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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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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산 상륙 작전은 1950년 10월, 6.25 전쟁 중 미 제10군단이 북한 원산에 상륙하여 평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계획되었으나, 북한군의 기뢰 부설로 인해 작전이 지연되고 피해가 발생한 작전이다. 이 작전은 지상 작전 지원을 위해 원산을 점령,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평양을 압박하려는 전략적 목표를 가졌으며, 국군의 선제적인 38선 돌파와 원산 점령으로 상륙 작전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그러나, 기뢰 제거 작업의 어려움과 미흡한 작전 준비, 중공군 개입에 대한 예측 실패 등으로 인해 작전의 효율성이 저해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북진 과정에서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1.4 후퇴의 원인이 되는 등,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모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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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상륙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원산 상륙 작전
한국 전쟁 중 원산 폭격
한국 전쟁 중 원산 폭격
기본 정보
분쟁한국 전쟁
날짜1950년 10월 2일 ~ 10월 28일
장소함경남도 원산시
결과미국 해병대의 원산 상륙 성공
교전 세력
교전국 1

지휘관
지휘관 1더글러스 맥아더
지휘관 2김일성

2. 작전 배경

6.25 전쟁 발발 이후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을 바탕으로 북진을 계획하면서, 북한 동해안의 주요 항구도시인 원산을 주목했다. 원산은 일제강점기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졌으며, 한국 전쟁 당시에도 북한 해군의 중심 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4]

맥아더 장군은 원산이 동해안의 다른 항구보다 작전을 펼치기 유리하며, 철도와 도로망, 중공업 시설 등을 통해 북한의 군수품 생산을 억제하고, 평양을 향해 서쪽으로 공격하거나 북쪽으로 진격하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5] 특히 원산항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으로, 수심이 적절하고 해저가 갯벌로 되어 있어 선박이 닻을 내리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원산 점령은 평양과 원산을 잇는 통로를 차단하여 북한군 전선을 동서로 분리하고, 평양을 동쪽에서 압박할 수 있게 하는 전략적 이점을 제공했다. 또한, 당시 소련으로부터 전쟁 물자를 들여오는 곳이었던 원산항을 점령함으로써 적의 군수품 보급에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원산 비행장에서는 20~30분 내에 평양을 비행기로 타격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한 고려 요소였다.[3]

2. 1. 작전 구역: 원산

'''원산시(元山市 / Wonsan-si)'''는 북한 강원도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북한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이자 경원선 등의 철도가 있는 교통 거점 도시이다. 강화도 조약(1876)으로 원산항이 개항하기 전까지는 '어을매'라는 순우리말 이름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옛 행정 구역 상에서도 '덕원부 원산촌'으로 기록되어 있었다.[1]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부산, 인천과 함께 원산항이 강제로 개항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외국 상인들의 입항으로 다양한 점포와 외국 상가지대가 생겼다.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건설로 해상과 육상 교통이 모두 발달한 항구도시가 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한용운의 책 '명사십리(明沙十里)'에서 언급된 것처럼 원산 바닷가 근처에 외국인 별장 20여 채가 줄지어 있었고, 한반도 유일의 관광 도시라고 불릴 정도였다.[1]

원산항은 겨울철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이며, 항구 내 투묘[2] 지역은 수심이 적절하고 해저가 갯벌로 되어 있어 선박이 닻을 내리기 좋았다. 1880년에 항만공사가 시작되었고, 1914년에는 경원선이 부설되었다.

2. 1. 1. 원산의 지정학적 의미

'''원산시(元山市 / Wonsan-si)'''는 북한 강원도의 항구도시이자 경원선 등이 지나는 교통 요충지이다. 강화도 조약(1876)으로 원산항이 개항하기 전까지는 '어을매'라는 이름의 작은 어촌이었다.[1]

원산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으로, 항구 내 수심이 적절하고 해저가 갯벌이라 선박이 닻을 내리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1880년 항만공사가 시작되었고, 1914년에는 경원선이 부설되었다.[2]

원산은 북한 동부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며 경원선(서울-원산), 평원선(평양-원산), 원라선(원산-라선)의 시작점이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이곳에 군사기지를 구축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 이전부터 원산은 군사기지로서의 장점을 지닌 지리적 요충지였다. 원산을 점령하면 평양과 원산을 잇는 통로가 차단되어 북한군 전선이 동서로 분리되고, 평양을 동쪽에서 압박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원산항은 당시 소련으로부터 전쟁 물자를 들여오는 곳이었고, 원산 비행장에서는 20~30분 내에 평양을 비행기로 타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3]

2. 1. 2. 원산의 군사적 의미

원산시는 북한 강원도의 주요 도시로, 항구와 철도를 갖춘 교통의 중심지이다. 강화도 조약(1876)으로 원산항이 개항되기 전까지는 '어을매'라는 이름의 작은 어촌이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경원선 철도가 건설되는 등 해상과 육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한반도 유일의 관광 도시로 불릴 정도로 발전했다.[1]

원산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부동항)인 원산항은 수심이 적절하고 해저가 갯벌로 되어 있어 선박이 닻을 내리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14년에는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개통되었다.[3]

원산은 북한 동부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며, 경원선(서울-원산), 평원선(평양-원산), 원라선(원산-라선)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이곳에 군사 기지를 구축한 적도 있다.[3]

한국 전쟁 이전부터 원산은 지리적 중요성과 군사 기지로서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원산을 점령하면 평양과 원산을 연결하는 통로가 차단되어 북한군의 전선이 동서로 분리되고, 평양을 동쪽에서 압박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원산은 항구 도시로서 소련으로부터 각종 전쟁 물자를 들여오는 곳이었기 때문에, 적의 군수품 보급에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원산 비행장을 이용하면 평양의 주요 시설을 공격하기에도 용이했다.[3]

1950년 6.25 전쟁 당시 원산에는 부두, 크레인, 선박 정박 시설, 철도 설비, 해군 기지 등이 있었고, 인구 10만의 대도시였다. 정유 공장, 철도, 선박, 파이프 등 다양한 산업 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원산 비행장은 공군 기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한국 전쟁 당시 원산은 북한 해군의 중심 기지였다. 1949년 8월 창설된 북한 해군은 원산에 중앙 기지를 두고, 청진, 원산, 진남포에 각각 위수사령부를 설치했다. 원산의 제2위수사령부(제588부대)는 4개 정대, 해안포병연대, 육전대로 편성되어 북한 해군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4]

맥아더 장군 역시 원산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원산이 동해안의 다른 항구보다 작전을 펼치기 유리하며, 철도와 도로망, 중공업 공장 시설 등을 통해 북한의 군수품 생산을 억제하고, 평양을 향해 서쪽으로 공격하거나 북쪽으로 진격하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5]

2. 1. 3. 한국전쟁 당시의 원산

1950년 6.25 전쟁 당시 원산은 부두, 크레인, 선박 정박 시설, 주요 철도 시설 및 해군기지를 갖춘 인구 10만의 대도시였다. 정유, 철도, 선박, 파이프 등 다양한 공장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원산 비행장이 있어 공군 기지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다.[4]

한국 전쟁 시기 원산에는 북한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북한 해군은 1949년 8월 해군 군관학교를 졸업한 약 200명의 기간 장교를 기반으로 청진에서 창설되었다. 이후 중앙기지를 원산으로 이전하고 청진, 원산, 진남포에 각각 위수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사실상 북한 해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제588부대로 지칭되었던 원산 제2위수사령부는 4개 정대와 해안포병연대, 육전대로 편성되었다.[4]

3. 작전 환경

한반도 해역은 수심이 낮아 기뢰원 형성이 쉽고, 진흙물 때문에 기뢰가 숨겨지기 좋은 환경이다. 북한 항구에서 기뢰를 띄워 보내면 15일 안에 한반도 주변 모든 연안에 도달할 수 있어, 상륙작전에 참여하는 한국군 함정에 큰 위협이 되었다.[6]

동해안은 수심이 깊고 조석간만의 차가 적으며, 해안이 가파르고 굴곡이 적어 기뢰 부설에 유리하다. 원산과 흥남 근해에는 기뢰 부설에 매우 효과적인 천수붕이 있었다.[7] 반면, 서해안은 해안선 굴곡이 심하고 수심이 얕아 기뢰 부설에 불리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8]

6.25 전쟁 당시 북한이 사용한 기뢰는 모두 소련에서 공급받은 것이며, 약 4,000개가 북한으로 유입되었다. 이 중 약 3,000개가 원산 근해에 부설되었고, 나머지는 진남포, 해주, 인천, 군산 등 서해안으로 이송되었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유엔군의 상륙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예상되는 모든 상륙 해안에 기뢰를 설치했고, 연안 해역에도 기뢰를 부설해 유엔 해군 함정의 함포 사격을 방해하고자 했다.

