첫 번째 경우이다. 이전에는 그룹으로 또는 "열두 사도"로 언급되지 않았으며, 열두 명의 제자 모두가 아직 소개되지도 않았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 빌립과 나다나엘이 언급되었고, 가룟 유다는 여기서 예수께서 "택하신" 열두 명 중 한 명으로 언급된다.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시몬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68-69)

NIV 성경은 일부 사본에서 발견되는 다른 번역을 채택하여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71]라고 번역한다.

베드로의 고백은 배움과 믿음의 여정을 마무리 짓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믿고 알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불스(Bulls)는 "우리는 깨달았습니다..."로 번역한다.[72]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을 그들 모두의 이름으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7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두 명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중 한 명은 마귀이다." (요한복음 6:70).

71절은 편집자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는 70절에서 주님의 거부의 말씀을 베드로에게서 구제하려고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마귀'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는 분명한 배신자인 유다를 의미했음에 틀림없다 - 그래서 편집자는 그렇게 추론한 것으로 보인다."[74] 이 장의 마지막 절은 복음사가가 앞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설명하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언급과 함께 3인칭 시점으로 기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6장 70절은 요한복음 13:31-38에서 다시 예언되는 베드로의 일시적인 배신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일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전통적으로 스테판 랭턴에게 기인하는) 장 구분에 따라 6장이 마무리된다. 7장은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대 지역으로 여행하는 것을 피하기로 결정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75]

6. 2. 배신자 유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이 말씀을 하셨다.[65] 59절은 이야기의 전환점으로, 앞선 내용은 예수께서 회당에서 유대인 공동체에게 가르치신 내용이며, 이후는 제자들이 그 가르침의 의미를 두고 예수와 나누는 사적인 대화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따르던 이들을 포함한다.[5]

그러나 일부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것은 어려운 말씀이다. 누가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요한복음 6:60) 라고 반응했다. 이 가르침은 단순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넘어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66] 신학자 앨버트 반스는 여기서 '어렵다'는 말이 '불쾌하고 용납할 수 없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즉, 제자들의 기존 생각과 너무 달라 터무니없다고 여겨 거부했다는 것이다.[12] 예수께서는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요한복음 6:60–61) 라고 물으셨다. 이는 '너희가 인자의 승천을 보면 더욱 실망할 것이냐?' 또는 '오히려 그때 확신을 갖게 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윌리엄 로버트슨 니콜은 후자의 해석이 더 적절하다고 보았다. 즉, 예수께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가 하늘에서 왔다는 사실을 더 믿기 쉬울 것이라는 뜻이다.[67]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승천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시점에서[68][69] 또는 이러한 가르침 때문에[70] 예수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그를 떠나 더 이상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 6:67) 라고 물으셨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열두 제자'가 처음으로 명확히 언급되는 부분이다. 이들 중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 빌립과 나다나엘1장에서 이미 소개되었고, 가룟 유다는 여기서 예수께서 "택하신" 열두 명 중 한 명으로 처음 언급된다.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68-69)

신 국제 버전(NIV) 등 일부 번역본에서는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로 번역하기도 한다.[71] 베드로의 이 고백은 앎과 믿음의 과정을 보여준다.[72]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의 답변을 그들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73]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 열두 명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중 한 명은 마귀이다." (요한복음 6:70) 라고 대답하셨다.

마지막 71절은 복음사가 혹은 후대 편집자가 덧붙인 설명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마귀'라고 지칭한 대상이 베드로가 아니라 명백한 배신자인 가룟 유다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해석된다.[74] 이 설명은 3인칭 시점으로 기록되어, 앞선 예수의 말씀의 의미를 부연한다. 일부 해석에서는 70절의 말씀이 유다뿐 아니라, 훗날 (요한복음 13:31-38) 예수를 부인하게 될 베드로(Cefa)의 일시적인 배신까지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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