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모사 공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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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모사 공중전은 1944년 10월, 미군이 필리핀 탈환을 위해 대만과 주변 지역의 일본군 항공 기지를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미군은 '킹 II 작전'의 일환으로 제공권과 제해권을 확보하려 했고, 일본은 '쇼 작전'을 준비하며 T 공격 부대를 창설하여 야간 공격을 시도했다. 10월 12일부터 미 해군의 대규모 공습이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T 공격 부대를 투입하여 반격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과장된 전과를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일본 공군의 참패였으며, 미군은 함선에 피해를 입었지만 작전을 지속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항공 전력을 크게 소모했고, 가미카제 공격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10월 19일 일본은 항공모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격침을 발표했으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포르모사 공중전의 결과는 레이테 만 해전의 실패와 일본 군사 전술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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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모사 공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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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교전 명칭 | 포르모사 공중전 (Formosa Air Battle) |
일부 | 태평양 전쟁의 태평양 전구 |
시기 | 1944년 10월 12일 – 10월 16일 |
장소 | 타이완, 필리핀해 |
결과 | 미국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일본 제국 | 구사카 류노스케, 후쿠도메 시게루, 시마자키 시게카주(†), 아리마 마사후미(†), 데라오카 긴페이 중장 |
미국 | 윌리엄 홀시 주니어, 마크 미처 |
병력 규모 | |
일본 제국 | 타이완에 330기, 규슈에 350기, 일본과 중국 기지에서 4일 동안 690기 추가 투입 |
미국 | 제38 태스크 포스: 항공모함 17척, 전함 6척,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10척, 구축함 58척, 항공기 약 1,000기, 제20 공군: 중폭격기 약 130기 |
피해 규모 | |
일본 제국 | 항공기 321–525기, 타이완 군사 시설 및 기반 시설 심각한 피해 |
미국 | 항공기 89기, 중순양함 1척 심각한 손상, 경순양함 2척 손상, 구축함 1척 손상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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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마리아나 해전에서 승리한 미군은 일본의 절대국방권을 돌파하고, 필리핀 탈환을 다음 목표로 설정했다. 이는 일본 본토와 동남아시아 간의 자원 수송로를 차단하여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쇼호작전을 계획했다. 이 작전의 핵심은 제2항공함대와 T 공격 부대였다.[1] T 공격 부대는 야간 및 악천후를 틈타 공격하는 전술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1] 그러나 T 공격 부대는 조종사 부족과 훈련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일본은 육군에서 갓 훈련받은 신참 비행사들을 T 공격 부대에 모집했지만, 이들의 미숙함은 야간 임무 수행과 결합되어 실제 전투에서 형편없는 성과와 과장된 격추수를 낳았다.
1944년 7월 23일 군령부와 제2항공함대는 T 공격 부대의 운용 방식을 두고 의견 차이를 보였다. 군령부는 악천후 시 주간 공격을 우선시하는 방안을 제시한 반면,[2] 제2항공함대는 야간 공격을 중심으로 주간 및 황혼 공격을 편성하는 방안을 제시했다.[2] 1944년 9월, 후쿠도메 시게루 제2항공함대 사령관은 T 공격 부대를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혔고, 도요다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부대 운용을 후쿠도메에게 일임하며 무리한 공격은 피하도록 지시했다.[3]
1944년 10월 10일 미군 제38임무부대의 십·십 공습을 시작으로, 다음날 필리핀 공격이 이어졌다. 이에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T 공격 부대에게 대만 동쪽 해상의 적에게 황혼 공격과 야간 공격을 명령했다.[7]
2. 1. 미군의 필리핀 탈환 작전
마리아나 해전에서 승리한 미군은 다음 목표로 필리핀을 선택했다. 필리핀은 일본 본토와 동남아시아의 자원 지대를 잇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였기 때문에, 이곳을 장악하면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다. 미군은 '킹 II 작전'을 수립하고, 레이테 섬 상륙에 앞서 대만, 오키나와, 필리핀 북부의 일본군 항공 기지를 공격하여 제공권과 제해권을 확보하려 했다.[5]일본군은 미군의 필리핀 침공 계획에 맞서 첩호 작전을 준비했다. 이 작전은 제2항공함대와 제6기지 항공 부대의 T 공격 부대를 주력으로, 육상 기지의 이점을 활용하여 야간 및 악천후 공격을 통해 미군 기동 부대를 격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 그러나 1944년 9월, 제2항공함대 사령관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T 공격 부대를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야간 공격을 결전의 일격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다 소에무는 부대 운용을 후쿠도메에게 일임하고, 무리한 공격은 피하도록 지시했다.[3]
1944년 10월 10일, 미군 제38임무부대는 오키나와를 공습했고(십·십 공습),[7] 다음날에는 필리핀을 공격했다. 이에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T 공격 부대에게 대만 동쪽 해상의 적에게 황혼 공격과 야간 공격을 명령했다.[7]
2. 2. 일본군의 방어 전략과 T 공격 부대
마리아나 해전에서 승리하여 일본의 절대국방권을 돌파한 미군에 맞서, 일본군은 쇼호작전을 통해 미군을 요격하려 했다. 이 작전의 핵심은 제2항공함대와 'T 공격 부대'였다.[1] T 공격 부대는 쇼호작전에서 야간 및 악천후를 틈타 공격하는 전술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1]1944년 7월 23일, 군령부는 악천후 시 주간 공격을 주로 하고, 기회가 없으면 야간에 공격하는 T 공격 부대 안을 제시했다.[2] 반면, 제2항공함대는 T 공격 부대에 의한 야간 공격을 중심으로 주간 공격과 황혼 공격을 편성하는 방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পরবর্তীতে 제6기지 항공부대의 전투 방법으로 발전했다.
