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익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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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익필은 이황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서인의 이론가이자 예학, 성리학, 경학에 능했던 조선 시대의 학자이다. 김장생, 김집, 김반, 김유 등을 길러냈으며, 율곡 이이, 성혼, 정철 등과 교류했다. 아버지의 신분과 관련된 문제로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힘썼으며, 1591년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사후에 증직되었고, 1910년에는 홍문관 제학에 추증되었다. 그는 교육관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을 것을 강조했으며, 직(直)을 실천하며 살았다. 기축옥사 배후 의혹, 김은휘의 배려 등과 관련된 논란이 있으며,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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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익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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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한글 이름 | 송익필 |
한자 이름 | 宋翼弼 |
로마자 표기 | Song Ikpil |
다른 한글 표기 | 송익필 |
다른 한자 표기 | 宋翼弼 |
본관 | 여산 송씨 (礪山) |
자 | 운장(雲長) |
호 | 구봉(龜峯), 현승(玄繩) |
시호 | 문경(文敬) |
생애 | |
출생 | 1534년 2월 10일, 조선 한성부 |
사망 | 1599년 8월 8일, 조선 충청도 당진군 북면 원당리 |
가족 관계 | |
부 | 송사련 |
모 | 연일 정씨 부인 |
배우자 | 본부인 창녕 성씨, 첩실 이름 미상 |
자녀 | 아들 송취방(宋就方), 서자 송취대(宋就大), 서자 송취실(宋就實), 서녀 여산 송씨 |
형제 자매 | 형 송인필(宋仁弼), 형 송부필(宋富弼), 남동생 송한필(宋翰弼), 누이 여산 송씨 부인 |
학문 및 정치 활동 | |
분야 | 유교, 성리학 |
당파 | 서인 |
2. 주요 이력
이황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수광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안당의 진외종손이며, 아버지는 서얼 출신 문신 송사련이다.[1] 서인 예학의 태두인 김장생, 김집, 김반 부자 및 인조 반정의 공신 김유 등을 문하에서 길러냈다.[1] 서얼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출생 문제에 대한 시비 및 아버지 송사련이 안당 일족과 사림 인사들을 역모로 몬 것에 관하여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1] 관직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1]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과 교류했다.[1] 서인의 이론가이자 예학, 성리학, 경학에 능하였다.[1] 1591년(선조 24년)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593년 9월에 석방되었다.[1] 사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가 1910년(융희 4년) 때 다시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1]
송익필은 서인 예학의 중심 인물로, 김장생, 김집, 김반 부자와 인조 반정의 공신 김유 등을 길러냈다. 이황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수광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3. 생애
서얼 출신으로, 아버지 송사련이 안당 일족과 사림 인사들을 역모로 몬 사건 때문에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이 때문에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예학, 성리학, 경학에 뛰어났다.
1591년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1593년 9월에 풀려났다. 사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1910년에는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
3. 1. 출생과 가계
1534년 2월 10일 한성부에서[3] 아버지 송사련과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 鄭氏) 부인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송인필(宋仁弼), 송부필(宋富弼)이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 송한필이 있었다.
그의 선조는 고려 원종 때 상장군을 지낸 정렬공(貞烈公) 송송례(宋松禮)이다. 송송례는 무신정권 말기에 원종 편에 서서 무신정권 인사들을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점차 몰락하여 평민 신분이 되었다. 증조부는 송자근쇠[4]이고, 할아버지는 갑사(甲士) 출신으로 직장(直長)을 지낸 송린(宋麟)이다.
아버지 송사련은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가 비첩(婢妾) 중금(重今)에게서 얻은 얼녀 감정(甘丁)과 평민 출신 갑사 송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사련의 어머니 감정은 안당 가문의 노비였으나, 송사련은 안당의 도움으로 천한 신분을 면하고 관상감판관을 지냈다.
기묘사화 이후, 안당의 아들 안처겸, 안처근 형제가 남곤, 심정 등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는데, 송사련은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역모죄로 고발하였다.[3] 이 고변으로 안당과 세 아들은 사형당하고, 안당의 집안은 멸문되었으며, 재산과 노비는 송사련이 차지하게 되었다. 송사련은 그 공으로 당상관인 절충장군과 통정대부를 거쳐 첨지까지 오르게 되었다.
