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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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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선거이다. 닉슨은 52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며 49개 주에서 승리했고, 맥거번은 매사추세츠와 워싱턴 D.C.에서만 승리했다. 닉슨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 소련과의 긴장 완화 등 외교적 성과를 바탕으로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맥거번은 베트남 전쟁 종식과 빈곤층 지원을 공약했으나 부통령 후보의 중도 사퇴, 민주당 내부의 분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 선거는 흑인 유권자들의 표심, 남부 지역의 공화당 지지 확산,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작 등 여러 측면에서 미국 정치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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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선거 개요
국가미국
선거 유형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68년
다음 선거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다음 선거 연도1976년
선거일1972년 11월 7일
투표율56.2%
후보자
후보 1리처드 닉슨
정당 1공화당
출신 주 1캘리포니아주
러닝메이트 1스피로 애그뉴
득표수 147,168,710표
득표율 160.7%
선거인단 1520명
승리 주 149개 주
후보 2조지 맥거번
정당 2민주당
출신 주 2사우스다코타주
러닝메이트 2사전트 슈라이버 (토머스 이글턴에서 교체)
득표수 229,173,222표
득표율 237.5%
선거인단 217명
승리 주 21개 주 + DC
선거 결과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지도
주별 획득 선거인 분포도 (빨강: 닉슨, 파랑: 맥거번, 금색: 호스퍼즈)
대통령 당선자리처드 닉슨
당선 정당공화당
선거 전 대통령리처드 닉슨
선거 전 정당공화당
선거 후 대통령리처드 닉슨
선거 후 정당공화당
관련 정보
관련 선거1972년 미국 선거
워터게이트 사건워터게이트

2. 경선 과정

공화당에서는 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높은 인기를 바탕으로 재선에 도전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방문과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 추진 등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캘리포니아주의 자유주의 성향 하원의원 피트 맥클로스키와 오하이오주보수주의 성향 하원의원 존 애시브룩이 각각 베트남 전쟁 반대와 닉슨의 외교 정책 반대를 내걸고 도전했으나,[2] 닉슨은 예비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큰 어려움 없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 부통령 후보로는 현직 스파이로 애그뉴가 다시 지명되었다.

민주당에서는 조지 맥거번, 휴버트 험프리, 조지 월리스, 에드먼드 머스키 등 여러 후보가 경쟁하는 치열한 경선이 펼쳐졌다. 베트남 전쟁 반대를 명확히 내세운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은 풀뿌리 조직의 지지를 업고 예비선거에서 승리하여 최종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민주당 전당대회 이후 부통령 후보 지명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다. 당초 지명된 토머스 이글턴 상원의원이 과거 우울증 치료 사실을 숨긴 것이 드러나면서 논란 끝에 사퇴했고,[32][35][36][37][38][39][40][41] 맥거번은 여러 인물에게 부통령직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한 끝에 사전트 슈라이버를 새로운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42] 이 과정은 맥거번 캠페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 1. 민주당

197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는 총 15명의 후보가 출마를 선언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5][6] 주요 후보로는 사우스다코타주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 미네소타주 상원의원이자 전 부통령이었던 휴버트 험프리, 앨라배마주 주지사 조지 월러스, 메인주 상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 등이 거론되었다. 특히 뉴욕주 하원의원 셜리 치isholm은 미국 주요 정당 역사상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대선 경선 후보였고, 하와이주 하원의원 패치 민크는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민주당 경선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13]

당초 가장 유력한 후보로 여겨졌던 인물은 존 F. 케네디로버트 F. 케네디의 동생인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1969년 채퍼퀴딕 사건의 정치적 부담으로 인해 출마하지 않았다.[7] 케네디의 불출마 이후,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에드먼드 머스키가 당내 중도파의 지지를 받으며 선두 주자로 나섰다.[8][9] 하지만 뉴햄프셔 예비선거를 앞두고 닉슨 행정부 측의 비열한 공작으로 조작된 "캐넉 서한"이 공개되고,[10] 아내에 대한 인신공격성 보도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언론에 의해 왜곡 보도되면서[10][11]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는 위기를 맞았다.

반면, 베트남 전쟁 반대를 명확히 내세운 진보 성향의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은 반전 운동 세력과 풀뿌리 조직의 열성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갔다.[12] 그는 자신이 위원장을 맡아 민주당 경선 규칙을 개혁한 덕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선거 과정에서 언론과 경쟁 후보들은 맥거번에게 "사면, 낙태, 마약(acid)"이라는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워 공격했다.[14][15]

인종차별주의적 발언으로 악명이 높았던 조지 월러스 주지사는 미국 남부 백인 노동자층과 북부의 소외된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며 초반 경선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으나,[16] 1972년 5월 15일 메릴랜드주 로럴 유세 도중 아서 브레머가 쏜 총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고 사실상 경선을 중단했다.[16]

결국 맥거번은 당내 기성 정치 세력의 견제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풀뿌리 운동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며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최종 지명되었다. 하지만 그가 주도했던 민주당 경선 규칙 개혁은 기존의 유력 정치인들과의 갈등을 야기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본선에서 맥거번 캠페인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공화당의 닉슨 후보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맥거번 캠페인이 본선에서 심각한 당내 분열과 자금난에 직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2. 1. 1. 후보자

=== 공화당 ===

사우스다코타주의 연방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


미네소타주의 전 연방 상원의원 '''유진 매카시'''


워싱턴주의 연방 상원의원 '''헨리 M. 잭슨'''


1972년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그 해 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통해 양국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을 추진한 점 등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여론 조사에서도 닉슨은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닉슨은 두 명의 도전자와 경쟁했다. 캘리포니아주 출신의 자유주의 성향 하원의원 피트 맥클로스키는 베트남 전쟁 반대를 내걸고 출마했으며, 오하이오주 출신의 보수주의 성향 하원의원 존 애시브룩은 닉슨의 중화인민공화국소련과의 관계 개선 정책에 반대하며 출마했다.[2] 첫 경선인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닉슨은 67.6%의 득표율로 압승했으며, 맥클로스키는 19.8%, 애시브룩은 9.7%를 얻는 데 그쳤다.[2]

결과적으로 닉슨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1,324명 중 1,323명의 지지를 확보하며 손쉽게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었다. 뉴멕시코 출신 대의원 1명만이 맥클로스키를 지지했다. 부통령 후보로는 현직 스파이로 애그뉴가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다시 지명되었다. 당내 온건파는 넬슨 록펠러를, 닉슨 자신은 존 코널리를 부통령 후보로 고려하기도 했으나, 애그뉴의 핵심 지지층인 보수파의 이탈을 우려하여 결국 애그뉴를 유임시키기로 결정했다.