1944년 9월 초, 제2항공함대 사령관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T 공격 부대를 결전의 일격을 위해 야간 공격이나 악천후 속에 운용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결행하겠다고 밝혔다.[3]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다 소에무는 부대 운용을 후쿠도메에게 일임하고, 힘들 때는 무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3]
그러나 T 공격 부대는 조종사 부족과 훈련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일본은 육군에서 갓 훈련받은 신참 비행사들을 T 공격 부대에 모집했지만, 이들의 미숙함은 야간 임무 수행과 결합되어 실제 전투에서 형편없는 성과와 과장된 격추수를 낳았다.[4]
2. 3. 1944년 10월 초, 미군의 움직임과 일본군의 대응
마리아나 해전에서 승리한 미군은 필리핀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필리핀은 일본의 자원 수송로를 차단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첩호 작전을 통해 미군을 요격하려 했고, 제2항공함대의 T 공격 부대를 주력으로 활용하여 야간 및 악천후 속에서 공격을 시도할 계획이었다.[1]1944년 7월 23일, 일본 군령부는 악천후 시 주간 공격을 기본으로 하되 여의치 않으면 야간 공격을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2] 그러나 제2항공함대는 T 공격 부대의 야간 공격을 중심으로 주간 및 황혼 공격을 조합하는 방식을 제안하여 의견이 엇갈렸다. 1944년 9월, 후쿠도메 시게루 제2항공함대 사령장관은 T 공격 부대를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혔고, 도요다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후쿠도메에게 부대 운용을 일임하며 무리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3]
결국 포르모사 공중전에서는 제2항공함대의 전술이 채택되었다. 실제 전투는 제2항공함대의 도상 연습과 유사하게 진행되었으나, 미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쉽게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 달랐다.[4]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 점령 후 킹 II 작전을 통해 필리핀 탈환을 계획했다. 이 작전에는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북부의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여 제공권과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1944년 10월 5일, 윌리엄 홀시 제3함대 사령관은 체스터 니미츠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부터 대만 군사 시설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히라는 명령을 받았다.[5]
1944년 10월 10일, 미군 제38임무부대는 십·십 공습으로 기록된 오키나와 공습을 실시했다. 다음날인 10월 11일, 미 함대는 필리핀을 공격했다. 후쿠도메 시게루 제2항공함대 사령장관은 T 공격 부대에게 오키나와 방면으로 진출하여 대만 동쪽 해상의 적에게 황혼 및 야간 공격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7]
3. 전투 경과
1944년 10월 12일부터 16일까지 5일간, 미 해군의 공습과 일본군의 반격이 반복되며 타이완섬 근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0월 9일, 일본 정찰기가 오키나와 동쪽에서 실종되었고, 다음 날 미군은 섬에 공습을 가했다. 10월 11일, 일본 정찰기는 제3함대의 기동 부대를 발견, 타이완과 필리핀 지역 사령관들에게 조기 경보를 전달했다.[41] 10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경계 태세에 돌입하고 요격을 준비했다. 타이완 주둔 일본군은 전투기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타이베이와 가오슝을 방어하게 했다. 규슈에서는 T 공격 부대가 야간 임무를, 다른 항공 부대는 미 항공모함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계획했다.[41]
미 항공모함 항공단의 전투 경험은 기동 부대 배치와 공격 목표에 따라 달랐다. 10월 12일 아침, 기동 항공모함 기동 부대는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흩어져 있었다. 기동 부대 38.2는 타이완 북부, 기동 부대 38.3은 섬 중앙부, 기동 부대 38.1과 38.4는 타이완 남부를 담당했다.[41]
10월 13일, 페스카도르스 제도에서 북부 루손 및 포르모사까지 더 넓은 목표가 할당되었지만, 적의 수는 적었다. 흐린 날씨로 공격 결과 확인은 어려웠다. 이틀간의 공격으로 포르모사 공군 기지 네트워크가 예상보다 크다는 것이 밝혀졌다. 마크 미처 제38기동부대 사령관은 오후 공격을 취소하고 야간 공격을 준비했다.
T 공격 부대는 황혼 공격을 위해 돌아왔다. 제38.1 및 38.4 기동부대가 공격받았다. 일본군 편대는 16시 40분에 레이더에 포착, 한 시간 뒤 제38.4 기동부대의 벨로 우드에서 출격한 전투 초계기에 요격되었다. 벨로 우드의 전투기는 약 112.65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적 편대를 격퇴, 10대의 전투기 및 폭격기를 격추했다.
18시 12분, T 공격 부대 조종사들의 또 다른 편대가 접근했다. 20분 만에 제38.4 기동부대 인근에서 6대의 비행기가 격추되었다. 이후 6대의 미쓰비시 G4M "베티" 폭격기 편대가 제38.4 기동부대의 항공모함을 공격, 4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베티 폭격기 한 대는 프랭클린에 충돌하려 했지만 비행 갑판에 스치며 함선의 우현 가장자리로 미끄러져 물속으로 떨어졌다.
제38.1 기동부대는 10대의 요코스카 P1Y "프랜시스"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다. 6대가 격추되었지만, 프랜시스 폭격기 1대가 캔버라에 어뢰를 명중시켜 23명이 사망하고 순양함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두 개의 엔진실이 침수되고 조타 장치에도 피해가 발생했다. 캔버라는 제30.3 기동부대의 일원으로 예인되어야 했다. 22시경 위치타가 손상된 순양함을 남동쪽으로 예인하기 시작했다.
캔버라의 상황으로 전투단은 적의 공중 공격 범위 내에 더 오래 머물렀다. 이른 아침 전투기 제압 작전이 루손섬과 포르모사섬의 공군력을 억제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새로 편성된 전투단은 캔버라를 호위했다. 오후 내내 적 항공기는 전투단 주변을 비행하며 발견 보고를 전달했다.
CTF 38은 또 다른 야간 경계를 예상했다. TG38.1, 38.2, 38.3은 모두 15:00~18:30 사이에 대규모 적 공습을 받았다.
TG 38.2가 먼저 공격받았다. 25대의 요코스카 D4Y "주디" 급강하 폭격기 편대는 구름을 이용해 탐지를 회피했고, 그룹의 전투 항공 초계에 요격되었다. 몇 대의 일본기만 미군 전투기를 통과했다. 살아남은 폭격기들은 핸콕 근처에 폭탄 두 발을 투하했고, 한 발은 폭발하지 않은 채 선수 포트 측 포좌에 명중했으나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오후 5시경, 대규모 적 편대가 레이더에 나타나 TG38.3을 향해 접근했다. 이들 중 다수가 전투 항공 초계에 격추되었다. 살아남은 적 항공기는 수면으로 내려갔다. 이 항공기들은 어뢰 폭격기와 전투기로, 기습 공격에 성공했다. 일본군의 회피 기동, 돌풍, 빈약한 전투기 엄호는 TG38.3이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고 탈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제38.1 전투단은 퇴각하는 캔버라 그룹을 엄호하도록 지정되었다. 16시 15분, 휴스턴이 TG38.1에 합류하여 와스프의 선수 쪽에 배치되었던 위치타를 대체했다. 일몰 후 1831에 대규모 보기가 나타났다. 그룹의 초계함의 대공포는 항공모함에 접근하려는 10대의 비행기를 격추했지만, 더 많은 항공기가 그룹 중심부에 도달했다. 적어도 두 대의 적 항공기가 휴스턴 근처에 어뢰를 발사했다. 함선은 처음 감지된 어뢰 궤적을 피하기 위해 우현으로 급선회했다. 두 번째 어뢰는 함선의 좌현으로 빗나갔지만, 첫 번째 어뢰는 함선 중앙의 용골과 방어 벨트 사이를 명중했다. 엔진실 및 기타 내부 공간에 침수가 발생하여 함선이 16°기울어졌다. 보스턴이 손상된 순양함을 동쪽으로 예인하기로 결정했다.
휴스턴이 피격된 후에도 TG 38.1에 대한 공격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지만, 일본 공격대의 추가적인 성공은 없었다.