3. 2. 소년기와 청년기
1534년 2월 10일 송사련과 연일 정씨 부인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한성부[3]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 송인필(宋仁弼), 송부필(宋富弼)이 있었고, 동생은 송한필(宋翰弼)이다.
그의 선조는 고려 때 상장군을 지낸 송송례이다. 송익필은 송송례와 송운의 후손이었으나, 가문은 점차 몰락하여 평민 신분이 되었다. 증조부는 송자근쇠[4]이고, 할아버지는 갑사 출신으로 직장을 지낸 송린(宋麟)이다.
아버지 송사련은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가 첩 중금(重今)에게서 얻은 얼녀 감정(甘丁)과 평민 출신 갑사 송린의 아들이었다. 이후 감정은 평민 송린과 혼인하여 송사련을 낳았다.
기묘사화로 사림파가 숙청되고 조광조를 따르던 안당 일족도 위기에 처하자, 안당의 아들 안처겸·안처근 형제는 남곤, 심정 등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3] 송사련은 이들의 대화 내용을 엿듣고 역모죄로 고발하였으며, 안당 부인의 부음을 듣고 찾아온 문상객과 장례 일꾼들을 거사 참여 세력으로 꾸며 고변하였다. 이 고변으로 안당과 세 아들은 사형당하고 안당의 집안은 멸문되었으며, 재산과 노비는 송사련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 공으로 송사련은 벼슬이 당상관인 절충장군과 통정(通政)을 거쳐 첨지까지 오르게 되었다.
신분과 도리를 중시하는 유생들은 송사련에게 등을 돌리며 심히 비난하였다.
송사련이 안처겸·안처근 형제의 남곤, 심정, 김전 제거 모의를 폭로, 고변한 공로로 공신에 책봉되고 양반이 되었기에, 송익필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던 송익필은 7~8세에 붓을 잡았는데, 그 조어(造語)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 송사련은 생모가 노비 출신이고, 자신은 서얼 신분이었으므로 아들들의 장래에 누가 될까봐 걱정하였다. 송익필은 스승 없이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자라면서 문장력(文章力)이 늘고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버지 송사련의 후광으로 유생들을 비롯한 다양한 이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산해, 최경창, 윤탁연, 정철, 조헌, 윤두수, 윤근수, 하응림 등과 교류하였다. 토정 이지함 등도 그의 재능을 칭찬하였다.
3. 3. 청년기
송익필은 아버지 송사련이 남곤, 심정, 김전 등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고변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양반이 되면서,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여 7~8세에 붓을 잡으면 그 문장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송사련은 생모가 노비 출신이고 자신은 서얼 신분이라 아들들의 장래를 걱정했다. 송익필은 스승 없이 성리학을 독학하며 성장했고, 문장력과 학문 연구 능력을 키웠다.
송사련의 후광으로 유생 등 다양한 이들과 교류했으나, 명종 말엽 사림파 집권 후 송사련에게 등을 돌린 이들의 화가 송익필 형제에게 대물림되었다.
3. 3. 1. 연좌제와 관직 단념
1558년(명종 13년) 25세 때 아우 송학필과 같이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아버지 송사련의 행적이 문제가 되어 대과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1] 이산해 등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금고를 풀어주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1] 결국 벼슬에 진출하기를 단념하고 경기도 교하군 심학산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다.[1]
3. 3. 2. 학문 연구
1560년(명종 15년) 김계휘가 아들 김장생을 송익필의 문하에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면서, 송익필은 27세 전후로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경기도 교하 심학산 구봉 아래에서 후학을 양성했다.[3] 김장생, 정엽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으며, 김장생은 스승에게서 예학을 배워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6] 송익필의 예학은 후대의 송시열, 윤선거, 송준길 등에게 계승되었다.
이이, 성혼 등과 성리학을 논하고 예학에 뛰어났으며, 문장에 능하여 이산해, 최경창, 백광훈 등과 함께 8문장가[5]로 불렸다. 정철, 윤두수, 윤근수 역시 그와 절친한 친구였다.