1972년 공화당 대통령 예비 선거 결과[3]
후보득표수득표율
리처드 M. 닉슨 (현직)5,378,70486.9%
약속되지 않은 대의원317,0485.1%
존 M. 애시브룩311,5435.0%
폴 N. 매클로스키132,7312.1%
조지 C. 월리스20,4720.3%
"표시된 이름 없음"5,3500.1%
기타22,4330.4%
합계6,188,281100%



한편, 베트남 전쟁 반대 참전군인회 소속 활동가 7명이 공화당 전당대회를 방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연방 검찰에 기소되었으나, 플로리다주 게인즈빌의 연방 배심원단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았다.[4]

=== 민주당 ===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주별 득표 1위를 차지한 후보
휴버트 험프리, 조지 맥거번, 조지 월리스, 에드먼드 머스키, 헨리 M. 잭슨, 셜리 치좀, 윌버 밀스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승자 독식제 주에서 승리한 후보
맥거번, 월리스, 험프리, 머스키, 치좀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비치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모습


민주당에서는 총 15명의 후보가 대통령 후보 지명을 얻기 위해 경쟁에 나섰다.[5][6]

이 중 셜리 치좀은 미국 역사상 주요 정당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자였으며,[13] 패치 민크는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 경선 출마자였다.[13]

당초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던 인물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F. 케네디 상원의원의 막내 동생인 테드 케네디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이었다. 그러나 1969년 발생한 채퍼퀴딕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타격을 입고 결국 1972년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7]

케네디의 불출마 선언 이후,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이 유력 주자로 떠올랐다.[8][9] 그는 당내 중도파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뉴햄프셔 예비선거를 앞두고 그의 선거 운동은 큰 위기를 맞았다. ''맨체스터 유니언-리더'' 신문에 머스키가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는 내용의 편지, 이른바 "캐넉 서한(Canuck letter)"이 실린 것이다. 이 편지는 훗날 닉슨 행정부의 비윤리적 선거 공작의 일환으로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지만,[10] 당시에는 프랑스계 미국인 유권자가 많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머스키의 지지율에 타격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신문은 머스키의 부인 제인 머스키가 선거 운동 중 술을 마시고 저속한 농담을 했다는 인신공격성 기사까지 내보냈다. 머스키는 눈보라 속에서 신문사 앞에서 연설하며 아내를 감정적으로 변호했는데, 언론은 그가 눈물을 흘렸다고 보도했다.[10][11] 머스키는 그것이 녹은 눈송이였다고 해명했지만,[10]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이미지를 잃고 지지율 하락을 겪게 되었다.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했고, 이후 경선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반면, 베트남 전쟁 반대와 진보적 가치를 내세운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은 반전 운동 세력과 풀뿌리 조직의 열성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점차 세력을 넓혀갔다.[12] 그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 방식을 개혁하는 위원회를 이끌며 예비선거의 중요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고, 이러한 변화된 제도는 그의 경선 승리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맥거번은 뉴햄프셔에서 예상 밖의 2위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고, 이후 위스콘신, 매사추세츠 등 주요 경선에서 승리하며 선두 주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4월 25일 매사추세츠 예비선거 승리 직후, 언론인 로버트 노바크는 익명의 민주당 상원의원(훗날 토머스 이글턴으로 밝혀짐)의 말을 인용하여 맥거번이 사면, 낙태, 마리화나 합법화를 지지한다는 인식을 퍼뜨렸다.[14][15] 이른바 "사면, 낙태, 마약(amnesty, abortion, and acid)" 프레임은 맥거번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특히 휴버트 험프리는 네브래스카 예비선거 등에서 이를 집중 공격했다.[14][15]

앨라배마주 주지사 조지 월리스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3당 후보로 출마했던 인물로, 인종 차별주의적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지만 미국 남부 백인 노동자층과 북부의 불만 유권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16] 그는 플로리다 예비선거에서 압승하는 등 초반 강세를 보였으나, 1972년 5월 15일 메릴랜드주 로럴 유세 도중 아서 브레머가 쏜 총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16] 피격 다음 날 미시간과 메릴랜드 예비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사실상 선거 운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7월에 경선을 포기했다.

결국 맥거번은 당 주류 세력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풀뿌리 운동에 힘입어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며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가 주도하여 개정한 민주당 경선 규칙은 당원들의 참여를 확대했지만, 기존 유력 정치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켜 당내 분열을 야기하기도 했다. 많은 민주당 기성 정치인들이 맥거번 지지를 거부하거나 심지어 닉슨을 지지하기도 했으며, 이는 맥거번 캠페인의 자금난으로 이어졌다. 뮤지션 사이먼 앤 가펑클과 록 밴드 시카고 등이 맥거번을 위한 모금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1972년 민주당 대통령 예비 선거 결과[3]
후보득표수득표율
휴버트 H. 험프리4,121,37225.8%
조지 S. 맥거번4,053,45125.3%
조지 C. 월리스3,755,42423.5%
에드먼드 S. 머스키1,840,21711.5%
유진 J. 매카시553,9553.5%
헨리 M. 잭슨505,1983.2%
셜리 A. 치좀430,7032.7%
제임스 T. 샌포드331,4152.1%
존 V. 린지196,4061.2%
샘 W. 요티79,4460.5%
윌버 D. 밀스37,4010.2%
월터 E. 폰트로이21,2170.1%
약속되지 않은 대의원19,5330.1%
에드워드 M. 케네디16,6930.1%
루퍼트 V. 하트케11,7980.1%
패치 M. 민크8,2860.1%
"표시된 이름 없음"6,2690.0%
기타5,1810.0%
합계15,993,965100%



'''주요 후보 지지자'''[17][18][19][20][21][22][23][24][25][26][27][28][29][30][31][89][90][91][92][93][94][95]


  • '''에드먼드 머스키''': W. 애버럴 해리먼(전 뉴욕 주지사, 전 상무장관), 해럴드 휴즈(아이오와 상원의원), 버치 바이(인디애나 상원의원), 애들레이 스티븐슨 3세(일리노이 상원의원), 마이크 그래블(알래스카 상원의원), 스티븐 M. 영(전 오하이오 상원의원), 밀턴 샤프(펜실베이니아 주지사), 마이클 디샐(전 오하이오 주지사), 거트루드 W. 도나헤이(오하이오 재무관), 존 글렌(우주 비행사)
  • '''조지 맥거번''': 프랭크 처치(아이다호 상원의원), 존 V. 터니(캘리포니아 상원의원)
  • '''조지 월리스''': 레스터 매덕스(전 조지아 주지사)
  • '''셜리 치좀''': 론 델럼스(캘리포니아 하원의원), 베티 프리단(페미니스트 작가), 글로리아 스타이넘(페미니스트 언론인), 제시 잭슨(목사)
  • '''테리 샌포드''': 린든 B. 존슨(전 대통령)
  • '''헨리 M. 잭슨''': 지미 카터(조지아 주지사)
  • '''휴버트 H. 험프리''': 잭 센센브레너(콜럼버스 시장)


'''민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지명 투표 결과 (1차 투표)'''

'''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른 인물'''