북한군은 어선이나 바지선궤도를 설치해 기뢰를 싣고 예인선으로 부설 장소까지 끌고 가 1분에서 1분 30초 간격으로 바지선 뒤에서 떨어뜨리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기뢰를 부설했다.

3. 1. 한반도 해안 지역의 지형적 특징

한반도 해역은 수심이 낮아 기뢰원 형성이 용이하고, 수질이 진흙물이어서 기뢰가 은닉되기 쉽다는 특징이 있다. 만약 북한 항구에서 기뢰를 해류에 띄워 보낸다면, 15일 이내에 한반도 주변 전 연안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기뢰는 상륙작전에 참가할 한국군 측 함정들을 위협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다.[6]

동해안은 수심이 깊고 조석간만의 차가 적다. 또한 해안이 가파르고 해안선의 굴곡이 적으며 육지 가까이까지 100패덤(1패덤은 1.8미터) 수심선이 위치하고 있다. 양항(良港)인 원산과 흥남 근해에는 기뢰부설에 매우 효과적인 천수붕(遷水棚, shelf)이 놓여 있었다.[7]

서해안은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수심이 얕아 60패덤 이상이 되는 곳이 없다. 평균 간만의 차는 약 6.40m여서 기뢰부설에는 불리한 조건이지만 기뢰 부설이 불가능하지는 않다.[8]

3. 2. 북한군의 기뢰 부설

한반도 해역은 수심이 낮아 기뢰가 숨겨지기 쉬운 환경이다. 북한 항구에서 기뢰를 띄워 보내면 15일 안에 한반도 주변 모든 연안에 도달할 수 있어, 상륙작전에 참여하는 한국군 함정에 큰 위협이 되었다. 특히 동해안은 수심이 깊고 조석간만의 차가 적으며, 해안선 굴곡이 적어 기뢰 부설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기뢰부설장면: 인력으로 기뢰를 적재한 후 예인선으로 부설장소에 예인해 1분 내지 1분 30초 간격으로 바지 후미에서 굴러 떨어뜨렸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이 사용한 기뢰는 모두 소련에서 제공한 것으로, 1950년 7월 10일에서 20일 사이에 블라디보스톡에서 철도를 통해 원산으로 옮겨졌다. 약 4,000개의 기뢰가 북한으로 들어왔으며, 그 중 약 3,000개가 원산 근해에 설치되었다. 나머지는 열차나 화물차를 이용해 진남포, 해주, 인천, 군산 등 서해안으로 운반되었다.[8]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유엔군의 상륙작전을 막기 위해 예상되는 모든 상륙 해안에 기뢰를 설치했다. 연안 해역에도 기뢰를 부설해 유엔 해군 함정의 함포 사격을 방해하고자 했다. 원산과 진남포 근해의 기뢰 부설은 8월 1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북한군이 설치한 접촉 기뢰는 설치 과정이 매우 단순하고 원시적이었다. 어선을 이용하거나 바지선(barge)궤도(track)를 설치해 10개에서 15개의 기뢰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인력으로 기뢰를 실은 후 예인선으로 부설 장소까지 끌고 가 1분에서 1분 30초 간격으로 바지선 뒤에서 떨어뜨리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약 3,000개의 기뢰가 3주 동안 원산항 근해에 부설되었다.[8]

3. 3. 기뢰로 인한 피해

한반도 해역은 수심이 낮고 진흙물이 많아 기뢰를 숨기기 쉽다. 북한 항구에서 기뢰를 해류에 띄워 보내면 15일 안에 한반도 주변 모든 연안에 도달할 수 있어, 상륙작전에 참가하는 한국군 함정에 큰 위협이 되었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이 사용한 기뢰는 모두 소련에서 공급받은 것으로, 1950년 7월 10일에서 20일 사이에 블라디보스톡에서 철도로 원산에 수송되었다. 약 4,000개의 기뢰가 북한으로 들어왔고, 그 중 약 3,000개가 원산 근해에 설치되었다. 나머지는 열차나 화물차로 진남포, 해주, 인천, 군산 등 서해안으로 옮겨졌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예상되는 모든 상륙 해안에 기뢰를 설치하여 유엔군의 상륙작전을 막으려 했다. 연안 해역에도 기뢰를 설치해 유엔 해군 함정의 함포사격을 방해하려 했다. 원산과 진남포 근해의 기뢰 설치는 8월 1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인천 상륙작전 이후 더욱 빨라졌다.

북한군은 어선을 이용하거나 바지선(barge)궤도(track)를 설치해 10개에서 15개의 기뢰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인력으로 기뢰를 싣고 예인선으로 설치 장소에 끌고 가 1분에서 1분 30초 간격으로 바지선 뒤에서 떨어뜨리는 단순하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기뢰를 설치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약 3,000개의 기뢰가 3주 동안 원산항 근해에 설치되었다[8].

1950년 10월, 원산만 상륙을 위해 작전을 펼치던 중 YMS급 516 뿐만 아니라, 509, 504는 기존에 부설되었던 기뢰로 폭발 피해를 입었다.


1950년 9월 4일 미 구축함 매킨함(McKean)이 서해의 진남포 입구에서 처음으로 적의 기뢰를 발견한 후, 300개가 넘는 기뢰가 한국 연안에서 발견되었다. 9월 4일부터 30일까지 유엔군 함정과 항공기는 총 54회의 기뢰를 발견했고, 대부분은 인천과 진남포 사이의 서해상에서 발견되었다.

1950년 9월 26일부터 10월 1일 사이에 기뢰로 인한 함정 피해가 잇따랐다.

날짜함정피해 내용인명 피해
9월 26일미 구축함 브러시함(Brush)단천 근해에서 해안포대 탐색 중 기뢰 접촉, 함 파손전사 13명, 부상 34명
9월 29일연안소해정 맥피정(Magpie)포항 근해에서 침몰실종 21명, 부상 12명
9월 30일미 구축함 맨스필드함(Mansfield)장전항에서 격추된 공군 조종사 탐색 중 기뢰 접촉, 함 파손부상 28명
9월 29일한국 해군 YMS-509정구룡포 근해에서 기뢰 접촉, 파손-
10월 1일YMS-504진도 근해에서 기뢰 접촉, 파손-


4. 작전 계획

서울 수복 이후, 맥아더 장군은 북진을 결정하고 원산 상륙 작전을 계획했다. 이 작전은 패주하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평양을 협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7] 미 해군의 조이 제독과 제7합동기동부대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은 추가적인 군수지원항으로 원산항 점령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인천 상륙 작전 계획과 유사한 형태로 원산 상륙 작전을 위한 해군 계획을 수립했다. 다만 스트러블 제독은 소해전대(TG 95.6)를 추가해 10월 9일에 최종 계획을 시달했다.[10]

원산 상륙 작전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지상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 작전적/전술적 적 중심 파괴로 유리한 여건 조성

# 적 퇴로 및 병참선 차단, 증원 거부

# 고착된 전선의 돌파

# 우회기동을 통한 작전적 또는 전술적 포위 달성

# 적 주위 전환 또는 기만 달성[11]

한국 전쟁 당시 발포 중인 위스콘신함의 16인치 함포. 원산 공격에도 참여했다.