3. 4. 정치 활동
1575년(선조 8) 아버지 송사련이 사망했고, 같은 해 신사무옥이 송사련이 안처겸·안처근 형제의 대화를 엿듣고 폭로한 것으로 밝혀졌다. 1586년(선조 19) 안당의 손자 안로(安璐)의 처 윤씨(尹氏)가 신원 상소를 올렸고, 송사련에 대한 비난 여론이 조성되었다.[1] 이이와 성혼은 아버지의 잘못을 그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하다고 변호했으나, 동인은 계속 이를 문제삼았다.[1]
1584년(선조 17) 이이가 사망하면서 송익필을 변호해주던 주요 인물을 잃게 되었다.[2] 동인들은 송익필을 '서인의 모주'(謀主)로 지목하고 제거하려 하였다.[3] 조헌은 송익필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4]
동인 중 강경파였던 이발(李潑), 백유양(白惟讓) 등은 안당 후손들의 소송과 공격을 적극 후원하였다. 일설에는 송익필의 조모가 안돈후의 서녀가 아니라 노비인 중금의 전남편 소생 딸이라는 설도 있었는데, 이발, 백유양 등은 안당의 후손들을 사주하여 이 부분을 물고 늘어졌다.[1]
1586년(선조 19년) 장례원 판결사 정윤희 등에 의해 다시 천민 신분으로 논정, 환천되었다. 이때 속량 문서까지 모두 없애 버리고, 송사련이 안처겸 형제의 거사를 폭로한 것을 문제삼아, 2대 이상 양역(良役)하면 노비를 면할 수 있다는 법 규정을 적용받지 못하게 하여 송씨 집안을 완전히 환천(還賤)시켜 버렸다.[1]
이산해는 송익필에게 이이를 비난하면 멸문의 화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송익필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이산해를 풍자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1]
諸葛孔明|제갈공명중국어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지혜가 뛰어났던 송익필은 서인의 이이, 성혼 등과 허물없이 지냈으나,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1589년 정언지 등에 의해 1579년 곽사원의 제방 송사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사건은 주관 부처인 공조 참판 정언지의 상소로 선조의 결심을 얻어 조사하게 되었다.[8]
토목 공사를 둘러싼 부정 사건에 송익필의 조카사위(송익필의 동생 송한필의 사위)가 관련되었고, 그동안 이이가 이 사건을 극력으로 돌보아주었다[8]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결국 선조가 교서를 내려 송익필을 축출하였다.
얼마 후 이발, 이길, 백유양 등 동인 편에서 송익필에게 공격을 집중시켰다.[9]
3. 4. 1. 안당 일가와의 갈등
1575년(선조 8) 아버지 송사련이 사망하였고, 그 해에 신사무옥이 송사련이 안처겸·안처근 형제의 대화를 엿듣고 폭로한 것이 밝혀졌다. 1586년(선조 19) 안당의 손자인 안로(安璐)의 처 윤씨(尹氏)가 신원 상소를 올렸고, 송사련에 대한 비난 여론이 조성되었다.[1] 이이와 성혼은 아버지의 잘못을 그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라고 변호하였으나 동인에서는 계속 이를 문제삼았다.[1]
1584년(선조 17) 이이가 사망하면서 그를 변호해주던 주요 인물을 잃게 되었다.[2] 동인들은 송익필을 '서인의 모주'(謀主)로 지목하고 제거하려 하였다.[3] 조헌은 송익필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4]
3. 4. 2. 동인과의 갈등
1575년(선조 8) 아버지 송사련이 사망한 뒤 신사무옥 때 송사련이 안처겸·안처근 형제의 대화를 엿듣고 폭로한 것이 밝혀졌다. 안당이 신원되면서 안당의 손자 안로 등은 송사련의 처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동인 이발은 안당의 후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1]
동인 중 강경파였던 이발(李潑), 백유양(白惟讓) 등은 안당의 후손들의 소송과 공격을 적극 후원하였다. 일설에는 송익필의 조모가 안돈후의 서녀가 아니라 노비인 중금의 전남편 소생 딸이라는 설도 있었는데, 이발, 백유양 등은 안당의 후손들을 사주하여 이 부분을 물고 늘어졌다.[1]
1586년(선조 19년) 장례원에서 판결사 정윤희 등에 의해 다시 천민 신분으로 논정, 환천되었다. 이때 속량 문서까지 모두 없애 버리고, 송사련이 은혜를 저버리고 안처겸 형제의 거사를 폭로한 것을 물고 늘어져, 2대 이상 양역(良役)하면 노비를 면할 수 있다는 법 규정을 적용받지 못하게 하여 송씨 집안을 완전히 환천(還賤)시켜 버렸다.[1]
이산해는 송익필에게 이이를 비난하면 멸문의 화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송익필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이산해를 풍자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1]
3. 4. 3. 정여립 사건과 기축옥사
諸葛孔明|제갈공명중국어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지혜가 뛰어났던 송익필은 서인의 이이, 성혼 등과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으나,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1589년 정언지 등에 의해 1579년 곽사원의 제방 송사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 사건은 주관 부처인 공조 참판 정언지의 상소로 선조의 결심을 얻어 조사하게 되었다.[8]
토목 공사를 둘러싼 부정 사건에 송익필의 조카사위(송익필의 동생 송한필의 사위)가 관련되었고, 그동안 이이가 이 사건을 극력으로 돌보아주었다[8]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결국 선조가 교서를 내려 송익필을 축출하였다.