맥거번은 부통령 후보로 여러 인물을 고려했다. 최종적으로 미주리주 상원의원 토머스 이글턴을 선택했으나, 이글턴이 과거 우울증 치료 사실을 숨긴 것이 드러나면서 논란 끝에 사퇴했다. 이후 맥거번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매제이자 초대 평화 봉사단 단장, 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서전트 슈라이버를 새로운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물망에 올랐던 다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루빈 애스큐: 플로리다 주지사
  • 프랭크 처치: 아이다호 상원의원
  • 존 길리건: 오하이오 주지사
  • 휴버트 험프리: 전 부통령
  • 에드워드 케네디: 매사추세츠 상원의원
  • 패트릭 루시: 위스콘신 주지사
  • 윌버 밀스: 아칸소 하원의원
  • 월터 먼데일: 미네소타 상원의원
  • 에드먼드 머스키: 메인 상원의원
  • 게일로드 넬슨: 위스콘신 상원의원
  • 로렌스 오브라이언: 민주당 전국 위원회 의장
  •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코네티컷 상원의원
  • 케빈 화이트: 보스턴 시장

2. 1. 2. 예비선거

=== 공화당 ===

리처드 닉슨은 1972년 당시 인기가 높은 현직 대통령이었다. 그는 그 해 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고, 데탕트 정책을 통해 소련과의 관계를 진전시킨 것으로 평가받았다. 여론 조사에서 닉슨은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닉슨은 두 명의 후보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자유주의 성향 하원의원 피트 매클로스키는 반전(反戰)을 내걸고 출마했고, 오하이오 출신의 보수주의 성향 하원의원 존 애시브룩은 닉슨의 중화인민공화국 및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에 반대하며 출마했다.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닉슨은 67.6%를 득표하여 압승했고, 매클로스키는 19.8%, 애시브룩은 9.7%를 얻었다.[2]

결과적으로 닉슨은 공화당 전당대회 대의원 1,324명 중 1,323명을 확보하며 압도적인 지지를 확인했다. 매클로스키는 뉴멕시코 출신 대의원 1명의 지지를 받는 데 그쳤다. 부통령 스파이로 애그뉴 역시 별다른 반대 없이 재지명되었다. 공화당 온건파와 닉슨 본인 모두 애그뉴를 교체하려는 의중이 있었으나(온건파는 넬슨 록펠러를, 닉슨은 존 코널리를 선호했다), 애그뉴의 보수 지지층 이탈을 우려하여 결국 재지명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1972년 공화당 대통령 예비 선거 결과[3]
후보득표수득표율
리처드 M. 닉슨 (현직)5,378,70486.9%
약속되지 않은 대의원317,0485.1%
존 M. 애시브룩311,5435.0%
폴 N. 매클로스키132,7312.1%
조지 C. 월리스20,4720.3%
"표시된 이름 없음"5,3500.1%
기타22,4330.4%
합계6,188,281100.0%



=== 민주당 ===

총 15명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해 경쟁했다. 주요 후보는 다음과 같다:[5][6]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주 주지사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F. 케네디 상원의원의 막내 동생인 미국 상원 원내총무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당초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69년 채퍼퀴딕 사건의 여파로 결국 출마하지 않았다.[7] 케네디의 불출마 선언 이후,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였던 메인주 상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가 유력 주자로 떠올랐다.[8][9]

그러나 머스키는 뉴햄프셔주 예비 선거 직전, ''맨체스터 유니언-리더'' 신문에 게재된 이른바 "캐넉 서한(Canuck letter)"으로 타격을 입었다. 이 편지는 머스키가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경멸하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사실 닉슨 측의 공작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뉴잉글랜드 북부 프랑스계 미국인 유권자들의 지지 기반을 흔들었다.[10] 연이어 해당 신문은 머스키의 아내 제인 머스키가 선거 운동 중 술을 마시고 저속한 농담을 했다고 보도하며 인신공격을 가했다. 머스키는 눈보라 속에서 신문사 앞에서 아내를 감정적으로 변호하는 연설을 했는데, 언론은 그가 연설 도중 눈물을 흘렸다고 보도했다. 머스키는 눈물이 아니라 녹은 눈송이였다고 해명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냉정하고 이성적인 이미지가 손상되었다.[10][11]

한편, 선거 2년 전부터 반전과 진보를 기치로 내걸고 출마를 선언한 사우스다코타주 상원의원 조지 맥거번은 반전 운동 세력과 풀뿌리 조직의 지지를 바탕으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12] 그는 자신이 개정에 참여했던 새로운 예비선거 규칙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1972년 1월 25일, 뉴욕주 하원의원 셜리 치점이 출마를 선언하며 주요 정당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대선 경선 후보가 되었고, 하와이주 하원의원 패치 민크 역시 출마하여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민주당 경선 후보가 되었다.[13]

4월 25일, 맥거번은 매사추세츠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며 상승세를 탔다. 그러나 이틀 뒤 언론인 로버트 노바크는 익명의 민주당 상원의원(훗날 토머스 이글턴으로 밝혀짐)의 발언을 인용하며 "사람들은 맥거번이 사면, 낙태, 대마초 합법화를 지지한다는 것을 모른다. 중부 아메리카, 특히 가톨릭 신자가 많은 중부 아메리카가 이를 알게 되면 그는 끝장이다"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로 인해 맥거번은 '사면, 낙태, 마약(acid)' 후보라는 부정적인 프레임에 갇히게 되었고, 이는 특히 네브래스카주 예비선거에서 휴버트 험프리 측의 주요 공격 소재가 되었다.[14][15]

앨라배마주 주지사 조지 월리스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3당 후보로 출마했던 인물로, 인종차별주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미국 남부(플로리다 예비선거에서 거의 모든 카운티 승리)와 미국 북부의 소외된 유권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으며 돌풍을 일으켰다.[16] 그러나 5월 15일, 메릴랜드주 로럴 유세 현장에서 아서 브레머에게 총격을 당해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월리스는 피격 다음 날 미시간주메릴랜드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사실상 선거 운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7월에 경선을 포기했다.

결국 맥거번은 당내 기성 세력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풀뿌리 운동의 힘으로 예비선거에서 승리하여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맥거번은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분열된 당의 후보 지명 절차를 개혁하기 위한 위원회(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를 이끌었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가 만든 새로운 규칙은 기존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많은 민주당 유력 인사들의 반발을 샀고, 이들 중 상당수는 맥거번 캠페인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닉슨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는 맥거번 캠페인이 닉슨에 비해 자금 조달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 요인이 되었다.

1972년 민주당 대통령 예비 선거 결과[3]
후보득표수득표율
휴버트 H. 험프리4,121,37225.8%
조지 S. 맥거번4,053,45125.3%
조지 C. 월리스3,755,42423.5%
에드먼드 S. 머스키1,840,21711.5%
유진 J. 매카시553,9553.5%
헨리 M. 잭슨505,1983.2%
셜리 A. 치isholm430,7032.7%
제임스 T. 샌포드331,4152.1%
존 V. 린지196,4061.2%
샘 W. 요티79,4460.5%
윌버 D. 밀스37,4010.2%
월터 E. 폰트로이21,2170.1%
약속되지 않은 대의원19,5330.1%
에드워드 M. 케네디16,6930.1%
루퍼트 V. 하트케11,7980.1%
패치 M. 민크8,2860.1%
"표시된 이름 없음"6,2690.0%
기타5,1810.0%
합계15,993,965100.0%



2. 1. 3. 전당대회

1972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이 설계한 새로운 경선 시스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시스템은 풀뿌리 조직과 반전 단체의 지지를 받는 맥거번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결과에 불만을 품은 당내 다른 계파들이 본선에서 맥거번 후보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총 15명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해 경쟁에 나섰다.[5][6] 주요 후보는 다음과 같다.

