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나사카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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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나사카 히로시는 일본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이자 작가, 사업가이다. 도치기현에서 태어나 만몽학교 전문부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에 입대하여 만주국 전선에 배치되었다. 이후 팔라우 앙가우르 전투에서 미군에 맞서 싸웠으며, 여러 차례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종전 후 귀국하여 서점 사업을 시작, 대성당서점을 창업했고, 검도 교사로 활동하며, 자서전 《영령의 절규―옥쇄의 섬 앙가우르》를 출판했다. 그는 앙가우르섬 위령비 건립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고, 위령 행사 참여와 유족 지원, 팔라우와의 교류에 힘썼다. 2006년 신부전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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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나사카 히로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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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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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후나사카 히로시 |
출생일 | 1920년 10월 30일 |
사망일 | 2006년 2월 11일 |
출생지 | 일본 도치기현 가미쓰가군 니시카타무라 |
묘소 | 조코지 |
군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1년 - 1944년 |
최종 계급 | 육군 군조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제2차 세계 대전 앙가우르 전투 |
제대 후 | |
직업 | 사업가, 다이세이도 서점 대표이사 사장, 남태평양 위령 협회 이사, 다이세이도 도장 관장 |
2. 생애
후나사카 히로시는 도치기현 가미쓰가 군 니시카타 정(오늘날의 도치기시)에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개구쟁이였으며, 소학교, 심상고등소학교, 공민학교를 졸업한 후 와세다 중학 강의록으로 독학하여 전문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1939년 만몽학교 전문부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했다.[1]
1941년 3월, 우쓰노미야 제36부대에 현역으로 입대, 만주 치치하얼 제219부대에 배속되었다. 검도와 총검술 유단자로, 특히 총검술에 뛰어났다. 육군 토야마 학교 출신 준위에게 "허리만으로 3단에 필적한다"라는 평가를 받았다.[2] 소총 사격에도 뛰어나 상장과 감장을 30회 받았다.[2]
1944년 3월 1일, 남방 작전동원령에 따라 제대를 앞두고도 4월 28일 앙가우르 섬에 상륙했다. 당시 23세[3]로, 중대 최고의 모범 병사로 부하들에게 존경받았다.
앙가우르 전투에서 후나사카는 척탄통 및 구포를 사용해 미군 200명 이상을 사살했다.[4] 전투 중 왼쪽 대퇴부에 큰 부상을 입었으나, 일장기로 지혈하고 포복하여 동굴 진지에 매복하는 등 불굴의 정신을 보였다. 빈사 상태의 부상을 여러 번 입었으나 금세 회복하여 '불사신 분대장', '악마의 분대장'으로 불렸다.[4]
식량과 물 부족으로 부대가 괴멸 직전에 이르자, 후나사카는 수류탄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미군 사령부에 단독으로 육탄돌격을 감행했다.[5][6] 수류탄 6발을 몸에 묶고 권총 1정을 든 채 미군 지휘소 20미터 앞까지 침투했으나, 미군에게 뒷목을 가격당해 쓰러졌다.[7]
후나사카는 3일 후 미군 야전병원에서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포로 심문 후 펠렐리우섬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용감한 병사' 전설은 미군 측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감시할 정도였다. 포로가 된 후에도 두 차례 비행장 방화를 계획하는 등 저항을 계속했다. 괌,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텍사스 등지의 수용소를 전전하다 1946년 귀국했다.
일본 육군은 1944년 10월 19일 앙가우르섬 수비대가 옥쇄한 것으로 판단, 후나사카에게 사망 통보를 했기에, 그는 1946년 귀국할 때까지 1년 3개월 동안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어 있었다.[1] 귀향 후 자신의 묘비를 뽑아 버렸고, 한동안 마을 사람들은 그를 유령으로 의심하기도 했다.[1]
전후 후나사카는 미국의 선진성을 배워 일본의 산업, 문화, 교육을 발전시키고자 서점 경영을 구상했다.[1] 시부야역 앞에 1평짜리 가게를 시작으로 대성당서점을 창설했다.[1]
전후 검도 교사 6단으로 승단했다. 검도 5단이었던 미시마 유키오와 검도를 통해 친분을 쌓았고, 미시마가 할복 자살할 때 사용한 칼은 후나사카가 선물한 것이다.[1]
앙가우르섬에 위령비를 세우는 것을 생애 목표로 삼았다. 저서 《영령의 절규―옥쇄의 섬 앙가우르》의 인세와 독자 성금으로 앙가우르섬, 펠렐리우, 코롤, 괌 등에 위령비를 건립했다. 이후 저작권료와 인세 전액을 국제 적십자사에 기부했다.