얼마 후 이발, 이길, 백유양 등 동인 편에서 송익필에게 공격의 화살을 집중시켰다.[9]
3. 5. 생애 후반
안당 일가의 추노 쇄환을 피해 은신하던 송익필은 기축옥사로 2천여 명 이상의 동인과 그 일가족이 숙청되자, 옥사의 배후로 지목되어 동인들의 추적을 받았다.[10] 그는 성혼, 김계휘 등이 주선해준 피난처로 옮겨다녔으며, 김장생의 숙부 김은휘는 자신의 집에 송익필과 송한필 가족을 숨겨주기도 했다.
3. 5. 1. 노비 환천과 유배, 석방
안당의 일가는 추노 쇄환사를 각지로 보내 송익필의 가족을 추적했다.[10] 그는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천을 피하여 은신하였다. 그러나 기축옥사로 2천여 명 이상의 동인과 그 일가족이 숙청되자 동인들은 옥사의 배후로 그를 지목하고 추적하였다.[10] 그는 성혼, 김계휘 등이 피난처를 주선해주어 옮겨다녔다. 김계휘의 동생이자 제자 김장생의 숙부인 김은휘는 자신의 집에 송익필과 송한필 가족을 숨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곧 조정에 자수하여 1591년(선조 24) 1월 탄핵을 받고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명천으로 이배되었다. '형은 동녘 산으로 / 아우는 서쪽바다로 / 갈림길에서 차마 울지도 못한다'는 시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유배지에서 그는 450여 수의 시를 남겼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고 1593년 9월에 석방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나왔지만 그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으므로 그는 은신처를 피해 숨어다녀야 했다.
3. 5. 2. 최후
1591년(선조) 1월 탄핵을 받고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가 명천으로 이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450여 수의 시를 남겼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고 1593년 9월에 석방되었으나, 그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으므로 은신처를 피해 숨어다녀야 했다.[11]
이후 임진왜란 기간 중 평안도 희천의 명문산에 은거하며 난리를 피했다.[11]
3. 6. 사후
인조반정 후 1625년(인조 3) 김장생 등의 제자들이 신원소를 상소하여 스승의 양민 환원을 요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3] 이후 김장생이 송익필의 복권 상소를 계속 올려 복권시켰다. 인조 반정 당시 반정 공신 중 이귀는 그의 직제자였고, 김류는 아버지 김여물이 송익필의 문하생이었으며, 김류 역시 잠시 그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기도 했다.
숙종 때 우암 송시열이 동춘당 송준길과 의논한 후 그의 묘비문을 지었다.[3] 그러나 그의 첫 비석은 유실되어 1720년(숙종 46년) 김진옥이 다시 비문을 짓고 새로 비석을 세웠다. 1752년(영조 28) 충청도관찰사 홍계희가 그의 증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통덕랑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다.[3]
1762년(영조 38)에는 제자인 김장생의 6대손에 의해 그의 저서 《구봉집》이 발간되었고, 족보에서 누락되어 빠져있던 그의 이름도 사후 3백여 년이 지난 1905년에 족보에 등재되었다. 1910년(융희 4년) 7월 20일 규장각제학에 추증되고,[3] 바로 순종의 명으로 문경(文敬)의 시호가 내려졌다.
1993년 신의식이 그의 비문을 새로 짓고 새로 비석을 세웠다.