한국 전쟁 당시 카데나 공군기지를 이륙해 작전중인 B-29 폭격기. 원산 공습에도 참여했다.


원산상륙작전을 위해 제7합동상륙기동부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었다.

제7합동상륙기동부대 (A.D Struble 미 해군 중장)
부대명/세력부대장
제7 합동상륙기동부대해군중장 A. D. Strubble
공격부대 (TF 90)해군소장 J. H. Doyle
제 10군단 (TF 92)육군 소장 E. M. Almond
선견부대 (TF 95)해군 소장 A. E. Smith
엄호 및 지원전단 (TG 95.2)해군 소장 C. C. Hartman
소해전대 (TG 95.6)해군 대령 R. T. Spofford
초계 및 정찰전단 (TG 96.2)해군 소장 G. R. Henderson
호위항모전단 (TG 96.8)해군 소장 R. W. Ruble
고속항모부대 (TF 77)해군 소장 E. C. Ewen
군수지원부대 (TF 79)해군 대령 B. C Austin



하지만, 북한의 동해안 방어 체계가 무너지고 한국 육군의 북진이 가속화되면서, 상륙 작전 대신 육로를 통한 원산항 공격이 더 효율적이라는 의견이 10월 초부터 제기되었다. 실무진에서는 육상과 해상 중 어떤 경로로 진격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검토하고 계획을 작성하고 있었다.[10]

원산 상륙 작전은 지상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연안 지역에서 연안 해상 기동 수단 및 항공기를 이용하여 접촉 중인 적 부대의 정면 또는 측후방으로 상륙하여 지상 작전 부대와 연결하는 기타 상륙 작전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통영 상륙 작전과 공통점이 있다. 연안 상륙 작전은 지상 작전 지원을 위한 것으로서 적시성, 신속성, 기습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적 해안 상 기뢰 및 각종 장애물에 대한 첩보는 반드시 확인되어야 하며 선견 부대에 의한 사전 소해 및 제거 작업은 기동이 완전 불가하지 않는 한 가급적 회피해야 하며 기뢰 및 해안 장애물의 위치만 표시하여 피해를 최소화하여야 한다.[11]

4. 1. 작전 수립 과정에서의 의견 충돌

인천 상륙 작전낙동강 방어선 반격 작전 성공 이후, 맥아더 사령부는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하여 북한군을 완전히 격멸하고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원산 상륙 작전이 핵심적인 부분으로 계획되었다.[17]

맥아더 지휘 예하 참모로서, 원산상륙작전에 대한 한계점을 지적하며 작전 수립과정에 참여하였다.


맥아더 사령부 내부에서는 원산 상륙 작전에 대한 찬반 논쟁이 있었다. 맥아더의 참모인 히키 장군과 라이트 장군제10군단제8군과 통합 작전을 수행하면 군수 지원이 더 쉬워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특히 해군은 제10군단의 해상 수송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해군은 제10군단이 해상으로 우회하는 것보다 육상으로 전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해군이 육상 이동을 선호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21]

  • 좁은 원산항에서 제10군단 병력과 제8군 보급품 하역이 겹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 제한된 함선과 상륙 주정으로 인해 다른 지역의 군수 지원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 예상보다 많은 기뢰가 발견될 경우 작전이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은 상륙 작전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확고한 의지 때문에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했다.[21]

4. 1. 1. 맥아더 장군의 명령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29일 미 합참에 북진 작전계획을 제출하고, 10월 2일 예하 부대에 하달했다.[22] 이 계획의 핵심은 미 제8군미 제10군단을 분리하여 운영하는 것이었다.

1) 미 제8군은 주공으로서 개성→사리원→평양 축선을 따라 공격한다.

2) 미 제10군단은 주공(미 제8군)이 공격을 개시한 뒤 1주일 이내에 동해안 원산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후 원산→평양 축선을 따라 서북으로 진출하여 미 제8군과 연결하며, 적의 퇴로를 차단 및 포위한다.

3) 유엔군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을 연결하는 선까지만 진격하고, 그 이북지역에 대한 작전은 국군이 전담한다.

맥아더 장군은 원산 상륙 작전을 통해 북진 작전을 성공시키고자 했다. 그가 미 제10군단을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켜 원산에 상륙시키려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23]

  • 북한 지역에서 가장 협소한 평양~원산을 연결하는 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다.
  • 평양에서 포위망을 구축하여 북한군을 격멸하고자 했다.
  • 태백산맥, 낭림산맥이 전선의 횡적 연결을 곤란하게 하고, 동서 지역 간 통신을 통한 작전 협조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독립적인 작전이 필요했다.
  • 군수 지원 면에서 전선이 낙동강에서 38도선으로 북상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 전 부대에 원활한 보급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원산항의 사용이 필수적이었다.

4. 1. 2. 작전 실시 명령

인천 상륙작전낙동강 방어선에서의 반격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유엔군은 9월 말 38도선 이남의 북한군을 격멸하고 전쟁 이전 상태를 회복했다. 서울 수복 이후, 국제사회는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할 것인지에 주목했다.[12]

한국 정부는 38도선 돌파 문제를 제기했고, 미국 내에서는 국무부국방부가 대립했다. 국무부는 중화인민공화국소련의 개입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 결정을 유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38도선 이북으로 북진 시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될 위험을 우려했다. 반면 국방부는 북한군을 완전히 분쇄하고 북한 점령이 필요하다는 맥아더 장군의 의견을 지지했다.[13]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NSC 81)에서 유엔군은 북한군 격퇴 후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개입이 없을 때에만 북진하고, 군사적 승리 후 유엔 주도로 한국 문제를 해결한다고 명시했다.[14]

미국 정부는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유엔군의 군사작전에 대한 정책(NSC 81-1)을 확정하고 9월 15일에 미 합참을 거쳐 맥아더 장군에게 하달했다. 미 합참은 유엔군사령관에게 북진에 대한 세부 지침('''9.27 훈령''')을 하달했는데, 핵심 내용은 유엔군의 38도선 돌파를 허용하지만, '''북한군 격멸'''만 해야 하며 '''소련 및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5]

9.27 훈령에 따라 38도선 돌파를 허가받은 맥아더 장군은 9월 29일에 구체적인 북진 작전계획을 미 합참에 제출했다.[16]

'''북진계획'''은 서부와 동부지역으로 나뉘었다. 서부에서는 미 제8군이 38도선을 돌파해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공격하고, '''동부에서는 미 제10군단이 주공 공격 1주일 이내 동해안 원산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하고, 원산-평양 축선을 따라 서북으로 진출해 미 제8군과 연결 및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하는 것이었다.[17]

이 계획은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이 있었다.[18]

'''1) 북한 정규군 와해'''

'''2) 소련이나 중국 참전 불가'''

이승만 대통령은 38도선 이북 돌파 필요성을 강조했다. 육군 총참모장(정일권 소장)은 미 8군사령관(워커 중장)에게 동해안 전선의 국군이 양양 북쪽 기사문리 일대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고 보고해 38도선 북쪽 기동 승인을 얻었다. 이를 근거로 국군 선두부대가 10월 1일 최초로 38도선을 돌파했다.[19]

결론적으로, '''원산상륙작전'''은 1950년 9월 29일 서울 수복 기념식 직후 맥아더 장군을 중심으로 북진 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며, 38도선 이북의 원산을 작전지로 한 계획 수립이 진행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9.27 훈령에 따라 1950년 9월 29일 구체적인 북진 작전계획을 미 합참에 제출하고, 10월 2일 예하부대에 하달했다. 북진 계획은 다음과 같다.[22]

1) 미 제8군은 주공으로서 38도선을 돌파한 뒤, 개성→사리원→평양 축선을 따라 공격한다.

2) 미 제10군단은 주공이 공격을 개시한 뒤 1주일 이내에 동해안 원산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후 원산→평양 축선을 따라 서북으로 진출하여 미 제8군과 연결하며, 적의 퇴로를 차단 및 포위한다.