서점을 경영하면서도 매년 앙가우르섬 위령 행사에 참여하고, 유족들을 모아 위령단을 조직하여 현지 성묘를 이끌었다. 팔라우 원주민을 지원하고 팔라우와 일본 간의 교류를 증진하는 데 힘썼으며, 전몰자 조사와 유족 연락 등 왕성한 활동에 헌신했다.
1981년에는 펠렐리우와 코롤에 있었던 일본군 위안소 위치에 대해 증언하는 책을 썼다.[12]
2. 1. 어린 시절
도치기현 가미쓰가 군의 니시카타 정(오늘날의 도치기시)에서 농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개구쟁이로 동네 불량배였다.[1] 소학교, 심상고등소학교를 마치고 공민학교를 졸업했지만,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와세다 중학의 강의록으로 독학했다.[1] 그 보람이 있어 전문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939년에는 만몽학교 전문부에 입학해 3년간 수학했다.[1]2. 2. 육군 입대
1941년 3월 우쓰노미야 제36부대에 현역으로 입대하여, 직후 만주로 건너가 치치하얼 제219부대에 배속되었다. 치치하얼 제219부대는 우쓰노미야 보병 제59연대를 주체로 한 부대로, 가상 적국인 소련군 침입에 대비하여 노몬한 부근, 알산, 논장, 하이라얼 일대의 국경 경비대로 활약했다. 후나사카 히로시는 제59연대 제1 대대 제1 중대 (통칭 이시하라 중대) 박격포분대에 배속되었다.당시부터 검도와 총검술 유단자였으며, 특히 총검술에 뛰어났다. 치치하얼의 영정에서 훈련 중에 육군 토야마 학교 출신의 준위로부터 "너의 총검술은 허리만으로 3단에 필적한다"라는 보증을 받을 정도의 실력이었다.[2] 후나사카는 박격포 분대장이었지만, 중대 최고의 명 소총 사수로서 입대 이후 사격으로 상장과 감장을 30회 받았다. 치치하얼 제219부대에서 "사격 휘장과 총검술 휘장 두 개를 동시에 받은 것은 후에도 앞으로도 후나사카뿐이다"라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2]
전황이 악화되어 1944년 3월 1일 제59연대에 남방 작전동원령이 하달되어, 4월 28일에 앙가우르 섬에 도착한다. 남방 동원령 하달 당시 후나사카는 제대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대대 주력과 함께 앙가우르 섬에 상륙한다. 당시 후나사카는 23세[3]였으며, 중대에서는 최고의 모범 병사로 여겨져 부하들에게 인망도 두터웠다.