4. 저서
- 구봉집
- 현승집(玄繩集)
- 예문답
- 가례주설(家禮註說)
- 현승편(玄繩編)
- 태극문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 송인(宋璘) | |
조모 | 순흥 안씨 | 안감정 |
아버지 | 송사련(宋祀連) | 1496년 ~ 1575년 |
어머니 | 연일 정씨(延日鄭氏) | |
형 | 송인필(宋仁弼) | |
형 | 송부필(宋富弼) | |
동생 | 송한필(宋翰弼) | 호는 운곡거사(雲谷居士) |
여동생 | 여산 송씨 | |
부인 | 창녕 성씨 | 1543년 ~ 1598년 |
아들 | 송취방(宋就方) | |
측실 | 이름 미상 | |
서자 | 송취대(宋就大) | |
서자 | 송취실(宋就實) | |
서녀 | 여산 송씨 |
6. 학문적 치적
그는 무너진 사회 질서를 회복시키는 방안으로 예의와 예절을 강조하였다. 제자들 중 사계 김장생은 단연 돋보이는 인물로, 송익필에게서 예의와 예절에 대한 예론을 전수받아 이를 아들 김집과 함께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이들 부자의 문하에서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미촌 윤선거, 명재 윤증 등이 배출되어 예학을 더욱 크게 계승 발전시킨다.[14] 이이, 성혼, 정철 등과 서인의 이론가로서 교류를 가졌으며, 예학, 성리학, 경학에 기여했다.
7. 평가와 비판
송익필은 독학으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치에 밝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율곡 이이는 "성리학을 논할 만한 자는 오직 송익필 형제 뿐"이라고 평가했다.[15] 조헌, 토정 이지함, 상촌 신흠, 택당 이식 등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아버지 송사련의 행적으로 인해 평생 멍에를 지고 살았으며, 사후에도 노비 출신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았다.[1] 그는 당쟁의 기획자, 서인·노론 집권 플랜을 설계한 책략가라는 비판도 받았다.[1]
7. 1. 긍정적 평가
송익필은 독학으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그 이치에 밝았다. 율곡 이이는 그를 "성리학을 논할 만한 자는 오직 송익필 형제 뿐"이라고 평가했다.[15] 조헌, 토정 이지함, 상촌 신흠, 택당 이식 등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조헌은 "늙도록 글 읽기를 쉬지 않아, 학문이 깊고 경(經)에 밝았으며, 행실이 방정하고 말이 정직하여 아버지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다."라고 평가했고, 토정 이지함은 "천지를 가슴속에 간직하였으니, 공자·맹자의 도(道)도 진실로 멀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상촌 신흠은 "천품(天稟)이 매우 높고 문장(文章) 신묘하였다."라고 평가했고, 택당 이식은 "타고난 자질이 투철하고 지혜로워서, 이치를 분석함이 정밀하였다."라고 평가했다.
실록에는 '송익필은 비록 송사련의 아들이나, 노년에도 독서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서에 밝았으며 언행이 바르고 곧아 아비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다.'는 평이 있다.[16]
7. 2. 부정적 평가
송익필은 아버지 송사련의 행적으로 인해 평생 멍에를 지고 살았으며, 사후에도 노비 출신이라는 이유로 비판받았다.[1] 그는 당쟁의 기획자, 서인·노론 집권 플랜을 설계한 책략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1]더불어민주당 및 진보 진영에서는 송익필이 기축옥사를 조작하여 동인 세력을 제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비판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보다는 정치적 행적에 더 주목한다.[1] 반면 국민의힘 및 보수 진영에서는 그의 학문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기축옥사 관련 의혹은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1]
8. 사상과 신념
송익필은 평생 직(直)을 생활철학으로 삼아 직심(直心), 직언(直言), 직행(直行)의 3직 실천에 힘썼다.[1] 그는 인간 본성인 선(善)을 회복하는 실천 방법으로 예절 외에 거짓됨이 없는 바른 행동, 즉 직(直)을 강조하였다. 제자들에게는 학문뿐 아니라 정직함도 중요하다고 가르쳤다.[1]
그는 사물을 연구할 때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왜 옳고 옳지 않은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했다. 공자와 맹자, 사서육경, 주자, 태극설 등을 강의할 때도 무조건 수용하기보다는 왜 옳은가를 유생과 문인들 스스로 생각하도록 이끌었다.