3. 1. 10월 12일: 미군의 대규모 공습과 일본군의 야간 공격
1944년 10월 12일, 미 해군 제3함대는 함재기를 동원하여 타이완섬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다. 이날 미군은 총 1,378대의 항공기를 투입했다.[41][42]같은 날, 일본군은 T 공격 부대를 투입하여 미 함대에 대한 야간 공격을 개시했다. 해군 폭격기 요코스카 P1Y(은하)와 함상 공격기 아이치 B7A(유성), 육군 폭격기 미쓰비시 Ki-67(비룡) 등으로 구성된 90여 대의 항공기가 출격했다. 그러나 조명탄 조명이 구름에 가려 불충분했고, 미군의 대공 사격으로 54대가 격추되는 큰 피해를 보았다.[41][42]
미 해군 항공모함 프랭클린과 중순양함 캔버라에 각각 한 발과 두 발이 명중했지만, 큰 피해는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 중 처음으로 가미카제 공격이 이루어져 프랭클린이 약간 손상되었다.[8]
미 제3함대 승무원들은 다음 날 공격을 위한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41][42]
윌리엄 홀시의 정보 장교 칼 솔버그는 12일 밤 1식 육상 공격기의 공격이 조직적이라기보다는 통제되지 않은 산발적인 공격이었다는 레이더 담당자의 소감을 기록했다.[41][42]
3. 2. 10월 13일: 미군 공습 지속, 일본군 피해 증가
미군은 947대의 항공기로 공습을 계속했다. 일본군은 T 공격 부대를 출격시켜 중순양함 캔버라에 일식 육상 공격기가 어뢰 1발을 명중시켰다. 캔버라는 기관실 침수와 화재로 항행 불능 상태가 되었지만 침몰하지는 않았고, 이 외에는 큰 손해를 입은 함선은 없었다.[1] 또한, 태평양 함대 사령부에 전달된 정보를 통해, 미 제3함대는 도요다 소에무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타이완에 있으며, 반격을 지시하고 병력 집결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신주에도 공격이 가해졌다.[1] 하지만, 마크 미처 제38임무부대 지휘관은 "수가 많아 모든 비행장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1]
3. 3. 10월 14일: 일본군의 항공 총공격과 미군의 피해
10월 14일, 일본군은 미군 함대가 전날까지의 공격으로 방어력을 상실했다고 판단, 380기를 동원하여 항공 총공격을 감행했다. 미군은 함재기의 요격과 대공 사격으로 일본군 항공기 244대를 격추했다.[10] 미군 측 피해는 경순양함 휴스턴(CL-81)이 어뢰 공격을 받아 엔진실 및 기타 내부 공간에 침수되어 16° 기울어졌다. 항공모함 핸콕(CV-19)은 요코스카 D4Y "주디" 급강하 폭격기 편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선수 포트 측 포좌에 명중한 폭탄 한 발이 폭발하지 않아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이날 공격은 15시부터 18시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일본군은 큰 피해를 보고 대만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 한편, 미군은 일본군의 허위 정보 보고를 감청하여, 피해를 입은 순양함 2척을 미끼로 일본군을 유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3. 4. 10월 15일 ~ 16일: 일본군의 공격 지속과 과장된 전과 보고
일본군 항공대는 16일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공격했지만, 피해만 늘어났을 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항공대는 '항공모함 격침', '전함 격파' 등 과장된 전과를 보고했다.[43] 대본영은 이러한 과장된 전과 보고를 그대로 믿고 발표했다.10월 19일, 일본군은 "항공모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구축함, 순양함 포함) 함종 불명 15척 격침, 격파"라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미국 본토의 주가를 일시적으로 폭락시킬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실제 미군 제3함대의 피해는 매우 적었다.[43] 다만, 4일간의 연속 공격과 필리핀 공습, 방공 전투로 인해 함대 장병들은 피로가 누적되었다. 결국, 제2군은 항공모함 벙커힐을 후퇴시켰다.
16일, 윌리엄 홀시 제독은 니미츠 제독에게 "도쿄 라디오가 격침을 보도한 제3함대의 모든 함정은 이제 해저에서 되살아나 눈앞의 적들을 향해 퇴각 중"이라는 조롱 섞인 전문을 보냈다.[43]
대본영 해군부는 잘못된 전과 보고를 천황에게 보고했고, 천황은 칙서까지 발표했다. 일본 국민들은 '미국 기동 부대 섬멸'이라는 대승리에 열광했다. 그러나 해군부는 16일, 정찰기가 미국 기동 부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과가 과장되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정정 발표하지 않았고 육군에도 알리지 않았다. 이는 이후 일본군의 전략과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10월 15일, 시마 기요히데 중장이 이끄는 제5함대가 일본 해군 조종사 구조 및 잔적 소탕을 위해 세토 내해를 출격했다. 그러나 미군은 암호 해독을 통해 이를 알고 있었고, 손상된 순양함 2척을 미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려 했다.[11] 하지만 일본 함대의 움직임이 둔해, 함대 전투 준비를 중단하고 레이테 상륙 지원에 집중했다.[12] 16일, 연합 함대 사령부는 시마 함대에 귀환을 명령했고,[16] 17일 시마 함대는 아마미오섬 삿카와 만에 입항했다.[17]
10월 19일, 격추된 미군 조종사 심문 결과, 루손 섬을 공습 중인 미군 정규 항공모함이 12척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본영 해군부의 발표가 완전히 거짓임이 드러났다.[18]
다음은 일본 대본영의 발표 내용이다.
발표일 | 발표 내용 |
---|---|
10월 12일 17시 20분 | 10월 12일 7시경부터 우세한 적기가 대만에 내습, 15시 30분경 아군과 적군이 교전 중이다. 아군 부대가 거둔 전과 중 13시까지 판명된 격추 적기는 약 100기이다. |
10월 13일 11시 30분 | 1. 아군 항공 부대는 10월 12일 밤 대만 동쪽 해면에서 적 기동 부대를 포착하고 밤새 반복 공격했다. 격침 항공모함 1척, 함종 불상 1척, 격파 항공모함 1척, 함종 불상 1척. 2. 아군 약간의 미귀환기가 있다. |
10월 14일 17시 | 아군 항공 부대는 이후 계속해서 대만 동쪽 해면의 적 기동 부대를 맹공 중이며, 현재까지 판명된 전과(이미 발표한 것을 포함)는 다음과 같다: 격침 항공모함 3척, 함종 불상 3척, 구축함 1척, 격파 항공모함 1척, 함종 불상 1척. |
10월 15일 15시 | 대만 동쪽 해면의 적 기동 부대는 어제 14일부터 동쪽으로 패주 중이며, 아군 부대는 이 적에 대해 반복 맹공을 가해 전과를 확대하는 중이다. 현재까지 판명된 전과(기 발표된 것을 포함)는 다음과 같다: 격침 항공모함 7척, 구축함 1척 (주) 기 발표된 함종 불상 3척은 항공모함 3척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격파 항공모함 1척, 전함 1척, 순양함 1척, 함종 불상 11척. |
10월 16일 15시 | 아군 부대는 궤주 중인 적 기동 부대를 계속 추격 중이며, 현재까지 판명된 전과(기 발표분을 포함)는 다음과 같다: 격침 항공모함 10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1척, 격파 항공모함 3척, 전함 1척, 순양함 4척, 함종 불상 11척. |
10월 17일 16시 | 아군 항공 부대는 16일 대만 동쪽 해면에서 새로 지원 온 적 기동 부대를 추격하여, 항공모함, 전함 각 1척 이상을 격파했다. |
10월 19일 18시 | 아군 부대는 10월 12일 이후 연일 연야 루손 동쪽 해면의 적 기동 부대를 맹공하여 그 과반수의 병력을 괴멸시켜 이를 궤주하게 했다. (1) 아군이 거둔 전과 종합은 다음과 같다: 격침 항공모함 11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순양함 혹은 구축함 1척, 격파 항공모함 8척, 전함 2척, 순양함 4척, 순양함 혹은 구축함 1척, 함종 불상 13척, 격추 112기 (기지에서의 격추를 포함하지 않음). (2) 아군의 손해 비행기 미귀환 312기. (주) 본 전투를 대만 해전이라고 칭한다. |
10월 21일 19시 | 대원수 폐하께서는 오늘 대본영 양 막료장을 소집하여 남방군 최고 지휘관, 연합 함대 사령장관, 대만군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칙어를 내리셨다: 칙어 짐의 육해군 부대는 긴밀한 협동 하에 적 함대를 요격하여 분전하여 크게 이를 격파했다. 짐은 깊이 이를 가상히 여긴다. 생각건대, 전황은 날마다 급박함을 더하니, 너희들은 더욱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하여 짐의 신뢰에 부응할 것을 기하라. |
4. 참전 병력
일본군에 할당된 항공기 중 약 3분의 1은 사상자, 부품 부족, 훈련된 조종사 부족으로 운용이 불가능했다.[43] 후쿠도메 시게루는 전투 초기에 720대의 항공기를 통합 지휘했으며, 이후 세토 내해에서 100대의 항공기가 추가되었다.[43] 대만에 주둔한 330대는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었고,[43] 약 350대는 큐슈에 주둔하며 미 해군 공격에 참여했다.[43] 이후 4일 동안 일본과 중국 기지에서 약 690대의 항공기가 추가 투입되었다.[43]
4. 1. 일본군
일본군은 제1항공함대(테라오카 킨페이 중장), 제2항공함대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 제1기동함대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 함재기만), 제5함대 (시마 기요히데 중장) 등 다양한 부대를 동원했다.[43] 이들 부대는 총 1,425기의 항공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가동 가능한 항공기 수는 이보다 적었다.제1항공함대와 제2항공함대는 제도상 "함대"였으나, 당시에는 육상 기지 항공 부대였다. 제5함대는 일본 본토에서 출격하여 잔적 소탕 임무를 맡았지만, 과장된 전과 보고와 함께 실패로 끝났다. 제5함대는 중순양함 나치, 아시가라, 경순양함 아부쿠마, 구축함 7척 (아케보노, 우시오, 카스미, 시라누이, 와카바, 하츠하루, 하츠시모)으로 구성되었다.