2. 3. 팔라우 앙가우르 전투
앙가우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팔라우-마리아나 전역 최후의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후나사카 히로시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그는 척탄통 및 구포를 사용해 미군 200명 이상을 살상하였다.[4] 수제작전으로 중대가 궤멸되는 가운데, 후나사카는 총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척탄통을 쏘고 계속 후퇴하여 대대의 잔존 병력들과 섬 북서쪽 동굴에 농성하며 유격전을 이행했다.전투 3일째, 후나사카는 미군의 공세에 왼쪽 대퇴부에 열상을 입었다. 몇 시간 동안 방치된 끝에 도착한 군의관은 상처를 보자마자 자살용 수류탄을 쥐여주고 떠나 버렸다. 그러나 후나사카는 붕대 대신 일장기로 다리를 지혈하고 밤새 포복해서 동굴 진지에 매복하였으며, 다음날에는 왼발을 끌면서도 걸을 수는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그 뒤로도 빈사 상태의 부상을 몇 번이나 입었으나 금세 회복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후나사카는 절망적인 전황에서 권총 3연사로 미군 3명을 쓰러뜨리고 노획한 기관단총으로 또 3명을 한꺼번에 사살하고, 왼발과 양팔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총검으로 1명을 척살, 적의 기관총수에게 총검을 투척하여 죽이는 등 귀신같은 분전을 계속했다. 후나사카의 모습을 본 부대원들은 "불사신 분대장", "악마의 분대장"이라는 별명을 붙였다.[4]
그러나 식량도 물도 없는 상태에서 일본군은 서서히 수세에 몰렸고, 부대는 괴멸 지경에 이르렀다. 후나사카는 수류탄 자살을 기도했으나 수류탄이 불발해 실패하고, 기왕 이렇게 된 것 죽기 전에 적어도 적장을 쓰러뜨리겠다고 미군 사령부에 단신으로 자살적 육탄돌격을 감행한다.[5][6] 수류탄 6발을 몸에 묶고 권총 1정을 가지고 전초기지를 돌파, 4일째에는 미국 육군 지휘소 텐트에서 20 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침투했다. 이때까지 입은 부상은 크고 작은 것이 모두 합쳐 24개였으며, 그 중 중상은 왼쪽 대퇴부 열상, 왼쪽 상완부 관통상 2개, 머리의 타박상, 왼쪽 복부 총상 5개가 있었으며, 오른쪽 어깨 염좌와 오른쪽 발목 탈골이 있었다. 또 오랫동안 포복했기 때문에 팔꿈치와 다리의 옷이 다 벗겨졌고, 전투에 의한 화상과 전신에 파고든 포탄 파편에 의해 귀신과 같은 몰골이었다 한다.
당시 미군 지휘소에는 6개 보병대대, 1개 기갑대대, 6개 포병중대, 고사기관포대대 등 총 1만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후나사카는 이 대병력의 지휘관들이 지휘소 텐트에 모일 때를 노려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가 속속 사령부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오른손에 수류탄 안전 마개를 뽑아쥐고 왼손에 권총을 들고 뛰쳐나갔다. 갑자기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괴상한 차림새의 일본군을 발견한 미군은 놀라서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한다.
미군의 동요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령부를 목표로 혼신의 힘으로 돌진하는데, 수류탄 신관을 터뜨리기 직전에 개머리판에 뒷목을 얻어맞고 졸도한다.[7] 미군 군의관은 후나사카를 보고 이미 틀렸다고 하면서도 야전병원으로 옮겼는데, 후나사카는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이것이 할복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만이 할 수 있는 용감한 죽음”이라고 발악했다.[8] 그런데 죽을 줄 알았던 후나사카는 3일 후 미군 야전병원에서 소생했다. 후나사카는 처음 깨어났을 때 주위의 의료기구를 때려부수고 급하게 달려온 헌병의 총구에 몸을 들이대며 빨리 죽이라고 난동을 부렸다. 이 이상한 일본군 이야기는 앙가우르의 미군들 사이에 순식간에 화제가 되어 전설화했다.