1969년 채퍼퀴딕 사건으로 유력 후보였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출마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1968년 부통령 후보였던 중도파 에드먼드 머스키가 당 주류의 지지를 받으며 앞서 나갔다. 그러나 뉴햄프셔주 예비선거 과정에서 자신과 아내에 대한 비방 편지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지지율이 하락했다. 반면, 맥거번은 예상을 깨고 근소한 차이로 2위를 차지하며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맥거번 캠프는 게리 하트를 중심으로 효과적인 선거 운동을 펼쳤다.

조지 월리스 주지사는 남부뿐 아니라 북부의 불만층 유권자들에게도 호소하며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으나, 선거 운동 중 아서 브레머에게 총격을 당해 하반신 마비가 되면서 사실상 경선을 중단했다. 피격 다음 날 미시간주메릴랜드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했지만, 더 이상 선거 운동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결국 맥거번은 풀뿌리 조직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당 주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며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최종 지명되었다. 맥거번은 과거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혼란 이후, 후보 지명 절차를 개혁하는 위원회(맥거번-프레이저 위원회)를 이끌었다. 이 위원회가 만든 새로운 규칙은 당원들의 의사가 후보 선출에 더 직접적으로 반영되도록 했으며, 이후 민주당 경선 방식의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기존의 당 유력 인사들과의 갈등이 생겨났고, 일부는 본선에서 맥거번을 지지하지 않거나 심지어 리처드 닉슨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는 본선에서 맥거번이 닉슨에 비해 현저하게 불리한 자금 상황에 놓이는 원인이 되었다.

'''민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지명 투표 결과'''

이름득표비고
조지 맥거번1864.95대통령 후보
헨리 M. 잭슨525
조지 월리스381.7
셜리 치점151.95
테리 샌포드77.5
휴버트 험프리66.7
윌버 밀스33.8
에드먼드 머스키24.3
테드 케네디12.7
샘 요티10
웨인 헤이스5
존 린제이5
프레드 해리스2
유진 매카시2
월터 먼데일2
램지 클라크1
월터 폰트로이1
밴스 하트케1
해럴드 휴즈1
패치 민크1
총투표수3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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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재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닉슨은 당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통해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고,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을 추진한 외교적 성과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닉슨은 두 명의 도전자와 맞붙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자유주의 성향 하원의원 피트 맥클로스키는 베트남 전쟁 반대를 내세웠고, 오하이오 출신의 보수주의 성향 하원의원 존 애시브룩은 닉슨의 중화인민공화국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에 반대하며 출마했다.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닉슨은 67.6%를 득표하며 압승했고, 맥클로스키는 19.8%, 애시브룩은 9.7%를 얻는 데 그쳤다.[2]

'''1972년 공화당 대통령 예비 선거 결과'''[3]

후보득표수득표율
리처드 M. 닉슨 (현직)5,378,70486.9%
약속되지 않은 대의원317,0485.1%
존 M. 애시브룩311,5435.0%
폴 N. 매클로스키132,7312.1%
조지 C. 월리스20,4720.3%
"표시된 이름 없음"5,3500.1%
기타22,4330.4%
합계6,188,281100%



결국 닉슨은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총 1,324명의 대의원 중 1,323명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맥클로스키는 뉴멕시코 대의원 1명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부통령 후보로는 현직 부통령 스파이로 애그뉴가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로 재지명되었다. 당내 온건파는 넬슨 록펠러를, 닉슨 자신은 존 코널리를 부통령 후보로 고려하기도 했으나, 애그뉴의 강력한 보수 지지층을 의식하여 결국 애그뉴를 유임시키는 것으로 결정했다.

2. 2. 공화당

상세 내용은 1972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예비 선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공화당 내에서는 현직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재선에 도전했다. 그에게 도전한 주요 후보는 다음과 같다.

닉슨은 예비선거 과정에서 두 후보의 도전을 받았으나, 당내에서 큰 어려움 없이 후보 자리를 확보했다.[2] 상세한 경선 과정과 결과는 전당 대회 섹션에서 다룬다.

2. 2. 1. 전당 대회

=== 공화당 ===

1972년, 공화당은 높은 인기를 누리던 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했다. 닉슨은 그 해 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고, 데탕트 정책으로 소련과의 긴장 완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2]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의 초기 징후가 있었으나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여론 조사에서 닉슨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는 두 명의 후보로부터 도전을 받았는데, 캘리포니아주 출신의 자유주의 성향 하원의원 피트 매클로스키는 반전(反戰)과 반닉슨을 내세웠고, 오하이오주 출신의 보수주의 성향 하원의원 존 M. 애시브룩은 닉슨의 중화인민공화국소련과의 데탕트 정책에 반대했다.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닉슨은 67.6%를 득표하여 19.8%를 얻은 매클로스키와 9.7%를 얻은 애시브룩을 크게 앞섰다.[2]

1972년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닉슨은 대의원 1,324명 중 1,323명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후보로 확정되었다. 매클로스키는 뉴멕시코주 대의원 1명의 지지를 받는 데 그쳤다. 부통령으로는 현직 스파이로 애그뉴가 박수갈채 속에 재지명되었다. 공화당 내 온건파와 닉슨 자신은 각각 넬슨 록펠러나 존 코널리를 새로운 부통령 후보로 고려하기도 했으나, 애그뉴의 보수 지지층 이탈을 우려하여 결국 애그뉴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리처드 닉슨
현직 대통령, 캘리포니아주 출신

존 애시브룩
오하이오주 선출 연방 하원 의원

피트 매클로스키
캘리포니아주 선출 연방 하원 의원

=== 민주당 ===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부통령 후보 지명 과정은 혼란스러웠다. 처음에 토머스 이글턴 상원의원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과거 우울증으로 전기 충격 요법 치료를 받은 사실을 맥거번에게 숨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맥거번은 처음에는 이글턴을 "1000%" 지지한다고 밝혔으나, 사흘 후 이글턴에게 사퇴를 요청했다. 이 일은 맥거번의 선거 운동에 우유부단하다는 인상을 주어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토머스 이글턴


일주일에 걸쳐 6명의 저명한 민주당 인사가 공개적으로 부통령 후보 지명을 거절한 후, 케네디 가의 의형제이자 전 프랑스 대사, 빈곤 퇴치 전쟁 지도자였던 사전트 슈라이버가 결국 후보직을 수락했다. 슈라이버는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특별 회기에서 공식적으로 지명되었다. 이 무렵 맥거번의 지지율은 여론 조사에서 42%에서 24%로 급락했다.