일본군은 10월 16일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지만, 피해만 키웠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항공대는 ‘항공모함을 격침’, ‘전함 격파’ 등 화려한 전과를 보고했다. 대본영은 이러한 과장된 전과 보고를 그대로 믿고 발표하여, 일본 국민들은 ‘미국 기동 부대 섬멸’이라는 대승에 열광했다. 심지어 미국 본토에서는 투자자들이 일본의 발표 내용을 믿어 주가가 일시적으로 대폭락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43]
10월 19일, 일본군은 “항공모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구축함, 순양함 포함) 함종 불명 15척 격침, 격파”라고 발표했지만, 실제 미 제3함대의 피해는 경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본영 해군부는 이러한 잘못된 전과 보고를 천황에게 보고하고, 천황의 칙서까지 발표했다.
이후 해군부는 16일 타이완 근해 상공에서 미 기동 부대를 발견하고 전과 보고를 다시 판단하여 대전과가 오인임을 확인했지만, 이를 정정 발표하지 않고 육군에도 정보를 전달하지 않아 이후 일본군의 전략과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43]
4. 2. 미군
제3함대 (윌리엄 홀시 대장) 예하 제38기동부대 (마크 미처 중장)는 항공모함 17척(경항공모함 9척 포함), 전함 6척, 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11척, 구축함 57척, 항공기 1,000대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43]구체적인 함선 목록은 다음과 같다.
기동 전대 | 함선 종류 | 함선 목록 |
---|---|---|
제38.1 기동 전대 (TG 38.1) | 경항공모함 | USS 카우펜스, USS 몬트레이 |
항공모함 | USS 호넷, USS 와스프 | |
제38.2 기동 전대 (TG 38.2) | 경항공모함 | USS 캐벗 (별동), USS 인디펜던스 |
항공모함 | USS 벙커 힐, USS 핸콕, USS 인트레피드 | |
제38.3 기동 전대 (TG 38.3) | 경항공모함 | USS 랭글리, USS 프린스턴 |
항공모함 | USS 에식스, USS 렉싱턴 | |
제38.4 기동 전대 (TG 38.4) | 경항공모함 | USS 벨로우 우드, USS 산 자친토 |
항공모함 | USS 엔터프라이즈, USS 프랭클린 |
5. 피해 및 결과
10월 14일, 미 제3함대는 일본군 항공기가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중순양함 캔버라의 퇴각을 엄호하면서 대만과 루손 북부에 공습을 가했다. 일본군은 미 함대가 방어력을 상실했다고 판단, 380기로 총공격을 감행하여 경순양함 휴스턴(CL-81)에 어뢰 2발을 명중시키고, 항공모함 핸콕(CV-19)에 근접탄 공격을 가했지만, 피해는 경미했다. 일본군은 이 공격으로 244기를 손실했다.[10]
미군은 일본의 과장된 전과 보고를 역이용하여, 피해를 입은 순양함 2척을 미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려 했다. 실제로 시마 기요히데 중장이 이끄는 제5함대가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이 계획은 미국 측에 누설되었다.
대본영의 오인된 전과 보고는 육군에도 전달되지 않아, 육군은 루손섬에서 레이테 섬으로 결전지를 변경하고 병력을 증파했다. 그러나 미군 기동 부대의 공격으로 제1사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이 장비와 물자를 상실하여 필리핀 결전 준비는 큰 차질을 빚었다. 또한, 루손 섬의 병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만에서 제10사단을, 오키나와에서 제9사단을 이동시켜 오키나와 전투의 전력 부족을 초래했다.
해군 발표의 전과에 의문을 품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은 대본영 육군부와의 방침 대립을 겪게 되었다.[34]
일본은 이 항공전으로 쇼호 작전에서 기대했던 T 공격 부대의 대부분을 소모했다.[35]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 제6기지 항공 부대는 전력 부족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할 수 없었고, 미 기동 부대를 야간에 기습하는 단 작전도 불가능하게 되었다.[36]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이 이 공중전에서 일본군의 기술적 열세를 확인하고 가미카제 특공대 창설을 결심했다는 설이 있지만, 부관 몬지 치카노리는 이를 부정했다.[37]
5. 1. 일본군의 피해
일본군은 이 공중전으로 312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고 발표했다.[43] 그러나 실제 피해는 이보다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쇼호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T 공격 부대의 대부분을 상실하여, 이후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효과적인 항공 지원을 제공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35] T 공격 부대는 미 기동 부대가 정박하여 활동이 둔해지는 야간에 기습하는 단 작전을 실행할 예정이었으나, 이 항공전으로 인해 불가능하게 되었다.[36]대본영은 당초 "항공모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구축함, 순양함포함) 함종 불명 15척 격침, 격파"라고 발표했지만,[18] 이는 과장된 것이었다. 실제로는 제2항공함대 사령부가 10월 15일 시점에서 항공모함 4척 격침으로 전과를 축소 판단했지만, 이 정보는 대본영과 연합함대 사령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25] 10월 16일, 연합함대와 군령부 참모들이 전과를 재검토한 결과, 항공모함 격침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27] 이 역시 육군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육군은 오인된 전과를 바탕으로 루손섬에서 레이테 섬으로 결전지를 변경하고 병력을 증파했지만, 미군 기동 부대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34]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은 이 공중전에서 일본군의 기술적 열세를 확인하고, 가미카제 특공대 창설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37]
5. 2. 미군의 피해
미군의 피해는 다음과 같다.[44]
일본군은 포르모사 공중전에서 미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실제 피해는 크지 않았다.[44] 경순양함 휴스턴은 10월 14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어뢰 공격을 받아 큰 손상을 입었지만[21] 침몰하지는 않았다.