2. 4. 포로수용소
그 후 며칠간의 포로 심문을 거쳐 후나사카는 펠렐리우섬의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무렵 이미 "용감한 병사" 전설은 펠렐리우 섬에까지 전해져 미군 측은 특히 "군소 후쿠다[9]"의 언행에 주의하라고 요주의 인물 으뜸으로 그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그러나 포로가 된 후에도 후나사카의 투지는 꺾이지 않았고, 펠렐리우로 이송된 지 2일째에는 빈사 상태의 중상으로 여겨져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다. 게다가 후나사카는 두 차례에 걸쳐 비행장을 불태우는 계획을 세웠지만, 같은 수용소에서 근무하던 F.V. 크렌쇼 상병(F. V. CRENSHAW, 생몰년 불상)에게 저지되어 실패했다. 괌,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텍사스 등지로 종전까지 수용소를 전전하며 1946년에 귀국했다.2. 5. 귀국 및 사업가로 변신
일본 육군의 앙가우르섬 수비대가 1944년 10월 19일에 옥쇄했고, 후나사카 히로시 역시 사망했다는 전사 통보가 같은 해 12월 30일에 본가에 통지되었다.[1] 그래서 후나사카는 1946년에 귀국할 때까지 1년 3개월 동안 죽은 사람으로 취급되어 있었다.[1] 후나사카는 고향에 돌아가자마자 가장 먼저 자기 무덤의 묘비를 뽑아 버렸다.[1] 한동안 마을 사람들은 귀신이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한다.[1]전후 부흥기에 후나사카는 전쟁 때의 강렬한 경험과 눈으로 직접 목도한 미국의 선진성을 배우는 것이 일본의 산업, 문화, 교육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서점 경영을 구상한다.[1] 후나사카는 시부야역 앞에 1평짜리 가게를 열고 여생을 서점 경영으로 사회에 헌신하고 싶다고 마음먹었다.[1] 이후 사업이 번창하여 대성당서점 창설로 이어졌다.[1]
2. 6. 검도
전후 검도 교사 6단까지 승단했다. 검도 5단이었던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와는 검도를 통해 친분을 쌓았고, 이를 계기로 후나사카의 자서전 《영령의 절규―옥쇄의 섬 앙가우르》의 서문을 미시마가 써 주었다. 1970년 미시마가 할복 자살할 때 사용한 미시마의 애도는 후나사카가 선물한 것이었다.[1] 이 경위는 자서 《세키노 마고로쿠》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후나사카는 당시 80세로 검도 범사 10단이었던 모치다 세이지와 대련할 기회를 얻어 모치다에게 도전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경험을 저서 《쇼와의 검성 모치다 세이지》에서 죽도를 잡고 약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땀이 뚝뚝 떨어지고 온몸이 뜨거워져 숨이 차 왔다며, 불가사의했다고 적고 있다.[1]
2. 7. 평화 운동
후나사카 히로시는 앙가우르섬에 위령비를 세우는 것을 자신의 생애 사명으로 여겼다. 그는 저서 《영령의 절규》 후기에 이러한 뜻을 밝혔으며, 책을 읽은 독자들의 성금과 책의 인세를 모아 앙가우르섬뿐만 아니라 펠렐리우, 코롤, 괌 등에도 위령비를 건립했다. 위령비 건립 후에는 저작권료와 인세 전액을 국제 적십자사에 기부했다.서점을 경영하면서도 매년 앙가우르섬 위령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유족들을 모아 위령단을 조직하여 현지 성묘를 인솔하고, 팔라우 원주민을 지원하고 팔라우와 일본 간의 교류를 증진하는 데 힘썼다. 수년간 전몰자 조사와 유족 연락 등 왕성한 활동을 하며 여생을 바쳤다.