3) 유엔군은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을 연결하는 선까지만 진격하고, 그 이북지역에 대한 작전을 국군이 전담한다.

맥아더 장군은 원산 상륙작전을 통해 북진 작전을 성공시키고자 했다. 미 제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켜 북한지역에서 가장 협소한 평양~원산을 연결해 전선을 형성하고, 평양에서 포위망을 구축해 북한군을 격멸하려 했다. 태백산맥, 낭림산맥이 횡적 연결을 어렵게 해 동서 지역 간 통신을 통한 작전협조가 불가능했기에 서부와 동부전선의 독립적인 작전이 필요했다. 군수지원 면에서도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 전 부대에 원활한 보급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원산항 사용이 필수적이었다.[23]

5. 작전 과정



맥아더미 제10군단원산에 상륙시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평양을 협공하려 했다. 미 해군의 조이 제독과 제7합동기동부대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은 군수지원항으로 원산항 점령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스트러블 제독은 소해전대(TG 95.6)를 추가, 10월 9일 최종 계획을 지시했다.

원산상륙작전을 위한 제7합동상륙기동부대의 기동편성은 아래와 같다.

원산상륙작전 기동부대 편성
부대명/세력부대장
제7합동상륙기동부대 (Joint Task Force 7)해군중장 A. D. Strubble
공격부대 (Task Force 90)해군소장 J. H. Doyle
제10군단 (Task Force 92)육군 소장 E. M. Almond
선견부대 (Task Force 95)해군 소장 A. E. Smith
엄호 및 지원전단 (Task Group 95.2)해군 소장 C. C. Hartman
소해전대 (Task Group 95.6)해군 대령 R. T. Spofford
초계 및 정찰전단 (Task Group 96.2)해군 소장 G. R. Henderson
호위항모전단 (Task Group 96.8)해군 소장 R. W. Ruble
고속항모부대 (Task Force 77)해군 소장 E. C. Ewen
군수지원부대 (Task Force 79)해군 대령 B. C Austin



원산상륙작전은 지상작전 지원을 위해 연안에서 해상 기동 수단 및 항공기로 적 부대 정면 또는 측후방에 상륙, 지상작전부대와 연결하는 기타상륙작전이라는 점에서 통영상륙작전과 유사하다.

원산상륙작전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 '''작전적/전술적 적 중심 파괴로 유리한 여건 조성'''

# '''적 퇴로 및 병참선 차단, 증원 거부'''

# '''고착된 전선의 돌파'''

# '''우회기동을 통한 작전적 또는 전술적 포위달성'''

# '''적 주위 전환 또는 기만 달성'''

연안상륙작전은 지상작전 지원이 목적이므로, 적시성, 신속성, 기습성이 중요하며, 적 해안 기뢰 및 장애물 정보 확인이 필수적이다. 선견부대의 사전 소해 및 제거는 기동 불가 상황이 아니면 회피하고, 기뢰 및 해안장애물 위치만 표시하여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11]

10월 초, 한국군이 동해안을 따라 빠르게 북진하면서 육상과 해상 진격 중 어느 쪽이 효과적인지 실무진에서 검토했다.

국군통수권자이승만 대통령의 결심으로 국군 제1군단의 제3사단과 수도사단은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했다.[25] 이들은 10월 1일 양양, 10월 3일 간성을 점령하고, 10월 10일 수도사단과 함께 원산 시가지에 진격, '''1950년 10월 11일 원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27] 국군 제1군단은 하루 평균 26km 속도로 진격, 신고산 점령 후 북한군 소총 8,000여 정과 전차 4대를 비롯한 많은 무기와 의약품을 노획했다.[29]

5. 1. 여건 조성 작전 (국군의 동부전선 북진)

1950년 9월 말, 38도선 북진에 관해 대한민국과 미국 간 논쟁이 벌어지던 시기에, 국군통수권자이승만 대통령의 단독 결심과 육군 참모장의 결정에 따라 국군 제1군단 소속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10월 1일 38도선 돌파를 감행하면서 원산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25]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9월 29일 서울 환도식을 마친 뒤 북진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육군 총참모장(당시 정일권 소장)은 동부전선 최북단에 있던 국군 제1군단에 연락하여 진격에 방해되는 요소가 있는지 물었고, 국군 제3사단 정면 양양 측면에 방해 요소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육군 총참모장은 즉시 미 제8군 사령관(당시 워커 중장)에게 "제3사단이 38도선 북방 요지(하조대-양양 남쪽)에서 사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 있으니, 38도선 지상에 뚜렷한 경계도 없는 만큼 공격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워커 장군은 이를 즉시 승인했고, 1950년 9월 30일 현장 시찰 직후 "북진하라!"는 명령을 구두로 하달했다.

국군은 1950년 10월 1일 오전 5시에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를 선두로 38도선을 돌파하였다.[26]

5. 2. 원산 탈환 작전 (양양-간성-원산 진출, 점령)

1950년 9월 말, 대한민국과 미국 간에 38도선 북진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국군통수권자이승만 대통령의 단독 결심과 육군 참모장의 결정에 따라 국군 제1군단의 제3사단과 수도사단이 10월 1일 38도선 돌파를 감행하면서 원산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25]

1950년 9월 29일, 서울 환도식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명령을 하달하였다. 육군 총참모장(당시 정일권 소장)은 미 제8군 사령관(당시 워커 중장)에게 38도선 북방 요지에서 사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 있으니 이를 공격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워커 장군이 승인하면서 1950년 9월 30일 현장 시찰 직후 구두로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를 선두로 1950년 10월 1일 오전 5시에 38도선을 돌파하였다.[26] 같은 날 14시, 국군 제3사단이 양양을 정면으로 돌입하면서 동시에 제3사단 서측으로 수도사단 제18연대가 양양에 동시에 입성하였다. 이어서 1950년 10월 3일에는 간성을 점령하였고, 1950년 10월 9일 원산 외곽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1950년 10월 10일 수도사단과 함께 공격을 개시하여 원산 시가지에 진격하였다. 곧이어 '''1950년 10월 11일, 원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27]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은 하루 평균 26km 속도로 진격을 계속 하였으며, 보급 사정이 나빠 제대로 된 전투화도 못 신은 채 맨발을 헝겊으로 감싼 채로 진격을 실시하였다. 국군은 강원선과 원산~김화 간 도로 그리고 세포, 평강, 법동 등 도의 남부, 서부 지역으로 통하는 큰길이 분리되는 교통요지[28]인 신고산을 점령한 이후 북한군의 각종 소총 8,000여 정과 전차 4대를 비롯해 많은 무기와 의약품을 노획하였다.[29]

5. 3. 원산상륙작전 (미 제10군단 상륙 작전)

맥아더의 구상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원산 상륙을 통해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평양을 협공하려 했다. 미 해군의 조이 제독과 제7합동기동부대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은 군수지원항으로 원산항 점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스트러블 제독은 소해전대(TG 95.6)를 추가해 10월 9일 최종 계획을 하달했다.

원산상륙작전을 위한 제7합동상륙기동부대의 기동편성은 다음과 같다.

원산상륙작전 기동부대 편성
부대명/세력부대장
제7합동상륙기동부대 (Joint Task Force 7)해군중장 A. D. Strubble
공격부대 (Task Force 90)해군소장 J. H. Doyle
제10군단 (Task Force 92)육군 소장 E. M. Almond
선견부대 (Task Force 95)해군 소장 A. E. Smith
엄호 및 지원전단 (Task Group 95.2)해군 소장 C. C. Hartman
소해전대 (Task Group 95.6)해군 대령 R. T. Spofford
초계 및 정찰전단 (Task Group 96.2)해군 소장 G. R. Henderson
호위항모전단 (Task Group 96.8)해군 소장 R. W. Ruble
고속항모부대 (Task Force 77)해군 소장 E. C. Ewen
군수지원부대 (Task Force 79)해군 대령 B. C Austin



원산상륙작전은 지상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연안에서 해상 기동 수단 및 항공기를 이용, 적 부대의 정면 또는 측후방에 상륙하여 지상작전부대와 연결하는 기타상륙작전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통영상륙작전과 공통점이 있다.