5. 3. 결과
대만 항공전 결과, 일본군은 상당한 항공 전력을 상실했다. 일본군은 "항공모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구축함, 순양함 포함) 함종 불명 15척 격침, 격파"라고 발표했지만,[43] 실제 미군의 피해는 경미했다.일본 대본영은 과장된 전과 보고를 그대로 발표했고, 심지어 천황에게까지 보고하여 칙서까지 발표하게 했다. 이러한 잘못된 정보는 일본군의 전략 수립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10월 19일, 격추된 미군 조종사 심문 결과 대본영의 발표가 허위임이 밝혀졌지만,[18] 이미 늦은 후였다.
육군은 이 오보를 근거로 '레이테 섬 결전'으로 전략을 변경했고, 이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다. 또한 루손 섬의 병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대만과 오키나와에서 병력을 이동시켰고, 이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력 부족을 야기했다.
일본군은 이 항공전으로 T 공격 부대를 거의 소모했다.[35] 쇼와 작전의 일환으로 계획했던 단 작전도 불가능하게 되었다.[36]
한편, 미군은 일본군의 과장된 보고를 비꼬는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윌리엄 홀시는 니미츠에게 "도쿄 라디오가 격침을 보도한 제3함대의 모든 함정은 이제 해저에서 되살아나 눈앞의 적들을 향해 퇴각 중"이라는 전문을 보냈다.[14][15]
결과적으로 대만 항공전은 미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군의 전략적 오판을 초래하여 이후 전투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오인과 영향
일본군 항공대는 10월 16일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여, 10월 14일 공격으로 손상되어 예인 중이던 경순양함휴스턴에 어뢰를 명중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항공대의 손실은 더욱 커졌고, "항공모함 격침", "전함 격파"와 같은 과장된 대전과를 보고했다.[11] 이 기간 동안 대본영은 전선 부대로부터의 과장된 전과 보고를 그대로 집계하여 발표했다.
실제 미국의 피해는 경미했지만, 4일 연속 공격과 필리핀 공습, 방공 전투로 인해, 함대 장병들에게는 피로가 누적되었다. 할제이는 벙커 힐을 후퇴시켰으나, 와스프나 렉싱턴처럼 후퇴가 인정되지 않은 경우도 있어, 사기에 영향을 주었다.
10월 15일, 시마 함대의 기함 나치는 아시가라, 경순양함 아부쿠마 및 구축함 7척(아케보노, 시오, 카스미, 시라누이, 와카바, 하쓰하루, 하쓰시모)을 이끌고 세토 내해를 출격했다. 한편, 미국군 할제이 제독은 암호 해독으로 일본 함대(시마 함대)가 출격한 것을 알고, 손상된 순양함 2척에 항공모함을 포함한 호위 부대를 붙여 위장 전보를 발신하여 일본 함대를 유인하려 했다.[12] 그러나 일본 함대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함대 전투를 위한 준비를 중단하고, 레이테 상륙 지원에 전념하도록 명령했다.[13]
10월 15일 오후, 제26항공전대의 1식 육상 공격기 수 기가 특공 공격을 목적으로 필리핀 루손 섬 클라크에서 출격했으나, 미귀환・전과 불명으로 끝났다.
10월 16일 아침, 연합 함대 사령부에서 해상 호위 총사령부에 이르기까지 호위 함정을 이끌고 미 함대를 추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4] 기함 뉴저지 함상의 할제이는 니미츠에게 "최근 라디오 도쿄가 전멸했다고 보도한 제3함대 함선은, 해저에서 인양되어, 일본 함대를 향해 고속으로 철수 중."이라는 비꼬는 내용의 전문을 발신했다. 칼 솔버그에 따르면 이것은 미국 측에서 유명한 보고라고 한다.
대본영 해군부는 잘못된 전과 보고를 천황에게 주상하고, 어가상(御嘉尚)의 칙어도 발표되었다. 국민은 "미국 기동 부대 섬멸"이라는 대승리에 환호했다. 해군은 10월 16일에 대만 해상에서 항공모함 7척을 포함한 미국 기동 부대를 탐색기가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과에 오인이 있음을 깨달았다.
10월 16일, 연합 함대 사령부는 시마 함대에 귀환을 명령했고,[16] 10월 17일, 시마 함대(나치)는 아마미오섬삿카와 만에 손실 없이 입항했다.[17]
10월 19일, 격추된 미군 함재기 조종사를 육군 헌병대가 심문하여 루손 섬을 공습 중인 미군 정규 항공모함이 12척이며, 그 함명이 모두 밝혀졌다. 이로써 대본영 해군부에서 발표한 포르모사 공중전의 전과는 완전히 오인이었음이 밝혀졌다.[18]
포르모사 공중전에서 전과를 크게 오인한 원인으로는 야간 공격 시 조명탄 사용의 어려움, 야간 수색의 한계, 자폭기의 해상 화재 등이 있었다.[22] 제호작전에서 야간 공격이 중시되었지만, 야간 공격은 목표 및 전과 인식이 어렵고, 숙련도 향상에도 어려움이 있었다.[23] 미측의 할제이도 공격을 받았을 때 미 함대가 염상하는 모습을 보고 큰 손해를 입었다고 오인했으며, 일본의 미 기동 부대 격멸 보고도 무리가 아니었다.[24]
제2항공함대 사령부는 10월 15일 시점에서 전과 오인을 알아차렸다. 최종적으로 항공모함에 대한 전과를 대형, 중형 합쳐 4척 격침으로 판정했지만, 이 중대한 정보는 대본영과 연합함대 사령부에 보고되지 않았다.[25]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미 전략 폭격 조사단의 질문에 "타이완 해역 항공전의 전과를 4척 정도로 보고 있었다"라고 증언했다.[26]
10월 16일, 미군 기동 부대가 발견되자 연합함대 항공 참모 후치다 미쓰오 중좌, 군령부 항공 참모 스즈키 에이지로 중좌, 제2항공함대 겸 T 공격 부대 항공 참모 다나카 마사오미 소좌, 연합함대 정보 참모 나카지마 치카타카 소좌가 재검토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항공모함 4척 격파 정도로 격침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27] 미요시 타츠키치도 비슷한 판단을 했다.[21] 후치다 미쓰오에 따르면, 오인에 대해 주의를 주고, 17일 제1호 작전 경계 발령에서도 적 항공모함 10척 건재를 전제로 했다.[28] 다나카 마사오미는 재검토 때 논의된 내용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29]
부인, 부겐빌 전투에서 이미 전과 보고의 10분의 1이 실제 전과였으며, 전과 오인은 이전부터 문제가 되었다. 나카자와 유 군령부 부장에 따르면, 연합함대 사령부의 보고에 불확실성이 있었고, 전과 확인에 주의를 줬지만, 오히려 항의를 받았다.[30] 후지모리 야스오에 따르면, 군령부 작전과는 검토를 했지만, 현지 부대 보고를 기초로 자료를 작성하는 것 외에 묘안이 없었다.[31]
육군 대본영 정보 참모 호리 에이조는 카노야에서 전과 확인 방법에 대해 청취 조사를 했지만, 전과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고, "이 성과는 신용할 수 없다"라고 타전했다.[32] 호리는 10월 15일에 마닐라에 도착한 후, 미군 함재기에 의한 마닐라 공습이 이루어졌고,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 등은 호리의 보고를 믿었다고 한다.[33]
대본영 해군부의 오인된 전과 재판정 사실은 20일에 열린 필리핀 결전을 위한 육해군 합동 작전 회의에서 육군 측에 전달되지 않았다. 육군은 오인 전과인 줄 모르고 루손섬 요격 방침을 레이테 섬 결전으로 변경하고 병력을 증파했다. 그러나 미군 기동 부대 등의 공습으로 제1사단을 제외한 증원 부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루손 섬 병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만에서 제10사단을 투입하고, 오키나와에서 제9사단을 대만으로 이동시켜 오키나와 전투 전력 부족의 원인이 되었다.