1981년에는 펠렐리우와 코롤에 있었던 일본군 위안소 위치에 대해 증언하는 책을 썼다.[12]
3. 저서
제목 | 출판사 | 출판일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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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령의 절규―옥쇄의 섬 앙가우르 전기》(英霊の絶叫 - 玉砕島アンガウル戦記) | 1966년 12월 | ||
《벚꽃아 벚꽃아 펠렐리우섬 동굴전》(サクラ サクラ ペリリュー島洞窟戦) | 1967년 8월 | ||
《옥쇄 암호전문으로 지은 팔라우 사투》( 玉砕 暗号電文で綴るパラオの死闘) | 1968년 8월 | ||
《이오지마―아아! 쿠리바야시 병단》(硫黄島-ああ!栗林兵団) | 1968년 8월 | ||
《순국의 불꽃》(殉国の炎) | 1971년 3월 | ||
《성서와 칼―태평양의 우정》(聖書と刀-太平洋の友情) | 1971년 10월 | ||
《칸노마고로쿠―미시마 유키오 그 죽음의 비밀》(関ノ孫六-三島由紀夫その死の秘密) | 1972년 | ||
《쇼와의 검성 모치다 세이지》(昭和の剣聖・持田盛二) | 1975년 | ||
《비화 팔라우 전기》(秘話パラオ戦記) | 1977년 | ||
《돌의 훈장》(石の勲章) | 1978년 8월 | ||
《멸진의 싸움 속의 전사들 옥쇄의 섬 팔라우 앙가우르》(滅尽争のなかの戦士たち 玉砕島パラオ・アンガウル) | 1979년 5월 | ||
《피바람 203 고지》(血風 二百三高地) | 1980년 8월 | ||
《옥쇄의 섬에 대의는 없었다》(玉砕戦の孤島に大義はなかった) | 1981년 6월 | 동남아 지역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증언도 포함 | |
《영령의 절규 - 옥쇄도 안가울》 | 문예춘추 | 1966년 12월 | 개제 《영령의 절규 - 옥쇄도 안가울 전기》(광인사NF문고, 1996년, 신장판 2015년, 재정판 2022년 12월) |
《사쿠라 사쿠라 페릴리우 섬 동굴전》 | 매일신문사 | 1967년 8월 | |
《옥쇄 암호 전문으로 엮는 팔라우의 사투》 | 요미우리 신문사 | 1968년 8월 | 개제 《육군 "이탈 부대"의 사투 오명 군인들의 은닉된 진실》(광인사NF문고, 2024년) |
《이오지마 - 아! 구리바야시 병단》 | 고단샤 | 1968년 8월 | |
《순국의 불꽃》 | 조출판사 | 1971년 3월 | |
《성서와 칼 - 태평양의 우정》 | 문예춘추 | 1971년 10월 | 개제 《성서와 칼 - 옥쇄도에서 태어난 인도주의의 기적》 (광인사NF문고, 2020년) |
《세키노 마고로쿠 - 미시마 유키오 그 죽음의 비밀》 | 고분샤카파 북스 | 1972년 | |
《쇼와의 검성·모치다 모리츠구》 | 고단샤 | 1975년 | |
《옥쇄전의 고도에 대의는 없었다》 | 광인사 | 1977년 | 개제 《비화 팔라우 전기 - 옥쇄전의 고도에 대의는 없었다》(광인사NF문고, 2000년, 신장판 2016년) |
《돌의 훈장》 | 북양사 | 1978년 8월 | |
《멸진쟁 속의 전사들 옥쇄도 팔라우·안가울》 | 고단샤 | 1979년 5월 | |
《혈풍 203고지》 | 총문사 | 1980년 8월 | 개제 《혈풍 203고지 - 러일 전쟁의 운명을 가른 제3군의 싸움》(광인사NF문고, 2016년) |
《혈풍 페릴리우 섬》 | 총문사 | 1981년 7월 | 개제 《페릴리우 섬 옥쇄전 - 남해의 작은 섬 70일간의 혈전》(광인사NF문고, 2000년, 신장판 2010년, 재정판 2024년 8월) |
참조
[1]
문서
[2]
서적
英霊の絶叫 - 玉砕島アンガウル戦記
光人社NF文庫
[3]
문서
[4]
서적
英霊の絶叫 - 玉砕島アンガウル戦記
光人社NF文庫
[5]
문서
[6]
문서
[7]
서적
英霊の絶叫 玉砕島アンガウル
文藝春秋
1966-12-01
[8]
서적
殉国の炎
潮出版社
1971-03-01
[9]
문서
[10]
뉴스
【訃報】舩坂弘氏(ふなさか・ひろし=大盛堂書店代表取締役会長)
http://www.bmshop.jp[...]
出版書店 業界NEWS
2006-02-14
[11]
웹사이트
Hiroshi Funasaka (1920-2006)
https://www.findagra[...]
2020-05-18
[12]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5-06-19
[13]
뉴스
【訃報】舩坂弘氏(ふなさか・ひろし=大盛堂書店代表取締役会長)
http://www.bmshop.jp[...]
2006-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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