원산상륙작전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 '''작전적/전술적 적 중심 파괴로 유리한 여건 조성'''

# '''적 퇴로 및 병참선 차단, 증원 거부'''

# '''고착된 전선의 돌파'''

# '''우회기동을 통한 작전적 또는 전술적 포위달성'''

# '''적 주위 전환 또는 기만 달성'''

연안상륙작전은 지상작전 지원을 위한 것으로, 적시성, 신속성, 기습성이 중요하며, 적 해안의 기뢰 및 장애물 정보가 반드시 확인되어야 한다. 선견부대의 사전 소해 및 제거 작업은 기동이 불가능하지 않다면 가급적 회피하고, 기뢰 및 해안장애물의 위치만 표시하여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11]

10월 초, 한국군이 동해안을 따라 빠르게 북진하면서 육상과 해상 중 어느 쪽으로 진격하는 것이 효과적인지에 대한 검토가 실무진에서 이루어졌다.

국군통수권자이승만 대통령의 결심에 따라 국군 제1군단의 제3사단과 수도사단은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했다.[25] 이들은 10월 1일 양양, 10월 3일 간성을 점령하고, 10월 10일 수도사단과 함께 원산 시가지에 진격, '''1950년 10월 11일 원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27] 국군 제1군단은 하루 평균 26km의 속도로 진격했으며, 신고산 점령 후 북한군의 소총 8,000여 정과 전차 4대를 비롯한 많은 무기와 의약품을 노획했다.[29]

5. 3. 1. 작전 준비 (병력, 보급 물자 준비)

맥아더 장군 및 유엔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원산 상륙작전을 통해 북진작전을 조기에 종결시키고자 하였다. 미 제10군단 소속 제1해병사단은 1950년 10월 16일 인천에서 상륙함정에 승선하여 출항하였고, 제7사단은 철도와 차량을 이용해 부산으로 이동, 1950년 10월 17일에 승선 및 물자 적재를 마쳤다.[30]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병력 승선이 지연되었고, 미 제10군단의 병력 및 장비 승선과 수송으로 인해 미 8군의 보급 노선인 인천과 부산의 보급 기능이 2주 이상 마비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31] 이는 보급 추진에 지장을 주어 차후 미 제8군의 계획에 차질을 초래했다.[31]

5. 3. 2. 작전 개시 (기뢰 소해작전~원산 상륙)

1950년 9월 4일, 미 구축함 매킨함이 서해 진남포 입구에서 적의 기뢰를 처음 발견한 이후 한국 연안에서 300개가 넘는 기뢰가 발견되었다. 미 극동해군사령관과 미 7함대사령관은 원산상륙작전에 앞서 기뢰로 인한 위협을 우려했다. 9월 26일부터 10월 1일 사이에 기뢰로 인한 함정 피해가 잇따랐다. 미 구축함 브러시함은 동해 단천 근해에서 기뢰 접촉으로, 미 연안소해정 맥피정은 포항 근해에서 침몰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 구축함 맨스필드함도 동해 장전항에서 기뢰 접촉으로 피해를 입었다. 한국 해군 함정도 기뢰 접촉으로 피해를 입었는데, YMS-509정이 9월 29일 구룡포 근해에서, YMS-504정이 10월 1일 진도 근해에서 기뢰 접촉으로 파손되었다.[9]

맥아더 장군 및 유엔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원산 상륙작전을 통해 북진작전을 조기에 종결시키려 했다. 미 제10군단의 제1해병사단은 인천에서 1950년 10월 16일에 상륙함정 승선을 마치고 출항했으며, 미 제7사단은 철도와 차량을 이용해 부산으로 이동하여 1950년 10월 17일에 승선 및 물자 적재를 마쳤다.[30] 그러나 병력 승선 지연, 미 제10군단의 병력 및 장비 수송으로 인해 미 8군의 보급 노선인 인천과 부산의 보급 기능이 2주 이상 마비되는 등 보급 추진에 차질이 발생했다. 또한 국군 1군단이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여 원산을 조기 점령할 것이라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 계획 일정이 어긋나게 되었고, 결국 원산상륙작전은 행정적인 상륙으로 변질되었다.[31]

1950년 10월 10일 국군 1군단이 원산에 진격하여 다음날 원산을 점령했지만, 미 해병1사단과 미 제7사단은 예정대로 10월 20일에 원산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유엔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원산항 부근에 32척의 기뢰 부설선을 동원하여 3,000여 기의 기뢰를 10월 4일까지 설치하여 상륙을 방해했다.

유엔군은 10월 10일부터 가용한 모든 소해함정을 동원하여 소해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했고, 일본 소해정 8척과 국군 해군 704 · 516 · 510 · 영등포함이 작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10월 13일 미 해군 소해정 2척, 10월 18일 국군 해군 516함과 일본 소해정 19호가 기뢰에 접촉하여 폭발하고, LST 영등포함은 대파되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UDT 대원들의 기뢰 위치 확인 및 부표 작업, 현지 주민들의 정보를 토대로 소해작전은 계속 진전을 보였고, 마침내 소해작전은 시작한 지 2주가 지난 1950년 10월 25일 오후에 종료되었다.[32]

6. 세부 작전 분석: 영흥만 소해 작전

1950년 9월 26일부터 10월 1일 사이, 기뢰에 의한 함정 피해가 잇따랐다. 9월 26일 미 구축함 브러시함(Brush)은 단천 근해에서 기뢰에 접촉, 함이 파손되어 전사자 13명, 부상자 34명이 발생했다. 9월 29일에는 미 연안소해정 맥피정(magpie)이 포항 근해에서 침몰, 실종 21명, 부상 12명이 발생했고, 9월 30일 미 구축함 맨스필드함(Mansfield)도 장전항에서 기뢰 접촉으로 함이 파손되고 부상자 28명이 발생했다.[9]

한국 해군 함정 역시 기뢰 접촉으로 피해를 입었다. YMS-504정이 10월 1일 진도 근해에서 기뢰에 접촉하여 파손되었다.[9]

1950년 10월 10일, 국군 제1군단이 원산을 점령한 후, 미 해병대 제1사단과 미 제7사단은 10월 20일 원산 상륙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유엔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원산항 부근에 32척의 기뢰 부설선을 동원, 10월 4일까지 3,000여 기의 기뢰를 설치하여 상륙을 방해했다.

유엔군은 원산항의 기뢰로 인해 상륙이 어려워지자, 10월 10일부터 가용한 모든 소해함정을 동원하여 소해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했다. 일본 소해정 8척과 국군 해군 704, 516, 510, 영등포함정이 작전에 참가했으나, 10월 13일 미 해군 소해정 2척이 침몰하고, 10월 18일에는 국군 해군 516함과 일본 소해정 19호가 기뢰에 접촉, 폭발하고 LST 영등포함이 대파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UDT 대원들의 기뢰 위치 확인, 부표 설치 작업과 현지 주민들의 정보 제공으로 소해 작전은 진전을 보였고, '''1950년 10월 25일 오후, 작전 시작 2주 만에 종료'''되었다.[32]

6. 1. 소해 작전 지역 선정

상공에서 찍은 영흥만

6. 2. 전투 부대 및 주요 함정 배치

원산 상륙 작전에 투입된 소해함정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35]

유형설명주요 함정주요 임무
소해구축함(DMS)태평양사령부 소속 4척 투입, 태평양함대 세력 보완엔디코트(USS Endicott, DMS-35), 도일(USS Doyle, DMS-34)항모 경계, 호송, 보급, 연안 경계, 함포 지원
철제 함대소해함(AM)4척 중 플레지(Pledge, AM-277) 즉시 가동, 파이어러트(USS Pirate), 인크레더블(USS Incredible) 재취항플레지(Pledge, AM-277), 파이어러트(USS Pirate), 인크레더블(USS Incredible), 메인스테이(USS Mainstay)사세보-부산 간 호송, 소해, 인천 상륙 작전 지원
목제 연안소해함(AMS)14척 샌디에고, 진주만, , 일본 배치, 일본 배치 함정은 제3소해전대장 작전 통제사세보, 부산, 진해 간 소해 및 호송, 항만 통제, 인천 상륙 작전 지원, 동해안 기뢰 탐색