해군 발표 전과에 대한 의문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에게 보고되었고, 이는 대본영 육군부와의 방침 대립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34]
일본은 이 항공전으로 쇼호작전에서 기대했던 T 공격 부대 대부분을 소모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제6기지 항공 부대는 전력이 부족했고, 단 작전 실행도 불가능하게 되었다.[35][36]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이 아군 비행기가 속수무책으로 격추되는 것을 보고 가미카제 특공대 창설 이유 중 하나라는 설이 있지만, 부관 몬지 치카노리는 이를 부정했다.[37]
6. 1. 전과 오인
일본군 항공대는 16일까지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14일 공격으로 손상되어 예인 중이던 경순양함휴스턴에 어뢰를 명중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항공대의 손실은 더욱 커졌고, "항공모함 격침", "전함 격파"와 같은 과장된 전과 보고가 이어졌다. 대본영은 이러한 과장된 보고를 그대로 집계하여 발표했고, 10월 19일에는 "항공모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구축함, 순양함을 포함) 함종 불명 15척 격침・격파"라는 대전과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는 일부 투자자들이 대본영 발표를 믿고 주가가 폭락하는 일시적인 소동까지 벌어졌다.[11]실제 미국의 피해는 경미했지만, 4일 연속 공격과 필리핀 공습, 방공 전투로 인해 미 함대 장병들은 피로가 누적되었다. 제2군은 벙커 힐을 후퇴시켰지만, 제1군의 와스프나 제3군의 렉싱턴처럼 후퇴가 인정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15일, 세토 내해를 출격한 시마 함대는 미군의 암호 해독으로 인해 발각되었고, 미군은 손상된 순양함 2척에 항공모함을 포함한 호위 부대를 붙여 일본 함대를 유인하려 했다.[12] 그러나 일본 함대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함대 전투 준비를 중단하고 레이테 상륙 지원에 전념하도록 명령했다.[13]
16일 아침, 연합 함대 사령부에서 해상 호위 총사령부에 미 함대 추격 명령이 내려졌다.[14] 윌리엄 할제이는 체스터 니미츠에게 "최근 라디오 도쿄가 전멸했다고 보도한 제3함대 함선은, 해저에서 인양되어, 일본 함대를 향해 고속으로 철수 중."이라는 비꼬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15][16]
대본영 해군부는 잘못된 전과 보고를 천황에게 보고했고, 천황의 칭찬(勅語)도 발표되었다. 국민들은 "미국 기동 부대 섬멸"이라는 대승리에 열광했지만, 해군은 16일 대만 해상에서 미 기동 부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과에 오인이 있음을 깨달았다.
16일, 연합 함대 사령부는 시마 함대에 귀환을 명령했고,[17] 17일 시마 함대는 아마미오섬삿카와 만에 무사히 입항했다.[18]
10월 19일, 격추된 미군 함재기 조종사 심문 결과, 루손 섬을 공습 중인 미군 정규 항공모함이 12척이며, 그 함명이 모두 밝혀져 대본영 해군부에서 발표한 대만 해상 항공전의 전과는 완전히 오인임이 밝혀졌다.[19]
다음은 대본영 발표 내용이다.
발표일 | 발표 내용 |
---|---|
쇼와 19년 10월 12일 17시 20분 | 10월 12일 7시경부터 우세한 적기가 대만에 내습, 15시 30분경 아군과 적군이 교전 중이다. 13시까지 판명된 격추 적기는 약 100기이다. |
쇼와 19년 10월 13일 11시 30분 | 아군 항공 부대는 10월 12일 밤 대만 동쪽 해면에서 적 기동 부대를 포착하고 밤새 반복 공격했다. 현재까지 판명된 전과는 다음과 같다. 격침 항공모함 1척, 함종 불상 1척. 격파 항공모함 1척, 함종 불상 1척. 아군 약간의 미귀환기가 있다. |
쇼와 19년 10월 14일 17시 | 아군 항공 부대는 이후 계속해서 대만 동쪽 해면의 적 기동 부대를 맹공 중이며, 현재까지 판명된 전과(이미 발표한 것을 포함)는 다음과 같다. 격침 항공모함 3척, 함종 불상 3척, 구축함 1척. 격파 항공모함 1척, 함종 불상 1척. |
쇼와 19년 10월 15일 15시 | 대만 동쪽 해면의 적 기동 부대는 어제 14일부터 동쪽으로 패주 중이며, 아군 부대는 이 적에 대해 반복 맹공을 가해 전과를 확대하는 중이다. 현재까지 판명된 전과(기 발표된 것을 포함)는 다음과 같다. 격침 항공모함 7척, 구축함 1척 (주: 기 발표된 함종 불상 3척은 항공모함 3척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격파 항공모함 1척, 전함 1척, 순양함 1척, 함종 불상 11척. |
쇼와 19년 10월 16일 15시 | 아군 부대는 궤주 중인 적 기동 부대를 계속 추격 중이며, 현재까지 판명된 전과(기 발표분을 포함)는 다음과 같다. 격침 항공모함 10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1척. 격파 항공모함 3척, 전함 1척, 순양함 4척, 함종 불상 11척. |
쇼와 19년 10월 17일 16시 | 아군 항공 부대는 16일 대만 동쪽 해면에서 새로 지원 온 적 기동 부대를 추격하여, 항공모함, 전함 각 1척 이상을 격파했다. |
쇼와 19년 10월 19일 18시 | 아군 부대는 10월 12일 이후 연일 연야 루손 동쪽 해면의 적 기동 부대를 맹공하여 그 과반수의 병력을 괴멸시켜 이를 궤주하게 했다. (1) 아군이 거둔 전과 종합은 다음과 같다. 격침 항공모함 11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순양함 혹은 구축함 1척. 격파 항공모함 8척, 전함 2척, 순양함 4척, 순양함 혹은 구축함 1척, 함종 불상 13척. 격추 112기 (기지에서의 격추를 포함하지 않음). (2) 아군의 손해 비행기 미귀환 312기. (주: 본 전투를 대만 해전이라고 칭한다). |
쇼와 19년 10월 21일 19시 | 대원수 폐하께서는 오늘 대본영 양 막료장을 소집하여 남방군 최고 지휘관, 연합 함대 사령장관, 대만군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칙어를 내리셨다. "짐의 육해군 부대는 긴밀한 협동 하에 적 함대를 요격하여 분전하여 크게 이를 격파했다. 짐은 깊이 이를 가상히 여긴다. 생각건대, 전황은 날마다 급박함을 더하니, 너희들은 더욱 마음을 합하고 힘을 합하여 짐의 신뢰에 부응할 것을 기하라." |
6. 2. 영향
일본군 항공대는 10월 16일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여, 14일 공격으로 손상되어 예인 중이던 경순양함휴스턴에 어뢰를 명중시키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항공대의 손실은 더욱 커졌다. 일본군 항공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항공모함 격침", "전함 격파"와 같은 과장된 대전과를 보고했다.[11] 이 기간 동안 대본영은 전선 부대로부터의 과장된 전과 보고를 그대로 집계하여 발표했다. 10월 19일, 일본군은 "항공모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구축함, 순양함을 포함) 함종 불명 15척 격침・격파"라고 발표했다. 미국에서는 투자자 중 일부가 대본영 발표 내용을 믿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주가가 대폭락하는 사태도 발생했다.실제 미국의 피해는 경미했다(휴스턴도 침몰하지 않았다). 그러나 4일 연속으로 공격을 지속하고, 필리핀 공습과 방공 전투도 계속했기 때문에, 함대의 장병들에게는 피로가 누적되었다. 제2군은 군 지휘관이 할제이에게 호소한 궁핍한 상황을 인정받아, 항공모함 벙커 힐이 후퇴했다. 이로 인해 이 군은 이 함을 잃은 상태로 레이테 만 해전에 임했다. 한편, 제1군의 와스프나 제3군의 렉싱턴처럼 호소했지만 후퇴가 인정되지 않은 예도 있었다. 할제이의 뇌리에는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있었다.