수백 명의 대의원이 맥거번에게 반대하거나 다른 이유로 불만을 품은 상황에서 부통령 후보 지명 투표는 혼란스러웠고, 70명 이상의 후보에게 표가 분산되었다. 주요 후보별 득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후보득표수
토머스 이글턴1742
프랜시스 팔렌설도405
마이크 그래블226
엔디콧 피보디108
클레이본 W. 스머더스74
버치 베이62
피터 로디노57
지미 카터30
셜리 치isholm20
문 랜드리우18.5
에드워드 브리싯18
에드워드 케네디15
프레드 해리스14
리처드 해처11
해럴드 휴즈10
조셉 몬토야9
윌리엄 가이, 아들레이 스티븐슨 3세각 8
로버트 버그랜드, 세자르 차베스, 윌버 밀스각 5
웬델 앤더슨, 스탠리 아놀드, 로널드 데람스, 존 후리한, 로베르토 몬드라곤각 4
루벤 애스큐, 허먼 바디로, 유진 매카시, 클레이본 펠, 테리 샌포드각 3
램지 클라크, 리처드 데일리, 존 데칼로, 어니스트 그뤼닝, 로저 머드, 에드먼드 머스키, 클로드 페퍼,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패트릭 테일러각 2
브루노 아그놀리, 어니스트 올브라이트, 윌리엄 바렛, 다니엘 베리건, 필립 베리건, 줄리언 본드, 하그로브 보울스, 아치 벙커, 필립 버튼, 윌리엄 채플리, 로턴 차일즈, 프랭크 처치, 레온 쿡, 조지 도디, 로버트 드리난, 닉 갤리피아나키스, 존 굿리치, 마이클 그리핀, 마사 그리피스, 찰스 해밀턴, 패트리샤 해리스, 제임스 헌트, 다니엘 이노우에, 헨리 M. 잭슨, 로버트 칼리스, 앨라드 로웬스타인, 마오쩌둥, 엘리너 맥거번, 마사 미첼, 랠프 네이더, 조지 노크로스, 제리 루빈, 프레드 시먼, 조 스미스, 벤자민 스포크, 패트릭 타볼라치, 조지 월리스각 1
기타88.49



부통령 후보 지명 투표가 길어져 맥거번과 이글턴은 새벽 3시경에야 지명 수락 연설을 해야 했다.

2. 3. 기타 정당

미국 독립당은 당초 1968년 대선에 같은 당 후보로 나섰던 조지 월리스(당시 앨라배마주지사)를 다시 후보로 내세우려 했으나, 1972년 5월 월리스가 총격 사건으로 하반신 마비가 되면서 계획을 철회했다. 대신 공화당 소속 미국 하원 의원이었던 존 G. 슈미츠를 대통령 후보로, 토마스 J. 앤더슨을 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슈미츠는 1972년 선거에서 유일한 주요 제3 정당 후보였다. 그는 32개 주 선거 명부에 이름을 올렸고, 총 1,099,482표를 득표했다. 그러나 어떤 주에서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으며 선거인단 표는 한 표도 얻지 못했다. 다만 보수 성향이 강한 아이다호주의 4개 군에서는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 후보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43] 특히 제퍼슨군에서의 슈미츠의 득표율은 1936년 윌리엄 렘키가 노스다코타주 일부 군에서 28% 이상을 득표한 이후, 자유주 또는 남북전쟁 이후 주에서 제3 정당 후보가 기록한 최고 득표율이었다.[44] 슈미츠는 동료 존 버치 협회 회원인 배우 월터 브레넌의 지지를 받았으며, 브레넌은 그의 선거 운동 재무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45] 슈미츠는 1990년대 후반 그의 딸 메리 케이 르토노가 아동 성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벤자민 스폭, 의사(인민당)


새롭게 창당된 자유당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 존 호스퍼스를 대통령 후보로, 토니 네이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들은 콜로라도주워싱턴주에서만 정식 후보로 등록되었고, 다른 4개 주에서는 공식적인 기명 투표(write-in) 후보였으며 총 3,674표를 얻었다. 비록 어떤 주에서도 승리하지 못했지만, 버지니아주의 공화당 소속 신의 없는 선거인 1명으로부터 선거인단 표 1표를 얻었다.[46] 이로써 부통령 후보였던 토니 네이선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선거인단 표를 받은 여성이자 유대인이 되었다.[46]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정치 활동가 린다 제니스를 대통령 후보로, 앤드루 풀리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1971년에 결성된 인민당은 의사 벤자민 스폭을 대통령 후보로, 줄리어스 홉슨을 부통령 후보로 각각 내세웠다.

3. 선거 과정

맥거번 측은 베트남 전쟁의 즉각적인 종전과 국가 빈곤층을 위한 최저 소득 보장 정책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며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32] 하지만 예비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들로 인해 그의 외교 정책이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갔고, 이는 선거 운동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공화당은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맥거번 후보를 급진 좌익 극단주의자로 몰아붙였고, 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선거 기간 내내 여론 조사에서 큰 차이로 맥거번을 앞서 나갔다.

대부분의 여론 조사에서 맥거번의 지지율은 닉슨에 비해 상당히 뒤처졌지만, 매사추세츠 상원의원 테드 케네디를 러닝 메이트로 선택했을 경우 지지율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다. 맥거번과 그의 선거 참모들은 케네디에게 부통령 후보직을 수락하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했지만, 케네디는 계속해서 거절했다. 대신 그는 미국 하원 의원이자 하원 세입 위원회 위원장인 윌버 밀스 (아칸소)와 보스턴 시장 케빈 화이트를 추천했다.[32] 이후 휴버트 험프리, 코네티컷 상원의원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미네소타 상원의원 월터 먼데일에게도 부통령 후보직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결국 미주리 상원의원 토머스 이글턴이 제안을 수락했다.[32]

그러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글턴의 부통령 후보 지명 비준 투표는 순탄치 않았다. 수백 명의 대의원들이 맥거번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졌고, 최소 세 명의 다른 후보가 추가로 지명되었으며 70명이 넘는 후보에게 표가 분산되는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33] 텍사스 주 하원 의원 프랜시스 파렌홀드를 지지하며 이글턴을 반대하는 풀뿌리 운동이 상당한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최종 투표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34] 부통령 후보 선출 투표가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맥거번과 이글턴은 현지 시간으로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수락 연설을 할 수 있었다.