10월 10일, 경순양함 워체스터(USS Worchester, CL-144) 소속 헬기가 투입되어 기뢰 정보를 제공했으며, 같은 날 파이어러트, 레드헤드(Redhead), 채터러(Chatterer)함이 증원되었다.[36]

6. 3. 기뢰부설 해역에서 상륙해안으로의 접근 시도

북한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유엔군의 상륙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예상되는 모든 상륙 해안에 기뢰를 설치하였다. 특히 원산 근해에는 1950년 8월 1일부터 기뢰 부설이 시작되었고,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더욱 가속화되어 약 3,000개의 기뢰가 3주 동안 부설되었다.[8] 기뢰 부설에는 어선이나 바지선(barge)이 이용되었으며, 인력으로 기뢰를 적재한 후 예인선으로 부설 장소까지 예인하여 1분에서 1분 30초 간격으로 바다에 떨어뜨리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1950년 10월 10일, 미 해병 1사단과 미 제7사단의 원산 상륙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원산항의 기뢰로 인해 상륙이 어려워졌다. 유엔군은 10월 10일부터 소해함정을 동원하여 소해작전을 펼쳤지만, 10월 13일 미 해군 소해정 2척이 침몰하고, 10월 18일에는 국군 해군 516함과 일본 소해정 19호가 기뢰에 접촉하여 폭발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LST 영등포함은 대파되었다.

스트러블 제독은 10월 2일, 스포퍼드 대령에게 소해 준비를 완료하고 영흥만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10월 6일, 미 해군 소해함정 6척이 사세보항을 출발하여 10월 10일 새벽 영흥만에 도착했다.[34]

10월 10일부터 경순양함 워체스터(USS Worchester, CL-144) 소속 헬기와 함께 원산항 남쪽 항로에 대한 소해 작전이 시작되었다. 헬기는 기뢰 정보를 제공했고, 소해함정은 이를 바탕으로 기뢰 위치를 확인했다. 스포퍼드 대령은 상륙 시기를 맞추기 위해 북쪽 항로로 소해 작전을 변경하고, 10월 11일 원산항 입구에 대한 소해 탐색에 집중했다.

10월 10일 오후, 파이어러트, 레드헤드(Redhead), 채터러(Chatterer)함이 증원되었다. 10월 11일과 12일 자정 회의에서 지휘관들은 상륙 작전 목표일 이전에 소해 작전을 완료할 것을 다짐했다.[36]

UDT 대원들의 기뢰 위치 확인 작업과 현지 주민들의 정보 제공으로 소해 작전은 진전을 보였고, 1950년 10월 25일 오후에 마침내 종료되었다.[32]

미군 전투기 더글러스 A-1 스카이레이더(Skyraider)


미국 보우트 사가 개발한 함상 전투기 F4U Corsair

7. 작전 결과

국군은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후 빠른 속도로 북진하여 10월 11일 원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27] 국군 제1군단은 하루 평균 26km를 진격하는 놀라운 속도를 보였으나, 보급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28] 맥아더 장군은 미 제10군단에게 최대한 빨리 국경선까지 진격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미군은 원산-함흥 지역을 확보하고 북쪽으로 진출하려 했다.[39]

그러나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소련군의 개입 가능성을 간과한 채 겨울이 오기 전에 북한 전역을 점령하려는 무리한 판단을 내렸다. 이로 인해 서부전선의 미 제8군과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넓은 간격을 둔 채 국경으로 진격하였고, 이는 결국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1·4 후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40]

침몰하는 한국해군함정 AMS-516


원산 상륙 작전 과정에서 기뢰로 인한 피해도 컸다. 1950년 9월 말부터 10월 초 사이에 미군 함정과 한국 해군 함정이 기뢰에 접촉하여 피해를 입었다.[9] 10월에는 소해함정을 동원한 소해작전이 시작되었으나, 미 해군 소해정 2척과 국군 해군 516함, 일본 소해정 등이 기뢰에 의해 침몰하거나 파손되었다. 영흥만 소해작전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예상치 못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41]

7. 1. 작전 성공 이후 (상륙 후)

국군은 1950년 10월 1일 오전 5시에 38선을 돌파한 이후 같은 달 14시에 양양에 도달하였다. 국군 제3사단과 수도사단 제18연대가 함께 양양에 입성하였다. 이어서 10월 3일에는 간성을 점령하였고, 10월 9일 원산 외곽에 도달하였다. 10월 10일 수도사단과 함께 공격을 개시하여 원산 시가지에 진격하였다. '''1950년 10월 11일, 원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27]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은 하루 평균 26km 속도로 진격하였다. 보급 사정이 나빠 전투화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맨발에 헝겊을 감은 채 진격해야 했다. 국군은 강원선과 원산~김화 간 도로, 세포, 평강, 법동 등 도의 남부, 서부 지역으로 통하는 큰길이 분리되는 교통요지[28]인 신고산을 점령하고, 북한군의 소총 8,000여 정과 전차 4대를 비롯해 많은 무기와 의약품을 노획하였다.[29]

맥아더 장군은 원산 상륙이 임박하던 1950년 10월 24일, 미 제10군단장(당시 알몬드 소장)에게 예하 부대를 모두 동원하여 최대한 빨리 국경선까지 진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사단을 투입하여 원산~함흥 지역을 확보하고, 장진호, 부전호, 풍산 방향으로 진출하려 하였다.[39]

유엔군사령부는 겨울이 오기 전 북한 전 지역을 점령하려 하였고, '중국소비에트 연방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후에 명백한 착오로 밝혀진) 판단 하에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하였다. 서부전선은 미 제8군이, 동부전선은 미 제10군단이 희천과 장진호 사이의 약 80km 간격에 대한 대비책 없이 국경을 향해 진격하였는데, 이는 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처참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40]

7. 2. 피해 현황



1950년 9월 26일부터 10월 1일 사이에 기뢰로 인한 함정 피해가 속출했다. 미 구축함 브러시함(Brush)은 단천 근해에서 기뢰 접촉으로 전사자 13명, 부상자 34명이 발생했고, 미 연안소해정 맥피정(magpie)은 포항 근해에서 침몰되어 실종 21명과 부상 12명의 피해를 입었다. 미 구축함 맨스필드함(Mansfield)도 장전항에서 기뢰 접촉으로 부상자 28명이 발생했다. 한국 해군도 YMS-509정이 9월 29일 구룡포 근해에서, YMS-504정이 10월 1일 진도 근해에서 기뢰 접촉으로 파손되었다.[9]

1950년 10월 10일부터 소해함정을 동원한 소해작전이 시작되었으나, 10월 13일 미 해군 소해정 2척(USS Pirate, Pledge)이 기뢰에 접촉하여 침몰하였고, 10월 18일에는 국군 해군 516함과 일본 소해정 19호(JMS-19)가 기뢰에 접촉하여 폭발하고, LST 영등포함은 대파되었다.

영흥만 소해작전으로 유엔군 및 국군에 예상치 못한 피해가 발생했다. 구체적으로, 유엔함정 2척, 한국해군함정 2척, 일본 소해정 1척이 기뢰에 의해 침몰했다. 미 소해함 침몰로 92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12명이 전사, 부상자 중 1명이 사망하였다. 한국 소해정 침몰로 15명이 전사하였고 11명이 중상을 입었다.[41]

8. 평가

원산 상륙 작전은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가 엇갈린다. 맥아더는 패주하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평양을 협공하고자 했다. 미 해군도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원산항 점령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작전을 준비했다.[10]

원산 상륙 작전을 위해 편성된 제 7합동기동부대(A.D Struble 미 해군 중장)의 주요 부대는 다음과 같다.