10월 15일, 시마 함대의 기함 나치는 아시가라, 경순양함 아부쿠마 및 구축함 7척(아케보노, 시오, 카스미, 시라누이, 와카바, 하쓰하루, 하쓰시모)을 이끌고 세토 내해를 출격했다. 한편, 미국군 할제이 제독은 암호 해독으로 일본 함대(시마 함대)가 출격한 것을 알게 되자, 손상된 순양함 2척에 항공모함을 포함한 호위 부대를 붙여, 위장 전보를 발신하여 일본 함대를 유인하려 했다.[12] 그러나 일본 함대의 움직임이 둔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함대 전투를 위한 준비를 중단하고, 레이테 상륙 지원에 전념하도록 명령했다.[13]
10월 15일 오후, 제26항공전대의 1식 육상 공격기 수 기가 특공 공격을 목적으로 필리핀의 루손 섬 클라크에서 출격했다(미귀환・전과 불명).
10월 16일 아침에는 연합 함대 사령부에서 해상 호위 총사령부에 이르기까지 호위 함정을 이끌고 미 함대를 추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4] 기함 뉴저지 함상의 할제이는 니미츠에게 다음과 같은 비꼬는 내용의 전문을 발신했다.
칼 솔버그에 따르면 이것은 미국 측에서 유명한 보고라고 한다.[15][16]
대본영 해군부는 잘못된 전과 보고를 천황에게 주상하고, 어가상(御嘉尚)의 칙어도 발표되었다. 국민은 "미국 기동 부대 섬멸"의 대승리에 환호했다. 해군은 10월 16일에 대만 해상에서 항공모함 7척을 포함한 미국 기동 부대를 탐색기가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과에 오인이 있음을 깨달았다.
10월 16일, 연합 함대 사령부는 시마 함대에 귀환하라고 명령한다.[17] 10월 17일, 시마 함대(나치)는 아마미오섬삿카와 만에 손실 없이 입항했다.[18]
10월 19일, 격추된 미군 함재기 조종사를 육군 헌병대가 심문한 결과, 루손 섬을 공습 중인 미군 정규 항공모함이 12척이며, 그 함명이 모두 밝혀져, 대본영 해군부에서 발표한 포르모사 공중전의 전과는 완전히 오인임이 밝혀졌다.[19]
;쇼와(昭和) 19년(1944년) 발표
다음은 대본영에서 발표한 포르모사 공중전의 전과이다.
발표일 | 내용 |
---|---|
10월 12일 17시 20분 | 10월 12일 7시경부터 우세한 적기가 대만에 내습, 15시 30분경 아군과 적군이 교전 중이다. 아군 부대가 거둔 전과 중 13시까지 판명된 격추 적기는 약 100기이다. |
10월 13일 11시 30분 | 1. 아군 항공 부대는 10월 12일 밤 대만 동쪽 해면에서 적 기동 부대를 포착하고 밤새 반복 공격했다. 아군이 거둔 전과 중 현재까지 판명된 것은 다음과 같다. |
10월 14일 17시 | 아군 항공 부대는 이후 계속해서 대만 동쪽 해면의 적 기동 부대를 맹공 중이며, 현재까지 판명된 전과(이미 발표한 것을 포함)는 다음과 같다. |
10월 15일 15시 | 대만 동쪽 해면의 적 기동 부대는 어제 14일부터 동쪽으로 패주 중이며, 아군 부대는 이 적에 대해 반복 맹공을 가해 전과를 확대하는 중이다. 현재까지 판명된 전과(기 발표된 것을 포함)는 다음과 같다. |
10월 16일 15시 | 아군 부대는 궤주 중인 적 기동 부대를 계속 추격 중이며, 현재까지 판명된 전과(기 발표분을 포함)는 다음과 같다. |
10월 17일 16시 | 아군 항공 부대는 16일 대만 동쪽 해면에서 새로 지원 온 적 기동 부대를 추격하여, 항공모함, 전함 각 1척 이상을 격파했다. |
10월 19일 18시 | 아군 부대는 10월 12일 이후 연일 연야 루손 동쪽 해면의 적 기동 부대를 맹공하여 그 과반수의 병력을 괴멸시켜 이를 궤주하게 했다. |
10월 21일 19시 | 대원수 폐하께서는 오늘 대본영 양 막료장을 소집하여 남방군 최고 지휘관, 연합 함대 사령장관, 대만군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칙어를 내리셨다. |
포르모사 공중전에서는 전과를 크게 오인했다. 오인의 원인으로는 야간 공격에 예정되어 있던 조명대가 조명탄 사용의 어려움으로 인해 거의 실시되지 않았고, 야간 수색이 되었지만 접촉하는 기체도 없어 공격 회피, 전과 확인이 지극히 어려웠으며, 자폭기의 해상 화재도 오인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 등이 있다.[22] 제호작전에서는 야간 공격이 중시되었지만, 원래 야간 공격은 목표 전과 인식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숙련도도 향상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23] 미측의 할제이도 공격을 받았을 때 미 함대가 염상하는 모습을 보고 큰 손해를 입었다고 오인했으며, 일본의 미 기동 부대 격멸 보고도 무리가 아니었다.[24]
이 항공전을 지휘한 제2항공함대 사령부는 10월 15일 시점에서 전과 오인을 알아차렸다. 2항함 사령부는 15일에 기존의 전과 판단에 더하여, 최종적으로 항공모함에 대한 전과를 대형, 중형 합쳐 4척 격침으로 판정했다. 즉, 4개 편대로 구성된 항공모함 부대의 한 편대 정도를 격멸할 수 있었지만, 다른 세 편대는 건재하다고 보았다. 그 전까지의 세 편대를 격멸하고, 남은 것은 한 편대, 같은 날의 항공전에서 그것도 격멸 가능하다는 낙관적인 판정에서 역전되었다. 이 전과 판단의 중대한 정정은 대본영에도, 연합함대 사령부에도 보고되지 않았다.[25] 2항함 장관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미 전략 폭격 조사단의 질문에 "타이완 해역 항공전의 전과를 4척 정도로 보고 있었다"라고 증언했다.[26]
10월 16일에는 수색기가 타이완 해역에서 항공모함 7척을 포함한 미국 기동 부대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궤멸된 것으로 알려진 미군 전력이 발견되자 연합함대(니치요시) 사령부에서 연합함대 항공 참모 후치다 미쓰오 중좌, 군령부 항공 참모 스즈키 에이지로 중좌, 제2항공함대 겸 T 공격 부대 항공 참모 다나카 마사오미 소좌, 연합함대 정보 참모 나카지마 치카타카 소좌 4명이 재검토를 실시했다. 1949년 7월 31일에 후치다 미쓰오가 맥아더로부터의 질문에 답한 진술서에 따르면, 다나카를 초치하여, 후치다와 스즈키가 다나카가 지참한 자료를 검토하고, 나카지마의 의견도 구했으며, 그 결과 아무리 상산해도 항공모함 4척 격파 정도로 격침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27] 군령부에서 현지에 파견 조사시킨 미요시 타츠키치도 비슷한 판단을 했다.[21] 연합함대 참모 후치다 미쓰오 대좌에 따르면, 오인에 대해 참모장 신진을 통해 주의를 주고 있으며, 17일의 "제1호 작전 경계" 발령에서도 적 항공모함 10척 건재하에 대처하도록 통달했다. 이 시점에서 해군은 연합함대, 군령부, 각 항공대에 이르기까지 대전과가 오인이라는 것을 공통된 인식으로 하고 있었다.[28] 전후, 다나카 마사오미는 이 재검토 때 논의된 내용에 대해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일(잊어버리는 것)도 있다"라고 말했다.[29]