전당 대회가 끝난 후, 이글턴이 과거 임상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전기 충격 요법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 큰 문제는 이글턴이 이 정보를 맥거번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당시 ''타임'' 잡지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7%가 "이글턴의 의료 기록이 투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지만,[35] 언론은 그의 "충격 요법" 치료 사실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맥거번은 이 논란이 자신의 핵심 선거 공약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킬 것을 우려했다.[35] 맥거번은 이글턴의 주치의를 포함한 정신과 의사들과 비밀리에 상담했고, 그들은 이글턴의 우울증 재발 가능성이 있으며, 만약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경우 국가 안보에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36][37][38][39][40] 맥거번은 처음에는 이글턴을 "1000%" 지지한다고 밝혔지만,[41] 언론의 압박과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사흘 만에 이글턴에게 사퇴를 요청했다. 러닝 메이트를 둘러싼 이러한 혼란과 입장 번복은 맥거번 선거 운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맥거번은 다시 부통령 후보를 찾아야 했다. 그는 테드 케네디, 에드먼드 머스키, 휴버트 험프리,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래리 오브라이언, 루빈 아스큐 등 6명의 유력 민주당 인사들에게 부통령직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결국 존 F. 케네디, 로버트 F. 케네디, 테드 케네디의 매형이자 전 주 프랑스 미국 대사, 전 평화 봉사단 단장을 역임했던 사전트 슈라이버가 제안을 수락했다.[42] 슈라이버는 민주당 전국 위원회 특별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이글턴 사태를 겪으면서 맥거번의 지지율은 41%에서 24%로 급락했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중 여론 조사 추이 그래프
빨간색: 리처드 닉슨, 파란색: 조지 맥거번, 주황색: 조지 월러스 (민주당 예비선거 출마)


아래 표는 1972년 2월부터 선거일까지 주요 여론 조사 기관의 조사 결과를 보여준다. 조지 월리스는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으나, 본선에서 무소속 출마 가능성도 제기되어 일부 여론 조사에서는 이를 반영하기도 했다. 월리스가 민주당 후보 지명에 실패할 경우 무소속으로 출마할지 여부는 선거철까지 불확실했으며, 일부 여론 조사는 이를 가정하고 실시되었다.

여론 조사 기관조사 날짜리처드 닉슨 (공화)조지 맥거번 (민주)조지 월리스 (무소속/민주)기타미정격차 (%)
해리스[47]1971년 2월45%34%12%9%11
해리스[47]1971년 4월46%36%13%5%10
해리스[48]1971년 5월47%33%11%9%14
해리스[49]1971년 8월 24–27일48%33%13%6%15
해리스[48]1971년 11월49%31%12%8%18
갤럽[50]1972년 2월 4–7일49%34%11%6%15
해리스[51][53]1972년 2월 28일 – 3월 7일53%28%13%6%25
해리스[51][53]1972년 2월 28일 – 3월 7일 (월리스 제외)59%32%-9%27
해리스[51][53]1972년 4월 1–7일47%29%16%8%18
해리스[51][53]1972년 4월 1–7일 (월리스 제외)54%34%-12%20
갤럽[52]1972년 4월 15–16일46%31%15%8%15
갤럽[52]1972년 4월 21–24일45%32%16%7%13
갤럽[52]1972년 4월 28일 – 5월 1일43%35%15%7%8
해리스[53]1972년 5월 9–10일40%35%17%8%5
해리스[53]1972년 5월 9–10일 (월리스 제외)48%41%-11%7
갤럽[54]1972년 5월 26–29일43%30%19%8%13
갤럽[54]1972년 5월 26–29일 (월리스 제외)53%34%-13%19
해리스[55]1972년 6월 7–12일45%33%17%5%12
해리스[55]1972년 6월 7–12일 (월리스 제외)54%38%-8%16
갤럽[56]1972년 6월 16–19일45%32%18%5%13
갤럽[56]1972년 6월 16–19일 (월리스 제외)53%37%-10%16
해리스[57]1972년 7월 1–6일55%35%-10%20
7월 10–13일: 민주당 전당대회
갤럽[58]1972년 7월 14–17일56%37%-7%19
해리스[57]1972년 8월 2–3일57%34%-9%23
갤럽[59]1972년 8월 4–7일57%31%-12%26
8월 21–23일: 공화당 전당대회
갤럽[60]1972년 8월 25–28일61%36%-3%25
해리스[61]1972년 8월 30일 – 9월 1일63%29%--8%34
해리스[62]1972년 9월 19–21일59%31%--10%28
갤럽[63]1972년 9월 22–25일61%33%-1%5%28
해리스[64]1972년 10월 3–5일60%33%--7%27
갤럽[65]1972년 9월 29일 – 10월 9일60%34%-1%5%26
갤럽[66]1972년 10월 13–16일59%36%--5%23
해리스[67]1972년 10월 17–19일59%34%--7%25
해리스[67]1972년 10월 24–26일60%32%--8%28
갤럽[68]1972년 11월 2–4일61%35%-1%3%26
해리스[69]1972년 11월 2–4일59%35%--6%24
선거 결과60.67%37.52%-1.81%-23.15



1972년 8월 선거 유세 중인 리처드 닉슨


1972년 10월 선거 유세에서 연설하는 조지 맥거번


맥거번 캠페인이 부통령 후보 문제와 급진적 이미지 논란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닉슨 측은 막대한 자금력과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선거 운동을 펼쳤다. 닉슨은 대규모 집회에 집중하고, 선별된 청중을 대상으로 연설하는 방식을 선호했으며, 소규모 유세 활동은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와 같은 대리인들에게 맡겼다. 닉슨은 자신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하며, 공화당의 하원 및 주지사 후보들에게 자신의 인기를 의도적으로 나눠주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닉슨 측은 맥거번에게 급진 좌익 극단주의자라는 낙인을 찍는 등 공격적인 네거티브 전략을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닉슨의 선거 참모들은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가 있는 워터게이트 호텔에 침입하여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되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선거 기간 중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닉슨의 재선 이후 진상이 드러나면서 결국 그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또한 닉슨은 학교에서의 인종 통합 정책에 대한 연방 정부의 개입을 축소하고 압력을 낮추는 등, 흑인 유권자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공화당의 지지 기반을 남부 백인 유권자들에게 확장하려는 이른바 "남부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 전략은 중서부 및 남부의 블루칼라 노동자뿐만 아니라 중산층 및 상류층 백인 유권자들에게도 효과를 발휘하여 1972년 선거에서 닉슨의 압승에 기여했다. 이 선거를 기점으로, 과거 남북 전쟁과 뉴딜 정책 이후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딥 사우스 지역은 점차 공화당의 아성으로 변모하게 된다.

선거는 11월 7일에 실시되었다. 최종 투표율은 55%에 그쳐, 1948년 대선 이후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투표율이 낮아진 원인 중 하나로는 미국 헌법 수정 제26조 비준으로 선거권 연령이 만 18세로 확대되면서,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낮은 젊은 유권자층이 늘어난 점이 꼽힌다. 결과적으로 닉슨은 60.7%의 득표율로 37.5%를 얻은 맥거번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닉슨은 맥거번의 출신 주인 사우스다코타를 포함한 49개 주에서 승리했으며, 맥거번은 매사추세츠 주와 워싱턴 D.C.에서만 승리하는 데 그쳤다.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큰 격차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4. 선거 결과



선거 결과, 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닉슨은 60.7%의 일반 득표율과 52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큰 격차의 승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77][78]

닉슨은 맥거번의 고향인 사우스다코타주를 포함하여 49개 주에서 승리했다. 맥거번은 매사추세츠주와 워싱턴 D.C. 단 두 곳에서만 승리하여 17명의 선거인단을 얻는 데 그쳤다. 맥거번의 전국 일반 득표율은 37.5%로, 이는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존 W. 데이비스 이후 민주당 후보로서 가장 낮은 득표율이었다.[70]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선거인단 투표 결과 지도. 닉슨(빨간색)이 매사추세츠와 워싱턴 D.C.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승리했다.