  • '''TF 90''' 공격부대 (J.H Doyle 미 해군 소장)
  • '''TF 92''' 제 10군단(E.A Almond 미 육군 소장)
  • '''TF 95''' 선견부대(A.E Smith 미 해군 소장)
  • '''TG 95.2''' 엄호 및 지원전대(C.C Hartman 미 해군 소장)
  • '''TG 95.6''' 소해전대(R.T Spofford 미 해군 대령)
  • '''TG 96.2''' 초계 및 정찰전대(G.R Henderson 미 해군 소장)
  • '''TG 96.8''' 호위항모전대(R.W Ruble 미 해군 소장)
  • '''TF 97''' 고속항모부대(E.C Ewen 미 해군 소장)
  • '''TF 99''' 군수지원부대(B.C Austin 미 해군 대령)


상륙함은 상륙작전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차상륙함, 도크형상륙함, 강습상륙함 등이 있으며, 독도함, 천왕봉함이 대표적이다.[10]

원산 상륙 작전을 위한 제7합동상륙기동부대의 기동 편성은 다음과 같다.

부대명/세력부대장
Joint Task Force 7, 제7 합동상륙기동부대해군중장 A. D. Strubble
Task Force 90, 공격부대해군소장 J. H. Doyle
Task Force 92, 제 10군단육군 소장 E. M. Almond
Task Force 95, 선견부대해군 소장 A. E. Smith
Task Group 95.2 엄호 및 지원전단해군 소장 C. C. Hartman
Task Group 95.6 소해전대해군 대령 R. T. Spofford
Task Group 96.2 초계 및 정찰전단해군 소장 G. R. Henderson
Task Group 96.8 호위항모전단해군 소장 R. W. Ruble
Task Force 77, 고속항모부대해군 소장 E. C. Ewen
Task Force 79, 군수지원부대해군 대령 B. C Austin



원산 상륙 작전은 지상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연안 지역에서 해상 기동 수단 및 항공기를 이용하여 적 부대의 정면 또는 측후방으로 상륙하여 지상 작전 부대와 연결하는 기타 상륙 작전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통영상륙작전과 공통점이 있다.

원산 상륙 작전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지상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 '''작전적/전술적 적 중심 파괴로 유리한 여건 조성'''

# '''적 퇴로 및 병참선 차단, 증원 거부'''

# '''고착된 전선의 돌파'''

# '''우회기동을 통한 작전적 또는 전술적 포위 달성'''

# '''적 주위 전환 또는 기만 달성'''

연안 상륙 작전은 지상 작전 지원을 위한 것으로, 적시성, 신속성, 기습성이 중요하며, 적 해안의 기뢰 및 장애물에 대한 첩보가 반드시 확인되어야 한다. 선견 부대에 의한 사전 소해 및 제거 작업은 기동이 불가능하지 않는 한 회피해야 하며, 기뢰 및 해안 장애물의 위치만 표시하여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11]

하지만, 10월 초부터 한국군이 동해안을 따라 빠른 속도로 북진하면서, 육로를 통한 원산항 공격이 더 현명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27]

맥아더는 1950년 10월 24일 미 제10군단장에게 모든 부대를 동원해 최대한 빨리 국경선까지 진격하라고 지시했다. 미 제10군단은 원산과 함흥 지역을 확보하고 장진호 등지로 진출하려 했다.[39]

유엔군사령부는 겨울이 오기 전 북한 전 지역을 점령하려 했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판단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착오였으며, 서부전선의 미 제8군과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희천과 장진호 사이의 간격에 대한 대비 없이 진격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처참한 결과를 맞게 되었다.[40]

8. 0. 1. 북한 지역의 지리적 여건 미고려

북진 계획 수립 시 동부 축선은 국군 및 유엔군이 북상함에 따라 정면이 확대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아 전투력이 분산되어 공격을 집중할 수 없었다. 맥아더는 작전 수립 당시 한반도가 동서로 양분[42]된 지형조건을 갖고 있어 지휘 단일화가 어렵다고 판단, 서부축선과 동부축선을 분할하여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원적 작전지휘권은 부대 간 협조를 어렵게 하고, 침투공간을 제공하여 북한군이 공세로 전환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8. 0. 2. 작전지속지원 미고려

북진 계획 수립 시 동부 축선은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이 북상함에 따라 정면이 확대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아, 전투력이 분산되어 공격 집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1]

8. 0. 3. 기뢰 제거 작업 작전의 성공

미 8군 지휘권 통합 시 인천항에 대한 보급 기지 의존도가 과도하고 경부 육상 보급로 상태가 불량함에 따라 원산항을 확보함으로써 보급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최초 목표였다. 그러나 원산의 지정학적 이점 등으로 원산을 반드시 사수하고자 했던 북한군의 철저한 대비로, 유엔군 측은 상륙 준비와 보급 하역의 상충으로 작전 지속 지원이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국군 및 유엔군의 북진 작전을 실시함에 따라 보급선이 연장되게 되었고, 작전 지속 지원 능력은 더욱 약화되었다.[43]

8. 0. 4. 국군의 성공적인 여건 조성 작전

국군은 1950년 10월 1일 오전 5시에 38도선을 돌파한 후 같은 날 14시에 양양에 도달하였다. 국군 제3사단이 양양을 정면으로 돌입하면서 동시에 제3사단 서측으로 수도사단 제18연대가 양양에 진입하였다. 이어서 10월 3일에는 간성을 점령하였고, 10월 9일 원산 외곽에 도달하였다. 10월 10일 수도사단과 함께 공격을 개시하여 원산 시가지에 진격하였다. '''1950년 10월 11일, 원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27]

동부전선의 국군 제1군단은 하루 평균 26km 속도로 진격했으며, 보급 사정이 나빠 전투화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맨발에 헝겊을 감은 채로 진격했다. 국군은 강원선과 원산~김화 간 도로, 세포, 평강, 법동 등 도의 남부, 서부 지역으로 통하는 큰길이 분기되는 교통 요지[28]인 신고산을 점령하고 북한군의 소총 8,000여 정과 전차 4대를 비롯한 많은 무기와 의약품을 노획하였다.[29]

국군 제 1군단과 예하 3사단, 수도사단은 양양에서 원산 일대까지 신속하게 진격하여 원산 점령에 기여하였다. 38도선 돌파 이후 3사단은 북한군의 후퇴 속도를 앞지르는 빠른 속도로 동해안 가도를 따라 10월 3일에 간성, 6일에 통천, 7일에 패천, 8일에 쌍음까지 진격하였다.

국군 제 1군단은 원산 일대까지 신속하게 진격하였으나, 북한군은 원산의 전략적, 전술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각지의 패잔병들을 합류시켜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의 협동 공격 작전으로 원산 시가지 중심부를 점령함으로써 원산 상륙이 가능하게 되었다.

원산 점령 후, 국군은 원산 일대를 경비하면서 미 제10군단의 원산 상륙을 엄호하여 상륙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지원했다.

8. 0. 5. 결정적인 기회에 전투력 집중 미흡

북한군은 소련에서 수입해온 기뢰를 사용하여 상륙을 저지하고자 했다.[1] 1950년 10월, 북한군은 원산 앞바다에 기뢰를 부설하여 항구를 봉쇄했다.[1] 주로 사용된 기뢰는 계류 기뢰(moored mines)나 부류 기뢰(floating mines)였다.[1]

동해는 서해와 달리 바닷물이 맑아 수중에 있는 기뢰를 맨눈으로도 식별할 수 있었다.[1] 따라서 수상 비행기헬리콥터를 이용하면 더 넓은 범위를 단시간에 정찰할 수 있었다.[1]

북한군은 소련에서 수입해온 기뢰를 사용하여 상륙을 저지하고자 했다.