부인, 부겐빌의 전투에서 이미 전과 보고의 10분의 1이 실제 전과였으며, 전과 오인은 이전부터 문제가 되고 있었다. 나카자와 유 군령부 부장에 따르면, 연합함대 사령부의 보고에서 불확실성을 삭제하고, 같은 사령부에 전과 확인에 더욱 배려하도록 주의를 환기했지만, 같은 사령부로부터 "대본영은 어떤 근거로 연합함대가 보고한 전과를 삭제했는가"라는 강한 항의 전보가 참모장 명의(후쿠도메 시게루 중장)로 타전되었고, 결국 반론 없이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30] 군령부 참모 후지모리 야스오에 따르면, 의문도 있어 군령부 작전과는 더욱 검토를 더했지만, 당분간 공적으로는 현지 부대 보고를 기초로 자료를 작성하는 것 외에 묘안도 없었다고 한다.[31]
육군의 대본영 정보 참모였던 호리 에이조의 회상에 따르면, 필리핀 출장 도중에 타이완 해역에서 항공전 중이라는 것을 듣고, "지금까지의 전법 연구에서 의문 부호를 붙인 항공전이다, 이 눈으로 직접 보겠다"라고 생각하여, 카노야에서 실제 항공병으로부터 전과 확인 방법에 대해 청취 조사를 했지만, 전과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고, "이 성과는 신용할 수 없다. 아무리 많아도 2, 3척, 그것도 항공모함인지도 의문"이라고 대본영 육군부 제2부(정보) 장 앞으로 타전했다.[32] 그 후 작전과에 보고되었지만, 고려되지 않았다고 한다.
호리는 10월 15일에 마닐라에 도착한 후, 17일에 남방총군사령부 제2과에서 타이완 해역 항공전의 전과를 재검토하고, 미군의 건재한 항공모함을 12척으로 계산하여,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 참모 부장 니시무라 토시오 소장에게 보고하고, 더 나아가 항공전의 전과만큼 수상한 것은 없고, 부겐빌 섬의 지상전에서 패배한 것은 해군의 로호 작전의 과도한 전과 보고가 원인이라고 보고했을 때, 미군 함재기에 의한 마닐라 공습이 이루어졌고, 야마시타 대장과 니시무라 소장은 호리의 보고를 믿었다고 한다.[33]
대본영 해군부에 의해 대전과가 오인되었다고 재판정된 사실은, 20일에 열린 필리핀 결전을 위한 육해군 합동 작전 회의에서도 육군 측에 전달되지 않았다. 육군은 오인 전과인 줄도 모르고 루손섬에서의 요격 방침을, "레이테 섬 결전"으로 전략을 대폭 변경하여, 결전 병력을 레이테 섬으로 증파했다. 그러나 (괴멸했을 터인) 미국 기동 부대 등의 공습을 받아, 제1사단만 항공 지원을 받아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지만, 그 외의 제26사단과 제68여단 등은 모두 장비, 물자의 과반수가 바다에 침몰하여, 열심히 쌓아온 필리핀 결전 준비는 물거품이 되었다. 게다가, 루손 섬의 병력이 뽑혀나간 구멍을 메우기 위해, 대만에서 제10사단을 루손 섬에 투입하고, 도미노식으로 오키나와에서 제9사단을 대만으로 이동시켰다.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전력 부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해군 발표의 전과에 의문이 있다는 것이 호리 참모로부터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에게 보고되어, 제14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전 "결전은 루손 섬에서 실시한다"라는 사전 약속을 환상의 대전과에 들떠서 급하게 변경한 대본영 육군부 제1부(작전)와의 방침 대립을 초래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34]
일본은 이 항공전으로 쇼호작전에서 기대했던 T 공격 부대의 거의 대부분을 소모해 버렸다. 그래도 탑승원 80조가 남아있어 즉시 재편에 착수했지만, 빨라야 10월 말까지 회복될 전망이 없어, 쇼호작전의 레이테 만 해전에서, 제6기지 항공 부대는 정예 T 공격 부대의 활약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숙련도가 낮은 혼성 실동기 300기에 미치지 못하는 항공 전력을 주력으로 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35]
또한, T 공격 부대의 작전으로 예정했던, 미 기동 부대가 정박하여 활동이 불충분한 야간에 기습하는 단 작전의 실행도 불가능하게 되었다.[36]
동 항공전 중,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이 신죽에서 아군의 비행기가 속수무책으로 격추되는 것을 보고, 기술적 열세를 알게 된 것이 가미카제 특공대 창설 이유 중 하나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부관 몬지 치카노리에 따르면, 오니시가 볼 수 있는 거리에서 그런 전개는 없었다고 한다.[37]
7. 평가
UP 통신 특파원은 "일본군의 뇌격, 폭격, 전투기 대편대가 전후 10시간에 걸쳐 이 대기동 부대를 덮쳤다. 이번 대전에서도 최대의 해공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격렬함에서는 4개월 전의 마리아나 해전조차 훨씬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이 무시무시한 방공 포화는 일본기를 격추시켰지만, 일본기 편대는 뒤에서부터 큰 파도가 밀려오듯이 우리 머리 위로 쇄도했다"고 보도했다.[38]
미국의 전사 연구가 새뮤얼 모리슨은 일본군의 공습을 가장 격렬한 규모였다고 평가하면서 "우리 항공모함 부대의 방어력이 자국을 지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6월에 이어 다시 입증했다"고 소개하고 있다.[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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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포르투갈 선원들이 이랴 포르모자(lha Formosa, 아름다운 섬)이라고 부른데서 명명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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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人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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