닉슨의 압승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맥거번 캠페인은 초기 부통령 후보 토머스 이글턴의 정신과 치료 이력 논란으로 혼란을 겪었고, 베트남 전쟁 반대와 급진적인 복지 정책 공약은 일부 유권자들에게 과격하게 받아들여졌다. 반면 닉슨은 중국 방문과 소련과의 데탕트 정책 등 외교적 성과를 내세우며 안정과 경험을 강조했다. 또한, 공화당의 이른바 '남부 전략'은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이었던 남부 백인 유권자들의 표심을 성공적으로 공략하여, 미국 남부가 공화당의 텃밭으로 변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닉슨의 압도적인 승리 이면에는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선거 기간 중 발생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 도청 사건은 처음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이후 닉슨 행정부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가 드러나면서 미국 정치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로 비화되었고, 결국 닉슨의 불명예 사임으로 이어졌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요약'''
대통령 후보부통령 후보정당일반 득표수득표율선거인단 수
리처드 닉슨 (캘리포니아주)스피로 애그뉴 (메릴랜드주)공화당47,168,71060.67520
조지 맥거번 (사우스다코타주)서전트 슈라이버 (메릴랜드주)민주당29,173,22237.5217
존 G. 슈미츠 (캘리포니아주)토마스 J. 앤더슨 (테네시주)미국 독립당1,100,8961.420
존 호스퍼스 (캘리포니아주)테오도라 네이선 (오리건주)자유당3,6740.001(a)
린다 제니스 (조지아주)앤드루 풀리 (일리노이주)사회주의 노동자당83,3800.110
벤자민 스포크 (캘리포니아주)줄리어스 홉슨 (컬럼비아 특별구)피플스당78,7590.100
루이스 피셔 (일리노이주)제네비브 군더슨 (미네소타주)사회주의 노동자당53,8140.070
기타81,5750.100
합계77,744,030100.00538
당선 필요 선거인단 수colspan="2" |270

(a) 버지니아주의 불충실한 선거인 로저 맥브라이드는 리처드 닉슨스피로 애그뉴에게 투표하도록 서약받았으나, 대신 자유당 후보 존 호스퍼스와 테오도라 네이선에게 투표했다.[46]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유권자 인구 통계별 투표 결과[84]
구분맥거번 (%)닉슨 (%)
성별
남성 | style="text-align:center;" | 37 | style="text-align:center;" | 63
여성 | style="text-align:center;" | 38 | style="text-align:center;" | 62
연령
30세 미만 | style="text-align:center;" | 52 | style="text-align:center;" | 48
30–49세 | style="text-align:center;" | 33 | style="text-align:center;" | 67
50세 이상 | style="text-align:center;" | 36 | style="text-align:center;" | 64
인종
백인 | style="text-align:center;" | 32 | style="text-align:center;" | 68
비백인 | style="text-align:center;" | 87 | style="text-align:center;" | 13
종교
개신교 | style="text-align:center;" | 30 | style="text-align:center;" | 70
가톨릭 | style="text-align:center;" | 48 | style="text-align:center;" | 52
학력
대졸 | style="text-align:center;" | 37 | style="text-align:center;" | 63
고졸 | style="text-align:center;" | 34 | style="text-align:center;" | 66
초졸 | style="text-align:center;" | 49 | style="text-align:center;" | 51
직업
사업가/전문직 | style="text-align:center;" | 31 | style="text-align:center;" | 69
화이트칼라 | style="text-align:center;" | 36 | style="text-align:center;" | 64
블루칼라 | style="text-align:center;" | 43 | style="text-align:center;" | 57
정당 지지
공화당 지지자 | style="text-align:center;" | 5 | style="text-align:center;" | 95
민주당 지지자 | style="text-align:center;" | 67 | style="text-align:center;" | 33
무소속 | style="text-align:center;" | 31 | style="text-align:center;" | 69
지역
동부 | style="text-align:center;" | 42 | style="text-align:center;" | 58
중서부 | style="text-align:center;" | 40 | style="text-align:center;" | 60
남부 | style="text-align:center;" | 29 | style="text-align:center;" | 71
서부 | style="text-align:center;" | 41 | style="text-align:center;" | 59
노동조합 가입 여부
노동조합 가구 | style="text-align:center;" | 50 | style="text-align:center;" | 48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닉슨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성향이 강한 가톨릭과 블루칼라 노동자 그룹에서도 과반수 득표를 기록했다. 이는 공화당 후보로서는 이례적인 결과였다. 민주당 지지자 중에서도 33%가 닉슨에게 투표하여, 통상적인 수준보다 훨씬 높은 이탈률을 보였다. 맥거번은 젊은층(18~29세)과 비백인 유권자 그룹에서는 승리했지만, 예상보다 격차가 크지 않았고, 특히 젊은층의 투표율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71][84] 맥거번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권자로부터 87%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이는 이전 민주당 후보들에 비해서는 다소 낮은 수치였다.[85] 유대인 유권자 그룹에서도 승리했지만, 역시 이전 선거만큼의 압도적인 지지는 아니었다.

선거 투표율은 55%로,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는 미국 수정 헌법 제26조 통과로 선거권이 18세로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현상이었다.