8. 0. 6. 성급한 전쟁 종결 준비

국군 제 1군단과 예하 3사단, 수도사단은 성공적인 작전 수행으로 양양에서 원산 일대까지 신속하게 진격하여 원산 점령에 기여하였다. 38도선 돌파 이후 3사단은 북한군의 후퇴 속도를 앞지른 신속한 진격 속도로 동해안 가도를 따라 10월 3일에 간성, 6일에 통천, 7일에 패천, 8일에 쌍음까지 진격하였다.[1]

북한군은 원산의 전략적, 전술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각지의 패잔병들을 합류시켜 완강하게 사수하려 하였으나,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의 협동 공격 작전으로 원산 시가지 중심부를 점령하여 국군이 원산에 상륙할 수 있었다.[1]

이후 국군은 원산 일대를 경비하면서 미 제10군단의 원산 상륙을 엄호하여 상륙작전을 지원하였다.[1]

8. 0. 7. 적정 파악 미흡



병력이 한반도 남쪽으로 빙 둘러 원산으로 파견되어 북진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병력의 유휴화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는 원산 상륙 작전이 작전 지연에 따른 시간 낭비로 이어진 한계점으로 작용했다.

적절한 장비와 훈련받은 인원이 갖춰지지 않은 기뢰 제거 작업은 시간이 지연될 것이 예상되었음에도 무리하게 추진되었다. 작전 역시 느리게 전개되어 공격 작전의 신속성을 잃었고, 사실상 전략적, 전술적 가치를 상실했다. 미 해군은 공산군의 해군 전력이 거의 없다고 간주했으나, 예상치 못한 수많은 기뢰 부설로 인해 작전이 지연되고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유엔군 측 상황은 해당 작전을 맡았던 테스크 포스 95의 지휘관 알렌 스미스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무기를 사용하며 해군이 없는 나라에 바다의 지배권을 빼앗겼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8. 0. 8. 원산 점령의 성공

맥아더 장군은 원산 상륙이 임박하던 1950년 10월 24일 미 제10군단장(당시 알몬드 소장)에게 예하의 모든 부대를 동원하여 최대한 빠른 속도로 국경선까지 진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상륙 부대인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사단을 투입하여 원산~함흥 지역을 확보하고, 장진호, 부전호, 풍산 방향으로 진출하려고 하였다.[39]

유엔군사령부는 겨울이 오기 전 북한 전 지역을 점령하려 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착오였다. 서부전선은 미 제8군이, 동부전선은 미 제10군단이 희천과 장진호 사이의 약 80km 간격에 대한 대비책 없이 국경을 향해 진격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으로 처참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40]

중국군 개입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북진 작전 계획은 북한의 열세로 인한 중공군의 개입을 부추겼다는 평가도 존재한다.[45]

8. 0. 9. 6.25전쟁과 원산상륙작전에 따른 가치 훼손

유엔군은 상륙작전을 위해 기뢰 제거 작업을 실시하였으나 북한군이 설치한 수많은 기뢰 때문에 원산을 오가는 해상길이 막혔다.[46]

소해정에서 기뢰를 부설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소해정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미 해군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예산 삭감으로 제대로 된 소해정과 기뢰 제거 병력이 부족했다. 한국 전쟁에서 새롭게 전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헬리콥터를 기뢰 탐지 작업에 동원하고, 자위 전쟁 외에는 참전할 수 없는 일본으로부터 소해 부대와 장비를 지원받아 간신히 원산항까지 이르는 항로를 개척했을 때는 이미 상륙 예정일(D-day)로부터 10일이나 지난 후였다.[46]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전염병에 노출된 채 선박 안에서 불안한 날을 보내야 했던 유엔군 해군은 지연된 기간 동안 바다 위를 왕복해야 했고, 이후 원산 상륙을 ‘요요 작전(Operation yo-yo)’이라 불렀다. 상륙 작전 이후에도 다 제거하지 못한 기뢰는 전쟁 기간 원산 앞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을 계속 위협했다.[46]

8. 0. 10. 작전 지연에 따른 차후 작전의 차질

원산은 해안가를 중심으로 선박, 철도, 항만 등 근대적 교통 시설이 발달하면서 도시 상업이 성장했다. 항만, 부두, 해벽 같은 접안 시설과 창고 등 저장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한 경원선 철도와 동해횡단항로를 통해 육상과 해상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이므로, 원산 상륙 작전으로 원산을 점령한 것은 이후 작전 계획 수립과 효과적인 작전 수행을 위한 여건을 조성했다는 의의가 있다.

9. 원산상륙작전의 시사점

한반도가 대한민국과 북한으로 분단된 후, 원산 상륙 작전이 계획되자 유엔군의 상륙작전을 막기 위해 북한은 기뢰를 설치했다. 유엔군은 기뢰 제거 작업을 실시했으나, 북한군이 설치한 수많은 기뢰로 인해 원산으로 가는 바닷길이 막혔다.[1]

참조

[1] 서적 두 도시 이야기(서울,평양 그리고 속초,원산) 중앙북스 2019-06-10
[2] 문서
[3] 서적 6.25전쟁 주요전투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12-28
[4] 저널 한국전쟁기 유엔군의 원산 상륙작전과 철수작전을 통해 본 해상수송 2022
[5] 서적 한국전쟁과 미국 해군 한국해양전략연구소
[6] 문서
[7] 문서
[8] 서적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9] 서적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2010-04-13
[10] 서적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11] 저널 상륙작전교리 측면에서 본 통영상륙작전의 의의 -연안상륙작전 교리를 중심으로 https://dl.nanet.go.[...] 132 2006-06
[12]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13]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14]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15]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16]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17]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18]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19]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20]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21] 서적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22]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23]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24] 서적 우리가 겪은 6.25전쟁 (3. 새로운 적, 새로운 전쟁) 도서출판 ARAM 2012-11-15
[25] 서적 우리가 겪은 6.25전쟁 (3. 새로운 적, 새로운 전쟁) 도서출판 ARAM 2012-11-15
[26] 서적 우리가 겪은 6.25전쟁 (3. 새로운 적, 새로운 전쟁) 도서출판 ARAM 2012-12-15
[27] 서적 우리가 겪은 6.25전쟁 (3. 새로운 적, 새로운 전쟁) 도서출판 ARAM 2012-11-15
[28] 웹인용 신고산 http://www.cybernk.n[...]
[29] 서적 우리가 겪은 6.25전쟁 (3. 새로운 적, 새로운 전쟁) 도서출판 ARAM 2012-11-15
[30] 서적 우리가 겪은 6.25전쟁 (3. 새로운 적, 새로운 전쟁) 도서출판 ARAM 2012-11-15
[31]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32] 서적 우리가 겪은 6.25전쟁 (3. 새로운 적, 새로운 전쟁) 도서출판 ARAM 2012-11-15
[33] 서적 우리가 겪은 6.25전쟁 (3. 새로운 적, 새로운 전쟁) 도서출판 ARAM 2012-11-15
[34] 서적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35] 서적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36] 서적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37] 문서 水壓信管: 수중 폭탄에 쓰이는 신관. 미리 조정된 깊이에서 수중 폭발을 하도록 만들어졌는데, 수중 폭탄이 가라앉으면서 수압에 의하여 점화하게 되어 있음.
[38] 서적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39]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40] 서적 군사작전을 통해 본 6.25전쟁 도서출판 양서각 2018-08-20
[41] 서적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42] 문서 한반도는 태백산맥 등 주요 산맥의 분포로 인해 동고서저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동부지역은 산악지형이 주로 분포하여 있다.
[43] 서적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44] 문서 트루먼은 한국전쟁이 소련과 중국 등이 개입하는 전쟁의 확산을 극도로 우려하여 '제한전쟁'이라는 프레임을 짜놓고 가능한 전쟁을 빨리 끝내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맥아더는 중국에 대한 폭격, 타이완의 국민당 군대 용병, 핵무기 사용까지 염두에 두는 확전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두 인사는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회담을 하게 된다.
[45] 서적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
[46] 저널 한국전쟁기 유엔군의 원산 상륙작전과 철수작전을 통해 본 해상수송 (2022) https://www.kci.go.k[...] 2022
[47] 저널 한국의 주요상륙작전과 해병대의 위상(2019) http://rs2.riss4u.ne[...] 해병대 전략연구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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