8. 1. 교육관
그는 유생들과 문인들에게 처음부터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을 것을 강조하였다.송익필은 그에게 배우고자 찾아온 유생들에게 자상하게 설명해 주는 법이 없었다. 스스로 정신을 집중하여 다시 읽고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지식을 습득하는데 있어 사색을 중요시 하되 연구자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강조한 때문이었다.[3] 그는 선생에게만 의지하는 주입식 교육이 자칫 학생들의 창의성을 저해할 수 있는 폐단을 생각했던 것이다.[3]
사물을 연구할 때도 무엇이 옳고 잘못되었나, 왜 옳고 옳지 않은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했다. 공자와 맹자, 사서육경, 주자, 태극설 등을 강의함에 있어서도 무조건 수용하여 옳다고 하기 전에 왜 옳은가를 유생, 문인들 스스로 생각하게 했다.
8. 2. 직(直) 철학
인간 본성인 선(善)을 회복하는 실천 방법으로 예절 외에 거짓됨이 없는 바른 행동, 직(直)에 대한 공부를 강조하였다. 그는 평생 직(直)을 생활철학으로 삼아 직심(直心), 직언(直言), 직행(直行)의 3직 실천에 힘썼다.[1] 제자들에게도 학문뿐 아니라 정직함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1] 높은 학문의 경지와 뛰어난 재주 못지않게 직(直)의 실천으로 행실도 바르고 곧았기에, 자신의 출세를 위해 주종관계와 친척관계가 파탄나는 것을 저지른 부친과 신분적 한계를 가지고도 당대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1]9. 논란과 의혹
송익필은 여러 논란과 의혹의 중심에 있었다.
정철과 함께 기축옥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특히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인물로 지목되기도 한다. 서자 후손이었던 송익필은 뛰어난 문장력으로 서인의 참모 역할을 했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 명을 환천(還賤)시키려 한 동인의 이발,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고자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17]
김은휘는 송익필과 송한필 가족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고 10년간 보살폈다.[1]
9. 1. 기축옥사 배후 의혹
정철과 함께 기축옥사에 개입했는데,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로 지목되기도 한다. 서자 후손인 송익필은 문장력이 뛰어나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여 인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발,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17]9. 2. 김은휘의 배려
김은휘는 그의 제자인 김장생의 숙부이자, 다른 제자인 김집, 김반의 종조부였다. 김은휘는 송익필과 송한필 가족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고 10년간 보살폈다.[1]10. 기타
전라북도 진안군의 운장산은 원래 운장산(雲藏山)이었으나, 송익필이 임진왜란 전후에 은거했다 하여 그의 호를 따서 운장산(雲長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11] 운장산은 본래 주줄산, 주화산 등으로 불리다, 운장산의 가운데 봉우리 이름인 운장대(雲藏臺)가 산이름이 되었고, 이를 일제강점기에 雲長으로 표기하면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Song Ikpil
http://koreandb.nate[...]
2014-01-08
[2]
웹사이트
Song Ikpil
http://100.naver.com[...]
[3]
웹사이트
불행한 삶을 살다 간 유학자 구봉 송익필
http://www.djtimes.c[...]
[4]
문서
또는 송자근금으로 부른다.
[5]
문서
조선 중기 팔문장계: 이율곡, 송익필, 최립, 하응림, 최경창, 이달, 백광훈, 이산해
[6]
문서
그러나 송사련과 관련하여 김장생의 제자들은 김장생이 이이, 성혼의 학맥을 계승한 것처럼 하고, 그의 존재를 언급하기를 꺼려하였다.
[7]
문서
그가 이이에게 김장생을 추천하기도 했다.
[8]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9]
서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도서출판 삼인
1999
[10]
서적
재상열전:조선을 이끈 사람들
청아출판사
2010
[11]
웹인용
운장산 雲長山을 버려야 전북이 산다.
http://www.dailyjeon[...]
2012-03-20
[12]
문서
저서들은 그의 사후 출간되었다.
[13]
뉴스
'8월의 북부 문화인물' 송익필선생
http://www.kyeongin.[...]
경인일보
2007-08-13
[14]
웹인용
송익필
http://koreandb.nate[...]
2014-01-08
[15]
뉴스
역사에 가려진 '송익필'을 재조명하다
http://books.chosun.[...]
조선일보
2010-12-25
[16]
간행물
선조수정실록 20권, 19년(1586 병술 / 명 만력(萬曆) 14년) 10월 1일(임술) 1번째기사
[17]
서적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다산초당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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