4. 1. 주별 선거 결과

4. 2. 주별 기록

닉슨/애그뉴가 승리한 주
맥거번/슈라이버가 승리한 주



선거
인단
리처드 닉슨
(공화당)
조지 맥거번
(민주당)
기타 후보전체
#%획득#%획득#%
네바다3115,75063.68366,01636.32---181,766
네브래스카5406,29870.505169,99129.50---576,289
노스다코타3174,10962.073100,38435.79-6,0212.15280,514
노스캐롤라이나131,054,88969.4613438,70528.89-25,0181.651,518,612
뉴멕시코4235,60661.004141,08436.53-9,5512.47386,241
뉴욕414,192,77858.51412,951,08441.18-22,0570.317,165,919
뉴저지171,845,50261.57171,102,21136.77-49,5161.652,997,229
뉴햄프셔4213,72463.984116,43534.86-3,8961.17334,055
델라웨어3140,35759.60392,28339.18-2,8761.22235,516
로드아일랜드4220,38353.004194,64546.81-7800.19415,808
루이지애나10686,85265.3210298,14228.35-66,4976.321,051,491
매사추세츠141,112,07845.23-1,332,54054.201414,1380.582,458,756
메릴랜드10829,30561.2610505,78137.36-18,7261.381,353,812
메인4256,45861.494160,58438.51---417,042
몬태나4183,97657.934120,19737.85-13,4304.23317,603
미네소타10898,26951.5810802,34646.07-41,0372.361,741,652
미시간211,961,72156.21211,459,43541.82-68,5711.963,489,727
미시시피7505,12578.207126,78219.63-14,0562.18645,963
미주리121,153,85262.1812697,14737.57-4,8040.261,855,803
버몬트3117,14962.66368,17436.47-1,6240.87186,947
버지니아12988,49367.8411438,88730.12-29,6392.031,457,019
사우스다코타4166,47654.154139,94545.52-9940.32307,415
사우스캐롤라이나8477,04470.788186,82427.72-10,0921.50673,960
아이다호4199,38464.24480,82626.04-30,1699.69310,379
아이오와8706,20757.618496,20640.48-23,5311.921,225,944
아칸소6448,54168.876199,89230.69-2,8870.44651,320
알래스카355,34958.13332,96734.62-6,9037.2595,219
애리조나6402,81264.666198,54031.87-21,5743.46622,926
앨라배마9728,70172.439256,92325.54-20,4872.041,006,111
오리건6486,68652.456392,76042.33-48,5005.23927,946
오클라호마8759,02573.708247,14724.00-23,7282.301,029,900
오하이오252,441,82759.63251,558,88938.07-94,0712.304,094,787
와이오밍3100,46469.01344,35830.47-7480.51145,570
워싱턴9837,13556.929568,33438.64-65,3784.441,470,847
워싱턴 D.C.335,22621.56-127,62778.1035680.35163,421
웨스트버지니아6484,96463.616277,43536.39---762,399
위스콘신11989,43053.4011810,17443.72-53,2862.881,852,890
유타4323,64367.644126,28426.39-28,5495.97478,476
인디애나131,405,15466.1113708,56833.34-11,8070.562,125,529
일리노이262,788,17959.03261,913,47240.51-21,5850.464,723,236
조지아12881,49675.0412289,52924.65-3,7470.321,174,772
캔자스7619,81267.667270,28729.50-25,9962.84916,095
캘리포니아454,602,09655.00453,475,84741.54-289,9193.468,367,862
켄터키9676,44663.379371,15934.77-19,8941.861,067,499
코네티컷8810,76358.578555,49840.13-18,0161.301,384,277
콜로라도7597,18962.617329,98034.59-26,7152.80953,884
테네시10813,14767.7010357,29329.75-30,7422.561,201,182
텍사스262,298,89666.23261,154,28933.25-18,0960.523,471,281
펜실베이니아272,714,52159.11271,796,95139.13-80,6341.764,592,106
플로리다171,857,75971.9117718,11727.80-7,4070.292,583,283
하와이4168,86562.484101,40937.52---270,274
전체53847,169,91160.6952029,170,38337.53171,378,2601.7777,718.554



두 후보 간 차이가 5~10%p인 주:



군별 선거 결과. 빨간색은 리처드 닉슨, 파란색은 조지 맥거번 승리를 나타낸다.


선거구별 결과.


닉슨의 일반 투표 득표율은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린든 B. 존슨이 기록한 득표율보다 약간 낮았지만, 승리 격차는 약간 더 컸다. 닉슨은 맥거번의 고향인 사우스다코타주를 포함하여 49개 주에서 과반수 득표를 얻었다. 맥거번 후보에게 투표한 곳은 매사추세츠주와 워싱턴 D.C.뿐이었고, 그 결과 선거인단 득표수는 더욱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다. 맥거번은 전국 일반 투표의 37.5%만을 득표했는데, 이는 존 W. 데이비스가 19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28.8%만을 득표한 이후 민주당 후보가 얻은 가장 낮은 득표율이었다. 1972년 이후 40%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한 주요 정당 후보는 조지 H.W. 부시 대통령으로,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37.4%를 얻었다. 당시 선거는 제3 정당의 강세에 영향을 받았다.[70] 닉슨은 역사상 공화당 후보로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맥거번 선거 캠페인은 투표 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낮춘 새로운 미국 헌법 수정 제26조 때문에 맥거번 후보가 닉슨을 이길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믿었지만, 대부분의 청년층 투표는 닉슨에게 돌아갔다.[71] 이것은 공화당 후보가 모든 미국 남부 주를 휩쓴 미국 역사상 최초의 선거였으며, 민주당의 아성에서 공화당의 요새로 지역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칸소주는 1세기 만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승리했다. 이 시점까지 아칸소주와 텍사스주를 제외한 모든 남부 주에서 이전 선거 또는 1964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했었다(공화당 후보는 1928년, 1952년, 1956년에 텍사스주를 휩쓸었다). 이 선거의 결과로 매사추세츠주는 닉슨이 후보로 나선 세 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한 유일한 주가 되었다. 특히 닉슨은 매사추세츠주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않고 백악관에서 두 번의 임기를 역임한 최초의 공화당원이 되었으며, 조지 W. 부시도 2000년과 2004년 선거에서 매사추세츠주에서 승리하지 않고 두 번 모두 승리하여 이 기록을 달성했다. 이 대통령 선거는 18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뉴욕주가 선거인단 수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지 못한 최초의 선거였으며, 선거인단 수가 41명으로 줄어든 반면 캘리포니아주는 45명이었다. 또한, 이는 미네소타주에서 공화당 후보가 승리한 마지막 선거로 남아 있다.[72]

맥거번은 130개 카운티, 컬럼비아 특별구, 그리고 알래스카의 4개 카운티 상당 지역(노스 슬로프 자치구, 베델, 쿠실바크 및 후나-앵군 인구 조사 지역)에서만 승리했는데, 이는 인기 대통령 선거가 시작된 이후 주요 정당 대통령 후보가 승리한 카운티 수에서 가장 적은 수였다.[73] 19개 주에서 맥거번은 단 하나의 카운티도 얻지 못했고(아칸소주, 코네티컷주, 델라웨어주, 플로리다주, 조지아주, 하와이주, 아이다호주, 인디애나주, 캔자스주, 네브래스카주,

5. 워터게이트 사건

1972년 6월 17일, 대통령 선거를 5개월 앞두고 5명의 남성이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 있는 민주당 전국 위원회 본부에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닉슨 행정부가 조직적으로 침입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른바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닉슨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결국 닉슨은 미국 하원의 탄핵 가능성과 상원의 파면 위기에 직면하자, 1974년 8월 9일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사임 사례였다.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는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연방 검사들은 닉슨 대통령 재선 캠페인에 불법 정치 자금을 제공한 기업들에게 자수할 경우 관대한 처벌을 약속했다.[86] 이에 노스롭 그러먼, 3M, 아메리칸 항공, 브래니프 항공 등 다수의 기업이 자수했다.[86] 1976년까지 총 18개의 미국 기업이 닉슨 캠프에 불법적으로 기부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86]

닉슨은 이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가장 좌절스럽고 여러 면에서 가장 만족스럽지 못한 선거였다"고 술회했다.[87]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의 공격적인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벌어진 일이었으며, 비록 선거 자체는 승리했지만 그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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